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과학과 신학은 대화해야 하는가? - 김동건
2017-03-25 22:48:10
아래 글은 신학자 김동건 교수가 2008년 출간한 책" 현대신학의 흐름"에서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발췌 요약했다. 이 글이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좋은 통찰을 제공해 주고 있다고 생각되어 여기에 옮겨본다.
1. 계몽주의는 이성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과학의 시대이기도 했다. 계몽주의 시대에 발전되기 시작한 자연과학은 놀랄만큼 빠른 변화를 거듭하여 과학이 그 시대의 정신을 변화시키는 힘이 어느 분야보다도 강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과학과 종교의 분쟁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인물이 갈릴레오일 것이다. 그는 당시에 보편적으로 믿어온 천동설 대신에 지동설을 주장했지만 자신이 발견한 사실에 따라 성서의 진리를 부인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성서와 자연 모두는 하나님에게서 연유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 진리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서의 진리표현과 과학적 진리 표현은 다르기 때문에 전자는 해석이 필요하고 후자는 관찰과 분석을 통한 객관적 논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성서와 과학은 서로 다른 영역을 점유하며 (성서가 제1의 근거이고) 과학은 진리를 위한 제2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당시 교회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1633년 재판을 받고 연금을 당했다. 갈릴레오의 이야기는 약 400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그때 야기된 과학과 신학의 간격은 극복되지 않고 있다. 계몽주의 이후로 자연과학의 각 분야는 각기 큰 발전을 해오며 신학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쳐왔다. 갈릴레오 이후 자연과학은 괄목할만한 발전을 했고, 그만큼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더욱 절실하게 되었다. 천문학과 물리학의 발전은 전통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변화를 가져왔고 생명공학과 뇌과학의 발전은 신학이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던지고 있다. 계몽주의에서 촉발된 과학의 발전은 신학의 패러다임과 주제를 변화시켰다.
2. 바티칸은 1992년에 갈릴레오에 대한 1633년의 종교재판이 과오였음을 인정하며 교황 바오로 2세는 성서와 과학적 진리가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교황청이 이 내용을 인정하는데 왜 400년이나 걸렸을까? 당시 갈릴레오가 주장한 지동설의 심각성은 사실 지동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과학적 학설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갈릴레오는 전혀 성서의 도움없이 관찰과 실험에 의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갈릴레오는 성서와 관계없이 존재하며, 성서와 상관없이 그 자체의 규칙을 가지고 운행되는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그가 주장한 지동설은 바로 그가 발견한 과학적 세계를 웅변적으로 말하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따라서 천동설과 지동설은 두 학설의 대립이 아니라 당시에 교회가 믿어왔던 세계와 과학의 이름으로 발견한 새로운 세계와의 충돌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세계관의 충돌이었다. 성서에 의해 구축된 세계관과 과학에 의해 발견된 세게관이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계몽주의 이후 점차 과학에 의한 세계관이 보편화되면서 대중적 갈등을 겪는다. 두 세계의 충돌이라는 계몽주의 시대에 야기된 문제는 지금도 진행중이다. 지금도 기독교인들은 교회에서 배운 성서의 세계와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의 세계라는 두 세계의 충돌로 인한 심각한 어려움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이 이런 문제에 충분한 답변을 제공해주지 못하면,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갈등을 느끼다가 현실을 지배하는 다양한 세계관과 기독교 신앙의 이원화에 빠지게 된다. 결국 세상에서는 거기에 맞는 가치관에 따라 살고, 기독교 진리는 교회 내에서만 통용된다. 이런 이원적 구조에서는 이 역사와 세상 속에서 생명력있는 기독교적인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
3. 계몽주의의 과학적 발견들은 새로운 진리 체계, 새로운 가치체계,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이것이 기독교가 유지해 온 가치체계와 근본적인 갈등을 일으킨 것이다. 아직도 이 문제를 과학의 발전이라는 단순한 문제로 생각하고, 두 가치의 충돌이라는 깊은 내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계몽시대 이후 성서의 세계와 과학의 세계는 충돌을 일으켰다. 이것은 두 세계관의 대립이었으나, 기독교는 신앙과 과학의 적극적인 대화와 조화를 시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여전히 힘들고 풀어야만 하는 과제로 남아있다. 계몽시대 이후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으며, 이제 현대 신학은 과학과의 대화를 피할 수 없고 과학의 세계가 던진 도전을 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계몽주의 이후 자연과학은 진리에 대한 다른 근거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자연적 방법(natural way)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만물과 사건들을 직접적인 신의 개입이 아니라 정확한 증거에 의해 원인을 찾고 그 자체에서 이유를 찾았다. 이제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기는 쉽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을 이 세상과 우리 삶을 통해 창조주로 체험하고 그를 이 역사의 주권자로 힘차게 고백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된 것이다. 자연과학의 충격은 컸고, 더 이상 전통적인 개념의 하나님이 설 자리가 좁아졌다. 자연적 방법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건과 원인들을 설명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생긴 공백은 너무나 컸다. 모든 사건은 그 자체의 원인과 결과로 다 해석되었고,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영역 외에는 신을 만나고 논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역사성 상실의 문제였다.
4. 계몽주의 이후 과학 혁명의 시대를 거치면서 과학적, 객관적, 과학적 진리, 혹은 객관적 사실이라는 말은 하나의 마술적 단어가 되었다. 이 말은 인간에게 엄청난 매력과 함께 인간의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비과학적이면 이는 객관적이지 못하며, 비객관적인 것은 비현실적이거나 비진리적인 느낌을 주게 되었다. 계몽주의 이후 과학의 발전은 사물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 토대 위에서 결과를 증명하고 또한 검증하는 소위 과학적 연구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자연과학의 이런 연구방법론은 타학문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세기의 역사 실증주의에 깊은 영향을 주고 다시 대중적 사고유형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실증주의 사관은 사실과 과학에 의해 확인된 법칙을 넘어서는 힘이나 실체를 거부하고 과학적 방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방법론을 배격한다. 과학의 발전과 역사학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실증주의적 사고는 과학적 사고를 대중적 현상으로 만들었다. 왜 이런 사고의 유형이 문제가 되는가? 인과율에 바탕을 둔 자연과학적 방법론은 일차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발전되고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이다. 따라서 이 방법은 인간과 인간 혹은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이런 방법론이 인문과학과 역사학에 영향을 미치고 대중적 사고방식에 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도 인식하는 주체와 알려지는 객체라는 "주-객 이원화"에 빠진다. 이 구조 속에서 인간은 항상 신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하고 인식하는 주체가 되고 신은 인간에게 알려지는 객체로서 "그 무엇이" 될 뿐이다. 계몽주의 이후 "주-객 이원화"의 문제는 신학이 풀어야 할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5. 과학적 사고는 인간을 지나치게 사실(fact)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1995년4월 10일 타임지의 표지 기사는 "우리는 아직도 기적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성서의기적을 다루면서 성서의 기적은 사실적 사건이 아니라는 논지를 펼쳤다. 이 기사의 밑바닥에는 어떤 사건이 "사실"이거나 아니면 "허구"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여기서 어떤 사건을 판단하는 범주는 "사실-허구"라는 두 범주뿐이다. 과학적 사고는 사실은 진실이고 사실이 아니면 허구라는 대중적인 사고를 형성했고, 그 결과 우리 시대에는 이런 경향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중심적" 사고는 성서도 문자적으로 보는 경향을 만들었다. "사실-중심적" 사고로 성서를 읽고 취급하는 것이 문제인 이유는 성서의 의미를 문자에 갇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과학의 도전에 대한 신학의 잘못된 대응 중 하나가 과학에 의한 성서의 훼손을 과학으로 막으려는 시도이다. 이런 일은 주로 기독교인 과학자들에 의해 시도되었는데 이들은 성서의 진술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성서의 잘못된 문자주의를 과학주의적 사고와 연관시킨다. 성서를 과학의 도전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성서에서 "사실"을 찾아서 증명하거나, 성서에서 과학적 진술이나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들이다. 사실에 집착하는 시대 정신에 따라서 성서의 진술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성서에 대한 중대한 오해에서 나온 것이다.
6. 성서는 성서만이 가지는 독특한 언어와 표현을 가진다.성서의 언어는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사실적 표현, 문학적 표현, 신화적 표현, 수사적 표현 등 언어의 모든 기능이 다 포함된 진술을 가진다. 당연히 이 성서의 언어를 통해서만 성서가 바로 이해되어 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 언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에게 기록된 텍스트로 주어져있다. 이제 우리는 텍스트를 뜷고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고, 성서의 세계에서 성서의 정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과학적 언어, 과학적 진술 방법으로는 성서의 뜻에 도달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성서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문자에 가둘 위험성이 크다. 또한 성서의 어떤 사건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고 성서가 참이라는 증명이 될 수 없다. 성서의 어떤 내용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면 우리의 신앙이 보증되는가? 성서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성서 진리를 과학으로 판단하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성서의 진리와 신앙은 인간의 과학적 증명 여부에 그 진실이 죄우되지 않는다. 성서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나 이런 논리에 의존하는 것은 결국 성서의 진리를 과학에 의존하게 만든다. 과학으로 성서를 수호하려는 사람들은 사실상 과학에 의존해 성서를 공격하는 부류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성서 진리의 타당성을 과학적 검증 여부에 맡기게 되는 것이다. 계몽주의가 야기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신학에 두 가지과제를 남겼다. 첫째는 성서의 언어와 정신을 충분히 이해하고 회복해야 하는 과제이고, 둘째는 신학과 과학의 대화의 폭을 넓히고 상호 이해를 도모하는 과제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과학주의를 추종하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되고, 또 과학적 결과의 틈새를 노려서 반대 논리를 만드는 것이 되어서도 안된다. 신학은 과학의 주류와 본격적인 대화를 해야 한다. 대화는 인식의 공유에서 부터 세부적인 주제까지 구체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를 통해 인간, 죄, 타락, 신앙, 생명, 윤리, 구원, 죽음, 부활, 창조, 종말 등 기독교의 모든 주제가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신학이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긴 기간 동안 철학과 중요한 연관 속에서 발전했지만 이제 21세기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중요한 시대이다. 이제 신학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학문의 분야는 철학이 아니고 과학이 되었다.
과학과 신앙 그리고 무신론
2017-03-20 17:09:45
1. 신학이 특별계시에 대한 해석이라면 과학은 일반계시인 자연에 대한 해석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책, 성경과 자연을 둘 다 목적에 맞게 적합한 방법으로 읽어야 한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이 성경과 자연이란 두 가지 책을 하나는 특별계시로서, 다른 하나는 일반계시로서 주셨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 두 책의 저자는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이시므로 이 두 책이 갖는 각 계시는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문제는 이 두 책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다. 성경과 자연은 서로 충돌하지 않지만 성경에 대한 해석인 신학과 자연에 대한 해석인 과학은 서로 충돌할 여지가 언제든지 있다. 왜냐하면 그 해석은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학과 과학이 서로 열린 자세로 지속적으로 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 과학은 자연을 읽어내는(해석하는) 과정이다. 과학은 이론과 실험 및 관측을 토대로 가설을 세우고 가설이 맞는지 검증하는 과정을 거친다. 만일 가설에 대한 반증이 나타나면 이론은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설은 경험적 데이타에 대한 해석뿐 아니라 미래의 예측 가능성도 확보해야 한다. 그렇기에 과학이론에서 경험적 증거의 엄밀성과 더불어 과학자 사이의 합의가 매우 중요하게 된다. 새로운 이론과 데이터가 나오면 이론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그래서 과학은 비판적 실재론을 취하게 된다. 과학은 자연세계를 이해하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그 이해는 자연세계에 국한된다. 과학은 중립적이지 무신론이나 유신론의 증거가 아니다.
3. 그렇다면 과학은 창조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과학은 무엇보다도 창조세계의 광대함과 창조의 역동성을 알려준다. 그리고 창조는 대단히 신비롭다는 사실도 알려준다.과학적 발견의 여러 증거들은 창조가 대단히 오래되었고 동시에 그 창조는 어느 시점에 완료된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창조임을 알려준다. 과학은 자연에 대한 유용한 해석이지만 과학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특히 과학과 과학을 사용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인 과학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과학은 바르게만 사용한다면 창조의 역사와 창조주의 지혜를 드러내는 유용한 도구이며 성경의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4. 성경과 과학을 어떻게 균형있게 볼 것인가? 성경의 창조기사는 현대과학과 모순되는가? 우리는 성경과 자연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창조주에 대한 신학적 서술을 목적으로 다양한 신학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비과학적(초과학적)서술들도 내포하고 있다. 이와 달리 과학은 창조역사에 대한 인과적 서술을 목적으로 시간, 순서,방법을 중시하는 비신학적 서술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이 창조주가 누구이시며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서술이라면 과학은 창조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인과적 서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새로운 무신론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과학주의 무신론이다. 리처드 도킨스나 스티븐 호킹 등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인데 이들은 인간은 물질로 부터 만들어진 우연적 존재이고 태초에 신이 아니라 물질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들은 신은 만들어진 개념일 뿐이며 이제 과학의 발전으로 신 개념이 불필요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학주의 무신론이 가진 한계는 물질의 기원이나 자연법칙의 기원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과학주의 무신론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에 기반한 무신론적 세계관이다. 과학과 세계관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과학의 영역에서는 동등한 위치를 가진다. 신앙의 기초는 증거가 아니라 체험이기 때문에 결국 신앙은 주관적 체험일 수 밖에 없고 객관적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다.
6.세계관에 따라서 과학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무신론적 해석은 자연현상이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것이 무신론의 증거로 주장하지만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그것은 무신론이나 유신론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세계관은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 신념체계이다. 이신론적 해석도 있는데 이는 기계론적 우주관으로서 신은 자연세계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유신론은 자연법칙을 신의 섭리로 이해한다. 과학은 자연현상의 기작에 대한 설명일 뿐 세계관의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세계관은 과학적 설명에 대한 해석적 이해다. 과학주의 무신론은 과학을 무신론적 세계관으로 해석하여 신의 창조를 기적의 영역으로 제한한다., 과학과 과학주의를 구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7. 과학은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이고 세계관은 과학에 대한 해석이다. 과학과 세계관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과학은 수용해야 하지만 세계관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 무신론적 세계관과 더불어 이원론적 세계관도 경계해야 한다. 이원론적 세계관은 기적의 영역에 신을 가두려고 한다. 유신론적 세계관은 자연법칙을 통해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초자연적 창조뿐만 아니라 자연적 창조도 인정한다. 과학은 유신론적 해석을 통해 신앙에 기여할 수 있다. 우주에는 6개의 상수들이 있는데, 1)전기력/중력 2) 원자간 결합력 3)우주의 총질량 4) 우주상수 5)은하분리 에너지/중력 7) 우주의 공간적 차원이 그것이다. 이런 우주 상수들을 유신론적 세게관으로 해석할 때 우주는 인류의 존재를 위해 정교하게 조율된(준비된) 시공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과학과 창조론
2017-03-20 18:10:33
1. 유신론적 세계관에 기반한 창조론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다양한 창조론들은 각기 성경의 창조기사에 대한 다양한 이해방식들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1)젊은 지구론은 창조를 약 1만년 전에 이뤄진 것으로 보는데 과학을 성경으로 판단하고 과학에 대한 적대적 해석을 가진 근본주의적 관점에 근거한다. 2)간격이론은 우주는 오래전에 창조되었지만 6일 창조는 약 만년 전에 창조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3)성년창조론은 실제 창조느 만년전에 일어났지만 아주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창조되었다는 주장이고 4) 날- 시대 이론은 6일의 하루를 긴 지질 시대로 해석한다. 5) 오랜 지구론은 우주와 지구의 창조를 장구한 시간으로 보지만 생물 진화는 부정한다. 6) 지적설계론은 우주와 지구 창조를 오래전에 이뤄진 것으로 보고 생물진화의 현상도 인정하지만 진화메커니즘을 부정하고 진화를 초자연적으로 본다. 7) 진화적 창조론은 진화를 포함한 인과적 방법의 창조를 인정한다.
2. 이러한 다양한 창조론이 등장한 배경에는 근대과학의 성립 이후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의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다.18세기 지질학의 발전으로 암석층, 화산활동, 용암층의 관찰 증거들은 젊은 지구론과 모순된다. 19세기 초에 지구의 연대는 최소 수백년만년전이라는 것이 주류의 과학적 견해가 되었다. 20세기 초에는 방사성 동위원소로 지구 연대를 직접 측정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빙하층, 대륙이동 등의 독립적 연구 결과로 오랜 지구연대가 확정되었다. 천문학의 운성 등의 연구 결과는 태양계 형성은 약 50억년 전에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성경의 창조기사를 과학적 발견과 일치시키기 위한 다양한 창조론이 등장하게 된다.
3. 창조기사에 대한 두 가지 해석적 관점은 일치론적 해석과 비일치론적 해석이다. 일치론적 해석이란 창조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순서대로 되었다고 보는 해석이다. 일치론적 해석은 과학발전에 따라 여러 견해가 등장하게 되는데 젊은 지구론, 간격이론, 날 시대 이론, 성년 창조론 등이 그것이다. 일치론적 해석은 성경을 과학적 서술로 보기 때문에 자의적 해석이 불가피하고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이와 달리 비일치론적 해석은 성경을 과학적 텍스트가 아닌 신학텍스트로 간주하여 창세기 1장을 창조에 대한 포괄적 해석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1장의 창조순서는 과학적 서술이 아닌 신학적 서술로 보는 것인데, 골격이론, 은유적 해석, 기능적 창조, 고대근동 우주론, 진화창조론 등이 그것이다.
4. 창조인가? 진화인가?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과학 개념으로서의 진화와 무신론적 세계관으로서의 진화주의를 구별해야 한다. 진화는 생물진화든 우주진화든 자연현상 그 자체로서 시간에 따른 인과적 변화를 의미하며 이것은 과학의 대상으로서의 데이터일 뿐이다. 진화과학(진화이론)은 진화라는 현상에 대한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와 달리 진화주의는 진화가 과학으로 설명된다면 그것은 무신론의 증거라는 주장인데 이것은 과학을 무신론적 세계관으로 해석한 주장이다. 예를 들면 우주팽창이나 우주배경복사와 같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이론이 박뱅우주론이고 화석이나 유전자등에 나타난 자연현상을 설명한 과학이론이 생물진화이론인데, 이 두 가지 과학이론들은 그 자체가 유신론이나 무신론의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유신론이나 혹은 무신론적 세계관으로 해석될 뿐이다.
5. 창조방법에 따라 두 가지 창조론이 나뉘는데 하나는 초자연적 창조론과 자연적 창조론이다. 초자연적 창조론은 창조를 기적적, 즉각적 방법에 국한시키는 견해로서 과학적 이해가 불가능하다. 자연적 창조는 창조가 인과적, 진화적으로 이뤄진다고 보는 견해로서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다. 진화창조론은 창주주가 이 두가지 방법으로 창조하신다고 본다. 일치론적 입장에는 젊은 지구론과 오랜지구론이 있고 비일치론적 입장에는 진화창조론이 있는데 이 세가지 창조론은 모두 창조주를 인정하는 기독교적 견해이다. 다만 이 세가지 입장은 성경 해석에 대한 유연성에 따라서, 과학적 발견의 수용정도에 따라서, 그리고 창조의 방법을 보는 관점에 따라서 견해가 달라진 것이다. 젊은 지구론은 초자연적 창조만을 인정한다. 오랜지구론은 초자연적 창조를 주장하지만 별/태양계와 지구의 경우는 자연적 창조를 인정한다. 이와 달리 진화창조론은 우주의 시작만을 초자연적으로 보고 나머지는 모두 자연적 혹은 초자연적 창조를 모두 인정하는 입장이다.
6. 창조과학자들이 진화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화라는 개념이 성경에 위배되거나 무신론적인가? 진화자체는 시간에 따라 변하는 자연현상을 의미한다. 우주진화는 시간에 따라 우주가 변하는 자연현상이고, 생물진화는 시간에 따라 종이 출현하고 종이 분화하는 현상이다. 그러니 진화라는 자연 현상을 가지고 성경에 위배된다든지 무신론이라든지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진화는 우연히 일어나므로 신의 섭리에 반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과학적 우연이란 그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없다는 의미이지 무목적성과 관계가 없다. 진화의 우연은 과학적 우연이므로 신의 섭리와 충돌한다고 볼 수 없다. 이신론이든 무신론이든 그것은 진화론에 대한 세계관적 해석일 뿐이다. 젊은지구론이 아닌 모든 견해를 진화론(진화주의)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음모론이 아닐 수 없다. 신의 언어를 저술한 프랜시스 콜린스가 보여주듯이 생물진화를 수용하는 크리스천 생물학자들이 얼마든지 있다.
7.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적 설명체계가 없다. 창조과학은 극단적 문자주의를 따라 성경해석이 매우 경직되어 있다. 그래서 창조과학은 성경을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결국 창조과학은 과학을 부정함으로써 창조론을 옹호하려고 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왜곡하는 신학적 문제를 안고 있기에 창조과학은 오히려 신앙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지적설계의 주장도 문제를 가지고 있다. 지적설계는 자연계는 신(여기서 신은 반드시 기독교적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적인 존재를 의미)에 의해 설계되었으므로 그 설계의 흔적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적설계는 형이상학적 논증으로는 유용할지 몰라도 지적설계 이론을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지적설계이론은 설명이 안되는 것이 지적존재의 증거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틈새의 하나님이란 오류에 빠지게 된다. 과학은 신을 증명해주지 못한다. 지적설계는 이미 실패한 것으로 입증된 자연신학을 견지하는 입장이다.
8. 그렇다면 복음주의권에서 취할 바람직한 창조론의 스펙트럼은 무엇인가? 창조 자체를 인정한다면 창조의 방법에 대해서는 열린 태도가 필요하다. 한가지를 고집하기 말고 다양한 창조론에 대한 수용이 가능하다는 말이다.누가 창조하셨는가에 대한 신앙은 변할 수 없는 진리지만 창조의 방법에 대한 그림은 다양할 수 있다. 우리는 크게 A) 생물진화를 인정하는 진화창조론과 B) 생물진화를 인정하지 않는 비진화창조론으로 구별할 수 있다. 진화창조론에는 1) 계획되지 않는 진화(unplanned evolution; 열린진화) 창조론 2) 계획된 진화(planned evolution) 창조론 3) 인도된 진화(directed evolution) 창조론 4)지적설계론(생물진화를 인정하지만 진화의 기작은 초자연적이라고 주장)이 있다. 비진화창조론에는 1) 점진적 창조론(오랜지구 창조론; 우주진화는 인정하나 생물진화를 부정) 2) 젊은 지구론(생물진화, 우주진화 모두 부정 ; 창조과학의 창조론)이 있다.
과학에 대한 이해
2017-04-01 18:10:54
1. 양립 가능 vs 양립 불가능
A is compatible with B ; A와 B는 서로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모두가 참이다.
A is incompatible with B; A와 B는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이며, A와 B중 어느 하나만 참이다.
2. 과학주의(scientism)
전문 철학자들이 사용하지 않는 용어다. 전문 찰학자들은 주로 환원주의, 물리주의 혹은 자연주의라는 용어를 쓴다. 현대 심리철학에서는 주로 물리주의와 자연주의를 동의어로 사용한다. 과학주의는 계몽주의 이래 과학만이 실재에 대한 진리를 알려준다는 세계관이다. 과학주의는 그 특성상 종교비실재론이므로 유신론과 양랍할 수 없다. 물리주읜 자연주의가 환원주의와 결합된 것이 과학주의라고 볼 수 있다.
3 세계관(Weltanschauung ; worldview)
독일의 칸트, 슐라이어머허, 딜타이, 야스퍼스 등과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발전되고 사용된 개념으로서 세계의 의미와 세계를 이해하는 근본방식에 대한 개인적 신념을 가리킨다. 독일헌법 4조1항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 그리고 종교적, 세계관적 신념의 자유는 불가침하다고 규정한다. 형이상학적 신념 및 가치관이 개입되기 때문에 세계관은 과학적 탐구의 영역이 아니다. 무신론이나 유신론도 일종의 세계관이다. 신이란 대상 자체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삶의 목적 같은 문제들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은 그 자체로는 무신론이나 유신론과 무관하다. 신앙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무신론적 세계관인 과학주의가 신앙과 충돌을 일으킨다. 앨빈 플란팅거는 대립하고 있는 것은 종교과 과학이 아니라 자연주의와 유신론이라고 말한다.
4. 경신의 원리(Principle of credulity)
신증명은 리처드 도킨스 등이 주도하는 신무신론자들( new atheists)의 공통된 태도다. 이런 태도에 대응하기 위해 라처드 스윈번은 "경신의 원리"를 제안했다. 경신의 원리란신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히 의심할 이유가 없는 한 일단 믿어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신 존재의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 쪽은 오히려 그 믿음을 부정하는 쪽이어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신의 원리는 종교적 경험에 대한 정당한 도움을 제공한다.
5. 진화, 진화이론, 진화주의 vs 창조, 창조론, 창조과학
진화란 생물진화든 우주진화든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자연현상 자체로서 일종의 과학적인 경험데이터를 의미한다. 진화이론은 진화현상에 대한 인과율에 근거한 설명체계이다. 이와 달리 진화주의란 진화나 진화이론을 무신론적 세계관으로 해석한 것이다.
창조라는 말은 유신론적 세계관을 전제하고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의미하는 범주다. 칭조론은 창조라는 현상이나 사건을 설명하는 이론인데 진화를 수용하는 창조론과 진화를 배제하는 창조론이 있다. 창조과학은 다양한 창조론들 중의 하나로서 진화를 배제하고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반과학적 창조론이다. 진화를 배제하는 창조론들은 진화와 진화주의를 구별하지 않거나 진화론이 성경의 창조론과 대립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성경도 과학도 모르기 때문이다.
6. 진화이론과 기독교 신앙
주류과학에서 검증을 거치고 전반적인 지지를 받는 진화이론을 배제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과학과 소통할 수 없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고립시키거나 약화시키게 된다. 맥그래스, 폴킹혼과 같은 학자들은 진화이론을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앙을 너무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 자체가 세상과의 소통을 필요로 한다. 진화이론을 받아들일 때 부딛히는 두가지 문제는 신론과 인간론이다. 첫째는 신론에서 발생하는 문제인데, 우주와 생물의 존재를 자연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창조나 섭리는 기적적인 방법에 제한하려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는 기적적인 방법과 자연적인 방법 모두를 사용하여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둘째는 인간론의 문제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달리 특별한 방법으로 지어졌다고 이해했고 이것이 인간이 특별한 존재인 이유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를바 없는 자연적인 방법으로 지어졌다면 인간의 독특성이 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특별함은 창조의 방법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특별해서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로 이런 특별한 관계를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진화와 창조는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양립가능하다.
갈등, 독립, 대화, 통합 등 4가지 관점은 이안 바버가 제시한 유형론이고 존 호트의 책을 통해서 대화 대신 접촉이라는 관점으로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갈등론으로 크게 두가지로 신앙적 진리를 무시하는 과학주의와 과학적 진리를무시하는 창조과학이나 문자주의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합론의 경우도 과학적 진리 아래에 신앙적 진리를 포함시켜 과학에 맞지 않는 것을 잘라버리는 과학주의적 통합과 반대로 신앙적 진리 아래에 과학적 진리를 포함시켜 성경 문자와 맞지 않는 과학은 잘라 내버리는 창조과학이나 문자주의적 통합이 있겠습니다.
반면 독립론이나 대화론은 신앙과 과학 각 영역을 인정하고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지만 독립론은 이원론에 가깝게 두개의 설명 영역을 나누고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고민하지 않는 입장이라면 대화론은 독립성은 인정하되 각각의 결과를 함께 보며 종합적 이해를 시도하는 관점입니다.
물론 통합론에도 과학이나 신앙 둘 중 하나를 위에 두고 나머지 하나를 그 밑에 종속시키는 기계적인 통합이 있겠고 그런 통합은 창조와 과학을 맞붙여 창조과학 같은 괴물을 만들어내거나 무신론과 과학을 맞붙여 진화주의와 같은 무신론적 과학주의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방식의 통합도 가능합니다. 과학과 신앙을 각각의 영역의 고유성을 인정하면서도 세계를 이해하는 종합적인 통일된 하나의 체계 아래 두려는 방식의 통합은 보다 건전한 방식의 통합입니다. 이런 통합의 관점은 오히려 대화론과 가깝습니다.
즉 그렇게 보면 대화론과 건전한 통합론은 상당히 유사한 관점이며 과신대에서 추구해야할 방향일 것입니다. 갈등론이나 독립론이 아닌, 그리고 기계적인 통합론이 아니 과학과 신앙의 영역을 각각 인정하면서도 접촉과 대화를 시도하여 통합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죠.
한 분이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신앙과 과학의 독립을 유지하면서 대화를 시도하여 통합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모두에게 공감을 받은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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