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개관[구약과 신약의 관계]- 김성진
2014-09-22 00:20:40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관심사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이해는 창1장1절에서 시작해야한다. 창세기 1장 1절은 창조자와 주권자가 한 하나님이심을 계시한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에서 말하듯이 창조질서 계시에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셨는데 형상이란 우상 곧 “쩔렘”을 가리킨다. 우상이란 곧 신의 형상으로서 신을 대표하는 기능을 가진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사람이 하나님의 대리자란 의미이다. 하나님을 사람이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로서 지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 질서이다. 이 창조 질서를 만드신 창조주가 곧 구속주이다 . 하나님은 항상 한 하나님이시니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 주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70%가 구약이다. 사람들은 신약을 구약보다 우선하지만 구약 없이 신약은 없다 구약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는 구약을 성취하신 분이시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구약의 맥락에서 이해해야한다. 고대 문서인 구약의 글쓰기방식은 현대의 우리와 다름을 인식해야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데 하나님은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의 파트너로 택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중심으로 성경을 읽으면 안 된다. 인물 중심이 아니라 그 인물을 통해 계시되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사를 이루는 일, 이것이 역사의 의미이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선언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자신을 창조주로 계시하신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쩔렘”, 곧 형상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지어진 것이고 하나님은 자신의 대리인인 사람을 통해서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성경관점이 무엇인가? 성경기록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 기록이 아니고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성경을 여러 가지 서론 다른 전승의 편집이라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가 아니라 주제에 맞추어 사건을 선택적으로 기록한다. 이것이 성경의 역사 기록 방식이다. 일반 역사처럼 사건을 육하원칙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주제를 중심으로 사건을 선별적으로 기록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은 왜 라는 질문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사건은 주제와 관련성이 중요하다. 성경을 연대기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 성경에서 사건을 기록한 의미는 주제 관련성에서 찾아야 한다. 큰 그림 하에서 개별 사건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창11장까지는 하나님이 창조주와 심판 주라는 객관적 하나님의 모습으로 기록하였는데 12장부터 표현이 부드러워지면서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먼저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에게 먼저 세 가지 약속을 하시고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 세 가지 약속이란 자손, 땅, 복의 세 가지이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하나님 관심사가 드러나 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언제나 신실하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바로 이 약속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시지만 언약의 파트너인 사람은 언약에 신실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씨, 땅, 복 이 세 가지 약속을 이루시는 일에 집중하신다.
창세기의 후반부는 요셉이란 인물의 기록이 주를 이루지만 요셉의 기능은 씨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고 정작 씨의 주인공은 장자가 아닌 유다였다. 유다의 형인 르우벤과 시므온은 장자권을 상실했고 유대가 실질적인 장자권을 갖게 된다. 요셉 이야기의 중간에 유다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유대 이야기에는 수혼 제도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땅 무르기와 함께 나타난 구약의 고엘 시스템 즉 기업 무르기 제도이다. 고엘, 곧 기업 무르는 자가 갖는 의무는 토지뿐 아니라 멸문될 그 가문의 복원까지 책임을 떠맡는다. 결국 고엘 시스템은 곧 수혼 제도를 통한 씨의 회복과 토지 무르기를 통한 땅의 회복으로 멸문될 가문을 복원시키는 제도이다. 결국 베레스와 오벳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는 고엘 시스템의 산물이다. 하나님은 고엘 시스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다.
이스라엘은 애굽생활을 통해 씨가 번성하고 출애굽하게 된다.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나라로 삼겠다고 하시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수단으로 사용하시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율법과 성막제도를 주시는데 성막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만나는 장소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장소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이방과 구별하는 민족정체성을 부여하였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 씨의 약속이 성취된다. 이제는 땅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데 여호수아부터 땅의 약속이 성취되기 시작한다. 가나안 정복에서 유독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두 전투만 기록한 것은 땅의 약속은 오직 순종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나안 정복 당시 여호수아의 실수는 가나안 족속을 철저히 진멸한 것이 아니라 성 중심으로 점령한 것이고 또 자기를 이어갈 이스라엘 지도자를 세우는데 실패한 것이다.
다윗이 등장하면서 사울과 다윗이 비교되는데 사울의 실수는 멋대로 제사를 드린 것과 아말렉 전쟁이다. 사실 사울에게 이것이 큰 흠은 아닌듯하나 결국 불순종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다윗은 미미한 처지에서 출발했지만 승승장구하게 되는데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지만 사울은 혼합주의자였다. 다윗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땅의 약속이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복의 약속이 다윗이 통치하는 나라의 복으로 이뤄진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씨와 땅과 복의 약속이 다윗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 다윗의 중요성이 있다. 그러나 솔로몬은 제국을 꿈꾸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그는 이방나라와 혼인 외교를 통해 제국을 꿈꾸었지만 오히려 나라는 분열되고 언약이 파괴되기 시작한다. 이후 북조, 남조는 잇달아 멸망하였고 이후 땅의 언약이 성취된 나라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의 언약을 실패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을 이루신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언약을 완전히 성취하신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고 소개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진정으로 성취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었다. 당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원래 의도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스께서 성취하신 이것이 바로 천국이다. 하나님나라가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구약 언약이 하나님나라로 성취되었으니 구약의 복은 천국의 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순종으로 언약이 완성된 것이니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언약이 성취된 것이다. 계시록은 하나님나라가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신약이 말하는 복음이다. 고로 구약의 맥락을 모르고 신약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약개관 [성경의 역사성과 통일성]-김성진
2014-09-29 14:34:15
1. 성경의 역사성과 통일성
신약의 관점으로 구약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구약의 관점으로 신약을 바라보아야 한다. 신약 성경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가르친 것 처럼 계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성경을 이해하여야 한다. 구약성경은 미완성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충족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역사성을 고려한 성경읽기이다. 고대 말시온 이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오늘날도 하나님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 강조하는 예수 중심주의는 창조와 구원을 분리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곧 구원주 하나님이시다. 창조주와 구원주는 같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미 구약에서 다 수립된 것이고 그 계획을 성취하신 분이 그리스도이다. 구약성경을 보면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끌어내려는 예수 중심적 구약 해석은 구약의 계시를 억지로 해석하게 만들거나 무시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순서대로(구약--> 신약)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자연스레 균형있게 읽을 수 있다.
신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모르는 것은 구약성경 없이 신약만을 읽기 때문이다. 삶이 없는 교리, 이원론적 신앙생활의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구약은 구체적 삶의 원리를 가르친다. 구원중심주의로는 삶의 실제를 알 수 없다.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언지 알려면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만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구약에서 발원하여 신약으로 흘러가는 언약적 물결의 흐름을 타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여야 한다. 구약은 신약을 이해하기 위한 부교재가 아니다. 신약을 공부하고 그 다음에 구약을 공부할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해야 한다. 계시가 주어진 순서를 유념해야 한다. 창세기를 알아야 요한계시록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구약을 모르면 신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신약은 구약의 메시지를 배경으로 하여 쓰여진 것이다.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은혜라고 하는 것은 세대주의적 발상이다. 구약에도 은혜가 있고 신약에도 율법이 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 한 분이시고 이 하나님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시다. 개혁주의 신학은 바로 구약, 신약 성경의 통일성에 기반하고 있다. 구약에는 율법을 범했을 때 그 죄악을 해결하는 은혜의 방도로 제사 제도가 주어져 있다. 구약의 제사 제도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낸 제도이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그 동안 신약, 예수 그리스도, 율법의 완성, 교리 이런 것에 너무 치중하여 왔다.
2. 구약 성경의 가치
구약 성경이란 말 자체가 신약적 전제를 가진 표현이다. 그 신학적 전제란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이며 또한 언약의 중심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과 히브리 성경은 동일한데 다만 분류법이 좀 다르다. 특이한 것은 히브리성경에는 역사서가 전부 선지서(느비임)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인데 이는 히브리인들의 역사관이 어떠함을 보여준다. 히브리인들은 예언 개념을 단지 미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일을 미래를 위해 해석하는 것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시므로 과거의 하나님의 언약 역사는 미래의 언약 역사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역사 가운데 사람의 행동보다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 중요하다. 인물 중심의 구약해석은 잘못이다. 구약 성경은 철저히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어떻게 행동하시는가를 계시한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는 사변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적 행동을 통해서 계시된다. 성경을 읽지 않고 교리중심의 신앙이 문제가 되는 이유가 여기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를 어떻게 주관하시는지 보아야 한다. 사람의 믿음이든 불신앙이든 성공이든 실패든지 하나님은 그것들을 사용하셔서 역사를 이끄신다.
3. 구약 성경의 정경화
정경(canon) 이란 표준 , 기준이란 의미이다. 정경이 아닌 것에는 외경과 위경이 있다. 그렇다면 정경의 기준이 무엇이며 정경화가 이루어진 시점은 언제인가? 그동안은 주후 90년경 랍비들의 종교회의인 암니야 종교회의에서 정경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으나 그 당시엔 이미 확립된 정경중에서 어떤 책의 가치를 논의한 흔적만 있을 뿐이다.) 주전 190년경의 벤시라 집회서에서 이미 정경이 율법과 선지서 그리고 조상들의 다른 책이라고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주전 2세기에는 현재의 구약 성경이 정경으로 인정되었으리라 추축한다.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1947년에 발견된 사해사본(주전 120년경)에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 성경이 모두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은 구약의 정경화가 대략 주전 200년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약에서 인용된 구약에 대한 권위가 흔들리게 된다. 그러면 정경화 기준은 무엇인가? 성경에는 성경외에 언급된 다른 문서들이 많이있다. 정경화의 분명한 기준은 성경 자체가 가진 증거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문서가 기록되고 그것이 공동체에 회람되면서 그 문세를 읽는 화중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이런 과정을 거쳐서 공동체가 정경 여부를 분별하게 된 것이다. 모세 오경은 일찌감치 정경화되었고 나머지 성경은 주전 1400년 부터 주전 400년까지 약 천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정경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는다면 성령 하나님이 성경을 정경으로 확립하시고 또한 보존하셨다고 믿어야 한다. 정경화에 대한 이 이상의 설명을 시도하는 것은 무리이다.
4. 구약 성경의 신뢰성
성경이 무오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원본에 대하여 말하여야 한다. 원본 이후에 이루어진 수많은 필사본과 번역본에 오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오늘날 성경의 원본은 한조각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성경이 무오한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신뢰성이 없다는 말인가? 1940년 이전만 해도 가장 오래된 구약성경 사본은 기원후 900년 경에 기록된 맛소라 사본뿐이 었다. 이 사본은 모세오경이 기록된 시점으로 부터 2300년, 가장 후대에 기록된 말라기와도 1300년의 시간적 격차가 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현재 구약 성경의 신뢰도를 의심하였다. 그런데 1947년에 사해사본이 주전 150년 경에 존재했던 쿰란공동체의 동굴에서 발견되었고 그래서 구약 성경의 기원이 12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해사본이 1200년후에 필사된 맛소라 사본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이는 성경을 필사한 서기관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성경을 필사하였는지를 입증한 것이었다. 결국 성경은 무오하지는 않지만 필사의 실수가 의미를 변질시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구약의 대가 월터 카이저는 40년을 구약성경을 연구한 후에 말하길 성경은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고 말하였다. 필사나 번역된 성경은 무오하지는 않지만 그 의미 전달력은 훼손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구약개관[구약성경의 해석]- 김성진
2014-09-29 17:39:59
1. 구약 성경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속성이나 이름을 아는 것이 아니고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해 우리의 가치관과 삶이 변화되어지는 전인격적인 앎을 의미한다. 결국 성경의 목적은 역사적 사실의 기술이나 신화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심으로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앎으로 참 진리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성경이 기록되었기에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가야 한다. 그런데 성경이 기록된 시대와 우리 시대사이에는 역사적, 문학적, 문화적, 사회적 공백이 존재한다. 따라서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이런 공백을 메꾸기 위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으면 자기류의 해석, 시대 착오적 해석, 피상적인 해석을 초래한다. 신학이란 성경에 자신을 계시해 놓으신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약과 구약의 관계는 많은 오류와 오해속에서 이해되었다. 말시온 같은 고대의 이단들은 신약안에 있는 모든 구약적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전통은 슐라이어마허나 하르낙, 키에르케고르 같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들은 구약을 이교도 종교의 폐물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옛언약과 새언약의 관계를 잘못 이해한데서 기인한다. 분명한 사실은 만일 구약 성경이 불필요한 것이라면 신약 성경은 성경으로서 존재가치를 상실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의 32%가 구약 성경을 직 간접적으로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약 성경을 자주 인용하는 신약 성경의 증거를 보아도 신약 성경을 이해하는데 구약성경은 필수불가결의 조건임을 알 수있다. 신약과 구약은 두개의 다른 언약이 하나의 밀접한 관계를 갖는 통일된 신학으로 구성된 하나의 계시이다. 특히 구약에는 300여개의 메시아 예언이 존재하는데 이 예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죽음들을 예언적인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구약은 그리스도를 향해 점점 명확한 빛을 밝혀주며 신약은 그리스도 이후 그 분의 사역과 그 구속으로 말미암은 결과를 보여준다. 이런 점진적 관계속에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이해하여야 한다. 신약이 없다면 구약의 미완성의 책이되고 구약이 없다면 신약은 표적이 없이 쏘아진 화살이 된다.
2. 구약 신학의 중심 개념은 무엇인가?
구약신학이 해야 할 일은 구약 성경이 진술하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통합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서는 구약 성경을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 정도로 이해하여 왔다. 이것은 구약의 역사적인 독자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이해이다. 구약 성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뿐 아니라 그 자체가 메시아가 오시기 이전에 하나님이 내리신 계시이다. 따라서 구약의 내용을 늘 신약과 연관시켜 보아야 하지만 구약 성경이 구체적인 역사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바 자체를 잘 알아보아야 한다. 앞에 것은 그동안 교회에서 많이 해 온 반면에 뒤의 것은 우리가 상당히 소홀히 해왔다. 문제는 구약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말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하나로 묶는 끈, 이것을 체계나 틀 혹은 알맹이나 중심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발터 아이크롯은 언약이라, 월터 카이저는 약속이라, 엘머 마텐스는 하나님의 계획, 구원, 공동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삶의 풍요라고 했다. 이에 반해 폰 라트는 구약 성경의 중심을 찾는 것을 반대했다. 현재로서는 이스라엘의 유일신을 구약 신학의 중심으로 보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드러나는 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고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런 면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는 성경 자체의 증거를 바탕으로 성경을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특히 그의 선택받은 백성과의 관계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 해석이다. 하나님은 자신과 창조하신 피조물과의 관계를 먼저 설정하셨고 그 관계를 유지하지 위한 다양한 형태의 법들을 주셨다. 그러므로 구약 신학의 과제는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성경을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여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인류 역사의 관계, 그리고 구속자이신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 신학을 이해하는데는 계시의 점진적 성취라는 기본적 전제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의 통일성과 유기성을 늘 염두에 두고 구약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태초부터 계획하시고 행하신 구원 역사가 어떻게 마지막 날까지 이루어 가는지를 드러내고 있음을 항상 인지하여 성경의 모든 인물과 사건을 이 구원 역사 안에서 해석하여야 한다.
구약개관 [구약성경의 무오성과 신뢰성]
2014-10-13 21:19:58
1. 성경의 저자가 성령이라면 인간 저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세 가지 성경관이 나타나는데 첫째 하나님이 독자에게 말씀하실 때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칼 바르트는 성경은 사람이 기록했지만 하나님이 그 기록을 통해 말씀하실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하며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객관성을 부인하고 주관성을 주장했다. 바르트는 성경의 초월성을 주장하지만 주관적 판단에 의한 초월성을 주장한 것으로서 종교개혁자들의 그것과 달리 인간적 성경관이다. 두 번째는 구술이론이다. 이것은 인간 저자는 성령이 불러주시는 대로 기계적으로 받아 적었다는 주장으로서 성령 하나님의 역할만 강조하고 인간 저저들의 특색, 능력의 반영을 고려하지 않은 기계적 영감설이다. 세 번째는 복음주의, 개혁주의가 받아들이는 완전 축자영감설이다. 이는 성경의 신적 무오성과 인간 저자의 다양성을 함께 인정하는 균형 잡힌 성경관이다.
2.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이 변해야 한다.
인물 중심의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중심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은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사건은 사실의 보도가 아니라 신학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 38장에서 에서 요셉 스토리 중간에 갑자기 유다 이야기가 끼어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유대의 혈통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이야기의 핵심이 요셉이란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분명한 의도와 관점을 가지고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관점의 전환이 중요하다.
3. 성경의 보존과 전달과정
사해 사본이 발견되기 이전에 가장 오래된 구약 사본은 AD 900년경 필사된 맛소라 사본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이 기록된 모세시대 보다 2300년, 가장 후대에 기록된 말라기와는 1300년의 시간적 격차가 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구약 성경 필사의 정확성을 의심하여 왔다. 그런데 1947년 주전 200년경 필사된 사해 사본이 발견되었고 이것이 주후 900년경 기록된 맛소라 사본과 거의 일치함으로써 성경 사본의 신뢰성이 제고되었다. ( 참고로 출애굽은 기준 주전 1446년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열왕기상 6장 1절에 근거한다.) 맛소라 사본에는 히브리어 모음이 표시되어 있고 관주 및 다른 사본과의 비교 주석이 달려있다. 이 맛소라 사본을 BHS 라고 부른다. 이외에 중요한 사본으로는 사마리아 오경, 아람어 사본인 탈굼 사본, 시리아 사본인 페쉬라 사본 등이 있고 최초의 번역본으로는 주전 300년경 헬라어로 번역된 70인경이 있다.
4.구약 성경 연구의 필요성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신약에서 말하는 성경은 모두 구약 성경이다. 성경 연구에서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성경 기록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기록된 시대와 우리 시대 사이에 세 가지 공백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역사적 공백, 문학적 공백 그리고 사회적 문화적 공백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 연구의 목적은 바른 해석인데 이 공백을 이해하지 못하면 바른 해석하기 어렵다. 본문 자체의 의미를 연구하는 것이 바로 본문 주해(Exegesis)인데 위에서 말한 공백을 알지 못하면 자기 생각을 가지고 본문을 해석하는 Eisegesis가 되기 쉽다. 이것은 시대착오적이고 피상적인 해석이 되고 마는데 특히 인물중심의 해석이 그러하다. 성경을 읽는 것이 성경 연구의 출발점인데 그 다음 단계가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위에서 말한 공백을 줄이기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해석단계인데 이것은 성경 메시지의 문학적 신학적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 세 단계가 성경 연구에 필요한 단계이다. 설교나 신학은 모두 성경 해석을 돕는 보조적 수단이지 성경 해석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바른 성경 해석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을 만남으로 삶이 변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하지 않고 설교나 신학 서적에만 의존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매우 잘못된 것이다. 성경 해석은 누가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의무이다.
구약개관 [구약성경을 읽는 관점]- 김성진
2014-10-20 19:17:24
구약 성경을 읽는 관점
그 동안 구약과 신약은 이분화 되어 왔다. 특히 예수 중심의 구약해석이나 구약 설교를 신약과 연관 시켜 설교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의 풍성한 삶의 원리들이 나타나있다. 신약과 구약은 분리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신약의 관점이나 예수 중심으로 구약 성경을 보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구약의 다양성과 수많은 관점을 예수중심이란 시각으로만 볼 수 없다.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이 없을 때도 그 자체로 완전하고 통일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된 것이 모두 구약 성경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신뢰한 모범을 보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통일성과 완전성을 인정하셨다. 그런데 예수 중심으로만 구약을 보면 구약 성경이 가진 통일성과 응집력이 깨어진다. 신약중심으로 구약을 읽으면 신약과 연결이 안 되는 구약의 많은 부분을 넘겨버리게 된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배치된 순서대로 읽는 것이 성경의 통일성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 성경 해석의 방향이 신약에서 구약이 아니라 구약에서 신약으로 가야한다. 유기적인 신구약 말씀은 주어진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 성경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해야 한다.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유일한 목표가 아니다. 이것은 이기적이고 비성경적 구원관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더 큰 목표가 있다. 하나님의 구원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는 소명이 뒤따른다. 구원의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는 책망과 상급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잘 살아야 한다.
고대의 마르시온 이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너무 다르다고 하면서 구약 폐기를 주장하며 신약 안에 있는 구약적인 요소들도 거부하였다. 이런 전통은 슐라이어마허, 하르낙, 키에르케고르 같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들은 구약성경을 이교도 종교의 폐물이라 주장하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무시하고 신약 성경만 중시하려고 한다. 자유주의나 신정통주의자들이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런 태도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를 잘못 이해한데서 기인한다. 신구약 성경의 모든 계시는 동등한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의 전재로 하고 어느 한쪽을 경시하면 안된다. 구약 성경의 길고 다양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간다. 만약 구약 성경이 없다면 신약 성경도 없다. 신약성경의 32%가 구약 인용이다. 신구약 성경을 분리하면 하나님에 대한 부분적 편파적 이해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면 신약에서 구약의 메시아 예언으로 이사야 7장 14절이 인용되었는데 우리는 이것을 그저 메시아의 동정녀 탄생을 구약에서 미리 예언한 것으로만 알고 이 구절이 가진 구약적 배경에는 관심이 없다. 구약본문의 배경을 알아야 신약에서 그 본문을 인용한 본의를 알 수 있다. 이사야의 그 구절은 단순히 메시아 탄생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그 예언이 성취된 역사적 패턴을 따라서 하나님의 메시아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는 하나님과 그 백성의 매우 다양하고 풍성한 관계가 나타난다. 구약에는 언약 백성의 다양한 삶의 실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을 모르고 신약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신약적 관점으로 구약을 보면 성경을 좁게 만든다. 구약은 풍성하고 다양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점을 향해 달려간다. 그 동안 구약 성경을 보는 관점이 너무 좁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중심이 아니란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동안 신약 학자들은 이런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큰 구원 계획을 이루신 분이시므로 하나님의 큰 구원 계획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이 맞다. 계시록의 궁극적 이미지는 회복된 에덴동산이다. 특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계시록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회복을 말하고 있다. 창조와 구원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큰 그림 속에서 보아야 한다.
구약개관 [언약신학1]- 김성진
2014-10-20 20:02:53
1. 성경적 언약의 개념
구약 성경의 대 주제는 언약이다. 구약과 신약의 공통분모는 언약(Testament)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록한 것이므로 성경 속에서 언약의 개념은 중요하다. 언약이란 하나님과 다양한 시대에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 회복이란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회복이며 나아가 창조질서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런 넓은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 인생이 부딪히는 모든 문제에 답을 가지고 있다. 주체적인 성경읽기가 바른 신앙생활에 핵심이다. 어떤 목회자도 이것을 대신해 줄 수 잆다. 목회자나 신학자는 바른 성경 읽기를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만이 우리에게 진리를 준다. 성경을 꾸준히 읽지 않고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성경의 큰 주제가 언약인데 언약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다. 성경은 이 약속에 관한 책이다. 언약을 히브리어로 "베리트"라고 하는데 언약을 맺는다는 말을 히브리어로는 "카라트 베리트' 즉 언약을 자른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 언약에서 나타나는데 언약을 맺을 때 짐승을 잘라서 갈라놓는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고대의 조약이나 언약의 형식은 생명을 담보로 한 언약이었는데 짐승을 갈라서 그 가운데를 지나감으로써 언약을 배반하면 그 짐승처럼 갈라져 죽임을 당할 것임을 의미한 것이다. 동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끼리 언약을 맺을 때는 양 당사자가 모두 갈라진 짐승 사이를 지나가지만 종주권 조약과 같은 경우에는 지위가 낮은 자만 걸어간다. 이렇게 고대 근동의 언약은 목숨을 건 언약이며 언약 배반의 댓가는 생명이었다. 이렇게 성경은 고대 근동민족들이 해왔던 언약의 방식으로 언약을 맺었는데 이는 언약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또 충분히 이해하는 방식으로 맺어졌음을 의미한다. 참고로 십일조 제도도 마찬가지이다. 십일조는 고대 근동에서 강한 상대방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었는데 하나님을 이 제도를 율법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15장에는 갈라진 짐승 사이를 언약의 강한 당사자인 하나님이 지나가시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언약 배반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암시일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은 언약에 신실하지 못한 경우에는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실 것을 맹세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을 바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다윗 언약에서도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의 언약적 불신실함에도 불구하고 언약적 신실함을 지키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윗 언약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세상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따라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으로 지속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다. 구약 역사에는 언약 백성의 신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엄청나게 나타난다. 신구약 성경은 모두 언약에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맺은 언약이 생명을 담보로 한 언약이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두 가지 제도를 제정하셨는데 그것이 율법과 제사 제도이다. 구약의 율법에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났다면 제사 제도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 있다. 제사 제도가 다양한 이유는 인간의 삶의 다양성을 반영한다. 제사 제도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회복의 원리가 나타나 있다. 결혼은 언약의 유비로도 사용되는데 결혼 원리는 안식법과 함께 변하지 않는 창조질서이다. 결혼과 안식 이 두 가지는 시대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원리이다.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는 창조 질서이다.
2. 성경적 언약의 특성
성경적 언약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는데 첫째는 약정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언약의 당사자들 사이에 확고한 맹세나 언약의 성취를 위한 서로간의 의무가 포함되는 법적인 계약 관계를 의미한다. 두 번째는 피로 맺은 약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계약은 생명을 걸고 맺은 약정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언약 배반에는 반드시 죽음이 뒤따르게 되어있는 엄중한 약정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사역하는 약정이다. 언약은 하나님과 그 백성 간에 맺는 언약이므로 쌍방적이지만 언약을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언약의 특성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사역하시는 피로 맺은 약정" 이다. 언약은 고대 근동의 계약 형식을 따라서 맺어졌으므로 고대 근동의 언약이 가진 언약 형식을 다음과 같이 반영하고 있다.
(1) 전문: 언약 양 당사자의 관계나 신분을 규정한다.
(2) 역사적 서문: 언약 양 당사자 간의 과거에 맺은 관계의 역사적 사례를 언급한다.
(3) 언약 조항들 : 봉신(언약의 약한 당사자)이 지켜야 할 규정을 명시- 구약의 율법이 여기에 해당된다
(4) 조약의 보관 및 낭독: 조약을 두 부로 만들어 양 당사자가 각자 한 부씩을 주로 신전에 보관한다.
십계명의 돌판이 두개로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5) 상벌의 규정 및 축복과 저주 : 조약의 준수, 배반에 따른 규정
(6) 조약 체결 의식- 증인들을 불러 모으고 피를 뿌리고 잔치를 벌인다.
구약개관[언약신학2]- 김성진
2014-10-26 22:05:21
1. 창조와 언약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이 단순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그 자체보다 구원 이후, 하나님과 관계속에서 누리는 삶이 중요하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지만 구원이후의 삶에는 우리의 노력이 중요하다. 하나님과 언약 백성의 관계형성 이것이 구원 역사이다. 성경에는 언약 당사자의 변화나 상황의 변화에 따라 여러가지 형태의 언약이 나타난다. 그러나 언약에서 언약의 대상자나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중요하다. 언약의 양식은 바뀔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시다. 창세기 1.2장에는 언약이란 말은 안나오지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맺음이 분명히 나타난다. 이것을 우리는 창조의 계약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창조 계약은 일반적인 면과 구체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데 일반적인 면은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넓은 책임과 관련되고 구체적인 면은 하나님이 주신 금령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한 책임과 관련된다.
창조 계약의 일반적인 면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 포함된 안식일, 결혼, 노동의 규례이다. 인간은 이 규례에 순종해야 한다. 이 세가지 규례는 하나님이 피조세계에 세우신 창조 질서로서 변할 수 없는 내재적 원칙이다. 창조질서로서의 이 세가지 규례는 가장 중요한 삶의 원리이다. 율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창조질서이다. 지혜를 바탕으로 세워진 창조 질서가 죄로 인하여 깨어졌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지혜의 기능을 가지고 오셔서 깨어진 창조 질서를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혜로 첫 창조를 이루셨듯이 창조 질서가 회복되는 새 하늘과 새 땅도 지혜로 만드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 활동과 관련하여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는데 " 복되게 하사" 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지적하셨듯이 "인간을 위하여" 안식일이 생겨난 것을 의미한다. 이 날에 여호와는 창조 사역을 쉬심으로 안식의 본을 보이셨고 이 안식을 통해 평안을 얻으셨다.(출 31:17)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날과 관련하여 "평안을 얻어야 한다" (출23:12) 또한 안식일은 거룩한 날인데 거룩의 첫번째 개념은 잘라냄 곧 분리이고 두번째는 잘라낸 것을 구별하는 성별이다. 안식일의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제7일을 다른 날로 부터 분리시켜서 성별한 것인데 그 목적은 이 날에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여 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샬롬을 누리는 것이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타난 안식일 계명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가 다르게 나타난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이 쉬셨으므로 안식하라는 것이고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이 애굽에서 해방시키셨므로 안식하라고 한다. 전자가 창조 질서에 따른 안식이라면 후자는 구원 질서에 따른 안식이다. 그러니까 안식일 개념에는 창조와 구원의 개념이 모두 있다. 창조하신 하나님이 쉬셨으니까 우리도 쉬어야 하고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으니까 쉬어야 한다. 이렇게 안식일 개념에는 창조주 하나님, 구원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쉼의 근본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창조 질서의 파괴로 간주하여 엄중한 형벌이 뒤따랐다. 창조질서는 삶의 원리인데 그것을 깨뜨리는 것은 피조물임을 거부하는 것이고 언약 백성임을 부인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안식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엄중한 언약의 표증으로 기능하였다.(출 31:13, 17)
하나님은 창조후에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를 주셨는데 이것이 창조질서이다. 창조질서에는 자연법칙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과 관련된 원리도 포함되는데 그것이 바로 안식, 결혼 노동이다. 안식은 생태계 전체와 연관되지만 결혼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원리이다. 결혼제도의 첫째 원리는 혼자서는 불완전한 인간을 남여의 결혼을 통해 완전하데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완전한 인간존재를 완전한 인간존재롤 만드는 창조질서가 결혼제도이다. 결혼제도는 사림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드는 창조질서이다. 그러므로 독신의 은사를 일반화하면 안된다. 여성이 없다면 남성은 창조질서안에 들어갈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결혼제도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중 가장 오묘한 섭리이다.
노동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이다. 인간은 일을 안하면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도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다. 이것은 노동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하나의 목적임을 의미한다. 노동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니밍 주신 사명이다. 하나님이 생태계에 세우신 첫번째 원리가 안식이고 이 안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노동이다. 6일의 노동이 없다면 7일째 안식도 의미가 없어진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모양이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을 대신하는 것이고 그 일이 바로 이 땅을 경작한다고 표현한 다스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의 가능성은 노동에서 찾아야 한다. 일을 하지 않으면 안식도 하나님의 백성이란 의미도 없어진다. 노동은 대단히 놀라운 창조질서이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미를 갖게된다. 노동은 하나님의 형상을 ㅗ만들어진 인간의 필수적인 역할이다.
2. 창조와 지혜
잠언 8장은 하나님이 지혜를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 도구이며 세상을 만드는 청사진으로 묘사되고 있다. 창세기 1장에 따르면 지혜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셈이며 요한복음 1장에 따르면 지혜가 바로 로고스인 셈이다. 그러나 지혜가 곧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다. 잠언에 따르면 지혜는 창조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지혜의 기능을 가진 분이시지 지혜 자체라고 말할 수 없다. 지혜는 창조의 도구였으며 창조 이후에는 창조의 질서가 되었다. 우리에게 창조질서로서의 지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삶의 원리로서의 지혜는 창조 질서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삶은 세가지 차원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째가 하나님과의 관계, 둘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셋째는 피조 세계와의 관계이다. 첫째 관계는 지혜는 언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는 것이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창조 질서에 맞는 삶이다.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전체 지식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악과 금령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경계를 지어놓은 것으로서 사람이 피조물임을 명심하라는 상징이다. 죄는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한 것이고 피조물이 자신의 경계를 넘어간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은 다양한 관계속에서 존재하고 살아간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창조질서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는데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을 대리하여 다스리는 존재로 지으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기능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대리인으로 아담만 세운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셨고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질서를 제시하셨는데 이것이 율법이고 윤리이다. 이것이 두번째 관계에서의 창조 질서이다. 사람들과의 다양한 관계속에서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지혜이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
세번째 관계는 사람을 둘러싼 환경과의 관계이다. 이것은 다스리는 자로서 사람이 자연세계나 다양한 사회 시스템과 맺는 관계이다. 자원을 사용하고 환경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책임이다.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을 훼손하는 것은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환경 신학은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여야 한다.
이 삼중적 관계속에서 각 관계를 균형있게 만족시키는 것이 지혜이다. 지혜는 삶 가운데 훈련되어야 하며 하나님께 구하여 받아야 한다. 지혜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훈련되고 완성되어가는 것이다. 물론 삼중 관계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환경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속에서 나타나야 하는 창조질서는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는다. 이 삼중 관계속에서 창조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다스리는 자가 된 사람의 기능적 역활에 합당한 삶이다.
구약개관[언약신학3]- 김성진
2014-11-30 22:47:33
언약은 쌍방적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이고 주권적으로 주어진 약속이다. 마지막 까지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 언약의 특징이다. 성경인물들은 불완전한 자 들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여 언약을 이루시며 인간의 실수를 통해서도 역사하신다. 성경은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서 해석해야 한다. 인간의 좌와 비참한 역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된다. 이렇게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발견하면 미레에 걱정할게 없다. 인간의 실수까지 사용하여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는데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신약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대표되는 구약을 떠나서는 해석하지 못한다. 신약과 구약을 분리하면 신약은 힘을 잃어버린다. 신약은 구약의 성취로 보아야 한다.
아담 언약- 시작의 언약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창조질서의 파괴는 심판으로 귀결되어야만 하나 하나님은 구속의 계약으로 인류를 보존하신다. 창세기 3:14-19은 구속계약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계약의 규정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먼저 하나님은 시탄에게 심판을 선포하신다. 사탄에게 최종적인 패배가 선언되고 사탄과 첫 인류는 영원한 대적의 관계가 된다. 여기서 사탄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나타나는데 사탄의 후소은 첫인류의 죄악으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죄악의 품성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여인의 후손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인류를 의미한다. 이 두 인류의 대립은 인간 역사의 큰 축울 이루며 긴 역사의 투쟁을 예고한다. 특히 3:15에서 사탄과 여인의 후손의 대립에서 여인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적으로 지칭하는 바 우리는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부른다. 남자와 여자에게는 각각 복과 저주가 선포되었는데 남자에게는 삶을 위한 음식을 주시지만 수고를 더불어 주시고 여자에게는 생육하는 임신을 주시나 해산의 고통을 더불어 주셨다. 그리고 남자 여자 모두에게 죽음이라는 저주가 임하였다.
창조 세계안에는 하나님의 완벽성이 투영되었고 창조 언약에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있다. 창조질서는 하나님, 사람, 피조물과의 관계의 질서이다. 그런데 이 창조질서가 인간의 죄로 무너졌다. 선악을 알게하는 지식이란 신지식 혹은 모든 지식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선악과 금령을 범한 것은 인간이 신의 경지를 넘어가려한 것이고 그 결과 창조질서가 무너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도 반역하게 되었고 약육강식의 세계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심판하시는데 사탄에게는 멸망의 심판을하시나 사람에게는 회복을 위한 심판을 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저주와 소망을 함께 주시는데 이것이 아담언약이고 시작의 언약이다.
노아 언약- 보존의 언약
이후에도 죄악의 역사는 반복되고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이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지개를 통한 약속을 주시는데 이것이 보전의 언약이다. 피채 먹지 말라는 규율이나 사형제도를 명하신 것은 보존의 언약으로 주어진 것이다. 노아 언약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 언약과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땅을 정복하라는 문화명령은 빠져있다. 그러나 노아계약에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전망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은헤는 노아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특성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노아 언약은 보전의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므로 하나님의 완성의 때까지 세상의 자연질서가 보존될 것을 약속하셨다.
홍수후에 인간을 보전하시겠다는 약속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하는 생명 존중의 명령에서 명백해진다. 노아언약은 창조질서는 보존하신다는 약속이다. 이제 하나님은 칭조질서를 파괴하지 않고 문화를 점령함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신다. 문화란 하나님나라이다. 이제 하나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나라 통치원리인 율법이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나라를 세워가신다. 하나님나라를 이 세상에 세워가는 것 이것이 바로 문화이다.
아브라함 언약- 약속의 언약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아브라함이 등장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자손, 땅, 복이라는 3가지 약속을 하신다. 이 약속의 목적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고 그들이 그곳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심으로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세계선교의 비전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배타적이고 패쇄적인 되었다.아브라함 언약은 약속의 언약으로서 주권적으로 맺어진 피의 약정이다. 잘라진 동물 사이로 하나님이 지나가신 것은 아브라함 후손의 죄를 하나님이 죽으심으로 언약을 성취하신다는 의미이다. 아브라함 언약의 표증은 할례이다. 할례는 구르다 껍질을 벗긴다는 뜻인데 그 의미는 순결성을 유지하거나 민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신약에서 이방인들에게 보존언약에서 주어진 피채 먹지 말라는 요구는 유효하나 할례는 제외된다. 모세도 할례를 마음에 하라고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 그리고 복, 이 세가지를 약속하셨다. 창세기 15장에 나타난 아브라함 계약의 공식적인 수립은 주권적으로 맺어진 피의 약정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계약의 약속을 정하셨다. 이 계약은 동의나 협정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명령의 형태이다. 언약의 방식은 그 시대 풍습을 따라서 동물을 쪼개어 벌려놓고 목숨을 걸고 서약을 했는데 하나님은 직접 동물이 쪼개진 사이를 지나감으로써 계약이 세워지게(잘려지게) 되었는데 이 모습은 계약관계의 은혜적인 특징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계약의 모든 약속이 실현되어야 할 책임을 하나님 자신이 맡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저주의 맹세로서 그 약속을 다짐하셨다.
아브라함 계약에서 처음으로 할례가 나타나는데 할례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계약적 표적(sign)이었다. 이 예식의 의미는 모세 시대에 강화되었으니 모세는 육체만 아니라 마음속에 할례를 행라고 가르쳤다.(신명기 10:16, 산명기 30:6) 그러므로 할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생활에 필요한 내부적 정화를 의미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생명을 걸고 서약한 것은 후에 구약 역사 전체에서 뚜렷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모세의 계약으로 형식을 바뀌었지만 아브라함 계약이 갖는 효력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계약을 어길 때 아브라함 계약에 나타난 저주를 받게되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도 아브라함 계약이 이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히브리서 9:15-20, 예수님의 성만찬)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 언약의 계약적 저주와 희생제물로써 자신의 몸을 바치셨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은 찢겨진 것이다.
모세 언약- 율법의 언약
애굽에서 430년은 이스라엘을 양육하시고 가나안 백성들의 죄가 관영하게 될 때를 기다린 시간이었다. 출애급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출애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형성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라 개념을 준 것이 모세 언약이다. 모세언약은 율법언약이다 613개조 율법은 나라를 세우기 위한 헌법으로 주어진 것이다. 나라를 구성하는 요소가 영토, 백성, 법이라면 영토를 빼고 백성과 법이 준비된 것이다. 영토는 나중에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을 통해서 주어진다. 이런 점에서 모세 언약은 다윗 시대를 준비한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과 삶의 규칙으로 주어진 것이다. 모세 언약은 이전 언약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율법으로 형식과 체계를 표준화한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백성을 바르게 세우는 수단이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다.
여호수아 이후 지도자 부재와 혼돈의 시대가 사사시대이다. 죄악의 사이클이 6번 돌아간다. 사사기 17-21장을 보면 모세의 손자가 미가의 집에서 우상의 제사장 노릇을 하고 나중에는 단 지파를 따라간다. 종교 시스템의 붕괴로 레위지파 사람들이 먹고 살수 없게된 것이다. 레위 사람 처가 죽는 사건으로 공동체 내전이 발생하고 베냐민 지파가 거의 붕괴되어 버린다. 룻기는 동일한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이야기인데 사사기와 의도적인 연결을 하고 있다. 룻기는 다윗이 준비되는 이야기를 통해 어두운 사사시대에 빛을 비추고 소망을 던져준다. 사무엘을 통해 사사시대가 정리되고 왕정기로 넘어간다. 신명기 17장을 보면 왕정제도는 이미 주어진 것이었는데 이스라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이방처럼 왕을 달라고 요구한다. 사울왕은 인간적으로 완벽했지만 하나님에게 마음이 갈라진 자였다. 그는가나안 사람같이 혼합주의 신관을 가진 자였다. 다윗의 탁월성은 하나님을 향한 일관된 마음이다. 비록 인간적 조건으로는 사울만 못하나 다윗은 잘못을 회개할 줄 알았으나 사울은 회개하지 않는 자였다. 이후 왕국이 분열되고 다윗의 흐름과 사울의 흐름으로 양분된다.
모세의 계약은 아담에서 시작하여 노아와 아브라함으로 이어진 하나님과의 계약관계가 법적인 차원에서 갱신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보편적 언약이 파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구체화되고 실체화되는 과정이다. 모세 계약은 하나님의 뜻이 외형적으로 기록된 구체화된 최종 요약이라는 특징이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법이 성문화되고 법령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아브라함 계약의 은혜로운 약속이 갖는 가치를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 언약후 400년후에 나온 율법 계약이 이전 계약을 폐지할 수는 없다.(갈라디아 3:17) 모세 계약은 하나님의 구원목적의 전체와 기능적으로 또 점진적으로 연관되며 이전의 계약들 보다 더 발전된 계약이다. 특히 모세 계약은 계약의 백성을 국가화하는데서 진보를 나타낸다. 그러나 모세 계약은 이후에 이어지는 모든 계약보다는 미숙하다. 다윗 계약은 이스라엘 위에 대표적인 왕을 영원히 세운다는 점에서 모세계약보다 더 전진한 개념이다.
다윗의 시대는 나라의 약속이 일차적으로 다 이루어진 시대이다. 아브라함 언약에서 주어진 3가지 약속이 다 이루어진 것이다. 다윗 시대에 비로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토를 다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다윗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복의 약속은 다윗왕국에게 주어진 평화와 풍요로 성취되었다. 이렇게 영토, 백성, 복의 약속이 일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다윗 언약은 왕국의 언약이다. 다윗 언약에서 "너의 아들"이란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다윗의 아들인 메시야를 가리킨다. 또한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집을 지어주신다고 할때 "집"은 다윗 왕조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인 예수 그리스도까지 흘러가는 개념이다. 그러나 다윗은 밧세바 사건을 전환점으로 하강곡선을 그리고 이전의 명예나 인정을 회복하지 못한다. 그의 아들 솔로몬도 다윗과 같은 패턴으로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추락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르호보암 때에는 주전 930년에 왕국이 분열되고 북조는 주전 722년 남조는 주전 586년에 멸망한다. 멸망이후에는 신약시대에 이르기 까지 다윗 왕국의 회복은 없었다. 그렇다면 다윗의 왕권이 영원하리라는 다윗 언약은 어떻게 된 것인가?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목적은 구약에서 다윗계약에 최고의 실현단계를 맞게 된다. 왕국만이 온 것이 아니라 왕도 왔고 법궤가 예루살렘에 왔고 하나님 자신은 그의 왕권을 다윗의 보좌와 연결하신다. 다윗계약의 핵심에는 임마누엘 원칙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사무엘상 7:3-9)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집을 지어주신다는 것은 후손에 대한 언약으로서 바로 다윗 왕조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은 다윗왕조를 세우실 것이며 다윗왕조는 하나님의 영원한 집을 세울 것이다. 그러나 은혜의 순서는 먼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다윗 왕조를 세우시고 그 다음 다윗왕조가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계열의 왕권을 통해 왕으로서 그의 영원히 거하실 집을 이스라엘에 유지시키실 것이다. 다윗계약에서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삼하 7:14) 사이에 세워진 관계는 메시아가 올 때 완성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이 두 아들 직분의 최종 성취로서 나타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몹시 징계하시면서도 유다와 이스라엘과는 은혜롭게 관계하시며 다윗 계약하에서 하신 약속을 잊지 않은신다.(왕상11:3) 그러나 유다의 죄악으로 하나님나라가 이스라엘에서 실현되었던 그 수준은 한계에 도달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지만 그 나라는 앞으로 올 실체의 그림자였다. 다윗 계약에는 조건이 있는데 이스라엘이 계약의 축복에 참여하려면 규정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다윗의 계약 이전에 아브라함 계약의 성취에 대해 하나님은 책임을 떠 맡으시고 이스라엘이 배반을 해도 계약의 목적을 확실히 실현해 가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에 영원히 앉아 전 세계를 의로 다스릴 것이다. 그는 임마누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의 왕위와 하나님의 왕위가 합병될 것이다. 이렇게 다윗의 계약은 조건적인 면을 갖고 있어 왕위가 끝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 계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셔서 다윗의 왕위가 영원하게 하신 것이다.
새 언약- 회복의 언약, 완성의 언약
새 언약이란 말은 구약의 언약과는 다른 새로운 언약이란 의미가 아니라 구약에서 약속된 것이 완성된 언약이란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의 최종적 성취이며 또한 다윗 언약의 성취이다. 다윗언약에 주어진 왕국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로 이루어졌다. 구약의 모든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모아진다. 그래서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에레미야 30-32장은 장차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질 나라를 예언하는데 이 예언을 통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킬 정치적 지도자를 기대해왔다. 그러나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질 진정한 다윗 왕국은 예수 그리스를 통해 성취되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3가지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유대인에 국한된 혈족개념이 아니라 열방의 모든 신자들에게로 확장되었고 영토도 가나안 땅이 아니라 온 세상으로 확대되었다. 이스라엘을 통해 계획하셨던 세계 선교의 비전이 성취된 것이다. 그리고 복의 개념도 회복의 개념으로 확장된다. 이것은 다윗나라의 회복이 아니라 죄로 무너졌던 창조 질서의 회복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관계, 사람과 관계, 자연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창조 세계에 투영된 하나님의 완벽성이 회복됨으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왕같은 제사장이 되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것이다. 계시록이 말하는 새하늘과 새 땅이 바로 창조 질서가 회복된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다윗 언약은 새 언약을 통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그것을 아직은 완벽하게 누리고 살지 못하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선포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나라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유다의 멸망으로 다윗언약은 파기되었는가? 이스라엘 후기 역사의 선지자들은 계약 파괴자에 대한 심판의 불가피성을 주장했지만 동시에 그들은 파멸을 뛰어넘는 희망을 선언했다. 그 희망은 약속의 땅으로 복귀, 예배의 회복, 메시아적 왕의 회복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이런 희망에 대한 하나의 통일된 주제는 새 언약에 대한 것이었다. 예레미야 30-32장에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이 준비되는데 그 내용은 약속의 땅으로 복귀, 하나님의 복의 회복, 하나님의 이전 약속의 성취, 성령역사에 의한 내적 소생, 죄에 대한 완전한 용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합, 새 언약의 영원성(종말론적 성격) 등이다. 새 언약 신학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에서 신학적 이상으로서의 이스라엘로 전환을 의미했다.
구약개관[여호와 하나님]-김성진
2014-12-07 22:05:39
하나님의 자기 계시
창조로 시작되는 성경의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다. 성경 기록의 목적은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하려는 것이다. 창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고 창조질서에는 하나님의 완벽하신 성품이 반영되어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으로 창조 질서가 무너졌고 하나님은 무너진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길을 준비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간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며 또한 구속적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창세기 38장에 유다와 다말 사건이 요셉 이야기의 흐름을 끊으면서 갑자기 나타나는데 이것을 인간의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 사건은 유다의 계보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중요성과 그 사역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준다. 성경은 언제나 구속사적 관점에서 필요한 사건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사건이 하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이루시려는지를 드러내기 위한 선택적 기록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분의 자기계시인 성경이다. 성경 안에서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으며 성경을 벗어난 계시는 전부 거짓이다. 하나님의 뜻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계시된다. 말씀은 방향을 제시하고 기도는 그 방향을 구체적으로 찾는 이정표를 제시한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구절인 "하나님은 영이시니"(요한복음 4:24 )라는 개념은 구약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내기 위해 신인동형적이나 신인동정적 표현으로 계시하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들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영이시란 말의 의미는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넘어 하나님을 알수 없다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은 성경계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
하나님은 계시의 수단으로 "여호와의 사자"(히브리어 malak)를 보내신다. '말악'은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이며 하나님의 전령으로서 사람인 선지자나 제사장 혹은 하나님의 천사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인 하나님의 천사는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시되어 나타날 때가 있는데 이는 천사가 일인칭으로 변화되면서 하나님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 신현의 큰 특징인데 이런 현상은 구약의 선지들과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도 나타난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얼굴"이란 표현도 등장하는데 이는 실제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현현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임재의 은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얼굴을 비추신다는 것은 함께 하신다는 의미로 얼굴을 숨기신다는 것은 버리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영광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카보드(kabod)는 무겁다(kad)라는 형용사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무거움, 풍요함, 명예, 영광 등으로 해석된다. 인간의 영광은 소유물로 나타나는데(창31:1) 이 단어가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신적 능력의 현현을 의미한다.(출16:7) 하나님의 영관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할 때는 특정한 장소에 제한적으로 나타나는 제한적 임재를(출 24:16, 40:34-35, 왕상8:11) 의미할 때도 있고 혹은 온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보편적 임재를(민14:21, 대상 16:24, 사6:3) 의미할 때도 있다. 하나님의 임재로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요한 17:1)
하나님의 모습과 속성
성경에서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인간이 형태를 가지신 분으로 묘사한다. 이런 신인동형적 표현들 때문에 19세기 이후 학자들은 성경을 인간의 작품으로, 또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의 상상으로 만든 인간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정도로 인식하였다. 이는 구약성경을 제한된 인간의 욕망이 신이라는 인간보다 덜 제한된 존재를 만들어낸 신화로 본 것이다. 그러나 신인동형적 표현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만든 인간 욕망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에게 내려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신인동형적 표현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 이해의 수준으로 낮춘 것이다. 신인동형적 묘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표현한 것으로서 이를테면 하나님의 성육신적 자기계시라고 할 수 있다.
신인동형적 표현은 인간과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인 이런 신인동형적 표현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접촉점을 만들어 주신 것인데 이는 신인동형적 표현이 하나님을 잘 드러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아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자계시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자계시의 목적은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며 또 그 관계를 회복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계시가 나타난 말씀에 대한 이해와 체험읋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신인동형적 표현의 최종적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정점이다.(히브리서 1:1)
신인동형적 표현이 하나님을 인간의 외적 모습을 따라 묘사한 것이라면 신인동정적 표현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감정을 가지신 것처럼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순종이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 표현한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후회하신다는 표현은 인간의 행동이 하나님의 기대에 맞지 않아 슬퍼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쩰렘)'이 대리 통치자로서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기능적 역할을 의미한다면 '하나님의 모양(드무트)'은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속성으로서 지정의를 의미할 것인데 신인동정적 표현은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속성을 하나님께 투사하여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의 인격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다양하게 계시하시는 의미는 그 이름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며 그 백성의 삶속에서 적극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이름들은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행동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과 함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드러내는 함축적인 의미를 갖는다.
"엘(EL) "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셈족어에서 신적존재를 의미한다. 엘로힘(Elohim)은 "엘"의 극존칭 3인칭 복수형으로서 최고의 신으로서 주로 창조주를 가리킨다. 이런 명칭은 자연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강조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감을 강조하는 이름이다. 이 명칭은 복합명사로서 사용되는데 예를 들면 "엘 샤다이" 는(창17:1) 하나님의 높고 강한 속성을 강조할 때, "엘 알리온"은(창14:18-19, 시50:14) 지극히 높은 하나님을, "엘 올람"은(창21:33, 사40:28) 영원하신 하나님을, "엘 로에"는(창16:13)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낸다.
출애굽기 3:14절에 처음 나타나는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은 일반적인 신적 존재보다는 더 구체적이고 언약적인 문맥 속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낼 때 주로 이 이름을 쓰는데 이 이름은 계약 관계를 밝히는 특별한 이름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름이다. 이 말이 함축하는 의미는 언젠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그의 백성에게 나타나실 때 완전하게 보일 것이다. (겔37:26-28) 이 이름은 모세 시대이후 부터 이스라엘의 종교를 이방의 종교와 구별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스라엘과의 어떤 관계 속에서 복합명사의 형태를 띠고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여호와 이레"는(창22:14) 바라보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여호와 닛시" 는(출17:15) 깃발을 들고 앞장서시는 하나님을, "여호와 샬롬"은(삿6:24)은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을, "여호와 로이"는(시23:1) 목자처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여호와 쯔바오트(sebaot)"는 (삼상17:45)는 전사이신 만군의 하나님을, "여호와 멜렉"은 왕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유일신 사상
고대 근동의 신관은 기능적으로 전문화된 다신론적 신관인데 반해 유일신 사상은 고대 근동에서 이스라엘에 유일한 신관이다. 유일신 사상은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신관으로서 세계 어느 종교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신관이다.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서 유일신 사상은 점진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인식되어 갔고 모세 시대에 뚜렷하게 인지되었다. 모세 율법의 핵심은 바로 유일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다. 유일신 사상이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난 곳이 신명기 6:4 소위 쉐마 명령이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신 것이 혼합주의 신관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서 하나님과 다른 신을 같이 섬기는 것인데 이는 유일신 사상에 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
하나님의 성품은 첫째는 하나님의 자기계시 속에 드러나고 둘째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계시이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개념은 두려우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복을 주시는 것뿐 아니라 심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능력은 또한 하나님의 질투이다(출20:5, 34:14) "질투하는 하나님“(el kanna)라는 히브리어의 기본 의미는 하나님의 특권과 하나님의 권리들의 필수적인 자기 유지를 위한 자기주장이다. 질투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특권이고 자기주장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질투는 결국 피조물과 공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의 독특한 능력에서 기인한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개념은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근거가 된다.
“단절하다, 자르다”는 의미인 히브리어 "거룩"(kadoshl)은 존재론적이고 내면적인 개념이다. 거룩함은 주로 하나님 자신에게만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어떤 존재와도 구별되는 하나님의 존재적 구별성을 가리킨다. 이차적으로는 물건이나 장소들과 관련을 맺는 것이다.(출15:11, 사40:25) 거룩은 하나님과의 가까운 정도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우냐에 따라서 거룩의 농도가 달라진다. 성막의 지성소에서 가까운 장소가 그렇듯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와의 거리 차이에 따라서 거룩의 농도가 달라진다. 거룩의 기념은 분리의 개념과 함께 하나님과의 친밀의 기념이다. 세상과 분리되는 것은 곧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내면적 친밀도에 따라서 거룩의 정도가 좌우된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신32:4의 모세의 노래 중에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하는 표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근본적 사상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도덕적 영역에서 그의 주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란 행동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현이다. 또한 하나님의 의는 언약관계 속에서 모든 창조질서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광의의 의미도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지옥도 심판도 없다는 얘기가 나오고 이런 하나님을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한다. 만일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무의미해지고 대속이나 종말이 불필요하고 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회개하면 언제든지 하나님이 용서하신다고 하지만 죄를 반복하면 그건 회개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공의와 함께 하나님의 헤세드(chesed)를 말한다. 헤세드는 하나님에 대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로서 구약성경에 135번 나타난다. 헤세드는 다양한 의미를 갖는데 보통 자비, 인자, 언약적 사랑, 변함없는 사랑, 언약에 대한 하나남의 성실성 등으로 번역된다. 이 말이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경건이나 헌신을 의미한다. 사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헤세드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피조물과 관계하시는 하나의 방식이다. 창조 질서의 붕괴를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면 붕괴된 질서를 회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헤세드이다. 공의와 헤세드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창조 질서안의 하나의 개념으로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 및 세상과 관계하는 하나님의 질서이다.
구약개관[율법1]- 김성진
2014-12-27 17:56:54
신약에서 율법이 부정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율법은 없어질 수 없는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백성 사이의 헌법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율법이 없다면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도 사라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오신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원리를 제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왜 율법을 주셨는가를 이해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출애굽이후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겠고 하셨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이룰 세계 선교의 뜻을 보여주신 것이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예배의 본을 보이는 직분이듯이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의 사명은 열방이 보고 배울 수 있는 선교학교가 되는 것이다. 다신교를 배경으로 하는 고대 근동에서 이스라엘만이 유일하게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모세를 통해 율법언약을 맺으면서 율법을 주셨는데 이 율법이 이스라엘을 다른 주변 나라와 구별되는 독특한 백성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613개 조항으로 구성된 율법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 삼으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제사장 나라가 되는 이스라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율법에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브라함이 나왔던 바빌론 땅으로 다시 원위치 시키기고 새로 시작하게 만드신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의 목표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 세계선교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는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불순종하게 되자 나라가 멸망한 것은 그 존재의 이유가 상실된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을 잘못된 선민의식으로 세계선교의 비전을 잃어버린 것이고 남북조가 멸망하여 바빌론 땅으로 원위치하여 제2차 성전시대에 다시 시작하게 하신 것이다. 두번째 기회를 주신 것인데 그들은 이 기회도 잘 살리지 못한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기다리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서계선교의 교두보로 세우신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의 독특성을 드러내는 삶의 원리로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 나아가 백성간의 관계를 규율하면서 모든 상황에서의 삶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613개조 율법이 삶의 모든 세세한 상황을 다 규율하는 것은 아니고 큰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나머지는 그 법정신을 해석하여 적용하도록 하신다. 이렇게 하면 삶의 모든 정황에 율법을 적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결국 율법은 종교적 삶의 기준이며 언약백성의 삶의 원리인 바 율법의 목적은 (1)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형성 (2)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바른 관계 형성 및 유지 (3)언약 백성의 삶의 원리 제공, 이 세 가지로 요약된다.
구약 율법에는 두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무엇을 하라거나 하지말라는 명령으로 주어진 필연적 법(apodictic law)이고 다른 하나는 만일 무엇을 하면 무엇한다는 조건법(casuistic law)인데 필연적 법은 주로 심계명과 같은 절대법이고 조건법은 음식법과 같은 상대적 명령이다. 이런 율법들은 구약에서 크게 5개의 율법모음집이 발견되는데 십계명, 언약의 책(출20-23장) 장막계명(출25-40), 레위기 계명(레1-27장) 신명기 계명(신12-26장)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절대법인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두번 나타나는데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편집상의 실수로 중복된 것이 아니라 언약의 당사자가 출애굽 1세대에서 2세대로 바뀌었기 때문에 언약을 갱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완성된 제사법은 항존적 계명이 아닐므로 오늘날 지킬 필요가 없지만 십계명은 오늘날도 지켜야 하는 항존적 계명이다.
구약개관[율법2]- 김성진
2014-12-29 01:34:03
구약율법에서 십계명이 가장 먼저 주어졌고 또한 가장 중요하다. 십계명의 구조는 1-4계명에서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 즉 수직적 관계를 규율하고 5-10계명에서는 백성간의 관계 즉 수평적 관계를 규율하는데 신약에서 말하듯이 십계명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된다. 십계명의 서문에는 먼저 구속역사에 대한 기술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고대 근동에서 언약맺는 방식을 따른 것으로서 강한 당사자를 중심으로 언약문서를 작성하는 형식이다. 고대근동의 언약 문서에는 강한 당사자가 약한 당사자를 위해 해준 일과 역사적 상황을 서문에서 언급한 후에 언약의 조문을 나열하는데 십계명도 이런 고대 근동의 종주권조약 형식을 따라 주어졌다.
제1계명은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명령한 것이다. 고대 근동의 신관은 다신교로서 인간의 필요에 따라서 여러 신들을 만들도 또한 그것들을 가시적 신상으로 만들었는데 1계명은 다신교를 부정하라는 명령이다. 유일신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 종교에서 다신교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혼합주의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ㅓ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며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도 바로 이것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여러 신들중의 하나로 여기는 혼합주의를 가장 싫어하시니 1계명은 바로 종교혼합주의를 금지한 것이다. 결국 혼합주의는 유일신인 여호와를 부인하는 것이다.
제2계명은 우상숭배를 금지한 것이다. 천주교는 2계명을 1계명에 포함시킨후에 제10계명을 둘로 나누어 십계명을 만들었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들이 형상을 만들어 예배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인 듯하다. 2계명에서 말하는 우상이나 형상은 다 같은 의미로서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신교인 고대 근동에서는 반드시 모든 신들이 형상으로 가시화되어 섬겼는데 형상을 금지하는 계명은 고대 근동의 잡신들과 여호와 하나님을 구별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우상 혹은 형상은 오직 인간뿐이니 그 외에는 어떤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우상이 없는 유일한 종교가 이스라엘의 종교였다.
제3계명을 지키려고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두려하여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도나이라는 이름으로 대치하여 사용한다. 그러나 시편에서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많이 부른다. 3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고대 주술자들이 자기들의 신들의 이름을 마구 부르듯이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마술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제4계명은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다소 다르게 나타나는데 출애굽기에서는 안식이 휴식의 의미로 신명기에서는 구원의 개념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휴식과 구원이란 두 개념이 안식일 계명에 있는 것이다. 구약의 안식일을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대치되는데 이는 초대교호히가 안식일을 주로 구원과 관련시켜 이해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안식일 계명에 있는 휴식의 개념이 희석된 것 같다. 그러나 안식일을 구원과 함께 일과 쉼의 분리를 가르친다. 주일에는 인삭일의 정신을 살려 영혼과 육체가 휴식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
제5계명은 사람 관계에 대한 첫계명으로서 부모 자식의 관계이다. 성경이 말하는 효도는 율리의 개념이 아니라 생명의 개념이다. 성경적 효의 개념은 무엇인가? 1계명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듯이 5계명은 사람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이듯이 우리는 육적으로는 부모의 피조물이다. 부모는 하나님의 창조의 대리자로 세워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보모에게 패역하는 자식은 예외없이 죽이라고 엄명한다. 다른 범죄와 달리 부모에게 패역하는 자식의 죄는 예외없이 사형으로 다스렸다. 그 이유는 부모 공경은 생명의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노아언약에서 살인자를 피로 보응하듯이 부모는 단순히 생물학적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칭조의 도구이자 생명의 통로인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자기 생명을 유지한ㅇ 가치가 없게되는 것이다. 부모는 창조주의 주권이고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이다. 그러므로 부모 공경과 하나님 공경은 동일한 것이다. 익서이 성경이 말하는 효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효도는 부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녀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그 생명이 길지 못할 것이다. 생명의 원천을 부인하므로 생명유지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래서 5계영에는유일하게 계명준수에 따른 보상이 조건으로 붙은 것이다.
구약개관[율법3]-김성진
2014-12-29 01:56:25
구약율법에서 절대적 율법과 상대적 율법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절대적 율법이란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변치않는 법이고 상대적 율법이란 사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법이다? 예컨데 십계명은 절대적 율법이고 음식법이나 할례는 상대적 율법이다. 음식법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에서 위생을 위하여 주어진 법이다. 신약에서 논쟁이 되었던 할례도 상대적 율법이었다. 구약 율법을 현대적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중요한 문제이다. 예수님의 율법해석과 적용은 좋은 모범이다. 바울이 율법을 부정적으로 표현한것은 당시의 논쟁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바울이 율법과 은혜를 이분법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거짓선생들의 주장애 대한 반박으로 율법의 부정적 측면을 말하고 은혜를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도 율법은 일점일획이라도 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구약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루터가 율법을 죄를 드러내고 억제하는 기능만으로 이해하면서 구약 율법에 대해 신학적 시대적 거리감이 생겼다.
예수님의 사역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대속교리는 구약의 율법에서 온 것이다. 율법을 만족시키는 것이 율법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이 없다면 대속교리의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도 구약의 대표 원리를 따른 것이다. 대표성의 원리를 따라 아담의 죄가 유전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구속받고 양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된후에 구속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먼저 양자로 입양되어야 구속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근거는 구약의 고엘사상이다. 고엘은 근족만이 할 수있으므로 예수님이 성육신하심으로 우리를 입양하심으로 우리 근족이 되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다. 예수가 우리의 근족이 되어야 우리를 대속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구약의 구속원리인 고엘시스템에 따라 세상에 오시고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철저히 구약의 율법을 따라서 오시고 일하신 것이다.
율법은 정죄뿐 아니라 회복의 원리도 제시한다. 루터는 율법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했다. 율법은 정죄 회복 그리고 삶의 원리 모두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구약율법은 폐기될 것이 아니라 그 법 정신을 현대에 적용해야한다. 이런 노력을 현대교회가 안한다. 예수의 율법해석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신약만 가지고 구약을 단절시켜서는 안된다. 현대교회는 율법을 연구해야한다. 율법 자체의 가장 큰 기능은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에서 가장 큰 부분이 제사법이다. 제사의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회복을 위한 것이다. 구약율법에는 다양성과 통일성이 있다. 율법의 뼈대는 공의와 사랑인데 이는 율법에 하나님의 속성이 반영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율법을 준 것이니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에 합당한 삶의 원리를 제시한다. 그리고 율법에는 공의와 사랑이라는 하나님의속성이 반영되어 있다.
구약 율법을 어떻게 현대에 적용할 것인가? 제사법은 폐지된 것이지만 제사의 원리는 예배에 투영되어야 한다. 제사의 목적이 그렇듯이 예베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죄를 고백하는 속죄제, 헌신을 의미하는 번제, 질서를 어긴 것에 대한 회복을 의미하는 속건제, 하나님과 백성의 화목을 기쁘하는 화목제, 제사의 이런 요소들이 예배에 반영되어야 한다. 구약 율법의 적용을 위해서는 절대적 율법과 상대적 율법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피성 규례나 음식법 등은 이미 폐지된 상대적 율법이나 창조질서에 관한 십계명과 같은 것은 절대적 율법이다. 구약의 헤렘 전쟁도 물론 상대적 울법이다. 헤렘 규례는 당시 가나안 전쟁에서 이방의 뿌리는 뽑아 이스라엘의 거룩성을 지키려는 의도로 시행된 상대법이다. 헤렘법은 잔인해 보이지만 이스라엘의 순결성을 지키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성지를 회복하려한 십자군 전쟁은 구약의 상대적 율법을 잘못 적용한 대표적 사례이다.
물론 상대적 계명도 다 버리라는 것은 아니고 그 정신은 가져와야 한다. 우리 시대와 상황에 필요한 상대적 계명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구약의 음식법은 상대법이지만 건강을 지키는 식습관이라는 법정신은 살려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율법이 중요한 것은 현대인들에게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구약 율법을 오늘날 준수하거나 준수하지 않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여야 한다. 율법은 언제든지 폐하거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버리지 않고 완성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율법을 따라 오셨고 그것을 완성하셨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하여 폐기된 율법과 예수께서 오셔서 이루셨지만 여전히 유지되어야 할 법이 무엇인지를 구별하여 우리 삶에 적용하여야 한다.
구약개관[모세오경]-김성진
2014-12-29 18:39:40
모세오경의 통일성
모세오경은 신학적이고 문학적인 통일성을 가진 하나의 책이다. 구조적으로는 레위기를 중심으로 앞으로는 창세기와 출애굽기가 뒤로는 민수기와 신명기가 배열되는 나선형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모세오경의 핵심이 사내산에서 체류하면서 언약을 맺고 성막을 짓고 제사법을 설명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모세오경의 촛점은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에 있다. 같은 관점에서 신명기도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을 재해석하고 다시 선포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오경 전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가 그 중심이며 이 언약관계의 핵심에는 율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오경을 이해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오경전체는 한 권의 책으로 간주하고 오경전체가 전달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찾는 것이다. 따라서 다섯권의 책이 원래 하나의 주제를가지고 한 사람 모세가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할 때 우리는 모세오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오경의 저작권 논쟁
구약연구에서 오경의 저작권만큼 지난 두 세기 동안 주목을 받은 논쟁은 없으며 현재도 오경의 저작권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800년대 이전에는 모세 저작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문서가설이 등장하면서 오경의 저작권 논쟁이 가열되었다.
벨하우젠(Wellhausen)은 고전적 문서가설(Documentary Hypothesis)을 완성한 사람인데 그는 오경이 JEDP의 네 개 문서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J문서(Jahwist source)는 주전 10-9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을 야훼로 사용하고 유다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문서이며, E문서(Elohistic source)는 하나님의 이름을 엘로힘으로 사용하고 요셉과 같은 북왕국 인물에 촛점을 맞춘 주전 8세기에 기록된 문서이다. 그리고 D문서(Deuteronomic source)는 신명기를 주전 7세기, 요시아 시대에 저작된 다른 층으로 본 것이고 P문서(Priestly source)는 주전 5-4세기에 기록된 제사장 문서로서 제의, 율법,연대기, 족보에 관심을 가지고 포로기 이후 제사장 계층의 관심을 반영한 문서라는 것이다. 그는 이 네 개의 서로 다른 자료들이 후대 편집자들에 의해 창조적으로 편집된 것이 오경이라고 말한다.
벨하우젠의 문서가설은 오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다른 이름(여호와, 엘로힘), 중복적인 기사, 문체상의 차이(동일인물이나 장소에 두가지 이름이 사용됨), 상이한 신학 등의 여러 의문점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로 등장한 것인데 이런 의문점 문서가설이 아니라도 설명이 가능하다. 오경의 모세저작설에 비평적인 학자들도 문서가설을 비판하는데 문서가설은 오경을 형성하는 각각의 문서들은 반복이나 모순이 없다고 전제하는데 이것은 히브리적 저술관습을 모순투성이로 만드는 것이므로 문서설이 비논리적이며 자기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만일 오경이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면 모세오경의 기반을 둔 구약성경의 신적권위가 상실된다. 예수님도 모세의 울법(토라)라고 말하면서 모세의 오경저작을 인정하였다.만일 오경이 후대의 것이라면 모세오경에 근거한 역사서 선지서는 모두 허구가 된다. 모세저작설을 부인하는 사람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다. 신34장 5절이후의 언급은 모세오경이 후대에 편집된 것임을 의미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오경의 모세저작설을 지지한다. 벨하우젠의 문서가설은 중요한 것을 강조할 때 동어를 반복하는 히브리적 문학기법을 모르고 현대적 사고방식으로 오경을 분석한 결과 나온 가설이다. 하나님의 두가지 이름도 엘로힘은 창조의 하나님을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을 가리킨 것으로 하나님의 두가지 속성을 이름으로 다르게 표현한 히브,리적 문학방식이다.
오경의 다섯권에 대한 이견들
마틴 노트는 5경이 아니라 4경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신명기가 앞의 4경과 여러면에서 다를 뿐 아니라 차라리 신명기의 내용은 이후에 기록되는 열왕기의 신학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신명기를 모세가 아니라 신명기 역가사라고 불리우는 사람 혹은 집단이 신명기부터 열왕기 까지 기록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한편 폰 라트는 5경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6경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약속과 성취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오경의 마지막은 모세의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실제로 성취되는지를 보여줌으로 끝나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나안 땅의 약속이 성취되는 여호수아서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여호수아를 포함해서 6경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오경은 문학적이나 신학적 구조상으로 챇으로는 레위기를 중심으로 장소적으로는 시내산을 중심으로 신학적으로는 언약과 율법을 중심으로 완벽한 대칭구조를 보이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시편도 모세오경을 본떠서 5권으로 편집되어 있는데 이것은 시편이 편집 완성되기 전에 이미 모세 오경이 5권으로 확립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구약개관[역사서]-김성진
2014-12-29 19:16:21
구약 역사서의 분류
기독교 성경에서는 구약 역사서로 분류되는 책들은 여호수아로 부터 에스더서까지 인데 바벨론 포로이전의 역사를 기록한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 그리고 바벨론 이후 역사를 기록한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가 그것이다. 그러니 히브리 성경에서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 4권만 역사서로 분류되고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는 선지서로 룻기, 에스더는 다섯 두루마리 책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니까 히브리 성경에서는 기독교 성경에서 역사서로 분류된 대부분의 책들이 선지서로 분류된 것이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를 미래의 선지서로 분류한 것은 히브리인들이 역사관을 보여준다, 그들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견한 것으로 본 것이다.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이 원리는 과거나 미래나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지 과거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시한다. 성경은 결국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현재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성경은 의미있는 삶이 무엇인가에 답을 준다. 이런 면에서 역사서는 과거 사건을 통해 미래를 보여주는 선지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 역사서의 내용과 연대
역사서는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가나안 입성후 사사시대를 거쳐 왕정으로 전환하는 정착과정 이후에 왕국의 분열과 멸망 그리고 포로 시대와 포로귀환 시대를 포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역사서는 개인의 영웅전이 아니다. 역사서는 아브라한에게 하신 3가지 약속인 자손, 땅, 복이 성취되는 과정이다. 출애굽에서 자손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여호수아의 가나안 전쟁에서 땅의 약속이 성취되었고 다윗 시대에는 평화와 풍요를 누림으로 복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역사서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하심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불성실함이 반복되는 패턴을 보여준다. 사울과 다윗의 대조적인 모습은 이후 이스라엘 왕들의 패턴을 결정하며 여리고성과 아이성의 모델은 이후 전쟁의 패턴을 결정하고 있다.
구약 역사의 연대를 추정하는 단서는 솔로몬이 왕이 된지 4년후에 성전을 건축을 시작했는데 이 때가 출애굽후 480년이라는 언급이 있는 열왕기 6장1절이다. 성경에는 솔로몬이 왕이 된 연도가 나타나지 않지만 고대 근동의 문서에 따르면 솔로몬이 왕이 된 해는 주전 970년이다. 그렇다면 성전 건축을 시작한 해는 주전 466년이고 출애굽한 해는 주전 1446년이 된다. 애굽에서 430년을 살았으니 입애굽한 해는 주전 1876년이고 여기에 야곱, 이삭, 아브람의 나이를 더해 가면 아브라함이 출생한 해는 주전 2166년이 된다. 여기까지가 성경에서 추정 가능한 연대이다. 창세기 12장 이전의 소위 원역사의 연대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 이후는 주전 722년이 북조 멸망, 주전 586년의 남조 멸망 그리고 주전 538년의 1차 포로귀환, 주전 516년의 2차 성전 완공 주전 458년의 에스라 귀환, 주전 445년의 느헤미야 귀환이 성경이 제공하는 중요한 연대이다.
구약 역사서의 특징과 해석
구약 역사서는 연대기가 아니라 저제에 맞추어 선별적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시작적 순서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반복되는 역사적 사건의 패턴은 신학적 강조를 위한 것이다. 결국 역사적 기록의 목적은 역사적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역사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원리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 원리를 발견하여 우리 시대에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역사서를 인물 중심으로 읽지 말고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역사로 읽어야 한다.
역사서는 연대기적 순서로 기록된 역사물이 아니고 신학적 해석과 구원 역사의 관점으로 구성된 구원 역사의 서술이다. 그렇지만 구약 역사서는 신학적 목적으로 생성된 신화물은 아니라 충분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구약 역사서에서 신학적 관점을 찾아내는 것이 역사서를 읽는 중요한 독법인데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 분량의 정도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나 평가를 주목하여야 한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을 그 본문에서만 보지 말고 다른 본문과 신학적, 문학적, 역사적으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역사서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을 때와 기록된 시점에 시간적 차이가 있으므로 역사적 사건의 기록에는 저자의 해석과 평가가 포함되어 편집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자가 한 사건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드러내는 근거를 찾는 것이 필요하고 겉으로 드러난 사건보다 그 사건의 내면에 있는 신학적 관점을 분석하여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반드시 따라야 할 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인물을 영웅화하여 그들의 단편적 삶을 강조하거나 우리 시대의 본으로 인식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 사건은 그 시대의 상황속에서 일어난 것이므로 그 사건 자체가 갖는 형식이나 패턴보다는 원리를 발견해야 한다.
구약개관[선지서]-김성진
2014-12-29 21:07:02
선지자란 누구인가?
기독교 성경의 선지서는 다섯 두루마리에 속하는 예레미야 애가와 역사서에 속하는 다니엘을 빼고는 대부분 히브리 성경의 선지서와 일치한다. 다만 기독교 성경에서 대/소 선지서를 분류한 것은 기록 분량에 따른 임의적 분류일 뿐이고 별다른 의미는 없다. 선지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비" 부름받은 자라는 뜻 이는 선지자란 하나님의 뜻을 그 백성에게 전달하는 일로 부름을 받은 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단순히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메신저이며 대언자라는 점이 중요하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선포하는 중보자였는데 이런 점에서 모세는 구약 선지자들의 근원이 된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신명기적 사관을 따라서 패역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여호와의 대언자로서 선지자들은 정죄하고 심판하며 회개를 촉구하였는데 그들은 하나님나라의 전령관으로서 모세로 부터 시작하여 세례요한까지 하나의 지속적인 흐름을 형성한다. 모세는 예언 운동의 원류이며 선지 전통의 기원을 이루는 사람이다. 신약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뿌리를 둔 것 처럼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모세의 율법에 근거하였다. 모세이후에 선지자의 모델 역할을 한 사람이 사무엘이다. 그는 모세/여호수아 시대와 다윗/솔로몬 시대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였는데 모세이후 세워진 최초의 선지자로서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과도기적 인물이었다. 사무엘이 왕을 세움으로써 이때 부터 선지자와 왕의 역할 분할이 일어났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왕은 그 뜻에 따라서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한 것이다. 이렇게 선지자는 왕정이 독자적으로 가거나 하나님을 반역하는 쪽으로 가지않도록 언약을 유지하고 신정정치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왕국 분열이후에 나타난 최초의 선지자는 엘리야인데 그는 패역의 시대에 부패한 왕정과 백성을 책망하여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여기에서 엘리야는 단지 언약의 수호자가 아니라 언약을 배반한 왕과 백성들을 언약의 법정에 고발하는 언약의 기소자(왕상19:10, 14) 역할을 하였다. 엘리야는 이후 구약 선지자들의 주요 기능중의 하나인 언약의 기소자 역할의 모델이 되었다. 엘리야가 언약의 기소를 할 때 늘 기준이 된 것은 모세의 율법이었다. 모세가 언약의 중보자라면 엘리야는 언약의 기소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모세와 엘리야는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엘리야의 모델을 따라서 정죄와 심판 화개의 촉구 하나님의 구원의 선포를 하였으니 이런 점에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임명을 받은 언약의 기소자들이었다. 구약의 선지자 전통은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신약을 여는 마지막 구약 선지자는 세례 요한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이어받아 사역을 시작하셨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도 구약 선지자 전통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의 율법을 존중하였으며 그 율법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하면서 당시 유대인들의 위선을 책망하고 경고하였다.
선지서의 메시지와 해석
선지서의 예언은 두가지 측면을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질 긴박한 성취적 측면이고 둘째는 종말론적 의미에서 먼 미래에 이루어질 성취적 측면이다. 선지자들의 예언의 첫번쩨 측면을 간과하고 구약의 모든 예언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종말론적 예언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구약예언중 직접적으로 메시아나 새언약에 대한 예언은 10%를 넘지 않는다. 선지서의 메시지는 선지자 개인의 특성, 당시의 상황, 백성들의 필요, 계시의 내용 등에 따라서 다양하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선지서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메시지가 주어진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모두 모세 언약의 율법에 근거한다. 그들은 언약 배반을 책망하고 심판을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한다. 그리고 회복과 축복을 약속한다. 우선 책망의 경우의 대부분은 시내산 언약의 조건으로 주어진 율법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며 인식일을 어겼으며 형식적인 예배와 순종이 없는 종교로 전락한 것을 지적하였다. 그 다음에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공의와 자비를 실천하지 않고 약자를 약탈하고 가난한 자를 착취하며 성적인 타락, 경제적인 타락, 그릇된 재판 등을 책망하였는데 결국 책망의 모든 판단 기준의 모세의 율법이었고 울법을 어긴 것이 곧 언약 배반으로 간주되었다.
구약의 선자자들은 정죄와 심판을 선포했지만 동시에 회복과 축복도 함께 선포하였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시므로 정죄하고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언약에 신실하시므로 회복과 축복도 약속하신다. 그러니까 정죄와 심판 그 반대인 회복과 축복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서 나오는 언약적 행동인 것이다. 그런데 그 회복은 '남은 자'와 '새 언약'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회복과 축복의 예언에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 새 언약에 대한 예언이 많이 나타난다.
구약의 선자자들
포로전 선자자들로는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호세아와 아모스가 있고 남 유다에서 활동한 이사야 , 미가, 하박국, 스바냐, 예레미야가 있으며 이방을 향하여 예언 사역을 한 요나, 나훔, 오바댜가 있다. 포로시기의 선지자로는 에스겔, 다니엘이 있고 포로 귀환후 선지자로는 학개, 스가랴, 요엘, 말라기가 있다.
호세아는 주전 8세기 중엽 이사야와 동시대 인물로서 이사야가 남유다에서 활동하는 시기에 북왕국의 멸망하기 전 마지막 시대에 사역하였다. 이 시기에 북왕국은 옛 영토를 회복하고 물질적으로 풍요했으며 남유다의 웃시야 시대의 부강함을 함께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외적인 번영과는 달리 내적으로는 종교적 혼합주의가 팽배하고 사회적 불의가 만연한 시대였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배교를 책망하고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였다. 특히 호세아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남편을 배반한 음탕한 여인으로, 하나님을 음란한 아내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남편으로 비유한 행위예언을 하였다. 아모스는 호세아보다 약산 이른 시기에 이스라엘에서 사역했는데 호세아가 주로 하나님을 배역한 영적 타락을 책망한 반면 아모스는 그들 가운데 있는 억압과 부정등 사회적 불의를 질책하였다.
미가는 이사야 사역초기인 8세기 중반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하였는데 이사야가 주로 궁정에서 왕들을 상대로 예언한 반면 미가는 주로 서민들의 입장에 서서 부자와 지도자들의 죄를 책망하였다. 스바냐는 요시야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인데 그는 요시야 개혁이전의 유다의 부패한 상황을 고발하면 앗수르의 멸망을 미래의 사건으로 예고하고 있다.동 시대에 사역한 선지자로는 나훔과 예레미야가 있다. 하박국은 나훔보다 약간 늦게 요시야 말기와 여호야김 초기에 활동하였는데 이 시기는 앗수르가 멸망하고 바벨론이 역사의 중심에 등장하고 유다가 바벨론의 위협을 받던 시기였다. 특이하게도 포로전 시기에 이방을 향하여 예언한 선자자들도 있는데 앗수르를 향해 예언한 요나와 나훔이 있고 암몬을 향하여 예언한 오바댜가 있다. 요나는 앗수르의 니느웨 백성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훔은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의 심판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또한 오바댜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방관하며 기뻐한 암몬의 멸망을 예고하였다.
포로지인 바벨론에서 활동한 예언자는 에스겔과 다니엘이었는데 그들이 주된 메시지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화복에 대한 소망이었다. 포로 회복이후에는 학개, 스가랴, 요엘, 말라기가 활동하였는데 학개와 스가랴는 귀환 공동체가 제2 성전을건축하는 일을 독려하고 성전건축과 메시아 왕국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요엘과 말라기는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에 대해 예언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임할 메시아의 구원을 말하였다. 결국 심판과 구원은 다른 것이 아니라 메시아가 나타나실 때 이루어질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의 양면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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