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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바울 연구 그 발자취와 전망- 톰 라이트

바울 연구 그 발자취와 전망- 톰 라이트

2014-09-19 19:13:59


빌레몬서는 바울서신 전체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사태를 조망할 수 있게 한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언급하지 않지만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하나로 묶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그리스도안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 차별이 없다"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고대세계에서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의 제국의 신들은 기존의 질서와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언가 특별한 조치를 취하고 계셨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는 일을 하셨다.

 

메시야 예수의 죽음으로 인하여 극적으로 변화된 바울의 이 새로운 세계관은 도대체 무엇인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를 통하여 이  세계 전체를 구출하려는 원대한 목적을 달성하시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에서 출발했지만 전 세계를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유대교의 제한된 세계안에 담길 수도 포착될 수도 없다. 바울이 유대교의 전통을 뒤집으려고 한 것이 아니다. 토라 자체는 성취되었지만 그 성취로 인하여 토라는 한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토라가 열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토라의 목적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토라는 정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것이지만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잠시 주어진 것이므로 이제  메시아가 옴으로 유효기간이 다하였다. 하나님께서 토라의 영속적인 가치와 목적으로 의도하셨던 모든 것이 이제 메시아와 성령의 생명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나는 바울 세계관의 중심사상이 "하나된 공동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공동체, 아브라함의 한 가족, 전세계를 아우르는 가족, 온갖 종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단일 가족이다. 바울의 관점으로 바울의 서신을 읽는다면  "하나의 공동체"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임을 알게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그리스도안의 공동체, 성령에 의한 공동체가 그 모든 내용 가운데 핵심중의 핵심이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한 그 사건때문에 시작된 새창조, 곧 하나님나라에 대해 이야기 하는 복음이 바로 그 근간이다. 교회의 하나됨, 예수의 제자들이 살아내야 하는 겸손한 하나됨을 이루는 새로운 방식이야말로 인간이 되는 전혀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표이다. 이 새로운 가족의 존재는 이 세상의 권세들에게 카이사르가 주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세상의 주이시고 예수가 세상의 주이심을 선언한다.

 

로마서 전체는 교회라는 복합적 통일체가 결과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은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로마서는 복음의 궁극적 목적이 다양한 문화를가진 교회가 하나된 예배를 드릴 것을 주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바울이 교회론의 핵심이고 새 성전 교회론(new temple ecclesiology)이다. 바울의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너희 곧 메시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갱신된 언약백성이다. 이스라엘의 긴 이야기는 마침내 그 목표에 도달했고 아브라함과 그 가족의 이야기가 마침내 메시야이신 예수 안에서 폭발적으로 성취되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는 자신안에 이스라엘을 집약하여 담고있는 인물이므로 이스라엘에게 해당되는 내용은 메시아에게도 해당된다. 이제 새 언약이 시작되었고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 살리신 것을 믿으면 그들은 이 갱신된 언약백성이며 가장 심오한 수준에서 "토라를 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갱신된 인류이며 하나님은 이제 이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출하고 통치하시며 바로 잡으실 것이다.

 

바울은 구약의 묵시전통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지배하는 위치로 높여져 마침내 세상에 정의를 가져올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존재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 아래 그리고 세상 위에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르신다"고 말한 실제적 의미이다. 고린도 전서 15장의 말처럼 이 세상의 권세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수립될 것이다. 우리는 만물을 갱신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핵심역할을 담당하기로 되어있다. 이것이 구원의 목적이다. 우리는 구원의 목적을 가릴 정도로 구원에 대한 교리를 강조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메사아 안에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함으로써 철저하게 다시 정의되고 다시 태어났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내가 메시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신 산다. 하지만 내가 아닌 메시아가 내 안에 사신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실함에 따라 사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이 아니라 "메시아의 신실하심" 이라는 말이 논란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전령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전 세계에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한 백성으로서 엄청난 특권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탁을 위임받은 것이고 그 신탁은 이 세계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지 아스라엘만의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서 3장 3절)에서 이스라엘이 믿지 않았다(faithless)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이스라엘이 그 위임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 세계를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했지만 이스라엘을 경로를 벗어났고 하나님의 위임에 신실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첫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른 조치를 취하심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관한 내용은 잊어도 좋다고 말하는 서구사상의 물결이 존재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생각은 로마서도 오해하고 바울의 핵심도 오해할 뿐이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신실한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메시아의 신실하심을 통하여 나타났다" 고 선언한다. 이 말은 자신안에 이스라엘을 간직한 이스라엘의 메시아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실함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구현하신 분이라는 의미이고 그리고 메시아 안에 있는 우리는 메시아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화답하는 우리의 피스티스, 곧 믿음, 신실함으로 그의 아신 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갈라디아 2장은 메시아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이 한 식탁에 속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 내용은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던지는 도전장이다. 이것이 칭의 교리가 속한 온전한 맥락이다. 칭의의 목적은 우리를 세상밖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세상을 바로잡는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의의 신학" 전체가 자리잡은 위치가 현재의 칭의와 미래의 칭의사이인 이유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 세상을 바로 잡우시기 위하여 인류를 바로 잡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어덯게 일어났는가? 하나님이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세상 죄를 감당하고 죽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죄가 정복되고 새 창조가 시작되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상징이란 측면에서 바울 세계관의 중심에 바로 이 공동체가 위치하고 있다. 이 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서이다. 우리가 바울을 읽을 때 어던 세계관의 탄생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가 기독교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새로운 과제- 새로운 신학]

 

1. 수정된 유일신론

 

신학은 바울의 세계관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신학은 이전의 규모와 역할에서 자라나 새로운 규모와 역할을 감당하고 새로운 과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하나님을 섬기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백성이 되기를 바라신다. 각 세대가 이 작업을 수행하지 않을 경우 교회는 분열되고 지리멸렬한 상태가 될 것이며 세상의 통치자들은 그것을 좋아할 것이다. 유대 유일신론은 바울에게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바울의 유일신론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다시 정의된 유일신론이다. 어떤 사람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적 유일신론자들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든 예수를 신적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성육신 교리는 초기 교회가 유대적 뿌리로부터 떠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완전히 말도 안되는 소리다.  바울은 유대식 유일신론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가 다시 그려낸 유일신론에는 예수가 성령과 함께 자리잡고 있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아들과 성령의 섭리(Son and Spirit dispensation)와 더불어 우리가 참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을 분명하게 본다는 의미이다. 이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알므로써 오는 결과는 다름아닌 쇄신된 인간성이다.

 

2.. 다시 논의된 선택 사상

 

누가 이스라엘인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메사아 안으로 다시 집약된다. 유대의 선택 교리는 메시아를 중심으로 다시 정의되는데 이것이 바로 새언약 신학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교회로 대체되었다는 말이 전혀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천년동안 계속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이야기가 그 왕, 기름부음 받은 존재의 도래를 향해 진행되어 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가 절정에 달한 순간에, 그 고대 예언들의 성취로서 오신 것이다. 유일신론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에 의해 다시 정의되어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의 우상들에 맞섰듯이 선택교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항시적인 과제는 세상의 권세들을 향한 꾸지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이 세계에 질서가 잡히기를 바라신다. 모든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이것이 기독교 정치신학의 기초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가 십자가 부활, 성령을 통하여 행사하는 주권적이고 구속적인 통치를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이 세상 앞에서 그 폴리스(polis)가 어떤 모습인자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3. 다시 상상된 종말론

 

우리는 바울에게서 유대 종말론의 모든 내용들이 메시아 안에서 성취되고 성령을 통해 그 효력이 발휘되는 것을 본다. 바울은 메시아는 다시 돌아올 것이며 모든 무릎이 그의 아들 앞에 꿇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바울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고 말할 때 그가 의도한 바는 "하늘이 우리의 고향이며 언젠가 그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가 의도한 바는 "너희가 하늘의 문명을 세상에 전파해야 할 백성이다"란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은 " 언젠가 너희가 여기를 떠나 하늘로 갈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늘로 부터 오시는 주 예수를 기다린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가 여기에 오시는 것은 우리를 하늘로 낚아채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낮은 상태의 몸을 그 분 자신의 형체와 같이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바울은 종종 시편 8편 [ 당신은 그를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시고 만물을 그 발아랴 두셨나이다]을 인용하는데 이것은 아담을 또한 예수를 그린 그림이다. 우리가 카이사르가 주가 아니라 예수가 주이심을 아는 것은 바로 우리가 피조물을 다스리는 인간의 주권을 보여주는 시편8편의 그림이 이제 메시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기도는 미리 맛보는 종말론의 한 조각이다. 기도는 하늘과 땅을 그리고 피조물의 투쟁과 신음을 단단히 묶는다. 이 세계가 고통받는 장소에서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고통을 느끼며 우리안에서 탄식하시는 성령을 느낀다. 이 모든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그 고통의 바깥에 계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선택된 목적은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바울이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신학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신학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은 누구이신지,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의 소명은 무엇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탐구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된 공동체를 그 핵심적인 상징으로 하는 세계관이 도무지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신학의 목적은 바울이 로마서 15장에서 말하듯이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함"이다. 모든 신학은 그토록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던 빌레몬과 오네시모에게, 유대인과 이방인이 식탁에서 떨어져 앉아야 했던 위기 상황에, 그리고 당시의 거대한 정치적 질문과 어두운 세상에서 길을 헤쳐 나가고 그리스도의 빛을 증언해야 하는 교회의 도전에 촛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빌레몬과 오네시모들 사이에 서서 "그리스도안에서 여러분은 화해되었고 여기 어떻게 그 화해가 가능하지 보여주는 실제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목도하는 이 삶, 이 공동체입니다" 라고 말하는 백성이어야 한다. "하나된 교회"라는 이 세계관적 상징이 우리 시대의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예수가 주이시며 그들은 주가 아니라고 말하게 되기를, 그리고 그 결과로 어떤 소동이 발생하더라도 거기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