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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2017-10-18 17:05:36


  1.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요한계시록은 많은 논란이 있고 오해가 많았던 책이고 지금도 그러하다. 특히 신흥 종교나 이단 종파들은 요한계시록을 왜곡하여 자기들의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악용하여 왔기 때문이다. 작금의 신천지 활동은 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더욱 문제는 기성 교회에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설교나 가르침이 거의 전무하다는데 있다. 유독 성경 중에서 요한계시록은 접근하기 어렵고 접근해도 알 수 없다는 식의 오해가 팽배해 있고 신흥 종교나 이단종파들은 이런 점을 노려서 요한계시록을 자기들 맘대로 왜곡하고 악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요한계시록의 해석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관점은 요한계시록은 성경을 구성하는 여러 책 중의 하나라는 점이다.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 시사하는 바는 크다. 이 사실은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신학적 내러티브에 준해서 읽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요한계시록은 대단히 묵시문학적 형태를 가지고 상징과 그림언어로 가득차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 해석은 성경 전체가 가진 내러티브의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요한계시록이 아무리 신비하고 상징적인 언어로 가득하다고 해도 그 책이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말하는 계시와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징과 비유언어로 가득한 요한계시록을 특히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성경의 다른 책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도 위험하지만 특히 요한계시록은 그렇다. 어느 신학자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문자적인 해석을 강요받지 않는 한 요한계시록을 상징과 비유로 해석해야 한다. 물론 어느 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어느부분을 상징과 비유로 해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성경 전체의 맥락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2.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것은 요한이 기록한 이 책이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계시라는 의미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는 이미 요한복음에서 기록되었다. 이제는 복음서에서 계시된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에게 주시는 계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그 계시가 반드시 그리고 속히 일어날 일들에 대한 계시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이 계시가 매우 임박한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계시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지체하지 않고 반드시 일어날 일들이란 의미로 보아야 한다. 요한은 이 계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하신 것이며 또한 요한 자신이 직접 환상 가운데 본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에게 명하여 요한이 본 것, 즉 요한에게 주어진 계시를 편지로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명하신다. 그러니까 여기서 요한의 역할은 구약의 예언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교회에게 전달하는 역할인 셈이다. 그런데 각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말미에는 예외없이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권면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편지의 내용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편지의 내용을 말씀하시는 분은 요한에게 편지를 써 보내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편지의 내용이 아니라 4장이후 전개되는 요한이 본 환상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4장 이후의 환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계시일 것이다. 그러니까 4장 이후의 환상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계시이며 동시에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셈이다. 이 점은 4장의 환상이 시작되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요한이 이 환상을 보았다는 언급으로도 지지를 받는다. 

 

  3. 그렇다면 왜 각 편지의 말미에는 왜 예외없이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권면이 주어진 것인가?  이 질문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와 4장 이후 전개되는 환상들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각 편지들에는 위로와 칭찬과 함께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들이 언급된 후에 이기는 자에게 주는 약속으로 마무리 된다. 이 사실은 각 교회들이 지금 어떤 싸움을 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고 아직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 까지는 남은 시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승리는 자동적으로 보장된 것이 아니라 각 교회들의 분투가 필요하다는 것이 전제되어있다.  이는 교회가 믿고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승리했지만 각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는 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현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자동적으로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말하지만 요한계시록은 그런 신학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렇게 각 편지는 이기는 자에게 대한 약속이 주어진 후에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권면이 주어진다. 이것은 교회가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4장 이후에 전개되는 환상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신비한 일에 대한 계시가 아니라 교회가 승리하고 약속을 받기 위해서 지켜야 할 교훈의 말씀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4장 이후의 환상은 교회가 최후의 승리에 도달하기 위해 읽고, 듣고, 지켜야 할 하나님의 교훈이라고 보아야 한다. 

 

  4.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요한을 부르시면서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그 계시는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통해 환상을 보는 방식으로 주어진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감동을 통해 환상을 보는 방식으로 요한에게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계시하신 것이다. 요한이 처음으로 본 환상은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보좌에 둘러선 이십사 보좌들과 보좌 앞에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었다. 그 다음에 네 생물들로 표상된 천사들이다. 네 생물들은보좌에 앉으신 이를 찬양하고 있고 이십사 장로들도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경배하고 있다. 이런 환상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에서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하게 실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록  각 교회가 거하는 땅에서는 아직 그렇지 못하지만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완벽하게 실현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첫번째 환상이 보여주는 메시지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이 앉으신 보좌 주위에 이십자장로들도 보좌에 앉아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십사 장로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다스리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나라는 하나님만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다스림에 참여하는 나라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십사 장로가 자기의 금관을 보좌 앞에 드리는 모습은 그들의 다스림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통해 이루어짐을 암시한다. 땅에 거하는 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나라의 왕이시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시작된 것을 믿고 있지만 그 나라가 이 땅에 온전하게 임한 것을 아직 보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는 아미 하늘에서 완전하게 실현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가 하늘에게 이미 실현되었다면 그 나라가 언제가는 반드시 땅에서도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 땅에 거하며 분투하며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일곱 교회들에게 이 첫 환상이 제시하는 메시지는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에 이런 환상이 가장 처음으로 주어진 것이며 이후에 등장하는 환상들은 바로 이 첫 환상에 토대를 두고 전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후에 전개되는 환상들은 바로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계시라고 볼 수 있다.  

 

 5. 이어지는 환상에서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들려진 인봉된 두루마리를 본다. 이것은 인봉된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이 하나님의 비밀로서 감추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 두루마리의 인봉을 떼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비밀이 알려질 수 없다. 더구나 그 인봉이 일곱이란 것은 그 비밀이 완벽하게 감추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하늘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다는데 있다. 그러나 장로중의 한 사람이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는 승리한 메시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요한이 이어서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선 것을 본다. 이 어린 양도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을 보는데 그것은 승리한 왕의 모습과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모습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죽임을 당함으로 승리한 이상한 승리임을 보여준다. 이 세상의 원리로 보면 이것은 납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임을 당한 것은 최종적인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세상이 보기에는 기이한 승리이다. 왜냐하면 그는 죽임을 당하므로 승리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원리와 반대되는 하나님나라의 원리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해야 하는 교회가 거쳐야 할 승리의 방식이 어떤 것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교회는 고난과 큰 환난 그리고 죽음을 통과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함을 의미한다. 이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하신 방식을 따라가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그의 승리에 동참하지 못함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런데 왜 인봉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고 볼 자가 오직 예수 그리스뿐인가?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했기 때문에 그 인봉을 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늘에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도 임하는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봉된 그 두루마리에는 어떻게 하늘에서 이뤄진 하나님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임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비밀인데 이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그 계시가 교회들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6. 어린 양이 인을 뗄 때 등장하는 전쟁과 기근으로 인한 사망의 환상들은 이 땅의 비참한 현실들들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하기 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실제로 역사 가운데 저지르는 자들은 땅의 짐승으로 상징되는 이 땅의 권세자들이다. 요한계시록은 이 땅의 짐승들에게 권세를 주는 실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다섯째 인을 뗄 때에는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한 신자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신원하여 주기를 간구한다. 이 환상은 땅의 짐승들이 권세를 부리는 이 땅에서 신자들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한 승리자들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는 것은 그들이 이긴 자들임을 인정하는 표시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원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찰 때 비로서 하나님은 이 땅을 심판하고 그들을 신원하실 것이다. 이 땅에 거하는 교회는 아직 싸움이 남아있고 그 싸움을 통과하여 승리에 동참하여야 하는 것이다. 여섯째 인을 뗄 때 보여진 우주적인 대격변의 환상은 하나님이 이 땅을 심판하는 최후의 대심판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날은 진노의 큰 날이고 아무도 그 진노를 견디어 낼 자가 없다.

 

 7. 이어서 요한은 네 천사가 땅의 바람을 붙잡아 불지 못하게 하는 환상을 보는데 이것은 앞에서 보여진 최후의 심판이 당분간 지연될 것을 암시한다. 그 심판이 지연되는 것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기 위한 것이다. 이마에 인을 친다는 것은 앞에서 죽은 자들에게 흰두루마기를 주는 것처럼 그들이 이긴 자들임을 인정하는 행위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이루기 전의 시간들은 교회가 고난을 통과하여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양육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는 자로 준비되는 기간인 셈이다. 그런데 인침을 받은 자의 수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별로 일만이천명 씩 모두 십사만사천명이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인침을 받은 자들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고 그 숫자가 실제로 십사만사천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한 자들인데 이미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은 백성들이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자기 피로 산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국한되거나 그 숫자가 실제로 십사만사천일 수 가 없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각 지파와 십사만사천이란 상징이 의미하는 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이스라엘의 지파를 의미하는 열둘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상징하고 이 열둘이란 숫자를 서로 곱하여 만든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충만한 수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니 인침을 받은 자의 수가 십사만사천이란 말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언약백성의 충만한 숫자를 가리킬 것이다. 그런데 이어서 요한이 본 것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모습이다. 이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승리한 자들임을 의미한다. 이들은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고 외쳐 이른다. 이 말은 이 큰 무리들이 얻은 승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한 승리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장로 중 하나가 말하길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하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앞에서 등장한 십사만사천과 동일한 무리들로 보아야 한다. 앞에서 등장한 십사만사천이 교회가 땅에 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기 위해 준비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면 나중에 등장한 셀 수 없는 무리는 최후의 승리를 거둔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십사만 사천이란 숫자가 계수된 것은 이들이 어떤 싸움을 위해 준비된 군대임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십사만사천이 승리를 거두기 위해 싸우는 교회의 모습이라면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싸움을 끝내고 승리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은 늘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사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상하지도 않고 어린 양이 그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결국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환상은 교회가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된 것을 보여준다. 이제 마지막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는 아무런 환상도 안보이고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해졌다. 마지막 일곱인이 떼어졌다는 것은 드디어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비밀이 공개될 것을 예고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늘은 숨죽여 그 비밀의 공개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해진 이유일 것이다. 

 

  8. 이제 두루마리의 일곱 인은 다 떼어졌다.  그러나 아직 두루마리는 펼쳐지지 않았고 하나님의 비밀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그 사이에 요한은 다른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은 환상이었다. 첫 나팔부터 여섯째 나팔에 이르기까지 나팔을 불 때 이 땅에 쏟아진 재앙은 일곱 인을 뗄 때 나타난 재앙보다 더 심각하고 파괴적이다. 그리고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완악하여 졌다. 이 땅에 쏟아지는 재앙은 사람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고 동시에 그것은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아무리 심각한 재앙을 가지고도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나팔 심판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여섯째 나팔 심판 이후에 다른 환상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힘 센 천사가 그 손에 펴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힘 센 천사는 5장에서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고 물었던 바로 그 천사이다. 그런데 바로 그 천사가 인이 다 떼어져 펼쳐진 두루마리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혹자는 여기의 작은 두루마리는 5장의 인봉되었던 두루마리가 아니라 다른 두루마리일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여기서 "작은" 이라는 수식어가 다른 두루마리를 가리킨다고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작은 두루마리"와 그냥 "두루마리" 라는 두가지 표현이 혼용되고 있기 때문이며 또 5장에서 두루마리 이야기 때 등장했던 힘 센 천사가 이제 펴놓은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는 점도 여기 작은 두루마리가 5장의 인봉된 두루마리임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작은 두루마리라고 표현한 이유는 아마도 요한이 먹을 수 있는 크기의 두루마리임을 암시한 것인 듯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상이 전개되는 맥락으로 보아 5장의 두루마리와 10장의 두루마리는 동일한 두루마리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8장 1절에서 일곱 째 인이 떼어진 후에 아직 두루마리가 펼쳐지지 않은 채 나팔환상이 등장했는데 이제 여섯째 나팔 이후에 드디어 펼쳐진 두루마리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펴 놓인 두루마리를 든 힘 센 천사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했고 요한은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기록하지 말고 인봉하라고 명령을 받는다.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이 무엇이고 왜 그것을 인봉하라고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것은 일곱 나팔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 쏟아질 하나님의 심판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이 인봉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이 잠시 중단됨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심판이 중단되는가? 그것은 11장에서 등장하는 두 증인의 예언사역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직 일곱째 나팔을 불지 않고 있는데 힘 센 천사가 말하길 일곱째 나팔을 불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이 공개되는 시점은 바로 일곱째 나팔을 불 때일 것이다. 힘 센 천사는 펴 놓은 두루마리를 요한에게 주면서 그것을 먹으라고 명한다. 이것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을 예언하라는 명령이다. 그 내용은 하늘에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 이 땅에 임한다는 계시이다. 이것은 실로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이 땅의 교회에게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이다. 그러나 이 땅에 속한 자들에게는 이 계시는 괴로운 소식일 것이다.  교회는 기뻐하지만 세상은 싫어할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요한이 그 두루마리를 먹을 때 입에서는 달지만 배에서는 쓰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두루마리의 내용을 가지고 요한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해야만 한다. 최종적으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전에 교회는 이 예언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이 기간이 앞에서 언급된 십사만사천이 이마에 인쳐지는 시간일 것이고 교회가 고난을 받는 시간일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일곱 우레의 재앙이 인봉되었을 것이다. 

 

  9. 앞에서 힘 센 천사는 요한에게 두루마리를 먹고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라고 했는데 11장에서는 힘센 천사는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어 그들이 예언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요한과 두 증인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아마도 두 증인은 요한을 대신하여 예언하는 자들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요한이 지금 편지를 써서 보내는 일곱교회를 의미할 것으로 보인다. 두 증인을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 비유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그렇다면 왜 일곱 증인이 아니고 두 증인인가? 그것은 이들이 감당하는 사역이 하나님의 비밀을 증거하는 증인의 사역임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두 증인이 예언하는 기간은 천이백육십일로 상징되는데 이 기간은 거룩한 성이 이방인들에게 마흔 두달 동안 짓밟히는 기간과 동일하다. 이것은 교회가 예언사역을 감당하는 기간인 동시에 고난을 받는 기간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기간은 동시에 십사만사천이 이긴 자로서 인쳐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기간이 지나야지만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된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승리했지만 교회는 아직 그의 승리에 동참하지 않았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는 일이 끝날 때 드디어 이미 하늘에서 이뤄진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도 임하게 될 것이다. 두 증인은 예언하는 동안 고난을 받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두 증인이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이 땅에 속한 자들에게 두 증인의 예언은 듣기 괴로운 소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두 증인의 죽음을 즐거워한다. 두 증인의 증언 사역을 헛되어 끝나고 그들은 패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삼일 반 후에 하나님의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다시 살아나며 그들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하므로 이기셨듯이 두 증인으로 상징되는 교회도 죽임을 당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게 된다. 그들이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에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 하늘이 올라가는 환상은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드디어 실현되기 직전에 고난받던 교회가 영광스럽게 될 것을 암시한다. 이때 지진으로 많은 자들이 죽을 것이나 살아남은 자들은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릴 것이다. 이것은 온갖 재앙으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두 증인의 예언 사역의 결과 회개하는 일이 벌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두 증인의 예언 사역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드디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다. 이미 앞에서 힘 센 천사가 예고했듯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비밀이 공개되었다. 그것은 세상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신다는 선포였다.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비밀은 하늘에서 이미 이뤄진 하나님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도 실현된다는 소식, 곧 하나님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기도하는 주기도문의 주제가 생각난다. 이 땅에 거하는 교회가 늘 기대하고 애써야 하는 일이 바로 복음의 실현인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이 공개되자 이십사 장로들도 하나님에게 경배하는데 이때 이들은 하나님을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1장에서 하나님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로 소개되는데 여기서는 장차 오실 자라는 미래 호칭이 빠져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으므로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적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호칭에 대한 "계신 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미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항상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호칭다음에 등장하는 "전능하신 이"이라는 호칭은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 또한 약속하신 것을 넉넉히 이루실만한 전능하신 분이심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될 때, 곧 하나님 왕노릇하실 때 하나님은 이 땅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 심판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며 띵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통치 행위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며 성전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임재가 땅에서 구현됨을 보여준다. 이때 나타나는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상징하는 전통적인 신현 현상이다.

 

  10. 요한은 다시 하늘에서 큰 이적을 보게되는데 그것은 여자와 용에 대한 환상이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려고 하고 용은 그 아이를 삼키려고 하는데 그 아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고 그 아이가 하나님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갔다. 이 이야기에서 여자가 낳은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여자는 교회를 그리고 용은 사탄을 상징할 것이다. 아이가 하나님과 보좌 앞으로 올라간 것은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하여 승천한 과거의 역사를 회고한 것으로 보이고 이후에 여자가 광야로 도망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가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는 상황을 상징할 것이다. 여자가 광야로 도망한 곳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인데 그곳에서 여자는 천이백육십일 동안 양육을 받는다. 여기서 말한 천이백육십일은 앞에서 두 증인이 고난을 받는 기간 그리고 두 증인이 예언하는 기간과 일치한다. 이렇게 볼 때 여자와 용에 대한 이런 환상은 앞에 등장한 두 증인 환상과 연결되는 환상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기 전에 두 증인이 고난을 받으며 예언하는 기간은 여자가 용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양육을 받는 기간이다. 그렇다면 여자와 용에 대한 환상은 앞에서 등장한 두 증인에 관한  환상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환상으로 보인다. 용이 하늘에서 내쫒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은 사탄의 패배를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남으로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던 사탄이 쫒겨난 것이다.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사탄을 이긴 성도들도 있는데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은 순교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이미 동참한 자들이다. 이들은 6장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가리킬 것이다. 이들은 이미 하늘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용과의 싸움에서 이미 승리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제 땅으로 내쫒긴 용은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한다. 아직 땅에 거하는 교회들에게 용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여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광야에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때와 반때를 양육받는다. 이 기간은 앞에서 언급한 천이백육십일과 동일한 기간이다. 마침내 용은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일전을 치루려고 바다 모래위에 섰다. 이어서 요한은 바다에서 나오는 한 짐승의 환상을 본다. 용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에게 권세를 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에게 경배하게 만든다. 이 짐승은 마흔 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는데 이 기간은 앞에서 여자가 보호와 양육을 받는 기간, 두 증인이 고난을 받는 기간, 두 증인이 예언하는 기간과 동일하다. 바다에서 나온 그 짐승은 입을 벌려 하나님을 비방하고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된다. 누구든지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게 된다. 여기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7장에서 그 이마에 인침을 받은 십사만사천과 동일한 무리일 것이다. 그들은 땅에 거하며 용과 싸움을 통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할 자들이다. 사로잡히거나 칼에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나 성도들은 인내와 믿음으로 짐승에게 경배하지 말고 이겨야 한다. 요한은 또 다른 짐승이 이번에는 땅에서 올라오는 환상을 본다. 그 짐승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 가진 권세를 행하고 큰 이적을 행함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우상을 만들게 한다. 그리고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인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하고 이 표가 없는 자는 매매를 못하게 만든다. 십사만사천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친 것처럼 짐승은 자기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짐승의 표를 받게 한다.

 

  11. 요한은 또 다른 환상을 보았는데 그것은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사천이 서있는 환상이다. 이들은 앞에서 보인 짐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이다. 그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다는 말은 앞에서 짐승에게 경배한 자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이름이 쓰인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그러니까 어린 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선 십사만사천은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 승리한 자들이다.  이때 하늘에서 나는 물소리와 큰 우렛소리 혹은 거문고타는 소리같은 소리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부르는 기쁨의 찬양을 상징할 것이다. 십사만사천은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데 이들 외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다. 새 노래라는 말은 이전에는 부르지 않던 노래임을 의미할 것인데 새 노래를 부른 이야기는 5장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것은 네 생물과 장로들이 부른 노래인데 그 노래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을 기대하며 하늘에서 부른 노래였다. 이제 네 생물과 장로들이 하늘에서 불렀던 그 새 노래를 십사만사천이 어린 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서서 부르고 있는 것이다. 두루마리의 인봉을 떼기 전에 하늘에서 네 생물과 장로들이 부르던  새 노래를 이제 두루마리의 인봉을 떼어낸 후에는 어린 양과 함께 시온산에 선 십사만사천이 땅에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음녀로 상징되는 바벨론과 더불어 더럽히지 않고 순결한 자들이며 어린 양의 인도를 따라간 자들이다. 이들은 땅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며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다. 이어서 요한은 공중에 날아가는 다른 천사의 환상을 보았는데 그 천사는 모든 민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다. 그가 가진 영원한 복음이란 이제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고 만유를 만드신 하나님을 경배할 시간이 되었다는 선포였다. 이제 이 땅에 하나님이 왕노릇하시며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때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음행으로 사람들에게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질 것이다. 누구든지 짐승과 그 우상에서 경배하고 표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이며 고난을 받으므로 밤낮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킨 성도들 곧 십사만사천은 모든 수고를 그치고 하나님의 안식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 하나님은 이 땅을 심판하시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성도에게 상을 주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땅에 속한 자들을 진멸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행위다. 이어서 요한이 본 환상은 바로 하나님의 이런 심판 행위에 관한 것이다. 구름위에 앉으신 인자와 같은 이는 머리에는 금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지고 있다. 천사는 이 분에게 땅이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되었으니 낫을 휘둘러 거두시라고 요청하고 그는 낫을 휘둘러 땅의 곡식을 거둔다. 여기서 인자와 같은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것이고 그가 땅의 곡식을 거둔다는 것은 이제 승리한 십사만사천을 하나님나라로 이끌어 들이시는 구원행위를 상징할 것이다. 또한 요한은 역시 예리한 낫을 가진 천사를 보는데 그 천사는 낫을 휘둘러 땅이 포도송이를 거둔 후에 그 포도송이를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틀에 던지는데 이는 짐승에게 경배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 부어짐을 의미할 것이다. 이 환상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곡식이나 포도의 수확으로 비유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실현되기 전에 모든 것이 무르익는 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땅의 교회들이 고난을 받고, 예언을 하며, 양육을 받으며, 이마에 인을 치는 시간이 지나야 비로서 그 때가 이르는 것이다. 이 시간을 거쳐서 성도들은 땅의 곡식으로 익어갈 것이며 이 땅에 속한 자들은 진노의 포도송이로 익어가는 것이다. 

 

  12. 드디어 15장에서 요한은 마지막 재앙의 환상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친다는 것은 이제 이 마지막 재앙 이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전히 임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마지막 재앙의 환상이 시작되기 전에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을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것은 앞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진 결과 십사만사천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찬양하는 장면이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라고도 하고 어린 양의 노래라고도 한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라는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한 후 홍해 앞에서 애굽의 군대로 부터 극적인 구원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노래를 불렀듯이 이제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구원받은 십사만 사천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요한은 마지막 재앙의 환상을 보는데 하늘의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리고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네 생물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 담은 금 대접 일곱을 일곱 천사들에게 주고 일곱 천사는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차례로 땅에 쏟는다. 첫째, 둘째, 셋째 대접이 각각 땅과 바다와 강과 물의 근원에 쏟아진다. 이 때 천사가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호칭을 "이전에 계셨고 지금도 계신 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이 대접 심판의 재앙이 14장에서 이미 언급된 마지막 심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며 강조임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여기서도 하나님을 장차 계실 분이 아니라 지금 현재 왕으로 다스리며 지금 계신 분으로 일컫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일곱 대접 재앙은 또 다른 재앙이 아니고 14장에서 언급된 마지막 심판에 대한 자세한 묘사라고 볼 수 있다. 최후의 심판으로서 대접 재앙은 6장에서 등장했던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신원하는 심판이다. 그래서 천사는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천사의 이 말에 응답하는 제단은 6장에서 제단 아래에 있던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의미할 것인데, 그들도 화답하여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의 심판이 참되고 의로우시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넷째, 다섯째 대접의 재앙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는다. 두 증인들의 예언도 그쳤고 이제 그들에게 더이상 회개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쏟을 때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세 더러운 영이 나와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쟁을 위해 온 천하의 왕들을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모아 마지막 발악을 한다. 일곱째 대접이 공중에 쏟아질 때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와 큰 지진이 발생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땅에 임하시는 신현 현상을 의미한다. 이 때 큰 성 바벨론이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진다. 이것은 이미 14장에서 보여진 바벨론이 무너지는 장면에 대한 자세한 묘사이다. 이 재앙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비방한다.

 

  13. 이어지는 환상은 앞에서 잠시 보여준 바벨론의 멸망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위해서 바벨론의 멸망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벨론은 많은 물위에 앉은 음녀로 상징된다. 여기서 음녀는 땅이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며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고 설명된다. 그런데 이 음녀는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는데 천사는 이 여자가 탄 짐승이 장차 무저갱에서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고 설명해준다. 그리고 음녀가 탄 이 짐승과 짐승에게 권세를 받은 이 땅의 왕들이 연합하여 어린 양과 더불어 전쟁을 벌린다. 이것은 이미 14장에서 언급된 아마겟돈 전쟁을 가리킬 것이다.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신 어린 양은 그들을 이기실 것이고 어린 양과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어린 양의 승리에 동참할 것이다. 이 환상 이후에 요한은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그가 큰 권세를 가졌고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해졌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 천사는 두루마리와 관련된 힘 센 천사인 듯하다. 이 천사는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선언한다. 바벨론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고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심으로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갚아주고 그의 행위대로 갚절을 갚아주신다. 그와 함께 음행하던 땅의 왕들도 울고 가슴을 치며 그의 고통을 무서워할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바벨론에게 심판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바벨론은 바다에 던져지고 다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바벨론이 멸망한 후에 하늘에서 큰 무리의 음성이 들려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찬양한다. 아마도 이들이 7장에서 등장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일 것이다. 그들은 땅을 더럽게 한 음녀를 멸하시고 성도들을 신원해 주신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롭다고 찬양한다. 이십사 장로들과 네 생물들도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양한다. 이제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으므로 무리들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한다. 어린 양의 아내는 자신을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혼인 잔치를 준비하였다. 이 세마포 옷이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것은 어린 양의 아내가 바로 승리한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의미한다. 요한은 또 다른 환상을 보았는데 그것은 하늘이 열리고 백마를 탄자가 땅으로 내려오는 모습이었다. 백마를 탄 자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며 그 눈을 불꽃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피 뿌린 옷을 입었다고 묘사되는 것으로 보아 천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백마 탄 자는 입의 검으로 만국을 치고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친히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며 그 옷과 다리에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이름이 쓰였다는 것으로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도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하늘에 거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일 것이고 그들이 입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는 그들이 승리한 자들이며 순결한 자들임을 암시한다. 4장의 첫 환상에서 요한은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제는 하늘이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 군대를 데리고 하늘에서 내려오신다.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것은 한편으로는 준비된 아내와 혼인잔치를 벌이시려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바벨론을 뒤에서 조정한 짐승과 거짓 선지자 그리고 용을 멸하시려는 것이다. 드디어 짐승도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잡혀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진다.

 

  14. 이어지는 천년왕국에 대한 환상은 그동안 이 환상을 19장에서 예수의 지상 재림 이후에 일어날 일들로 해석함으로써 전천년설이 등장했다. 전천년설은 20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후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천년동안 왕노릇하는 천년 왕국 시대가 도래하고 천년 왕국이 끝날 즈음이 사탄이 무저갱에서 올라와 성도들과 다시 전쟁을 벌리고 최종적으로 패하게 된 후에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을 내리신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문맥을 오해한 결과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19장 말미에서 용의 하수인인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잡혀 불못에 던져졌고 이제 지금 20장에서는 모든 악의 원흉인 용도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던져진 불과 유황 못에 함께 던져진다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맥으로 본다면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용을 잡아서 무저갱에 넣고 천년동안 결박하였다는 것은 12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 하늘에서 용이 내쫒겼다는 이야기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용이 무저갱에 던저져 천년동안 갇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용이 하늘에서 그 세력을 잃고 내쫒긴 상태를  비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늘에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성도들은 영적으로 보면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상에 하나님나라가 임할 때 모든 성도들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왕노릇할 것인데 그들은 이미 하늘에서 왕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맥으로 읽어가면 천년이 차매 사탄이 옥에서 놓여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고 성도들의 진과 성을 두른다는 말은 16장에서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온 천하의 왕들을 모아서 일으키는 아마겟돈 전쟁에 상응할 것이고 또한  11장에서 두 증인이 예언을 마칠 때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벌려 그들을 이기고 죽인다는 이야기와도 상응할 것이다. 아무튼 20장은 19장의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멸망에 이어 모든 악의 근원인 용의 멸망을 말하려고 한 것이고 이 말을 하기 위해서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해 용이 무저갱에 결박되었던 사실을 언급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용이 멸망을 당한 후에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이가 촤후의 심판을 내리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죽은 자들이나 산 자들이나 모두 그 보좌 앞에 서있는데 모든 사람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는데 그  책은 생명책이라고 말한다. 생명책은 13장에 처음 등장하는데 거기서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새명책이라고 지칭된다. 누구든지 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자는 다 짐승에게 경배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 심판을 받는 자들은 생명책에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고 짐승에게 경배한 자들이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요한은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자는 불못에 던지우는 환상을 본 것이다. 

 

  15. 예수가 지상재림하여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용을 멸하고 짐승에게 경배한 자들을 심판하심으로 이제 세상의 모든 악은 제거되었다. 이제 세상이 새롭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을 보며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졌고 다시 있지 않더라고 말한다. 그러나 요한의 이 표현이 처음 창조된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새로운 하늘과 땅이 창조되었다고 보는 것은 너무 문자적인 해석이다. 하나님은 이미 있던 하늘과 땅을 새롭게 하신 것이지 그것을 없애고 다시 창조하신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다만 요한이 그리 표현한 것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새로 만들어진 것 처럼 보일 정도로 만물이 새롭게 되었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어서 요한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말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은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이 땅에 도래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또한 이 장면은 19장에서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는 말과 상응한다. 이제 모든 악이 제거되거 하늘과 땅이 새롭게 되었으므로 드디어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 이것은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가 신랑으로 비유되고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한 성도들이 신부로 비유된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의 언약관계에 대한 유비라고 볼 수 있다. 어린 양과 성도들이 혼인을 한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영원히 동거하며 함께 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고 말한 것이다. 드디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오래전 구약 백성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므로 이제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도 아픈 것도 없을 것이다. 이제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고 보좌에 앉으신 이가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이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다 이루어졌다.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나라가 드디어 이 땅에 완전히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이기는 자들만이 상속받을 수 있다. 이기는 자들만이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복된 약속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짐승을 두려워하는 자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들, 악을 행하는 자들, 우상숭배자들은 모두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다.

 

  16. 어린 양의 신부는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비유된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음란하고 더러운 성 바벨론과 대조된다. 하나님은 음란한 바벨론 성을 멸하시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준비하셨다. 바벨론 성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이라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거룩한 예루살렘 성이 바로 어린 양의 신부로 준비된 것이다. 이제 천사는 요한에게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자세히 보여주려고 한다. 성령은 요한을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준다. 그 성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서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았다. 그 성에는 열두 문이 있고 그 문들 위에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이름들이 써있고 열두 기초석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들이 있었다. 예루살렘 성에 대한 이런 묘사는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여 어린 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 있던 십사만사천을 연상하게 한다. 십사만사천이 문자적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충만한 수를 의미하듯이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으로 이루어진 예루살렘 성 역시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충만한 공동체를 의미할 것이다. 이들이 바로 어린 양의 신부로 준비된 자들이다. 또한 이런 묘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언약백성의 충만한 수로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어서 예루살렘 성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등장하는데,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고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은 정육면체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각각의 길이가 백사십사 규빗이다. 이런 표현 역시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상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이 정육면체인 것은 성전의 지성소에 놓여있는 언약궤와 동일한 구조임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하나님과 닮아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특이한 것은 성 안에 성전이 없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성전이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구약의 성전 구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관계를 반영하고 있는데 지성소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다면 성소는 이스라엘의 임재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성전에 설치되어 있는 지성소와 성소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고 함께 동거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그렇지만 지성소와 성소가 구별되어 있고 지성소에는 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는 엄격한 분리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 어린 양과 승리한 성도들은 혼인을 하고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언약백성의 분리와 구별을 보여주는 성전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 어린 양이 직접 성전이 되어 성도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성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으로 해나 달의 비침이 필요없게 된다. 그런데 요한은 만국이 그 빛 가운데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환상을 본다. 더구나 예루살렘 성에는 밤이 없기 때문에 성문들도 닫히지 않으니 누구나 자유롭게 그 성에 들어올 수 있다. 사람들은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성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성에 들어가는 만국의 사람들과 땅의 왕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이어지는 구절에서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간다는 말로 보아서 만국의 사람들이나 땅의 왕들은 구속받은 언약백성 외에 다른 사람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예루살렘 성의 구성원인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5장에서 언급된 대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즉 만국 가운데서 어린 양의 피로 구속된 자들, 그리고 7장에서 등장하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큰 무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나라는 만국에서 구속받은 모든 언액백성들에게 열려있는 나라이고 그들은 모든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 나라에 들어올 것이다. 천사는 또 요한에게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보여주었는데 그 강은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에서 발원하여 예루살렘 성 길 가운데로 흐르는 강이었다.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달마다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다. 이 장면 역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의 생명이 강과 같이 충만하게 흐르므로 모든 질병과 사망이 사라질 것을 보여주는 환상이다. 다시는 저주가 없고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그의 종들 가운데 있으므로 그 종들이 그의 얼굴을 볼 것이며 그의 이름도 그 종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과 그 나라 백성이 가진 언약관계의 절정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으로 그들이 세세토록 왕노릇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노릇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종들을 비추심으로 그 종들이 왕노릇 하는 그런 나라이다. 

 

  17. 이제 모든 환상이 끝났다. 요한은 자신이 본 것을 전했고 요한이 한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그리고 그 말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동일한 하나님이 이제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천사들을 보내 알려주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졌듯이 이제 땅에서도 반드시 지체되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예언의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두루마리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은 이제 공개되었다. 왜냐하면 그 예언대로 이루어질 때가 가까왔기 때문이다. 그 때가 이르기 전에 불의를 행하는 더러운 자들도 있고 의를 행하는 거룩한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 때는 지체하지 않고 속히 올 것이며 그 때 하나님은 각 사람에서 그가 행한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다시 1장에서 등장했던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반복되고 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시다. 이 호칭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과 뜻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시요 또 그것을 넉넉히 이루실 만한 전능하신 분이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기 두루마리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권세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자기 두루마리를 빠는 자들은 7장에서 등장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을 의미할 것이다. 그들은 환란 가운데 인내하고 믿음을 지킴으로 어린 양의 승리에 동참한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게 하시고 교회들을 위하여 증언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더하거나 제하는 일이 엄격하게 금지된다. 이 두루마리의 예언을 증언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로 지체하지 않고 속히 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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