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레슬리 뉴비긴
2017-09-03 19:31:33
오늘날 복음은 공적 영역에서 진리로 인정받지 못하고 교회 내부와 개인의 주관으로 진리의 영역이 축소되고 사유화되었다. 그 이유는 지난 몇 세기 동안 있엇던 기독교 내부의 역사적 오류에 대한 반성, 그리고 합리적 이성이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가 독선적이라는 세상의 비판으로 인해 교회가 복음에 대한 확신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1 과연 복음은 교회와 개인을 넘어서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한 공적 진리일 수 있는가? 진리는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는게 오늘날의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가 되었다.2 이러한 타당성 구조에 의하면 복음은 교회라는 특정한 영역에서만 진리로 통할 수 있는 사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합리적 이성은 진리를 진리되게 하는 타당성 구조로 적당한가? 합리적 이성 역사 믿음에서 출발하고 믿음은 이성을 소유한다는 점에서 인간 이성은 객관적 진리를 위한 타당성 구조로 적합하지 못하다. 이는 유한한 인간의 능력인 이성을 진리의 최종 판단자로 우상화한 것이다.3 나는 유한한 인간 내부에 내재하는 합리적 이성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인간 외부에서 계시하시는 복음이야말로 객관적 진리의 표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이 공적인 진리로 기능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복음을 타당성 구조로 삼는 공동체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 세상은 복음이 제시하는 사회의 기준에 일치하는 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면도 있는데 사회가 복음의 기준에 일치하지 않을 경우 교회는 이에 맞서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신정국가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복음을 강압이나 힘을 통해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교회가 약자이며 소수자일 때 복음은 더 큰 힘을 발휘했다. 교회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지배하게 하는 기독교 승리주의는 대안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세상의 종이 되서 세상을 섬김으로써 교회는 진정한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4
현대 세계에서 다원주의는 지배적인 가설이 되었다. 폴 니터를 비롯한 다원주의자들의 기본적인 가정은 인류의 하나됨이 절박히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특정한 종교적 전통이 인류가 하나됨의 구심점을 제공할 수 없다는 확신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은 교회가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상황이고 그래서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체계화가 요청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한 세계도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곳이었다. 종교다원주의 문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우리 세대에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나는 종교 다원주의는 문화적 붕괴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한 분이 아니라 많은 수의 하나님의 있으며 궁극적인 실재라는 것도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물이든 상호 일관성 없이 행동하는 것이라면 인류의 하나됨에 무슨 희망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기독교의 유일성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노아언약을 들어 그들의 주장을 편다. 그러나 성경 이야기에서 두 가지 요소, 즉 선택받은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를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말하는 주석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모든 인간에 대한 그 분의 목적은 아주 처음부터 끝까지 기본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목적은 선택을 통하여 성취된다. 즉 모든 사람을 축복하기 위하여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신적인 목적의 두 가지 차원, 즉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모두가 성경 전체를 관통하면서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대립적인 것으로 본다면 둘 다를 오해하는 것이다.
폴 니터와 존 힉은 자신들이 편집한 "기독교 유일성의 신화"에서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다원주의로 나아가는 단호한 이동을 주장했다.존 힉이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묘사했던 이런 이동은 실재에 대한 그리스도 중심적 견해에서 신 중심적 견해로의 이동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렇게 진일보한 이동은 구원중심적인 것으로 기술된다. 즉 중심을 구원에 대한 보편적 추구로 둔다. 그러나 이런 이동은 코페르니쿠스적인 것과는 정반대가 된다. 오히려 그것은 자아 밖에 있던 중심점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나가면서 자아를 유일한 중심점으로 삼는 이동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을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실재로부터 종교적 경험에 대한 관심으로 전화시키는 이동을 좀 더 발전시킨 것으로서 신학을 인간학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구원중심적 견해는 실재를 자아의 욕망에 종이 되게 만든다. 그것은 인격적인 실재이신 하나님이 자아에게 응답을 요구하는 부르심을 가지고 말을 걸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것은 확실히 소비 사회의 산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우리를 점점 멀어지게 만들고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현대의 사고와 감정의 흐름에 대항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진리는 교리도 세계관도 종교적 체험도 아니며 또한 정의나 사랑과 같은 추상명사들을 되뇌임으로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인격적이고 구체적이며 역사적이다. 하나님은 바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화목하게 하신다.
근대 서구문화가 종교적인 일과 세속적인 일 사이에 그어 놓은 날카로운 경계선은 그 문화를 접해 본 적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유일한 자기 계시라는 주장이 세계 종교와의 관계에서 갖는 함의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 이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기독교와 타종교에 대한 논쟁은 대개 종교란 인간이 신적인 존재를 접촉하는 주된 매개체라는 무언의 가정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가정 자체를 의문시해야 한다. 우리의 사고를 종교적이라고 불리는 것에만 기울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복음이 다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과 어떤 관련성을 갖는지 질문해야 한다. 나는 예수를 주와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영원히 버림받을 것이라는 배타주의적 견해를 거부한다. 칼 라너는 이런 배타주의를 거부하면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인정하지만구원의 역사는 가시적인 교회의 영역 너머 타종교에까지 미친다는 포괄주의를 주장한다.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개념은 널리 수용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타종교도 그 자체로 구원의 도구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견해는 널리 받아들여졌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며 그분은 모든 피조물과 인간에게 무한한 사랑의 원천이 되신다는 실재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종류의 신조를 가진 사람이든, 자신의 마음과 양심과 이성 속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를 갖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 반응이 희미하고 일정치 않고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에게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타종교에 대한 참된 사고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세상의 심각한 죄 사이의 밀고 당기는 자기장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잘못된 길로 빠져들게 된 것은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주변에서 맴돌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독교와 타종교들에 관계에 대한 논쟁에서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죽어서 어떻게 되는가? 였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며 그것이 중심적인 질문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타종교에 대한 참된 사고에 이를 수 없다. 그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만이 답을 주실 자격을 갖기 때문이다. 한스 큉은 비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 운명에 대한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개신교 신학자들을 가차없이 비판한다. 칼 라너도 타종교 안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기독교 안에서 그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아지며 만일 복음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면 구원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 기독교 신학자들의 의무라고 말한다. 나는 신학자들의 이런 사고방식은 하나님이 하실 최후의 심판을 자신이 미리 아는 것처럼 주장하는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개개 영혼의 사후 운명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은 계속 진행되는 세계 역사 속의 한 행위자와 그 가운데 고난받는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실재로부터 영혼을 추상화시킨다. 우리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그의 삶이라는 전체 이야기에서 분리되어 추상적 영혼으로 이해할수 없음을 주장해야만 한다. 이런 환원주의적 사고는 인간을 단순히 물리적 활동으로 환원하려는 유물론자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오도하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형태의 환원주의를 배격한다면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사후에 이 사람의 영혼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 역사의 일부로서 사람의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종말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구원의 문제를 개인 영혼의 관점에서 제기한다면 그것은 문제를 잘못 제기하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역할과 관련되어야 하고 , 우리가 하나님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문제와 관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종교인의 대화는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개인 영혼의 사후 운명에 관한 문제 제기는 궁극적인 행복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개개인의 필요에서 시작된 것이지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타종교와 세속적 이데올로기들을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토론하면서 누가 결국 구원을 받는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다면 그것은 삼천포로 빠지는 꼴이 된다. 그런 질문에는 하나님만이 답을 주실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위대한 역사에서 시작하여 어떻게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비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에서 우리가 할 첫 번째 일은 그들의 삶속에서 참 빛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그림자를 찾아내고 그것을 반기는 일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발견되는 경건함이나 고상함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런 태도는 지극히 잘못된 것이다. 더구나 복음을 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들의 감추어진 죄를 샅샅이 찾아내야 하고 그들의 선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받는 선결조건으로 아무 효력이 없다는 생각은 더욱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와 맥을 같이 하는 모든 사업에서 비그리스도인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중심은 우리의 삶의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가 성경의 이야기 안에서 알려진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성경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맡게 될 역할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인간 삶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비그리스도도인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그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이렇게 우리가 세상의 일에 헌신함으로써 진정한 대화의 환경이 조성된다. 우리는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들과 길이 갈라지는 곳이 어느 지점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바로 그 지점이 실제적인 대화가 시작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은 단지 종교적인 체험을 나누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 역사의 의미와 목표점에 대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지점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에게 예수 이야기와 성경 이야기를 말해줌으로써 그 대화에 본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그 이야기 자체가 바울이 말한대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아 그 이야기를 하도록 택함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역할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이이 아니다.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에 대한 입장은 존 힉과 핸드릭 크래머, 칼 라너로 각각 대표되는 다원주의, 배타주의, 포괄주의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가 유일한 진리임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배타주의지만 비그리스도인들의 구원 가능성을 부인하는 의미에서는 배타주의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교회에 속한 구성원에 한정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포괄주의지만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가 구원의 전달수단이 될 수 있다고 간주하는 포괄주의는 거부한다. 나는 모든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다원주의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다원주의는 배격한다. 다원주의와 포괄주의는 인류의 하나됨에 대한 절대적인 필요에서 시작된 제안이다. 물론 우리는 분명히 이런 필요를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필요에 대한 인식이 그 필요를 채워주는 방법에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며 이런 인식이 종교가 하나됨을 성취하도록 도와주는 수단이라는 주장에 정당성을 주는 것도 아니다.
각주 1
동일한 맥락에서 마틴 로이즈 존스는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이란 책에서 우리 시대의 "변증의 과잉"을 지적한다. 그는 세상의 비판에 주눅든 교회가 변증에 지나친 에너지를 쏟는 바람에 정작 복음이 선포되지 못하는 상황을 비판한다.
각주 2
타당성 구조는 한 개인 혹은 집단이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는 권위의 근거를 의미한다. 이 개념은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피터 버거가 처음 사용하였으나 훗날 레슬리 뉴비긴이 이 개념을 자신의 선교신학을 서술하는 핵심 개념으로 차용하였다.
각주 3
이와 관련해서는 네델란드의 개혁주의 철학자 헤르만 도예베르트의 "이론적 사유의 신 비판"이란 책에 핵심을 찌르는 논의가 담겨 있다. 이 책에서 도예베르트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철학을 내재 철학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초월적 비판을 수행한다.
각주 4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은 복음의 이러한 역설을 잘 묘사하고 있다. 요더는 연약함의 힘., 무능력의 능력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 동일한 맥락에서 마틴 로이즈 존스는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이란 책에서 우리 시대의 "변증의 과잉"을 지적한다. 그는 세상의 비판에 주눅든 교회가 변증에 지나친 에너지를 쏟는 바람에 정작 복음이 선포되지 못하는 상황을 비판한다. [본문으로]
- 타당성 구조는 한 개인 혹은 집단이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는 권위의 근거를 의미한다. 이 개념은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피터 버거가 처음 사용하였으나 훗날 레슬리 뉴비긴이 이 개념을 자신의 선교신학을 서술하는 핵심 개념으로 차용하였다. [본문으로]
- 이와 관련해서는 네델란드의 개혁주의 철학자 헤르만 도예베르트의 "이론적 사유의 신 비판"이란 책에 핵심을 찌르는 논의가 담겨 있다. 이 책에서 도예베르트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철학을 내재 철학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초월적 비판을 수행한다. [본문으로]
-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은 복음의 이러한 역설을 잘 묘사하고 있다. 요더는 연약함의 힘., 무능력의 능력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레슬리 뉴비긴
3장 아는 것과 믿는 것
우리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믿음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만 다원주의적이고 사실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다원주의적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과 사실을 절대적으로 구분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미국 대법원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을 가르치는 것을 불법으로 판결하였는데 이는 과학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종교는 몇몇 사람들이 믿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법원 판결은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경계를 긋는 일에 따라 좌우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 대부분의 인간 역사 기간 동안에 사람들은 모든 지식이 하나라고 생각했으며, 신학도 천문학이나 역사처럼 인단 지식의 일부분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어떻게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지게 되었는가?
지난 300년의 유럽 역사 가운데 체계적인 회의론이 등장했다. 진리로 생각되는 모든 것은 새롭게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오랜 전통과 교리들은 비판적 의심으로 진위여부를 심판받아야 했다. 이런 운동의 위대한 개척자가 바로 데카르트다. 그는 어떤 합리적인 사람도 의심할 수 없는 지식의 확고한 토대를 열정적으로 찾으려 했다. 그는 수학에서는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분명하고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일관된 방식으로 지식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는 이미 굉장한 믿음의 행위가 들어있다. 우리가 어떻게 오류 없음을 완전히 보장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을 의심할 수 없는 증거라고 인정한다 해도, 그것은 생각하는 자아가 외부의 어떤 실재와 아무런 접촉도 하지 않았을 때만 성립되는 것이다. “분명하고 뚜렷한 개념”이란 대목도 철저한 검토가 필요하다. 분명하고 뚜렷한 시각적 형상은 말로 기술하지 않아도 이해가 되지만 개념이란 상호간에 통용되기 위해서 반드시 단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단어는 모든 언어의 한 부분일 때만 유용하고, 모든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파악해서 질서를 부여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더군다나 단어의 완벽한 의미는 그 언어가 형성된 문화에 의존한다.
버트란드 러셀은 과학적인 법칙에 도달하는 데는 세 가지 단계가 있는데, 첫째는 의미 있는 사실들을 관철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사실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가정에 도달하는 것이고 셋째는 이런 가정에서부터 관찰에 이해 검증될 수 있는 결과들을 추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의미 있는 사실들”이 어떤 점에서 의미 있는 것인지 물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늘 수많은 사실들이 있다. 그중 어떤 것이 의미 있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두느냐에 있다. 가정을 만드는데도 따로 법칙이 없다. 그것은 오히려 직관과 상상의 문제다. 실험에 의한 가정의 검증도 과학자들이 실제로 연구하는 방식에 관한 지나친 단순화가 있다. 참된 가정은 예견치 못한 온갖 종류의 상태에서도 사실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고 과학자들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입장에서 그것을 시험해 봐야 한다. 우리는 결론적으로 러셀의 설명은 과학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공정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해에 이르는 길이 하나는 지식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두 갈래의 길로 나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믿는 것 없이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믿는 것은 앎으로 가기 위한 길이다. 보편적인 의심을 통한 확실성의 추구는 막다른 골목과 같다. 보편적인 의심의 방법, 즉 모든 믿음은 증거와 의심할 수 없는 논증에 의해 옳다는 것이 입증될 때까지 의심해야 한다는 제안은 결국 보편적 허무주의로 가게 된다.
우리는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 항상 사용하는 수단으로 단어들을 사용한다. 단어들이 실재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경험에 의해서 형성된 언어의 한 부분으로서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 단어를 쓰고 있는 동안에는 실재와의 접촉을 위해 그 단어에 의지하여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였던 일련의 관념들과 분리시켜 놓는다면 그 단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어, 언어, 관념, 즉 우리가 사용하는 동안 무비판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모든 도구를 가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대개 문화라고 부르는 좀 더 광범위한 실재의 일부다. 우리는 보통 그것을 그저 당연하게 여기며 의식하지 않는다. 안경의 렌즈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우리가 보는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 관해 분명한 사실은 그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일도 아니도 그렇다고 실패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이런 주장들이 안다는 것과 연관된 대략적이나마 사실적인 것들이라면 어떻게 우리 문화에서 사실적 지식이라고 주장되는 것, 즉 모든 사람이 수용하리라 기대되는 공적인 진리와 누구나 자신의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믿음과 가치의 세계와의 이분법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대답하기 곤란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가정들에 대해 반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 쓰고 있는 안경을 벗고 새로운 안경을 쓰고 세계를 바라보라는 주문을 받고 있다. 수세기 동안 유럽인들은 세계를 창조자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존재의 중요성을 가지는 통일된 우주로 보았다. 그러나 지난 300년 동안 아주 다른 우주관이 점차 사회 전반적으로 기반을 넓혀갔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적인 생활에서 사용하는 새로운 안경을 제공했고 이 안경은 우리에게 사물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를 가져다주었다. 이 새로운 우주관에 의하면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수학적으로 계산이 가능한 상호 연관된 구성물로 이해될 수 있다면 그것은 “설명”된 것이다. 사물은 목적에 의해 설명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목적은 사람의 믿음과 가치관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그 원인, 즉 무엇이 그것을 발생케 하는가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우리 문화의 중심적인 지적 추진력은 모든 것을 물리의 기본적 법칙에 의해 이해하려는 이런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해된 세계는 소위 “사실”이라고 불리는 세계다. 이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고 모든 사람이 배울 필요가 있는 세계다. 그것은 인과법칙이 적용되는 폐쇄된 세계이고, 목적을 설명의 범주에서 제외시킨 세계이고, 그래서 그 안에는 가치 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사실의 세계다. 그러나 금세기 과학의 발전은 이런 세계에 대하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소립자 물리학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소위 물질이라는 것의 궁극적인 요소는 물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양자물리학의 발전은 고전 물리학에서 볼 수 있는 바, 관찰하는 주체를 제외시킨 우주란 것은 진정한 모습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물리학에서의 이런 발전들은 인간의 침투의 궁극적 한계에 대한 천문학의 발전과 더불어 금세기를 지배하던 우주관을 확실히 변화시켜 놓았다. 그러나 아직 일반대중들의 사고에 이런 광범위한 변화가 흡수되지는 않았고 대부분 보통 사람들은 가치가 개입되지 않은 사실이나 기계적인 우주에 대한 신화를 가지고 산다. 이런 우주관에서는 사실에 대한 이전의 다른 견해에 토대를 둔 인간 행동에 관한 규칙들이 존재론적인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그것들은 단지 가치 즉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일 뿐 사실의 세계의 일부는 아니다. 사실은 가치가 개입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의 세계는 어떤 목적의 산물이 아니라 우연과 인과성이라는 두 가지 요인의 작용에 의한 부수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 세계를 두 세계, 즉 가치가 빠진 사실의 세계와 사실에 토대를 두지 않은 가치의 세계로 양분한 것에 대한 타당성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목적을 빼버린 이런 우주 개념이다.
4장 권위, 자율, 전통
현대 서구 문화에 뚜렷한 자의식을 가져다주었던 18세기의 계몽운동은 어떤 면에서 전통과 권위에 대한 반대운동이었다. 그러므로 현대 과학적 세계관에서 기독교적 신앙을 확인하고 변론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이런 계몽운동이 전통과 권위에 대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주어야 한다. 이제 계몽운동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기독교의 믿음에 관한 진술인 경우에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 사회영역에서 신학자들의 말은 개인적인 의견으로만 수렴되고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즉 그런 의견을 주장하는 권리는 인정하나 공적인 진리나 물리학자들의 진술과 같은 의미로의 사실에 근거한 지식, 곧 공적 진리의 반열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그들의 말을 공적이고 사실적이며 객관적 진리로 주장할 수 있을까?
요즘에는 아이의 자유와 자율만을 전적으로 강조하고 아이의 마음에 종교적 진리에 관한 특정 견해를 주지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강력하게 비난받는다. 이이들은 어떤 진리주장에 대해 비판적인 능력을 사용도록 교육을 받아야 하며 이전의 진리개념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는 새로운 사실에 대해 개방적인 되도록 교육을 받아야 한다. 종교적 배움에 대한 이런 접근법은 과학교육에 대한 접근법과 명백하게 대조된다. 과학교육에서 학생들이 믿는 것은 그것을 사실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것을 정말로 이해하고 사실임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논리적 주장의 문제를 넘어선 일종의 직관에 가깝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전거를 배우는 단계에서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전거를 타는 지식이 내면화될 때까지 우리는 자전거를 타는 전통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수학이나 과학을 배우는 것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마이클 폴래니가 말했듯이 과학의 권위는 본질적으로 전통적이다.
폴래니의 말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과학에 대해 이해하는 것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과학의 승리는 권위를 관찰과 유추로 대체시킨 것에 기인한다는 러셀의 말은 대중적으로 이해되는 과학의 의미를 잘 반영한다. 그러나 전통의 권위가 과학적 진리 탐구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가정은 기본적으로 잘못이다. 과학에서도 먼저 전통의 권위에 오랫동안 순복한 다음에야 비로소 아직 미해결되었을 뿐 아니라 독창적 연구를 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대열에서서 연구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다. 이론을 사실로 주장하는 것은 우주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의 행위다. 따라서 먼저 정당화는 믿음에 의해 가능하다. 믿고 난 다음에 그 부수적인 결과로 그것이 실제로 효과가 있기 때문에 정당화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과학적인 전통, 즉 많은 개념과 자료의 분류, 과학의 도구가 되는 이론적인 모델들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전통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연구를 위해 이런 전통 속에 있어야만 한다. 그런 지속적인 전통이 없다면 과학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어떤 역사적 순간에서는 전통의 어떤 부분이 비판적으로 검토될 수도 있고 대안이 제시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비판적 검토도 전체적으로 볼 때 전통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전통의 권위는 대체적으로 과학자 공동체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이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전통의 권위를 자유롭게 수용함으로써 결속된다. 과학은 이런 전통에 대한 주의 깊은 보호 없이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혁신은 전통을 이미 섭렵하고 있는 사람만이 책임감 있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새롭게 주장되는 사실도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한 믿음을 불신케 할 만큼 충분하지는 않다. 이런 전통의 권위는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가? 분명히 그 자체 외에 어떤 것에도 의존하고 있지 않다. 모든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시각과 마찬가지로 과학도 어쩔 수 없이 순환논법에 연루된다. 시작부터 그것이 증명하려고 하는 것의 진실성을 가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우주는 이성적인 이해로 접근이 가능한 것이라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전통의 유지는 과학자 상호간의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어떤 과학자도 과학의 전체 지식 중 극히 일부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데카르트 이래로 개인적인 위험도 걸 필요가 없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어떤 종류의 진리가 있다는 생각에 우리가 현혹된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기독교 전통의 권위와 관련하여 이런 현혹에 두 가지 형태가(서로 연관된)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성서적 근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주의”다. 성서적 근본주의는 성경본문만을 고수하면 실수할 위험에서 해방되며, 스스로 진리를 분별하는 일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함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과학주의는 과학은 아무런 개인적인 결정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복사이고 “객관적”이기 때문에 모든 주관적인 편견에서 자유로운 지식의 종류라고 생각한다.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기독 신앙인은 전통 안에 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전통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쓰이는 모델과 관념이 되므로 그는 그것을 내면화하고 그것들 안에 거해야 한다. 신앙은 나의 개인적인 의견으로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진리로 간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공적으로 확인되어야 하고 인종과 교리와 문화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알려져야 한다.
5장 이성, 계시, 경험
이성과 계시는 기독교 신앙의 원천과 기준에 관한 오랜 논쟁의 전통에서 두 개의 대립되는 원칙으로 나타나고 있다. 18세기는 기독교가 계시에 의지하지 않고도 이성의 한계 내에서 수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던 시기였다. 성공회는 성경과 전통 그리고 이성을 교회신앙의 세 가지 원천과 기준으로 인정했다. 우리가 믿음에 대한 확고한 토대를 찾으려 한다면 이 세 가지 요소들 사이의 적당한 역할과 상호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전통은 성경에서 분리된 독자적은 계시의 원천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시대를 거쳐 오면서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표현하여 애쓰는 교회의 지속적인 활동이다. 또한 이성을 마치 성경, 전통과 더불어 참된 지식의 세 번째 원천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누구도 이성의 사용 없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없지만 이성도 공통된 이해를 구현하는 언어를 지닌 공동체의 전통 밖에서는 작동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성을 제3의 진리의 원천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곧 현재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가 작동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에서도 모든 논거의 사용이 전통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유형화된다. 가장 분명한 점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논거를 할 수 없는데 언어는 공동체가 자신의 경험을 일관성 있게 납득할 수 있는 방식을 유형화시킨다. 우리는 선진들의 경험, 발견, 논쟁 같은 것을 조사하면서 논거능력을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논거의 전통은 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전통 안에 사는 자들의 노력, 즉 무엇이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지에 관해 말하고자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또한 전통의 발달은 그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변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합리성의 전통은 단지 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수용하는 합리성은 공동체 전체의 삶의 일부이고 그 안에서 유형화되어 만들어진다. 물론 이런 식으로 합리적 능력의 사용을 이해하는 것은 완전한 상대주의로 귀착된다는 반대가 있을 수도 있다. 만일 모든 합리성이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응하면서 특정한 언어를 사용하는 특정한 공동체의 논거 능력의 발휘라면 우리에게 보편적인 진리란 없는 것인가?
나는 이런 반대에 대한 대응으로 다음 세 가지 사고의 맥락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로 모든 합리적 담론의 전통은 경험을 이해하려는 노력 가운데 계속해서 변화하며 그것은 현재의 지배적 전통에 도전하며 사물을 보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으킨다. 이는 모든 합리적 사고가 사회적 전통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전통이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진리는 전통 안에서 파악되며 그 안에서만 파악될 수 있지만 전통은 오직 그것이 전통의 추종자들을 진리로 이끌 수 있는 능력에 따라 판단된다. 둘째, 만일 어떤 상대주의자가 모든 논거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유형화되기 때문에 진리를 안다는 어떤 주장도 지지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의 주장은 결국 실재에 대해 그들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말이다. 즉 실재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주장이다. 매킨타이어는 이런 주장이 형성된 사회적인 맥락은 바로 개인들이 뿌리가 없이 존재하는, 즉 확고하고 안정된 전통이 없는 사는 세계화된 사회라고 말한다. 현대의 범세계적 문화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과 믿음을 이분하는 지배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이란 모든 신앙체계를 상대화시키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화에서 이성이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기독교 신앙의 전통과 대치될 때 일어나는 사실은 분명히 “타당성 구조”가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비추어서 현재의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를 상대화시킬 것이다. 경쟁 관계에 있는 이 두장에 대해 공평하게 심판 역할을 할 만한 유형화되지 않은 이성이란 없다. 지금까지 논의의 결론은 이성과 전통이 독립적인 혹은 경쟁적인 진리의 기준으로 대립될 때, 이성의 본질이 오해된다는 것이다. 모든 이성의 사용은 사회적, 언어적 전통에 의존한다. 그리고 그런 전통에는 불확정적이고 우연적인 성격의 모든 역사적 사건이 들어있다. 역사적 전통 안에서 발견되지 않은 “이성의 진리”란 없다.
기독교 신학의 바탕은 성경 기록의 주제가 되는 역사적 사건들에서 나온다. 이것은 한 특정 인간 공동체의 활동이며 이런 사건들의 참여자가 되고 증인이 된 공동체의 활동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 공동체들 중 한 공동체로서 교회가 가지는 특수성이 교회가 합리적 활동을 통해 만들어 내는 보편적 주장을 무효화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자명한 진리“라고 부르는 것은 합리적인 논쟁의 출발점이 아니라 오랜 합리적 논쟁의 역사적 산물이다 그렇다면 이성은 분명히 계속되는 사회적 전통의 영역 밖에서는 작용하지 않는다. 사회적 전통이란 전통을 이끌어가는 공동체의 지속적인 경험과 무관한 순수하고 이지적인 활동으로 이해될 수 없다. 상황 신학자들은 신학이란 여러 세대를 거쳐서 성경과 교리 안에서 물려 내려오는 영원한 진리의 문제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신학은 공리들과 같은 교의적 진술로 시작하여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한 주장을 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 지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학에 대한 이런 접근은 특히 경험주의 전통이 강한 영국에서 동의를 얻고 있다. 그러나 ”사실“이란 것은 언제나 이론을 수반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의 전통에 의해 형성된 관념적 틀에 의존되어 있다. 단지 있는 그대로의 감각된, 해석되지 않은 자료로서의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말했듯이 그리스도인 공동체란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에 참여하는 사람들로서, 또는 그 사건들에 대한 증인으로서 그들에게 드러나 보였던 것으로 말미암는 합리성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런 유의 드러나 보인 것과 과학적 발견 속에서 새로운 시각의 탄생을 알리는 상상력에 바탕을 둔 도약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닮은꼴이 있다. 틀림없이 과학 연구에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들과 종교 이야기에서의 계시의 순간에는 유사점이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 과학은 이성을 통한 발견에 대해 말하지만 종교는 계시에 대해 말한다. 물론 계시라는 단어의 사용이 이성을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케플러가 전체의 움직임에서 새로운 유형을 발견한 것이나 모세에게 개인적인 소명이 드러나 보인 것이나 모두 논법의 전통에서는 새로운 출발이다. 모세의 경험을 시작으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로 이어져 온 합리적 전통이 있으며, 이런 전통에도 이성이 케플러의 발견으로 발달되어 온 사고의 전통 못지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두 전통의 차이는 하나는 이성에 의지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계시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차이는 바로 처음의 경험을 표현하는 두 가지 방식, 즉 하나는 “나는 발견했다.” 이고 다른 하나는“하나님이 말씀하셨다.”이다. 이 차이점은 이성의 사용이냐 이성의 포기냐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의 차이다. 하나는 자아가 최고의 위치에 있고, 다른 하나는 다름 사람과의 상호관계 안에서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해왔던 전통적인 이분법, 즉 이성과 계시의 구분은 심각한 오해에 기초한 것임이 명백하다. 핵심은 문제를 보는 두 가지 다른 관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의 모든 경험의 배후에 궁극적인 실재가 어떤 의미에서 인격적이라면, 다시 말해 우리가 궁극적인 실재를 마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단서들을 통해 가장 근접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그런 실재에 대한 개인적 지식은 다른 사람들을 알게 될 때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와 그것”의 세계에 적합한 지식을 얻는 방식으로도 알 수 있는 지식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알고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다른 사람에 대해 가지는 지식 사이에는 근본적인 단절이 있다. 진정한 개인적인 지식이 가능해지는 것은 자율적인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주장, 즉 말과 행동에 나타나는 그 사람의 자아 전달 없이도 다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나의 주장을 포기할 때이다. 이는 내가 그 사람을 조사하던 것을 멈추고 그의 말에 귀기울여주고 질문을 받아주고 믿어주는 모델을 감행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연신학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시작으로 하는 신학에는 결코 한 걸움도 다가설 수 없고 그것은 사실 정반대의 방향으로 갈 가망이 높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님이 자신을 정말로 계시해 오셨으며 지금도 계시하고 계신다는 사실 가운데 실현되어 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들을 깨닫게 되고, 창조된 세상에서 매일의 삶을 경험하면서 일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고 진리의 원천과 기준으로서 이성과 계시사이에 대치되는 것이 없다. 만일 대치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이성이 사용되는 두 가지 방식 사이의 대치다. 이성을 계시와 대치하는 것으로 놓을 때, 논쟁에 쓰이는 용어가 근본적으로 혼동된다. 실제로는 이성이 불합리한 것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합리적 주장의 전통이 신적인 자기 계시의 순간을 그 출발점으로 잡는 또 다른 합리적 주장의 전통과 대치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성과 계시 사이에 선이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합리적 전통 사이의 대화에 선이 그어지게 된 것이다.
기독교의 합리적 전통은 출발점을 어떤 자명한 진리에서 찾지 않는다. 그 출발점은 하나님이 특별한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신 사건이다. 이런 계시들은 항상 특별한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에게 그 상황에 적합한 구체적인 응답을 요구했다. 이런 부름과 도전에 응답했던 공동체는 계속해서 진행되는 역사의 변화하는 상황들을 분별하고 이에 대처해야만 했다. 처음 주어진 계시는 새로운 상황들에 비추어 계속적으로 재 이해되어야 했고 재해석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 새로운 경험에 맞는 일관성과 의미를 제공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관한 검증을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전통은 계속 진행되는 새로운 경험에 대처해 가는 투쟁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형성되고 재 충당된다. 현재 있는 모든 전통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항상 해체될 가능성을 가지고 위협을 받는다.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적인 정열과 실제적인 용기에 의해 지탱되어야 하지만 그들은 과거의 형식만을 되풀이해서는 안 되며 새로운 경험에 비추어 전통을 용감하게 재 진술함으로써 그 전통에 충실을 기해야 한다. 그것은 보편적인 주장을 하며, 보편적 타당성을 주장하는 다른 경쟁관계에 있는 합리적 주장의 전통과 공존한다. 그리고 이런 경쟁적인 주장들의 유효성에 대해 판결을 내릴 만한 중립적인 재판석은 없다. 이미 언급했듯이 사회적으로 유형화된 모든 합리적 전통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으면서, 다른 모든 전통들을 판단할 수 있는 형태의 합리성이란 없다. 보편적 판단을 옹호하는 입장은 “계시된 모든 진리”에 대한 주장이 이성적 규범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회적으로 구체화된 합리적 논쟁의 전통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이성의 규범이란 없다. 이런 보편성의 주장은 소위 “근대화”라는 기준으로 전 세계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문화에 의해 좀 더 타당성을 가지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타당성 구조”를 제공하고 있다.
성경적 전통에 의해 형성되었던 유럽 사회의 타당성 구조, 즉 하나님의 존재는 자명한 진리 중 하나였기에 아무런 의식적 결정 없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던 오래 과거의 기간과는 달리 이제 우리는 그런 믿음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즉시 주관적이라는 비난에 직면하게 되며 기독교 전통을 고수하는 것 또한 하나의 개인적 취향의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말이 암시하는 것은 우리가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고 다시 상대주의적인 몽롱한 상태로 되돌아 왔다는 것이다.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가 견고하게 확립된 단 하나의 진리는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 대한 그분의 목적을 계시하시고 성취하시기 위해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역사하셨고, 지금도 역사하신다는 그리스도인의 주장을 거부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적 전통 안에서 살려고 노력하지만 동시에 내가 속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모든 시간을 다른 전통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속에 살면서 그들과 삶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이 자명하다고 부르는 것이 나에겐 자명하지 않고 이와 반대로 내게 자명한 것이 그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내가 기독교 전통에 참여하는 것이 사고와 실행에 있어 건강하고 활력이 있는 한 나는 다른 전통과의 외적인 대화를 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 최종결정을 위해 호소할 수 있는 양축 모두보다 우위에 있는 외적인 기준이란 없다. 지금 당장의 결론은 두 가지 전통의 활력과 완전성을 비교하는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결론은 홀로 재판장이 되시는 분이 판결을 내리는 종말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끝)
13장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나니
1. 종교다원주의는 현대사회의 지배적인 가설이다. 그런 사회에서 어느 한 종교가 자신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인류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며 이런 배타적인 주장은 지난 세월동안 교회가 해온 주장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다. 더구나 오늘날의 다신앙적, 다문화적, 다민족적 세상에서 인간 역사 속에 있는 무한한 다원성과 상대성 가운데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당치 않게 보인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오늘날의 다원적 세상은 교회가 이전에는 전혀 겪어보지 못했던 근본적이고 새로운 상황이고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기독교 신앙의 체계화가 요청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한 세계도 종교적으로 다원적이었기에 종교 다원주의의 문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오늘날 우리 세대에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점점 더 상호의존적인 구조로 변해가는 지구촌 사회에 속해 있으며 그래서 인류의 하나됨이라는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한 집단이 모든 사람에게 진리인 것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잠재적으로 재앙을 몰고 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고든 코프만은 근대역사 인식은 우리에게 기독교의 유일성에 대한 주장을 포기할 것과 인간 역사에 대한 성경적 시각은 다른 모든 인간적 시각과 마찬가지로 문화에 의해 결정됨을 인정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근대 역사 연구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 사는 민족들이 문화에 의해 제약을 받는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지만 근대 역사 인식이 세상사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는 특권적인 관점을 가진다는 상상은 근거 없는 독단적 견해이다. 코프먼의 종교 신학은 최종적으로 그것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그것보다 더 궁극적인 신앙적 헌신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과 유사하다. 그것은 바로 근대 역사 인식의 정당성에 대한 신앙적 헌신일 뿐이다.
3. 종교다원주의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투쟁을 포기해 버린 문화적 붕괴의 전형적인 사례다. 이런 붕괴는 우리 문화의 한쪽 특징일 뿐, 과학세계에서는 사물의 일관된 합리성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적이 없다. 예를 들면 물리학은 상대성과 양자이론을 통합할 수 있는 통일된 이론을 찾는 연구를 멈추지 않는다. 만일 한분이 아니라 많은 수의 하나님이 있으며 궁극적 실재도 상호일관성이 없다면 인류의 하나됨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랭돈 길키는 어떤 종교가 유일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압적이 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어떤 공동체가 절대적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거기다 권력까지 장악하게 되면 억압적으로 되는 것은 사실이고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그렇게 잘못 이해되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 의 주장은 그런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진리가 예수 안에서 인간 문화의 상대성 가운데로 임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진리는 지배나 제국주의적 권력의 형태가 아니라 권력을 가지지 않은 형태, 오히려 연약함과 고난 가운데 드러나 보이는 권력의 형태를 취한다. 물론 이런 형태들은 항상 잠정적이고 사람들의 죄와 잘못으로 인해 결점을 갖지만 그것들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최초의 증인들의 비판적인 제제를 받는 한 항상 개혁될 수 있다.
4.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의 유일성을 긍정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되는 모든 문화의 교만에 대항하는 지속적인 보루다. 예수를 유일하신 구세주요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교만이라는 비난은 사실상 그런 신앙을 “근대 역사 인식”이 폐기해 버릴 것이라고 추정하던 사람들에게 돌려져야 한다. 성경 이야기를 선택받은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로 보는 해석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모든 인간에 대한 그분의 목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본으로서 존재한다. 그 목적이 선택을 통하여 성취된다. 즉 모든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 어느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 신적인 목적의 두 가지 차원, 즉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모두가 성경 전체를 관통하면서 나타난다. 이 두 가지를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본다면 둘 다를 오해하는 것이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주권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들고 종교 다원주의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현대의 사고와 감정의 흐름에 대항하는 일은 쉽지 않다. 현대를 지배하는 타당성 구조에 도전장을 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 다원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가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또한 당신들은 모든 종교들이 주장하는 절대성을 상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당신들이 절대적인 어떤 입장을 가졌기 때문인가?” 인류가 하나 될 수 있는 진리는 교리도, 세계관도, 종교적 체험도 아니다. 또한 정의나 사랑과 같은 추상명사들을 되뇜으로써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신 진리이며 그 진리는 인격적이고 구체적이며 역사적이다.
14장 복음과 종교
1. 근대 서구 문화가 종교적인 일과 세속적인 일 사이에 그어놓은 날카로운 경계선은 그 문화를 접해 본 적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의 유일한 자기계시라는 주장이 세계종교와의 관계에서 가지는 함의에 대해 생각할 때 종교라고 부르는 것 이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기독교와 세계 종교에 관한 오늘날의 논쟁은 대개 종교란 인간이 신적인 존재를 접촉하는 주된 매개체라는 가정 위에서 이뤄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가정 자체를 의문시해야 한다.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증거를 주시는 증인을 꼭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영역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암시는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를 소위 종교라고 불리는 것에만 기울여서는 안 되며 복음이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다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과 어떤 관련성을 갖는지 질문해야 한다.
2. 우리는 성경적 신앙의 토대 위에서 세계의 주요 종교들이 지위와 역할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위대한 실재, 곧 창조자이시며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그분이 지으신 모든 것과 인간에게 무한한 사랑의 대양이 되신다는 사실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모든 실재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실재는 모든 피조물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인자하심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 또 어떤 종류의 신조를 가지고 있든, 자신의 마음과 양심과 이성 속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그 반응이 희미하고 일정치 않고 오류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의 반응을 일으킨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람들의 심각한 죄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 힘이 작용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항상 양 극단 중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강조함으로써 긴장을 완화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는 전적으로 은혜의 보편성과 전능성에 의지하는 해결안을 택하는 쪽으로 기울어서 보편주의 형태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 경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시는 행위가 모든 사람에서 제기하는 문제의 예리함이 무뎌지고 모든 것이 결국 모두에게 좋게 된다고 낙관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구해낼 수 있는 죄의 심연을 너무나 의식한 나머지 자신이 받은 은혜가 자신의 경험과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 작용할 수 있음을 믿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혹은 그가 고수하는 특정한 모습의 기독교 세계 밖의 사람들을 버림받은 자로 대하게 될 수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진정한 대화란 불가능하다.
4. 우리가 이런 두 가지 위험을 피하려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세상의 심각한 죄라는 두 가지 영적 힘이 서로 밀고 당기는 자기장 같은 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이웃들이 신봉하는 다른 종교에 대한 그들의 헌신이나 신앙, 세계관을 대해야 하는가? 나는 이 문제에 관한 논쟁이 치명적으로 잘못된 길로 빠지는 이유는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라는 단 하나의 질문 주변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착한 사람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라는 이 질문의 의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선하고 유용한 삶을 살면서 사회에서 선하고 유익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 이다. 이것은 기독교와 세계의 종교들에 관한 논쟁에서 거의 이의를 달지 않았던 유일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며 그것이 중심적인 질문으로 남아있는 한 우리는 결코 진리에 이를 수 없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늘 우리에게 올바른 질문을 할 것을 요청한다.
5. 이런 질문이 잘못된 첫째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만이 답을 주실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실 최후의 심판을 자신이 미리 가진 양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판단은 교만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자신도 동참하는 심각한 죄라는 두 개의 전극을 가진 자기장 안에 있기 때문에 경건한 확신과 경건한 두려움이 상응하면서 통합되는 모습을 지닌다. 두려움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외에 다른 것을 신뢰하지 않기 위한 것이고, 확신은 나와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충만함에 대한 것이다. 이 질문이 잘못된 둘째 이유는 그것이 개개 영혼의 사후 운명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계속 진행되는 세계 역사속의 한 행위자와 그 가운데 고난 받는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실재로부터 영혼을 추상화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그의 삶이라는 전체 이야기에서 분리되어 추상적인 영혼으로 이해될 수 없다.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사후에 이 사람의 영혼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 역사의 일부로서 이 사람의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종말은 무엇일까? 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하는 대화는 개인의 영혼의 사후 운명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이런 질문이 잘못된 셋째 이유는 이런 식의 문제제기는 궁극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개개인의 필요에서 시작된 것이지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은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침투해 들어가서 자신의 욕망을 중심으로 살던 그들의 삶을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중심으로 사는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이런 은혜의 위대한 역사를 사유화하면서 마치 우주적인 구원의 이야기인 복음을 개인적인 구원 이야기로 왜곡하고 있다.
5.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그들의 삶속에서 참 빛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그림자를 찾아내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때때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발견되는 고상함을 인정하기를 거절하고, 복음을 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들의 감추어진 죄를 샅샅이 찾아내려 하는데 이는 지극히 잘못된 태도이다. 내가 제시하는 두 번째 접근법은 그리스도인들이 역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와 맥을 같이하는 모든 사업에서 비그리스도인들과 열심히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중심은 우리의 삶의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가 성경의 이야기 안에서 알려진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며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간과 공유하는 인간의 이야기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맡게 될 역할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며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비그리스도인을 고려하지 않고는 그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셋째로 바로 이렇게 우리가 세상의 일에 함께 헌신함으로서 진정한 대화의 환경이 조성된다. 우리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우리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을 발견하게 되고 바로 여기가 실제적인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그 대화의 중심은 인간 역사의 의미와 목표점에 대한 이야기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그 대화에 본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길은 예수의 이야기와 성경 이야기를 그저 말해주는 것이다. 그 이야기 자체가 바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고 부르심을 받아 그 이야기를 위탁받은 무리의 일원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이 그의 몫은 아니다.
6.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존 힉, 핸드릭 크래머, 칼 라너로 대표되는 다원주의, 배타주의, 포괄주의라는 세 가지 입장으로 분류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내가 견지하는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가 유일한 진리임을 긍정한다는 의미에서 배타주의지만 비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는 배타주의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교회 구성원에 한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포괄주의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가 구원의 전달 수단이 될 수 있다고 간주하는 포괄주의는 배격한다. 나는 모든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는 다원주의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유일하고 결정적인 사건을 부인하는 다원주의는 배격한다. 다원주의와 포괄주의에 대한 논쟁은 인류의 하나됨에 대한 절대적 필요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필요에 대한 인식이 그 필요를 채워주는 방법에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고 종교가 인류의 하나됨을 도와주는 수단이라는 주장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반드시 진리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한 인류로서 우리는 같은 여정을 가고 있고 우리는 그 길을 알 필요가 있다. 모든 길이 동일한 산의 정상에 이르는 것이 아니며 절벽으로 이끄는 길도 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길과 목표점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류 가족과 연결되어 있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함께 인생의 순례 길을 가는 모든 사람들과 그 전망을 나누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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