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언어와 공공성의 충돌- 김동춘
2014-09-03 15:03:41
[왜 한국 개신교의 신앙언어는 공공성과 충돌하는가?]
▲ 김동춘 교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증거된 복음, 사도적 신앙고백에 기초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그리고 역사상 그리스도교 교회가 진술하는 신앙의 확신들은 신앙 자체로부터 오는 독특성에도 불구하고 공적 진리(public truth)의 타당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2천년 교회의 역사속에 존재했던 그리스도교는 자신들의 성경적 가르침과 교리적 진술, 그리고 신앙고백을 그리스도교적 신앙언어의 독특성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동시대의 공적 세계안에서 보편성과 신빙성과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나름의 시대적합한 신앙논리와 변증적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세상을 향해 평화와 기쁨을 주는 것이며, 열방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창조세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이다.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주님이라면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세상을 향해 들려주고, 증언하는 신앙언어 역시 게토안에 갇혀 속좁은 배타성과 고집스러움에 매몰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복음논리, 즉 신앙언어는 세상 한 복판에서 모든 이들의 공명(共鳴)을 불러 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유벽한 곳에서만이 아니라 도시의 광장에서 불리어져야 하고, 골목에서만이 아니라 시장에서도 들려져야 하고, 문명과 문화의 중심에서 고백되어져야 한다. 결국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공공성의 문제이며, 공적 신앙(public faith)의 문제이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공적 진리로서 기독교 신앙’에 관한 우리의 확신을 말한다.
현재의 한국개신교의 위기는 공공성의 위기이다. 그 가운데 심각한 것은 기독교 신앙의 공공성, 즉 ‘공적 신앙’(public faith)의 부재와 결핍이 가져온 위기라고 진단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 개신교가 직면한 위기의 두 축은 도덕성의 상실과 공공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의 추락의 지표는 천주교의 상승 지표와 대비되는데, 개신교의 추락의 주요 원인인 도덕적 부패는 그 증상과 현상이 두드러지게 관찰되어 문제를 파악하는 용이한 반면, 공공성 문제는 아직 그 원인, 증상, 치유책이 잘 포착되지 않고 있다.
I. 개신교의 공공성 위기의 원인으로서 신앙언어
1. 개신교의 위기로서 공공성: 왜 공공성이 문제인가?
최근의 한국교회에 나타난 눈에 띄는 현상은 한국교회의 문제가 우리 사회의 공론장(公論場)에 대두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왜 문창극 발언은 사적인 차원의 신앙발언에 그치지 않고 전국민적 논쟁거리가 되는가? 정교분리가 원리적으로 규정된 우리 사회에서, 더구나 기독교국가도 아니며, 신정정치적(theocratic)사회도 아니며, 세속화적 사회로 진입한 현대사회에서 왜 ‘교회현상’이 우리 문화의 한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한 장로의 신앙발언은 역사관과 연결하여 논란이 증폭되는가?
그것은 단지 미디어 환경의 변화만으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한국개신교의 공론장으로의 부상은 먼저 한국교회의 사회적 위상변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더 이상 사회내의 소수종파가 아니라 주류집단이 되었고, 여론주도층으로 성장하였다. 더 이상 한국개신교는 사회내의 인적, 물리적 규모와 영향력에 있어서 핍박받는 소외집단이거나 주변부 집단이 아니라, 사회의 흐름을 선도해 나갈 책임적인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신천지나 구원파처럼 자기 방어적이며, 소종파적 존재/행위방식에 머물지 말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공성이란 성장기 이후의 개신교가 우리 사회안에서 그에 합당한 종교적 기능과 역할을 보여 달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공공성이란 우리 사회의 개신교를 향한 합의적 요청개념일 수 있는데, 그것은 한국교회가 본래 종교가 당연하게 드러내 주어야 할 도덕적, 정신적, 가치관적 차원의 걸맞는 존재감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공성은 한국교회의 위기의 한 축인 도덕성의 몰락에 대한 해답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공공성 문제에서 더 중요한 것은 현존하는 사회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타당성에 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오늘의 개신교가 사회속에서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신앙행태(예를 들어 땅밟기, 저주기도, 무례한 전도방식), 신앙적 사고들, 그리고 신앙적 어법(또는 신앙언어: ‘세월호 사건은 하나님의 뜻이다’)이 인간사회의 공동선과 일치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보편성과 타당성을 지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공공성이란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적합성, 즉 사회속에서 기독교적 신앙이 보편성과 적합성, 그리고 공통점을 추구하는데 있다. 그것은 교회의 정체성이나 신앙의 본래성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흔히 교회의 정체성에 집중할 때, “교회는 교회일 뿐, 세상과 교회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표현된다), 세상속에 있는 한 교회가 세상과 공통성을 의식하면서 시민적 양식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문창극 사태는 한국개신교의 공공성의 결핍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 사건이다. 문창극의 하나님의 뜻, 역사관이 격렬한 반응을 일으킨 것은 개신교적 신앙언어가 공공성과 충돌한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왜 신앙언어에 주목해야 하는가?
세월호 참사와 문창극 사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하는 자리에서 신앙언어를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오늘의 사회는 세속적이면서, 종교적이다. 종교와 세속이 분리되지 않는다.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도 차단막이 없으므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상호 교차하고 있고, 상호 교환적이 되고 있다. 더구나 현대사회의 특성상 SNS을 통한 매체적인 언어전달의 신속성과 광범위함이 존재하고 있어, 사적 언어를 공적 담론으로, 종교적 신앙언어를 세속광장으로 신속하게 옮겨 오게 한다. 이러한 사회구조의 특성으로 한 개인의 신앙, 더구나 그것이 개인의 사적인 신앙고백적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파급력은 엄청나다. 그것이 교회적 신앙언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순전히 사적인 신앙적 신념과 확신에 근거한 발언이라 할지라도 비기독교인들과 기독교 밖의 세계, 즉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손쉽게 유포되어 공론화가 일어난다.한국사회가 비록 그리스도교세계도 아니며, 국가교회적 전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사회구조는 종교와 세속의 구분이 없으므로, 공론장에서 증폭되는 신앙발언을 기독교적 특수성이라는 보호막으로 방어하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종교화된 세속사회에서 특정한 신앙언어는 그 자체가 복음선포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뜻이며, 주님의 축복의 숨은 뜻이 담겨있다’는 신앙언어는 주일예배 시간에 교회의 설교자에게 들을 수 있는 복음 메시지이지만, 때로는 교회당 밖의 수많은 익명의 청중들에게도 전달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러한 신앙언어는 개신교의 상징 메시지가 될 수 있으며, 복음전도와 교회에 대한 신뢰도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종교와 세속의 담이 허물어지고 있는 지금, 종교적인 메시지가 세속의 담론의 장으로 유입되고 있고, 사적인 신앙언어가 공적 매체를 통해 노마드적으로 넘나들고 있는 오늘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왜 최근 개신교의 신앙언어(혹은 개신교 문제)가 공론장에서 자주 출몰하는지 파악이 가능해 진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언어가 사회 일반에서 타당하게 들려지고 있는지 예민한 관찰이 필요하다.
II. 왜 개신교의 신앙언어는 공공성과 충돌하는가?
1. 한국개신교가 공공성과 충돌하는 이유는 사적인 신앙언어를 신앙의 특수성이라는 울타리안에 가두어 버리고, 사적인 신앙고백적 언어가 공론장에서 공적 담론으로 연결된다는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사적 신앙고백(신앙언어)과 공공의 영역이라는 두 영역에 실존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개신교의 위기는 신앙의 특수성을 고집하면서 기독교신앙의 공공성으로 이행되지 않을 때 초래하는 위기이다.
‘이럴 바엔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생활하고 싶다’. 이런 장탄식은 단지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부패 현상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언어가 공론의 장에서 어이없는 논리로 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두 사람의 넌센스한 신앙발언은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개신교 교회와 개신교가 선포하는 복음전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발언은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이 내 뱉는 말들은 하나같이 사회통념상 창피한 종교, 막장 종교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왜 교회의 신앙언어는 공론의 장에서 그렇게도 절망적일까? “일제 식민통치는 우리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식민시대의 고난은 일본의 근대문물을 수용하는 통로가 되어 민족 부국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교회의 장로가 신앙집회에서 천연스럽게 던진 이 발언은 일제의 폭압적 강점을 하나님의 섭리적 축복으로 둔갑시켜버렸다. 그런데 교회의 설교와 간증에서 이런 섭리적 언어는 일상적이다. 교회의 내부자 언어에서 ‘세월호 사건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 인도하심이요, 은혜요, 축복의 의미가 있으니 감사하라는 권면이 주된 신앙적 언어가 된다, 이런 언어들은 신앙 내부자 언어로 그들의 신학적 공간에서는 늘상 통용되는 일상의 신앙언어이다. 그런데 개신교인들의 이런 식의 사고방식과 언어사용이 심각한 문제가 된다. “주님은 죄인을 용서하셨으니 역사적 책임자 처벌이나 진상규명이나 누굴 탓하지 말고, 증오하지 말고 다 용서하자”, “이 고난은 주님의 축복이었다”. 이와 같은 사고와 논리, 그리고 그런 류의 신앙어법은 비신자들, 교회 밖의 공공의 영역, 그러니까 공론장에서는 우수꽝스럽고, 우매하기도 하고, 도무지 납득불가한 언어행태가 되고 있다.
문창극의 발언이 논란이 되자 이를 옹호하는 샬롬나비 등의 보수권에서는 그 발언이 국무총리로서 공적 영역에서 행한 발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장로 문창극으로서 교회의 신앙집회에서 행해진 개인적인 신앙의 확신이고 고백이므로 문제삼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런가?
첫째, 문창극의 발언은 사적 신앙언어라는 이름으로 던져진 공적 언어이다.
엄밀하게 말해 문창극의 발언은 단지 사사로운 신앙간증이 아니었다. 그가 행했던 특강은 신앙인 개인이 겪은 신비체험이나 환상이나 기적 체험과 같은 신앙인 개인적 차원에서 겪은 종교적 경험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강연은 민족사의 현실에 대한 기독교적 역사해석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발언은 결코 개인적인 신앙경험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의 강연은 도리어 그가 평소에 지니고 있던 일제식민역사를 찬양하면서 결국은 반공주의 기독교로 연결지을 수 있는 이념적인 편향성을 공교회라는 공간에서 신앙언어로 표출한 것이었다.
둘째, 교회의 사적 신앙언어가 공론장에서 증폭될 경우 교회는 자신들의 공적 담론을 사적 신앙의 자유권 보호라는 위장막안으로 신속히 도피한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사의 역사경험을 사사로운 신앙주관으로 굴절된 해석을 가한 것인데, 그럼에도 그것을 사사로운 신앙고백의 차원으로 축소할 수 없는 것이다.
빈번하게 문창극적 논리를 방어하는 그룹에서는 사적 신앙의 보호와 공적 성격의 신앙발언의 교차로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사유화된 자기 신념의 극대화를 꾀하고 있다. 그들은 문창극이 지극히 사적인 신앙의 신념에 따라 발언한 것이라고 변호하지만, 그러한 역사관은 수구적이며, 기득권 옹호적인 역사관을 명백하게 표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유화된 신앙언어의 형식을 빌린 것일 뿐 사실 그 역사관 자체는 공적 차원으로 확산시킬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발언된 것이다.
우리는 공공성 논의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의 개인적인 차원과 사사로운 것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앞에서 자아의 실존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개인적(individual)이지만, 신앙이 사적 종교의 도피처이거나 사사로운 욕망의 투영물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사적인(private) 것은 아니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교차적으로 공존하는 현대사회.
종교인의 신앙언어는 사적 언어만이 아니라 공적 언어가 된다.
한국개신교의 신앙언어는 신앙의 개인 실존의 자기고백적 차원과 사회속의 그리스도인됨과 교회됨으로서 공공성사이, 즉 고백적 신앙언어와 공적 영역에서의 신앙적 증언사이를 구분하기도 하고, 연결하기도 해야 하는데,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의 만유통치적 삶의 원리’와 ‘두 왕국적 영역구분’을 의도적으로 동시에 사고해야 한다.
최근의 개신교에 있어서 사적인 신앙언어가 공공성과 충돌한 대표적인 사례는 이명박의 서울시장 재임시 행했던 신앙고백적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건은 사적인 신앙고백이 왜 공공의 차원에서 공적 담론으로 논란이 되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명박 전서울시장은 당시 어느 기독교 집회에서“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합니다”라는 신앙고백적 발언을 했다가 엄청난 논란이 일어났다. 그 사례는 그리스도인 개인의 고백적 발언이 서울시장이라는 공적 직분자의 그것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문창극의 발언 역시 그러한 사례의 일종이다.
그렇다면 좌편향적 민족주의적 역사관이 보호받아야 하는 것처럼, 문창극의 우편향적 역사관도 역사해석의 다양성을 보호받아야 한는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은 다원주의나 다양성의 이름아래 정당화될 수 없다. 적어도 일제식민찬탈을 찬양하는 것은 평화, 정의, 인간애 등의 인간사회가 추구하는 공동선에 위배된다. 그것은 마치 히틀러의 역사를 역사해석에 대한 다양성이라는 명분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역사관의 ‘다름’의 문제가 아니라 전혀 ‘틀린’ 역사관이다. 이 역사관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행동과 이스라엘 사회에서 수립될 토라의 법,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나라가 지시하는 방향과 내용, 세계구원에서 실현될 하나님의 우주적 정의의 실현이라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공유된 기독교적 정신에 비추어 볼 때 그렇거니와 인간속에 심겨진 양심과 인류사회가 지향하는 공동선의 측면에서 그렇다.
2. 개신교 신앙이 우리 사회에서 ‘불편한 종교’ 혹은 ‘무례한 종교’로 비춰진 것은 기독교 신앙 본래의 순수성, 본질적 가치,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개신교 신앙이 교회 밖의 사람과 너무 동떨어진 언어구조, 사유체계, 가치지향점을 너무 자주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인들의 신앙적 사고나 언어논법은 대부분 일반적 통념과는 거리가 먼 사고의 틀을 보여주면서, 그것들은 단지 우수꽝스럽고, 넌센스하며, 이성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약간 ‘이상한’ 사고를 지닌 정도를 넘어서서 대단히 무례한 자들의 언어요, 폭력적인 언어가 되어버렸다.
예컨대 종교인 납세문제가 이슈로 등장했을 때, 목회자는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교회에서의 목회는 돈벌이를 수단으로 하는 직업군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에 따른 봉사직이므로 납세할 의무가 없다고 반론을 폈지만, 사실 이런 논리에 수긍하는 흐름은 아니었다. 편리한 방어논리, 즉 지극히 교회 내부자 논리에 근거한 신앙언어는 일반인들이 느끼기에 상당히 넌센스한 것이어서 개신교 집단이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복리와 평균가치, 그리고 사회를 선도하려는 공동의 책임의식을 전혀 갖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들의 종교집단의 권익보호에 급급한 사익집단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의 교회 헌금 횡령을 사회법정에서 “하나님의 돈을 목사가 마음대로 사용하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냐”는 식의 발언이나 사회법을 어기고도 마치 교회나 목회자는 사회법을 초월하는 상위의 법에 있는 것처럼 발언하는 것이나, 심지어 교회 여성도에 대한 무례한 발언 등은 사적 종교로서 기독교의 단면을 여실하게 드러내 주는 표현들이다. 문제는 소박한 수준의 사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라(물론 순진함으로 무장된 강한 주관적 성향의 사적 신앙언어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어느 정도 권력화된 형태의 사적 신앙언어는 무례함의 언어적 표현과 폭력적인 언어 표현을 서슴치 않는다. “누구도 주의 종을 판단하거나 거역할 수 없다” 등등, 교회안에서 목회자의 독점적 지위를 절대시하는 것은 그런 사례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회의 신앙언어들이 공공성과 보편 타당성으로부터 고립되어 동시대의 사고방식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인 것과 비기독교적인 것,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교회와 사회사이의 공동의 기반들, 즉 공유점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개신교의 신앙언어가 너무 빈번하게 비그리스도인 세계를 향해 배타적이며, 무례하고, 심지어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달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독교적인 특수성(particularity)보다 일반성과 공통성(commonness)을 함양할 필요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그리스도인으로 자기 정체성을 포기할 수는 없다 -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시민의 일원이자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사회의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면서, 사회적 자산, 정보, 지식, 제도, 기관들과 소통하고 연루되어 실존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공유적 언어보다 비공유적 신앙언어를 더 강렬하게 구사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예를 들어 교회는 구원기관이고, 세상은 멸망받을 비구원의 대상이라는 구획은 세상속에 실존하는 교회가 드러내는 ‘비공유적 신앙언어’에 속한다. 이것은 교회와 세상이 갖는 공동의 기반을 훼손하는 논리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논리들이 어느 순간 세상을 향해 배타적이고, 공격성을 띠는 형태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적 신앙언어도 공공성과 보편적 사고의 관점에서 재관찰되어야 한다. 기독교적 섭리신앙은 불의한 인간, 부도덕한 방식의 사건을 동원할 수 있지만, 그것을 빌미삼아 명백히 드러나는 도덕적 책임을 모면하는 면피논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뜻, 섭리, 주님의 은혜라는 교회의 언어는 이성, 보편성과 마주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일제식민통치는 하나님의 뜻이며, 결국 국가를 부강하게 하기 위한 섭리적 방편이었다”는 교회적 신앙언어라는 것이 사실은 일제의 식민역사의 어두운 역사를 찬양하는 군국주의와 신민사관의 이념의 포로가 된 신앙언어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이제 개신교 신앙언어는 공공성의 맥락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 교회안과 교회 밖, 종교적 언어와 세속적 언어사이의 공동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공공성을 함양하는 신앙구조를 위해 다음과 같은 신학적 자산들을 활용할 수 있다.
- 일반은총에 근거한 공공성: 일반은총은 본래 ‘일반적인 것’(general)이 아니라 ‘공통적인’ 은총(common grace)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신자와 불신자, 교회와 세상이 공유하는 은총이며,두 영역에서 발견되는 은총이다.
성육신의 신비: 신적 현실과 인간적 현실이 분리됨이나 혼합됨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안에 결합하는다는 성육신의 신비는 ‘공공성의 성육신적 기반’을 제공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신적 신비만이 아니라 인간적 현실안에서 만나게 된다. 인간적 현실없이 그리스도적인 것은 만날 수 없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구원과 창조, 초월성과 내재성, 영혼과 육체라는 전인적 관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안에서 제자직의 삶을 살 뿐 아니라 세상안에서 시민직으로 살아간다. 신앙과 이성, 그리스도적인 영역과 세속적 영역에 근거한 두 왕국의 원리는 제자직의 비범성과 시민직의 일반성을 양립적으로 살아간다.
3. 한국개신교의 공공성과의 충돌은 전환기 한국교회에게 요청되는 종교의 합리성과 타당성 결여에 기인한다. 사회의 변동기에 직면한 개신교가 주술신앙적 형태로부터 합리적인 설득에 기초한 신앙으로 전환되지 않을 때 충돌이 일어난다. ‘하나님 뜻’ 발언이 격론이 벌어진 것은 발생된 사건에 대한 인과론적 해석이 아닌 극단적인 섭리론적 해석에 기인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주술종교적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근대화로 이동하는 사회적 변동기에 불안정한 삶에 안정과 내면적 질서를 부여하는 삶의 원리와 정신적 의지처가 되었다. 그러나 일정한 경제성장을 달성한 한국백성들에게는 더 이상 주술신앙적 기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80년대까지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 신앙언어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라는 조용기식의 신앙논리였다. ‘불가능은 없다’는 믿음의 언어는 근대화의 성장지향의 이념이 절대화되던 시기에는 한국국민에게 일종의 ‘유사(類似) 희망의 신학’의 역할을 발휘하였으나 근대적인 것에 대한 성찰, 전통에 대한 회귀, 무분별한 성장과 풍요가 초래한 인간성의 파괴 등에 대한 반성은 개신교에 대한, 그리고 신앙의 의미추구가 더 근본적인 질문이 되었다. 이를 요약하다면 한국개신교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타계적이며, 역사초월적 종교로부터 세속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역사내재적이며, 현실의 삶에서의 유물론적이며 물화(物化)의 종교로 변모하였으며, 이러한 전환기의 한국개신교는 ‘축복형 종교’로부터 ‘의미 추구형 종교’로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한국사회는 점차적으로 개천에서 벼락부자로 신분상승이 가능한 우발적 축복을 기대하기 힘든 사회로 재편되어 가고 있다. 막연한 사회-경제적 신분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고, 급속한 사회구조의 변동을 꿈꾸기에는 어렵게 된 지금에는 ‘바라볼 수 없는 중에도 바라봄’으로 기적을 유발하는 ‘불합리함의 신앙’유형은 점차 소멸되고 있고, 반대로 상식적 사고를 존중하고, 합리적 과정을 중시하며, 벼락같은 축복이 아닌 성실한 노동을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건강한 삶이라고 간주하면서, 실재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시민적 양식을 갖춘 ‘시민교양의 기독교’의 출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한국개신교의 대중적 강단 저변에는 합리와 타당성을 중시하며, 이해를 추국하는 신앙은 연약한 믿음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어느덧 개신교 신앙인들의 의식 저변에는 바로 그러한 신앙 유형이야말로 ‘불량한 믿음’으로 인식되는 시대에 도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주술신앙의 효능은 끝났으며, 이성신앙과 도덕신앙이 요청되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몽적 신앙과 초월적 신앙은 양자 택일의 성격은 아니다.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의 초월성을 붙들 수 있으며, 반이성적이지는 않으면서 이성적 합리를 존중하고, 이성 너머의 신앙의 영역에 대한절대적 신뢰와 복종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좀 더 보충적으로 질문한다면, 왜 한국개신교의 신앙언어는 공공성과 충돌하는가?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행해진 강단설교와 권면은 대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비약’과 ‘역설’의 신앙언어를 관행적으로 즐겨 사용하였다. 이 신앙언어는 단지 믿음에 대한 내적 태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삶의 방식에서 합리와 타당성을 무시하게 하도록 유도한 논리적 근거로 작용하여 비약과 역설의 삶의 방식을 정당화하게 한 내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것은 가톨릭적 신앙언어가 자연과 은총,교회와 사회, 그리스도인과 시민적 삶, 창조와 구원, 초월적 신적 신비와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현실을 종합하고 상보적으로 연결해 주는 신학적 이음새가 견고하게 설계되어 있는 것과는 반대로 개신교 신앙논리에 이 양자사이의 격차와 괴리가 심각한데서 원인이 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거저주시는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부인할 수 없는 교리이지만), 죄인된 자에게 더 부어주시는 은혜, 노력하지 않은 자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길, 등등의 신앙논리와 간증들은 결국 개신교인들의 신앙의식속에 노력없이 도달되는 비정상적인 축복을 동경하게 하고 일상의 생활에서 정직한 삶을 경원시하고 벼락같이 임하는 돌발적인 축복의 사건은 일상생활의 건강한 삶을 밀어내 버리게 하였다.
이러한 역설과 비약의 신앙언어 혹은 신앙의식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객관적 파악이나 진단을 어렵게 함으로써 정상적인 가치판단을 흐리게 만들어 버린다. 세월호 참사를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신호이거나 뜻이며, 학생들의 죽음은 한국교회를 위해 의미가 있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 그것이다.
일제식민강점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있는 것이며, 우리 민족을 잘되게 하기 위한 섭리적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 역시 역설의 신앙논법이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섭리적 해석은 역사 이해를 접근하는 객관적인 사고, 그러니까 공공성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신앙집단 내부에서 행해지고 들려진 이 신앙논법이 비그리스도인들이 들을 때, 이것이 얼마나 황망한 사고라고 하겠는가, 그야말로 기독교인들과 그곳에서 행해지는 설교, 가르침은 넌센스를 남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일반인의 보편적이고 상식적 사고와 전혀 다른 것이어서 사회적 인식은 불가능하게 된다. 결국 비약과 역설의 신앙언어는 공공성과 공적 신앙의 장애물리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무리하면서
한국개신교의 신앙언어는 공공의 장, 특히 공론장에서 격렬한 충돌을 야기시켜 왔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언어는 개신교의 존립과 우리 사회에서의 신뢰도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 한국개신교는 자신의 확고한 신앙의 신념과 언어표현이 사회 일반에서 적합성과 타당성을 지니는지, 그리고 공동선을 지향하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 개신교는 점차 주술적이며 비합리적 축복종교의 기능은 희박해 지면서 사회의 공동선과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는 종교로 자리매김하지 않으면 안된다. 개신교의 믿음의 체계와 논리는 그 자신의 본래적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속에 소통하는 신앙 메시지를 제시하면서 기독교 교회와 발전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사적 신앙고백과 신앙언어의 공공성의 두영역에 실존하는 한국개신교
합리, 상식, 절차적 투명성의 문제로서 공공성
신앙영역의 사회 일반에서의 적합성과 공통성, 공동선의 문제로서 공공성
개신교의 표현은 점차 의례적 예배, 주술적, 무당행위로서 축복종교의 기능은 희박해 지면서 반대로 사회의 공동선, 보편적 가치, 중시하는 종교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사회일반이 기대하는 개신교의 기대이것에 대한 개신교의 의식이 시급하다.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창극 장로의 역사관- 배덕만 (0) | 2023.05.05 |
---|---|
사회문제에 대한 복음주의의 실패- 김형원 (0) | 2023.05.05 |
일제시대와 하나님의 뜻- 김근주 (1) | 2023.05.05 |
고통과 하나님의 뜻- 권연경 (0) | 2023.05.05 |
[제임스 헌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0) | 2023.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