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와 노동
2015-05-26 15:52:53
과연 신약성서에는 노동에 대한 담론이 있는가? 예수 당시 노동에 대한 시각은 무엇이며 노동자의 상황은 어땟을까? 예수는 노동에 대하여 어떤 가치를 부여했으며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복음서에서 헬라어 에르가테스는 노동자를 의미하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로 한글성서에서 일꾼으로 번역되었다. 아마도 일꾼은 농사를 짓는 곳에서 추수를 전문으로 하는 일용직 노동자일 가능성이 많다. 이들은 주인에게 고용되어 일이 끝난 후에 주인으로 부터 품삯(미스또스)을 받는 사람이다. 예수께서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것은 당시 팔레스타인의 열악한 노동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많은 땅을 소유한 대지주가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여 일을 시키고 그 댓가를 적절히 지불하지 않고 임금을 착취하는 현실을 염두에 두신 말씀일 것이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부자들이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들을 어떻게 부당하게 대우했는지 야고보서는(5장 1-5절) 잘 묘사하고 있다.
한글 성경에서 "품꾼"으로 변역된 단어는 헬라어 "미스띠오스"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고용된 일꾼 혹은 일용직 노동자이다. 당시 지중해 지역의 사회계층에서 일용직 노동자는 하위계층으로서 절대적 빈곤층에 속했다. 신약성서에서 노동 및 노동자와 관련하여 "수고하다(코피아노)"라는 동사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1:28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당시 일용직 임금 노동자로서 힘든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르키는 것이 분명하다. 복음서에나타나는 직업에는 군인,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어부, 농부, 목축하는 자들이 있지만 당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던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예수 당시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용노동자로서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최저생계비, 실업과 임금 체불, 소작농의 착취, 채무, 강제노동 등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직업을 목수로 소개하고 있는데 당시 목수는 수공업이 종사하는 노동자로서 유대 사회에서 비교적 좋은 직업이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한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참된 인간으로서 인간적인 삶의 조건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노동하며 사셨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노동에 대하여 어떤 기르침을 주셨는가? 첫째로 에수님은 임금 노동자들이 고용주에거 품삯을 받는 것이 당연한 권리임을 분명히 선언하셨다.(마10:10, 눅10:7) 예수 시대 노동자들은 때때로 품삯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당시 대지주인 부자들 가운데 일을 시키고 품삯을 제대로 주지 않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5:4은 이런 현실을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그 고용주에게 품삯을 제대로 받는 것이 노동자들의 당연한 권리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관심사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둘째는 예수는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쉼을 보장하셨다.(마11:28-30) 마태복음의 본문을 노동의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에수는 당시 노동의 굴레와 착취속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참된 자유와 안식을 선포하신 것이다. 본문에서 "수고하며" 라는 말에는 힘든 육체노동을 의미하는 동사 "코피아오"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예수께서 당시 육체노동자의 힘든 고통을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선언하셨음을 의미한다.
노동의 신학
2015-05-26 14:22:57
노동은 생계수단이며 직업활동의 일환으로서 생산활동을 하면서 생산물의 결과에 따라 임금을 받거나 이윤을 획득하는 경제활동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노동은 살아있음을 뜻하며 살아기기 위한 활동이다. 노동은 그 자체가 생명력을 의미하며 인간 존재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러한 노동에는 3가지 차원이 있는데 호구지책인 생물학적 차원, 인간 사회 구성원으로서 활동인 사회적 차원, 노동을 통한 창조적 활동은 문화적 차원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동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은 노동을 인간에게 부여된 위임(commission)혹은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주님의 창조세계를 경작하고(cultivate), 돌보고( care), 관리하도록(manage) 위임하셨다. 그러므로 노동은 인간이 자연을 경작하고 다스림을 통해 문화를 이루어 나가는 총체적인 활동이다.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계획의 일부이며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다. 일은 인간 존재의 핵심으로서 인간은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러므로 노동은 타락으로 인해 발생된 형벌과 저주가 아니다. 물론 타락으로 인하여 노동은 본래적 의미를 잃고 생존을 위한 고역이 되고 비인간적 경쟁과 착취의 결과물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은 사람이 타락하기 이전이 이미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일하시는 분으로(working God) 계시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 역시 일하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는 말씀을 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동역하는 자임을 밝히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일하시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함께 일하는 존재이고 이것이 바로 노동의 신학적 의미이다. 안식일의 본래 의미는 단순히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의 인권과 복지를 보장하려는 것이지만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형식적 준수에 초점을 맞추어 노동의 의미를 왜곡하였다 또한 교회에 팽배하던 영육, 성속 이원론은 묵상, 예배, 금욕을 강조하며 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했다.
루터는 직업소명설을 통해 부르심의 이중구조를 철폐하고 모든 직업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종교영역에 제한되어 왔던 소명을 세속 직업의 영역으로 확장함으로써 부르심의 의미를 세속화시켰을 뿐 아니라 세속 직업을 신적 부르심으로 간주함으로써 직업에 신적 거룩의 의미를 덧입혔는데 이것이 거룩한 세속성(holy worldliness)이다. 루터의 직업소명설은 현재의 직업만을 소명으로 제한할 위험이 있거나 현존하는 사회적 신분과 직업을 영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로 오해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직업소명설의 본의는 종교영역의 특정 직업에만 하나님의 소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직업을 통해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현장의 문제는 결코 만만치 않다. 노동의 공간은 노동을 제공하여 임금을 받는 노동자와 자본을 제공하여 노동력을 사들여 생산활동을 하고 그 결과로 이윤을 얻는 자본가로 구성된다. 여기서 노동하는 인간의 가치가 그의 노동력과 임금에 의해 결정되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인간이 소외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칼 맑스는 인간관계가 물건의 관계로 표시되는 상품세계에서 일어나는 소외와 노동력이 상품이 되고 노동이 사용가치가 되어 버리는 자본주의 사회구조 자체를 문제시 하였다. 또한 노동 공간에는 착취와 억압이 발생하는데 이는 노동 공간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갑을 관계나 주종관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착취와 억압이 일어난다.
문제는 노동에 대한 편향된 관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 중심의 노동관을 가지고 이윤이 극대화되어야 노동자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논리를 가지고 이윤 극대화를 추구한다. 이윤의 극대화라는 목표아래서 노동자는 소외되고 억압을 받게 된다. 또한 기업 이윤의 극대화는 소수 특권층에게 만 이익이 되고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결과도 이미 경험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본가 중심의 노동관이 교정될 필요가 있다.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청지기적 노동관을 추출하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성실하고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노동관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청지기적 노동관은 마치 노동 환경에서 노동자에게 상당한 자유의 여백이 주어지고 자율성과 융통성이 있는 듯한 착각을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지기적 노동관은 그리스도인들의 노동관으로서 상당한 성경적 근거와 적실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노동윤리와 관련된 기초적 문제는 노동자의 인권과 권리가 보장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첫째로는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가 지급되어아 햐는데 이것은 일자리와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것이다. 둘째는 노동자에게 쉼을 보장하는 것이다. 안식일은 노동의 굴레로 부터 인간 해방을 외치는 자유의 선포이기도 하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의 보장과 노동후 쉼에 대한 보장을 위한 대안 적 노동공간의 창출이 모색되어야 하는데 최근에 논의되는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기업이 그런 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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