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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에 나타난 삼위일체론- 마이클 호튼

교회사에 나타난 삼위일체론- 마이클 호튼

2015-06-15 16:02:15


 

예루살렘에서 니케아까지

교회사에 나타난 삼위일체론의 발전

 

마이클 호튼

 

 

 

초기의 기독교회는 복음을 예루살렘과 유대에 전하는 사명을 맡은 유대인 분파였다. 그러나 곧 기독교회는 이방세계로 들어갔는데, 일차적으로 로마제국에 널리 퍼져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하여 들어갔다. 이런 과정에서 복음은 다양한 반대와 도전에 직면하였다. 대중적인 수준에서는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그들의 만신전에 새로운 신을 추가하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라 다신교를 반대했다. 그런데 기독교가 회심자들을 얻고 또한 문화 엘리트들의 비판을 받으면서 기독교는 철학적 도전에 더욱 직면하게 되었다.

 

불신자들의 전제와 타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전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옹호할 것인가? 기독교의 사명과 관련된 이런 반복되는 질문은 고대 교회의 생각을 압박했다. 삼위일체 교리는 결코 기독교과 이교도의 사상을 합성하여 나온 것은 아니다. 반대로 삼위일체 이론의 초기 선구자들은 자신들이 계승한 언어와 철학적 개념을 매우 능숙하게 이용하여 계시를 해석하였다.

 

 

초기 삼위일체 논쟁

 

수세기 동안 그리스적 사고는 하나와 여럿이라는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단일성과 복수성을 동시에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질문이다. 실체는 하나의 본질로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여러 다양한 것들로 이루어진 것인가? 고대 세계에서 (파메니데스, 스토익스 심지어 플라톤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같은 대부분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실체는 하나의 순수한 본질 혹은 존재로 이루어져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조금씩 다르게 경험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단일함을 인식하기보다는, 하나의 순수한 원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여러 복사물이나 그림자들의 세상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일성과 복수성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모든 실재는 진리와 순수 그리고 단일성으로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복수성과 다양성으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단일성이 우선적으로 주장되고 선호된 반면에 복수성은 다만 인정되고 용인되었다.

 

이러한 지적세계에서 살았던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계시를 숙고하기 시작했다. 초기 기독교 사상가중 한사람인 오리겐(주후 185-254)은 알렉산드리아에 학교를 세우고 거기서 성경을 번역하면서 성경의 교훈을 플라톤적 범주로 전환시켰다.(위에서 언급한 그리스 세계관을 참고하라) 오리겐은 성경을 플라톤과 결합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선호하는 단일성이란 용어를 선호하므로 포기할 수 없었기에, 오리겐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에 종속된 피조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하나님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복수성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리겐의 이런 생각은 아들은 유일하시고 한분이신 아버지보다 못한 신적 존재라는 말로 들린다.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장로로 일했던 아리우스는 한 발자국 더나가서 아들은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하길 셋이 존재하지만 그 셋이 동등한 영광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했다. 오직 성부만이 하나님이고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세미 아리안주의는 중도노선을 택하여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 본질은 아니고 유사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당시에 동방교회는 호모우시오스(동일 본질의)와 호모이우시오스(유사 본질의)라는 동사의 차이에 흥미를 가졌다.

 

사벨리우스는 하나님의 단일성 그리고 아들과 성령의 신성을 보존하는 좀 다른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는 주장하길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하나의 신적 인격이 가면들을 쓴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어떤 복수성도 없는 한분이시지만 무대 위의 배우처럼 어떤 때는 아버지로, 어떤 때는 아들로 또 어떤 때는 성령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배우가 실제 세 명은 아니라는 것이다. 3세기 로마의 장로는(사벨리우스) 주후 220년에 파문되었지만, 일반적으로 양태론으로 알려진 사벨리안주의는 교회사를 통하여 거듭되는 도전으로 남아있다.

 

요약하자면 이런 모든 초기의 도전들은 순수한 단일 존재로부터 떨어져 나오거나 갈라져 나오지 않은 복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스적 사고 때문이었다. (복수성)이 하나님의 본질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개념적 도구가 없었던 것이 문제의 한 부분이었다.

 

 

용어들의 발견

 

이런 관점에 대한 실제적인 돌파구가 4세기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에게서 나타났는데 그들은 니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그리고 가이사랴의 바실이었다. “본체 개체라는 혼란을 주는 그리스 용어 대신에 그들은 한 분 하나님의 단일성을 확인하면서도 삼위의 인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하이포스타시스( 고유한 특성을 가진 개별적 실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단일한 본질을 가지신 동시에 고유한 특성을 가진 세 개별적 인격 혹은 실체임을 주장하였다. 단일성과 복수성, 즉 하나님은 한 본질을 가진 세 인격이시라는 것이다. 복수성은 하나님의 본체가 아니라 인격이라는 것이다.

 

동방교회의 이 신학자들은 주장하길, 세 인격의 각각은 단일한 신적 본질을 공유하며(오리겐과 아리우스의 존재론적 종속주의를 배제하여),아들과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인격적 존재를 수여받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단일성과 복수성은 동등하게 인정하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한 분 하나님을 인식하자마자, 즉시 세분의 영광의 빛을 보게 되며 세 분을 구별하자마자 즉시 한 분 하나님에게로 이끌린다.” 고 말했다.

 

세 인격들 간의 상호관계는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로 표현되었는데 그것은 세 인격들 각각의 상호내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상호내주가 요한복음에서 강조되었는데 거기서 아들은 아버지 품속에 혹은 아버지 옆에 계신다.(1:18)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아버지께 나아오지 못하며 사실 아들을 아는 것은 곧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14:6-7)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느냐?” (14:10) 예수님은 성령이 자신을 영화롭게 한다고 선포하면서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니 그러므로 내가 말하길 그가 나의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6:14-15) 그리고 기도 중에 말씀하시길,”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17:5) 예수님은 자기를 믿을 모든 자들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다 하나가 되어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17:21,23)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이 논리적 모순이라는 비판에 반대하지만 그 반대를 표현할 정확한 어휘를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철학적으로는 대단히 복잡하지만,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이 사용한 용어는 교회의 신학을 말할 수 없이 풍요롭게 만들었다.

 

 

동서방 교회의 긴장

 

동서 교회들 간의 차이점은 종종 과장되어왔다. 서방교회에서 처음에 일어난 그리스 용어에 대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동서방 교회의 교부들은 모두 본질이 하나이고 인격이 셋이라는 삼위일체 형식에 대해 일치하였다. 사실 이런 표현을 새로 만들어낸 사람은 라틴 교부인 터툴리안이었다.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뤄진 (나중에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성문화된) 보편교회적인 합의는 괄목할만한 것이었고 오늘날까지 교회의 고백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이고 신학적인) 차이점들로 인하여 결국 서방교회가 일방적으로 니케아 신조를 수정했을 때 1054년 동서방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고 말았다. 원래의 라틴어로는 성령이 성부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었는데, 로마교회가 또한 아들로부터”(에 필리오)라는 구절을 덧붙였다. 그래서 이것을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부른다. 이 일로 동방교회는 서방교회가 삼위일체 대신에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려 한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방교회가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은 스페인에서 다시 일어나려는 아리안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도(1215) 동서방 교회의 분열은 해결되지 못했다.

 

 

가톨릭의 합의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종교개혁의 공헌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보편교회의 신조들과 가톨릭교회의 합의된 교리를 확인한 것 외에 종교개혁자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기여한 것은 거의 없다고 왜곡한다. 그러나 존 칼빈은 동서방 교회의 이 오랜 논쟁에 통찰력 있게 기여하였다. 16세기에는 많은 고대의 이단들이(예를 들면, 신 아리안주의, 나중에 유니테리언주의로 불린 소시안주의) 다시 등장했기 때문에 칼빈은 자신의 목회에서 이에 대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칼빈은 주장하길,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하면서,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헛되고 공허한 생각이 머리에 떠돌 뿐이며 결국 참된 하나님이 배제될 것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한편으로는 종속론의 오류를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양태론의 오류를 피하려고 예민하게 조심하면서 하나님의 단일성과 동등성을 확증하였다. 그러면서 칼빈은 각 인격이 엄격하게 동일한 의미에서 하나님이시라는 서방교회의 의견을 강조하면서 또한 각 인격이 서로 구별되며 이 인격성은 단순한 관계적 개념이 아니라 구별된 실체, 즉 고유한 인격적 특성을 가진 구별된 존재라는 동방교회의 입장도 강조했다. 칼빈은 말하길, 각 인격은 각각 고유한 특질을 가진 완전한 신성으로 이해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질적이나 양적인 차이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본질의 단일성 자체는 인격성이 아니고 말하자면 제4의 요소인 삼위일체이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그들이 하시는 일을 떠나서는 결코 신적 본질에 직면하지 않는다.

 

나아가, 각 인격이 동일한 방법과 동일한 정도로 공유하는 한 본질 외에, 각 인격은 자신을 다른 인격과 구별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어거스틴 이후 서방교회가 전통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는데 부족한 점인 것 같다. 칼빈은, 각 인격들을 구별하는 인격적 특성과 함께 세 인격들이 동일하게 공유하는 본질적 특성에 동일한 비중을 두는 이런 관점으로 고대 (동서방교회)의 서로 다소간 충돌하는 의견들이 조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로부터 신적 속성을 받지는 않지만 인격적 존재를 받는다. 성부로부터 성자는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영원히 나오신다. 어떤 경우에도 본질은 나거나 나오지 않고 단지 인격이 그러하다. 성자는 아들이라 불리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신적 본질을 가진 실체적 존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외적인 사역으로 보아서도 분명하다.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난 (삼위)의 구별을 무시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말하자면, 성부는 모든 사역의 시작이시며, 만물의 원천이시고, 아들은 지혜와 모략 그리고 만물의 질서 잡힌 성향이시며, 성령은 그런 모든 사역

의 권능과 효력이시다.

 

이런 식으로, 칼빈은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말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예를 들면 니사의 그레고리는 말하길, 하나님의 모든 외적인 사역은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아들을 통하여 나타나고 성령 안에서 완성된다고 하였다.

 

 

결론 : 삼위일체 교리의 실제적인 유익

 

이 주제에 관한 모던 리포메이션 의 다른 논문들은 삼위일체 교리는 실제적인 함의를 풍성하게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옹호한다. 그러나 이전 역사의 기술적인 복잡함을 고려하면 이런 적절한 결론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어떤 시대에나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앙과 실천이 삼위일체 신앙으로 전적으로 정의되고 집중되어 있는가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단지 우리가 동의하기 어려운 정통 교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구속 역사의 한 가운데를 건너서 삼위간의 영원한 협약으로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성자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성부께 경배하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탄식하며 찬송한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으며 축복을 받는다. 성령의 권능 안에서 성자에 대한 성부의 말씀으로 쓸모없는 황무지가 아름다운 정원으로 꽃피우며 세상에 퍼져나간다.

 

우리는 단일 인격의 하나님이 아닌 성부의 자녀로 입양되었으며, 중보자이신 성자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었고 성령으로 그 성자와 그의 교회에 연합되었다. 로마서 11 36절의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바울의 송영은 이제 새로운 중요성을 가진다. 이 말이 의미는 모든 좋은 선물이 성부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성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부 못지않게 성자와 성령도 창조주이며 섭리주이시다. 성자 못지않게 성부와 성령도 우리의 구주이시며 주이시다. 성부와 성자 못지않게 성령은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다.

 

 

삼위일체(Trinity) 교리

2015-04-17 18:48:42


삼위일체 교리의 이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삼위일체적 신앙고백속에 둘러싸여 있다. 찬송에서 삼위일체를 찬양하고 사도신경으로 삼위일체를 고백하며 세례도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받는다. 그렇지만 기독교 역사상가장 논란이 많고 어려운 주제가 삼위일체 교리이며 그 결과 논쟁끝에 교회가 분열하기도 하고 다양한 이단들이 출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2천년 동안 심위일체 교리를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로 강조하고 고수해 왔다. 삼위일체(Trinity)는 삼위(Three Person)이란 용어와 일체(One Substance)라는 용어가 합쳐진 것이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용어 자체는 성경에 없는 단어이지만 성경에 나타나 있는 있는 하나님 개념을 잘 표현하는 적절한 용어인 것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용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용어가 담고 있는 개념이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삼위일체 교리에는 중요한 세가지 개념이 담겨 있다.  첫째는 하나님은 유일하고 참된 신이라는 고백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유대교와 공유하고 있는 대단히 근본적인 신관이다. 둘째는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복수로 표현한 경우들이 있고(창1:26) 또한 복수의 하나님을 동시에 언급한 경우도 나타난다.(시110:1) 신약성경에 오면 세 분의 하나님이 좀더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삼위 하나님이 동시에 나타난 사건이다.(마3:16-17) 사도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삼위 하나님의 존재를 언급하였다.(벧전 1:2) 그렇다면 이 두가지 진술은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닌가? 이런 모순을 설명하기 위하여 역사상 나타난 대표적인 것이 양태론인데, 양태론은 하나님인 한 분이신데 세가지 역할을 수행하신다는 것이다. 양태론은 삼위 하나님이 구별된 진정한 인격이 아니고 한 존재의 다양한 존재 양식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여기서 세번째 명제로 연결되는데, 그것은 세분 하나님이 모두 동등하고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별개의 인격적 존재라는 고백이다.

 

  요약하면 삼위일체 교리는 다음 세가지 명제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1. 하나님은 유일하신 한 분이시다.

2.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3. 세 하나님은 모두 동등하고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학자들은 대체로 다음 3가지 방식으로 세분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존재론적 설명인데 이는 존재론적으로 삼위 하나님 사이에는 어떤 서열이 없고 신적 속성이나 성품에 있어서 완전히 동등하다는 것인데 이것을 존재론적 삼위일체라고 한다.  둘째는 경륜적 설명인데, 이것은 삼위 하나님이 그 사역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신다는 것이다. 창조사역에서는 성부는 창조를 계획하셨고 성자는 창조의 명령이 이루어지게 하셨으며 성령은 창조의 질서를 세우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 사역에서는 성부는 구원을 계획하시어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성자는 성부에 순종하여 세상에 오심으로 구속계획을 실행하셨으며 성령은 성자가 성취하신 구속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역의 측면에서 보면 성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성자와 성령은 종속적이고 보조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삼위 하나님 간에 어떤 위계질서가 있는데 이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한다.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종합하면 삼위 하나님은 각기 완전한 신으로서 본성과 성품에서 동등하시지만 그 사역의 역할에서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삼위 하나님간의 관계를 상호내주, 즉 페리코레시스로 설명한다. 상호내주란 삼위 하나님이 서로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인데 성부가 성자와 성령안에, 성자는 성부와 성령안에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안에 완전하고 총체적으로 내주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상호내주 한다는 것은 존재가 서로 분리될 수 없이 연합되어 있으며 또한 사역에서도 서로 의존하고 협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이 하나이며 하나가 셋이라는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려고 자연적, 심리적, 사회적 유비들이 동원되어 왔는데 자연적, 심리적 유바는 "하나(Oneness)"에 대해서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셋(Three Persons)"에 대하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반면에 사회적 유비는 "셋"은 설명하나 "하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어떤 유비로도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하거나 설명하는데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가 이해나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 교리가 모순이라거나 비논리적이라고 주장하는 는 것은 인간의 교만이다. 차라리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신비에 속하는 영역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마땅한 태도일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이 피조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며 스스로 만족하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자존성과 독립성을 잘 드러낸다. 하나님의 신비가 피조물의 이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실천적 의미

 

  삼위일체는 단순히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삶에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나니이 삼위일체로 계시다는 것은 우리가 예배하고 신앙하는 대상인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라 세분이 하나를 이루신 분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어느 한 분을 예배하거나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가 일체로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기도문의 부름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것은 성부만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을 힘입어 성부께 나아가는 부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든 찬양하든 감사를 하든 우리의 모든 예배행위는 하나님 어느 한 분이 아니라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삼위일체되심은 하나님이 세분이시면서 하나로 연합된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다양성과 통일성을 완벽하게 구비하신 완벽한 공동체의 모델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주 만물도 각각의 다양성과  독특성 가운데 함께 연합하여 하나의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도록 만드셨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각각 부여받은 독특한 역할을 하면서 전체의 공생이라는 통일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는 개개인은 개성, 취향이 모두 다르지만 그 다양성 가운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존재로 지어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독특성과 다양성 그리고 개별성이 존중되면서도 그것이 대립과 분열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유지하고 공생을 추구하는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목적에 합당하다 할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었지만 그 몸을 이루는 각 지체들의 은사는 다양하므로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동시에 한 몸으로서 통일성을 이루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되심을 본받는 교회 본연의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삼위하나님이 일체를 이루시는 연합을 설명하는 상호내주(페리코레시스)는 삼위하나님은 각각 완전한 신이시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어니라 언제나 상호내주하시는 연합체 혹은 공동체로서 존재하시며 또한 항상 함께 협력하여 일하신다. 하나님이 그러히시듯이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과 모든 피조물도 그러한 것이다. 사람도 하나님의 상호내주를 닮아서 상호의존 관계로 지어졌다. 사람은 개별적인 인격이므로 서로 구별되지만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아렇게 사람은 자연과 사회속에서 관계를 맺는 존재로 만들어졌고 존재는 이미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관계를 벗어나 홀로 존재하려는 것이나 개인의 독립성와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의 존재방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페리코레시스의 실제가 가장 잘 나타나야 할 곳이 바로 교회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에서 페리코레시스의 관계를 회복하는 모델로 교회를 세우셨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모습을 반영한다. 교회는 상호내주와 상호의존이라는 페리코레시스적 삶을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창조주요 구원자인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이지만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 창조된 이 세상의 본질이기도 하다. 비록 죄로 말미암은 반역은 창조물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반영을 파괴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 삼위일체적 모습을 다시 회복하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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