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의 유형- 한인철
2017-08-06 21:06:03
종교다원주의의 유형- 한인철
1. 다원주의의 형태들
저자는 다원주의의 형태를 크게 대별하여 공통기반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와 차이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로 구분한다. 전자가 차이보다 공통기반을 중시하여 종교전통 간의 대화를 시도한다면 후자는 공통기반보다는 차이를 중시하여 차이에 근거를 두고 대화를 시도한다. 저자는 공통기반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는 대체로 신중심주의나 구원중심주의를 가리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신중심적 다원주의는 대체로 대화에 전제가 되는 기본적인 공통기반을 신이나 신앙에서 찾는 반면에(존 힉, 윌프레드 스미스) 구원중심적 다원주의는( 슈버트 오그덴, 폴 니터) 대화의 전제가 되는 공통기반을 신이나 신앙 대신 공통의 접근 혹은 공통의 상황으로서의 구원에서 찾는다. 차이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는 문화-언어적 접근과(조지 린드 벡) 과정-관계적 접근의(존 캅) 두 가지 서로 다른 양태로 분류할 수 있다.
다원주의자들은 종교전통간의 만남의 목적이 개인의 개종이든(배타주의) 종교전통 자체의 개종이든(포괄주의), 개종 자체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일치한다. 하지만 다원주의자들이 개종의 가능성에 대해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다. 다원주의자들에게 개종은 대화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고 만약 개종이 가능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항상 쌍방적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다원주의자들은 만남의 궁극적인 목적을 개종이 아니라 각자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상호 성숙이나 상호변혁에 둔다. 저자는 다원주의가 배타주의나 포괄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대화의 목적이 개종이 아니라 상호변혁으로 바꾼 것이라고 말한다.
1-1. 공통기반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
이 형태의 다원주의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전통들 사이에 공통기반이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포괄주의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다만 포괄주의와 다른 점은 포괄주의에서는 공통기반이 신적 실재에 대한 하나이면서 동일한 경험에 근거하는데 반해 이 형태의 다원주의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이 형태의 다원주의는 실재에 대한 하나이며 동일한 보편적인 경험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며 이 점에서 포괄주의를 넘어선다.
이 형태의 다원주의에서는 종교전통들 간의 공통기반이 차이보다 더 중요하고 강조되며 대화의 출발점이자 전제 조건으로 제시된다. 이들은 공통기반이 없다면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통상 이들에게 서로 다른 종교전통들은 하나이며 동일한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경험들 혹은 응답들로 이해된다. 실재에 대한 각 종교전통의 경험은 철저히 그 종교전통을 태동케 한 문화, 언어 및 역사에 의해 조건 지워지기 때문에 이들은 경험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동일한 실재에 대한 보다 충분한 경험을 위해 다른 종교전통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대화의 마지막 단계는 항상 만남이며 그 목적은 개종이 아니라 상호성숙, 상호성장에 있다.
1-2. 차이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
이 형태의 다원주의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전통 사이의 차이를 그 성격상 종류와 질에 있다고 보는 점에서 포괄주의보다는 배타주의에 더 가깝다. 이들은 정도의 차이를 주장하는 포괄주의는 결국 기독교 우월주의로 귀결된다고 비판한다. 이 형태의 다원주의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전통들 사이의 차이는 인간됨의 서로 다른 길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점에서 이들은 종교전통간의 질적인 차이를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배타주의와 구별된다. 이 형태의 다원주의는 각 종교전통은 그 자체의 유일무이한 독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각 전통에 헌신된 자들에게 참되고 절대적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 다원주의가 각 종교전통들이 모두 동일한 차원의 가치와 타당성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는 종교전통들 간의 차이가 공통기반보다 더 중요하고 더 강조되며 대화의 출발점이자 전제조건으로 제시된다. 이들은 종교전통들 간의 대화는 공통기반 때문이 아니라 차이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종교전통들 간에 다르기 때문에 만나야 할 이유도 있고 대화도 효과적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종교전통들 간의 만남의 목적은 개종이 아니라 상호변혁에 있다고 본다. 서로 다르다는 것은 서로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배움을 통해 각자의 성숙과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공통기반을 대화의 전제로 삼는 일은 공통기반이라는 미명하에 특정 종교전통에 특수한 것을 다른 종교전통에 강요하는 제국주의적 관점이라고 비판한다. 이들에게 공통기반은 대화의 전제가 아니라 대화의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2. 공통기반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
2-1 존 힉의 실재(신)중심적 다원주의
힉은 기독교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종교관이 전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비기독교 종교전통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교회나 그리스도가 더 이상 그 중심이 아니란 것을 의미한다. 힉은 경험적 실체로서의 종교는 서로 다른 인간 심성들과 역사 조류들을 반영하는 인간의 문화적 형태들이라고 말하면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서로 다른 종교 개념의 양태들로 예배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힉의 다원주의를 일컬어 신중심주의 혹은 실재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다. 힉의 신중심적 다원주의는 공통기반을 찾는 것으로 대화를 출발하여, 공통기반으로부터 종교 전통들 간의 차이를 규명하고 이런 차이에 기초하여 종교전통 간의 만남의 성격을 규명한다.
힉은 초기에는 공통기반을 ‘하느님’ 혹은 ‘영원한 일자’라는 용어로 사용하다가 보다 중립적인 개념으로 ‘실재’라는 개념을 선택했다. 실재가 모든 종교전통들의 공통기반이라는 힉의 주장에는 중요한 구원론적 함의가 있다. 그것은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실재 중심성으로의 인간 실존의 변혁이 각각의 종교전통들 안에서 현저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힉은 각각의 종교전통들이 하나의 동일한 실재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그리고 그에 응답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비기독교 종교들과 만나게 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개종 이상의 그 무엇이다. 그것은 상호 인정 혹은 상호 성숙이다. 힉의 실재중심주의는 기독교 자체의 변화 가능성을 연다. 기독교의 실재에 대한 비전도 기독교 공동체의 시공간적 제약성 속에서 형성된 것이기에 비기독교 종교전통의 실재에 대한 비전으로부터 배워서 기독교 자체의 실재에 대한 비전을 보다 풍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2. 폴 니터의 구원중심적 다원주의
신중심주의자들이 공통기반으로 제시한 신 혹은 실재는 엄밀히 유신론적 종교 특별히 기독교 편향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그 때문에 신을 공통기반으로 제시하는 시도는 결국 기독교의 신을 다른 종교전통에 암암리에 강요하는 결과에 이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비판을 수용하여 새로운 형태의 다원주의를 형성하려는 대표적인 학자가 폴 니터이다. 니터는 처음에는 신중심적 다원주의 입장을 취했다가 후에 해방신학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입장을 ‘구원중심주의’ 혹은 ‘하나님나라 중심주의’로 변경했다. 니터는 해방신학과의 만남을 계기로 종교전통간의 공통기반의 존재보다는 ‘공통목표’가 더 중요하다는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구원중심주의가 종교전통간 공통점에 여전히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신중심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대화에서 중요한 점은 무엇이 과연 다른 종교전통들을 만나게 하는 공통점인가 하는 것이다.
공통목표는 니터가 구원중심주의를 주장하면서 새로 사용하기 시작한 개념으로 종교전통들이 아직 실현하지 못했지만 공통적으로 목표로 하는 것, 예를 들면 구원 혹은 하느님나라를 가리킨다. 니터는 해방신학의 통찰을 빌어 모든 종교전통들은 그 차이를 무론하고 ‘가난한 자와 비인간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니터는 예수가 하나이자 유일한 혹은 독생자로 불렸던 것은 단정적인 신학적 진술을 제공하거나 혹은 다른 중보자를 배척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비전과 길에 대한 전적 위임의 행동과 실천을 독려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본다. 기독교가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지향하는 많은 중보자들 중의 하나라는 니터의 새로운 비전은 더 이상 개종을 목적으로 다른 종교전통들을 만나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니터의 새로운 비전은 개종 대신에 종교전통간의 협동을 만남의 새로운 목적으로 제시한다. 해방의 실천을 위한 종교 전통 간의 협동, 이것이 바로 니터가 말하는 종교전통간 만남의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니터에게 있어서 공통기반은 더 이상 대화의 출발점이 아니라 대화의 구체적인 실천, 즉 만남의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출현하게 될 대화의 부수물이다.
3. 차이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
3-1. 조지 린드벡의 문화-언어적 다원주의
조지 린드 벡은 종교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문화-언어적 접근 방법을 제시한다. 린드 벡에 의하면 종교란 단순히 진리에 대한 명제도, 경험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도 아니다. 종교는 무엇보다도 그리고 일차적으로 언어요 문화라는 것이다. 린드 벡의 문화-언어적 접근 방법에서는 종교경험은 모든 종교에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해당 종교에 특수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기 때문에 린드 벡의 문화-언어적 접근 방법에서는 종교간 대화에 공통기반보다 차이가 강조된다.
린드 벡의 다원주의에서 종교간 대화의 출발점이자 전제는 공통기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하면 각 종교의 경험은 상호간 공통점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다르다는 것이다. 공통기반에 중심한 다원주의는 현상학적 분석방법에 기초하여 보편경험을 추구하며 이에 근거하여 차이의 성격을 규명하지만 린드 벡의 차이에 중심한 다원주의는 보편적인 종교경험 자체를 부정하면서 오히려 각 종교경험은 종교전통마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린드 벡은 경험은 언어를 사용하는 과정 중에 문법이 작용한 결과로 본다. 그러므로 경험이 문법으로부터 해명되어야 하지 문법이 경험으로부터 해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 공감대가 없다면 만남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다르다는 사실 바로 그것 때문에 만남이 더욱 필요하고 생산적이 될 수도 있다. 린드 백은 종교에 대한 명제적 접근방법은 종교전통간의 만남을 기독교로의 개종의 계기로 이해하며, 또한 경험-표현적 접근 방법은 종교전통 간에 보편경험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기독교로의 개종을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린드 벡의 문화-언어적 접근 방법에서 종교 전통간의 만남은 개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린드 벡에 의하면 만남은 배움의 과정으로서 상대방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이다.
린드 벡에 의하면 언어는 가변적이나 문법은 불변한다. 따라서 한 때 문법을 기술하는데 충분했던 언어가 시대가 변하면서 불충분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종교전통간의 만남이 배움의 과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점, 즉 언어가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갖는다는데 있다. 린드 벡의 문화-언어적 접근 방법에서 종교전통들이 만남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문법을 기술하는 방식이다. 변하지 않는 동일한 문법(종교경험, 즉 삶의 형태)을 오늘날 달라진 상황 속에 어떻게 보다 효과적으로 기술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 속에서 그러한 언어적 도구들을 다른 종교전통들로부터 발견하고 그것을 배움으로써 문법을 재 기술하는 것이다.
저자는 린드 벡이 공통기반에 중심을 두지 않고도 다원주의가 가능할 수 있다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다원주의에 새로운 장르를 여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저자는 하나의 언어가 하나의 경험만을 형성한다는 주장이나 언어는 바뀌어도 문법과 그에 따른 경험은 바뀌지 않는다는 린드 벡의 전제는 현실적 타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고 비판한다.
3-2. 존 캅의 그리스도중심적 다원주의
존 캅은 공통기반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를 비판한다. 캅은 제시된 공통기반들은 실제로는 모든 종교전통들에 공통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캅은 이들 공통기반들은 실제로는 기독교로부터 추상해낸 것을 보편화하여 모든 종교전통들에 적용한 것으로 제국주의적 성격을 갖는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캅은 공통기반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대화의 선행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은 결국 각 종교전통의 독특성을 제거하거나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그 결과 자기 종교전통에 대한 신뢰와 위임을 약화시킨다고 지적한다. 또한 캅은 공통기반을 전제로 한 대화는 사로 다른 것을 배워 상호 변혁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한다. 캅은 린드 벡의 문화-언어적 접근 방법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캅은 언어에 기초한 종교전통에 대한 이해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서로 다른 종교전통들의 독특성을 드러내는데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존 캅은 자신의 다원주의를 ‘그리스도중심적 다원주의’라고 칭한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포괄주의로, 신중심주의는 다원주의로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캅은 그리스도중심적 다원주의는 반드시 포괄주의일 필요가 없으며 보다 근본적인 다원주의라고 주장한다. 캅은 모든 종교전통들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서로 다른 길들 즉 실존의 구조’로 이해한다. 이것은 사람다움의 경험 자체가 다양하고 그에 대한 표현도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각 종교전통들은 그 자체가 각각 하나의 산들이고 그 산에 오르는 길도 다양하다고 비유할 수 있다. 캅은 모든 종교전통들의 이러한 독특한 차이에 대한 근원적 인식으로부터 대화를 시작한다. 기독교를 예로 들면 그는 기독교의 독특성에 대한 철저한 긍정으로부터 대화를 시작한다. 공통기반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위해 기독교의 독특성을 유보할 필요도 없고 기독교의 독특성을 모든 종교전통에는 보편적으로 적용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캅은 그리스도에 대한 위임 속에서 다른 종교전통에 자신을 개방하려고 한다.
존 캅은 종교전통들간의 차이를 강조하고 차이로부터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각 종교전통의 독특성을 그대로 되살리고 그 가치와 진가를 충분히 인식하며 그럼으로써 각 종교전통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 종교전통에 대한 분명하고도 강한 위임과 헌신을 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캅은 이렇게 할 때 종교전통들간의 대화가 생산적이고 서로 배울 수 있으며 대화의 목적은 종교전통들간의 유사성이나 공통성을 확인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전통에 없는 것을 다른 종교전통으로부터 배우는데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캅의 그리스도중심적 다원주의는 서로 다른 다원주의 양태들의 단점을 보완하여 다원주의 분야의 새 지평을 개척했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캅은 공통기반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에 의해 약화되었던 기독교 종교전통의 독특성을 다시 회복하여 기독교 종교전통에 대한 강한 신뢰와 위임을 가지고 타종교와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캅은 각 종교전통을 다른 종교전통들과의 만남을 통해 끊임없이 변혁되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종교전통의 고립주의를 극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전통을 창조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타 종교와의 대화- 한인철
2017-08-01 15:08:18
1. 대화의 기준
저자는 전통적으로 신학자들이 종교전통들 간의 대화 기준으로 사용해온 ‘계시’ 개념이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계시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유신론적이고 따라서 비유신론적 종교들이나 비종교적 이데올로기들을 포괄하지 못하거나 그것들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는 계시 개념 대신에 다양한 종교전통들 간의 대화의 기준으로 공통기반, 차이. 만남, 이 세 가지를 제시한다.
1-1. 공통기반
대체적으로 배타주의 입장은 공통기반을 부정하는 입장에 있고 포괄주의나 다원주의적 입장은 공통기반을 긍정하는 입장에 있다. 공통기반을 긍정하는 입장에서도 포괄주의는 기독교에 독특한 것을 다른 종교에 확대하여 공통기반으로 제시하고 기독교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다원주의자들은 라너의 이런 관점을 기독교 제국주의라고 비판한다. 공통기반에 중심한 다원주의는 공통기반을 대화의 전제로 주장하는 반면에 차이에 중심한 다원주의는 공통기반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대화의 전제가 아닌 대화의 결과로 주장한다.
1-2. 차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전통들 사이의 차이는 질적인 것인가 양적인 것인가? 대체로 배타주의와 다원주의는 질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포괄주의는 양적인 차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배타주의가 차이를 진리와 거짓의 차이로 규정한다면 다원주의는 동일한 목적을 위한 서로 다른 길로 규정한다.
1-3. 만남
종교 전통들 간의 만남의 목적은 일방적인 개종에 있는가 아니면 쌍방적인 상호변혁에 있는가? 대개 배타주의와 포괄주의적 입장의 신학자는 일방적인 개종을 그리고 다원주의자는 상호변혁을 만남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이해한다.
2. 대화의 유형
저자는 대화의 유형으로 알란 레이스의 세 가지 유형 즉 배타주의, 포괄주의 그리고 다원주의를 채택하였다. 저자는 레이스의 유형론이 자신이 제시한 대화의 세 가지 기준은 공통기반, 차이, 만남에 가장 적합한 분류법이라고 말한다.
2-1. 배타주의
저자는 칼 바르트를 기준으로 배타주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 공통기반
배타주의는 근본적으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전통들 사이에는 공통기반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의 종교이고 다른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불신앙을 표출하는 형태에 불과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차이
한마디로 바르트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전통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단언한다. 정확히 말하면 바르트는 다른 종교전통들을 거짓으로 혹은 우상으로 간주한다.
-. 만남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기독교와 다른 종교전통들은 둘 중에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이중택일의 문제다. 결국 바르트에게 만남의 목적은 개종을 의미한다.
2-2. 포괄주의
저자는 칼 라너를 기준으로 포괄주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 공통기반
라너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전통들 사이에는 공통기반이 있다고 말하며 이것을 시원적 계시 혹은 익명의 신앙이라고 표현한다. 라너는 이 공통기반을 대화의 전제이며 출발점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런 전제가 라너가 다른 종교인들을 익명의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이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으며 다른 종교인들도 기독교인들과 함께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게 하였다. 라너에게 모든 종교전통들은 하나의 동일한 종교적 뿌리에 기초를 둔 서로 다른 가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 차이
다시 말하면 종교전통 간의 차이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잠재해있는 동일한 익명의 계시와 신앙이 인간의 의식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명시화되고 개념화되고 주제화됨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라너에게 종교전통 간의 차이는 정도에 있는 것이지 그 질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라너는 기독교는 모든 종교전통들 가운데 익명의 계시와 신앙을 가장 분명하게 개념화하고 주제화한 절대적인 종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라너는 바르트가 주장하듯이 기독교는 참된 종교이고 다른 종교는 거짓종교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모든 종교전통들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의 인도 아래 있다고 말한다.
- 만남
라너는 자신의 익명의 기독교 이론에 근거하여 기독교가 다른 종교전통을 만나는 목적은 익명의 신앙을 명시적인 신앙으로 끌어올리려는데 있다고 말한다. 라너의 이런 주장이 함축하는 바는 익명의 신앙은 명시화되지 않으면 공허한 것이고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결국 라너에게서도 만남의 궁극적인 목적인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개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2-3. 다원주의
저자는 다원주의의 형태를 공통기반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 차이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 그리고 중심없는 다원주의로 분류한다. 존 힉, 파나카, 캔트웰 스미스, 등이 첫 번째 형태에 속한다면 린드벡, 존 캅은 두 번째 형태에 속하는 다원주의 학자들이다. 그리고 일본의 선불교학자 마사오 아베가 세 번째 형태에 속한다고 본다.
-. 공통기반
이 형태의 다원주의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전통들 사이에 공통기반이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포괄주의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다만 포괄주의와 다른 점은 포괄주의에서는 공통기반이 신적 실재에 대한 하나이면서 동일한 경험에 근거하는데 반해 다원주의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다원주의는 실재에 대한 하나이며 동일한 보편적인 경험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며 이 점에서 포괄주의를 넘어선다.
-. 차이
다원주의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전통 사이의 차이는 그 성격상 종류와 질에 있다고 보는 점에서 포괄주의보다는 배타주의에 더 가깝다. 다원주의자들은 정도의 차이를 주장하는 포괄주의는 결국 기독교 우월주의로 귀결된다고 비판한다. 다원주의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전통들 사이의 차이는 인간됨의 서로 다른 길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점에서 다원주의는 종교전통간의 질적인 차이를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배타주의와 구별된다. 다원주의는 각 종교전통은 그 자체의 유일무이한 독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각 전통에 헌신된 자들에게 참되고 절대적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다원주의가 각 종교전통들이 모두 동일한 차원의 가치와 타당성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 만남
다원주의자들은 종교전통간의 만남의 목적이 개인의 개종이든(배타주의) 종교전통 자체의 개종이든(포괄주의), 개종 자체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일치한다. 하지만 다원주의자들이 개종의 가능성에 대해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원주의자들에게 개종은 대화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고 만약 개종이 가능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항상 쌍방적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다원주의자들은 만남의 궁극적인 목적을 개종이 아니라 각자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상호성숙이나 상호변혁에 둔다. 저자는 다원주의가 배타주의나 포괄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대화의 목적이 개종이 아니라 상호변혁으로 바꾼 것이라고 말한다.
3. 다원주의의 형태들
저자는 다원주의 형태를 크게 대별하여 공통기반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와 차이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로 구분한다. 전자가 차이보다 공통기반을 중시하여 종교전통 간의 대화를 시도한다면 후자는 공통기반보다는 차이를 중시하여 차이에 근거를 두고 대화를 시도한다. 저자는 공통기반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는 대체로 신중심주의나 구원중심주의를 가리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신중심적 다원주의는 대체로 대화에 전제가 되는 기본적인 공통기반을 신이나 신앙에서 찾는 반면에(존 힉, 윌프레드 스미스) 구원중심적 다원주의는( 슈버트 오그덴, 폴 니터) 대화의 전제가 되는 공통기반을 신이나 신앙 대신 공통의 접근 혹은 공통의 상황으로서의 구원에서 찾는다. 차이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는 문화-언어적 접근과(조지 린드벡) 과정-관계적 접근의(존 캅) 두 가지 서로 다른 양태로 분류할 수 있다.
3-1. 공통기반에 차이를 둔 다원주의
종교전통들 간의 공통기반이 차이보다 더 중요하고 강조되며 대화의 출발점이자 전제 조건으로 제시된다. 이들은 공통기반이 없다면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통상 이들에게 사로 다른 종교전통들은 하나이며 동일한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경험들 혹은 응답들로 이해된다. 실재에 대한 각 종교전통의 경험은 철저히 그 종교전통을 태동케 한 문화, 언어 및 역사에 의해 조건 지워지기 때문에 이들은 경험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동일한 실재에 대한 보다 충분한 경험을 위해 다른 종교전통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대화의 마지막 단계는 항상 만남이며 그 목적은 개종이 아니라 상호성숙, 상호성장에 있다.
3-2 차이에 중심을 둔 다원주의
종교전통들 간의 차이가 공통기반보다 더 중요하고 더 강조되며 대화의 출발점이자 전제조건으로 제시된다. 이들은 종교전통들 간의 대화는 공통기반 때문이 아니라 차이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종교전통들 간에 다르기 때문에 만나야 할 이유도 있고 대화도 효과적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종교전통들 간의 만남의 목적은 개종이 아니라 상호변혁에 있다고 본다. 서로 다르다는 것은 서로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배움을 통해 각자의 성숙과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공통기반을 대화의 전제로 삼는 일은 공통기반이라는 미명하에 특정 종교전통에 특수한 것을 다른 종교전통에 강요하는 제국주의적 관점이라고 비판한다. 이들에게 공통기반은 대화의 전제가 아니라 대화의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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