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소고

16세기 종교개혁

16세기 종교개혁

2014-10-15 12:51:21


 

 14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교황권은 추락하고 세속권력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이 때 등장한 것이 면죄부였다. 세속권력의 관심사는 돈이었고 그들은 교회를 이용하여 자신이 지배하는 영토에서 다양한 헌금의 명목으로 돈을 거둬들이려고 하였다. 이런 배경하에서 면죄부도 발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면죄부는 세속권력과 교황권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돈을 거둬들이는데 면죄부를 신학적 도구로 이용한 것이다. 돈 문제로 신학을 왜곡하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은 진리를 가리는 일이고 망하는 길이었다. 면죄부는 로마교회의 보속교리에 기초하고 있는데 당시에는 세례를 받은 이후에 짓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고 이 문제를 위하여 성인들의 잉여공로 사상을 개발하여 면죄부로 발전시킨 것이다. 사실 면죄부가 처음으로 발행된 것은 12세기 십자군 전쟁 당시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당시 교황인 우르반 2세가 발행한 것이었다. 이후에 면죄부 발행은 남용되었고 14세기에는 교황의 권위가 추락되고 세속권력과 결탁하여 돈을 모으는 일에 집중하면서 각종 다양한 종류의 면죄부가 창안되었다. 이 당시에 면죄부는 일반화되어 시행되던 것이었는데 루터가 이것을 공격한 것이다.  사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계시한 것은 교회에 도전하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신학적 논쟁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때는 루터는 개혁을 상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종교 개혁은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지만 개혁이 성공한 곳은 독일 북부, 영국, 저지대 지역, 스위스, 댄마크, 스웨덴 등 주로 북부 유럽지역이었고 남유럽 지역은 카톨릭에 흡수되어 버린다. 남유럽 지역이 장원중심의 봉건 사회로서 봉건영주와 교권이 결탁한 신분 사회라면 북부 유럽은 상공업에 종사하는 신흥 부루주와들이 등장하는 사회였다. 북부 유럽에서 종교 개혁이 성공한 이유는 바로 바로 이 신흥 부루주와들이 종교개혁의 주도층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도 위그노들은 모두 상공업자 출신이었는데 종교 개혁에 실패하자 다수의 위그노들은 미국이나 영국으로 도피하게  된다. 신흥 부루주와들은 봉건 신분사회를 거부하였고 그들의 이런 요구에 종교개혁이 부합되엇던 것이다. 이에 반해 토지 자본에 기초한 계급사회인 귀족, 봉건 영주사회는 개혁을 반대하고 수구를 한 결과 남부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이 실패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막스베버는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라는 논문에서 개신교가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이렇듯 중세 경제구조의 변화가 종교개혁과 맞물리게 된 것이다. 중세 카톨릭의 몰락이 부가 교회로 집중하는 경제문제와 관련이 되듯이 종교개혁도 경제문제와 관련이 된 것이지 순전히 신학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부구조를 지탱하는 것은 하부구조인 것이다. 물론 루터는 순수하게 종교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종교개혁이 신학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100년전의 위클리프나 얀 후스도 신학적으로는 루터와 동일한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고 루터는 성공했다. 그것은 루터의 개혁에는 하부구조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부구조의 변화없이 상부구조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교리의 개혁만이 아니라 생활의 개혁도 있었는데 직업의 귀천을 부인하는 직업소명론이 그것이다. 직업소명론은 종교개혁의 주도층인 상공업에 종사하던 부루주와들에게 부합하는 생활개혁이었다.

 

  또한 루터의 성공 배경에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있었다. 당시 루터의 정치적 후원자는 독일 작센의 영주인 프레드린 선제후가 있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피선거권과 선거권을 가진 7명의 선제후(4명의 영주와 3명의 대주교로 구성됨) 에 의하여 투표로 결정되었는데  선제후인 프레드릭의 정치적 영향력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알 5세에 맘 먹었다. 프레드릭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신학적 관심보다도 경제적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영지인 작센의 재물이 헌금을 통해 로마 교회로 유입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차에 루터의 개혁을 이용하여 로마교의 영향에서 분리할 기회로 삼은 것이다. 루터와 프레드릭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한 배에 타게 된 것이다. 이것이 루터의 개혁이 성공한 정치적 배경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배경은 루터 개혁의 태생적 한계로 작용하였다.  1525년에 루터의 만인 제사장설에 자극되어 독일에서 농민봉기운동이 일어나는데 초기의 긍정적 자세와는 달리 루터는 농민봉기의 진압을 정당시하게 되는데 이는 아마도 프레드릭의 정치적 압력에 굴복한 결과일 것이다. 이후에 루터의 개혁은 보수 반동화되기 시작한다. 로마 카톨릭을 공동의 적으로 삼을 때는  루터와 프레드릭은 한 배를 탔지만 농만 봉기이후에 루터와 프레드릭은 다른 배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루터는 농민봉기를 반대함으로써 영주의 편을 들게된다. 루터는 시대 인식에 순진하였고 그래서 루터의 개혁은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출발하였으며 나중에는 보수 반동화로 변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종교개혁은 대부분 영주나 시의회의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이루어졌는데 이는 국가의 힘을 얻어서 종교개혁을 행정적으로 처리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주류종교개혁(Magistrial Reformation) 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주류종교개혁은 그것이 시의회나 영주의 이익에 반하게 될 때 정치적 압력을 받아서 보수화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칼빈의 세르베투스 사건도 이런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박해하고 죽이는 사건은 국가 공권력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것인데 이는 당시 주류종교 개혁이 국가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중세 말기 로마 카톨릭이 그랬듯이 종교개혁이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신앙이 디르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던 자들이 또 다른 사람을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를 한 것이다. 주류종교개혁의 이런 한계에 도전한 운동이 재세례파 운동이다. 이 운동은 처음에 펠릭스 만츠를 비롯한 쯔빙글리의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츠빙글리가 오직 성경만을 외치지만 그의 개혁이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유아세례의 부당성을 거론하기 시작하고 정교유착의 폐해를 지적하며 정교분리를 주장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재세례파들이었다. 16세기는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으로 당시 서유럽 국가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국가 안보의 유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재세례파의 징집거부나 유아세례 거부는 국가체제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결국 재세례파는 로마 카톨릭은 물론 주류종교개혁 그룹의 핍박을 받아 엄청난 희생을 치루게 되니 이렇게 재세례파의 비극적 역사가 시작된다.

 

  종교개혁은 중세 역사와의 단절을 가져왔는데 이는 마치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같이 버린 셈이다.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을 반대하다가 중세 역사까지 부인한 것이다. 한 예로 종교개혁은 중세 수도원 전통을 붕괴시켜버렸는데 이후 개신교 역사에서 수도원 역사가 증발되어 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세 역사는 로마 카톨릭만의 역사가 아니라 기독교의 소중한 역사인데 종교개혁자들은 중세를 부인하고 자신들의 신학적 정당성을 교부역사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이렇게 되어 개신교는 중세 역사에 무지하게 되었고 당시 기독교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세 역사로 부터 배우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개신교는 역사의 연속성을 잃어버리고 중세를 암흑기나 단지 로마 카톨릭의 역사로만 치부하고 중세 1000년을 건너뛰고 교부 시대에서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이어가려고 한 것이다. 사실 루터의 신학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중세 역사에서 다 나왔던 신학이다. 특히 위클리프나 얀 후스의 신학은 루터의 신학과 거의 동일하였다. 그러니까 루터의 신학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1세기부터 발전되어 온 중세 교리와 신학에서 나온 것이다. 종교개혁의 신학은 중세 신학의 연속성 상에서 보아야 한다. 다만 이전 시대와 다른 점은 루터 시대에 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점이다. 기독교 역사 1500년이 루터를 만들어 낸 것이지 루터가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16세기 신학을 우상화하는 개신교의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신학은 역사의 산물이고 신학은 늘 상황적이었다. 역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신학이다.

 

 

질문 1

신학의 역사의 산물이고 신학은 늘 상황적이라면 신학의 연구 대상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초역사적 혹은 상황을 뛰어넘는 영원한 진리가 신학에 의해 훼손될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요? 

 

질문 2

정교분리가 된 이후에 오늘날 개신교는 16세기 주류 종교개혁이 가지고 있던 한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볼 수 있나요? 

 

 

 

  

 

'나의 소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정기- 솔로몬과 분열 왕국  (0) 2023.05.06
사사제도와 왕정제도  (0) 2023.05.06
르네상스  (0) 2023.05.06
중세의 수도원 운동  (0) 2023.05.06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0) 2023.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