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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종교신학’(Theology of Religions)

종교신학입문

2017-07-04 17:09:24


 ' 종교신학’(Theology of Religions)이란 기독교와 타종교(이웃종교)의 관계를 연구하는 신학의 분과입니다다시 말해 기독교가 타종교를 어떻게 봐야 할지에 관한 논의입니다오늘날과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기독교는 타종교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기독교가 타종교에게 배울 점은 없을까요본 세미나는 이런 중요하고 민감한 질문들에 답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길희성 교수는 보살 예수에서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의 평화는 없다.는 스위스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의 유명한 어구를 인용하면서그렇다면 종교 간의 대화 없이 종교 간의 평화는 없다.고 덧붙입니다그렇습니다이제 타종교에 대한 관심은 세계시민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보편 교양이 되었습니다기독교는 더 이상 타종교의 실재를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는 강한 사회적문화적 압박에 직면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 왜 타종교에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던집니다. 아마도 이 질문의 의도는, 우리가 속한 기독교 전통을 공부하기에도 바쁜 시간에 왜 엉뚱한 관심으로 귀한 시간을 낭비하느냐는 걱정과 힐난일 것입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하신 분들의 의문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또한 분명히 그런 위험이 있을 수 있음을 항상 경계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타종교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저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 때문에 타종교를 공부합니다.

 

첫째,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인문학도로서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자 노력합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인문학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제겐 인간의 깊은 내면과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문화를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에는 다양한 지평이 존재합니다. 종교학에서는 종교적 인간, 정치학에서는 정치적 인간, 생물학에서는 유기체로서의 인간을 연구합니다. 이 중 종교를 통한 인간 이해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종교는 한 인간이나 사회의 바탕에 위치한 가장 근원적인 세계관이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를 모르고서 유대인의 삶과 문화를 이해할 수 없고, 힌두교를 알지 못하고서 인도인을 논할 수 없듯이, 종교를 모르고서 인간의 삶과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둘째, 제가 속한 종교 전통(기독교)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타종교를 공부하다보면 자연스레 자신의 종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게 됩니다. 일찍이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Max Müller)는 자신의 저서 종교학 입문(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에서 하나의 종교 밖에 모르는 사람은 어떤 종교도 모르는 사람이다.”(he who knows only one, knows none)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타종교를 공부함으로써, 그들과 제가 속한 종교 전통의 특징을 더 뚜렷이 이해하고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지요.

 

셋째, 변증과 선교의 접촉점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이방 문화를 깊이 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저 역시 타종교를 잘 이해함으로써,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과의 접촉점을 찾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접촉점을 통해 변증과 선교를 위한 굳건한 다리를 놓고자 애씁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베드로전서 3:15)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이방인들의 질문과 공격에 대응해, 언제든 자신의 신앙을 변증할 수 있는 적절한 답변을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팡세(Pensées)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철학을 조롱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 철학하는 것이다.”(Se moquer de la philosophie, c'est vraiment philosopher) 그러나 우리가 철학을 모른다면 철학을 조롱할 수 없듯이, 타종교를 모른다면 그들의 종교를 비판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강영안 교수가 강교수의 철학이야기에서 지적했듯, 그런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신의 무지로 인해 특정한 철학이나 이방종교에 사로잡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타종교를 알아야 할까요? 기독교가 타종교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없을까요? 기독교는 오늘날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다종교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모두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질문들입니다. [종교신학 입문] 세미나를 통해 그 대답을 찾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목표

1) 종교신학의 핵심 개념을 명료히, 체계적이고, 비판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2) 종교신학을 둘러싼 담론의 지형을 파악하고, 다양한 주장들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선택하고 논증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3) 타종교(이웃종교)에 대한 최소한의 개론적 지식을 습득합니다.

4) 파울 F. 니터(Paul F. Knitter),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헨드릭 크래머(Hendrik Kraemer), 존 H. 힉(John H. Hick), S. 마크 하임(S. Mark Heim), 제럴드 R. 맥더모트(Gerald R. McDermott),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등이 저술한 종교신학의 고전들을 읽고 자신의 관점에서 비평할 수 있도록 합니다.

5)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갖는 의미에 대해 더 진지하게 사유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갖습니다.

 

대상

1) 타종교에 관심이 있고, 타종교를 더 잘 알고 싶으신 분.

2) 종교 간의 대화를 추구하고, 타종교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하길 원하시는 분.

3) 기독교 근본주의에 깊은 회의를 느끼시는 분.

4) 종교신학과 관련된 다양한 학문적 담론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계시는 분.

5) 변증학과 선교학에 관심이 있으신 분.

6) 다종교 사회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하시는 분.

 
주교재


1) 폴 니터, 유정원 옮김, 종교신학입문, 분도출판사, 2007.
2) 레슬리 뉴비긴, 홍병룡 옮김, 마이클 고힌 해설,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IVP 모던 클래식스 004), IVP, 2007.


부교재


1)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길희성 옮김, 종교의 의미와 목적 (종교학 총서 4), 분도출판사, 1991.
2) 헨드릭 크래머, 최정만 옮김, 기독교 선교와 타종교: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대한 비교종교학적 비판, CLC, 1993.
3) 심상태, 익명의 그리스도인: 칼 라너 학설의 비판적 연구 (신학선서 8), 성바오로출판사, 2001.
4) 존 힉, 이찬수 옮김,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 , 1991.
5) S. Mark Heim, Salvations: Truth and Difference in Religion, Orbis Books, 1995.
6) Gerald R. McDermott, Can Evangelicals Learn from World Religions?: Jesus, Revelation & Religious Traditions, IVP Academic, 2000.


추천도서


1) 서공석 특별 기고, 이찬수, 유정원, 종교신학의 이해 (신학 총서 32), 분도출판사, 1996.
2) 데니스 L. 옥콜름, 티모디 R. 필립스 편, 이승구 옮김, 다원주의 논쟁, CLC, 2001.
3) 로널드 내쉬 외 2인 공저, 박승민 옮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 어떻게 되는가: 미전도인의 운명에 대한 세 가지 관점 (비교신학 시리즈 03), 부흥과개혁사, 2010.
4) 한인철, 종교다원주의의 유형, 한국기독교연구소, 2005.
5) H. 카워드, 한국종교연구회 옮김, 종교다원주의와 세계종교, 서광사, 1990.
6)  F. 니터, 변선환 옮김,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한국신학연구소, 1987.
7) 에드워드 롬멘, 헤롤드 네틀랜드, 정흥호 옮김, 기독교와 타종교: 세계 종교에 대한 성경적 신학, 서로사랑, 1998.

 

기독교와 타종교- 문제와 희망

2017-07-04 22:04:35


 타종교들이 보여주는 다원성과 생명력에 당황하거나 매력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은 과거에는 느끼지 못했던 의문점들과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것은 문제이며 동시에 인간성, 신성, 기독교 자체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통칠을 안겨 준다는 점에서는 희망이다.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은 그 어느때 보다 분명하고 곤혹스럽게 다양한 종교들과 그들의 다른 많은 궁극적 대답들에 직면하게 된다. 이 새로운 상황은 때로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오늘날 타종교에 대한 지식의 증가와 새로운 자각은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종교신학이란 학문을 통해 이런 도전에 대응하려고 했다. 나는 종교신학입문에서 기독교와 타종교의 여러 관계를 다룬 주요 신학적 입장과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타종교가 수행하는 역할을 다룰 것이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타종교의 힘과 진리를 점점 더 일상에서 많이 체험하는 까닭에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사도행전 4장 12절이나 요한복음 3장 16-19절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본문은 전통적 기독교 가르침만이 단 하나의 참된 종교이며, 타종교는 타신앙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해주는 미덕을 지닐 뿐이라고 가르친다. 종교적다원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이들은 이 선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다원성에 대한 감수성을 키울 때 우리의 변화된 역사적 상황은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각 종교의 주장을 기억하고 인류가 믿어 온 종교들의 계속된 다양성과 다원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래서 나는 다음 3가지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1. 고대부터 계속되어 온 종교다원성을 현대는 왜 다르게 체험하는가? 2. 이 체험은 많은 사람들에게 시 새대를 예고하며 타종교들과 아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는가? 3. 새 시대가 밝아오고 있다는 시각과 타종교들과 새롭게 관계 맺고 그들을 새롭게 이해하라는 제안은 왜 그토록 많은 이에게 문제와 고민을 던져 주는가? 2001년 9월11일 이후에 발생한 사건들은 내가 다룬 상항들을 더 중요하게 보게 만들었고 종교가 더 불안해진 평화를 증진시켜 줄 수 있다는 낙관주의를 옹호하게 해 주었다. 연구와 기도, 종교 간 대화, 정의와 평화와 해방을 앞당겨 주는 실천, 생태계 보전을 위한 노력이 나를 변화시켰다. 그리스도인인 나는 평화로운 하나님나라에 관한 복음을 실현하는데 관심이 있었고, 그 세계는 나를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하려는 타종교인들과 함께 협력하고 대화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나는 오늘날 과거 어느 때보다 이 실천하는 협력이야말로 진리를 밝혀준다고 확신한다. 

  오늘날 타종교는 더 이상 경계 저 멀리 존재하고 있지 않다. 타종교는 전세계에 분포해 있고 타전통에 대해 알기 위해 더 이상 학자나 세계 여행가가 될 필요가 없다. 누구든지 서적이나 다양한 미디어들을 통해 전세계의 종교들을 접할 수 있다. 이제 사람들은 점점 기독교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타전통들의 진리를 평가하고 비교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타전통들에 정통할 때 자신의 종교 안에서도 굳게 설 수 있음을 점점 더 많이 느낀다. 1960년대에 윌프레드 켄트웰 스미스는 앞으로 우리가 참으로 종교적으로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인정하는 종교적인 다원성 안에서 영위될 것이라고 말했다. 종교신학은 이런 현실에 무심하지 않고 모든 것이 모든 이에게 유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실제로 종교신학은 종교적으로 다른 것에 대해 더 많이 배우려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이 종교는 다종교인의 삶과 신념이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묻는다. 이 물음은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확신해 온 그리스도교가 타종교와 만나고 타종교인이 인정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을 이해하게 해 주었다. 종교들의 다양성과 그 끝없는 생명력을 자각한 사람들은 모든 이를 위한 하나의 유일한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에 동의하는 이들은 이 간단명료한 판단을 문화, 철학, 경제 체계에도 적용시켜 왔다. 그리하며 많은 현대인들은 자신의 이성적 행동, 의식, 민족성, 종교가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에드워즈 스할레벡스는 기독교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고 나머지 전체는 잘못된 길에 빠져 있다는 확신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이 가는 길만이 종교적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는 주장은 시간을 역행하여 사는 꼴이다. 인류학, 역사학, 사회학자들은 단 하나의 최고는 없으며 다양성이 실재를 구성하고 여러가지가 존재하며 기능한다고 확신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점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니면 거부하려는가? 에드워즈 스힐레벡스의 말대로 다원성은 단순히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원리의 문제다. 우리가 많은 것을 억지로 하나로 뭉뚱그려 버리는 것은 우리를 상처내고 세상을 망쳐 놓는다. 스힐레벡스는 오늘날의 논리로 따지든 현실상황을 보든 다양성이 단일성보다 우선한다고 단언한다. 그는 종교들이  다양하다는 것은 제거해야 할 악이 아니라 모두가 환영하고 기뻐해야 할 자산이며 하나의 특정 종교보다 모든 종교 안에 더 참된 종교적 진리가 있으며 이것은 기독교에도 해당되는 사항이라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세계종교들은 새로운 하나의 종교 형태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종교들의 대화 공동체 형태로 모여야 한다. 

  세계종교들이 한데 모인공동체들의 대화 공동체는 아직 꿈이다. 오늘날 서구의 철학자들은 세상과 모든 것이 진화하고 있거나 과정 중에 있다고 본다. 현대 불교도 서로 의존하여 발생하는 연기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발견한 고타마의 사상을 정교하게 다듬어 놓았다. 토마스 베리와 브라이언 스윔이 밝힌 웅대하게 진화하는 우주 이야기는 생태 환경에 처한 위기에 주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 가져온 엄청난 붕괴는 기존에 생각했던 대로 사회계급이 불변하는 것도 신이 정해 놓은 것도 아니라고 판단하게 만들었다. 만물의 부동성 역시 다윈이 발견한 생물체 진화론으로 깨졌다. 종의 기원은 창조가 단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정이며 끝나지 않고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아이슈타인이 제창한 새로운 물리학은 모든 것이 하나의 존재물이라기 보다는 생성하고 있고 이 생성은 상호관계를 통해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을 고무시켰다. 이 맥락에 의하면 우리는 생성 과정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고 관계 안에서만 생성될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은 절대적 일자나 유일자를 만들어 내는 다원성을 향해 나아가지 않고 조화로운 다원주의, 곧 일치를 만들어 내는 다원성을 향해 나아간다. 다시 말하면 이 움직임은 진실로 대화 공동체를 향해 나아간다.간다. 각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들과 대화하면서 살고 대화를 통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대화 공동체 말이다. 이런 철학적 입장은 종교 다원주의에 관한 새로운 경험을 해석해 줄 수 있다. 세계종교들은 전례없이 서로 갈등하며 각자의 정체성과 문제점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 종교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종교들과 함께하는 폭넓은 공동체에서 발견하고 발전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일정한 문화적 망원경을 통해 진리를 바라보며 이 망원경은 우리의 전통과 사회가 가르쳐 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문화적, 종교적 망원경이 허용하는 것 이상의 진리를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 그 답은 종교들 간의 대화 공동체라는 주제와 조응한다. 우리는 다른 망원경을 빌리면 된다. 만일 이웃의 망원경을 통해 볼 수 있다면 비록 이 새 망원경이 낯설더라도 우리 망원경에서 놓친 것을 볼 수 있다. 탈근대적 사상의 학자들은 우리의 문화, 종교적 망원경을 통해 우리가 보는 진리는 제한된 것일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의심의 대가들인 니체, 프로이드, 마르크스에 의하면 한 집단이 자기네 진리를 절대적 진리라고 고집할 때 그 진리는 다른 이들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쓰인다고 말했다. 미쉘 푸코가 지적한대로 진리 주장은 쉽게 권력 주장이 되어 버린다. 진리가 위험한 이데올로기로 둔갑했던 실례는 종교사와 문화사에서 수없이 있었다. 인간이 진리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해석학적 언어로 이 모든 것을 살펴보면 우리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대화 실천이라고 한 과제와 만날 수 있다.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이들과 대화해야 한다. 

 

종교신학 개관

2017-07-18 18:18:40


1. 종교신학은 타종교를 다룬다는 점에서 종교학과 유사하지만 기독교의 관점에서 타종교를 다루기 때문에 종교학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한 분과라고 보아야 한다기독교의 관점에서 타종교를 바라보는 네 가지 입장이 있다.

2. 첫째는 배타주의적 관점인데, 배타주의라는 용어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만든 다소 부적인인 용어이므로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배타주의 대신에 특정주의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폴 니터의 분류에 의하면 이 입장은 대체모델에 해당한다. 이것은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고 오직 기독교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으로서 타종교를 구원에 이르는 길에서 배제한다. 이 입장은 보수적인 기독교를 대변하는 가장 대표적인 입장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 칼빈, 칼 바르트 등이 이 입장을 견지하는 인물들이다. 이 입장에는 타종교에는 계시가 구원도 계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좀 더 보수적인 입장과 타종교에 구원은 없지만 일반계시는 존재한다는 좀 덜 보수적인 입장이 있는데 전자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신학자는 칼 바르트리고 헤르만 바빙크는 후자의 입장을 갖고 있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밖에는 어떤 구원이나 계시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타종교에 나타날 수 있는 일반계시도 부정한다. 배타주의에 대한 비판은 기독교 외에 타종교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과 기독교가 가진 하나님 사랑과 구원의 보편성을 훼손시킨다는 점이다.

3. 둘째는 포괄주의 혹은 내포주의적 입장인데 이것은 타종교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기독교가 구원에 이르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길이라는 입장이다. 물론 이 입장은 타종교에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기에 기독교를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 입장은 제2차 바타칸 공의회 이후 로마카톨릭의 공식입장이며 일부 진보적 개신교 분파의 입장이다. 이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적 인물은 칼 라너인데 그는 '익명의 그리스도인' 개념을 통해 포괄주의를 주창했다. 라너는 모든 타종교인을 사실상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본다. 여기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기독교회 밖의 모든 타종교인들을 가리키는데 라너는 그들은 비록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알지 못하지만 익명의(아직 세례를 받지 않아 세례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2차 바타칸 공의회의 입장이 라너의 입장과 동일하지는 않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라너의 입장을 수용하지만 타종교의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목회적 관점에서) 다소 제한적인 입장이다. 포괄주의적 입장은 타종교를 열등한(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함으로써 기독교의 외연을 확장하고 타종교를 기독교에 종속시키려는 종교 제국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 입장은 기독교 내부적으로는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제고시키지만 외부적으로는 타종교인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4. 셋째는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인데 종교다원주의에는 단순히 다수의 종교가 존재함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인정하는 서술적 종교 다원주의와 다수의 종교가 존재하고 그 각각에 모두 구원이 있음을 주장하는 규범적 종교다원주의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입장은 후자를 지칭한다.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은 모든 종교는 구원에 이르는 '동등한 길'임일 강조한다. 배타주의가 기독교를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포괄주의가 구원에 이르는 최선의 길로 말한다면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는 구원에 이르는 동등한 길로 본다. 이런 입장은 개신교 자유주의나 로마카톨릭의 자유주의 신학의 견해로서 대표적인 인물이 존 힉이나 파울 니터이다. 이들은 각각의 종교는 불완전하므로 종교 전통 간의 대화를 통해 배움을 강조한다. 종교다원주의가 즐겨 사용하는 두 가지 비유가 산의 비유 우물 안 개구리 비유이다. 전자는 산의 정상은 하나이지만 그 정상에 이르는 다양한 길들이 있듯이 구원에 이르는 다양한 종교가 있다는 비유이다. 후자는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모양에 따라 다른 모양의 하늘을 보듯이 각 종교는 각자의 문화와 전통에 따라서 동일한 구원을 다르게 체험한다고 말하는 비유다. 종교다원주의는 얼핏 겸손하고 관용적으로 보이지만 인식론적 입장에서 가장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왜냐하면 누구도 산 정상에서 산에 오르는 길을 내려다 본 사람이 없는데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산 정상에 서 있는 듯한 독선적 인식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다원주의는 각 종교의 독특한 개성을 말살하고 획일화시킨다는 비판과 함께 비목회적인 입장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종교의 발전을 진화론적 도식으로 이해하여 종교다원주의야 말로 타종교를 바라보는 진화의 최정점에 위치한 견해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이미 고대의 로마세계도 종교다원주의가 번성했기 때문이다.

 

5. 넷째는 상대주의 혹은 평행주의적 입장인데, 이것은 모든 종교는 구원에 이르는 각자의 길임을 강조한다. 이 입장은 각 종교에는 그 종교만의 독특한 구원과 가치가 존재함을 전제하고 다양한 구원을 인정한다. 이 입장은 교회사적 배경은 없고 탈근대주의적 맥락을 가지고 가장 최근에 나타난 학문적 견해로서 대표적 인물은 마크 하임이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고 구원들이라고 말하면서 각각의 종교는 각각의 구원을 받으므로 종교 간의 대화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종교다원주의는 각 종교의 개성과 가치를 무시하고 획일화한다고 비판하며 각각의 종교는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각기 다른 구원의 형태를 가진 자기 완결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이 입장은 종교 간의 어떤 이해나 대화도 불필요하가 만들기 때문에 고립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타종교에 무관심하고 각자의 종교에만 충실하게 만듦으로 위장된 배타주의라는 비판도 받는다.

 

6. 그렇다면 기독교는 타종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자유주의자들이 타종교를 하나님의 복음을 예비하는 빛이라고 주장한다면 근본주의자들은 타종교를 완전한 거짓이며 사탄의 발명품이라고 보는데 이 두 가지 극단적 견해는 거부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타종교에 대한 균형 잡힌 견해는 무엇인가? 그것은 비록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지만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일반계시로 말미암아 부분적인 진리의 빛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다. 물론 이 부분적인 진리도 사탄으로 말미암아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다고 본다. 이 입장은 '완화된 배타주의' 혹은 폴 니터의 '부분 대체모델'에 해당한다. 헤르만 바빙크나 레슬리 뉴비긴도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 입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타종교인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하지만 온유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애써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타종교인에 대해 관용을 가져야 하지만 스스로는 담대하고 확신에 찬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7. 참고 서적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해설총서 ; H.V. 스트라렌, 현석호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3

익명의 그리스도인, 심상태, 성바오로출판사 2001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 존 힉, 이찬수 옮김, , 1991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 폴 니터, 변선환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87

종교간의 대화;  R. 파니카, 김승철 옮김, 서광사, 1992

Salvations; Truth and Difference in Religion; S. Mark Heim, Orbis books 1995

종교의 철학적 의미; 마이클 피터슨 외, 하종호 옮김, 이대출판부, 2009

종교다원주의의 유형, 한인철, 한국기독교연구소, 2005

다원주의 논쟁, 데니스 외, 이승구 옮김, CLC, 2001

종교신학입문, 폴 니터, 유정원 옮김, 분도출판사, 2007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레슬리 뉴비긴, 홍병룡 옮김, ivp, 2007

Can Evangelicals learn from world religions? ; Jesus, Revelation & Religious Traditions; Gerald R. McDermott, IVP Academic, 2000

God's Rivals; Why has God allowed different religions? Insights from the Bible and Early Church,; IVP Academic, 2007

무례한 기독교; 다원주의 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시민교양, 리처드 마우, 홍병룡 옮김, ivp, 2014

 

종교의 의미와 목적-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2017-07-19 01:29:07


1. 모든 종교의 종교현상들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학은 서술적이고 비교구적이며 비환원주의적이다. 종교학은 진리 판정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종교 현상의 다양한 차원들(경험적, 신화적, 교리적, 윤리적, 의례적, 사회적 차원)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데 관심이 있다. 신학이 특정 종교의 입장을 반영한다면 종교학은 특정 종교의 입장을 배제한다. 종교학은 진리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신학이나 철학과 달리 규범적이 아니라 서술적이다. 또한 종교학은 사회과학과 달리 비환원주의적이다. 종교철학은 모든 종교를 대상으로 하지만 종교학과 달리 종교 현상이 아니라 종교의 교리와 사상적 차원의 진리를 주체적이고 합리적으로 탐구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종교사회과학(사회학, 인류학, 심리학)도 모든 종교를 대상으로 하지만 주로 종교 현상의 사회적, 심리적 기능에 관심을 두고 환원주의적으로 서술한다. 종교사회과학의 관심은 진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종교의 사회적, 심리적 역할에 있다. 이와 달리 신학의 관심은 자신이 믿는 종교를 대상으로 하며 특정 종교의 진리에 대한 고백적이고 변증적인 접근을 한다. 종교사회과학은 종교현상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종교현상을 더 근원적인 층위로(사회현상이나 심리현상과 같은) 환원하려고 한다. 종교사회과학의 환원주의적 사례를 보면 맑스는 헤겔 법철학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하며 종교현상을 현실불만을 내세로 넘기게 만듦으로써 부르주아들이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하는 도구라고 비판했다. 비슷한 관점으로 니체도 도덕의 계보에서 기독교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판했다. 프로이트는 종교의 기원에서 종교를 노이로제라는 심리현상으로 규정했으며 뒤르켐은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종교는 집단의 통합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며 종교를 지배자의 정치 현상으로 규정했다.

 

2. 신학자들은 자신의 종교에 대한 신뢰와 열정을 배경으로 지적활동을 하는데 반해 종교학자들은 특정한 종교전통과 거리를 둠으로써 종교를 객관적, 학문적으로 연구하려고 하는데 이런 태도를 종교학자들은 판단중지(epoche)라고 말한다. 그러나 종교학은 이러한 태도 때문에 종종 비난을 받고 있다. 과연 종교가 신앙과 무관하게 이해될 수 있는가? 종교라는 깊고 신비한 세계가 그것을 직접 경험함 없이 객관적 학문적 태도로만 알 수 있는 것일까? 윌프레드 캔트월 스미스는 종교에 대한 객관적 이해만을 추구하는 경박한 분위기를 비유하며 말하길 마치 어항 밖에서 기어 다니는 파리가 금붕어를 잘 관찰하지만 금붕어의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사실 서양의 학자들이 어린 식으로 동양의 종교를 연구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 종교학자가 기독교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한 신자의 내면에 대해 완전히 무지할 수 있으며 불교에 해박한 종교학자가 불공을 드리는 한 촌부의 세계를 전혀 이해 못할 수도 있다. 스미스는 이런 문제가 종교 연구의 이중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자신이 믿는 종교를 논할 때는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타종교를 연구할 때는 철저히 외부적 관찰자의 자세로 논하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종교 연구의 이런 이중성을 지양하고 모든 종교를 연구함에 있어 타당하게 적용할 수 있는 단일한 연구방법을 강구하고자 했다.

 

3. 스미스는 서구 학자들이 타종교를 연구하면서 변해가는 태도를 네 단계로 나누어 정리했다. 첫 단계는 타종교를 인격적 내면은 무시하고 하나의 산물로서 이해하는 그것(it)의 단계다. 둘째 단계는 타종교를 믿는 이들을 의식하기 시작하는 그들(they)의 단계다. 셋째 단계는 타종교인들을 대화할 수 있는 인격적 대상으로 인정하는 당신들(you)의 단계다. 넷째 단계는 타종교인들을 전 세계적인 신앙공동체의 동료 신앙인으로 간주하는 우리(we)의 단계다. 종교는 외형적으로 관찰 가능한 축적적 전통과 내면적 신앙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종교학은 주로 종교를 신조, 교리, 경전, 신화, 의전, 제도 등의 외형적 측면, 즉 축적된 전통으로 이해해왔는데 이것은 종교를 비인격화하고 물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란 그것을 신앙하는 인간과 독립되어 있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축적된 전통이 신자들의 신앙과 만날 때 발생하는 그들 내부의 인격적인 보이지 않는 사건이다. 신자는 축적된 전통을 통해 초월적 실재를 마주하는 신앙을 경험하게 되고 그렇게 경험된 신앙이 다시 외현화한 것이 바로 축적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스미스는 종교를 인간 내면의 경험과 연관하여 이해하려고 했다. 스미스가 보기에 축적된 전통은 신앙을 외부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며 종교는 축적된 전통이기 이전에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며, 따라서 결국 종교학은 인간학이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스미스는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종교를 신앙하는 신앙인과의 대화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4. 스미스는 인격주의적 종교 연구의 논리적 귀결로서 종교현상의 의미를 그 신앙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의 의미라고 결론을 내린다. 다시 말해 그 현상을 종교적 현상으로 감지하고 그것에 의해 삶의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들, 곧 신자들이 규정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란 종교학자들이 관찰하고 규정하는 종교현상이 아니라 불교신자들이 이해하고 체험하는 종교현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스미스는 종교현상의 이해를 위해서는 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대화만큼 중요한 것이 없듯이 스미스는 타종교의 종교현상에 대해 진술할 때 그 진술이 타당한 진술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종교 신자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스미스의 이런 인격주의적 종교의미론은 종교사회학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종교사회학자들은 그러한 의미론이 행위자의 주관적 해석을 과신하는 것이며 학문적 객관성을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객관적 의미와 당사자들의 주관적 이해와의 차이에서 이데올로기적 은폐성을 발견하는 것이 사회과학자들의 작업임을 감안할 때, 스미스의 종교의미론은 위르겐 하머마스의 심층해석학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스미스의 인격주의적 의미론은 학문적 객관성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인간이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자의적인 주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근대 학문적 객관주의가 종교 현상을 연구하는데 적합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종교현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주관성과 객관성을 초월하는 제3의 길을 제시하는데 목적이 있다.

 

5. 스미스는 종교적 진리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도 하나의 파격적인 이론을 제시한다. 우리는 흔히 진리를 시공을 초월하여, 그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옳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런 진리관은 자연과학에서는 타당할지 모르지만 종교와 같은 인간의 인격과 관련된 현상을 다루는 일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종교적 진리는 결코 그것을 믿고 실천하는 인격을 떠나서 그 자체의 진위를 논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진리는 특정한 사람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진리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이를 가리켜 인간적 진리관(a human view of truth)이라고 명명한다. 진리의 관점이 이와 같다면 한 종교 안에서 종교가 가르치는 진리를 실천하느냐 못하느냐의 갈등은 있을 수 있지만 한 종교와 다른 종교 사이에 진리의 갈등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스미스는 물화된 종교의 개념을 축적적 전통으로 이름 붙이고 종교의 본질을 축적적 전통이 아닌 내면적 신앙임을 역사적 연구를 통해 잘 밝히고 있다. 스미스에 의하면 본래 종교라는 단어는 초월적 실재와 관계 맺는 인간의 인격적 내면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다시 말해 종교란 초월적 실재와의 관계성을 표현하는 것이었지 물화된 구체적 종교를 지칭하는 단어는 아니었다. 이런 맥락에서 스미스는 종교란 단어는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나 불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 불교인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종교를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이나 명사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근대 이후에 일어난 것이다. 종교란 인간 외부의 고정된 실체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동서양의 모든 문헌에서 인간과 초월적 실재의 만남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즉 종교의 본질은 축적적 전통이 아니라 신앙이다.

 

기독교 선교와 타종교- 헨드릭 크래머

2017-07-25 23:31:04


1. 이 책은 1938년에 열린 세계선교대회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타종교를 향한 교회의 증언과 관련해 쓰여졌다. 저자는 1장에서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선교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함을 논하고 3장에서는 기독교 윤리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상술한 후 4장에서 타종교에 대해 어던 태도를 가질 것인가를, 5-6장에서는 타종교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이어서 7장에서는 비기독교 세계의 당시 종교상황을 살펴보고 8장에서는 비기독교세계에 대한 선교 상황을 , 9장에서는 각 선교지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선교를 해야할 지를 밝힌 후 10장에서 기독교 선교와 선교 환경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2.  저자는 교회의 본질적인 성격은 무엇이며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저자는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교회가 선교 사업에 대해 재인식을 해야만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선교를 교회의 본질로 본다) 그렇다면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세계 속에서 선교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가? 저자는 선교는 교회의 본질임을 강조하면서 선교에 대해 혼란을 보이는 교회에 대한 철저한 자기비판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하나님의 영이 교회 안에서 계속 역사하심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표징 중 하나가 선교사업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선교는 세상에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증거해야 하는 교회의 사도적 책무라고 강조하며 선교 사업에 대한 혼란이 가증되는 시대 상황 속에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선교의 위기는 곧 신앙의 위기라고 말한다.

 

3. 저자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경적 실재론을 강조하며 성경적 실재론에 입각하여 타종교를 판단할 것을 요구한다. 저자는 타종교를 일반계시나 자연신학의 관점에서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교회가 비기독교세계에 대한 선교의 책무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믈론 저자는 기독교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관이 타종교에 대한 우월감으로 표출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우월감은 본질적으로 문화적인 산물이지 종교적인 산물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자각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면 타종교에 대한 우월감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타종교에 대한 태도를 기독교와 세상의 관계라는 일반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표현은 저자가 타종교를 일반계시나 자연신학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폴 니터의 분류에 의하면 부분대체 모델이라 할 수 있겠다.)

 

4.  저자는 종교를 그 구심적인 전적으로 계시에 있는 계시종교와 초경험적인 종교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종교로 분류하면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계시 종교로 나머지 모든 종교들을 자연종교로 간주한다. 저자는 계시 종교에서 계시란 성경적 실재론의 범주에 속하며 자연종교와 달리 계시종교에서 종교적 체험이란 부차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타종교(자연종교) 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존재하는가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문제라고 말한다. 저자는 모든 문화, 인종에게 보편적이면서도 유사한 종교의식이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기독교는 타종교에 대해 성경적 실재론에 근거한 변증법적 태도가 요구되는데 그것은 타종교에 대해 단호한 대담성과 동시에 철저한 겸손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성경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 타종교에 대한 태도는 그리스도를 위해 진리를 전파하는 교회의 선지자적, 제사장적, 사적 직분의 조화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교회가 하나님의 화해를 세상에 전하는 사절로서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 이것이 모든 진리를 능가하는 최고의 진리라고 강조한다. 

 

5. 저자는 기독교와 기독교 문명은 동일시 될 수 없으며 역사적 기독교와 타종교들 간의 놀라운 유사점은 종교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획일성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지적한다. 그럼로 저자는 기독교와 타종교등 간의 차이점은 종교적 체험의 정도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타종교에 대한 지나 친 부정적 시간이나 지나친 호의적 시각 모두 적당하지 않다고 말하며 선교 사업의 핵심은 개종과 회심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저자는 타종교에 대한 선교는 과거의 방법이 아니라 새롭게 복음주의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다시금 성경적 실재론에 입각한 기독교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이해없이 타종교에 접근하면 혼란만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며 기존에 선교 사업에 사용된 접근 방법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저자는 이제 선교사들은 기독교 진리를 고수하되 타종교인들이 그 진리를 납득할 수 있도록 그들이 놓인 상황과 어울리는 표현양식으로 그 진리를 제시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타종교들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 방법이 교리적 취향을 충족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청중들의 생명력있는 응답을 불러 일으키는 방법으로 말하고 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저자는 선교지역에서 기독교는 외래성을 지니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여 그 자역에 걸맞는 토착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고 말한다.

 

대체 모델 : 참된 종교는 단 하나다.

2017-07-25 18:51:05


개신교 주류의 내부는 근본주의, 복음주의, 신복음주의, 오순절 등 다양한 분파가 존재하지만 타종교에 대한 이들의 공통된 인식은 대체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대체 모델은 참된 종교는 오직 기독교 하나뿐이라는 입장인데 이는 다시 완전 대체와 부분 대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체 모델을 완전 대체와 부분대체로 구분한 점은 니터의 탁견이다.

 

   완전 대체는 기독교 밖에는 구원도 계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근본주의를 대변하는 입장인 동시에 교회사 속에서 신장들이 통상적으로 타종교를 이해하는 종교신학의 대표적 모델이기도 하다. 완전 대체 모델을 신학적으로 가장 정교화한 사람은 칼 바르트인데 그는 오직 은총, 믿음, 그리스도, 성경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창했다. 그는 기독교외의 다른 종교는 종교이고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며 기독교를 종교화하는 것은 죄를 범하는 일이라고 말하며 기독교와 종교를 대립적으로 이해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기독교 밖의 일반계시를 부인하는 개신교 교파들이 대체적으로 완전 대체 모델을 선호한다. 

 

  이와 달리 부분 대체 모델은 기독교 밖에 구원은 없지만 계시는 존재한다도 보는 입장이다. 부분 대체 모델을 대변하는 이들은 타종교에도 일반계시(원 계시, 창조계시)가 존재함을 인정한다.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있음을 인정하는 근거는 성경과 전통이 그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타종교를 통해서도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구원을 베푸시지는 않는다. 성경에는 일반계시에 응답하여 참된 신앙인이 된 사례가 존재하지 않으며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그리스도의 배타적 유일성을 견지한다. 부분 대체 모델은 타종교를 오직 전도의 대상으로만 바라 보는 완전대체 모델과 달리 타종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해소하고 대화 상대로 이해함으로써 공공선을 증진하는 일을 위한 사화적 협력 등이 가능하게 만든다는 장점이 있다. 부붐대체 모델에도 계시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보는 관점과  소극적으로 보는 관점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적극적 관점은 타종교에 주어진 일반계시가 복음을 이해하는데 예비적인 도움이 된다고 보는 관점이고 소극적 관점은 그것이 비록 존재하지만 왜곡되어 복음 이해에 큰 의미가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아무튼 대체모델은 완전대체든 부분대체든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고 구원은 오직 기독교 안에서만 주어진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대체모델은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의 구원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이에 대해서는 대체모델의 주장하는 사람들 간에도 다양한 의견들이 잇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심으로 자기 양심과 도덕적 삶이 이끄는 대로 산 타종교인들에게 하나님은 죽기 직전에 당신의 사자를 보내 복음을 듣게 하고 최종 결정의 기회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칼 바르트는 역사의 종말에 죽으신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택할 기회를 얻고, 궁극적으로 선택할 것이므로 보편적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바르트는 이런 주장으로 인해 익명의 다원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클락 피녹이나 존 샌더스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의지를 강조하여 하나님은 온 세상에 보편적으로 현존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은 어떤 종교를 믿든 모든 사람 안에서 일하시므로 예수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도 구원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 이밖에 인간이 죽은 후에도 복음을 듣고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의견, 타종교인들도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면 분명 예수를 믿었을 것으로 하나님이 여기심으로 비록 복음을 듣지 못했지만 그들에게도 구원이 주어진다는 의견, 그리고 하나님은 타종교의 거룩하고 신실한 사람들을 예외적으로 다루시어 구원을 주신다는 의견 등이 있다.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대체모델에도 그 계시의 가치를 인정하는 정도에 따라 소극적인 부분대체와 적극적인 부분대체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소극적 부분대체는 타종교에 계시가 존재함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대단히 제한적이라고 말하는데 반해 적극적 부분대체는 타종교에 존재하는 계시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기독교가 타종교로 부터 배울 점이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불교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무인격성을 배울 수 있고, 유교를 통해서는 침묵하는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다는 식이다. 이런 입장은 성서의 충분성을 주장한 종교개혁 전통과 긴장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입장을 주장하는 제럴드 멕더모트는 이 입장이 성서의 충분성 교리와 충돌하지 않는다고 변호한다. 그는 타종교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기독교에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독교가 알고 있는 계시를 더 깊이 깨닫고 확장하는데 도움을 줄 뿐이라고 말한다. 소극적 부분대체가 타종교를 거짓과 사탄의 역사로 보는 완전대체의 편협함을 극복했다면 적극적 부분대체는 비록 제한적이나마 타종교와의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완성모델 : 기독교가 타종교들을 완성시킨다.

2017-08-01 11:42:36


  완성모델은 하나님 사랑의 보편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특수성(유잃성)을 함께 강조하는 데 이점이 다원주의와 다른 점이다. 다원주의는 보편성을 강조하지만 특수성은 강조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원주의는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포기지만 완성모델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견지한다. 완성모델은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를 이상적으로 완성시킨다는 주장을 한다. 기독와 다른 종교는 질적 차이가 아닌 양적 차이로 본다.(대체모델에서는 질적 차이 본다. 예컨데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그래서 다른 종교들의 교리가 기독교 교리안에 모두 포괄되며 다른 종교의 필요들도 기독교를 통해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흔히 포괄주의 혹은 내포주의라고도 부른다.

 

  완성모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으로 채택되었다. 칼 라너의 교리(doctrine)가 공의회의 교의(dogma)로 선포된 것이다. 당초 기독교의 출발은 로마 그리스 세계의 종교다원적 상황에서 출발되었다. 그러나 신약시대, 교부시대, 중세를 통틀어 타종교에 대한 역사'진지한 관심은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 철학이나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셈족 종교의 도전을 제외하면 대체로 서양 사회는 기독교 중심으로 일원화되어 유지되어 왔다. 타종교에 대한 지식도 주로 개인 여행자의 기행문 등에 의해 파편적으로 전해졌을 뿐이다.(예를 들면 헤로도투스의 '역사'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 그러나 15-17세기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해  타종교에 대한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이 당시 축적된 지식은 훗날에 타종교를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연구할 수 있는 재료가 되었다.  이후 타종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카톨릭 교회의 종교신학은 16세기 트렌트 공의회와 19세기 제1차 바티칸 공의회까지는 명백히 대체모델이었다. 그러나 타문화권에 존재하는 고등종교에 대한 인식과 칼 라너의 연구에 의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완성모델로 전환되었다. 칼 라너는 타종교를 진실하게 믿는 자들은 (그들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그리스도를 따르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들 역시 그리스도의 보편적 속죄 사역에 힘입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칼 라너는 보편적 사랑에 기초한 하나님의 구원의지와 은총받은 인간의 초월을 향한 갈망이 타종교를 믿는 이들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 토대라고 보았다. 하이데거 철학에 영향을 받은 칼 라너는 인간을 세계에 대해 개방되어 하나님의 은총을 추구하는 존재로 보았다. 라너는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존재할 뿐 아니라 타종교에도 구원이 존재함을 적극적으로 인정했다.(다원주의와 같은 점) 그러나 라너는 타종교를 '익명의 기독교'로 간주했기에 타종교가 받는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해 받는 구원임을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견지했다.(다원주의와 다른 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라너의 신학을 대체로 수용했지만 (목회적 현실을 고려하여)그의 주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 그래서 타종교에 존재하는 계시와 구원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기 보다는 소극적으로 시인하는 정도에 그쳤다. 완성모델은 비록 타종교에 계시와 구원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타종교를 익명의 기독교로 간주하며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견지한다. 이런 점에서 완성모델은 기독교 제국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타종교들에도 완성모델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현대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 Kabbalah'에서는 다양한 신과 천사의 이름을 암송함으로 신비 처험을 하게 된다고 주장하며 (종교와 관계없이) 이 신비체험을 구원을 가져오는 매개로 보았다. 이슬람교는 전통적으로 철저한 대체모델인데 이슬람교의신비주의 전통인 '수피즘 Sufism" 에서는 이슬람교를 타종교의 완성으로 이해했다. 힌두교 특유의 '화신사상 Avatarava da'도 힌두교 중심의 완성모델을 보여준다. 힌두교는 거대한 종교의 용광로와도 같다. 힌두교 신전에는 예수상도 있는데 힌두교도들은 예수를 힌두교신들 중 하나인 비쉬누 신의 화신으로 본다. 바수반두가 부파불교(소승불교)를 집대성한 '아비달마구사론'도 당대 불교의 입장에서 세상의 모든 사상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불교적 세계관으로 타종교를 포괄하고 있다. 일본전통종교인 '신도'의 '본지수적설'( 붓다가 일본에 와서 일본의 전통신인 가미가 되었다는 학설)에 근거한 '신불습합(불교가 신도를 완성시켜준다는 사상' 사상도 완성모델의 전형을 보여준다.

 

관계 모델: 많은 참된 종교가 대화에 초대받았다.

2017-08-08 03:19:52


1. 대화를 위한 전제공통기반

  관계모델의 주된 관심사는 종교 간의 대화다. 관계모델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에게 타종교인과의 대화는 기독교인으로서 필수불가결하며 윤리적으로 절박한 사안으로 간주된다. 그들은 모든 종교들이 나름의 가치를 가졌다는 점에서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어느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거나 절대적이라는 주장을 거부한다또한 이들은 종교들의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지만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종교들 간에 공통기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관계모델에서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장벽은 예수의 고유성(유일성)의 교리다. 왜냐하면 대체모델이나 완성모델처럼 예수의 유일성 교리를 견지한다면 타종교와의 대화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 공통기반을 위한 세 가지 근거

  관계모델은 종교 간 대화를 위해 공통기반의 존재가 필수적이라고 믿기에 그 공통기반의 근거를 다음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는 하나의 공통된 실재가 존재하지만 종교는 문화적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대표적인 학자는 존 힉인데 그는 현상계와 물자체를 구분한 칸트의 철학은 차용하여 실재는 하나지만 문화적 표현은 다양하다고 주장했다. 존 힉은 예수의 유일성 교리를 극복하기 위해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묘사하는 언어는 과학적 언어가 아니라 상징과 은유를 사용한 시적이고 고백적 언어이므로 예수의 유일성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극복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둘째는 모든 종교는 동일한 신적 실재에 대한 보편적 신비체험(실재와 일치하는 체험)을 공유한다는 레이몬드 파나카의 주장이다. 파나카는 일치의 체험은 종교마다 다르고 다양하지만 그 체험이 동일한 신적 실재에 대한 체험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라고 주장한다. 파나카는 예수의 유일성 교리를 극복하기 위해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분하여 보편 그리스도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그리스도는 단지 역사적 예수에만 독점적으로 적용되지 않고 붓다, 라마, 크리슈나, 이스바라 등, 타종교의 뛰어난 인물에게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세 번째 입장은 종교 간 공통기반을 실재나, 체험에서 찾지 않고 종교인들이 처한 공통의 상황에서 찾는다. 이 입장에서는 존 힉의 실재나 레이몬 파나카의 체험보다 더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공통 상황을 인류가 처한 고통의 문제로 본다. 그래서 각 종교들은 인류가 처함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 윤리의 필요성이라는 공통된 윤리적 과제 안에서 협력해야 한다고 주방한다. 이런 입장을 가진 대표적인 학자가 한스 큉, 레오나르도 볼프, 폴 니터 등이다. 그러나 이들 입장은 공동선에 대한 단순한 협력이 목적이 아니라 대화의 출발점으로서 공공선에 대한 협력을 공통기반으로 삼자는 것이다. 공동선에 대한 협력과 실천을 통해 이해와 대화를 증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예수의 유일성을 극복하기 위해 예수를 해방자, 사회실천가로 제시하며 고통받고 착취받는 자의 입장에서 고통과 불의에 저항을 예수의 고유성으로 본다.

 

3. 관계모델의 기독론

  대체모델이나 완성모델에서는 예수의 유일성을 견지하는데 반해 타종교와의 대화를 주된 관심으로 하는 관계모델에서는 예수의 유일성을 견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관계모델에서는 예수의 유일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그래서 관계모델은 예수를 하나이며 유일한 구세주요 계시자로 보는 전통적 기독교 언어에 대한 재해석을 제안한다.  첫 번째 제안은 예수를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희생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성사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당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분이라는 것이다. 관계모델은 예수를 사랑의 성사로 보는 것과 희생제물로 보는 것은 아주 다른 길로 가게 만든다고 말한다. 성사로 이해된 예수는 타종교인들과 어울릴 수 있지만 희생제물로 이해된 예수는 홀로 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제안은 예수의 신성을 성령의 능력이 부어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성령 기독론이다. 이 제안은 성령 기독론은 예수를 하나님 말씀의 육화로만 이해하는데서 생기는 결함을 보완해준다고 말한다. 로저 하이트는 성령이신 하느님은 예수의 역사적 출현 이전부터 세상의 구원을 위해 활동하셨으므로 성령 기독론은 성령이 기독교 밖에서도 활동하신다고 이해하며 성령의 역사를 타종교의 중재자들에게도 개방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4. 관계모델에 대한 비판

  첫째로 관계모델은 종교 간의 차이가 갖는 함축을 진지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종교적 다양성을 하나의 실재, 하나의 구원으로 획일화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런 점에서 관계모델은 기독교적 범주로 타종교를 해석하려는 지나치게 서구적이거나 기독교적 모델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고 이런 점에서 기독교 제국주의적 성격을 가진다고도 볼 수 있다. 예컨데 불교의 , 緣起, 도교의 를 기독교적 범주인 초월적 실재로 이해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관계모델의 전형으로 평가 받는 힌두교조차도 힌두교 내부의 배타성을 온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힌두교 중심의 관계모델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둘째로 관계모델은 독단적인 선험적 인식론을 전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관계모델은 마치 자신들이 모든 개별 종교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듯이 아무도 가져본 적이 없는 全知的 작가 시점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초월적 실재에 대한 이해는 각 종교가 처한 역사적, 문화적 조건에 의해 제한된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들이 이해한 초월적 실재에 대해서는 그런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 모순을 보인다.

 

수용모델: 많은 참된 종교를 그대로 놔두라

2017-08-15 20:33:06


1. 수용모델이란 흔히 상대주의 혹은 평행주의라고 불리는데 모든 종교가 구원에 이르는 각자의 길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각각의 종교는 자기 완결성을 갖고 있으므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는데 기독교의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수용모델은 탈근대적 맥락에서 나온 주장이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서구회는 계몽주의를 전면적으로 반성하게 되는데 이런 시대에 계몽주의와 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등장한 것이 탈근대주의다. 특히 탈근대주의는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근대성의 노력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고 경고하는데, 수용모델은 이런 탈근대의 맥락에서 보편적 진리 추구를 거부하고 종교간의 차이를 강조한다. 

2. 조지 린드벡은 종교에 대한 명제적-인식적 인식적 이해(데체모델)나 체험적-표현적 이해(완성모델, 관계모델) 이해를 비판하고 문화적-언어적 이해를 주장했다. (1984년 교리의 본성: 탈자유주의 시대의 종교와 신학) 린드벡은 삶과 사고 전체를 형성해주는 문화적-언어적 틀이나 매개가 없이는 종교 체험은 붕가능하다고 말하며 언어가 체험에 선행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린드벡은 종교간에 공통토대는 존재하지 않으며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린드벡은 종교간에 대화는 필요하고 서로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하지만 공통점을 억지로 찾기보다는 차이점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 대화에 더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3. 마크 하임은 자신의 책 "Salvations: Truth and Difference in Religion" 에서 많은 종교들과 많은 구원들을 주장했다. 린드벡이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교들이 다른 것이라고 말하며 언어로부터 실재를 다루었다면 하임은 그 반대로 종교들은 참으로 시작부터 다르기 때문에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하임은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많으며 종교들의 참된 차이는 이 많은 신성을 반영한다고 주장하며 종교의 다원성은 하나님 안의 다원성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하임은  특정 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어차피 포괄주의자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 치이에 근거하면서도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생산적인 종교 대화의 형태로서 "가치선택적 다원주의"를 주장한다.

 

4. 프랜시스 클루니로 대표되는 "비교신학"의 입장은 종교신학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라고 주장한다.  이미 정립된 종교신학 이론은 자기 종교중심적인 대화가 될 뿐이므로 종교신학을 중단하고 먼저 전제없는 대화를 시작해야 하고 그 이후에 종교신학을 전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클루니는 타종교를 공부하고 비교를 통해 배움으로써 자기 종교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키고 구체적 실천을 위한 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고 말한다. 

 

5. 수용모델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특정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한 포괄주의적 입장을 피할 수 없음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수용모델은 완성모델과 유사하지만 타종교의 고유성과 독립적 가치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수용모델에서는 예수의 유일성을을 견지하면서도 타종교에 대한 열린 자세를 가지고 배울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수용모델은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고립주의에 빠지거나 절대성을 부인함으로써 상대주의에 빠질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간과될 수 없다.

 

종교신학의 다양성- 폴 니터

2017-08-22 16:44:12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들이 다양한 만큼이나 타종교를 이해하는 기독교 종교신학도 다양하다. 사실 우리에게 당혹스러운 것은 종교의 다양성보다 종교신학의 다양성이다. 종교신학의 다양성을 두고 그리스도안 간에 진지한 대화가 필요하다. 나와 다른 관점들의 장점을 인정하고 동시에 자신의 관점이 가진 약점과 위험성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느 관점이 최선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각 관점 마다 장점과 단점들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모델은 타종교에 대해 어느정도 배타적이기 때문에 타종교와 대화에 진리를 위한 논쟁이 불가피하다.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대체모델에서는 타종교인을 위한 부드럽고 따뜻한 사랑을 보여주여야 한다. 완성모델은 타종교 안에 이미 존재하는 하나님의 현존을 인종한다. 다만 예수는 타종교를 완벽하게 하고 완성시켜준다고 본다. 그래서 타종교인이 그리스도인과 대화하면서 예수를 만난다면 그들은 더 나은 힌두인, 더 나은 불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관계모델은 대화를 통해 타자의 전복과 완성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복과 완성에 대한 개방성이 구비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예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수용모델은 타종교의 다름을 수용하여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각 모델마다 장단점을 다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어느 한 모델을 절대시하지 말고 다양한 모델에서 배울점을 배워야 한다.

   종교신학이 다양하기 때문에 타종교인들과는 신학의 정립이전에 공공선을 위한구체적인 협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사변적인 종교신학을 끌어들이는데 급급하기 보다는 먼저 타종교인과 적극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비교신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한다. 물론 이런 대화와 만남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는데 종교신학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종교신학에 대한 그리스도인간의 대화와 그리스도인과 타종교인과의 대화 사이에는 순환적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타종교인과 전지구적인 이슈를 둘러싼 공통의 윤리적 행동, 구체적 협력을 통한 신뢰외 증진 등이 필요하다. 

 

불교와 기독교

2017-09-05 13:01:15


서언

 

  기독교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세 가지 도전을 든다면 첫째는 고대와 중세의 그리스 철학의 도전, 근대의 과학의 도전 그리고 현대의 종교다원주의의 도전일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의 도전 중에서 가장 실질적인 도전은 불교의 도전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불교는 지역성을 탈피한 보편종교로서의 특성을 잘 갖추고 있으며 탈근대 시대의 종교없는 영성과 잘 부합되어 개종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상류층에서 개종자가 가장 많이 증가하는 종교가 불교이며 한국에서도 불교는 아직도 가장 많은 종교 인구를 차지하고 있다.

 

불교 역사 개관

 

 오늘날 동유럽 지역에 있던 아리안족은 기원전 17-18세기 대이동을 했는데 가장 동쪽으로 이동한 아리안족들이 인도에 침입하여 그 결과 토착민인 드라비다족의 인더스 문명이 종말을 고했다. 아리안족의 정착과 함께 "업(karma)"과 "윤회"의 관념이 유입되고 아리안족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카스트 제도"가 성립되었고 이렇게 하여 정립된 종교가 "바라문교" 다. 바라문교는 초기에는 인격화된 자연신을 숭배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려 현세의 복을 기원하는 베다 종교였다. 이후에 바라문교는 브라만 계급을 중심으로 한 제사절대주의로 변화했는데 이 시대는 브라만이 모든 것을 독점하는 시대로서 카스트 제도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후에 바라문교는 제사절대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브라만을 거치지 않고 출가하여 깨달음을 통해 직관적으로 진리에 접근하려는 우파니사드 종교로 발전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브라만이나 출가자 중심의 엘리트 종교인 바라문교는 인민들의 종교적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속세인들의 삶의 의미를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

 

  불교가 흥기할 무렵인 기원전 5-6세기의 인도는 사회적, 사상적으로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아리안족의 정착이 마무리되면서 농업 생산이 증대되고 상공업이 발달하며 도시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도시에서는 상공업자들이 화폐경제에 의해 부를 축적하고 길드와 유사한 조합을 구성하여 도시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지금까지는 제사를 관장하는 브라만과 정치를 관장하는 크샤트리아가 사회의 지배층이었지만 새롭게 등장한 상공업자와 서민인 바이샤에 의해서 기존의 카스트 제도는 질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변화를 배경으로 베다의 전통과 바라문교의 지배질서에 도전하는 많은 자유사상가들, 종교운동가들이 등장했는데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상가 6명을 "육사외도"라고 부른다. 육사외도라 불리는 사상의 각축전장에서 오늘날 네팔 지역 출신인 고타마 삿달타에 의해 불교가 탄생했다. 불교는 바라문교의 범아일여 사상과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여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불교가 등장한 후에 바라문교 차체가 개혁되어 등장한 것이 힌두교이다.

 

  한 사람의 인간인 역사적 붓다가 가르쳤던 초기 불교는 궁극적 목적을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에 두고 삼법인1, 사성제2, 오온, 연기, 무아, 아라한 등을 핵심 교리로 제시했다. 역사적 붓다 사후 100년경에는 경재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상좌부(부파, 소승) 불교와 대중부 불교로 분파가 나누어지면서 경전에 대한 매우 복잡하고 전문적은 주석들으 등장하게 된다. 그리기고 출가자 중심으로 종단이 운영되고 지나치게 전문화됨으로서 점차 민중들의 지지를 잃게 된다. 이러한 부파 불교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대승불교가 등장하면서 한 인간이었던 역사적 붓다가 신격화되고 붓다에 대한 기도와 공덕사상이 발생한다. 대승불교는 여래장, 보살, 대승, 사홍서원, 극락3, 공, 불탑신앙 등을 핵심 교리로 제시하는데, 그 안에는 중관, 유식, 화엄, 천태, 정토, 미륵, 선종4 등의 다양한 종파들이 존재한다. 소승불교에서 붓다는 인간일 뿐 신적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 붓다는 신격화되고 기도와 공덕사상이 등장하면서 출가자 중심의 종교에서 재가자들을 위한 종교로 변화한다. 이후 대승불교도 점차 원래의 의미를 잃고 민중들의 삶으로부터 유리되면서 다양한 상징을 통해 비밀스런 깨달음을 전달하는 밀교가 등장하지만 이후 불교는 힌두교에 흡수되거나 이슬람의 침임으로 인도에서 사라지게 된다.

 

기독교적 관점의 비판

 

  기독교의 관점에서 불교의 핵심 교리들에 대한 몇 가지 비판들이 있다. 첫째로 불교는 종교의 궁극적 목적을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에 두며 이 고통의 원인을 집착이라고 보고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한다. 그러나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이란 교리는 원리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집착을 버리려면 집착을 버리려는 또 다른 집착이 발생하고 이 집착의 사슬은 연쇄적으로 무한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윤회와 무아설은 양랍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윤회하는 주체의 상정은 사실상 무아교리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모든 것은 비어있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중관사상(=공사상)은 존재론적, 윤리적 허무주의라는 파괴적 결과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중관사상에 의하면 옳고 그름, 있고 없음이 모두 버려야 할 집착이 되기 때문이다. 넷째모든 인간에게 불성이 있고 이 불성을 잘 닦으면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여래장 사상은 인간 안의 죄성을 간과한 지나치게 낙관적인 인간관이다. 다섯째,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이고 이 해방은 존재의 소멸인 열반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데, 존재의 소멸이 인간의 종말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나 희망이 될 수 없다. 

 

각주 1

삼법인은 불교의 정체성을 규장하는 깃발과도 같은 교리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제행무상" 고정불변한 실체로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법무아" 고통으로부터 해방하는 길은 열반이라는 "열반적정"이 그것이다. 여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통이라는 "일체개고"를 더하여 사법인이라고도 한다.

각주 2

불교의 진리를 고.집.멸.도의 네가지 명제로 표현한 것이다.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고성제" 고통의 원인은 집착이라는 "집성제" 고통을 없애기 위해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 멸성제" 그리고 멸성제를 실천하기 위한 8가지 바른 가르침(팔정도)을 제시한 "도성제"가 그것이다.

각주 3

불교의 극락 개념은기독교의 천국과 다르다. 극락은 열반을 준비하는 장소로서 극락에서 불법을 가르쳐서 열반에 들도록 도와주는 장소이다. 궁극적 구원으로서의 불교의 열반 개념이 기독교의 천국과 유사할 것이다.

각주 4

중국화된 불교로서 논리나 교리를 불신하는 신비주의적 불교다., 달마대사가 선종의 창시자이며 혜능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조주스님의 벽안록은 선종의 경전으로 유명하다. 불립문자(언어는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 직지인심(진리는 직관으로 전달된다), 교외별전(진리는 경전 안에 없다), 견성성불(진리를 깨달음으로 부처가 된다)을 4대 원리로 제사한다.

  1. 삼법인은 불교의 정체성을 규장하는 깃발과도 같은 교리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제행무상" 고정불변한 실체로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법무아" 고통으로부터 해방하는 길은 열반이라는 "열반적정"이 그것이다. 여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통이라는 "일체개고"를 더하여 사법인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2. 불교의 진리를 고.집.멸.도의 네가지 명제로 표현한 것이다.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고성제" 고통의 원인은 집착이라는 "집성제" 고통을 없애기 위해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 멸성제" 그리고 멸성제를 실천하기 위한 8가지 바른 가르침(팔정도)을 제시한 "도성제"가 그것이다. [본문으로]
  3. 불교의 극락 개념은기독교의 천국과 다르다. 극락은 열반을 준비하는 장소로서 극락에서 불법을 가르쳐서 열반에 들도록 도와주는 장소이다. 궁극적 구원으로서의 불교의 열반 개념이 기독교의 천국과 유사할 것이다. [본문으로]
  4. 중국화된 불교로서 논리나 교리를 불신하는 신비주의적 불교다., 달마대사가 선종의 창시자이며 혜능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조주스님의 벽안록은 선종의 경전으로 유명하다. 불립문자(언어는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 직지인심(진리는 직관으로 전달된다), 교외별전(진리는 경전 안에 없다), 견성성불(진리를 깨달음으로 부처가 된다)을 4대 원리로 제사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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