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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톰 라이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톰 라이트

2014-09-19 19:13:00


원제는 SURPRISED BY HOPE 이다. 차리라 책 제목을 놀라운 희망, 하나님의 나라

이렇게 하는게 나을 뻔 했다.

 

톰은 이 책에서 다음 두가지 질문을 다룬다.

기독교 복음의 궁극적 희망은 무엇인가?

현재의 세상에서 발견하는 희망은 무엇인가? 

 

그는 이 두가지 질문은 서로 상호 긴밀히 연관되므로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서 두번째 질문의 답도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현 세상의 희망에 대해서 별로 말한 것이 없는 이유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희망이 정말로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죽음에 대하여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믿었던 바를 재조명하여 살려내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신앙이 우리에게 최상의 근거를 가진 희망을 제공해준다고 믿으며 이런 희망이 기독교의 실천신학과 정치신학의 기초가 된다고 말한다.

 

그는 기독교가 제시하는 궁극적 희망이 바로 우리가 세상에서 발견하는 희망의 원천이요 근거가 된다고 강조한다.

 

갈곳이 없는 교회

 

톰은 기독교의 궁극적 희망은 무엇인가? 그리고 현 세계에서는 어떤 희망이 있는가? 라는 이 두가지 질문이 완전히 별개로 다루어져 왔지만 이 질문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그동안 이 두가지 질문이 별개로 다루어진 이유는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천국행" 혹은 "세상을 벗어나는 구원"의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만약 기독교의 희망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는 것이라면 이 두 질문을 연결시킬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첫번째 희망은 두번째 희망에 온전한 기초를 제공하며 활력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톰은 이 책에서 다루려는 두가지 근본적 질문의 배경으로 다섯가지 사례를 보여주는데 그것들은 모두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관한 것들이다. 그는 세상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어떤 혼란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봄으로 이 논의를 전개시키려고 한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한 혼란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생각, 기도, 전례, 실천 그리고 특히 선교가 심각한 오류에 빠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그는 플라톤에서 헤겔, 그리고 이후의 철학자들이 우리가 죽음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진지한 생각의 주된 이유가 된다고 하는 주장은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톰은 죽음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현대인의 믿음은 참으로 다양하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고 있다. 첫번째는 영혼과 육체는 완전히 멸절한다고 믿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운명에 대한 설명으로는 상당히 불만족스럽지만 적어도 깨끗하고 깔끔하며 이것은 결국 죽음이후의 삶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인데 이런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한다. 둘째는 윤회와 환생에 대한 믿음이고 셋째는 뉴에이지 사상이나 불교와 같은 저급한 단계의 대중적 자연종교에서 보듯이 죽음 이후는 자연현상으로 흡수되어 버린다는 믿음이다. (요약자주=이런 부류들의 믿음은 각기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죽음을 불가피하면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하여 기독교 신앙은 죽음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제시한다.)그는 이런 특징들은 모두 죽음에 대해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고 말하면서 대부분의 사람이 기독교 신앙이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예 모른다고 말하면서 더 걱정스러운 것은 이런 복합적인 무지가 교회안에도 종종 나타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낙원에 대한 혼란

 

톰은 교회안에 죽음이후의 삶에 대한 혼란이 있으며,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듣는다면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중세의 그림은 서구 그리스도인들의 상상력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서 많은 신자들은 신약성경에 '천국'이란 말만 나오면 그것을 구원받은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장소라고 생각하며 자라는데 사실 신약성경에서 사용하는 '천국'이란  용어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천국' 곧 '하나님 나라'는 사후의 운명이나, 이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일컫는 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죽음과 부활에 대해 무엇을 말하느냐가 다른 모든 것의 색채와 모양을 결정하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죽음과 부활은 우리에게 더 이상 놀라움으로 다가 오지 않고 현재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에서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지 않는 그런 '희망을 제시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그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는 플라톤화된 교리보다 강력하고 혁명적이어서 기독교 첫 세기에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순교한 교회는 부활을 확고하게 믿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톰은 죽음을 '드디어 본향으로 가는' 순간이나 '하나님의 영원한 평화로 부름을 받는' 시기로 보는 경건주의는 세상을 제멋대로 다스리려는 카이사르와 논쟁하려 하지 않지만 부활 신앙은 세상의 불의에 대항하는 확고한 결의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는 부활신앙에는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수반되기 때문이고 말한다.

 

죽음이후의 삶에 대한 이러한 혼란과 관련하여 톰은 네가지 질문을 던지려고 하는데 첫째는 우리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어떻게 아는가? 둘째는 우리는 불멸의 영혼을 갖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셋째는 이 주제 전체애 대한 기독교적 사고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네번째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희망

 

톰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미래에 대한 희망은 확고하게 부활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은 미래가 첫번째는 죽음 직후에 어떤 상태로 머무르는 단계로, 두번째는 새롭게 재 창조된 세상에서 새로운 육체를 가지고 사는 단계로, 이렇게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고 말한다. 초기 기독교에는 이렇게 부활이 중심적인 사상이었으므로 부활을 빼면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잃어버린다고 그는 강조한다. 유대교에서 주변부에 있던 부활 사상이 기독교에서는 중심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은 천국에 가는 것이나 혹은 죽음을 면하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사후에 영광스럽고 존귀하게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고 육체의 죽음이후에 다시 육체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했으며, 그러나 부활이 마지막 때에 위대하게 일어나기 전에 역사 도중에 한 사람이 먼저 부활함으로써 역사의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최종적으로 부활할 것을 예견하고 보장한 것이라는 내용의 '이미 임한 종말론'을 믿는 무리는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없었고 이 신앙이 기독교의 핵심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이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고 마지막날 최종적 부활에서 완성되리라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최종적 부활사이의 기간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도록 부르셨다고 믿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을 입은 신자들이 각 개인의 삶과 정치적 삶에서 또 자신들의 사명과 거룩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성취를 실행하고, 그럼으로써 최종적 부활을 기대하며 살도록 부르셨다고 그들이 믿었다는 말이다.

 

톰은 부활신앙은 메시야 신앙의 변형으로 이어졌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유대교에서는 누구도 메시아가 죽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고 따라서 당연히 그 누구도 메시야가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게 된 것이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이시고 따라서 카이사르는 주가 아니라고 하는 신앙이 아주 일찍부터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톰은 이렇게 부할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1세기 유대교의 지형안에 확실히 자리잡으면서 기독교는 유일신, 선택, 종말사상에 기초한 유대교 신학안에서 역사, 희망, 그리고 해석학을 바라보는 전적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