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의 칼빈주의’에 대한 고찰 -송기섭
2014-09-03 16:11:39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나타난 "막스 베버의 칼빈주의’에 대한 고찰
송 기 섭*
목 차
1 머리말
2.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j 에 나타난 막스 베버의 칼빈주의
3. 칼빈주의의 중요한 요소
4. 베버에 의해 새륨게 창조된 칼빈주의
5. 베버에 의해 창조된 칼빈주의 지파의 그 후의 실제 내용 j
6. 결론
1. 머리말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 그 중에서도 특히 칼빈 파의 개혁이, 과연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는가? 이에 대해 저명한 종교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1904-5년에 걸쳐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Kapitalimus)이라는 표제 아래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이후, 일세기에 걸쳐 이 문제는 학문적 논쟁의 초점이 되어 왔다. 베버는 이 논문들에 대해 위대한 경제 사회학자인 베르너 좀바르트(Wemer Sombart) 에 힘입은 바를 시인한다. 좀바르트는 1902년 그의 연구 "근대자본주의" (Der lIfoderne Kapitalismus) 에서 근대자본주의 전개에 있어 기본적 인 힘으로서 이른바 “자본주의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른바 “자본주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근대 자본주의 겸제 발전에 결정적 인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을 주장했다. 베버는 이 가설을 받아들이면서 그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 흑은 원천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가하였다. 이 논문을 통해서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의 결정적 요소가 칼빈주의 종교적 윤리의 하나의 부산물로서 나타난 것이라고 하는 가설적 명제를 제시하였다 1)
이 논문은 여러 상이한 분야의 학자들에 관심을 동시에 끌게 되었다. 그것은 베버의 가설이 다양한 측면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와 역사학자들이 관련되게 되었다. 경제학자들이 관련되게 되었다. 또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학자들은 일부는 베버의 입장을 공격하고, 일부는 지지했다. 또 다른 일부는 수정된 형태로, 조건부 형태로 받아들이기도 했다.논자는 베버의 가설에 대한 학자들의 지지와 비판들올 살펴보고자한다. 그리고 과연 막스 베버가 r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 정신과 관련한 칼빈주의에 대해서 연구하고 이해하고 언급한 내용이 칼빈주의의 한 부분만을 강조함으로써 칼빈주의 전체를 어우르지 못한 불완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베버의 칼빈주의는 사업의 확장을 통한 이윤 증대가 어떤 사람이 구원받은 표지가 된다. 그러나 칼빈은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고 그 결과 구원을 확신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한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선택의 거울”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구원의 확신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고 말한다 2) 이와 관련하여 베버의 칼빈주의가 칼빈이 말하는 칼빈주의와 어떻게 차이가 있는 것인가? 그리하여 베버는 그의 논문에서 또 다른 하나의 칼빈주의를 자신도 모르게 창조한 것은 아닌가률 살펴보고자 한다. 한 걸음 나아가서 베버에 의해 새롭게 이해되고,창조된 칼빈주의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이후 역사적 으로 베버의 칼빈주의가 실체화되고 있는 점도 깊은 관심올 가지고 살펴 나가고자 한다,
2.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나타난 막스 베버의 칼빈주의
2.1 베버 명제의 의도
막스 베버는 자신의 논문의 목적 과 의도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어떤 경재적 정신 혹은 경제 체계의 에토스(ethos)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 특정한 종교적 관념이 끼치는 영향은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베버는 근대 경제생활의 정신과 금욕적 프로테스탄트의 합리적 윤리 사이에 존재하는 관련성을 고찰하고 있다 .3)
2.2 칼빈주의와 자본주의 : 베버 명제에 대한 설명
자본주의는 모든 시대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그 차이는 심리학적인 것이다. 즉 재화의 축적에 관한 새로운 “풍조(ethos)" 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 자본주의 정신은 무엇이며 그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를 베버가 논하고자 한다고 풀러톤은 요약한다 4) 프랭클린의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돈의 저축이 아니었다. 재부의 획득을 하나의 목적으로서, 모든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이룩해야 할 “소명 (calling)" 으로서 파악하는 태도이다. 근대 자본주의와 과거에 존재해 온 자본주의의 차이점은 바로 재부의 획득을 의무로 받아들이는 태도, 즉 근대 자본주의의 특수한 기풍에 ”정신“이 놓여 있다고 보았다 5)
현세적 금욕주의
끊임없이 재부의 획득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선천적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에게 이것이 필요했다. 전통주의 (traditionalism)는 계속해서 돈을 획득하고자 하는 의무에 대한 노동자들의 무관심으로 베버는 규정한다. 근대 이 전에는 전통주의가 사용자 계급 사이에도 빌리 퍼져 있었다. 근대의 기업세계에서 지속적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자기 훈련 혹은 “금욕주의”라는 자질을 특정으로 하고 있다. 낭비하지 않고 절제 있는 생활을 한다. 신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존 D. 록펠러 (1837-1937. 미국의석유 사업가) , 러셀 세이지(1 816-1906. 미국의 은행가) 같은 사람일 것이다. 재화의 획득은 이제 “패덕”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의 종교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상한 비합리적 의무감이 종교적 재가(載可)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6)
소명 (Calling)
종교의 프로테스탄트적 형태와 재부의 획득 사이의 파악하기 어려운 관계를 해명할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할 수는 없올까? 루터가 『예수 시락 J Uesus Sirach, 구약성서 외경의 하나)의 11 장 21 절올 “주를 믿고 너의 직업 (Beruf)에 충실 하라”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직업”의 회랍어 원문 πòuoç, 는 “수고 (toi l)"이다. 루터가 번역이 아니라 혜석을 한 것이다. 칙업을 소명 (calling)올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루터가 속세의 영역 내에서 종교적 삶을 살아야 하는 의무 개념을 “직업”에 부가시킨 것은 종교 개혁이 사회 이론에 더해준 중요한 기여가 된다고 풀러톤은 설명한다 .7). 한편 소명에 대한 칼빈주의와 루터주의, 가톨릭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즉
(1) 칼빈주의와 가툴리시즘은 모두 노동올 크게 강조한다. 칼빈주의에 있어서는 노동은 확신의 수단이고 가톨릭에 있어서는 구원의 수단이다.
(2) 칼빈주의는 노동을 “복음적 명령”과 “복음적 권고”로 나누는 가톨릭의 태도를 무시한다. 루터는 평신도와 수도승의 삶을 구별하는 태도를 부정했다. 속세 안에서도 완전한 기독교적 생활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도숭들의 합리화된 금욕적 이상을 새속생활에 도입하지는 않았다. “눈물이 노동에 선행하며, 고난은 행운을 넘어 선다”고 루터는 말했다. 용서와 신앙에 의한 의인(훌認)의 경험은 외면적 생활보다 내면적 생활올 강조했다. 이성보다는 감정에 지배되는 경건이었다,8).
(3) 칼빈주의 비상한 끈기
가톨릭에서 적선올 위해 비상한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칼빈주의 경우에도 비상한 끈기가 있어야 확신올 얻게 된다. 세바스찬 프랑크 (Sebastian Franck, 1499-1543, 독일의 자유 사상가, 종교 개혁가)에 따르면 종교 개혁의 의미는 “모든 기독교인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수도승이 되어야 한다 .. 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을 목적 으로 한다. 그 보상으로서 선택받았다는 확신올 수반한다. 그래서 직업을 통해 (per vocationem) 신에게 봉사 한다는 관념에 도달하게 된다. 칼빈주의의 경건은 루터 파와 구별된다‘ 신의 영광이라는 목표에 의해 합리화되고 끊임없이 자기-통제라는 방법에 의해 합리화 된다.9).
재부의 획득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목적 이 된다. 청교도의 규율 있는 금욕주의, 절제와 검약은 이제 사업상의 이해관계로 종속된다. 백스터와 웨슬리는 신으로부터 도둑질을 하지 않기 위하여 저축할 것올 말했다. 겸약의 습관올 정립시켰다. 그리하여 하나의 비극적인 현상이 발생했다 자본주의는 소명이 가지고 있는 사업의 의의를 발견했다. 거기서 초월적 이고 초세상적 동기를 제거했다 그리고는 하나의 직업(job)으로 변모시켜 버렸다고 풀러톤은 강조한다 10).
2. “막스 베버의 칼빈주의”에 대한 지지와 비판
2.1 베버의 입장을 지지
오랜 베버의 친구이며 동료였던 에른스트 트휠치 (Ernst Troeltsch)는, 칼빈주의 경제 윤리의 발단은 대단치 않은 것이었지만 그것은 이욱고 근대적 경제 정신의 발전 및 칼빈주의 그 자체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큰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는 요소로 성장해 갔다고 평가한다 12) 소명에 관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는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칼빈주의적으로 소화되고 또 노동의 엄격성과 통제가 선택되었음올 보증하는 표지로 됨에 따라 그 자체로서 필요한 동시에 신으로부터 지정된 직책에 그 사람의 정력을 체계적으로 투입하는 것, 즉 직업생활에 기여하게 된다. 이윤은 신이 숭인해 주었다는 표지로 간주되게 된 것이다. 태만을 거부하고 재부의 획득을 위한 모든 기회를 활용하며 신의 축복을 확신하는 태도와 결합된 소명 및 노동의 개념은 이제 장사와 돈
벌이의 영역에 접근하게 되었다. 노동 그 자체를 위해 노동하는 것을 가르치게 되었다. 여기에 부르즈와적 생활 방식올 탄생시킨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사회적 교리 가운데서 근대의 경제적 상황의 기초를 아무런 유보 조건 없이 받아들인 유일한 형 태라고 트휠치는 주장한다 13) 신이 지배하는 우주는 기독교적 에토스가 상호적 활동, 노동의 분업,능력의 다양성올 통하여 작용하는 실체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칼빈주의와 그 지파가 자생적인 교회의 발전과 정교 분리의 문제에 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본 것 이상으로, 전 시대의 자유를 부정하고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를 결정하는 세속적 금욕주의의 경제 윤리에 있어서도 베버와 견해가 일치하였다.
2.2 베버의 입장을 비판
좀바르트(Werner Sombart)14)는 근대 자본주의의 전개가 생각보다 훨씬 일찍 시작되었다고 「근대 자본주의 J 2판에서 결론지었다. 그는유대교와 결부된 사회적 태도 및 경제적 실천이 바로 자본주의 정신의 주된 근원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윈드럽 허드슨 (Winthrop S. Hudson)15l은 베버가 칼빈주의의 경제적 의미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지나친 단순화의 표본이라고 지적한다. 칼빈주의가 사회 질서의 형성에 조력한 점도 었지만 반대로 전자가 후자에 의해서 형성된 점도 있다는 것이다. 베버가 더욱 큰 단순화에 빠진 것은 17세기 청교도주의와 16세기 칼빈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한 것을 지적 하고 있다. 토니 덕슨(Tony Dickson)과 휴 맥라클란 (Hugh Mclachan)은 「자본주의 정신을 찾아서· 베버의 프랭클린에 대한 오역 ("In Search of the Spirit of Capitalism: Weber's Misinterpretation of Franklin") 16) 이라는 논문에서 베버의 프랭클린의 윤리에 대해 동의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근검에 대한 충고이지 도덕적 인 규범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논점의 핵섬은 프랭클련이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인생과 상업 성공의 덕목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라 것이다 17)
H.M. 로버트슨은 「막스 베버와 그의 학파에 대한 비판("A Criticism of Max Weber and His School")J 에서 주장하기를 “로마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16, 17 세기에 있어서 동일한 가르침을 강조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베버의 ‘소명’ 개념이 루터에게는 이상하고 프로테스탄티즘은 베버의 작품에서 세워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로버트슨 (Ronald Robertson)은 베버가 칼빈의 신도들이 정말로 예정설을 믿었는지, 믿어서 1 구원의 공항 '(salvation panic)을 느끼면서 살았는지를 입증하지 못하였고 또한 칼빈의 예정설을 믿어서 그 믿음의 영향으로 자본주의적 기업인이 되었는지를 입증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18)
3. 칼빈주의의 중요한 요소
3.1 기독교 강요」 가 말하는 칼빈주의
칼빈은 복음올 설교할 때 어떤 사람은 수용하고 어떤 사람은 수용하지 않는데 이는 바로 신의 선택하심의 현상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칼빈의 예정론은 목회현장의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었다. 칼빈은 복음올 듣고 말씀올 받아들이면 신의 선택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19)
복음을 설교 --> 수용함 = 신의 선택 받옴
--> 수용하지 않읍 =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함
칼빈은 예정 또는 선택은 전적으로 신의 은혜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 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20). 칼빈은 위의 성경 구절에 근거하여 신이 선행의 공로를 미리 보시고 예정하셨다는 예지예정설을 거부한다. 칼빈은 예수께서도 이 지상에서 무슨 선행의 공로를 세우시기 전에 신에 의해 피택 되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예정 흑은 선택의 거울이라고 한다. 우리의 공로를 보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우리를 은혜로 택하신 것 21) 이라는 것이다.
신의 선택과 예정→ 예수 : 거율
“창세전에 피택 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모든 공로를 제거시킨다.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정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의 은혜가 주권적으로 우세함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요약하기를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원하시는 사람들을 은혜의 양자에 의하여 자기의 아들들로 삼으신다. 이것의 원인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22) 칼빈은 하나님의 초대의 보편성과 선택의 특수성을 요약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선택받은 자가 된다는 것이다.
신의 초대 보편성 --> 선택의 특수성
요한복음 1 : 12 (영접) --> 요한복음 1: 13(신께로 난 자)
마태복음 13: 5
밭에 씨를 뿌린다 --> 결실을 맺는다 (돌발, 옥토밭)
“ ... 외적인 설교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회개와 신앙에로 부름 받았다. 그러나 회개와 신앙의 성령은 결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23)고 말한다. 복음의 소리가 많은 사람의 귓전올 때리지만 성령에 의하여 “신앙의 선물”을 받는 사람은 적다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올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24)고 할 때, 이는 신에게로 그의 부르심의 보편성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25)는 선택의 특수성에 해당한다. 씨 뿌리는 비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즉 씨 뿌리는 행동은 보편적 초대를 의미하고 이 말씀에 대한 신앙의 반웅은 선택의 특수성, 곧 신의 선물올 의미한다 26)
3.2 맥킨논과 자레트 교수의 베버의 칼빈주의 논쟁 27)
한편 말콤 맥킨논(Macolm H. MacKinnon)은 베버의 칼빈주의가 청교도들의 언약 신학이 변질되어 주의주의(主意主義)가 강화된 것올 칼빈주의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연서 베버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서 자레트(David Zaret)는 원래의 칼빈주의에도 주의주의(主意主義)적인 면이 있고 또한 변질되었다고 말하는 청교도 언약 신학 안에도‘오직 믿음’ (sola fide) 의 칼빈주의 요소가 함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또한 칼빈 자신에게도 주의주의(主意主義)적인 성격이 함께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칼빈의 저서들과 청교도 성직자들의 저서와 개인 서신들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 1980년대 말과 1990년대를 대표하는 베버 칼빈주의 논쟁이라 할 수 있는 자레트와 맥킨논 논쟁을 통해서 베버가 이해한 칼빈주의가 원래의 칼빈의 칼빈주의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맥킨논은 베버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칼빈주의가 세상적인 수고를 인정하는 신적 승인을 해준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1)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서 그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교리적 정점의 17세기 칼빈주의 위에 베버가 대부분올 의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2) 기 독교에서 특히 칼빈주의 에서 의로운 행위 (works)는 세속적 인 활동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28) 맥킨논은 칼빈 이후의 신학적 인 발전들이,청교도 언약 신학 안에서 행위 에 대한 동인(動因)이 되었던 구원 열망을 제거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자레트 교수는 맥킨논이 칼빈의 예정론과 언약 신학을 날카롭게 구별했다고 지적하고 그 과정에서 자료를 임의로 잘못 선택하고 그 결과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반박한다.
맥킨논은 베버가 칼빈주의를 주의주의(主意主義)적으로 오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에 대해 자레트는 맥킨논이 칼빈의 저작과 청교도 성직자들의 작품을 임의적으로 선택해서 칼빈의 주의주의(主意主義)적 인 변을 간과했다고 말한다 또한 청 교도 성 직 자들의 작품에서 ‘오직 믿음’ (sola fide) 의 부분은 놓치고 주의주의(主意主義)적 인 변만을 강조함으로써 칼빈주의와 정교도 언약 신학을 억지로 구분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자레트의 주장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베버의 칼빈주의에는 주의주의가 강조되고 ‘오직 믿음’의 면이 약화되어 원래의 칼빈주의에서 균형을 잃은 행위에 치우친 점이 드러나 보인다.
4. 베버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칼빈주의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에서 새로운 베버 자신의 칼빈주의를 세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 구체적 인 내용을 다음에서 살펴 보도록 한다.
4.1 사업 확장과 번영을 통해 이윤의 극대를 이루는 것을 ‘선택의 증거’로 삼는다.
베버의 칼빈주의에 따르면 사업을 통한 이윤의 증대를 기준으로, 어떤 사람이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입증 하여야만 했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는 신의 영광을 위해 자본을 축적해 나가는 데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 또한 노동 그 자체률 위혜서 노동을 한다. 가능한 한에서는 무엇이든 저축올 하고, 사업의 이윤과 번창올 통해서 자기가 선택받은 자라는 것올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29)
4.2 물질적 인 부를 추구하는 데 필요한 합리적 인 태도: 이자 금지에 대한 교회법 거부, 근면, 직업의 신성화, 사유재산 소유에 대한 정당화의 태도
베버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의 모든 형태를 저주받을 짓으로 규정한 대목은 성경에 없다고 지적한다. 부르즈와였던 칼빈은 네덜란드 공화국과 공화정 시대의 영국이 최초의 성공적인 자본주의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도록 도움올 제공할 수 있었다30)고 믿는다. 또한 근면 의무, 저축 의지, 직업의 신성화. 나아가 상업과 산업의 확장을 호의적으로 보는 태도, 필요 이상의 사유 재산을 소유하는 것올 정당화해 주는 태도 둥에 호의적 이었다. 또한 정직과 덕성이라는 문제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31)
4.3 자본주의적인 노력을 종교적인 노력으로 전화시키다: 카네기, 존 D. 록펠러 둥을 칼빈주의자로 만들다.
베버의 칼빈주의에 있어서 자본주의적 인 노력은 종교적 인 노력으로 전화되었다. “즉 그것은 사람들이 하늘과 땅의 두려운 주님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게 하였다. 그것은 나아가 카네기와 존 D. 록펠러에게로 통해 가는 다리를 만들게 했다. 즉 “프로테스탄티즘은 재산을 획득하기 위한 인간의 자유로운 노력올 종교적으로 인가해 주었다" 또 “자본주의 정신은 이렇게 해서 정당화된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경제적 이익을 끝까지 지키기 위하여 빈틈없는 자세를 갖추도록 하는 모든 자연적 인 환경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32)
4.4 베버의 칼빈주의는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와 침례교인 벤자민 프랭클린을 새로운 칼빈주의자로 포
함시키고 있다.
베버의 칼빈주의자들의 구원은 신이 선택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그의 구원받은 여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업에서의 성공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축적된 부를 개인의 쾌락과 행복올 위해 사용하지 않고 신과 공공복지를 위해 사용하게 된다. 베버는 칼빈주의자들을 그들의 소명 속에서 부단한 수고를 하도록 만들었다. 요한 웨슬리는 분명하게 칼빈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그의 자본주의 정신의 기여로 베버의 새로운 칼빈주의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비칼빈주의적인 퀘이커 교도의 세속화된 인물 프랭클린은 그의 자본주의적 성향들로 정직하게 영향올 미칠 수 있었지만 칼빈주의적 영향들은 그의 조상의 과거 속에 깊숙이 묻혀버렸다. 그러나 그는 베버 안에서 새로운 칼빈주의자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33)
5.5 칼빈의 ‘오직 믿음’ (sola fide) 의 은혜와 열매의 균형이 열매(행위) 쪽에 치우치고 청교도의 계약 신학에서의 은혜와 주의주의(主意主義)의 균형에서 주의주의 쪽을 강조함으로 균형을 잃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칼빈주의로 나타나게 되었다.
존 코튼(John Cotton)과 리차드 박스터 (Richard Baxter)를 통해서 맥킨논(Malcolm H. MacKinnon)34)은 칼빈주의의 ’오직 믿음(sola fide}’의 은혜가 아닌 다른 주의주의(主意主義)률 강조함으로써 ’베버의 칼빈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해 자레트 (David Zaret}35)는 극구 변호함을 통하여 ‘베버 칼빈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36) 맥킨논은 베버가 코튼이나 박스터와 같이 칼빈 자신에게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올 주장한다. 또한 자레트는 맥킨논이 지나치게 베버의 칼빈주의를 비판하는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레트
자신도 베버의 칼빈주의가 칼빈의 입장에서는 벗어나 있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드러나 보인다.
5. 베버에 의해 창조된 칼빈주의 지파의 그 후의 실제 내용
5.1 베버의 칼빈주의 지파의 정의
베버에 의해 창조된 칼빈주의 지파는 베버의 r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에 나타난 베버가 칼빈주의 특정으로 기술한 내용에 동의하고 받아들이는 학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베버가 논문에서 정의한 칼빈주의 정의에 속하는 일단의 단체들과 사상과 생각을 가진 무리가 사회 속에서 사상과 생각올 실천하고 드러내는 현상을 포함하여 베버의 칼빈주의 지파에 넣기로 한다.
5.2 베버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베버의 칼빈주의의 학자들
베버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베버의 칼빈주의 학자들은 그 창시자 막스 베버를 비롯하여 베버의 푸랑크푸르트 학파롤 포함한다. 또한 베버를 적극 지원한 에른스트 트휠치와 일부 비판을 했지만 중요한 부분을 받아들인 R. H. 토니, 그리고 미국의 라인훌드 니버와 그 이후의 베버 명제에 동의하는 모든 학자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의 베버 칼빈주의의 발전
베버는 종교적 인 방향으로서 이 세상의 금욕주의 (inner-worldly asceticism)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베버는 칼빈주의 예정 교리가 신자들을 이 세상에서 선에 대한 항구적이고 방법적인 봉사의 삶올 살아가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분명히 청교도 교파의 조직적인 원리들을 다루었다. 몇 개의 비 칼빈주의 조직들이 ‘소명’의 윤리를 채용한 것을 주목했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들을 자세하게 진전시커지는 않았다. 그가 강조한 것은 조직의 원리들이었다 중요한 점은 신학적 인 다양성이고 이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적절한 기독교적인 행위인지의 물음에 대한 실질적인 일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37) 미국에서의 베버의 칼빈주의는 뿌리를 깊게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교파를 초월한 청교도 윤리와 자유주의적인 경향의 신학, 세속화를 이루어 나가는 모든 기독교적 문화 위에 베버의 칼빈주의는 둥지를 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 다. 베버로부터 트롤취, 토니, 니버를 이어 소급적으로 요한 웨스리, 벤자민 후랭클린, 찰스 피니 (Charles Finney) ,벅 듀크(J ames B. Duke),38) 드와이트 무디 39) , 존 D. 록펠러, 카네기 등이 이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올 것이다. 또한 미국 청교도들의 뒤를 이어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세속화의 늪으로 인도한 자유주의 신학자들, 그리고 나아가 텔레비전을 통한 원거리 목회 (televangelism)등에서 절정을 이루는 종교의 상업화를 주도하는 모든 형태의 종교의 상업주의자들40) 이 이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6. 결 론
이 모든 것들을 감안할 때, 베버의 논제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의 논제는 완전하지 않고 많은 결함올 지니고 었다. 그러나 그 어떤 비판도 자본주의 성장올 설명하고자 하는 베버의 기본 전제를 파괴하지는 않는다. 역사는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한 나라들이 가톨릭이 우세한 나라들보다 더 많은 경제적 성장을 이룬 것을 보여준다. 베버는 단순히 개신교를 원인 그리고 자본주의를 결과로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의 활력이 정신적인 일종의 기풍올 포함한다는 점을 주장한다. 그 주된 기원이 개신교 윤리에 이념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올 밝히려 했다. 베버는 칼빈주의의 현세적 금욕주의가 근대 자본주의 정신간의 이른바 선택적 친화력 (elective affinity)올 분석하고 있다 4 1) 그러나 이 과정에서 칼빈주의의 이해에 있어서 많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이해와 해석올 내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교리는 자본주의 정신올 이루는 현세적 금욕주의와 근면과 정직신과 공공복리를 위해 부를 사용하는 경제관과 인생관, 그리고 도덕적 윤리관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의 베버의 칼빈주의는, 외형적인 교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주요 프로테스탄트 조직들은 현세 금욕주의를 채택했다. 그것은 ‘원래의 칼빈주의’에서 벗어난 급진적 이거나 혹은 청교도 훈동의 독립지파들에게서도 왔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었다. 그는 현세적인 금욕주의와 구원의 확산을 위해서 끊임없이 사업 번창을 통해 증명하려는 노력을 그의 칼빈주의 이해의 특정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가 되고 근대 자본주의가 번창하는 경제 윤리의 토대가 되었다. 그의 중심 논증은 계속적 인 지지를 받고 있고 오늘날에도 많은 지지자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윤리는 교파와 신학을 넘어 세속적 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는 r프로테스탄트 윤리 와 자본주의 정신」 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또 하나의 칼빈주의 지파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소위 ‘베버파의 칼빈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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