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전쟁
2014-09-11 14:04:23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의 첫 전투는 여리고성 전투였다. 이 전투는 역사상 가장 이상한 전투로 기록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전투방식은 역사상 있었던 그 어떤 전투와는 다른 기이한 방식으로 치러진 전투이기 때문이다. 그 전투 방식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군사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달린 것이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리고 전투에서 특이한 명령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여호와께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께 바쳐지는 방식은 성안의 남녀노소를 칼날로 진멸하는 것이며 심지어는 소와 양과 나귀도 진멸하고 성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불사르며, 불타지 않는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는 것이었다. 또한 불타서 무너진 여리고성을 재건하는 일도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상식에 반하는 일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전쟁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부 진멸을 한 것과 심지어는 소와 양과 나귀까지 진멸을 하고, 성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불사른 일이다. 전투력이 있는 성인 남자를 진멸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여자나 노인 그리고 아이들까지 진멸한 일은 이해가 되지 않는 너무도 잔인한 짓이 아닌가? 그리고 당시의 귀중한 재산인 가축까지 진멸하는 일은 더구나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여리고 성과 성안의 물건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기지 않고 다 불살라 버린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런 가나안 전투 방식은 이미 신명기에서 예고된 것이었다. 모세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이스라엘에게 넘겨 이스라엘이 치게 하실 때, 그들을 진멸하되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며 당연히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라고 명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전쟁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성취로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에게 땅을 빼앗아 아브라함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에게 땅을 빼앗으려고 하신 것인가? 그리고 왜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시려고 하신 것인가? 이 점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노아의 홍수이후에도 시간이 자나가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여호와를 떠나 악을 향해 나아갔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어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시며 그에게 수많은 후손을 주실 것과 그가 지금 우거하는 가나안 땅을 그 후손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땅이라는 두 가지 약속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정의와 공평을 행함으로 여호와를 도를 지키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 그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정의와 공평의 법인 율법을 주신 것이다. 모세는 말하길 여호와께서 주신 율법은 이스라엘이 차지할 가나안 땅에서 행하게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한다. 즉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여야 할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에게서 땅을 빼앗으신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의 법을 떠나서 온갖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그 땅을 더럽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의 법을 따라 행함으로 더렵혀진 가나안 땅을 새롭게 하라는 하나님의 요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스라엘이 율법에 충성스럽게 행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경고를 받았다. 땅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그 안에서 살라고 주어진 구체적인 삶의 자리이다. 가나안 정복전쟁은 이 사실을 역사적인 예표로서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가나안 족속이 그 땅에서 쫓겨났듯이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법을 떠난다면 그 땅은 그들을 토하여 버릴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가나안 정복전쟁의 특징으로 나타난 "바쳐짐(헤렘)"의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불쌍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그들의 누적된 죄악에 물들지 말고 그 땅에서 새롭게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 나라를 건설하라는 엄중한 명령이었던 것이다. 그들을 살려주어 동거하거나 섞여서 산다면 이스라엘도 유혹을 받아 결국은 여호와를 떠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도 예외 없이 여호와의 진노로 진멸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후에 전개된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는 이 진실을 잘 보여주지 않는가! 심지어 가나안 족속이 기르던 가축도 다 죽이고 그들이 사용하던 물건도 다 불태우라고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하나님의 법을 떠난 가나안 족속이 이룬 악의 문화를 가증하게 여기셨으며 또 얼마나 이스라엘로 하여금 철저히 새롭게 시작할 것을 요구하셨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실현되는 순간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의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더럽혀진 가나안 땅이 그 하나님나라의 등장으로 새롭게 될 기회가 온 것이며 장차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인하여 받게 될 복의 출발이었다. 그렇다면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주어진 "헤렘"의 명령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의 모든 더러운 것과 철저하게 결별하고 새롭게 시작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요구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여호수아와 가나안 정복전쟁
2014-09-12 14:46:30
여호수아와 가나안 정복전쟁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살게 된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서로 관련되어 하나의 큰 역사책을 이룬다. 유대인들은 이들 역사책인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 상하를 "전기 예언서"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이 책들이 예언자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똑 같은 관점으로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진격하던 시기는 국제적인 혼란기였다. 주전 12세기는 기존의 강력하던 나라와 왕국들이 붕괴하면서 세계의 질서가 새로 편성되던 시기였고 그로 안하여 중종지역 전체의 무질서와 혼란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힘의 공백기가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하는데 호기가 되었다. 그러나 세계시적인 상황은 기회를 제공한 것 뿐이고 그 기회를 타서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과제였다.
여호수아 1장 5-9의 서문은 열왕기까지 아우르는 역사서 전체의 서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행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비결은 강력한 군사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준행여부에 있었다. 그 당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이며 마참내 여호수아가 얻게 된는 땅이다. 그러므로 이 땅을 얻는 것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준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갈대와 우르와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을 불러 내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마침내 그들이 거할 구체적인 공간으로 이끄신다는 점에서 여호수아의 주제는 제국과 대조되는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구체적인 등장이라고 볼 수 있다.
세 차례의 군사작전을 통하여 가나안 정복전쟁은 마무리 되었는데 전쟁에 대한 서술은 이 전쟁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며 승리는 하나님께 있지 사람에게 있지 않음을 증거하고 있다. 가나안 정복전쟁의 대부분의 경우는 "헤렘"으로 규정되어 성안에 있는 호흡이 있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죽여야 하며 일체의 금품이나 전리품도 취해서는 안되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원주민들을 진멸하게 하신 것은 단지 전쟁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죄악과 부패애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그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런 전쟁 역사 서서술의 배경이 포로 후기였을 것을 생각하면 이런 진멸 전쟁에 대한 강조는 전적으로 지난 과거의 반성의 시각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짐작케한다. 그것은 실제로 앞으로도 이방 민족을 진멸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난 과거에 제대로 순종하지 않음으로 오늘의 비극이 벌어졌다는 점을 상기시키려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멸 명령은 이방민족에 대한 적대감이 아니라 악과의 싸움, 악과의 단절을 강조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가나안 정착시기에 시작된 헤렘의 전통은 삼상 15장 아말렉 전투에서도 나오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착 이후에도 심지어는 왕정기에도 나타난다. 기독교 역사상 헤럼 전통이 악용된 헌저한 사례가 중세의 마녀사냥일 것이다. 교회사를 보면 기독교가 권력을 가졌을 때 구약의 내용을 악용한 것을 보게된다. 구약에서 우상숭배와 함께 항상 지적된 것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압제였다. 그래서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것과 함께 정의를 행하라는 요구가 항상 나온다. 우상숭배의 특징은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것이다. 정의가 없는 신앙은 우상숭배에 다름 아니다. 구약이 말하는 야웨신앙은 정의로운 삶, 공의가 실천되는 삶이다.]
여호수아 11장 23절은 가나안 정복이 끝나고 전쟁이 그쳤다고 말하지만 여호수아 다른 본문을 보면 아직도 싸우고 얻어야 할 땅이 많이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특시 사사기 1장을 보면 정복전쟁이 완결된 것이 아니라 아직 진행중임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여호수아 당시에 단시일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랸 시간에 걸쳐 점차적으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주로 산지 지대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이는 평지의 거민들이 철기시대의 문화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그들과 싸우기에 역부족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11장에서 땅이 정복되고 전쟁이 그치고 안식이 찾아왔다고 선언한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면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작지만 그 땅을 차지하기 시작했으므로 이미 그 땅을 정복한 것이라고 보는 신앙적인 안목이 전제되었을 것이다.
13장부터 가나안 땅을 분배하기 시작하는데 땅을 분배하는 방식은 제비를 뽑는 것이었다. 이는 인긴적인 계산이나 강자의 논리가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믿음의 고백이 전제되어 있다. 이렇게 분배된 땅은 다른 자파에게 결코 팔아 넘길 수 없는 영원한 기업이 되었다. 분배된 땅에는 아직 점령되지 않은 땅도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여겨 분배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고 계속하여 성취된다는 믿음이 전제되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이런 것을 보면 여호수아서가 단지 땅을 정복하고 분배하는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과 명령에 대한 순종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24장에서는 세겜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여러 집단돠 지파들을 하나로 묶는 지파동맹의 자리가 되었다. 여호수아가 회고한 거룩한 역사는 이제 모든 지파의 역사가 되었고 이런 역사를 함께 자기들의 것으로 공유하고 고백함으로써 이들은 한 민족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래서 이후의 이스라엘을 지파 동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지파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신앙공동체로서 한동안 세겜이 종교적 중심지였고 후에는 실로가 그 중심지가 되었다.
[레위 지파에게는 땅이 분배되지 않고 땅을 분배받은 각 지파들이 레위지파에게 십일조의 방식으로 땅을 주었다. 십일조는 일종의 공동체 훈련이다. 십일조 정신은 서로가 의존되고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공동체 제도이다. 이런 공동체적 제도인 십일조는 지극히 인간적인 일인데 하나님은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며 거룩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의 십일조를 멋대로 해석하여 악용함으로 한국 교회가 혼란을 겪고 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성경의 해석, 곧 신학의 문제이다.]
[가나안 땅의 정복은 여호수아로 부터 300여년이 지난 다윗 시대에 이르러 완성된다. 정복이 끝나지 않은 여호수아 시대에 땅을 각 지파에게 분배한 이유는 무엇일까? 분배된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지만 그 땅을 실제로 차지하기 위해서는 각 지파에게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구체적인 행동이 요구된다. 믿음은 약속에 대한 반응이다. 약속없이는 믿음이 없지만 믿음없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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