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제에 대한 복음주의의 실패- 김형원
2014-09-03 15:04:46
[사회문제에 대한 복음주의의 실패]
[1] 한국 보수교회의 사회참여의 역사
1. 1950년-1980년대
(1) 장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해방 후 장로인 이승만 대통령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한국 보수교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노골적인 지지 하에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그들은 이승만 정권을 거의 기독교 정권으로 인식하였고, 그 정권의 유지를 위해 부정부패까지 묵인하고 감쌀 정도로 당시 정치세력과 밀착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4.19 혁명 후 기독교인 대통령의 몰락으로 충격을 받은 교회는 군사정부가 들어선 후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내적 역량을 키우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보수 교회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났을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교회의 현실도피와 피안적 세계관을 다시 복구하면서 사회와 정치에 대한 참여는 성경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진보 교회가 독재정부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반대 활동에 나서는 것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있는 것이었다.
(2) 독재정부 시절 보수 교회의 가르침
독재정부 시절 기독 청년들이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가르침은 "통치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니 절대 복종하라. 데모하지 말라. 만약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기도하라"는 말이었다. 정부에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복종하는 것과 동격으로 취급되었다. 이것과 함께 강조되었던 것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오직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져야 하며, 전도와 선교가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독재 정부를 비판하고 저항하면서 거리로 나섰던 진보적인 교회를 비판하고, 그 결과 그들이 당하는 핍박을 쓸데없이 자초하는 것이라고 간주하며, 오직 교회 내적 성장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당시 전세계 복음주의교회들에서는 독재와 빈곤, 폭력과 압제, 전쟁과 평화, 환경, 인권 등의 이슈를 둘러싸고 적극적인 신학적 논의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결과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모인 세계복음화 국제대회에서 공포한 로잔언약이었다. 특히 제5항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Christian Social Responsibility)에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모든 종류의 악과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와 화해를 실현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중대한 책임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 대회에 참석한 한국 대표는 그 결과를 한국교회에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고, 그 결과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활동, 특히 독재 권력에 저항하고, 불의와 인권탄압에 항거하고 사회적 약자를 세우는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10년이나 지난 후에야 학생선교단체와 기독교세계관 운동에 관심 있던 사람들의 노력으로 비로소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세계 복음주의 교회들의 동향과 그 신학적 풍성함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한국의 보수교회들은 오직 선교와 교세확장에만 열을 올려 독재정권의 도움을 받아 엑스플로 74, 빌리그래함 전도집회와 같은 대형집회를 이어갔다. 여전히 교회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과 현실 참여에 대해서는 침묵 내지는 금지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3) 신학적 근거
한국 보수교회들이 사회-정치 참여를 기피했던 성경적-신학적 근거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롬 13장을 기초로 하는 '정교분리' 신학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2) 보수 교회는 이 가르침을 절대적인 것으로 해석해서 국가 통치세력들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정부의 권력이 하나님이 정하신 조건 범위 내에 있다는 것을 규정하는 4절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1-2절만 강조할 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둘째,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날카롭게 분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성속이원론’이다. 사회와 정치에 관심을 기울일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에 전도를 더하고 더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기도나 전도만 할 수는 없다. 가정생활도 하고, 직장생활도 하며, 여행도 가고, 오락도 즐긴다. 그것을 절대 시간낭비라고 비판하지는 않는다. 우리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독 사회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만 하면 이원론을 꺼내들며 배제하려고 한다. 신학적 일관성까지도 아니고 삶의 일관성조차 결여된 입장인 것이다.
셋째, 설령 기독교인이 세상을 변화시킬 책임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직접적인 사회변화에 나서는 것보다는 개인의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회를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정치나 사회참여가 아니라 복음으로 개인을 변화시키는 것을 통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을 거론할 것도 없이, 개인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변화로 연결된다는 근거 없는 순진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의 삶이 개인적인 영역과 사회구조적인 영역이 모두 섞여 있기에 변화도 두 영역 모두에서 시도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4) 이중성
그러나 이런 신학적인 인식의 결핍 문제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 보수교회 지도자들이 말로는 이원론적인 입장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적극적으로 사회와 정치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60-80년대 군사정권 아래에서 비록 신학적으로는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면서 마치 정치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것처럼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독재 정권에 협력하고 지지하고 동조하는 정치적 행위를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신헌법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 표명과 국가조찬기도회였다. 이것은 거의 정교유착으로까지 볼 수 있는 행태였다.
2. 적극적 정치참여로 전환
(1) 변화의 시기
1980년대까지 명목적으로 정교분리를 내세웠던 보수교회들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기폭제는 1989년 KNCC에 대항하는 보수 교단의 연합체로 결성된 한기총의 발족이었다. KNCC보다 더 많은 교단과 교회들을 규합한 한기총은 대형교회 목사들의 야망적인 주도 하에 정치적으로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장로대통령 만들기에 온 힘을 기울이면서 어느새 정치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보수정권이 무너지고 진보정권이 들어선 시점부터는 보다 노골적으로 그들의 정책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대하면서 정치 현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과거에 그렇게 강조하던 ‘정부에 무조건 순복하라’는 가르침은 더 이상 교회에서 들을 수 없게 되었고, 교회 강단은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과 같은 정치적 언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주5일제 반대, 햇볕 정책에 대한 비판, 전시작전권 이양 반대, 국가보안법 개정 반대, 사학법 개정 반대, 수도 이전 반대, 등등.
1990년대 말부터는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는 정부비판 집회와 시위, 기도회와 예배를 광장에서 찾아보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이들은 한기총의 주도 하에 과거 운동권에서 전향한 사회운동에 익숙한 자들이 이끄는 기독교사회책임이나 기독교 뉴라이트의 가세 속에 지속적으로 사회-정치적 참여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결과 21세기에 들어 기독교 보수 세력은 한국사회 보수 세력의 가장 충실한 지원세력이 되었다. 어느새 과거에 금과옥조처럼 받들던 정교분리와 성속이원론 신학을 저버린 것이다. 그 대신 진보교회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2) 변화의 이유
이런 변화를 목격한 사람들은 한국 보수교회가 수십 년 동안 사회-정치적 참여를 반대하다가 갑자기 적극적인 사회참여로 돌아선 것에 대한 신학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 어느 신문사 기자는 적극적으로 광장에 나오는 한기총 대표회장에게 정교분리와 정부에 대한 순복이라는 신학적 입장을 바꾼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성경적이거나 신학적인 대답이 아니었다. 단지 정치적 상황이 바뀌어서 이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최소한 목사나 교회의 지도자라면 행동변화의 이유에 대해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근거를 설명하는 것이 우리의 기대지만, 이들은 그저 현실의 변화만을 자신들의 행동의 변화 이유로 들 뿐이었다.
(3) 세 가지 요인
그러면 한국 보수교회는 정교분리와 이원론적인 신학적 입장을 버리고 왜 이렇게 적극적인 사회참여로 돌아서게 되었을까? 크게 세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민주화 요인: 1987년 민주화 항쟁 이전에 독재정권을 비판하던 진보 교회의 인사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렀고, 지독한 감시에 시달렸으며, 빨갱이라는 낙인과 더불어 살아가야했다. 그러나 당시 보수 교회 지도자들은 신학적 이유도 있었지만, 추후에 몇몇 보수 대형교회 목사들이 고백했듯이, 군사정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못하였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 독재와 정의와 같은 부담스러운 이슈가 사라지면서 점차 현실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도 탄압의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보적 인사의 노력으로 얻은 민주화의 혜택 속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권력 요인: 독재 정권 시절 정부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내적으로 세력을 키웠던 보수 교회들은 1980년대 이후 초대형교회를 건설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1989년 한기총이라는 거대 집단의 결성과 더불어 한국 사회와 정치권에서도 그 파워가 통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장로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알리면서 교회에 러브콜을 보냈던 자가 결국 대통령이 되었고, 대형교회마다 국회의원들을 비롯해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 역시 보수교회의 파워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결과 보수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한국 사회에서 관철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더불어 신학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점차 현실 정치의 맛에 끌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대형교회 목사들의 권력 욕구와 맞물리면서 적극적인 사회-정치 참여는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거기에 더하여, 보수 정권 시절 정부를 지지하면서 제공받았던 각종 혜택들에 대해 진보정부가 손을 대기 시작하자 (목회자 소득세, 사학법, 종교재산) 보수 교회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정부비판에 나섰고 심지어는 정부 전복(거의 혁명과 같은)까지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셋째, 가치관의 위기: 군사독재 정권은 보수 기독교가 원하는 친미-반공 논리를 그대로 정책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이후 이러한 기조에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었고,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진보 정부는 보수 세력이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정책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보수 교회들의 확신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들은 ‘공산주의=기독교 박해=반공=미국의 도움=기독교 자본주의 국가로서의 미국=친미=친자본주의’라는 도식을 확고하게 만들었고, 그것과 반대되는 ‘반미=공산주의와의 대화와 타협=사회주의=반기독교’라는 반대 명제도 타협할 수 없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그래서 반대 명제에 하나라도 해당되면 결국 기독교 자체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기독교를 사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거리로 나서게 되었다.
[2] 사회참여의 근거
1. 사회윤리의 부재
사회참여에 대한 입장의 변화에 대해 신학적 근거가 빈약한 것도 문제지만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 보수교회는 사회에 참여하고 정치에 참여하겠다는 의욕만 앞섰을 뿐 그 이유와 방향에 대한 신학적 기초가 매우 빈약하다는 점이다. 왜 사회참여를 해야 하는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참여해야 하는지, 한국사회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서 참여하는지에 대한 성경적-신학적 기준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현실에 참여한다는 것은 현실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회를 향해서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지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보수 교회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원리가 무엇인가? 진보 교회는 수십 년 동안 성경적 사회윤리를 정립하려고 애써왔다. 세계 복음주의 신학계에서도 1960년대 이래로 국제적이고 정치-경제적인 이슈들에 직면하면서 사회윤리에 관심을 갖고 성경적-신학적 원리를 도출하려고 노력해왔다. 그 한 가지 예가 로잔언약과 후속 선언들이었다. (휘튼, 그랜드래피즈, 마닐라) 그러나 한국 보수 교회는 거의 전적으로 개인 윤리만 가르쳤을 뿐, 정치, 정부, 경제, 인권, 문화, 인종, 인권, 정의, 평화, 평등, 빈곤, 전쟁과 같은 사회 윤리의 주제들에 관해 제대로 된 신학적 토론도 없었고, 더욱이 교회에서는 이런 주제들에 대해 공부하거나 가르친 경험도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힘이 생기면서 의욕을 가지고 사회 현장에 뛰어든 것이다. 그러니 마치 거대한 황소 한 마리가 멍에에서 벗어나 좌충우돌하면서 밭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보수교회 사회참여의 두 가지 행동 원리
그러면 보수교회가 적극적인 사회참여에 나설 때 성경적-신학적 사회윤리 외에 근거로 삼는 행동원리나 가치관은 무엇인가? 이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핵심 가치는 성경적이거나 신학적인 것이 아니다. 오직 현실적인 이유뿐이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반공주의와 경제주의.
(1) 반공주의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 있었던 교회는 신사참배에 응하면서 일제에 협조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가 집단과 가까웠기 때문에 민족과 무산계급을 중시하던 공산주의 세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와 기독교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대거 월남하게 되었다. 남한에 있던 교회도 선교사나 미군정과 더 친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에 해방 후 좌우 이념 갈등 국면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우익 편을 들었고, 그것이 장로 이승만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로 이어졌다. 결국 월남한 교인들과 남한의 교회들 모두 친미적이고 반공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이런 경향을 더욱 극단적으로 강화시켰다.
영원할 것 같았던 전 세계의 체제대결적인 냉전은 1990년대 들어가면서 급격하게 변화되었다. 소비에트연합이 해체되고, 동부 유럽이 유럽공동체로 편입되면서 냉전 시대가 막을 내렸고, 중국과 베트남 등 공산권 국가들이 자본주의화의 길로 나서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 내지는 대결은 구시대적 유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 변화의 바람은 한반도에도 불어 닥쳐 남북교류와 더불어 화해를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시도되었다. 점차 일반 국민들도 북한에 비해 남한이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은 북한 당국자들도 흡수통일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 정치 세력은 분단이라는 상황이 여전히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유용하다고 판단하여 중요한 정치적 국면마다 남북대립이라는 오래된 화두를 벽장 속에서 꺼내어 사용한다. 그들은 여전히 과거 냉전적인 사고의 틀로 북한을 바라보고 남북관계를 판단한다. 그래서 대화와 협력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오직 냉전적 대결만이 지속해야 할 행동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보수 세력은 우리 사회의 모든 다양한 현상과 가치의 갈등을 반공이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판단해버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전두환도 이승만도 박정희도 옹호하게 되는 것이다. 독재, 학살, 친일, 인권탄압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공이라는 가치만 공유하면 우리 편인 것이다. 이에 더하여, 실제로는 반공과 전혀 상관없는 사안에도 반공의 잣대를 들이댄다. 광주민주화항쟁은 정통성 없고 민중을 억누르는 권력에 대한 저항이지만,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이것도 반공 대 친공의 문제로만 보인다. 그들은 여전히 5.18은 좌익이 주도한 폭동이며, 그래서 그것을 진압한 것은 자유민주주의를 공산주의로부터 사수하는 애국적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노조 운동 역시 반공의 잣대로 판단한다. 과거 마르크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일어나라고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면서 현재 모든 노동자들이 마치 마르크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김석수 경북대 철학과 교수는 "한국의 보수주의는 냉전적인 반공주의에 안착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더 많은 권력을 유지, 확보하려는 면이 강했다. 우리의 보수주의는 수구 반동 세력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 마침내 스스로를 광기화시키는 파시즘적인 형태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한국 현대 철학사에 등장하는 기형적 보수주의 측면에 대한 반성적 고찰” 진보와 보수, 사회와 철학 연구회 (2002, 이학사), 129)
이런 수구세력에 동조하는 또 하나의 세력이 바로 한국 보수교회다. 이들은 반공을 강하게 내세우고, 북한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북한과 관련 있어 보이는 사회주의적 경제를 반대하고, 미국식 경제체제를 지지하며, 자유세계의 수호자로서 미국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세력은 무조건 동지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것과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거나 정책을 시행하려는 세력에 대해서는 마치 신앙에 대한 박해를 가하려는 세력으로 간주하면서 비판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보수교회가 사회-정치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삼는 절대적인 기준이다. 이 기준 앞에서 다른 가치들은 모두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2) 경제주의
한국 보수교회에서 반공과 한 쌍을 이루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맹신이다. 이들은 세계 경제대국인 미국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국가로 추앙하면서 우리도 무조건 그런 길로 가야한다고 확신한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하나님의 경제체제라고 굳건히 믿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북한이 채택하는 공산주의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지지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제동을 거는 것은 결국 북한을 편드는 것이고, 반미를 선동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에게는 자본주의의 다양성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다. 오직 얄팍한 지식에 근거한 천민자본주의만 그리스도인이 택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경제 전반에 대해 적용되는 것으로 확장한다. 그래서 거의 맹목적으로 시장자유주의, 친기업적 정책, 재벌위주 정책, 성장 제일주의, 무한 경쟁주의를 지지한다. 그 결과 위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자 권익을 위한 정책, 기업에 대한 규제, 부의 공정한 분배와 같은 정책들에 반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단지 경제정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독재, 인권 탄압, 빈부격차, 경제적 파탄으로 인한 자살자의 급격한 증가, 교육의 경제예속화와 같은 문제들은 경제 성장에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경제만 발전될 수 있다면 그 모든 희생은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한국 보수교회는 천민자본주의의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이 되었다. 이처럼 경제주의는 반공주의와 더불어 한국보수교회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강력한 가치요 동인이 된 것이다.
3. 파생적인 행태
(1) 한국 보수정치세력과 연결되는 오류
반공주의와 경제환원주의를 맹목적으로 수용한 결과, 한국 보수교회는 이 두 개의 연결고리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를 성경적 비판 과정 없이 수용하면서 수구 정치 세력을 거의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수구 독재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했던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반공을 국시로 내건 독재정권, 경제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군사정권은 보수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집단인 것이다. 보수 정치 세력도 이 사실을 간파하고, 보수 기독교 세력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좋은 동력으로 인식하면서 그들을 부추기고 자극하면서 정치적 세력의 장으로 끌어들인다.
이처럼 반공과 경제주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설정한 결과, 그 두 가지 가치에서 일치만 된다면 다른 부분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무시하게 되었다. 이런 태도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보수정치 세력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로 이어진 것이다. 보수 정치세력을 내 편으로 여겨서 그들이 하는 것은 무조건 지지하고, 그들에 반대하는 자들은 무조건 적대세력으로 간주하는 단순무식한 소아병적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2) ‘맹목적 지지’의 왜곡된 모습
이러한 맹목적 지지는 필연적으로 왜곡된 모습을 노출하게 된다.
첫째, 수구 정치세력의 주장을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검토와 반성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따른다. 그 결과, 보수 기독교 세력은 반공과 친미를 내세우는 보수 정치 세력이 주장하는 다른 가치들과 정책들도 무조건 지지하는 행태를 보여주었다. 신자유주의, 한미 FTA, 제한 없는 사유재산권, 수도 이전 반대, 햇볕 정책 비판, 북한 인권문제 부각, SOFA개정에 대한 비판적 태도, 경쟁교육 지지.
둘째, 보수 정치세력이 비성경적인 모습을 보여도 전혀 비판하지 않는다. 쿠데타를 일으켜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도, 초헌법적인 긴급조치와 법들로 인권을 유린해도, 정권 유지를 위해서 수천 명의 무고한 시민들을 사상해도, 조작된 북풍을 이용해서 공작정치를 펼쳐도, 경제와 복지 공약을 헌신짝처럼 내던져도,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선거부정을 해도,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리로 재판정을 모독해도 무조건 지지하고 변호해주는 것이다.
(3) 기독교적 가치보다 이데올로기
이렇게 보수 세력과 정치적으로 결탁한 가장 참담한 결과는 교회, 목사, 신학자라고 이름 하면서도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 가치들을 내팽개친 행태를 보이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는 점이다. 반공주의와 경제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기독교적 입장에서 볼 때 더 큰 문제는 이 두 가지를 붙들려다 정작 하나님께서 인간사회의 기초로서 주신 성경적 가치들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즉 성경적인 사회윤리와 사회-정치 참여의 기준을 놓쳐버린 것이다.
기독교 사회윤리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핵심 가치들이 있다. 정의, 평화, 공평, 인권, 약자보호, 생태와 같은 것들이다. 학자들마다 각 개념에 대한 정의와 실제적 적용에 대한 견해들이 조금씩 다르지만, 이런 가치들이 기독교인들이 사회를 바라보면서 견지해야 할 중요한 가치들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아무리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위의 성경적 가치들을 무시하거나 짓밟는 것은 결국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를 저버리는 것과 같은 행태로 간주된다. 그러나 한국 보수교회는 이런 가치들을 마치 공산당 선언에나 써 있는 것처럼 취급한다. 그러면서 시대착오적인 반공과 천민자본주의만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다.
이것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성경적 가치보다 우위에 두는 행태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스스로 기독교윤리를 저버린 것이다. 이것은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다. 이단들과 타종교에 대해 엄청나게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과 상충되게 스스로 이데올로기를 우상으로 삼는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3] 비참한 결과
잘못된 가치관과 행동원리로 움직인 것은 필연적으로 왜곡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한국 보수교회가 잘못된 가치관으로 사회참여에 적극적으로 나서다보니 과거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1. 신학적 기초가 결여된 사회참여는 오류만 낳는다.
무조건 수구 세력을 지지하다보니 그들의 잘못된 행태까지도 관용하고, 그들에게 반대하는 세력은 무조건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국민들로부터 점차 신임을 잃고 있다. 우리는 최근에 이런 모습들을 너무나 많이 봐 왔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대형교회 목사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하던 4대강 사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들은 심지어 성경까지 들먹이면서 이 사업이 마치 한민족의 미래를 바꾸는 것이며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반민족적인 것으로 몰아붙이는 작태를 벌였다.
2012년 대선에서 국정원이 댓글 공작으로 대선에 개입한 것이 밝혀져 한창 국정원에 대한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국민들의 열망이 터져 나오던 시점에 전임 한기총 대표회장은 한 일간신문에 광고를 싣고 국정원의 불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이 불법적으로 유출한 노무현 대통령의 NLL관련 발언에 대해서만 부정확한 독해에 근거해서 비난하였다. 이에 더하여 김진홍, 서경석 목사 등이 참여하고 있는 범시민사회단체연합과 한국시민단체협의회는 2007년 정상회담을 종북매국으로 매도하는 기자회견을 하기까지 하였다.
몇몇 정치적인 목사들은 서울나들목교회에서 박정희대통령 추모예배를 가지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가 융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칭송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추모예배 하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돈을 최고로 여기는 태도와 현 권력에 아부하는 모습이 바알신앙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비슷한 시기에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기독교 장려정책으로 인해 교회 부흥의 기초가 마련되었고 그 결과 한국이 굴지의 기독교국가가 되었다고 칭송한다. 그를 콘스탄티누스, 세종대왕, 모세, 야곱과 동등한 인물로 평가한다.
두 전임 대통령들은 기여한 것 이상으로 국가와 민주주의, 그리고 수많은 국민들에게 심각한 해를 끼쳤다. 그들은 헌법을 자기 입맛에 맞게 부정한 방식으로 개정하는가 하면, 위헌적인 법률을 제정하고 긴급조치를 남발하면서 국가의 기반을 유린하고 민주주의의 기초인 자유와 정의를 훼손하였다. 산업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방치하고 그들의 정당한 권리 요구조차 빨갱이로 몰아 감옥에 처넣었다. 자신의 권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혜택을 주었지만,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초법적인 무자비한 칼을 휘둘렀다. 사람들에게 돈을 가져다주었을지는 모르지만 정의와 공평, 정직과 섬김, 그리고 약자를 보호하라는 성경적 가치는 심각하게 훼손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기독교 발전에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되면 그들의 잘못을 기독교가 고스란히 지고 갈 수밖에 없게 된다. 가장 혜택을 많이 본 집단이 오류의 책임도 지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서 목사들이 내뱉은 망언의 슬픈 기억과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를 둘러싼 친일과 일제지배 합리화와 한민족 비하 논쟁에서 보수 교회 지도자들이 보여준 실망스런 태도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이 두 가지 사안에서 보여준 한국 보수교회 지도자들의 태도 역시 공통점이 있다.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고에 대한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정부가 타격을 입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것이다. 왜? 반공주의와 경제주의를 공유하는 가족과 같은 보수 정부니까. 그 결과 성경적 원리나 신학은 어디로 숨었는지 사라져버렸다. 오직 세속 이데올로기와 진영 논리만 굳건히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그 결과 보수 정권의 부패와 불의와 무능력도 용인하고, 국민들의 정의 관념에도 무감각하고, 하나님나라의 사회적 가치들을 무시하는 ‘반기독교적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2. 상처
반공주의와 경제주의를 중심에 놓고 사회-정치적 참여에 나서는 한국 보수교회의 행태는 반드시 상처를 남긴다.
첫째, 성경적 가치보다 현실적 가치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반기독교적인 가르침을 온 몸으로 전해준 결과, 정의와 공평의 감각이 뛰어난 젊은 세대들은 점차 교회를 떠나고 있다. 시대의 변화도 인지하지 못하고, 성경적 가치도 내팽개치고 오직 수구 냉전적 천민자본주의에 깊이 물들어 인간의 존엄성, 공동체적 소망, 그리고 약자를 주님처럼 대하는 공감능력이 상실된 교회에서 무슨 소망을 발견하겠는가?
둘째, 이들의 행태는 불신자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기독교는 비인간적이고, 부정의하고, 불의와 타협하고, 호전적이고, 약자보다 강자편이고, 인간보다 돈을 중시하고, 섬기는 것보다 권력 휘두르기를 좋아하고, 희생하기보다 이용하려는 집단이라는 인식이 비기독교인들 사이에 확신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결과는 우리도 너무 잘 아는 현실이다. 개신교의 신뢰도와 호감도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개독교, 먹사 라고 조롱까지 받으며, 안티 기독교 세력이 점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도가 어려워지면서 기독교가 쇠퇴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4] 어떻게 할 것인가?
2천 년 전 초대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전해졌을 때 온 몸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당시 잘못된 문화를 개혁하기 위해 힘썼고(축첩, 조혼, 노름과 폭음),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애썼고, 사회 구조적인 개혁에도 나서서 인권을 신장하기 위해 힘썼고(노비, 여성, 어린이), 강대국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는데 힘썼고(반일, 반청), 부패한 관리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에 나서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소중한 유산을 모두 폐기하고 시대착오적 반공주의와 우상숭배적인 경제주의라는 허상에 기초한 잘못된 현실인식으로 똘똘 뭉쳐서 정치 현장에서 수구 세력과 합세하여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는 왜곡된 교회와 지도자들의 모습이다. 이제 우리는 잘못된 이데올로기적 기초를 버리고 성경적 사회윤리에 기초한 행동으로 돌아가야 한다. 설령 그렇게 해서 교회가 손해를 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결국 승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성육신적 낮아짐과 섬김의 정신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 정신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약할 때가 아니라 강하고 힘이 있을 때 증명된다. 지금 한국교회는 가진 힘을 이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약자와 고통 받는 자들을 섬기는데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뼈를 깎는 자기 절제와 섬김의 삶이 지속될 때 이 땅의 기독교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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