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주의의 사회윤리
2015-04-16 00:32:18
대안주의의 사회윤리는 한마디로 말하면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가 아니라 성경적 현실주의(Biblical Realism)이다. 기독교 현실주의란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의 원리만을 제시한 것이지 실제적인 지침까지 제공한 것은 아니란 주장으로서 라인홀드 니버가 이 입장을 대표한다. 그는 불가능한 윤리적 이상의 현실적합성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 윤리의 초월적 성격을 인정해야 하며 그것의 현실 불가능성을 전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가르침은 개인적 종교윤리만을 염두에 둔 것이므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니버는 죄로 말미암은 인간 본성의 무능과 부패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이것은 동시에 윤리적 비관주의를 가져옴으로써 성경적 가르침의 윤리적 실현을 가능성을 위축시키고 성경적 가르침을 현실적 맥락에서 변형시킴으로써 그 급진성을 약화시키는 문제점이 있다.
이에 반해 성경적 현실주의는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을 위한 근본적인 원리이자 실제적인 지침이 된다는 입장으로서 메노나이트 전통을 따르는 하워드 요더,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이 입장을 대표한다. 그들은 예수 윤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직접적인 현실적합성을 가지며 규범적인 구속력을 갖는다고 주장하면서 만일 예수님의 모범이 규범적 모델이 될 수 없다면 그것은 윤리적 가현설주의가 된다고 말한다. 예수의 윤리는 당대의 로마제죽의 폭력적, 지배적 사회 정치 질서에 대항하는 사회 윤리로서 사회적, 윤리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배와 종속이라는 폭력에 기반을 둔 세속적 지도력이 아니라 섬김과 나눔에 근거한 하나님나라적 윤리와 지도력이다. 이처럼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를 세속적 규범과 대척적이며 대립적 맥락에서 파악하면서 기독교 공동체의 윤리적 독특성을 강조하는 이 관점은 교회론적 혹은 공동체 중심의 윤리라는 성격을 가진다. 게르하르트 로핑크도 이와 유사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구약의 토라와 신약의 예수 윤리에서 사회적 에토스를 강조하면서 이것을 교회공동체의 대조성이 근거하는 대조사회 윤리로 주장한다.
성경적 현실주의는 기독교 신앙고백과 윤리적 규범사이의 긴밀성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철저한 제자도를 요구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기존질서를 철저히 거부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줄하는 윤리적 대안이 된다. 결론적으로 이 윤리관은 성경본문을 기독교 윤리를 위한 규범으로 받아들이며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가시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열망이 있다. 이러한 급진적 제자도는 콘스탄틴적 기독교에 대한 결별이면서 1지배와 폭력에 기반을 두는 세상 질서에2 대한 거부와 저항으로 표현되는 대조 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윤리관은 성경적 가르침이 어느정도로 기독교 윤리의 현실적합성을 갖느냐는 문제를 지니고 있으며 실현불가능한 윤리적 이상주의에 머물 위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각주 1
아나뱁티스트는 세상과 교회의 철저한 반정립의 틀을 구축하였다. 세상은 교회와 공존할 수 없으며 세상 전체에서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현실은 이미 세상 전체에서 보편적으로 승리한 현실이 아니라 오직 구속받은 공동체 안에서 온전히 드러날 뿐이며 이 세상은 교회와 전혀 다른 존재로 규정된다.
각주 2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세상(코스모스)는 그리스도 밖에서 죄에의해 지배되고 죄로 오염된 세계 혹은 그런 삶의총체이며 인간의 죄성으로 왜곡되고 뒤틀려진 모든 삶의 방향과 사고들이다. 말하자면 세상은 하나님이 주되심이 부정되는 삶의 영역이요 하나님의 통치에 반하는 사회질서 및 제도를 말한다. 세상에 대한 아나뱁티스트의 관점은 세상을 타락한 권세로 보는 것이다. ..
- 아나뱁티스트는 세상과 교회의 철저한 반정립의 틀을 구축하였다. 세상은 교회와 공존할 수 없으며 세상 전체에서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현실은 이미 세상 전체에서 보편적으로 승리한 현실이 아니라 오직 구속받은 공동체 안에서 온전히 드러날 뿐이며 이 세상은 교회와 전혀 다른 존재로 규정된다. [본문으로]
-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세상(코스모스)는 그리스도 밖에서 죄에의해 지배되고 죄로 오염된 세계 혹은 그런 삶의총체이며 인간의 죄성으로 왜곡되고 뒤틀려진 모든 삶의 방향과 사고들이다. 말하자면 세상은 하나님이 주되심이 부정되는 삶의 영역이요 하나님의 통치에 반하는 사회질서 및 제도를 말한다. 세상에 대한 아나뱁티스트의 관점은 세상을 타락한 권세로 보는 것이다. 원래 권세들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였지만 죄의 침입으로 타락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수의 구속은 단지 죄사함만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에 대한 승리라고 말한다. 악한 구조나 권세로서의 세상에 대한 관점을 월터 윙크는 지배체제라고 설명한다. 그는 지배체제란 제도적인 삶의 한복판에 존재하는 비인격적 영적 실재로서 세상의 제도속에 악마적 영성으로 깃들어 있으면서 세상의 흐름을 지배하는 체제라고 설명한다. 윙크는 예수는 이 제배체제에 속하지 않으며 지배체제와 대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공동체는 지배체제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삶의 질서 즉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윙크는 복음이란 지배체제의 악에 대하여 그 상황에 따른 구체성을 갖는 구원이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아나뱁티스트적 대안주의 기독교
2015-04-15 22:40:56
대안주의 기독교가 가진 전제는 첫째로 세상을 선한 창조질서로 긍정하지 않고 악마적인 질서로 봄으로써 교회와 세상의 극명한 대조, 대립의 이원성을1 강조한다. 둘째는 그러므로 교회에만 소망이 있고 교회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아나벱티스트적 패러다임은 복음주의자처럼 복음 전파를 통한 세상의 복음화를 사명으로 찾지 않고, 기독교 세계관 처럼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사명으로 삼지도 않으며, 에큐메니칼 진영이나 해방신학처럼 세계의 변혁적 실천에서 사명을 찾지도 않는다. 그들은 다만 교회가 교회됨을 회복하여 교회의 본래성, 독특한 정체성을 드러내는데서 그 해답을 찾는다. 아나뱁티즘은 교회가 세상으로 나가기 보다는 교회답게 존재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교회됨의 원형의 키워드는 예수윤리, 희년, 십자가, 급진제자도, 대안 공동체 등이다. 아나뱁티즘은 대안주의 기독교의 대표적인 흐름중이 하나이다. 아나뱁티스트인 하워드 요더가 예수의 정치학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윤리와 교회의 사회참여 방식에 확기적인 방향성을 던진 이후에 이런 아나뱁티즘은 이런 대안주의 기독교의 주된 유형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성공회 교인인 스탠리 하우어워스나 총체적 복음주의자인 로날드 사이더, 짐 윌리스, 독일 국가교회를 반대한 게르하르트 로핑크, 인도의 복음주의 행동가 비샬 망갈와디 등도 모두 대안주의적 기독교의 흐름에 있다고 보여진다.
교회주의적 기독교는 복음이 실현될 자리를 세상이 아니라 교회안에 가두어 버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세상을 향한 부르심을 생각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기독교를 교회라는 제도화된 종교적 틀 안에서 해소해 버렸다. 이런 교회주의 기독교를 극복하게 한 것이 기독교 세게관이다. 기도굑 세계관은 그리도인들로 하여금 성속 이원론을 허물고 세상속에서 일상의 삶이 갖는 신앙의 의미를 갖게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세계관은 그리스도인을 세상으로 내밀기는 하였지만 세상 구조와 질서 앞에서 어떨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세계관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주었지만 세상을 변혁시킬 실천적 대응능력을 제시하는데는 실패하였다. 또한 기독교 세계관은 타락보다는 구원을 구원보다 창조에 강조점을 두고 세상을 선한 창조질서로 간주하여 지나치게 세상 긍정의 관점을 주었다. 기독교세계관은 그리스도의 왕적이고 보편적 통치를 강조하지만 그 통치가 아미 실현된 것만을 강조해서 그런지 아직 미완료된 그리스도의 통치와 구속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승리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세상에소 도피하지 말고 선한 창조의 세상을 긍정하라는 기독교세계관의 메시지는 때로는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세상 질서나 구조와 싸워야 할 논리적 구조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대안주의 기독교는 세상에서 교회의 가치를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역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의 교회의 존재 자체에서 찾는다. 교회의 세상을 위한 가장 큰 봉사는 교회가 믿음의 실제를 보여주고 나아가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패러다임을 교회론적 대안주의라고도 부른다. 교회가 세상 징서와 세상적 삶의 방식과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때 그것이 세상을 향한 강력한 대안이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으로 나가 세상 구조를 변혁하기 보다는 도리어 교회가 교회다움을 드러내어 교회가 세상과 다른 이질성과 독특성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사회변혁의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일종의 대안사회로 보고 하나님의 통치는 세계 전체에서가 아니라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구약윤리가 지향하는 대상은 이방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예수의 산상수훈은 전 인류가 아니라 제자공동체를 위한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세계형성을 위한 전략으로서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통해 대안 사회를 건설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의 사회,경제, 문화적 가치를 거부하고 저항하며 오히려 예수의 삶과 죽음에서 보여준 방식을 순종하는 급진적 제자도의 원리를 따라서 삶으로써 이 세상에 대안사회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를 대안사회로 이해하는 관점은 교회를 사회라고 정의하는데서 출발한다. 교회는 종교적 결사체나 종교적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위에 건설된 새로운 사회, 하나님의 통치가 가시화되어야 할 하나님의 사회, 성경적 가치와 규범에 따라 대안적 질서를 창출해내어야 할 대안사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하나의 사회로 보며 신약의 교회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가시적으로 나타내야 할 사회적 존재로 본다.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교회는 세상과는 구별되고 대조되는 삶의 방식을 가진 대조사회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이런 대조사회로서 교회 안에서 실현되어야 할 삶의 방식으로서 지배구조를 폐기하는 섬김의 공동체, 모든 종류의 폭력을 포기하는 평화의 공동체를 제시하였다. 세상 질서와 세상의 삶의 방식과 다른 교회의 대조성, 이질성을 말이 아니라 저존재 방식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핑크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국가기관도 아니고 종교기돤도 아니며 세상과 대조되는 질서로 부름받은 공동체적 사회라고 주장한다. 신약에서도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는 영적인 종교운동가가 아니라 세상과 구별되는 대조사회를 세우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과 대립관계를 설정하면서 그들만의 새로운 질서를 실현하는 대안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로핑크는 그의 대조사회론에서 그리스도인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대치될 수 없는 봉사는 교화가 참으로 교회되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로핑크는 대조사회라는 개념외에 대항사회라는2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교회의 새로운 실존방식이 세상에 도전하고 대항하는 기능을 한다는 의미이다. 대조사회가 세상과의 구별과 대비의 측면을 설명한다면 대항사회 개념은 교회의 대조성이 세상 질서에 대립하고 도전하는 측면을 설명한다.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형제인 노베르트 로핑크는 대조사회를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대안적 경제질서로 제시하면서 구약의 이스라엘 가운데 요구되었던 희년법을 예로 든다. 그는 희년법은 축적된 사회 구조의 모순을 청산하는 사회-경제적, 생태적 프로그램인데 이런 급진적인 사회변혁 프로그램은 이방 나라가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에서 실현되어야 할 대안적 질서였다고 것이다. 그러므로 토라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안에 대인적인 사회를 향성하여 세계를 변혁하시려는 일종의 사회적 구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제적 차원의 대조사회 개념은 하워드 요더, 아드레 트로끄메, 로널드 사이더 등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 특히 복음주의자인 로널드 사이더는 가난한 자의 문제는 희년, 인식년, 십일조를 통해 경제적 코이노니아를 실천하는 성경적 교회의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구속받은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는 전적으로 새로운 개인적, 사회적, 경제적 관계를 드러내야 한다고 말한다.
대안적 교회론은 세상문화와 적절한 타협과 균형을 유지하는 두왕국론의 적응주의적 방식이나 세상 전체의 변혁을 목표로하는 그리스도 왕적주권론의 변혁주의 방식이 아니라 세상 질서와의 대립, 대조 그리고 대항을 통해 대안사회로서의 교회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대안적 교회론을 간단히 이원론적 분리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대안적 교회론은 세상에서 탈출하거나 세상을 도피하는 부정적인 분리가 아니라 교회가 세상 구조와 질서를 거부하고 대항하여 교회의 교회됨을 가시화하는 것을 세상 변혁의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모트는 대안주의 전략을 비판하면서 교회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사회질서가 과연 세상의 관심을 끌거나 세상을 변화시킬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갖는다. 또한 대안주의 전략만이 유일한 사회변혁적 방법인가를 묻는다. 이미 존재하는 사회구조나 질서를 보완하고 잘 운영하면 더 안정적이고 현실성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 않는냐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향한 구체적인 정의 활동이 없이 대안사회 건설에만 집중할 때 또 다른 교회주의 적 게토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주 1
대안주의 세계관은 세상과 교회와의 철저한 반정립을 전제로 한다. 그들은 창조질서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로 간주하거나 하나님의 통치가 보편적으로 실현될 것을 낙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세상이 아니라 구속된 교회공동체 안에서 가시화된다.
각주 2
교회가 대항세력이라는 명제는 교회가 현실사회속에 존재하지만 현존하는 사회구조, 즉 기성체제나 지배구조에 대항하는 특징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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