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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기독교 사회윤리 by Gerald C. den Hertog

선교적 교회론의 형태로서 기독교 사회윤리 by Gerald C. den Hertog

2015-06-15 16:04:59


 

선교적 교회론의 형태로서 기독교 사회윤리

화란 개혁교회의 경험에 대한 사례연구

Gerald C. den Hertog

 

 

서론

 

[174] 일반적으로는 서구유럽에서, 특별히 화란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자수의 심각한 감소와 세속화에 비추어 볼 때, 공적 영역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시급해지고 있다. 기독교 사회윤리는 이러한 대화에 교회가 참여할 수 있고 또 참여해야 하는 주된 방법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 윤리에 대한 최근의 대화가 교회론적 관심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선교적 열심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토론하기 위해서도 선교적 교회론의 형태로서 기독교 사회윤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 논문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화란에서 사회 윤리에 대한 교회의 역할에 대한 토론을 간단히 검토할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교회와 사회윤리 사이의 신학적 관계에 대한 주제는 많이 논의되지 않았지만 그 주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특별히 교회의 선교적 소명과 관련하여 그러하다.

 

 

윤리적 기준의 세속화

 

[175] 2010년에 화란 윤리학협회는 지난 백 년 동안 화란 윤리학계의 발전에 관한 에세이를 한권 발행하였다. “1900년부터 1970년간의 화란 윤리학이란 제목으로 된 그 책에서 화란 윤리학협회는 협회가 설립된 1970년을 회고하면서 그 해가 전환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1970년 이전에는 윤리적 논문에서 신학이 주도적이었다. 그 책에서 헨리 크롭과 쿠반더발은 “19세기 초에는, 화란 대학들에서 윤리학은 제도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신학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화란의 상황은 주변 나라들과 확실히 달랐다. 당시에 독일이나 영국에서는 윤리학이 철학의 독립된 분과에 속해있었다. 그러나 화란에서는 철학 분과는 윤리학에서 한 자리도 차지하지 못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적어도 1876년 이래로, 신학부는 철학과 기독교 윤리학에서 각각 한자리씩 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교회가 국가 일에 관여하는 화란의 특유함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1960년까지 도덕적 이슈에 대한 국가적 의견에서 신학자가 선도적 역할을 하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공공연한 상황이었다. 서로 상당히 다르기는 하였지만, 로마 가톨릭, 화란개혁교회, 그리고 개혁교회들은 도덕적 이슈에 관한 국가적 논의에 교회가 참여하고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데 기본적인 인식을 같이 하였다. 이런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다양한 형태의 목회서신과 교회 선언으로 화란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조언하고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1960년대 세속주의의 꾸준한 공격과 교회의 신자들의 감소로 인하여 국가적 차원의 도덕적 논의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변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든 대학에서 윤리적 기준에서 신학적 기반이 약화되었고 신학과 무관한 과학적 연구의 다양한 분야에서 이슈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의학적 무능에서 의학적 능력으로 전환되는 의학연구의 빠른 변화로 인하여 의학 전문가들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윤리적 숙고에 직면하였다. 의료 윤리의 여파로 인하여 다양한 종류의 응용 윤리가 대두하였는데 예를 들면 경제 윤리, 환경윤리, 동물윤리, 기술윤리가 그것이다. [176] 분명한 이유로, 의료 윤리는 큰 관심을 끌었는데, 의학부 안에 곧 의료 윤리분과가 설립될 것이다. 1980년 초에 화란 정부는 국가적 도덕을 선도하는 전통적 역할을 포기함으로써 사실상 이런 변화가 촉진되었다. 화란 정부는 낙태, 안락사와 같은 중요한 윤리적 이슈들을 다루기 위하여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하고. 정부의 역할은 인간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위해가 되는 문제에 법적인 통제를 가하는 일에만 국한하였다. 철학적인 의문이나 신학적인 의문이나 모든 근본적인 의문들이 사라진 것은 그 시대의 이미지에 부합하였다. 오늘날 윤리적 기준은 일반적으로 철학과 다양한 응용과학들과 연관되어 있고, 신학은 상당한 정도로 배제되었다.

 

“1900년에서 1970년 사이의 화란 윤리학 의 편집자들은 1970년 이전 시기에는 기독교 윤리학자들이 대형 교회에 속했고 대부분 대형교회에서 선임되었기 때문에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그들의 근본적인 선입관이 공적 토론에 기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비록 사회 윤리학의 준수는 1960년 이전에는 화란에서 중요한 공적 이슈가 아니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라도, 1960년대에는 그것이 이슈화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1900년에서 1970년 사이 화란 윤리학 편집자들이 1960년대와 1970년에 사이에 사회 윤리학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한 선명한 논의를 소홀히 한 것은 놀랍기만 하다.

 

 

사회윤리학의 역할에 대한

빌헬름 베레마와 해리 퀴터트의 견해

 

아펠도른 신학대학에서 수년간 목회신학과 윤리학 교수를 지낸 빌헬름 베레마는 교회 자체가 사회 윤리학의 공식적 주제가 된 것은 대단히 예외적인 일이다.” 라고 언급한 1969년의 기고에서 그 당시의 위기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간결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베레마의 주장은 다른 사회적 기관들처럼, 교회가 윤리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거나 교회의 활동은 특정한 윤리적 행위를 나타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베레마의 주장은 교회의 설교나 교회 활동이 사회적 윤리학의 주제가 된다는 제안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177] 조직체적 교회와 유기체적 교회를 구별하는 카이퍼주의자를 언급하면서, 베레마는 우리가 신자들 개개인의 책임인 소명을 그렇게 엄밀하게 교회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

 

세속화 과정에 관하여, 베레마는 모든 조직들 가운데 유독 교회가 신자 개개인을 대신하여 말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사회적 관심에 대한 신자 개개인의 의견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성숙한 교회 회원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해야만 한다. 이것이 마틴 루터가 주장한 기독교인의 자유이다. 베레마는 핵무장이나 비핵무장에 대한 논의를 예로 든다. 화란개혁교회(NHK)의 개개 회원은 1962년에 교회가 발표한 목회서신과 동일한 견해를 갖지 않았지만, 조직으로서 교회가 이미 발언한 사실을 수용하도록 강요되었다. 베레마는 교회조직이 사회 윤리적 주제에 개입하는 것은 사회 윤리를 준수하는 일에 해롭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개입은 사회 윤리가 교회 관습의 이론으로 발전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하고 베레마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특정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세속화를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인류를 위하는 일이 하나님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사회에서 논의되는 이슈들과 진심으로 협력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베레마의 비판이 주로 해리 퀴터트를 향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해리 퀴터트는 교회를 사회적 주제와, 심지어는 혁명적 윤리와 연결시키려는 일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으로서 베레마가 비판한 교회와 사회 윤리의 관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1969년에 퀴터트는 교회와 신학은 하나님의 구원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인간 현실의 단편들에 대한 것이며 비록 그것들이 교회밖에 존재하지만 교회가 구원으로 선언하는 것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잠재된 왕국이란 용어를 도입하는데,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 특정한 것에 앞서지 않으며, 후자가 전자의 디딤돌이거나 전자와 비슷한 표현도 아니며 오히려 후자는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를 통해 세상을 구원으로 부르시는 바로 그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퀴터트가 익명의 기독교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있는 곳은 어디에나,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과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익명의 말씀으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178] 이 말씀에 접촉된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래의 세상이, 말 그대로, 약속의 말씀이 창조적인 능력으로 이 세상에 성취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때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모두가 전형적인 기독교인이 되고 모든 신학은 행위를 지향할 것이다.”

 

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익명의 일이라는 퀴터트의 제안은 기독교 사회 윤리의 가능성에 대한 다소간 낙관적인 견해를 초래한다. 베레마는 교회가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나 동료 인간들에 대한 진보적인 배려를 위한 부르심에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다. 다만 베레마의 견해는 교회는 구체적으로 말해야 하고 자기 시대의 긴급한 필요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메시지가 이런 문제들에 교회가 구성원들을 대신해서 결정하고 행동할 정도로 구체적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베레마는 교회를 사회 윤리의 적절한 주제로 수용하는 결과는 교회론이 사회의 실제적인 발전에 따라서 정의될 것이란 점을 주목한다. 베레마의의 신학에는 이러한 경향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베레마가 보기에)퀴터트의 신학은 어떻게 교회가 사회 안에서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1970년 이래 화란신학에서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경향

해리 퀴터트와 게리트 드 크루이프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사회윤리에서 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맡기는 경향은 공적 영역에서 기관으로서의 교회를 배제하는 전조가 되었을 뿐이다. 사회윤리의 주제로서 교회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이미 “1900년에서 1970년의 화란 윤리학에서 지적한 과정에 대한 반향이었으며 이것은 교회를 공적 논쟁의 중심부로 끌어내리려는 시도로 간주될 수도 있다. [179] 퀴터트가 이런 개념을 재고한 최초의 신학자였지만 그가 나중에 그것을 거부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그는 사회윤리에서 교회가 전통적으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을 배제하는 사람들의, 가장 두드러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두드러진 대변인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적 담론에서 이전과는 다른 역할을 맡아야만 했다.

 

1970년대에 윤리학에서 일어난 퀴터트의 사고방식의 변화는 그의 조직신학적 재정립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1974년에 처음으로 발표된 개념은 -사람들이 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위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아래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과 신적 계시에 대한 그의 인식에 근본적인 것이다. 이러한 선언을 가지고, 퀴터트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이 행하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지에 대해 우리는 단지 짐작할 뿐이므로, 비슷한 표현으로 이뤄진 믿음의 선언은 참되고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자만심을 금지하였다. 이런 입장이 유효하다면, 하나님을 어떤 사회적이나 정치적인 프로그램과 직접 연계시킨다든지 혹은 누구에게 특정한 사회적이나 개인적 행동을 따르도록 권장할 권리를 아무도 갖지 못하게 된다.

 

1985년에 퀴터트는 신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신앙과 정치에 대한 신학적 입장 이란 책에서 모든 것은 정치이지만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다는 말로 표현하였다. 만일 하나님에 대한 진리가 단지 가설이라면, 누구도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고 무엇을 원하시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토대에 대해 미치는 함의는 다음과 같다. 적절한 언어적 감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에 적응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을 빼앗기고 도덕적 질서도 없이 단지 우리가 만들고 형성하는 공허한 세계에서 사는 것이 합리적인가? 1967년에 퀴터트는 창조와 구속을 긴밀하게 연관시키고 자신의 사회 윤리를 거기에 기초하였지만, “모든 것이 정치다에서 그는 이 두 가지의 관계를 끊고 거의 완전히 분리시켜 버렸다. 공허한 세상에서는 인간 개인만이 하나님과 세상사이의 유일한 접촉점이다. [180] 기독교 신앙은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 단지 동기만 부여할 뿐이다. 다름 사람에 대한 사랑은 사람들에게 사회적 정치적인 개입을 고취시킬 것이다.

 

사회적, 정치적 윤리에 대한 교회의 개입은 1981(암스테르담), 1983(헤이그) 핵무장에 대한 대규모 저항에서 절정에 달했다. 비록 퀴터트가 논의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음직이고 있다고 분명히 의미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가 모든 것이 정치다는 책을 발간했을 때, 교회의 거대한 사회적 정치적 개입은 이미 종언을 고했다.

 

교회 회원 감소에 자극을 받은 화란개혁교회(NHK)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근본적인 원리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1994년에 발간된 민주주의 윤리에 대한 게리트 드 크루지프의 간행물은 교회의 정치적 책임을 화란개혁교회가 재고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드 크루지프는 바르트의(바르트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화란개혁교회에서 대단히 영향력이 있고 압도적이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정치선언을 분석하면서 신앙적 정서에서 나온 것이지만 윤리와 구체적인 자리를 연결시키는데 실패한 경우를 바르트가 얼마나 자주 증거하고 훈계하였는지를 주목하였다. 드 크루지프는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관점이고 둘째는 사회의 복합적 실체의 관점이다. 민주적인 사고를 하라는 그의 신학적 주장은, 바르트적 형태이든 아니면 반 룰러리안적 형태이든, 원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어있을 뿐 신정주의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기독교적 정서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롭게 공존하려는 자발성도 중요하다.

 

비록 퀴터트가 윤리에서 신학적 토대를 배제하는 급진적인 변화를 시작했지만, 화란개혁교회의 새로운 신학-윤리적 접근은 그다지 분명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드 크루지프의 신학-윤리적 재정립은 퀴터트의 급진적인 변화에 비견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 드 크루지프는 바르트적 신정선언에 종지부를 찍고 어거스틴의 두 왕국 이론으로 회귀하였다. 그러나 드 크루지프와 퀴터트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트뢸치가 아니라 어거스틴을 대부로 삼은 드 크루지프는 신학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181] 드 크루이프의 간행물이 1994년에 등장했을 때, 세속화와 교회 회원의 감소는 현격하였으며 이런 추세를 저지하려는 모든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해 처음으로 기독교민주당은 정부구성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화란에서 기독교국가의 몰락을 의미한다. 기독교민주당원들은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약간의 의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2012 11월 이후로 화란 국민들은 기독교민주당이 대표하지 않는 정부를 구성하였으며 3개의 기독교 정당은 겨우 의석의 14%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기독교의 사회적 존재가 기독교 정당에 달린 것은 아니지만, 화란 역사에 비춰보면 이런 변화는 단순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다.

 

 

하우어워스가 화란에서 수용되다.

 

공적인 일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미미해진 결과는 이렇다. 주된 결과는 사회윤리가 기독교 신학에서 이른바 해방된 것이지만, 이런 관점은 진보주의자들에게도 더 이상 명백하지 않다. 오늘날 신학으로부터 해방된 윤리의 어두운 측면이 널리 감지되고 있다. 이것은 상당한 정도로 스탠리 하우어워스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데, 그는 교회가 사회 윤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사회 윤리라고 말했다. 비록 이 말은 1960년대에 퀴터트의 입장과 비슷하게 들리지만 적어도 하나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퀴터트가 낙관적인 세계관을 표방하며 감추어진 하나님의 현존이 사회를 자유하게 한다며 혁명적인 경향에 전향적 자세를 옹호할 때, 하우어워스는 성경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교회가 이 이야기를 따라서 문화에 대항하여 살라는 부르심을 받았음을 호소하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하나님이 세상에 도입하신 새로운 정치는 지배하기 보다는 섬기는, 압제하기 보다는 고난을 받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그들의 사귐은 사회적 경계를 강화하기 보다는 가로 지른다.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장벽들이 무너지는 것은 인간적 이상주의나 민주적 법치주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하심으로 인한 것이다. 그 공동체는 복음의 기관일 뿐 아니라 복음의 열매이니 이것이 바로 좋은 소식이다. 그 공동체는 단순히 선교의 매체이거나 선교 기관이 아니라 바로 선교 그 자체이다.

 

[182] 화란에서 하우어워스의 사상을 수용하는 두 가지 노선이 있는데, 두 가지 모두 사회윤리에서 교회의 역할을 다루는 것이다. 첫 번째 다소 긍정적인 반응은 신학적 훈련을 별로 받지 않은 젊은 복음적 개혁교인들로부터 나왔다. 또한 반혁명당에 뿌리를 둔 크리스텐유니에라는 군소 기독교 민주정당이 하우어워스에게 점증하는 관심을 보인 것이다. 이 정당의 전신인 개혁정치연합은 수년 동안 경제와 정치에서 보수적이고 우익적 입장을, 그리고 낙태나 안락사 같은 의료 윤리 문제에 강경한 관점을 취하며 자기 정체성을 견지해왔다. ‘기독교국가의 종말을 경험한 젊은 세대는 좌익 시절의 반혁명당을 연상케 하는 경제와 외교 정책으로 돌아왔는데, 이런 변화는 크리스텐유니에 당원이나 지지자들이 반가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란개신교회(PKN)과 같은 주류 교회들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세속 사회에서 정통개혁교회들은 공동체 생활의 질을 높이고 자기들의 정체성을 강화하는데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런 종교적, 교회적인 상황에서 제임스 케네디 같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대조 사회로서의 교회를 호소하는 하우어워스에게 영향을 받고, 영감을 받아서, 케네디는 교회의 사명은 대안 사회를 통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83]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후기 기독교국가에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 그리고 정부의 권위를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서 정부의 권위를 강조하는 초기의 반혁명적 주장이 거의 잊혀져가는-하우어워스의 글에서 보듯이- 상황에서 교회의 역할에 집중하려는 것이다. 하우어워스에 대한 이런 반응은 오랜 전통이 포기된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다소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며 또한 직업과 공적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에서 어느 정도 신칼빈주의적 관념을 드러낸다.

 

아브람 반드빅은 하우어워스의 수용에 대한 또 다른 노선을 대표한다. 반드빅의 수정된 신학적 입장은 사회에 대한 근본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이 입장은 다소간 하우어워스의 관점과 같은 노선이지만, 하우어워스에게 거의 혹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1992년에 발전된 그의 신학적은 지향성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대체로 역사적인 이해에서 세상에 대한 급진적인 심판으로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이런 신학에서는 이런 심판이 시간적으로 연장되는 형태 외에는 역사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여지가 거의 없다. 이 점에서 반드빅은 하우어워스를 극단적으로 반대한다. 문제는 이것이 실제적으로 어떤 차이점을 만들어내느냐는 것이다.

 

교회의 생명을 이야기로 보는 관점에서 하우어워스에 대한 반드빅의 비판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반드빅이 보기에 하우어워스는 교회의 생명에 중요한 것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반드빅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도들과 교부들이 형성한 기독교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그들은 해이하고 근거 없는 윤리가 아니라 (윤리를) 하나님의 유일하고 하나인 행동의 결과로 묘사한다. 어떤 사람이 죽음으로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삶에 참여하며, 그 때까지는 십자가의 형태로 있지만 장차 계시될 영광을 소망한다. [184] 이런 이유로 교회는 단지 이 세상의 공동체 중에서 또 다른 대안 공동체가 아니라 이미 세상에 대해 죽은 종말론적인 실체이다.

 

반드빅에 의하면, 하우어워스는 스스로 교회를 공동체로 묘사하는 신학을 강조하는 점에서 슐라이허마흐를 따르고, 윤리의 탁월성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칸트의 입장에 동조하고, 종말론을 무시하는 점에서는 계몽주의의 반형이상학적 경향에 안주한다고 말한다.

 

게리트 드 크루이프도 하우어워스의 신학이 실현된 종말론의 급진적인 변형이라고 규정하면서 그의 신학이 종말론에서 후퇴한 것을 비판하였다. 드 크루이프는 실현된 종말론은 궁극적인 것과 잠정적인 것 사이의 신학적 구별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침해한다고 생각한다. 하우어워스에 대한 드 크루이프의 비판이 하우어워스에 대한 반드빅의 반대와 일치하지만, 그들의 입장은 매우 다르다. 반드빅이 아나밥티스트 입장에 가까운 경향이라면, 드 크루이프는 하나님이 잠정적인 시간에도 현존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에 사회윤리 영역에서 하우어워스와 협력할 용의가 있다.

 

하우어워스에 대한 반응들은 갈라지기도 하고 모이기도 한다. 하우어워스를 옹호하는 복음적 개혁교회는 [하우어워스를 통해] 어떤 종류의 신칼빈주의가 부흥할 것으로 다소 낙관적인 기대를 한다. 이에 반해 반드빅은 신학적인 비관주의이다. 하우어워스 옹호자들은 교회가 무거운 사회적 사명의 짐을 져야한다고 하지만, 반드빅에게는 어떤 윤리적 프로그램도 없다. 그러나 하우어워스 옹호자들은 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반드빅은 하나님은 사회에서 활동하시지 않는다는 빈약한 신학적 대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양측은 모두 사회적 접근의 필요성에 동의한다. 양측은 모두 기독교 정부의 시대는 지나갔음을 인정하면서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도덕적 토론을 위하여 의지할 수 없는 정부에 대해 염려한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는 현실이기 때문에, 양측은 모두 정부를 대체로 방치하고 사회를 포퓰리즘에 노출되게 버려두는 것은 현대화란의 정치적 상황에 지속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185] 민주주의는 기본적 원리를 필요로 한다. 드 크루이프는 민주주의를 위한 신학적 토대를 선호한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신학적 토대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교회와 사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정부를 필요로 한다. 올리버 오도너반이 제시한 정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인식은 설득력이 있고 주목할 만하다. 사람들 사이의 정의와 평화를 수립하는 인간의 활동과 책임을 판단하는 것이 정부의 정당한 임무이다. 사회의 한가운데서 정치적인 행동에 필요한 권위를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명의 권위가 필요하다. 정부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며 또한 사회의 권력들과 경쟁하지 않는 것이 그 자체로 선교적 책임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했듯이 그리스도가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는 영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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