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장로의 역사관- 배덕만
2014-09-03 15:06:04
[문창극 장로의 역사관: 식민사관 혹은 신앙적 민족사관?]
I. 들어가며
한국근대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풀었던 문창극 장로의 강의가 한국교회의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일각에선 그의 역사관을 식민사관으로 규정하며 맹렬히 비판했고, 일군의 사람들은 그의 관점을 건전한 기독교적 역사관으로 옹호했다. 결국, 여론이 부정적 방향으로 급변하면서, 문창극 장로는 스스로 국무총리 지명을 포기했지만, 그 후에도 한국교회는 문창극 장로의 역사관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아직까지 논쟁중이다.
이 글에선 문 장로의 강연 속에 나타난 그의 역사관을 간략히 분석하고, 그의 역사관을 둘러싸고 제기된 교계의 다양한 발언들을 지지와 반대진영으로 구분하여 설명할 것이다. 끝으로, 일부 역사가들이 문 장로의 역사관과 동일한 것으로 언급했던 함석헌의 역사관을 살펴봄으로써, 과연 양자의 동일시가 적절한 것인지 살펴볼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문 장로의 역사관의 실체를 보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길 기대한다.
II. 문창극의 역사관
(1)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봄으로 해서, 과거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한국 역사에서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면, 과거에서 지금까지 지내 온 상황을 보면, '아, 대한민국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우리가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단련시키기 위해 고난을 주셨다.
우리 민족에게 고난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민족을 단련시키기 위해 고난을 주신 겁니다. 고난을 주신 다음에 또 우리에게 하나님은 길을 열어 주십니다. 매번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중요 중요 시기마다. 그러면 길을 왜 열어 주셨느냐, 우리 민족을, 이 나라를 써야 될 일이 있기 때문에 길을 열어 준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나라라는 것은 지금까지 오면서 그 굽이굽이마다 시련과 도전을 받았지만 그것이 또 하나의 기회가 됐습니다. 그것이 기회가 돼서 지금 이 나라가 왔습니다.
하나님이 뜻이 있는 거야. 우리한테 너희들은, 이조 500년, 허송세월을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너희들은 고난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한테 고난을 주신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3) 우리민족은 본래 무지하고 더럽고 게으른 민족이었다.
그 다음에 1890년대에 또 한 분이 왔습니다. 비솝 여사라고 영국 분인데, 이 사람은 책으로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비솝 여사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한국을 다 샅샅이 다 들여다봤어요. 이 사람은 부산에서부터 저 신의주, 저 강계 넘어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던 분이에요. 그래서 책을 한 권 냈는데, 이 사람이 부산에 와 보니까,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찌나 더러운지, 그 하수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그런 나라고, 자기가 놀란 것은 그 당시 일본인들이 거처하고 있는 동래라는 곳이 있습니다. 부산 동래가 옛날에는 일본인들이 거기 거처했습니다. 동래에 가 보니까, 동래 현에는 그렇게 깨끗하다는 것. '야, 일본은 이렇게 깨끗한데, 어떻게 한국 사람들이 사는 이곳은 부산진은 이렇게 더러우냐.' 이 사람이 놀래 가지고 썼습니다.
(4) 우리민족의 지도자들은 무능했다
제가 책을 읽어보니까, 그 당시 민비라는 사람 죽고 나서, 또 고종이랑 그 다음에 엄비 뭐 이런 사람들이 그 다음 대신을 했는데, 얼마나 나라에 대해서 무책임하냐면 '일본한테 나라를 팔아먹어도 좋다, 일본이 우리를 합병해도 좋다. 단, 우리 왕실, 이 씨 왕실만 살려 달라.' 그게 조건이었어요. 1910년 한일 합방할 때, 가장 큰 조건, 이완용이가 그 조건을 들고 일본을 들고 협상을 했어요.
이거 윤치호 일기에 나온 거예요. 그 당시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일본 가서 유학했을 때, 무슨 공학을 한다거나, 의학을 한다거나, 이, 우리 진짜로, 이 나라가 비탄에 빠진 이 나라를 구하려면 그런 게 필요한 거 아닙니까, 과학을 한다거나, 그런 거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사회학 철학, 정치학, 다 혓바닥 놀리면서, 게으르고 먹고 살려고 그런다. 그게 우리 조선 사람들, 우리 엘리트들의 생각이었어요.
(5) 기독교는 우리민족에게 근면을 가르쳐주었다
기독교가 뭡니까. 기독교가 우리 조선 민족한테 너희 일해야 한다. 너희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근면해야 한다. 근면해야 한다. 그걸 깨우쳐 준 거야.
우리나라, 이조 말기의 그 우리 민족들의 피에는, 공짜로 놀고먹는 게 아주 그냥 몸에 박혀 있었다 이거야. 여하튼 이런 나라였어요. 이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고, 그런데, 그런 나라에 선교사님들이 와서, 이 변화를 주신 거다. 우리가 게으른 가운데, 기독교로 우리가 개종을 하고, 우리가 하나님 뜻에 맞게 살려고 작정을 한 이후에 이렇게 달라지는 거예요.
(6) 공산주의는 게으른 자들의 전유물이다
그러니까 윤치호라는 사람이 뭐라 그랬냐면, "조선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딱 맞는 거다." 그러는 거야. 체질상, 왜 그러냐. "공산주의가 사람들로 열심히 일하게 하기보다는 남의 노고에 얹혀살기를 조장한다. 이것이 유교를 가진 조선과 공통점이다." 그렇죠. 공산주의도 자기가 일하는 겁니까. 자기 일 안 하려고 그러잖아. 정부가 세금 내라 그래서, 세금 걷어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놀자 그러는 게 공산주의 아니에요? 사람이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자기 노력과 자기 땀으로 일해야 하는데, 야, 돈 번 사람들은 다 우리 거를 착취했다. 그러니까 저 사람 것 뺏어서 우리가 먹자, 그게 아주 심플하게 얘기하면 그거 아니겠어요. 조선의, 과거 조상들의 피에는 오히려 공산주의가 맞는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7) 게으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단과 6.25를 주셨다.
그런데 우리를 분단시켰어. 분단시킨 이유가 뭐냐, 그때는 안타깝고, '이게 뭐냐 도대체, 우리는 독립을 얻었는데 독립도 못하지 않았냐.' 그렇지 않다 이거야.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너희들은 내가 불쌍해서 독립은 시켜줬지만 앞으로도 너희들은 더 고난의 길을 갈 수밖에 없어. 아직도 너희의 그 게으름, 죄, 깨끗하게 안 된 거야.' 그래 분단을 시킨 거예요. 분단을 시킨 것이 지금 와서는 오히려 우리한테 분단이 됐기 때문에 한국이 이 정도 살게 된 거예요. 만일 그때 공산주의가 됐으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됐겠습니까. 지금 월남, 중국, 중국은 지금 몇 년 사이에 잘 살아졌지만, 지금 북한. 그게 우리의 지금 현실이에요. 남한이 그 당시 통일됐다면, 지금 북한이 된 거야. 북한이 돼 있는 거야.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놔두신 것이 아니야. 하나님은 '너희들은 안 되겠다. 다시 고난을 더 가져라.' 그래서 분단을 시켰어. 그것뿐입니까, 6·25까지 주셨어. 이 6·25까지 주신 거야.
(8) 일본과 미국이 없었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여러분, 한국에 미군이 없는 한국을 한번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반미, 제가 친미를 하자 그러는 얘기가 아니야. 미군이 없는 한국은 금방, 옛날은 소련 밑에 가 있는 거고, 지금은 중국 밑에 가 있는 것. 중국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어. 이미 북한은 중국에 속국이 돼있지, 거의 돼 있지 않습니까, 6.25를 왜 주셨냐, 미국을 붙잡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또, 돌아보면 미국을 붙잡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그 다음에 경제 발전했습니다. 경제 발전했는데. 경제 발전 누가 했습니까. 우리 힘으로 했습니까? 물론 우리가 새마을운동도 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뭐 하고 뭐 다 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했습니다. 진짜 하루에 3교대씩 밤을 새우면서 일을 했습니다. 근데 그 일을 해서 상품을 만드는 게 다 어디 갔습니까, 그 당시 신발, 무슨 앨범, 흑백TV, 이런 거 다 우리가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거 어디서 다 사 줬죠? 그거 다 미국에서 사 준 거야. 우리 경제 개발의 가장 뿌리는 뭐냐, 미국에서 사 줬기 때문에. 우리 경제 개발도 사실은 미국의 덕이 굉장히 컸습니다.
그래 1960년대부터 1970년부터 우리는 공업화를 했잖아요. 근데 공업화를 한 가장 큰 힘이 뭡니까. 일본의 기술력이야. 일본이 우리보다 먼저 기술을 다 하고, 일본이 우리보다 앞장섰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본만 따라가면 되는 거야. 박정희나 삼성이나 다 일본 따라 한 거야, 현대자동차, 다 일본 따라서 우리가 이만큼 컸습니다. 본 지금 우리 우습게 보지만, 우리 일본 사람들 특히 우습게 보죠. '쪽바리들' 이렇게 생각하지만, 일본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경제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9) 통일과 평화는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터치”로 이루어진다.
근데, 여하튼, 공산주의라는 것은 그렇게 우리가 뭐 협상을 통해서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남북통일이 되고, 이런 거 없어요. 그런 거 일어날 수가 없어. 우리 남북을 분단시킨 이유가 다 있어. 왜냐, 하나님은 통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한다는 것을 우리 민족에게 다시 한 번 보여 주려고 그러는 거다 이거야. 분명히 보여 주실 거예요. 그거는 우리가 무슨 남북회담해서 뭐, 개방 정책을 써서 그렇게 안 돼. 그거는 분명 10 년 내에 하나님의 터치가 온다 이거예요. 그때 한국 민족이, '아, 이게 뜻이 있구나' 하는 걸 된다 이거예요.
(10) 하나님께서 한국을 세계의 중심국가로 만드실 것이다
하나님이 쓸 사람은 저는 대한민국이라고 생각해. 왜? 이거는 제가 괜히, 아 우리 민족이 잘났고 뭐 이런 걸 부추기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거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 일본이 우리보다 먼저 선교사가 왔어요. 임진왜란 때, 일본 소서행장을 따라서 선교사가 조선에 왔어. 일본에 있던 선교사가, 일본이 우리보다 먼저, 200년, 300년 앞서서 선교사가 왔는데, 일본은 하나님의 나라가 안 됐어. 중국도 우리보다 훨씬 먼저 선교사가 왔어. 근데 중국도 하나님의 나라가 안 됐어. 한국이 유일하게 그래도 지금 천만 교인이라고 그러는데, 천만 교인을 지금 가지고 있는 거야. 참된 신자는 얼만지 모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나라로 돼 있는 거예요. 아까 '동북아 시대가 열렸다. 여기가 중심이다' 할 때 하나님은 '아, 한국을 써야 하겠구나, 한국을 다음의 세계의 중심 국가, 세계의 새 예루살렘으로 만들어야 되겠다' 하는 뜻이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된다 이거예요.
III. 문창극 역사관에 대한 양분된 반응
문창극 장로의 강연내용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후, 교계 안팎에서 뜨거운 논쟁이 발생했다. 먼저, 문 장로의 역사관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문 장로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결집되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기 시작했다. 물론, 양측의 갈등과 대립이 가열되자, 양측에 가담하길 주저하며 보다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려는 중도적 그룹도 형성되었다. 여기서는 문 장로의 입장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두 그룹의 주장들을 간략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동조집단
첫째. 이들은 문창극의 역사관이 성경적·신학적 관점에서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들은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고난을 당하고,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고통을 받았던 기록들을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이해하면서, 문창극의 역사해석도 같은 신학적 전통에 서 있다고 옹호했다. 이종윤 목사는 문창극의 강연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과 창조 능력으로 보전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 사상을 믿는 신앙적 표현”이라고 주장했고, 이상규 교수는 문창극 후보가 모든 사건에 섭리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역사 인식을 갖고 있으며, 이 같은 역사 인식은 함석헌의 인식과 같은 것이라 설명했다. 특히, 신문을 통해 문창극에 대한 공개적 지지를 선언했던 샬롬나비는“문 후보의 발언은 신자로서 개인적인 신앙고백이며 동시에 일종의 신학적인 발언이”며, “우리는 문 후보의 발언은 신학적 역사해석에 있어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와 충분히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천명했다.
둘째, 이들은 문창극의 강연이 교회 안에서 행한 것이므로,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교회라는 특수한 공간과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종교적 목적의 강연이기 때문에, 문창극의 강연은 세속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교회언론회(김승동 목사)는 "교회 안에서 (벌인)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한 강연인데, 기독교적 언어를 사용한 것을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지나치게 정치적 용어로 바꾸려는 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논평했으며, 고명진 목사(수원중앙교회)는 “문 씨의 간증이 교회라는 제한적 공간에서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내용을 정치적 관점으로 비방, 폄하하고 진실을 왜곡, 여론 선동하는 풍토는 사라져야 한다”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전광훈 목사는 영적 세계와 성경적 역사관을 전혀 모르는 기자들이 교회 안에서 한 강연 중간의 말 한마디로 "개망신시키려고" 떠들었다고 말했다. 이상규 교수도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끝으로, 이들은 문창극의 역사관이 식민사관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이들은 문창극이 결코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진정한 애국자라고 치켜세웠다. 만나교회의 김병삼 목사는 “문 후보가 친미, 친일이 아닌 '친한파'이며, 미국, 일본, 중국도 아닌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을 '극우'와 '꼴통 보수'라 부른다면 기꺼이 문 후보 편에 서겠다고도 했다. 심지어 샬롬나비의 경우, 문 씨가 지속적으로 반복했던 “하나님의 뜻”은 “식민사관이 아니라 신앙적 민족애”에 있다고 천명하면서, “이 강연의 본의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로 비록 고난과 어려움을 당했지만 현재 우리가 누리는 민족의 번영을 위한 시련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악은 반드시 하나님의 처벌하신다는 신념도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2. 반대집단
첫째, 이들은 문창극의 “하나님의 뜻”으로 본 한국근대사 해석에서 심각한 신학적 오류를 지적한다. 특히, 구약성경을 근거로 한 하나님 주권사상을 한국근대사에 적용한 것은 성경해석의 치명적 오류에 근거한 것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다음과 같은 박영돈 교수의 주장이 대표적인 예다.
그런 발언에서 나타나는 주권 사상에 대한 오해와 맞물린 문제는 잘못된 성경 해석이다. 문 장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 민족을 대비하여,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세우려 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통치와 섭리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의 압제로 연단하신 것처럼 우리 민족을 일제의 지배 아래 연단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성경 해석이 그의 역사의식을 상당 부분 주관하고 있다...그러나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방인들이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특정 국가에 그대로 적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는 것은 성경 해석의 기본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다. 거기서부터 역사의식이 뒤틀린 것이다.
둘째, 이들은 문창극의 역사관이 지나치게 자학적이라고 비판한다. 문 장로는 우리민족의 번영과 기독교의 상관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우리민족의 역사에서 부정적 측면만을 과도하게 부각시켰다. 이런 모습에 대해서 윤경로 교수는 “어느 민족이나 열등한 부분이 있고 우등한 부분이 있는데, 문씨는 열등의식으로 역사를 보는 ‘자학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라고 비판했으며, 성기문 교수도 “문창극 총리 후보의 강연과 그의 칼럼 등이 보여 주는 기독교상(像)은 '하나님의 뜻'을 빙자한 외세 의존적, 서구 문화 우월적 기독교, 당파적 이념적 기독교의 모습을 보여 준다. 자기를 학대하고 비천하게 심지어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어야 기존 역사에서 벌어진 질곡과 불의함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박찬희 교수도 “문창극 씨의 이 강연 전체 요지는 "하나님께서 한국을 사용하기 원한다"는 것이지만, 그가 강연을 이끌어 가는 심저에는 일제가 심어 놓은 자학적 민족관과 식민사관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고 비판했다.
셋째, 문창극의 역사관을 비판했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그의 역사관을 친일/식민사관으로 규정했다. 한완상 박사는 “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역사 인식은 일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수용한 역사관”이라고 단정했으며, 이만열 교수도 민족 자체가 게으르고 무능하다는 말은 일제가 주장하는 식민 사관과 맞닿아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당시 일본 기독교인들의 추태를 분석한 후, 서정민 교수의 “하나님 뜻”에 대해 이렇게 통렬하게 비판했다.
한국의 크리스천이 '일제 침략'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 어떤 맥락에서라도 언급하는 순간,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와 협잡(挾雜)한 과거 일본의 일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의 망발(妄發)과 동행하는 일이며, 심지어 오늘날 일본의 양심적 크리스천들에게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일이 되는 것이다.,,무엇보다, 우선 한국 그리스도교 일부의 소름 돋칠 만큼 경박하고, 치졸하며, 앞뒤도 분간하지 못하는 '하나님 섭리론'은,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의 강제 병합 당시 일부 일본의 극우(極右)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내세우던 '병합신의론'(倂合神意論)과 꼭 같은 것임을 밝혀 둔다.
넷째, 문창극의 주장을 맘모니즘적 역사인식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문창극은 현재의 경제적 번영을 하나님의 축복이자 바람직한 것으로 설정하고, 이런 상황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에게 고난을 주셨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문창극의 이런 현실과 역사인식이 맘모니즘에 물든 뒤틀린 기독교의 전형이라며 날카롭게 비판한다. 예를 들어, 박득훈 목사는 “가난한 상태에서 부유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경제성장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는 것이 바로 승리주의와 번영신학이다”라고 문 장로의 역사관과 신학의 근본적 문제를 지적했으며, 숭실대 이용주 교수도 다음과 같이 문 장로 안에서 동일한 문제를 발견했다.
문 장로의 강연은 하나님나라의 복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가 믿는 신의 이름은 맘몬이다. 창고와 금고에 먹을거리와 재물이 가득한 부강한 나라. 그것이 그의 종교이다. 그의 영적 고향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벨론이고 로마이다. 그의 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다.
끝으로, 일군의 비판자들은 문 장로의 역사해석이 신성모독적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민족의 비극을 하나님의 뜻으로 단정함으로써, 그런 역사 속에서 억압과 착취를 당했던 사람들의 고난을 간과혹은 정당화했고, 결과적으로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사악한 폭군으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을 문장로가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그의 설명의 논리적 결과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강연이 신성모독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악랄한 침략과 착취, 그리고 남북 분단과 6.25전쟁의 참사가 우리 민족을 연단하여 결국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할 위험이 다분한 발언이다. 물론 문 장로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표현은 하나님을 악과 불의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하지 못하게 한다.(박영돈)
사회적 약자와 소외자를 향한 은혜와 사랑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문창극은 성경의 하나님을, 제국주의의 무자비한 통치와 살육에 던지고, 동족상잔의 참상을 일으키는 폭군적인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문창극이 말하는 하나님과 기독교 세계관은 결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도 기독교 세계관도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히고 자의로 재판장 노릇을 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다(장신대 학생회, )
IV. 문창극과 함석헌
문창극 장로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들 중, 한국근대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한 문창극의 관점을 함석헌의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민족의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풀이했다는 의미에서,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문창극 장로의 역사관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이 장에선 함석헌의 역사관을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문창극과 함석헌을 동일시하는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규명할 것이다.
1.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은 오산학교 교사 시절이던 1934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22회에 걸쳐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했다. 이 글들은 1950년 3월에 단행본으로 간행되었으며, 1961년에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제목을 고쳐서 오늘날까지 읽히고 있다.
이 책이 『성서적 입장에 본 조선역사』란 제목으로 처음 출판되었을 때, 함석헌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 똑바른 말로는 역사철학은 성경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는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 김성수의 설명처럼, “제국주의가 아니면 유물론적 역사관이나 사회주의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철저한 기독교 중심주의 사관에 몰입함으로써 자신과 조국의 사상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분투했던 것이다.” 하지만 후에 함석헌은 기독교 정권인 자유당 정권을 겪고 나서 기독교인만 생각하는 사상의 편파적 위치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책의 제목을 성서적 입장에 본 조선역사를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고쳤다. 하지만 그런 제목의 변경에도 불구하고, 이 책 속에는 기독교신앙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2. 고난으로서 한국사
함석헌은 한국역사 속의 비극적 측면들을 매우 고통스럽게 서술한다. 외세에 의한 침략의 역사, 폭력적 정치집단에 의한 민중 억압의 역사, 별다른 문명을 이루지 못한 역사를 더듬으며 절규한다. 결국, 함석헌에게 비친 우리 역사는 처절한 고난의 역사였던 것이다.
고난의 역사! 한국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바닥 가락은 고난이다. 이 땅도 이 사람도 큰일도 작은 일도 정치도 종교도 예술도 사상도 무엇도 다 고난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끄럽고 쓰라린 사실임을 어찌할 수 없다...우리는 큰 민족이 아니다. 중국이나 로마나 터키나 페르시아가 세웠던 것 같은 그런 큰 나라는 세워본 적이 없다. 또 여태껏 국제 무대에서 주역이 되어본 일도 없다. 애급이나 바빌론이나 인도나 그리스같이 세계문화사에 뛰어난 자랑거리를 가진 것도 없다...그것보다 있는 것은 압박이요, 부끄러움이요, 찢어지고 갈라짐이요, 잃고 떨어짐의 역사뿐이다. 공정한 눈으로 볼 때 더욱 그렇다. 그것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슬픔이다.
3. 고난의 신학적·역사적 의미
함석헌이 우리민족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인식했지만, 그것은 약자의 무의미한 운명이 아니었다. 함석헌은 우리민족의 고난을 이사야 53장에서 예시된 예수의 고난과 동일시했다. 우리의 고난은 패배자에게 지워진 무의미한 고통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역사적 사명의 구현이었던 것이다. 즉, 함석헌은 오랫동안 고난에 사무친 한국역사를 비참한 심정으로 읽었지만, 어느 순간 한국의 고난이 한국에게 주어진 “가시 면류관”임을 깨달았다. 예수의 머리에 씌어진 가시면류관이 인류의 구원을 위한 도구였듯이, 우리민족의 고난이 인류전체를 위한 영광의 고통이었다는 말이다. 이 맥락에서 한국사가 구원사로 승화된다.
성경은 그러는 가운데서 진리를 보여주었다. 나를 건진 것은 믿음이었다. 이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가시 면류관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역사를 뒤집고 그 뒷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계역사 전체가, 인류의 가는 길 그 근본이 본래 고난이라 꺠달았을 때 여태껏 학대받은 계집종으로만 알았던 그가 그야말로 가시 면류관의 여왕임을 알았다. 이제 우리는 마치니와 한가지로 ‘그녀의 할 일은 아직이다’라고 용기를 낼 수 있다. 과연 그녀의 일은 이제부터다.
바로 이 부분이 학자들이 함석헌의 역사철학을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다. 함석헌 연구자인 김성수의 평가처럼, “그의 공헌은 이렇게 아사 상태에 처한 한국인의 정신적 가치와 고난의 의미를 예수와 동일시함으로써 한국인을 정신적 아사 직전 상태에서 인류의 구원자로 부활시킨 데에 있다.”
4. 우리민족의 사명
함석헌은 세계의 하수구요 공창이었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물질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아니라, 한국, 인도, 유대, 흑인 같은 세계의 약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며, 이들을 통해 인류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고 믿는다. 함석헌은 우리민족의 사명을 이렇게 선언한다.
그러므로 인생이 물질의 종 아닌 것이 우리에 의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권력이 정의 아인 것, 종내 그것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우리로 인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불의의 세력이 결코 인생을 멸망시키지 못하는 것이 우리로 인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사랑으로써 사탄을 이기고 고난당함으로써 인류를 구한다는 말이 거짓 아님을 증거 하여야 하고, 죄는 용서함으로써만 없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천하 앞에 증거 하여야 한다. 온 인류의 운명이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5. 민족과 민중
함석헌은 개인을 사회적 존재로 간주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결정적 배경을 민족으로 규정한다. “지금까지 개인의 뒤에 서서 버텨주고 명령한 것은 민족이다.” 심지어 예수조차 그가 유대민족의 일원이란 사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기독교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유대민족을 잊고 예수를 알 수 없고, 유대 역사를 모르고 기독교를 알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기독교의 세계적인 것을 부인하는 말도 아니요, 예수를 민족주의자로 한정하는 말도 아니다. 다만 민족적 배경 없이는 인격이 없다는 말이다. 민족의 저수지에 물이 고인 것이 없이는 우주에 울리는 생명의 폭포는 떨어질 수 없다는 말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민족과 민족주의를 철저하게 구분한다. 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자신의 주장이 “심한 민족주의”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함석헌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선언한다. “민족주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면서 함석헌은 역사에서 민중(씨ㅇㆍㄹ)의 상관관계에 주목한다. 그는 씨ㅇㆍㅇ의 역사가 지향하는 것이 민중에게 그들의 머리 위에서 일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일”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 손, 즉 하나님의 경륜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역사에 결정적 차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알면 자유요, 모르면 필연이다. 알면 은총이요, 모르면 숙명이다. 아는 것으로 자녀가 될 수 있고, 모르는 것으로 종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함석헌은 민중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한다.
V. 나가며
이상에서 문창극 장로의 강연을 간단히 정리하고, 그의 입장에 대한 다양한 평가들을 살펴보고, 그와 비교대상이 되었던 함석헌의 역사관을 분석했다. 이런 작업을 토대로, 나는 문창극의 역사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첫째, 문창극 장로의 역사관은 식민사관이다. 이런 표현을 노골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한민족의 민족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독립을 위한 우리민족의 치열한 투쟁과 노력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해방 이후의 민족의 발전을 미국과 일본의 절대적 도움으로 풀이한 것은 식민사관의 핵심적 요소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다.
둘째, 문창극 장로의 역사관은 기독교와 상관없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뜻”이란 용어를 계속 사용하고, 그런 관점으로 한국근대사를 설명했지만, 그 설명의 근저에는 기독교신앙과 민족주의를 배타적으로 유착시키고, 반공주의와 자본주의에 경도된 이념적 시간에서 한국근대사를 풀이했다. 따라서 기독교적 외피를 썼지만, 내용은 철저히 세속적이다.
셋째, 문창극 장로의 역사관 속에 인간의 자리는 없다. 자신은 이런 역사관을 신본주의적이라고 확신할지 모르지만, 현재 한반도가 처한 상황에선 결코 교회에서 추천할 수 없는 무책임하고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물론, 한반도의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신자들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터치”도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해야 할 정당하고 필요한 행동도 무시하거나 포기해선 안 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그의 바람처럼, 훌륭한 지도자들이 필요하단 말인가? 이런 주장고상한 신앙도, 차원 높은 철학도, 유용한 정책도 아니다. 신학도 인문학도 아니다.
끝으로, 문창극 장로와 함석헌은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뜻이란 단어를 같이 사용했을 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도, 고난의 의미, 민중의 가치, 한국의 사명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대화가 불가능하다. 한국역사를 신앙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이란 단어로 표현했다고 해서, 양자를 동일시하는 것은 함석헌을 제대로 읽지 않고 발언한 황당한 오류일 뿐이다. 부디 읽지 않은 사람들은 함부로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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