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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위르겐 몰트만의 신학

몰트만의 신학 -정승원

2014-09-18 01:03:59


 흥미롭게도 몰트만 역시 바르트와 같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복음주의 신학자라 고 평가 받기도 한다. 얼마전 한국에 온 몰트만은 그래도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에서 강연을 했고, 한 복음주의 신앙서적에 그와의 인터뷰 내용까지 나온 것을 보면 더욱 그것을 실감할 수 있다. 그를 복음주의자로 오해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늘 성경, 삼위일체 하나님, 십자가, 부활 등을 말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는 결코 복음주의 신학자도 더욱이 보수주의 신학자가 아닌, 한 자유주의 신학자에 불과함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의 '희망신학'은 사실 그와 친분이 있었던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블로흐는 막시스트적인 종말론을 거부하고 열린 미래를 향한 종말론을 발전시켰다. 이 세상에는 정체된 정수

(essence)란 없고 단지 미래가 밝혀주는 현재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미래에 담겨져 있는 약속이야말로 현재에 희망을 주는 확실한 존재적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몰트만은 블로흐와는 달리 미래를 어떤 유토피아적 추상이 아니라 역사속에 진입되는 구체성으로 본다. 더욱이 하나님을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갑작스러울 정도로 놀랄 방법으로 인간 역사에 관여하고 인간 세계와 약속을 하는 존재로 보고 있다 (물론 몰트만은 하나님을 어떤 변하지 않는 '존재'로 보기보다는 세상과 관여됨으로 나타나고 알려지는 역동성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더 정확히 표현해서 하나님이란 스스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하나님의 핵심적 성품은 바로 미래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

할 수도 없고 현재에 가두어 둘 수도 없다고 한다. 미래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현재에 다 나타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계시를 미래에서부터 오는 어떤 약속과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전통적 기독교에 주장하듯 계시란 어떠한 명제적(propositional)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계시는 미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명제적이라 한다면 그 계시가 근거하는 미래는 열린 미래가 아니라 닫힌 미래가 된다는 것이다. 즉 명제가 그 미래를 구속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바로 미래를 담지하는 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즉 미래로부터 오는 자라고 한다. 그의 부활을 과거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시작과 역사의 근저로 본다. 즉 부활을 미래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인간에 대해 정의할 때도 미래의 틀로서 정의한다. 실존주의 철학에서와 같이 인간을 변하지 않는 존재로 정의하기보다는 '되어감'으로 정의한다. 오직 마지막날에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게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말은 인간이 현재를 초월하고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일종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희망이 없다는 것이 죄라고 정의한다. 즉 미래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일종의 은혜가 아니라 행위를 의지하는 모습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또한 교회에 대해 말하기를 마치 역사의 마지막이 이미 이르른 것처럼 현재에 초점을 두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교회는 세상의 종으로서 미래의 약속을 선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그의 윤리관과 연결이 되는데, 윤리에는 이미 정해진 규범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만이 윤리의 규범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윤리의 기준은 미래의 결과에 대한 기대라고 한다. 즉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가 우리를 소외당한자들과 눌린자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무엇이 될 것인가'를 기대하면서 지금의 '무엇'에 도전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비록 막스적인 개념은 아닐지라도) 혁명을 환영한다. 

 

그의 신학 중 특이할 만한 점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십자가 사건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부정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존재론적(ontological)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일종의 경세적(economic) 삼위일체를 주장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경세적 삼위일체는 우리가 믿는 구속사적 차원의 경세적 삼위일체가 아니다. 다른 많은 자유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사건 속에서 발생되는 모습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속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교회에 부여하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역사를 성령으로 정의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상에서 발생된 십자가 사건이 아니고는 설명이 불가능하고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십자가 사건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자신의 열림을 확증했다는 것이다. 

 

지난 호에 우리는 몰트만의 신학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번호에서는 간단하나마 그의 신학을 분석 비판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그의 신학은 철저한 변증법적(dialectical) 신학이다. 그가 말하는 미래 혹은 약속은 바로 칸트가 말하는 본체론적 세계나 바르트가 말하는 전적 타자로서의 초월적 하나님과 별 다를 바가 없다. 또한 역사속에 비쳐지는, 즉 미래의 약속이 가능성으로 현재에 다가오는 희망은 칸트가 말하는 현상적 세계나 바르트가 말하는 역사속에 내재하는 혹은 계시속에 나타난 하나님과 별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초월적-내재적 변증법은 바르트의 계시 개념과 거의 같다고 하겠다. 물론 바르트와는 달리 몰트만은 역사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역사적 역동성 역시 변증법적 틀안에서의 모습이다. 이런 차원에서 몰트만은 칸트와 헤겔을 종합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결코 미래의 하나님이 현재 역사속에 현존지 않는다는 아이디어는 멀게는 칸트, 가깝게는 바르트에서 답습했다 하겠고, 미래(혹은 종말)와 현재가 역사라는 존재의 틀속에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된다는 생각은 헤겔에서 왔다고 하겠다. 또한 자기 부정(self-negation)을 통해 하나님이 십자가 고통에서 자신을 나타내었다는 생각 역시 헤겔적이라고 하겠다.

 

또한 인간과 질적으로 영원한 차이가 있다는 초월적 하나님이라는 실존주의적 개념은 사실 현재속에 완전히 들어오지 않고 계속적으로 열린 미래로 남겨져 있다는 몰트만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미래적 하나님 혹은 약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은(칸트의 본체론적 세계 하나님 혹은 바르트의 전적으로 감추어진 하나님과 같은) 현재의 그 무엇과도 결코 동일시 되지 않는 긴장속에서 어떤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이것은 칸트의 현상적 세계에서의 범주적 의미나 계시 속에 하나님이 전적으로 나타났다는 바르트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초월적 하나님(희망의 하나님)에 대해 무엇인가 잡을 듯 하면서 못잡고 또한 역사속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무엇인가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 듯 하면서도 계속 신비나 가능성으로 남게 되는 그러

한 역설적 긴장이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다.

 

또한 미래적 하나님이 역사속에서 고통, 아픔, 갈등 등을 체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함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바르트의 사상을 그대로 답습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핵심적 성품은 미래적이라는 몰트만의 주장은 하나님의 핵심적 성품은 그의 자유라는 바르트의 생각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 천상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에서 나타나는 분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그 무엇이 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계셔서 그리스도에서 자신을 전적으로 감추시고 동시에 전적으로 나타나셨다는 바르트의 주장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사실 우리로 미래에 대해 희망하도록 하는 것은 일종의 믿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란 어떠한 근거가 없니는 불가능한 것이다. 몰트만은 그 근거를 추상적 미래에 두는데 그런 미래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즉 그런 미래는 없다고 믿는 것과 그런 추상적 미래가 있다고 믿는 것과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미래가 전적으로 순수하게 열려져 있다고 하는데 만약 희망을 위한 어떠한 근거가 미래에 있다면 그 미래는 전적으로 순수하게 열려진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전적으로 순수하게 미래가 열렸다는 것은 일종의 절대적 신적 의미를 미래에 부여하려는 발상인데 이러한 발상은 비합리적(irrational) 신념과도 같은 것이다. 그 신념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 신념은 바로 현재 몰트만 자신에 있는 것이다. 즉 결코 미래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 말하는 미래 혹은 종말은 구체적 과거 사건에 근거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역사적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몰트만이 주장하듯 미래에 속한 사건이 아니다. 사도들이 귀로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다. 몰트만의 십자가-부활 사건 해석은 그 옛날 영지주의나 가현설과 같은 이단 사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역사적 십자가-부활 사건은 계속 우리 현재에 그 구성적(constitutive) 힘을 끼치고 그가 재림하실 때에 우리도 마찬가지로 부활 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즉 규범적 근거와 종말론적 근거가 추상적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역사적 사건에 있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과거와 현재를 모르고 미래에 대해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을까? 즉 희망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은 미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에 근거해서 가질 수 있는 지식이다. 이 지식에 근거하여 우리가 무엇인가 미래에 대해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과거와 현재없이 중립적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몰트만은 역사속에 과거-현재-미래라는 등식이 아니라 거꾸로 미래-현재-과거라는 등식을 세워 마치 미래가 현재을 구성(constitute)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데 이것은 허구일 뿐이다. 역사는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가는 것이다. 우리가 미래를 희망하고 신뢰하는 것은 그 미래가 항상 열려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루신 일 그리고 지금 이루시는 일로 인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이은렬

2014-02-21 02:31:16


‘희망의 신학’을 중심으로

(위르겐 몰트만, 이신건 역, 대한기독교서회,2002년)

 

지도교수: 김길성 교수님

제 출 자: 이   은   열

학    번: 2004301017

 

 

Ⅰ. 들어가는 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신학적 입장은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으나 “종말론”, “희망” 그리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으로 크게 대표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신학을 가능케 한 근거는 “희망”이다. 희망으로 인해 그의 신학은 시작된다. 즉 몰트만 신학의 신학적 원리는 희망에서 파생되어지는 것이다. 중세기의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에 의해 “지식을 찾는 신앙 곧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fides quaers intellectumcredo, ut intelligam)는 근본 명제를 지금까지 표준적인 근본 원리로 삼아 왔으나, 몰트만은 ‘지식을 찾는 희망 - 나는 알기 위해 바란다(spes quaerens intellectum-spero, ut intelligam)라는 근본 원리를 따르는 것이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종말론에 있어서 몰트만 이전 까지의 종말론은 기독교 신학의 마지막 부록 쯤으로 역사의 종국에 가서나 있을 수 있는 미래적인 것으로 여겨졌는데 비하여 몰트만은 이 종말론이야 말로 기독교 신학의 근거로서 그 시작이며 중심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철저하게 소망의 지평과 미래의 차원에서 종말의 관점으로 시종일관하고 있다. 즉, 그에 의하면 출애굽이나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롬 15:13)”으로서 “미래를 존재의 양태”로 가진 하나님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종말론적 소망은 현실을 간과하는 희망이 아니라 항상 현실과의 대립 가운데서 나타난다고 보고있다. 그리하여 경험과 희망이 맞서는 상극 속에서 갈등이 생기고 그 희망은 고난과 죽음이 경험되는 현실과의 대결 에서 형성되어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역동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소망의 사고는 크리스챤으로 하여금 현실에 타협, 안주하지 않고 그 것에서 고난 받고 그것에 대항하게 하는데 이는 “하나님과의 평화는 이 세상과의 불화”로 보기 때문이다.

 

IⅠ. 본    론

1) 몰트만에 대해서...

몰트만은 1926년 4월 8일 함부르크의 자유스러운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학과 원자물리학을 전공하길 원했고, 성서보다는 문학 작품을 더 즐겨 읽었다. 그러나 그가 17살이 되던 해에 함부르크가 무참히 파괴되는 것을 목도했고, 18살에 전쟁에 참여하여 이듬해에 전쟁 포로가 되어 벨기에, 스코틀랜드에서 3년간 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자신의 삶의 확실성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 동안 그는 기독교적 삶 속에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발견했고, 이 경험은 그에게 절망과 자포자기를 이겨내는 생명력을 선사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자신에게 생명력을 허락한 능력을 파악하기 위하여 신학 공부의 문을 두드렸다. 

이러한 전쟁 체험은 일평생 그의 신학이 연대적, 현실적 특징을 갖도록 방향 지워 주었다. 개개인이 경험하는 삶의 상황은 개인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항상 사회적, 집단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음을 그는 자각하게 된 것이다. 그는 찢기고 죽임 당한 수많은 인간 들을 보면서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자는 결코 신학에서 세상에 대해 초연한 자세로 개인적 관심만을 가질 수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는 괴팅켄(Goettingen)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브레맨-바써호스트(Bremen-Wasserhorst)라는 작은 마을에서 5년 동안 목회하면서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는 논문을 완성했다. 

그 이후 그는 부퍼탈(Wuppertal), 본(Bonn)대학에서 교수하였고, 1967년 이래로 계속해서 튀빙겐에서 정교수로 활동해 왔다. 그 동안 그는 많은 나라의 대학에 초빙되어 객원 강의와 강연을 행했고, 지금까지 8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그의 부인 벤델(E.Wendel)여사도 신학 박사로서 여성 신학을 주도하고 있으며, 사이에 세 딸을 두고 있다. 

 

2) 희망의 신학에 대해서

『희망의 신학』은 "Evangelische Theologie"(개신교 신학)의 발행인들이 1958년으로부터 1964년까지 전개하였던 논쟁으로부터 생겨났다. 여기서 그는 게하르트 폰 라트(G. v. Rad), 발터 침멀리(W. Zimmerli), 한스 발터 볼프(H-W. Wolff), 한스 요아힘 크라우스 등에 의해 대변되었던 구약성서 신학과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에 의해 초석이 놓여지고 에른스트 케제만(E. K semann)에 의해 수정, 발전되었던 신약성서 신학 사이를 중재해 보려고 했다. 여기서 그의 핵심적인 질문은 역사 이해에 대한 질문이었다. 현실 전체는 인간의 희망을 깨우는 하나님의 약속의 맥락 안에서 역사로 경험되는가, 아니면 그 맥락과 대립하는 가운데서 역사로 경험되는가? 아니면 역사는 인간 실존의 역사성에 근거하고 있는가?에서 그는 좀더 정의롭고 좀더 평화로우며 좀더 인간적인 세상에 대한 미래의 전망을 획득하기 위하여  전쟁 이후에 풍미하였던 실존주의를 극복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희망의 신학』에서 몰트만은 다양한 신학의 재료들을 서로 엮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었다. 여기서 사용된 신학의 재료들은 구약성서의 약속의 신학,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Parusia)의 신학, 홀랜드의 사도직의 신학, 혁명적인 윤리였다. 사실 몰트만의 신학 사고는 괴팅겐 대학교 시절부터 침멀리와 케제만에 의해 이미 이런 방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네델란드 신학자 아놀드 반 룰러(Arnold van Ruler)를 통해 종말론적 방향과 메시야적 동기를 갖는 "사도직의 신학"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는 그가 1958년과 1961년까지 발표한 논문에서 종말론적 희망과 역사적 실천의 관계에 대해 다루었음을 보아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몰트만은 그의 주장을 통해서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소망하는 것으로 보았다.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었고 약속된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는 주장을 보면 기독교의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역사와 부활에 근거하기 때문에 그 소망은 logos가 아니라 약속의 형식이며 그리스도는 “그가 누구냐, 그가 무엇을 말했느냐”만이 아니라 “그가 장차 무엇이 될 것이냐, 그에게서 무엇이 기대되느냐.”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으로서(골 1:27) 소망은 신앙을 유지시키고 미래의 종말을 향하여 끌고 나가는 힘이 되며 사랑의 삶 속으로 이끌어 들이는 요인으로서 신앙의 인식과 나아가 역사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그가 신앙하는 것을 인식하기 위하여 미래의 것을 소망한다는 것이다.

 

또한 『희망의 신학』은 또한 우리에게 신학이 어떻게 희망으로부터 시작하고 종말론적인 빛 안에서 그 주제들을 숙고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려고 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교는 단지 부록에서만이 아니라 전적으로 종말론이고 희망이며, 그래서 현재의 혁신과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종말론적인 것은 그리스도교에 덧붙여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매체, 즉 모든 것이 조화되어 있는 원래의 소리같은, 또는 모든 것이 잠겨 있는 기대된 새 날의 여명의 빛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에게 있어서 신학에는 하나의, 즉 미래의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있거나 세계 밖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 앞에 있는 하나님, 즉 희망의 하나님(롬 15:13)이기 때문이다. 그는 밤중의 불기둥처럼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출13:21)이요, "존재의 본질로서의 미래"(블로흐)를 가진 하나님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의 미래의 약속에서 인간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아직도 오지 않은 종말에 대한 미래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미래 일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현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현실에서 출발해서 그 미래, 미래의 가능성, 미래의 힘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야말로 종말론적 정신과 유토피아적 정신의 토대요, 그 시금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하늘의 영원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가 서 있는 바로 그 땅의 미래, 인류의 미래를 본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미래를 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는 이 땅의 희망이라는 것이다. 그럼, 희망이란 무엇인가? 몰트만은 말하기를 ‘희망은 고난 중의 위로일 뿐만 아니라 고난에 맞선 하나님의 약속의 저항이기도 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둔 사람은 더 이상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고 현실 때문에 고난받고 현실에 저항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평화는 곧 세상과의 불화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몰트만은『희망의 신학』에서 이러한 그의 신학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당대의 신학 주제를 놓고 비판적 대화를 전개했다. "희망에 관한 명상"(서론)에 이어 몰트만은 "종말론과 계시"(I장)에서 초기 바르트의 하나님의 초월적 주체성의 신학, 불트만의 인간의 초월적 주체성의 신학, 구원사적 종말론,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종말론과 치밀하게 논쟁하면서 "계시의 종말론"을 제시한다. 여기서 몰트만은 계시가 약속의 성격을 갖고 있고 희망으로 파악된다는 점을 역설힌다. 그리고 그는 "약속과 역사"(ll장)에서 약속과 계시의 상관성, 그 특징을 설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미래"(Ⅲ장)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종말론을 설명한다. 여기서 그는 미래를 변화시키는 희망을 제시하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역사의 의미가 성취되는 도상에 있으며 성령의 역사 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의 미래의 시작이요, 도래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학은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그의 현 상태에서 정지하거나 절대화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세의 또 다른 공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고 또 약속된 하나님의 미래를 소망한다. 이것을 소망하지 않는 신앙은 미신이거나 죽은 신앙이다. 왜냐하면 예수와 함게 시작한 종말론은 현대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연관성도 없는 신화가 아니라 주어진 상태에서의 안일과 만족, 자기 절대화의 본성으로부터 벗어나 역사를 변화시키는 추진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트만의 신학은 다른말로 “정치 신학”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정치적 운동이 아니라 현재의 불합리한 상태에서의 해방을 부르짓기 때문이며 그 이후에 이는 해방 신학, 흑인 신학, 여성 신학, 그리고 한국의 민중신학 등 제 3 세계에서의 사회 변혁 신학 운동에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내용을 보면 "종말론과 역사"(Ⅳ장)에서 몰트만은 현대의 역사이해를 개관하고, 비판한 후에 종말론적 역사이해를 나름대로 제시하며, 마지막으로 "새출발의 교회"(V장)에서 그는 미래의 지평을 세계에 열어 주는 교회의 사명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몰트만은 죽음에 대해서도 죽음이 원죄의 결과라고 하는것과 죽음은 인간의 자연적 끝이라는 견해를 모순된 것으로 여기고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죽음은 모든 사물의 영원한 생명으로의 새 창조와 함께 극복될, 연약하고 시간적인 피조물의 특성이라는 생각을 제시하려 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기독교의 부활의 희망 속에서 영혼불멸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파악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IIⅠ. 나가면서

이상으로 본인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와 그리고 그의 종말론을 나름대로 다루어 보았다. 몰트만의 신학은 철저하게 종말론적 시각에서 다루어 짐을 알 수 있다. 그가 보는 종말론의 시각은 시작이며, 앞을 향한 전망과 성취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성서를 텍스트로 하고 있고, 따라서 약속과 성취를 이루시는 하나님, 무에서 존재를 있게 하신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하는 종말론적 희망의 신학이라고 그는 주장하고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와 그의 부활사건은 ‘모순’이지만 이런 ‘모순’ 속에서 동일성을 발견할 수 있고, ‘비 동일성 속에서 동일성’을 볼 수 있는 사건이요, 이것이 희망의 종말론의 기초가 된다고 보고있는 것이다. 

 

몰트만이 또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진정한 희망을 어떻게 하면 세상속에다 가져다 줄 것인가 하는데 있는데, 이것은 바로 교회의 파견의 행위로 가능하다고 그는 보고 있다. 이것은 현재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전망아래서 신앙 없는 자를 신앙 있는 자로 인식하면서 ‘만물의 회복’이나 ‘피조물과의 대화’를 목표로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모든 것 중에 모든 것 되실 때’까지 ‘희망이 없는 세계에 희망을 전염시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몰트만의 신학에 대한 비판이 만만치 않다. 

첫째 개인의 영혼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세계가 아무리 변화된다 할지라도 개인의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않는다면 세계는 이 땅 위에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인데, 이에 대해 몰트만의 신학은 현실을 위한 어떤 구체적 대안이나 행동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죄와 악의 문제를 그렇게 심각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구원이란... 심령의 구원이나 악한 세계로부터의 개인의 구출, 시련받는 양심의 위로를 의미하지 않고 종말론적인 의의 희망, 인간의 인간화, 인류의 사회화, 전 피조물의 평화의 실현을 의미한다”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몰트만은 종말론적 희망이 그리스도의 미래,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고 기대한다고 하면서 앞으로 열려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시는 때’에 이루어 진다고 하면, 과연 이런 미래는 실현될 수 있는 미래인가? 아니면 또 다시 전혀 다른 미래에로 열어 제치는 종말론적 희망을 기대해야 하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종말론적 전망 속에서 바랄 수 있는 하나님의 미래가 ‘만물의 회복’이나 ‘피조물과의 화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지나치게 관념적인 사고가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의 구원의 필연성’을 말하는 것으로 전통적인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원론적인 내세신앙을 완정히 붕괴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과연 그렇게 된다면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중보개념은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은 미래를 바라지도 않고, 희망도 없다면 성경속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몰트만의 신학

2017-03-30 11:47:25


1. 몰트만은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종말론을 새롭게 해석한다. 그는 지금까지 종말론은 기독교 교리의 부록으로 간주되어 묻혀지고 소홀히 취급되어 왔다고 말한다.신맑스주의자인 에른스트 불로흐의 희망의 원리라는 책은 몰트만에게 영감을 주었고 희망의 신학이 태어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몰트만은 성서의 맥락에서 하나님은 약속하고 약속을 성취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그렇기에 성서의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약속의 하나님이며 미래의 하나님이라고 강조한다. 몰트만은 종말이란 단지 역사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몰트만은 미래적 사건인 하나님의 약속은 종말에 성취되는 동시에 현실역사 속으로 들어와 현재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기독교 역사관은 미래의 약속이 현재속에 성취되는 역사였다. 말하자면 역사는 단순히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것(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에 나타난 역사관)이 아니라 미래에서 현재로 도래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현재로 도래하는 미래는 현재를 변화시키는 변혁적 종말론이 된다. 사실 몰트만의 이런 종말론의 뿌리는 유대의 묵시사상에 근거한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형성된 유대 묵시사상에 등장하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하나님의 약속이 현재 성취된다는 종말론적인 선포다. 이렇게 현재로 도래하는 하나님의 미래가 곧 하나님나라이고 우리에게 도래하는 하나님나라는 회개를 요청하게 된다. 이 회개가 바로 현실을 변혁하는 힘이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나라로 가는게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우리에게 도래한다. 몰트만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종말론적 사건으로 보았으며 이 종말론적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다고 본다. 그러나 몰트만의 종말론은 오스카 쿨만이 말하는 실현된 종말론이나 승리의 종말론이 아니라 여전히 미래의 종말론이고 현재와 긴장 가운데 있는 미래다. 

2. 몰트만의 신학은 종말론의 신학에서 출발하여 삼위일체 신학으로 나아간다. 몰트만의 신학적 촛점은 신정론(Theodicy)이다. 그의 신정론에 대한 관심은 초기에 희망의 신학으로 대표된 종말론에서 시작하여 후기에 십가자에 달리신 하나님과 삼위일체와 하나님나라로 나타난 삼위일체론으로 발전한다. 그러니가 몰트만은 초기 신학에서 강조한 약속의 하나님을 후기 신학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제시한 것이다. 후기 신학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의 고난에 공감하고 함께 고난을 당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몰트만의 이런 신론의 배경에는 아브라함 헤셀이 강조한 하나님의 Pathos, 구약의 쉐키나의 하나님, 세계사의 과정을 하나님의 자기 활동으로 본 헤겔의 사상이 있다. 몰트만이 제시한 세상의 고통에 참여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신학적 초점인 신정론에 대한 대답으로 등장한 신론이지만 그러면 하나님과 세계의 구별이 없이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몰트만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영을 통해 피조세계 안에 거하시면서 동시에 피조세계와 구별된다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