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 존 힉
2017-08-08 07:09:00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 존 힉
그리스도인들은 늘 다종교 사회에서 살아왔고 그들은 타종교들을 기독교보다 열등하고 어두운 우상숭배의 잔재로 여기고 교회의 선교 목표물로 간주하였다. 칼 바르트는 오직 기독교만이 절대적 자기 확신을 가진 유일한 참된 종교로서 타종교들에 도전하여 선교할 임무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역사, 체험, 사상, 영성이 다양한 종교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고 이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이자 유일한 것으로서의 기독교가 아닌 여러 가지 것들 중의 하나로서 기독교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중심적인 것으로부터 실재중심적인 것으로 변화해야 한다.
나는 악의 문제와 씨름하면서 기독교 신정론이 살아남으려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의 궁극적인 구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인류의 다수는 이미 영원한 지옥불로 떨어지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고 말하는 칼빈신학 내에서 어떻게 이것이 받아들여 질 수 있는가? 기독교가 오직 하나뿐인 참 종교라는 주장과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에 대한 믿음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나는 타종교들의 예배에 참여하면서 그들도 기독교에서처럼 인격적으로 선하고 정의와 사랑을 요구하는 더 높은 신적 실재를 향해 마음을 열어 놓는 것을 보게 되었다. 윌프레드 캔드월 스미스의 말처럼 어떤 것이 참된 종교인가라는 물음은 적적한 것이 못되며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는 각자의 신앙생활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예수-중심적 모델로부터 신-중심적 모델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게 되었다. 나는 모든 종교들은 하나의 신적 실재에 대한 인간의 서로 다른 응답으로서,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상황 속에서 형성된 다양한 인식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패러다임의 전이로 인해 기독론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만일 예수가 성육신한 하나님으로서 삼위일체의 제2격이라면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운 유일한 종교가 되기 때문에 모든 인류는 기독교로 개종해야만 한다는 주장이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성육신의 교리는 시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일 뿐 예수는 신에게 전적으로 헌신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예수는 왕을 신의 아들로 부르는 유대교 전통을 근거로 신의 아들로 불리게 되었다. 사실 이 칭호는 유대교뿐 아니라 그리스 전통에서도 위대한 인물을 통상적으로 표현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그리스-로마 문화권으로 확장되어 가면서 신의 아들이란 이미지는 신의 성육신이라는 신성화의 개념으로 고착되었다. 은유적 호칭인 신의 아들에서 삼위일체의 제2격으로 중대한 전이가 발생한 것이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라는 표현은 역사적 예수에게는 소급되지 않는 1세기 말 교회 신학의 반영으로 보아야 한다. 판넨베르크는 부활 이전의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로 명시하지도 않았고 다른 이들이 자신을 그렇게 고백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했으며 한스 큉도 보수적인 성서주석가들도 예수가 메시아적 위엄을 암시하는 신의 아들과 같은 칭호를 직접 자신에게 사용하지 않았음에 동의한다고 말한다. 예수는 철저하게 신에 의지하고 자신을 이웃에게 완전히 개방한 삶을 살아간 인간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나사렛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는 신의 아들로 고양되고 그리스도로 선포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신의 아들이며 로고스가 육신을 입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가 유효한 구원의 접촉점이 된다는 경험적 사실을 표현하는 상징적, 은유적 언어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 안에서 참으로 신을 만날 수 있지만 오직 예수 안에서만 신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도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타종교들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는 세 단계의 발전과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완전거부의 단계로서 모든 타종교인들은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1302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교회 밖에는 구원도 죄사함도 없다고 선언했고 플로렌스 공의회(1438-45)는 누구든지 가톨릭 교회 밖에 머무는 자는 영생에 이를 수 없다고 선포했다.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단계를 넘어섰지만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이 도그마가 존속되고 있다. 1960년 시카고 세계선교대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모든 자들이 지옥에 떨어진다고 선포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인류의 절대 자수는 영원히 좌절하고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단계는 신앙의 실재에 대해 생각하는 가톨릭 사상가들로부터 비기독교에 속한 신실한 사람들을 고려하는 인식에서 나왔는데, 이는 타종교인들이 경험적으로는 아니지만 형이상학적으로는 가톨릭 교인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타종교인들을 비가시적인 교회 혹은 잠재적인 교회에 속한 자들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그리스도인들을 고려한 것이지만 여전히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세 번째 단계는 제2차 바타칸 공의회에서 등장했는데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개념을 내세워 신실한 비그리스도인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것은 대담한 종교일치적 발언인 것 같지만 기독교를 중심으로 모든 종교들이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 두 번째 단계에서 한 발도 더 나가지 못한 것이다. 이 보다는 차라리 “사람은 자신의 역사적 상황 아래서 자신에게 유효하게 적용되는 종교 안에서 구원받는다.”고 말한 한스 큉의 제안이 타당하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를 유일한 구원자로 주장해왔고 유대교는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선민이라고 주장했으며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완성된 계시를 전해준 최후의 예언자라고 주장했다. 불교나 힌두교도 자신들의 종교가 최고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각 종교들은 하나의 특별한 전통 안에 머물면서 마치 종교가 하나뿐인 듯이 행동해 왔다. 그러나 한걸음 뒤로 물러나 보면 각각의 종교는 모두 다양한 종교들 중 하나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나는 모든 종교들의 숭배와 체험의 대상이 되는 실재를 영원한 일자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모든 종교의 공통근거가 되는 신성한 실재, 영원한 일자는 무한하여 인간의 사고, 언어, 체험의 영역을 넘어서면서도, 유한한 인간 본성에 가능한 방법으로 드러나며 개념화된다. 우주의 중심은 기독교나 어떤 특정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하느님이 빛과 생명의 근원인 태양이며 모든 종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반영하며 그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다. 이제 프톨레미오스식 신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사고가 일어나야 한다. 오늘날 세계의 종교들은 대화를 통해 접촉하면서 상호 이해를 위한 시도를 신중하게 추진하고 있으며 종교 일치적 조류가 광범위하게 흐르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단일한 세계종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일한 세계종교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종교대화의 도달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종교체험을 가지며 이것은 매우 다양하지만, 서로 다른 종교체험들은 다른 문화와 역사 안에서 동일한 초월적 실재에 대한 다양한 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체험에는 유신론적 형태도 있고 무신론적 형태도 있는데, 종교체험의 유신론적, 무신론적 형태는 저마다의 타당한 인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영원한 일자에 대한 다양하고 광범위한 차이들은 폭넓은 인간의 문화 차이에서 오는 복잡한 뿌리에 근거하고 있다. 종교는 환상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반응이다. 하지만 초월적 실재에 대한 모든 종교에서 합의된 중립적인 언어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하나님이란 표현을 쓸 것이지만 하느님은 인격적 방식이든 비인격적 방식이든 인간의 다양한 종교에 의해 인식되고 경험되는 초월적 실재이다. 하지만 종교체험의 형태들은 무한한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아니라 특정 인간의 의식에 의해 유한하게 체험된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종교는 경험적 사실주의이자 동시에 초월적 관념주의인 것이다. 하느님은 유신적 형태와 무신적 형태를 모두 취하는 신적 현상들의 영역에서 인류에게 경험되는 신적 본체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는 무한한 실적 실재가 제한되고 조건적인 유한한 인간의 의식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에만 그 실제가 인간에게 알려질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종교전통 안에서 갖는 체험 이상의 폭넓은 신학적 토대를 배우게 될 것이다.
종교들 간의 대화에는 자기 신앙이 절대적인 진리라 확신하는 신앙고백적 대화와 초월적 존재는 무한히 크다는 의식을 갖고 신절 실재를 보다 충실하게 인식하기 위해 쌍방이 자기들의 통찰을 나누는 진리탐구식 대화가 있다. 신앙고백적 대화의 태도는 칼 바르트의 교의학과 1938년 헤드릭 크래머가 작성한 ‘비기독교 세계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서신’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런 태도는 1966년까지 세계교회협의회의 지배적인 입장으로 작용하여 그동안 이 위대한 교회일치운동에는 종교 간의 대화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신앙고백적 태도를 타종교를 배척하는 대신 신앙고백적 자세를 수용하면서 타종교와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여전히 기독교의 계시만이 유일하고 참된 계시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런 입장을 견지하는 레슬리 뉴비긴은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한 증인이 되는 것만이 목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타종교와의 대화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한 증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을 불가피하다.” 고 말한다. 물론 뉴비긴은 비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도 변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긍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기독교 안에 얼마나 진지하고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가하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독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매우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성육신의 교리, 삼위일체의 교리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더 이상 형이상학적 진리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현실화한 인물인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상징적 표현이자 신학적 언어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의 유일성과 우월성을 이제 더 이상 주장할 수 없으며 다른 위대한 세계종교들이 가진 저마다의 타당성을 인정해야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기독교 전통을 가르쳐줄 수 있으며 또 그들로부터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종교역사상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기독교가 맡은 특별한 역할을 완수하려면 기독교는 반드시 신앙고백적 태도에서 진리탐구식 태도로 변해야 한다. 종교간 대화의 목적은 피상적인 의견의 일치나 신념의 희석이 아니라 진리의 새로운 차원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순수한 지적토론을 넘어 서로 간의 예배에도 참여하고 세계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도 동참하는 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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