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헌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2014-09-03 14:49:26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 저서,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관련 세미나 개최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 ©jamesdavisonhunter.com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로마로부터 핍박을 받던 초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 역사에는 '그들'이 있었다. '부, 권력, 문화 엘리트', '황제의 아내와 딸들', '부유하거나 교육을 많이 받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집안에서 태어난 교부', '이교도 철학에 뒤지지 않는 학문적 결과들을 생산해내는 학교들' 등이 바로 '그들'이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의 저서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와 관련해 현대기독연구원(원장 김동춘 박사, 이하 현기연)이 지난 25일 서울 창천동 하.나.의.교회에서 개최한 공개세미나를 위해 발제문을 낸 이주일 연구원(현기연 연구원)은 먼저 "헌터는 종교사회학과 문화사회학을 전공한 사회학자로서 '문화 전쟁', '복음주의'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종교와 사회 및 문화를 분석해 왔다"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는 제임스 헌터의 저작 중 가장 최근에(2010) 출판된 책"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 책의 핵심 주장을 요약하자면, 기존 미국 기독교 진영(기독교 우파, 기독교 좌파, 신재세례파)의 문화 변혁 전략은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잘못된 길이며 진정한 문화 변혁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며 "헌터에 따르면 기독교 진영의 문화 전략 이면에 전제된 문화에 대한 (사회과학적) 이론이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자료사진)이주일 연구원 ©현대기독연구원
이주일 연구원은 "헌터에 따르면 오늘날 기독교 일반의 상상력을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관점이 있는데, 이것은 '개인의 마음과 정신(hearts and minds)'(21p)이 가장 중요한 문화적 독립변수라는 견해다"며 "즉, '문화는 대다수의 사람이 보유하는 가치와 이런 가치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선택의 집적(accumulation)으로 구성된다'(22p)"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의 사례는 대표적이다"고 했다. 찰스 콜슨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 닉슨 대통령 시절에 특별 법률 고문으로 일하며 정치적으로 많은 권력을 누린 사람으로,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돼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 때 세 사람의 상원의원 헤트필더, 휴스, 퀴에 의원이 투옥된 찰스 콜슨은 위해 매일 시간을 정해 기도하고 감옥으로 그를 찾아가 위로하며 책을 전해 주기도 했다. 이들은 평소에도 콜슨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했던 사람들이다.
퀴에 의원은 콜슨을 대신해 옥살이를 해야겠다는 감동이 생겨, 특수법조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형을 치를 수 있다는 내용이 언급된 사실을 알아내 법원해 청원하기도 한다. 그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 사실을 들은 콜슨은 감동을 받고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는 남아있는 형 기간 동안 동료 죄수들에게 사랑을 베풀고자 기도하고, 죄수들이 제일 싫어하는 빨래도 자진해서 하자 처음에는 의심하던 이들도 하나 둘씩 감동을 받기 시작한다. 그래서 후에는 함께 기도모임도 시작하고 교제도 나누며, 콜슨은 평생 죄수들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한다.
▲찰스 콜슨의 저서 '거듭남'
형을 마치고 나온 콜슨은 '거듭남'(Born Again)이라는 책을 저술해 미국 사회에 큰 화제가 되고, 그의 결심대로 1976년에는 '교도소 선교회'를 조직해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계속해 후에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템플턴상을 받기도 한다.
이주일 연구원은 헌터의 의견을 정리하며 "콜슨은 세계관이 역사를 결정해 왔기 때문에 세계관의 변화와 실천이 문화를 변화시킨다고 주장했다"며 "따라서 세속화된 문화를 변화시키려면 평범한 개인들의 세계관이 먼저 바뀌어야 하며 그 결과 평범한 다수의 선택이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헌터는 이런 관점이 찰스 콜슨만이 아닌 가톨릭교회(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신교회(제임스 돕슨), 심지어 미국 계몽주의(토머스 제퍼슨)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한다"며 또 "이런 관점이 개신교만이 아닌 가톨릭에서도 발견된다"며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관점에 따라 전도에 집중한다. 왜냐하면, 전도는 영혼을 구원하여 개인을 변화시키고 결과적으로 문화를 변혁시키기 때문이다(제임스 보이스, 빌 브라이트, 빌리 그레이엄, 오스 기니스)"고 말했다.
그러나 "헌터는 개인의 마음과 정신을 강조하는 전략이 결과적으로 문화 변혁에 실패했다고 평가한다"며 "예컨대, 오늘날의 미국인 86-88%가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지만, 미국의 문화('사업과 문화, 법과 정부, 학문 세계, 대중오락'-40p)는 물질주의와 세속적인 경향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했다.
이주일 연구원은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가장 열정적인 종교생활을 해온 다수는 정통적이고 보수적인 그룹이지만 헌터에 따르면, 이들의 영향력은 지난 2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축소되어 왔으며 '특히 사상과 상상력의 영역'(41p)에서 더욱 그랬다"며 "반대로 유대인 공동체나 동성애 공동체는 각각 미국 인구의 3.5%, 3%를 넘기지 않았음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헌터는 실패의 진정한 원인이 독일 계몽주의를 거쳐 플라톤에까지 소급되는 '관념론'(idealism)적 문화이론을 전제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며 "관념론적 문화이론이란 역사를 움직이는 근본 요인을 관념으로 보는 이론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좌파와 우파, 신재세례파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과도하게 정치화된' 패러다임과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며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문화 변혁에 대한 (사회과학적) 이론을 올바르게 교정하고 정치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서 벗어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주일 연구원은 "헌터가 제시한 새로운 문화이론에 따르면 '전도, 정치, 사회 개혁, 창작'(79p) 등은 문화에 간접적인 영향만을 미칠 뿐이며, 문화의 중심에 있는 엘리트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그 영향이란 미미한 수준에 그치게 된다"며 "그래서 19-20세기의 금주 운동, 20세기 기독교 우파의 동성애, 낙태, 포르노의 합법화 저지 운동 등은 문화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실패했으며, 복음주의 부흥운동이 문화의 흐름을 바꾸지 못했고, 경건한 청교도들이 세운 학교들은 세속화의 중심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헌터가 제시한 새로운 문화이론은 역사적 증거를 통해 뒷받침된다"며 "기독교는 초기 3세기 동안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종교로 성장했는데, 이 성장은 유대교 디아스포라 회당과 그리스 로마 제국과 연결된 도시라는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이루어졌다. 교회의 지리적 중심은 제국의 중심인 로마였다"고 말했다.
또 "교회는 부, 권력, 문화 엘리트에 의존하여 성장했다"며 "황제의 아내와 딸들이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에 우호적이었고, 대부분의 교부들이 부유하거나 교육을 많이 받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교부는 상당한 수준의 지성인이었고, 학교를 설립하여 수준 높은 지적 교육을 진행하고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이 연구원은 전했다.
덧붙여 "2세기에 초기 교부들이 세운 학교들은 그리스 철학을 활용하여 이교도 철학에 뒤지지 않는 학문적 결과들을 생산했다. 그 결과 3세기에 당대 최고의 철학적 지성들은 기독교를 진지한 비판과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며 "300년대 후반에 이르면, 기독교의 주교들은 대체로 좋은 집안 출신이었고 로마제국의 교육제도인 파이데이아(paideia)를 경험한 철학자로서 로마 제국 내에서 존경을 받는 자였고 정치적 자율권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주교들은 파이데이아가 유지하고 있던 사회질서에 대한 사상과 이해관계를 거부하고 '가난한 자의 돌봄'이라는 새로운 사회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며 "점차 기독교의 주교들은 로마제국 내에서 기존의 권위를 능가하는 새로운 종류의 권위를 획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덧붙여 "헌터에 따르면, 고대 말에 기독교는 수도사와 수도원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리더십을 제시했다. 수도사는 '경건한 사람으로, 대중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 지위는 파이데이아와 그것이 섬기던 권력구조에 대한 직접적 도전이었다'(96p)"며 "수도원 운동의 특징으로는 첫째, 수도원은 학문의 중심지로서 서구 세계 최고의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는 중심지였다. 둘째, 수도원은 '복음화의 전진기지'(99p)였는데, 수사들은 평민보다 지방/지역 귀족들의 복음화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실상 유럽 주요 지역의 기독교화의 주된 요인 중 하나는 선교사들이 지주 귀족들의 물질적 자원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며 또 "주교나 수도원 원장들은 주로 부자나 귀족 출신이었는데,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용감한 성인들은 부자나 귀족 태생이었다'(101p)"고 소개했다.
이주일 연구원은 "헌터는 야만족이었던 유럽의 개종이 '교회가 지적 문화적 생산의 지도적 위치에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중첩되는 엘리트들의 자원들이 없었다면 결코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며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사회적으로 당대의 일급학자들이었으며 중세 스콜라주의의 대가들이었다. 루터와 칼뱅, 멜랑히톤과 베자 등은 당대 아카데미 속에 있던 신학자들, 교수들, 학생들의 넓은 네트워크 속에 있었으며, 특히 베자의 제네바 아카데미를 비롯한 다양한 개혁주의 아카데미와 대학이 스위스,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네덜란드에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국제적 네트워크는 종교개혁 사상의 급속한 확산을 가능하게 했다"고 했다.
또 "정치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은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수많은 귀족들로 권력이 분산되어 있어서 제국의 권력은 종교개혁자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며 "경제적으로 16세기에 팽창하던 국제교역은 새로운 대안적 상업 엘리트들을 출현시켰으며 이들에 의해 도시와 마을은 정치적 자율권과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덧붙여 "헌터는 1차 대각성 운동을 주도한 조지 휘트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웨슬리 형제 등 다양한 지도자들은 주로 상인과 전문계급 출신들이었고 명문대학(옥스퍼드, 에든버러, 예일, 하버드)에서 탁월한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대안적 엘리트 집단을 구성했고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특히, 휘트필드는 대각성 운동의 전역에서 활동하면서 핵심적 부흥 운동가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주된 역할을 했다"며 "결론적으로, 헌터는 진정한 문화 변동이 사상만이 아니라 사회적/제도적/경제적/문화적 동력의 복잡한 결합을 통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이주일 연구원은 "즉, 엘리트와 네트워크, 기술, 새로운 제도 등이 적절한 조건을 형성했을 때에 새로운 사상이 새로운 문화를 낳는다는 것이다. 대중적 호소와 포퓰리즘적 수준의 대안문화 수용은 결코 문화를 근원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며 "새롭게 생산된 문화적 생산물도 이런 여타의 사회적 조건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문화 변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고 했다.
이는 앤디 크라우치가 기존의 관념론적 문화모델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제시한 새로운 전략, 즉 '문화를 변혁시키기 위해 단순히 관념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적 인공물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도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의 저서 '기독교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그러면서 "헌터는 자신이 제시한 새로운 문화변동 모델을 기초로 현재 미국 기독교의 위치를 추적하는데 헌터에 따르면, 오늘날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미국 기독교가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주요한 영역은 정치다. 그러나 특징적인 것은, 이들의 활동 영역이 정치의 중심부(고위직 정치가, 판사, 활동가, 싱크탱크 등)가 아니라는 점이다"며 "이들은 주로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압력단체의 형태로 활동한다"고 했다.
덧붙여 "경제 영역에서의 사정은 완전히 다른데, 2차 세계대전 이후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백인 앵글로색슨 기독교도) 체제가 붕괴되면서 경제에 대한 개신교의 영향력은 사실상 상실되었다"며 "실제로 개인적/집단적 차원에서 다양한 성과를 내고 있는 여러 사례가 존재하지만, 주로 이들의 성공은 '미국 자본주의의 최정상이 아니라 중산층에서 일차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130p)"고 소개했다.
이주일 연구원은 "헌터에 따르면, 미국 기독교의 문화적 위치는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후원의 규모와 방향을 통해 우선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며 "표면적으로 신앙에 기초한 자선적 기부는 매우 활발해 미국의 자선적 기부의 거의 40%는 종교기관을 향한 것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런 기부들은 대체로 소액의 개인후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톨릭 재단과 복음주의 재단들의 경우 대부분의 기부금을 내부적 전도나 구제, 선교, 신학교 등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사실상 가톨릭과 복음주의 재단에 지성인, 예술가, 사회 혁신가를 위한 장학제도는 없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헌터는 문화 자본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기독교 신앙의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했다고 지적한다"며 "예컨대, 식민지 시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의 주요한 문화 생산 기관들(교회, 대학, 학교, 사회 개혁 운동, 대중문화, 고급 문화 등)은 WASP 체제의 주도적인 역할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다. 그러나 WASP의 쇠퇴와 함께 미국 내 기독교 신앙의 문화적 영향력도 급속히 감소해 WASP의 붕괴 이후, 주류 개신교 정체성의 독특성은 사실상 해체됐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현대 복음주의 기관들은 주로 19세기 중후반의 주류 개신교의 세속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했는데, 이들 내부의 학자들은 미국 사회의 주류 문화(미국의 지성 그룹)와 복음주의 내부의 대중(반지성주의 그룹)에게 이중적으로 소외받는 상황이다"며 "또한, 복음주의 기관들은 책과 잡지, 출판, 라디오, 텔레비전 등을 통해 다양한 문화 생산물을 쏟아내고 있지만, 이 생산품들은 주로 신자들의 내적 필요를 타겟으로 하며 미국 사회에서 주로 주변에 위치한 대중문화의 형태로 작동한다. 그 결과 이들의 문화적 활동은 '공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지적 논쟁의 핵심 중재자들에게 대체로 무시된다'(139p)"고 평한 헌터의 입장을 전했다.
이주일 연구원은 "'1960년대 이후 현대 기독교의 어떤 운동도 탁월한 방식으로 예술과 인문학, 학문 등을 창조하거나 공헌하여 조직해내지 못했다'"는 헌터의 주장을 소개하며 "결론적으로, 헌터는 20세기 말-21세기 초의 미국 기독교가 (복음주의, 개혁주의, 가톨릭을 모두 포함하여) 중산층의 신앙이었을 뿐이이라고 말한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오늘날 기독교 문화 자본의 활력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보다 회중석의 보통 사람들 속에, 문화 생산의 중심부보다 주변에, 특별한 것보다 대중적인 취향 속에, 지성인보다는 중급지식인들 속에, 그리고 이론적 상상적인 것보다 실천적인 것을 지향하는 것 속에 존재한다. 복음주의 내에는 '고급 문화'에 대한 취향이 약하고 일반적으로 번역(translation)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즉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142-143p)"는 헌터의 말을 인용했다.
그러면서 "결국 미국 기독교가 미국 사회 내에서 문화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는 '문화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역에 그들이 없었기 때문이다'(143p)"며 "헌터에 따르면, 사실상 정치 영역 이외에는 기독교인(지도자)들의 일치적 네트워크는 존재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지도력이 없다"고 정리했다.
이주일 연구원은 "헌터가 볼 때,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 하나는 인간의 보편적 중요성과 함께 '연약한 자들에 대한 돌봄'이다. 따라서 엘리트주의는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다"며 "따라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질문은 '탁월함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영향력과 특권의 위치에 있으면서, 엘리트주의의 덫에 걸리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149p)이다"고 말했다.
그는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의 긴장에 대한 질문 속에는 '권력'의 문제가 있고, 헌터는 현대 기독교의 권력에 대한 이해는 미국 기독교를 최악으로 이끌어가도록 만들었다고 강조한다"며 "그래서 헌터는 권력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적 이해로서 '신실한 현존'을 제안한다. 신실한 현존의 핵심적 내용은 새로운 사회 이론 모델을 전제로 문화 생산과 사회생활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는 대항적 지도자들의 네트워크(와 공동체)가 포함되는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정리했다
[추기] 발제문
제1부 기독교와 세계변혁
발제: 이주일 (현기연 연구원)
이 책의 저자인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는 종교사회학과 문화사회학을 전공한 사회학자로서 '문화 전쟁', '복음주의'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종교와 사회 및 문화를 분석해 왔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는 제임스 헌터의 저작 중 가장 최근에(2010) 출판된 책으로서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현황을 중심으로 기존의 문화 변혁 전략을 꼼꼼하게 반성하고 과거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을 요약하자면, 기존 미국 기독교 진영(기독교 우파, 기독교 좌파, 신재세례파)의 문화 변혁 전략은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잘못된 길이며 진정한 문화 변혁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헌터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신실한 현존'(faithful presence)이라고 명명한다. 그렇다면 왜 기존의 전략은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가? 헌터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 진영의 문화 전략 이면에 전제된 문화에 대한 (사회과학적) 이론이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1부).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좌파와 우파, 신재세례파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과도하게 정치화된' 패러다임과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2부).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문화 변혁에 대한 (사회과학적) 이론을 올바르게 교정하고 정치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서 벗어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기준을 충족시키는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신실한 현존’이다(3부).
이 발제문이 다루는 범위인 ‘제1부 기독교와 세계변혁’은 복음주의 사회참여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공통된 문화이론을 폭로하고 그것이 왜 작동할 수 없는 허위 이론인지를 고발한다. 1장에서는 기독교의 역사가 창조 명령(문화 명령)을 실현하려는 과정이었으나 그동안의 기독교 문화 변혁 전략은 성공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2장은 오늘날 문화 변혁에 대한 대중적 상상력을 지배하고 있는 이론이 무엇인지를 기독교 내 다양한 사례를 통해 드러낸다. 3장은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는 문화 이론이 실제로는 실패했다고 말하면서 실패의 원인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 관념론적 모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4장은 허위 모델이 아닌 실제로 문화의 변동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무엇인지를 11개의 명제를 통해 보여준다. 5장은 이런 대안적 문화 이론을 입증할 수 있는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기독교 역사 전체에 걸쳐서 제시하고 있다. 6장은 현대 미국 기독교가 정치, 경제, 문화의 영역에서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평가하면서, 현대 미국 기독교는 대안적 문화 이론에 따르면 문화 변혁을 성취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7장에서는 창조 명령이 보편적 명령이고 희생적 섬김이라는 본질을 지니고 있지만, 이 명령에 대한 해석은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으로 빠지기 쉽고 권력 오용의 유혹에 넘어갈 위험이 크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신실한 현존’이라는 대안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이 발제문은 우선 1부의 내용을 충실히 요약하여 소개하는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먼저 내용에 대한 요약문을 제시하고 난 후 헌터의 분석과 주장에 대한 평가와 토론할 만한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특히, 발제자는 문화에 대한 신칼빈주의적 이해와 기독교(복음주의) 좌파적 견해에 대체로 공감하는 입장에서 헌터의 주장을 평가하고자 한다.
1장 기독교 신앙과 세계변혁의 과제
헌터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은 창세기 2:15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창조적 노동을 통해 세계를 형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세상을 포기한 채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어내야 한다는 “구조선 신학”이 가끔씩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을 형성하는 신학과 신앙이 기독교회의 주된 흐름이었다.
창조 명령을 실행해 왔던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타락과 선이라는 이중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장로교, 성공회, 루터교, 가톨릭, 파라처치 기구 등 사실상 모든 기독교 전통은 세상에 대한 참여와 개선을 소명으로 여긴다. 세상에 참여하여 세상을 개선하려는 이들의 의도와 태도, 열정은 존중 받아 마땅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헌터는 이 책에서 가톨릭, 개신교, 진보와 온건 및 보수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기독교의 사회 참여 형태를 분석하고 진단한다. 헌터의 핵심적 주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문화와 문화적 변화에 대해 생각하는 지배적 방식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허울 좋은 사회과학과 실용신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다양한 전략들이 기초하고 있는 그 모델은 작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작동할 수도 없다.(19)
2장 문화: 공통된 견해
세계 변혁은 문화 변혁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곧 ‘문화’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문화 변혁의 전략을 구상한다. 헌터에 따르면, 오늘날 기독교 일반의 상상력을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관점이 있는데, 이것은 “개인의 마음과 정신(hearts and minds)”(21)이 가장 중요한 문화적 독립변수라는 견해다. 즉, “문화는 대다수의 사람이 보유하는 가치와 이런 가치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선택의 집적(accumulation)으로 구성된다.”(22)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의 사례는 대표적이다. 콜슨은 세계관이 역사를 결정해 왔기 때문에 세계관의 변화와 실천이 문화를 변화시킨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행위자는 개인이며, 개인의 선택을 낳는 핵심적 원인은 개인이 보유한 가치나 세계관이다. 예컨대, 콜슨은 현대의 상대주의와 위험한 이데올로기들이 발생한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세속적 진화론인 다윈주의를 지적한다. 따라서 세속화된 문화를 변화시키려면 평범한 개인들의 세계관이 먼저 바뀌어야 하며 그 결과 평범한 다수의 선택이 달라져야 한다. 헌터는 이런 관점이 찰스 콜슨만이 아닌 가톨릭교회(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신교회(제임스 돕슨), 심지어 미국 계몽주의(토머스 제퍼슨)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은 각 진영별로 독특한 문화변혁 전략을 수립하게 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관점에 따라 전도에 집중한다. 왜냐하면, 전도는 영혼을 구원하여 개인을 변화시키고 결과적으로 문화를 변혁시키기 때문이다(제임스 보이스, 빌 브라이트, 빌리 그레이엄, 오스 기니스). 헌터는 이런 관점이 개신교만이 아닌 가톨릭에서도 발견된다고 이야기한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테레사 수녀).
개인의 마음과 정신을 강조하는 관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치를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들에게 잘못된 정치나 잘못된 법은 관련된 행위자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이며, 행위자들의 잘못된 선택은 잘못된 행위자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다. 종교적 우파와 좌파,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압도적인 다수의 기독교인은 정치를 문화 변혁의 주된 수단으로 삼아왔다. 따라서 헌터는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교회의 지배적인 공적 증거는 정치적 증거였다고 말하는 것도 과장이 아니”라고 지적한다(31).
개인의 마음과 정신을 강조하는 관점은 마지막으로 시민과 국가, 시장을 매개하는 시민사회 영역을 갱신하고자 했다. 기독교인들의 자발적 사회 운동은 아버지 학교 운동, 결혼 운동, 성품 운동, 십대 금주 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헌터에 따르면, 이와 같은 전략들의 공통적 요소는 1)행위자를 개인으로 설정하고 2)문화 변혁은 가능하다고 보며 3)변화는 평범한 사람에게서 ‘아래로부터’ 시작된다는 관점이다.
3장 공통된 견해의 실패
헌터는 개인의 마음과 정신을 강조하는 전략이 결과적으로 문화 변혁에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예컨대, 오늘날의 미국인 86-88%가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지만, 미국의 문화(“사업과 문화, 법과 정부, 학문 세계, 대중오락”(40))는 물질주의와 세속적인 경향에 지배당하고 있다.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가장 열정적인 종교생활을 해온 다수는 정통적이고 보수적인 그룹이다. 그러나 헌터에 따르면, 이들의 영향력은 지난 2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축소되어 왔으며 "특히 사상과 상상력의 영역"(41)에서 더욱 그랬다. 반대로 유대인 공동체나 동성애 공동체는 각각 미국 인구의 3.5%, 3%를 넘기지 않았음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그렇다면 개인의 마음과 정신을 강조하는 기독교 진영의 전략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인가? 헌터에 따르면, 그 원인은 “그들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고, 충분히 결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며, 충분히 철저하게 혹은 기독교적으로 믿지 않기 때문”(45)이 결코 아니다. 헌터는 실패의 진정한 원인이 독일 계몽주의를 거쳐 플라톤에까지 소급되는 ‘관념론’(idealism)적 문화이론을 전제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관념론적 문화이론이란 역사를 움직이는 근본 요인을 관념으로 보는 이론이다. 미국 개신교는 관념론에 개인주의와 경건주의를 결합시킨 문화이론을 전제해 왔다. 미국 개신교적 문화 변혁 모델은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림1> 관념론적 문화모델
헌터에 따르면, 앤디 크라우치는 기존의 관념론적 문화모델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문화의 물질성을 인정하는 새로운 전략을 제시한다. 즉, 크라우치는 문화를 변혁시키기 위해 단순히 관념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적 인공물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크라우치는 문화 생산자들이 새로운 문화적 인공물을 많이 생산하면 새로운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개인들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는 개인들이 많아지고 그 총합은 문화 변혁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말한다. 헌터는 크라우치가 관념론을 적절하게 교정하려고 노력한 점은 칭찬할만 하지만 문화의 외적/가시적 측면에만 집중하고 문화 내적/비가시적 측면은 여전히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크라우치의 모델은 문화의 본질과 동력(dynamics)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크라우치의 문화상품 소비모델은 ‘시장 영합주의’(a market populism) 속에서 작동하는 또 다른 한계를 지니고 있다.
4장 문화와 문화 변혁에 대한 대안적 견해: 11개의 명제
제임스 헌터는 4장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문화 변동을 설명하는 대안적 문화 이론을 11가지 명제로 간략하게 제시한다. (1) 문화는 내러티브나 신화로 표현되는 규범적이고 지배적인 진리로 정의될 수 있다(“명제1: 문화는 일종의 진리 주장과 도덕적 의무 체계다”). 문화는 언어를 통해서 의식과 사회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2) 또한, 문화는 단기간에 생성/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고 지속되며 변화한다(“명제2: 문화는 역사의 산물이다”). (3) 문화는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는데, 이 상호작용은 사상과 제도 사이에, 개인과 제도간에 발생한다. 사상은 특정한 제도적/환경적 조건 안에서만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며, 개인이 제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제도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힘이 더 크다(“명제3: 문화는 본질적으로 변증법적이다”). (4) 문화는 상징 자본(symbolic capital)의 성격을 지니는데 상징 자본은 세대간, 개인간에 쉽게 전달될 수 없지만 돈처럼 축적이 가능해서 축적된 수준에 따라 권력과 영향력의 강도가 결정된다(“명제4: 문화는 자원이며, 그 자체로 권력이다”). (5) 따라서 자연스럽게 문화적 산물과 상징 자본은 계층화된다. 문화 상품과 관련된 개인, 네트워크, 제도는 주변이 아닌 중심에서 작동하게 된다(“명제5: 문화적 산물과 상징 자본은 '중심'과 '주변'이라는 엄격한 구조 속에 층화되어 있다”). (6) 문화는 개인의 천재성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통해 형성된 (새로운) 제도 안에서 형성되고 변화된다(“명제6: 문화는 네트워크 내에서 생성된다”). (7) 문화는 경제(시장 영역), 정치(정부), 학교(교육) 등 다른 제도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자율적이지 않다(“명제7: 문화는 자율적이지도, 충분히 일관적이지도 않다”). (8-9) 문화는 일반적으로 엘리트에 의해 중심에서 형성되어 주변으로 확산된다. 따라서 대중의 정치적 동원은 근본적인 문화 변혁을 일으키지 못한다. 실제로 문화 변동은 중심에서 약간 주변에 있는 엘리트들이 최고 중심에 있는 엘리트를 대체하면서 발생한다(“명제8: 문화는 가끔 아래에서 위로 변하지만, 대체로 위에서 아래로 변한다”, “명제9: 변화는 대개 명성 밖에 있는 엘리트에게서 시작된다”). (10) 따라서 변동 에너지의 극대화는 문화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 자원들이 중첩될 때 일어난다(“명제10: 세계변혁의 집중력은 엘리트들의 네트워크와 그들이 주도하는 제도들이 중첩될 때 극대화된다”). (11) 문화 변동은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권력 투쟁을 동반한다(“명제11: 문화는 변한다. 하지만 투쟁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헌터가 제시한 새로운 문화이론에 따르면, 문화는 행위자가 의도적으로 단기간에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전도, 정치, 사회 개혁, 창작”(79) 등은 문화에 간접적인 영향만을 미칠 뿐이며, 문화의 중심에 있는 엘리트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그 영향이란 미미한 수준에 그치게 된다. 그래서 19-20세기의 금주 운동, 20세기 기독교 우파의 동성애, 낙태, 포르노의 합법화 저지 운동 등은 문화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실패했으며, 복음주의 부흥운동이 문화의 흐름을 바꾸지 못했고, 경건한 청교도들이 세운 학교들은 세속화의 중심이 되었다.
5장 역사의 증거
헌터가 제시한 새로운 문화이론은 역사적 증거를 통해 뒷받침된다. 중요한 역사적 변동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한다. 기독교는 초기 3세기 동안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종교로 성장했는데, 이 성장은 유대교 디아스포라 회당과 그리스 로마 제국과 연결된 도시라는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이루어졌다. 교회의 지리적 중심은 제국의 중심인 로마였다. 교회는 부, 권력, 문화 엘리트에 의존하여 성장했다. 황제의 아내와 딸들이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에 우호적이었고, 대부분의 교부들이 부유하거나 교육을 많이 받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교부는 상당한 수준의 지성인이었고, 학교를 설립하여 수준 높은 지적 교육을 진행하고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2세기에 초기 교부들이 세운 학교들은 그리스 철학을 활용하여 이교도 철학에 뒤지지 않는 학문적 결과들을 생산했다. 그 결과 3세기에 당대 최고의 철학적 지성들은 기독교를 진지한 비판과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300년대 후반에 이르면, 기독교의 주교들은 대체로 좋은 집안 출신이었고 로마제국의 교육제도인 파이데이아(paideia)를 경험한 철학자로서 로마 제국 내에서 존경을 받는 자였고 정치적 자율권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주교들은 파이데이아가 유지하고 있던 사회질서에 대한 사상과 이해관계를 거부하고 ‘가난한 자의 돌봄’이라는 새로운 사회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점차 기독교의 주교들은 로마제국 내에서 기존의 권위를 능가하는 새로운 종류의 권위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헌터에 따르면, 고대 말에 기독교는 수도사와 수도원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리더십을 제시했다. 수도사는 “경건한 사람으로, 대중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 지위는 파이데이아와 그것이 섬기던 권력구조에 대한 직접적 도전이었다.”(96) 수도원 운동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수도원은 학문의 중심지로서 서구 세계 최고의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는 중심지였다. 둘째, 수도원은 “복음화의 전진기지”(99)였는데, 수사들은 평민보다 지방/지역 귀족들의 복음화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확산되었다. 사실상 유럽 주요 지역의 기독교화의 주된 요인 중 하나는 선교사들이 지주 귀족들의 물질적 자원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주교나 수도원 원장들은 주로 부자나 귀족 출신이었는데,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용감한 성인들은 부자나 귀족 태생이었다.”(101) 이 모든 역사적 과정 속에는 부정적 결과와 긍정적 결과가 혼합되어 있다. 그럼에도 헌터는 야만족이었던 유럽의 개종이 “교회가 지적 문화적 생산의 지도적 위치에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중첩되는 엘리트들의 자원들이 없었다면 결코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헌터는 16세기 종교개혁이 신학적/영적 요인을 제외한 사회/정치/경제적 측면들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정치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은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수많은 귀족들로 권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따라서 제국의 권력은 종교개혁자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 16세기에 팽창하던 국제교역은 새로운 대안적 상업 엘리트들을 출현시켰으며 이들에 의해 도시와 마을은 정치적 자율권과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은 당대의 일급학자들이었으며 중세 스콜라주의의 대가들이었다. 루터와 칼뱅, 멜랑히톤과 베자 등은 당대 아카데미 속에 있던 신학자들, 교수들, 학생들의 넓은 네트워크 속에 있었으며, 특히 베자의 제네바 아카데미를 비롯한 다양한 개혁주의 아카데미와 대학이 스위스,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네덜란드에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국제적 네트워크는 종교개혁 사상의 급속한 확산을 가능하게 했다. 헌터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지속적인 운동들이 이어졌으나, 이 운동들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문화를 변혁시키지는 못했다고 지적한다. 주변적이고 단기적인 성공에 머물렀음에도, 종교개혁 이후의 여러 운동들도 나름대로 문화 변동의 논리를 따랐다. 1차 대각성 운동을 주도한 조지 휘트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웨슬리 형제 등 다양한 지도자들은 주로 상인과 전문계급 출신들이었고 명문대학(옥스퍼드, 에든버러, 예일, 하버드)에서 탁월한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대안적 엘리트 집단을 구성했고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특히, 휘트필드는 대각성 운동의 전역에서 활동하면서 핵심적 부흥 운동가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주된 역할을 했다. 18세기 후반의 영국 노예제 폐지 운동은 주목할 만한 사례 중 하나다. 이 운동의 성공은 주로 윌리엄 윌버포스의 개인적이고 영웅적인 노력 때문으로 여겨지지만, 헌터는 그보다 더 복잡한 요인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헌터는 진정한 문화 변동이 사상만이 아니라 사회적/제도적/경제적/문화적 동력의 복잡한 결합을 통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즉, 엘리트와 네트워크, 기술, 새로운 제도 등이 적절한 조건을 형성했을 때에 새로운 사상이 새로운 문화를 낳는다는 것이다. 대중적 호소와 포퓰리즘적 수준의 대안문화 수용은 결코 문화를 근원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새롭게 생산된 문화적 생산물도 이런 여타의 사회적 조건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문화 변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특히, 정치는 새로운 문화적 의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가 탄생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6장 미국 기독교의 문화 경제
헌터는 자신이 제시한 새로운 문화변동 모델을 기초로 현재 미국 기독교의 위치를 추적한다. 헌터에 따르면, 오늘날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미국 기독교가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주요한 영역은 정치다. 특징적인 것은, 이들의 활동 영역이 정치의 중심부(고위직 정치가, 판사, 활동가, 싱크탱크 등)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주로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압력단체의 형태로 활동한다. 경제 영역에서의 사정은 완전히 다른데, 2차 세계대전 이후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백인 앵글로색슨 기독교도) 체제가 붕괴되면서 경제에 대한 개신교의 영향력은 사실상 상실되었다. 실제로 개인적/집단적 차원에서 다양한 성과를 내고 있는 여러 사례가 존재하지만, 주로 이들의 성공은 “미국 자본주의의 최정상이 아니라 중산층에서 일차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130) 헌터에 따르면, 미국 기독교의 문화적 위치는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후원의 규모와 방향을 통해 우선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신앙에 기초한 자선적 기부는 매우 활발하다. 예컨대, 미국의 자선적 기부의 거의 40%는 종교기관을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런 기부들은 대체로 소액의 개인후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톨릭 재단과 복음주의 재단들의 경우 대부분 대부분의 기부금을 내부적 전도나 구제, 선교, 신학교 등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사실상 가톨릭과 복음주의 재단에 지성인, 예술가, 사회 혁신가를 위한 장학제도는 없는 것이다. 헌터는 문화 자본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기독교 신앙의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식민지 시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의 주요한 문화 생산 기관들(교회, 대학, 학교, 사회 개혁 운동, 대중문화, 고급 문화 등)은 WASP 체제의 주도적인 역할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다. 그러나 WASP의 쇠퇴와 함께 미국 내 기독교 신앙의 문화적 영향력도 급속히 감소하게 된다. WASP의 붕괴 이후, 주류 개신교 정체성의 독특성은 사실상 해체되었고, 가톨릭교회는 다른 기독교 전통보다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지적이고 문화적인 생산 영역에서 통합되었음에도 주로 내부적인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영향을 미친다. 현대 복음주의 기관들은 주로 19세기 중후반의 주류 개신교의 세속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했는데, 이들 내부의 학자들은 미국 사회의 주류 문화(미국의 지성 그룹)와 복음주의 내부의 대중(반지성주의 그룹)에게 이중적으로 소외받는 상황이다. 또한, 복음주의 기관들은 책과 잡지, 출판, 라디오, 텔레비전 등을 통해 다양한 문화 생산물을 쏟아내고 있지만, 이 생산품들은 주로 신자들의 내적 필요를 타겟으로 하며 미국 사회에서 주로 주변에 위치하여 대중문화의 형태로 작동한다. 그 결과 이들의 문화적 활동은 “공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지적 논쟁의 핵심 중재자들에게 대체로 무시된다.”(139)
제도적인 영역에 대한 헌터의 비판은 더욱 단호하다. 한 마디로, “1960년대 이후 현대 기독교의 어떤 운동도 탁월한 방식으로 예술과 인문학, 학문 등을 창조하거나 공헌하여 조직해내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헌터는 20세기 말-21세기 초의 미국 기독교가 (복음주의, 개혁주의, 가톨릭을 모두 포함하여) 중산층의 신앙이었을 뿐이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 문화 자본의 활력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보다 회중석의 보통 사람들 속에, 문화 생산의 중심부보다 주변에, 특별한 것보다 대중적인 취향 속에, 지성인보다는 중급지식인들 속에, 그리고 이론적 상상적인 것보다 실천적인 것을 지향하는 것 속에 존재한다. 복음주의 내에는 “고급 문화”에 대한 취향이 약하고 일반적으로 번역(translation)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즉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142-143)
결국 미국 기독교가 미국 사회 내에서 문화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는 “문화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역에 그들이 없었기 때문이다.”(143) 헌터에 따르면, 사실상 정치 영역 이외에는 기독교인(지도자)들의 일치적 네트워크는 존재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지도력이 없다. 홈스쿨링이나 알파 같은 운동들도 근대세속문화에 저항할 수 있는 자원이 없는 방어적 행동에 불과하다.
7장 창조 명령에 대한 찬성과 반대
헌터는 7장에서 1부를 마무리하면서 창조 명령을 오늘날에 적용하기 위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려 한다.
헌터가 볼 때,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 하나는 인간의 보편적 중요성과 함께 ‘연약한 자들에 대한 돌봄’이다. 따라서 엘리트주의는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내세웠던 포퓰리즘은 일종의 ‘억압적 평등주의’로 변질되곤 했다. 쉽게 말해, “포퓰리즘이 일종의 문화적 평등주의가 될 때, 탁월해야 할 아무런 동기와 자극도 없어진다.”(149) 따라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탁월함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영향력과 특권의 위치에 있으면서, 엘리트주의의 덫에 걸리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149)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의 긴장에 대한 질문 속에는 '권력'의 문제가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사회참여적 활동에는 권력이 무엇이며 권력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있다. 헌터는 현대 기독교의 권력에 대한 이해는 미국 기독교를 최악으로 이끌어가도록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헌터는 권력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적 이해로서 '신실한 현존'을 제안한다. 신실한 현존의 구체적 내용은 3부에서 다뤄지지만, 그 핵심적 내용은 새로운 사회 이론 모델을 전제로 문화 생산과 사회생활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는 대항적 지도자들의 네트워크(와 공동체)가 포함되는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할 내용들
1. 헌터는 기독교의 기존 문화 변혁 전략이 포퓰리즘적으로 주변에 머무른 채로 파편화된 대중 운동과 정치적 권력 획득을 통해 아래에서 위로 문화를 변혁시키려 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국 기독교 사회참여 현황에 대한 헌터의 정교한 사회학적 분석은, 마치 마크 놀의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을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처럼 강렬하다. 마크 놀이 역사적 분석을 통해 복음주의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면, 제임스 헌터는 동일한 폭탄을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던진 것으로 보인다.
2. 종교와 문화 사회학자인 헌터의 공헌 중 하나는, 문화 변동의 메커니즘을 엄밀하게 제시하고 기존의 기독교 문화변혁 운동이 실제로 작동할 수 없었던 원인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해 낸 점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기독교 좌파와 우파, 신재세례파, 기독교 세계관 운동, 복음주의 등이 추구한 문화변혁 운동에서 사실상 문화 변동 이론 자체가 공허하게 비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일종의 관념론적 도식과 행위자를 철저하게 개인으로 설정한 문화 변혁론이 기존의 복음주의 사회 참여 방식을 지배해 왔다는 헌터의 지적은 피해가기 어려운 것 같다. 실제로 이런 관념론적 도식에 경건주의가 친화적이며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복음주의자치고 경건주의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2-1. 앤디 크라우치가 제시한 문화적 인공물 생산이라는 모델도 중심-주변이라는 계층화된 문화의 구조를 간과했기 때문에 효과가 없다는 지적도 예리하다. 복음주의의 문화적 생산은 대부분 '대중'을 향한 것이기에 주변에 머물고 말았으며 문화에 근원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마크 놀이 지적하듯, 미국(과 한국)의 창조과학 운동이 실제로 문화 변혁에 실패한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2. 헌터의 시각에서 보면, 복음주의 부흥운동에 문화적 영향력에 대한 평가도 다소 달라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17~8세기의 복음주의 운동을 촉발시켰던 대각성 운동의 여러 사회적 활동들은 윌버포스의 노예제 해방과 같은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문화의 중심으로 치고 들어가지 못했다. 실제로 복음주의 부흥운동이 사회의 근대적 세속화를 저지하지 못했던 이유가 이것일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복음주의 지성운동, 사회참여 활동을 어떤 식으로 기획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3. 헌터가 ‘지나친 정치화’가 복음주의 사회참여를 특징짓고 있다는 점은 (특히 미국 상황에서) 상당히 예리한 지적이다. 실제로 이 지적은 헌터에 대한 찰스 콜슨의 응답을 검토해 보더라도 확인된다. 콜슨은 헌터의 주장에 대해 ‘'정치가 헌터의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3-1. 개인적으로는 모든 문제를 정치적인 것으로 환원하려는 과도한 정치화의 한 가지 원인으로 ‘개인화’의 문제를 고려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근대화를 통해 철저한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정치 이외에도 기능해 오던 완층지대와 연대적 삶의 방식이 사라지고 파편화/개별화되면서 갈등의 조정자로 ‘국가’만이 남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4. 창조 명령과 관련하여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의 한계를 함께 지적한 내용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과거에 전개된 고지론이냐 미답지론(저지대론)논쟁은 이 비판을 고려할 때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다시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고지론이라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경계는 기독교적으로 정당하지만, 자칫 포퓰리즘에 머무를 수 있는 저지대론적 이해도 대안적 모델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5. 기존 복음주의 정치 참여의 세 진영에 대한 헌터의 비판은 매우 예리하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과연 기독교 우파와 좌파, 신재세례파 진영이 ‘동일한’ 강도로 지양되어야 하는가라는 점이다. 헌터가 말한 ‘다원주의’와 ‘언어에 대한 신뢰 상실’이라는 지점, 그리고 문화 변동의 동학을 고려할 때 실질적으로 행위자가 역사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신학적으로는 창조와 구속, 자연과 은총,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구분을 고려해 볼 때) 세속화의 진행을 막고 한 사회를 ‘기독교화’하겠다는 우파의 목표와 전략은 그 자체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불필요하고 해로운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기독교 좌파가 기독교 우파와 단순하게 ‘정치 과잉에 기대고 있다’라고만 평가받을 수는 없지 않을까? 왜냐하면, 기독교 좌파의 목표는 ‘공공선’에 대한 증진, ‘다원주의’에 대한 긍정, 주류 정치경제체제에 대한 반성 및 저항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재세례파 진영도 이점에서 다소 공통점이 있고 게다가 ‘콘스탄틴주의’에 대한 민감성은 그 어느 진영보다 강하기도 하지만, 사실 기독교 좌파가 기독교 국가를 세우는 일을 추구하지 않으며 다원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어느 정도 콘스탄틴주의에 대한 극복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헌터의 비판은 분명 일리가 있으나, 기독교 우파, 좌파, 재세례파 진영을 모두 동일한 수준에서 비난하고 폐기처분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 좌파의 모델이 (정치적 과잉의 문제를 다소 해결한다면) 비교적 신실한 현존, 샬롬의 추구에 가깝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예컨대, 짐 월리스가 재세례파 전통과 기독교 좌파의 주장을 결합시킨 것도 하나의 시사점이 크다고 보인다.
6. 또한, 한국의 상황에서 보자면, 중요한 이슈마다 ‘정치’의 문제가 걸려있다. 분명, 복음주의 사회참여가 곧 정치참여로 수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호 사건, 용산참사, 쌍용차사건, 위안부, 제주해군기지, 밀양 송전탑, 국정원 정치개입 등등의 문제들을 생각해 볼 때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는 주체가 ‘국가’인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헌터가 미국 복음주의권에 가했던 칼날을 그대로 한국에 적용할 수 있을까? 오히려 한국 복음주의의 다수(우파)는 국가-기득권 세력에 철저히 ‘동화’되어 있으며, 이것은 재세례파처럼 철저히 교회로 물러나서 대조사회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해결되지 않고, 국가를 철저히 견제할 수 있는 기본적인 체계와 문화를 확립하는 선결 조건이 필요하지 않을까? 과연 한국 복음주의자들에게 정치에서는 다소 물러나서 정치가 아닌 공공 영역의 문제에 집중하라고만 쉽게 말할 수 있을까?(이런 점에서 276쪽에서 첫번째 과제를 제시한 헌터의 지적은 유의미하다.)
7. 동의할 수 있는 결론은 정치 과잉에서 ‘공공성’으로의 방향전환이다. 정치로 환원될 수 없는 공공 영역에 대한 관심과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를 벗어난 참여가 필요하다. 그것을 신실한 현존이라고 한다면, 큰 그림에서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신학’과 ‘목회적 실천(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8. 헌터의 기본적인 신학적 입장은 사실상 전통적인 개혁파와 신칼빈주의적 입장에 가깝다. 1) 창조 명령에 대한 긍정, 2) 창조-타락-구속에 대한 이해, 3) 일반 은총, 4) 정치와 공공 영역의 구분(신칼빈주의) 6) 샬롬에 대한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관점을 공유.
9. 기독교 좌파의 경우 '르상티망', 즉 우파에 대한 적대감이 그 출발점이라는 지적만큼은 겸손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말 그대로, 적대감이 아니라 샬롬이라는 긍정적 이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10. 이번 교황 방한에 대한 한국 복음주의권의 대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 복음주의는 다원주의적 현실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 말로 누군가를 비판하기보다(종교적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오히려 존중과 관용, 그리고 윤리적 삶의 열매를 통해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선결 과제가 한국 기독교 앞에 놓여 있다.
제2부 권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최경환 (현기연 연구원)
문제는 권력이다
헌터에 따르면 그동안 사회참여와 변혁을 외치던 많은 기독교인들은 정작 그들이 변화시키고자 했던 대상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설령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 그리고 그런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다. 즉, 문제 설정과 진단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고, 결국 그런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자리에 접근하질 못했다. 그렇다면 복음주의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몰랐기에 헌터로부터 이런 혹독한 비판을 받은 걸까? 그것은 바로 ‘권력의 역동성’에 대한 민감함이다. 인간관계와 사회의 구조에 편재하는 권력을 진지하게 대면하고 성찰하지 않았던 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의 열정과 헌신에도 불과하고 사회변화에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 헌터의 비판이다.
그동안 사회과학에서는 다양한 구성원들을 하나의 사회로 결집시키고 모을 수 있는 근거와 요소가 무엇인지 밝히려했다. 근대 국가는 ‘국민주권’을 통해 권력의 합법성을 획득했고 국민들은 이를 승인하고 인정했다. 국가는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양도받음으로 폭력과 강제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가졌지만 동시에 그 권력은 언제나 국민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전복 당할 수 있는 것이다(158). 따라서 현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그 권력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투쟁을 주의 깊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권력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들이 과도하게 국가라는 단일한 권력집단에게 집중됨으로 “국가는 점차로 공적 행복의 화신”이 되었고, “정치의 언어가 우리의 공통 생활, 공적 목적,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 이해의 더 많은 부분”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영역이 되어 버렸다. 즉, 오늘날 우리들이 사는 사회는 국가의 후원을 받고, 국가의 권력을 통하지 않고서는 공적인 이슈들과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모든 문제를 국가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연스럽게 정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다양한 삶의 영역들이 축소되고 환원되고 말았다. 문제는 이렇게 과도하게 삶의 모든 영역들이 정치화됨으로 “정당정치의 언어가 우리가 타자를 이해하는 방식을 형성했다”는 사실이다(162). 모든 문제를 정치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결국 모든 이념들을 정치적 의미로 해석하게 만들었고 이는 ‘정체성의 정치’로 이어졌다: “정체성은 이념과 너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당파적 참여가 그들의 도덕적 의미를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한 개인이 선한지 나쁜지를 판단하는 척도 말이다. 이것이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얼굴이다”(163).
또한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동일시됨으로 정치적인 것을 배제하고서는 공적인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나 상상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동일시는 “공적 생활의 복잡성과 풍부함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와 더불어 공통된 문제와 이슈를 다루는 대안적 방법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축소시켰다”(164). 정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자발적인 시민들의 공적인 문화를 빼앗아 버렸고 정치적 당파에 기대어 타자를 평가하려는 권력의지를 만들었다. 대화와 협력, 타협과 설득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공론장을 통해 민주적 공론을 만들기 보다는 “법률적, 정치적 수단을 통해 타자에게 우리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훨씬 쉬운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165).
니체가 기독교인들의 노예의지를 비꼬면서 만들어 낸 ‘르상티망’(ressentiment)은 “정치적 행동의 동기로서 분노, 시기, 증오, 격노, 보복”과 같은 원한감정을 뜻하는 용어로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참여 동기를 설명하는 탁원한 정치 심리학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을 역사의 희생자이자 고난 받는 자로 규정함으로 상처의 서사를 만들어 낸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주도권을 악의 세력에 빼앗김으로 자신들이 누렸던 혜택을 박탈당하고, 그로 인한 상처가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이 되었다. 그리고 “더 많은 상처에 대한 두려움을 부추기는 것은 집단 내에서 연대감을 생성하고, 그 집단이 행동하도록 동원하는 전략이 된다”(166). 반대자의 위협을 과장하거나 극대화할수록 집단의 정체성과 연대는 더욱 견고해지고, 공격력은 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를 포기하는 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한 것만큼이나 심각한 것이 된다. 헌터는 이러한 원한감정이 그동안 복음주의 사회운동을 추동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고 분석한다. 세속화와 상대방에 대한 원한감정을 기초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사회참여의 신학적 정당성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들의 사회운동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2. 기독교 우파: 공포와 분노를 행동으로
기독교 우파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상상력의 원천은 ‘위협’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많은 신념과 원칙들이 현재 근본적으로 도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결혼, 부모 됨, 가족의 권위와 자율성과 같은 가치들이 도전을 받고 있다. 또한 “전통과 성경에 대한 도전뿐 아니라 진리 개념 자체에 대한 도전”에도 직면해 있다(172). 한 때는 이들이 중요시했던 가치들이 미국 사회에서 존중을 받고, 사회 전반에 걸쳐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던 시절이 있었다. 기독교 우파는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현재화하려 한다. 즉 자신들의 찬란했던 과거를 빼앗겼다는 섭섭함과 향수, 거기에서 발현되는 근심과 불평이 사회참여의 중요한 동력이 된 것이다.
기독교 우파의 과거에 대한 향수는 미국의 건국 신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에게 “미국의 건국은 현재를 측정하는 참조점이다”(173). 미국은 애초에 기독교 국가로 설립되었고 건국이념은 다분히 기독교적인 가치와 원리에 입각한 기독교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학교, 자선단체, 병원 같은 공화국 초기의 제도들은 내용은 그렇지 않지만 특성상 기독교적이었고, 그것의 도덕도 기독교적이었다”(173). 결국 이들은 민족탄생의 서사를 자신들이 선점해서 차용하려 했고, 미국 역사에서 자신들의 찬란한 영웅서사를 계속 재생산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공적 영역에서 종교는 노예제 폐지와 금주 운동, 그리고 시민권 운동을 일으키는 원초적 원동력이었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낙태, 동성애 반대 운동 속에서 현재로 이어진다. 즉, 가장 ‘미국적인 것’의 오리지날은 기독교 우파가 지니고 있으며, 자신들을 통해 그 영광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신앙이 미국의 위대함에 영적, 도덕적 토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미국은 믿음의 백성의 것”이다(176).
이렇게 기독교 우파의 관점으로 보면 현재 미국은 분명히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들이 볼 때, 현재 미국이 도덕적으로 쇠퇴하고 있는 이유는 “종교적인 모든 것에 대한 점증하는 적대감” 때문이며, “미국의 세속화” 때문이다(177). 그 결과 “이 나라는 세속적 자유주의자들과 인본주의자들에 의해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나라로 변질되고 말았다. … [우리 것과] 전혀 다른 의제를 가진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자부심과 위엄, 명예를 강탈해버렸다”(177) 이들은 “세속적 자유주의가 사법부를 장학한 것을 자치 정부가 지금까지 직면했던 최대의 공격이라고 불렀다”(178).
기독교 우파가 세속문화에 빼앗긴 자기들의 주도권과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사용하는 정치적 수사는 고난의 이야기를 확대재생산 함으로 동정심과 적대감을 동시에 유발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고 비난받는 해군 군목의 이야기, 졸업식장에서 학생대표가 주기도문을 암송함으로 감수해야 했던 야유와 비난, 동성애자에게 회원권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학생단체 지위를 상실한 단체 이야기 같은 것이다. 이들에게는 “국가와 문화, 신앙에 대한 피해의식이 대단하다”(182). 이들에게 오늘날의 위기는 단순히 신앙의 위기일 뿐 아니라 국가적 특성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 제임스 돕슨(James Dobson)은 이러한 공포와 분노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죽음을 향한 행진, 즉 낙태, 안락사, 난잡한 동성애와 이성애, 마약의 합법화를 대표한다고 선언한다. 오직 두 가지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정말 분명하다.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사회적 해체의 길을 선택하느냐(183).
상황의 심각성은 결국 진지한 결단을 촉구한다. 이제는 일어나서 ‘아니오’라고 말할 때이고, ‘이제 그만 더 이상 가만있지 않겠다’라고 말할 시간이다. 만약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 그 결과 이들은 2004년을 정점으로 정치 세력을 최대치로 끌어 모을 수 있었다.
기독교 우파가 참여를 호소하는 방법은 기도와 행동 두 가지이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이다”(184). 남침례교회는 “정치적 무관심은 죄”라는 말하면서 이들은 신자들로서 민주적 정치 과정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담은 공무원이 더 많이 나오고, 의회와 행정부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자리를 차지하고 그곳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188). 기독교 우파에 있는 모든 집단의 소원은 공공생활을 그들의 방식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들의 의도는 “미국 가치를 탈환하는 것”, “새로운 남북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191). 그래서 이들은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 통치해야 한다. 승리해야 한다. 그만큼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정치에 거는 희망은 놀라운 정도다. 그들은 “국가를 치료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겠다는 열망은 위협과 협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돕슨은 때때로 좌절이 너무 깊어져서 보수적인 사회 이슈들을 법적 우선순위에서 더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면 공화당을 붕괴시키겠다고 위협했다”(193). 결국 기독교 우파는 자신들의 운명을 미국의 운명과 동일시하고 앞으로의 생존도 함께 할 것이라 믿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기독교 우파가 자신의 힘을 가장 과시했던 2004년 대선 이후 이들의 세력은 급격하게 쇠퇴했다. 마치 20세기 초 원숭이 재판으로 알려진 스코프 재판에서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재판에서는 이겼지만 결국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듯이, 그들의 열망이 부시 대통령을 당선시켰지만, 미국 역사에서 기독교 우파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점차 고조되었다. 헌터가 예리하게 지적하듯이, “이 운동이 그 당시 미국인들에게는 강력한 반성직주의를,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젊은 신자들에게는 심각한 반감을 초래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젊은 복음주의자들 안에 정치적 좌경화 현상이 발생하였고, 2008년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를 대통력으로 열정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197).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스스로 정치에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정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가 더 큰 문제라는 인식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3. 기독교 좌파: 미워하면서 닮아가기
기독교 좌파라고 우파와 다르지 않다. 이들도 자기들 나름의 신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이 구사하는 신화는 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에서 도출하는 정의에 대한 갈망이다. 이들은 20세기 중반까지 가시성과 영향력 면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라든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에 영향을 받은 다양한 형태의 해방운동으로 드러난 이들의 사회참여는 1980년대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들의 교세는 점점 기울었고, 그들의 의제가 민주주의를 통해 어느 정도 성취됨으로 그 세력도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부활은 뜻밖에도 주류 교단이나 대표적인 기독교 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진보적인 복음주의자들을 통해 일어났다. 기독교 우파와 비교해 볼 때, 이들의 응집력이나 조직력은 미약한 수준이지만 지난 몇 년간 큰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기독교 우파가 세속화를 미국의 가장 큰 해악이라고 진단한 반면, 기독교 좌파는 빈곤과 불평등을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해악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해악을 조장하고 부추겼던 세력은 다름 아닌 기독교 우파의 지도자, 조직, 이념, 이슈였다고 분석한다. 당연히 기독교 좌파는 이들에 대한 적대감을 통해 운동의 동력을 이끌어 냈다. 기독교 우파가 미국의 세속화와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 분개하면서 내뱉는 공격적 언사만큼이나 기독교 좌파도 이에 못지않게 분노에 찬 수사를 구사한다. 또한 기독교 우파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자신들이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난 것은 안타까워하며, “우파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아”와야 한다고 말한다(219). 이들은 “극단주의자들로부터 기독교 어휘를 개선하고 기독교의 도덕과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고(219), 궁극적으로는 정치를 통해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기독교 좌파와 우파는 서로 방향을 다르지만 이들이 구사하는 수사는 동일하다. 문제와 진단은 다르다 해도 권력을 다시 장악하는 것이 해결방식이라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헌터는 진보적인 복음주의자로 잘 알려진 짐 월리스(Jim Wallis)의 정치 연설을 분석하면서 월리스 역시 “기독교 우파 안에서 발견되는 기본적 권력 의지와 다르지 않다”고 꼬집는다(220). 월리스는 대중 동원 능력이 탁월했고, 어떻게 하면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이상은 저항할 수 없는 바람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운동”에 있었고, 그 변화를 야기하는 틀은 정확하게 국가였다(222). 따라서 그에게 “정의와 평화의 목적을 성취하는 지배적 도구는 정치다”(222).
성서를 현실 정치에 적용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오히려 기독교 우파보다 더 직설적이다. 예를 들어, “미가 4:1-4을 미국 해외정책의 표준으로 인용”한다든가, “이사야 65:20-25을 연방예산 측정의 기준으로 사용한다”(224). 월리스는 현재 미국이 마치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신정국가라도 되는냥 고대 이스라엘의 율법과 예언을 미국 민주주의에 그대로 적용하려 한다. 따라서 결국에는 이들 역시 제국을 열망하는 것이라는 헌터의 비판은 날카롭다.
우파와 좌파 모두 의로운 제국을 열망한다. 따라서 그가 폴웰과 로버트슨에 대해 국가 권력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의제를 실행하려 한다고 비난할 때, 그와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다른 기독교인들도 똑같은 기준에 의해 심판받게 되어 있다(225).
결국 기독교 좌파는 “정치와 정치적 성향의 사회 운동을 통해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것”,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혼합하는 것”,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것”, “신학과 국가적 이해와 정체성을 혼동하는 것”에서 기독교 우파와 너무나 닮았다(225).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권력이기 때문에 이들의 “현실정치는 공화당이 미국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오랫동안 기독교의 보수적 유권자들을 이용한 것과 동일하다”(227).
4. 신-재세례파
기독교 좌파와 신-재세례파 사이에서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시장경제의 인간적, 환경적 결과들에 대해 공통의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든가, “중산층으로서 문화 양식을 공유하고 있는 경향”이 그것이다(229). 이는 월리스가 초기에 신-재세례파로부터 많은 신학적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의 차이점은 “그들의 국가관에서 발견된다. 전자는 강력한 국가를 원하고 국가에 압력을 가해 법과 정책 분야에서 자신의 뜻을 실현하고 싶어한다. 반면에 후자는 국가의 구조 행동, 권력 사용에 대해 기본적으로 불신하면서 국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230).
신-재세례파가 자신들의 신화로 삼고 있는 것은 “참되고 진정한 신약 기독교와 초대 교회의 이상”이다(230). 세계변혁에 대한 이들의 신념은 예수의 생애와 교회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들의 르상티망은 교회사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콘스탄티누스주의이다. “콘스탄티누스적 오류는 미국 기독교가 자본주의 논리와 관행을 자기 자신과 자신이 섬기려는 세상에 해를 끼칠 정도로 전적,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왔다”는 것이고 “미국 기독교가 그리스도와 함께, 자유민주주의와 소비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 모두에게 이중적 충성”을 바쳤다는 것이다(236). 이러한 세상에 대한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정체성과 사명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다”(237). 예수는 새로운 인류의 모델로서 강제와 폭력을 거절하고 당대의 통치 권력과 대안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그는 타락한 정사와 권세를 정복했고, 교회는 그것을 선포하고 실천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교회는 “하나의 대안적 공동체로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보여주어야 한다(240). 이들에게 비폭력에 대한 헌신은 “제자도의 근본적인 징표이자, 복음의 핵심적인 윤리적 가르침이다”(241). 이들을 평화주의자라 부르는 것은 바로 정사와 권세에 맞서 싸우는 무기가 비폭력이며, ‘힘없음’(powerlessness)이 그리스도와 그의 모범을 따르는 중요한 표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재세례파의 사회비판 속에는 기독교적 계시와 세상의 지혜, 교회와 지배 문화 사이의 강력한 대립이 내재해 있다. 교회와 세상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관점 속에는 “신학과 교회를 진정으로 탈세속적(postsecular) 자기이해로 인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담겨있다(244). 세상은 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타자이자 나그네로 존재해야 한다. 교회의 소명은 예배 공동체가 되는 것이고, 윤리는 다름 아닌 “예수를 따르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245).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탈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정치적 실천이라고 말한다. “교회의 시민권이 참된 시민권이며”, 교회는 “세상에서 대안적 공간과 대안적 실천을 창조한다”(245). 그럼으로 요더에 따르면 “기독교 공동체는 … 하나의 정치적 실재다”(247). 참된 기독교는 “십자가의 정치”(politics of cross)로 드러나야 한다.
헌터는 이러한 신-재세례파의 신앙적 동기 속에는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날카로운 이원론에 영감을 불어 넣는 것은 하나님이 교회에게 원하시는 모든 것이 되고 싶은 열망, 그리고 교회가 세속성에 오염되거나 그런 부패에 연루될 수 있다는 공포다”(245). 이러한 공포는 세상에 대한 저항을 넘어서 분노, 비난, 부정의 메시지로 뒤덮여졌다는 것이 헌터의 분석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살펴보면, 저항의 대상이나 비판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지만, 정작 대안을 제시하는 언어들은 상당히 신학적이고 종말론적이며 추상적인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는 기독교 우파나 좌파보다 그 대안이 훨씬 더 맹목적이고 허망한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이들의 신앙적 원천은 경건주의와 완전주의에 닿아 있고, 대체로 분리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신-재세례파에서는 자신들이 기존의 정치언어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오늘날 정치를 둘러싼 권력관계와 정치언어를 너무 단순하게 봤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불러 올 수 있다. 즉 이들이 사용하는 신학언어는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지 못하고 단순히 예수의 이야기만을 반복하기 때문에 정치언어와 의제에 그들의 논리가 잠식당할 위험에 놓이게 된다.
5. 권력 인 듯, 권력 아닌, 권력 같은 기독교
헌터가 보기에 그동안 기독교는 사회 속에서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을 너무 쉽게 봤다. 권력은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고, 인간 경험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인간은 근본적으로 ‘호모 포텐스’(Homo Potens)라 불릴 수 있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비대칭적으로 “모든 사회적 실재에 스며있기 때문에” 인간은 권력을 “회피하거나 초월할 수 없다”(269). “권력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고 상호작용적이며, 역동적으로 공유되고 전염성이 있다”(268). 이 권력은 모든 종류의 사회집단을 통해, 그리고 우리 자신의 주관성을 통해 모든 제도 속에 존재한다.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권력 분배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권력은 어느 곳에나 편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학은 이러한 ‘권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일단 신-재세례파는 “권력에 대한 이해를 정치적 혹은 경제적 권력에 한정함으로써 사람들이 권력을 포기하거나 ‘힘없게’ 됨을 상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272). 이들은 ‘교제’, ‘공동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자발적인 사회를 구성하고자 하는데, 이는 교회도 하나의 제도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제도는 본질상 권력을 소유하고 행사”하기 때문이다(273). 교회는 (그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다양한 상징과 형식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교회가 사람들로 구성된 인간적 제도인 한, 세상에서 작동하는 권력 구조에 참여하고 권력을 행사할 것이다”(274). 그래서 “교회와 세상 사이에 날카로운 선을 그으려는 모든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274). 사람들이 모인 곳은 어쩔 수 없이 그곳이 교회라 하더라도 세상과 공유하는 힘의 영역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헌터는 “권력 문제와 관련해서 ‘힘없음’은 일종의 허구”라고 날카롭게 비판한다(274).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권력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고, 창조 명령은 이러한 권력을 사용하라는 명령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권력은 부패하고 손상되었다. 이 사이에서 오는 갈등은 “신실한 기독교적 증거가 역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이”에서, “사회적 현실과 복음의 영적, 윤리적 요구 사이”에서, 그리고 “사회의 도덕성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항상 긴장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274). 이 긴장과 갈등을 서로 다른 이상을 가지고 ‘기독교화’하려고 했던 것이 세 가지 입장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타자들을 참된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의심”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만들었다(275).
하지만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말라’는 부름은 현 세상의 무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충실히 거하라는 부름이다. 그리고 그 충실함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긴장을 인정하고, (실패는 불가피하고 언제든지 용서할 수 있으며, 우리 노력을 일신하고 신성하게 만들기 위해 성령께서 항상 역사하신다고 믿으며) 그 긴장 속에 거하는 것이다(275).
헌터가 제시하는 기독교와 권력의 긴장은 다음의 세 가지를 인정하고 끌어안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적 실천과 세상 권력 간의 내재적이고 끝없이 복잡한 결합, 세상에서 충실하게 활동하는 교회 속의 불가피한 내재적 긴장, 하나님 나라 복음에 순종하고 증거하려는 신실한 기독교인에게도 실패는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는 것”(276). 이러한 인정과 승인이 패배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자들이 권력 및 권세와 더 나은 관계를 발견하기 위해 계속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가능한 한 많은 은혜와 용서를 통해 일한다는 뜻이다”(276).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헌터는 복음주의 사회운동의 근본적인 문제를 모든 사회문제를 정치로 환원해서 해결하려는 태도와 사회적 상상력의 빈곤으로 봤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가 세상에서 탈정치적(postpolitical) 운동에 힘써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교회의 정체성의 미국의 정체성과 분리하는 것이다. 그동안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의 미래를 특정한 정치 신화, 이념, 의제의 성공과 연결”시켜서 설명하려 했다. 우파와 좌파 모두 자신들이 진정한 ‘미국적인 것’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 신앙을 미국의 정치문화와 결합시켰다. 하지만 “이제는 분리할 때다”(277). 둘째 과제는 “교회와 기독교 신자들이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정치는 항상 공적 생활의 조잡한 단순화이며, 공공선은 언제나 공적 생활의 정치적 표현 그 이상이다”(277). 헌터는 정치를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정치 만능주의’를 지속적으로 비판하면서 “정치는 세상에 관여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라고 말한다(278). 따라서 올바른 사회변화는 “정치를 비신화화하고 그것에 비현실적 기대를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278). 정치는 공동선을 향한 열망을 해소해 줄 수 없고, 다만 “이 세상의 삶을 좀 더 정당하고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뿐이다”(278).
‘공적인 것’이 정치라는 울타리로부터 벗어날 때,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예술, 교육, 환경보호, 시장, 구제에 참여할 기회가 생기고, 새로운 대안적 공간이 생겨나며, 정치권력을 상대화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는 먼저 상상력의 도전이고, 이어서 실천의 도전이다”(279).
생각할 문제들
1. 일단 헌터의 분석과 비판은 불편하고 아프다. 복음주의 사회운동에 대한 헌터의 비판은 전방위적이면서 너무나 날카로워 그의 비판으로부터 벗어날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미국 복음주의 사회참여에 대한 헌터의 현상적 비판은 두 가지다. 첫째는 그동안 복음주의가 근본주의의 오명을 벗어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어느 정도 지적인 성과를 이룬 것 같지만, 실상은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학계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차원에서도 복음주의는 지적담론에서 완전히 외면을 당했다. 둘째는 복음주의가 그동안 대중을 동원해서 하나의 정치적인 세력으로 집결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선거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평가는 완전히 잘못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실제로 정치적 의제를 형성하는데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시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것이 헌터의 평가이다. 하지만 헌터의 더 뼈아픈 비판은 그가 단순히 복음주의 사회운동의 신학과 행동을 비판하는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숨겨진 욕망과 정치적 심리까지 모두 들춰내 폭로해 버린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근본적인 동기는 다름 아닌 분노와 르상티망이었다는 것이다.
2. 헌터의 가장 탁월한 공헌은 후기현대사회에서 권력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다양한 담론들을 입체적으로 분석해 주고, 국가와 시민사회, 그리고 교회의 역학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었다는 것이다. 기독교 우파와 좌파, 그리고 신-재세례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분석해 보면 이들이 상상하는 사회가 보인다. 즉, 이들의 정치적 수사와 담론분석을 통해 이들의 사회적 상상을 유추해 내는 작업은 (신학이 제공할 수 없는) 사회학과 문화이론을 전공한 학자만이 제공할 수 있는 탁월한 혜안이다. 헌터는 분노와 르상티망이라는 분석 틀을 가지고 기독교 우파와 좌파의 사회참여 논리를 분석한다. 헌터는 이미 『문화전쟁: 미국을 정의하기 위한 투쟁』에서 현대 미국의 문화를 추동하고 있는 힘은 극단적인 정치적인 이념의 대립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과연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참여가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로만 설명될 수 있을까? 특별히 복음주의 좌파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변화에 대한 비전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력과 대안을 만들어 내는 구체적인 행동에 있는데, 이러한 긍정적인 상상력을 르상티망이라는 정치 심리학으로 모두 설명해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월리스에게는 우파에 대한 분노도 분명 존재하지만,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안적인 비전이 훨씬 강력하다.
3. 헌터는 그동안 복음주의자들이 후기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 ‘차이’와 ‘해체’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은 것에서 그 실패의 원인을 삼았는데 이는 아주 정확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분출되는 욕구들을 어떻게 대체하고 받아들어야 하는지 몰랐으며, 가치와 세계관이 해체되는 다원주의 사회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이들은 ‘권력’을 단순하게 끌어안던지,무시하기만 했을 뿐이다. 헌터는 우리가 권력이라는 자장 아래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창조적으로 활용하고 저항하고 전유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권력을 피하려고 하지도 말고, 권력을 극복하려다 실패하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그의 말 속에는 어떻게 해서든 복음과 세상의 긴장과 갈등을 끌어안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복음주의 사회운동이 환골탈퇴하기 위해서는 1) 기독교의 정체성을 미국의 정체성과 분리하는 것과 2) 공적인 것을 국가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헌터의 제안 또한 적절하다. 과도하게 정치적인 이슈와 문제로 사회참여를 유도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고 사회적 상상력의 빈곤을 초래할 것이다. 그럼에도 헌터가 그렇게 ‘권력’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과연 정치적인 문제들을 도외시한 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오늘날 사회참여를 둘러싼 다양한 이론적, 실천적 문제들은 대부분 정치적인 의제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정의와 평등의 문제를 제도적인 차원에서 다루든지, 아니면 광장에서 만들어지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다루든지, 이 모든 것들은 ‘정치적인 것’과 분리해서 다뤄질 수 없다. 정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문제를 풀 수도 없다.
4. 역시 복음주의 사회참여의 신학은 이론적으로 가난하고 상상력은 부재한다. 그동안 복음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신학과 유산으로부터 정치신학적 함의를 보다 정밀하고 예리하게 만들어 내질 못했다. 제임스 돕슨이나 짐 월리스와 같은 탁월한 대중 운동가는 있을지 모르지만 이론가는 없었다. 어쩌면 복음주의자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실천과 행동이 아니라 이론과 학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복음주의는 그동안 사회참여에 대한 진지하고도 치밀한 지적담론을 형성하지 못한 결과 어설픈 참여와 섣부른 행동을 확대 재생산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크 놀이 지적한 것처럼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4-1. 헌터가 복음주의 사회참여의 신학을 분석하면서 신칼빈주의나 공공신학을 제외한 것은 1) 이들의 신학이 자신의 이론적 분석 틀인 ‘르상티망’에 포섭되지 않았거나, 2) 이들의 신학에는 사회과학이나 정치학적인 논의가 풍성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연구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이론적인 영역에서는 복음주의 사회참여의 신학을 보다 깊이 있게 다루었다는 이들의 신학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5. 헌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지속적인 현존을 통한 임재와 참여(presence)의 신학을 도출하고, 구체적인 장소와 사람에게 집중함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부르심을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와 훈련을 강조한다. 그런데 헌터가 대안으로 제시한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다소 모호하고 애매한 부분이 없지 않다. 행동양식에 대한 규범이나 기준이 제시되지 않은 실천은 행위자에게 과도한 선택과 결단의 부담을 줄 위험이 있으며, 보편성을 부여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헌터는 1부와 2 부에서 복음주의 사회운동의 다양한 형식들을 사회학자의 예리한 시각으로 비판의 칼날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안을 제시하는 3부에서는 정교한 이론을 제시하기 보다는 두루뭉술한 신학적 설명으로 도약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회참여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나 신학적 윤리를 기대했던 사람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하지만 그가 제안하는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오히려 그러한 기대를 불식시키기 위한 전략적 대안이다. 어떠한 원리나 원칙에 맞춰서 삶의 양식과 행위의 당위성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저항하고, 매 순간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고 고뇌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실하게 공동체와 타자를 위해 책임있는 자아로 자신을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형성하는 길이다. 이 훈련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책임있는 정치적 주체로 탄생하는 것이고 결국에는 이러한 주체들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6. 헌터의 ‘신실한 현존’이라는 대안은 오늘날 어떤 모습의 신학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까? 본인은 본회퍼를 통해 구현될 수 있다고 본다. 본회퍼가 기존의 윤리학을 비판한 부분은 헌터의 분석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본회퍼는 기존의 기독교사회윤리를 비판하면서 기독교가 어떠한 프로그램과 세력형성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영향력을 끼치겠다는 모든 시도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한 사회참여와 변혁은 결국 승리주의로 귀결되며,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라 말했다. 본회퍼에게 기독교윤리의 핵심은 “현실(reality)과 그 현실을 만들어 가는 것(becoming real)”이다. 한마디로 기독교윤리의 과제는 하나님의 현실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현실에 참여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 즉 자신의 존재를 그리스도의 삶의 양식에 맞추는 것이라 말한다. 행위의 법칙이나 원칙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와 신실함을 통해 참여의 형식이 구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현실에 참여하는 것은 타자를 위한 책임을 수용하는 순간 구성된다고 본회퍼는 말한다. 이 순간에 윤리적 “상황”이 발생한다. 구체적인 타자와의 만남이 윤리적 책임의 원천이다. 본회퍼는 “자신의 특정한 시간과 자신의 특정한 공간”에서 기독교윤리를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 그래서 그에게 윤리학의 과제는 다름 아닌,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홈즈(Holmes)가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본회퍼의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는 바로 ‘윤리적인 행위가 발생하는 장소’이다. 본회퍼에게 윤리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이고, 그것은 “스스로 한계선을 설정하며, 자신을 청종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신실한 현존은 히틀러 암살이라는 자리로 그를 이끌었던 것이다.
[출처] 제임스 헌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현기연 공개세미나 |작성자 거북이
[제임스 헌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이주일/최경환
배우는 자의 기도/서재
2014-09-03 14:49:26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 저서,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관련 세미나 개최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 ©jamesdavisonhunter.com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로마로부터 핍박을 받던 초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 역사에는 '그들'이 있었다. '부, 권력, 문화 엘리트', '황제의 아내와 딸들', '부유하거나 교육을 많이 받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집안에서 태어난 교부', '이교도 철학에 뒤지지 않는 학문적 결과들을 생산해내는 학교들' 등이 바로 '그들'이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의 저서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와 관련해 현대기독연구원(원장 김동춘 박사, 이하 현기연)이 지난 25일 서울 창천동 하.나.의.교회에서 개최한 공개세미나를 위해 발제문을 낸 이주일 연구원(현기연 연구원)은 먼저 "헌터는 종교사회학과 문화사회학을 전공한 사회학자로서 '문화 전쟁', '복음주의'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종교와 사회 및 문화를 분석해 왔다"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는 제임스 헌터의 저작 중 가장 최근에(2010) 출판된 책"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 책의 핵심 주장을 요약하자면, 기존 미국 기독교 진영(기독교 우파, 기독교 좌파, 신재세례파)의 문화 변혁 전략은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잘못된 길이며 진정한 문화 변혁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며 "헌터에 따르면 기독교 진영의 문화 전략 이면에 전제된 문화에 대한 (사회과학적) 이론이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자료사진)이주일 연구원 ©현대기독연구원
이주일 연구원은 "헌터에 따르면 오늘날 기독교 일반의 상상력을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관점이 있는데, 이것은 '개인의 마음과 정신(hearts and minds)'(21p)이 가장 중요한 문화적 독립변수라는 견해다"며 "즉, '문화는 대다수의 사람이 보유하는 가치와 이런 가치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선택의 집적(accumulation)으로 구성된다'(22p)"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의 사례는 대표적이다"고 했다. 찰스 콜슨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 닉슨 대통령 시절에 특별 법률 고문으로 일하며 정치적으로 많은 권력을 누린 사람으로,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돼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 때 세 사람의 상원의원 헤트필더, 휴스, 퀴에 의원이 투옥된 찰스 콜슨은 위해 매일 시간을 정해 기도하고 감옥으로 그를 찾아가 위로하며 책을 전해 주기도 했다. 이들은 평소에도 콜슨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했던 사람들이다.
퀴에 의원은 콜슨을 대신해 옥살이를 해야겠다는 감동이 생겨, 특수법조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형을 치를 수 있다는 내용이 언급된 사실을 알아내 법원해 청원하기도 한다. 그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 사실을 들은 콜슨은 감동을 받고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는 남아있는 형 기간 동안 동료 죄수들에게 사랑을 베풀고자 기도하고, 죄수들이 제일 싫어하는 빨래도 자진해서 하자 처음에는 의심하던 이들도 하나 둘씩 감동을 받기 시작한다. 그래서 후에는 함께 기도모임도 시작하고 교제도 나누며, 콜슨은 평생 죄수들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한다.
▲찰스 콜슨의 저서 '거듭남'
형을 마치고 나온 콜슨은 '거듭남'(Born Again)이라는 책을 저술해 미국 사회에 큰 화제가 되고, 그의 결심대로 1976년에는 '교도소 선교회'를 조직해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계속해 후에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템플턴상을 받기도 한다.
이주일 연구원은 헌터의 의견을 정리하며 "콜슨은 세계관이 역사를 결정해 왔기 때문에 세계관의 변화와 실천이 문화를 변화시킨다고 주장했다"며 "따라서 세속화된 문화를 변화시키려면 평범한 개인들의 세계관이 먼저 바뀌어야 하며 그 결과 평범한 다수의 선택이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헌터는 이런 관점이 찰스 콜슨만이 아닌 가톨릭교회(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신교회(제임스 돕슨), 심지어 미국 계몽주의(토머스 제퍼슨)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한다"며 또 "이런 관점이 개신교만이 아닌 가톨릭에서도 발견된다"며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관점에 따라 전도에 집중한다. 왜냐하면, 전도는 영혼을 구원하여 개인을 변화시키고 결과적으로 문화를 변혁시키기 때문이다(제임스 보이스, 빌 브라이트, 빌리 그레이엄, 오스 기니스)"고 말했다.
그러나 "헌터는 개인의 마음과 정신을 강조하는 전략이 결과적으로 문화 변혁에 실패했다고 평가한다"며 "예컨대, 오늘날의 미국인 86-88%가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지만, 미국의 문화('사업과 문화, 법과 정부, 학문 세계, 대중오락'-40p)는 물질주의와 세속적인 경향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했다.
이주일 연구원은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가장 열정적인 종교생활을 해온 다수는 정통적이고 보수적인 그룹이지만 헌터에 따르면, 이들의 영향력은 지난 2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축소되어 왔으며 '특히 사상과 상상력의 영역'(41p)에서 더욱 그랬다"며 "반대로 유대인 공동체나 동성애 공동체는 각각 미국 인구의 3.5%, 3%를 넘기지 않았음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헌터는 실패의 진정한 원인이 독일 계몽주의를 거쳐 플라톤에까지 소급되는 '관념론'(idealism)적 문화이론을 전제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며 "관념론적 문화이론이란 역사를 움직이는 근본 요인을 관념으로 보는 이론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좌파와 우파, 신재세례파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과도하게 정치화된' 패러다임과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며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문화 변혁에 대한 (사회과학적) 이론을 올바르게 교정하고 정치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서 벗어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주일 연구원은 "헌터가 제시한 새로운 문화이론에 따르면 '전도, 정치, 사회 개혁, 창작'(79p) 등은 문화에 간접적인 영향만을 미칠 뿐이며, 문화의 중심에 있는 엘리트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그 영향이란 미미한 수준에 그치게 된다"며 "그래서 19-20세기의 금주 운동, 20세기 기독교 우파의 동성애, 낙태, 포르노의 합법화 저지 운동 등은 문화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실패했으며, 복음주의 부흥운동이 문화의 흐름을 바꾸지 못했고, 경건한 청교도들이 세운 학교들은 세속화의 중심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헌터가 제시한 새로운 문화이론은 역사적 증거를 통해 뒷받침된다"며 "기독교는 초기 3세기 동안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종교로 성장했는데, 이 성장은 유대교 디아스포라 회당과 그리스 로마 제국과 연결된 도시라는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이루어졌다. 교회의 지리적 중심은 제국의 중심인 로마였다"고 말했다.
또 "교회는 부, 권력, 문화 엘리트에 의존하여 성장했다"며 "황제의 아내와 딸들이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에 우호적이었고, 대부분의 교부들이 부유하거나 교육을 많이 받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교부는 상당한 수준의 지성인이었고, 학교를 설립하여 수준 높은 지적 교육을 진행하고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이 연구원은 전했다.
덧붙여 "2세기에 초기 교부들이 세운 학교들은 그리스 철학을 활용하여 이교도 철학에 뒤지지 않는 학문적 결과들을 생산했다. 그 결과 3세기에 당대 최고의 철학적 지성들은 기독교를 진지한 비판과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며 "300년대 후반에 이르면, 기독교의 주교들은 대체로 좋은 집안 출신이었고 로마제국의 교육제도인 파이데이아(paideia)를 경험한 철학자로서 로마 제국 내에서 존경을 받는 자였고 정치적 자율권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주교들은 파이데이아가 유지하고 있던 사회질서에 대한 사상과 이해관계를 거부하고 '가난한 자의 돌봄'이라는 새로운 사회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며 "점차 기독교의 주교들은 로마제국 내에서 기존의 권위를 능가하는 새로운 종류의 권위를 획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덧붙여 "헌터에 따르면, 고대 말에 기독교는 수도사와 수도원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리더십을 제시했다. 수도사는 '경건한 사람으로, 대중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 지위는 파이데이아와 그것이 섬기던 권력구조에 대한 직접적 도전이었다'(96p)"며 "수도원 운동의 특징으로는 첫째, 수도원은 학문의 중심지로서 서구 세계 최고의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는 중심지였다. 둘째, 수도원은 '복음화의 전진기지'(99p)였는데, 수사들은 평민보다 지방/지역 귀족들의 복음화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실상 유럽 주요 지역의 기독교화의 주된 요인 중 하나는 선교사들이 지주 귀족들의 물질적 자원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며 또 "주교나 수도원 원장들은 주로 부자나 귀족 출신이었는데,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용감한 성인들은 부자나 귀족 태생이었다'(101p)"고 소개했다.
이주일 연구원은 "헌터는 야만족이었던 유럽의 개종이 '교회가 지적 문화적 생산의 지도적 위치에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중첩되는 엘리트들의 자원들이 없었다면 결코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며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사회적으로 당대의 일급학자들이었으며 중세 스콜라주의의 대가들이었다. 루터와 칼뱅, 멜랑히톤과 베자 등은 당대 아카데미 속에 있던 신학자들, 교수들, 학생들의 넓은 네트워크 속에 있었으며, 특히 베자의 제네바 아카데미를 비롯한 다양한 개혁주의 아카데미와 대학이 스위스,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네덜란드에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국제적 네트워크는 종교개혁 사상의 급속한 확산을 가능하게 했다"고 했다.
또 "정치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은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수많은 귀족들로 권력이 분산되어 있어서 제국의 권력은 종교개혁자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며 "경제적으로 16세기에 팽창하던 국제교역은 새로운 대안적 상업 엘리트들을 출현시켰으며 이들에 의해 도시와 마을은 정치적 자율권과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덧붙여 "헌터는 1차 대각성 운동을 주도한 조지 휘트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웨슬리 형제 등 다양한 지도자들은 주로 상인과 전문계급 출신들이었고 명문대학(옥스퍼드, 에든버러, 예일, 하버드)에서 탁월한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대안적 엘리트 집단을 구성했고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특히, 휘트필드는 대각성 운동의 전역에서 활동하면서 핵심적 부흥 운동가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주된 역할을 했다"며 "결론적으로, 헌터는 진정한 문화 변동이 사상만이 아니라 사회적/제도적/경제적/문화적 동력의 복잡한 결합을 통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이주일 연구원은 "즉, 엘리트와 네트워크, 기술, 새로운 제도 등이 적절한 조건을 형성했을 때에 새로운 사상이 새로운 문화를 낳는다는 것이다. 대중적 호소와 포퓰리즘적 수준의 대안문화 수용은 결코 문화를 근원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며 "새롭게 생산된 문화적 생산물도 이런 여타의 사회적 조건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문화 변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고 했다.
이는 앤디 크라우치가 기존의 관념론적 문화모델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제시한 새로운 전략, 즉 '문화를 변혁시키기 위해 단순히 관념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적 인공물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도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의 저서 '기독교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그러면서 "헌터는 자신이 제시한 새로운 문화변동 모델을 기초로 현재 미국 기독교의 위치를 추적하는데 헌터에 따르면, 오늘날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미국 기독교가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주요한 영역은 정치다. 그러나 특징적인 것은, 이들의 활동 영역이 정치의 중심부(고위직 정치가, 판사, 활동가, 싱크탱크 등)가 아니라는 점이다"며 "이들은 주로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압력단체의 형태로 활동한다"고 했다.
덧붙여 "경제 영역에서의 사정은 완전히 다른데, 2차 세계대전 이후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백인 앵글로색슨 기독교도) 체제가 붕괴되면서 경제에 대한 개신교의 영향력은 사실상 상실되었다"며 "실제로 개인적/집단적 차원에서 다양한 성과를 내고 있는 여러 사례가 존재하지만, 주로 이들의 성공은 '미국 자본주의의 최정상이 아니라 중산층에서 일차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130p)"고 소개했다.
이주일 연구원은 "헌터에 따르면, 미국 기독교의 문화적 위치는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후원의 규모와 방향을 통해 우선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며 "표면적으로 신앙에 기초한 자선적 기부는 매우 활발해 미국의 자선적 기부의 거의 40%는 종교기관을 향한 것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런 기부들은 대체로 소액의 개인후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톨릭 재단과 복음주의 재단들의 경우 대부분의 기부금을 내부적 전도나 구제, 선교, 신학교 등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사실상 가톨릭과 복음주의 재단에 지성인, 예술가, 사회 혁신가를 위한 장학제도는 없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헌터는 문화 자본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기독교 신앙의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했다고 지적한다"며 "예컨대, 식민지 시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의 주요한 문화 생산 기관들(교회, 대학, 학교, 사회 개혁 운동, 대중문화, 고급 문화 등)은 WASP 체제의 주도적인 역할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다. 그러나 WASP의 쇠퇴와 함께 미국 내 기독교 신앙의 문화적 영향력도 급속히 감소해 WASP의 붕괴 이후, 주류 개신교 정체성의 독특성은 사실상 해체됐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현대 복음주의 기관들은 주로 19세기 중후반의 주류 개신교의 세속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했는데, 이들 내부의 학자들은 미국 사회의 주류 문화(미국의 지성 그룹)와 복음주의 내부의 대중(반지성주의 그룹)에게 이중적으로 소외받는 상황이다"며 "또한, 복음주의 기관들은 책과 잡지, 출판, 라디오, 텔레비전 등을 통해 다양한 문화 생산물을 쏟아내고 있지만, 이 생산품들은 주로 신자들의 내적 필요를 타겟으로 하며 미국 사회에서 주로 주변에 위치한 대중문화의 형태로 작동한다. 그 결과 이들의 문화적 활동은 '공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지적 논쟁의 핵심 중재자들에게 대체로 무시된다'(139p)"고 평한 헌터의 입장을 전했다.
이주일 연구원은 "'1960년대 이후 현대 기독교의 어떤 운동도 탁월한 방식으로 예술과 인문학, 학문 등을 창조하거나 공헌하여 조직해내지 못했다'"는 헌터의 주장을 소개하며 "결론적으로, 헌터는 20세기 말-21세기 초의 미국 기독교가 (복음주의, 개혁주의, 가톨릭을 모두 포함하여) 중산층의 신앙이었을 뿐이이라고 말한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오늘날 기독교 문화 자본의 활력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보다 회중석의 보통 사람들 속에, 문화 생산의 중심부보다 주변에, 특별한 것보다 대중적인 취향 속에, 지성인보다는 중급지식인들 속에, 그리고 이론적 상상적인 것보다 실천적인 것을 지향하는 것 속에 존재한다. 복음주의 내에는 '고급 문화'에 대한 취향이 약하고 일반적으로 번역(translation)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즉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142-143p)"는 헌터의 말을 인용했다.
그러면서 "결국 미국 기독교가 미국 사회 내에서 문화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는 '문화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역에 그들이 없었기 때문이다'(143p)"며 "헌터에 따르면, 사실상 정치 영역 이외에는 기독교인(지도자)들의 일치적 네트워크는 존재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지도력이 없다"고 정리했다.
이주일 연구원은 "헌터가 볼 때,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 하나는 인간의 보편적 중요성과 함께 '연약한 자들에 대한 돌봄'이다. 따라서 엘리트주의는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다"며 "따라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질문은 '탁월함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영향력과 특권의 위치에 있으면서, 엘리트주의의 덫에 걸리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149p)이다"고 말했다.
그는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의 긴장에 대한 질문 속에는 '권력'의 문제가 있고, 헌터는 현대 기독교의 권력에 대한 이해는 미국 기독교를 최악으로 이끌어가도록 만들었다고 강조한다"며 "그래서 헌터는 권력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적 이해로서 '신실한 현존'을 제안한다. 신실한 현존의 핵심적 내용은 새로운 사회 이론 모델을 전제로 문화 생산과 사회생활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는 대항적 지도자들의 네트워크(와 공동체)가 포함되는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정리했다
[추기] 발제문
제1부 기독교와 세계변혁
발제: 이주일 (현기연 연구원)
이 책의 저자인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는 종교사회학과 문화사회학을 전공한 사회학자로서 '문화 전쟁', '복음주의'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종교와 사회 및 문화를 분석해 왔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는 제임스 헌터의 저작 중 가장 최근에(2010) 출판된 책으로서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현황을 중심으로 기존의 문화 변혁 전략을 꼼꼼하게 반성하고 과거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을 요약하자면, 기존 미국 기독교 진영(기독교 우파, 기독교 좌파, 신재세례파)의 문화 변혁 전략은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잘못된 길이며 진정한 문화 변혁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헌터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신실한 현존'(faithful presence)이라고 명명한다. 그렇다면 왜 기존의 전략은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가? 헌터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 진영의 문화 전략 이면에 전제된 문화에 대한 (사회과학적) 이론이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1부).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좌파와 우파, 신재세례파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과도하게 정치화된' 패러다임과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2부).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문화 변혁에 대한 (사회과학적) 이론을 올바르게 교정하고 정치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서 벗어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기준을 충족시키는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신실한 현존’이다(3부).
이 발제문이 다루는 범위인 ‘제1부 기독교와 세계변혁’은 복음주의 사회참여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공통된 문화이론을 폭로하고 그것이 왜 작동할 수 없는 허위 이론인지를 고발한다. 1장에서는 기독교의 역사가 창조 명령(문화 명령)을 실현하려는 과정이었으나 그동안의 기독교 문화 변혁 전략은 성공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2장은 오늘날 문화 변혁에 대한 대중적 상상력을 지배하고 있는 이론이 무엇인지를 기독교 내 다양한 사례를 통해 드러낸다. 3장은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는 문화 이론이 실제로는 실패했다고 말하면서 실패의 원인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 관념론적 모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4장은 허위 모델이 아닌 실제로 문화의 변동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무엇인지를 11개의 명제를 통해 보여준다. 5장은 이런 대안적 문화 이론을 입증할 수 있는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기독교 역사 전체에 걸쳐서 제시하고 있다. 6장은 현대 미국 기독교가 정치, 경제, 문화의 영역에서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평가하면서, 현대 미국 기독교는 대안적 문화 이론에 따르면 문화 변혁을 성취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7장에서는 창조 명령이 보편적 명령이고 희생적 섬김이라는 본질을 지니고 있지만, 이 명령에 대한 해석은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으로 빠지기 쉽고 권력 오용의 유혹에 넘어갈 위험이 크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신실한 현존’이라는 대안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이 발제문은 우선 1부의 내용을 충실히 요약하여 소개하는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먼저 내용에 대한 요약문을 제시하고 난 후 헌터의 분석과 주장에 대한 평가와 토론할 만한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특히, 발제자는 문화에 대한 신칼빈주의적 이해와 기독교(복음주의) 좌파적 견해에 대체로 공감하는 입장에서 헌터의 주장을 평가하고자 한다.
1장 기독교 신앙과 세계변혁의 과제
헌터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은 창세기 2:15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창조적 노동을 통해 세계를 형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세상을 포기한 채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어내야 한다는 “구조선 신학”이 가끔씩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을 형성하는 신학과 신앙이 기독교회의 주된 흐름이었다.
창조 명령을 실행해 왔던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타락과 선이라는 이중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장로교, 성공회, 루터교, 가톨릭, 파라처치 기구 등 사실상 모든 기독교 전통은 세상에 대한 참여와 개선을 소명으로 여긴다. 세상에 참여하여 세상을 개선하려는 이들의 의도와 태도, 열정은 존중 받아 마땅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헌터는 이 책에서 가톨릭, 개신교, 진보와 온건 및 보수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기독교의 사회 참여 형태를 분석하고 진단한다. 헌터의 핵심적 주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문화와 문화적 변화에 대해 생각하는 지배적 방식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허울 좋은 사회과학과 실용신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다양한 전략들이 기초하고 있는 그 모델은 작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작동할 수도 없다.(19)
2장 문화: 공통된 견해
세계 변혁은 문화 변혁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곧 ‘문화’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문화 변혁의 전략을 구상한다. 헌터에 따르면, 오늘날 기독교 일반의 상상력을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관점이 있는데, 이것은 “개인의 마음과 정신(hearts and minds)”(21)이 가장 중요한 문화적 독립변수라는 견해다. 즉, “문화는 대다수의 사람이 보유하는 가치와 이런 가치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선택의 집적(accumulation)으로 구성된다.”(22)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의 사례는 대표적이다. 콜슨은 세계관이 역사를 결정해 왔기 때문에 세계관의 변화와 실천이 문화를 변화시킨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행위자는 개인이며, 개인의 선택을 낳는 핵심적 원인은 개인이 보유한 가치나 세계관이다. 예컨대, 콜슨은 현대의 상대주의와 위험한 이데올로기들이 발생한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세속적 진화론인 다윈주의를 지적한다. 따라서 세속화된 문화를 변화시키려면 평범한 개인들의 세계관이 먼저 바뀌어야 하며 그 결과 평범한 다수의 선택이 달라져야 한다. 헌터는 이런 관점이 찰스 콜슨만이 아닌 가톨릭교회(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신교회(제임스 돕슨), 심지어 미국 계몽주의(토머스 제퍼슨)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은 각 진영별로 독특한 문화변혁 전략을 수립하게 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관점에 따라 전도에 집중한다. 왜냐하면, 전도는 영혼을 구원하여 개인을 변화시키고 결과적으로 문화를 변혁시키기 때문이다(제임스 보이스, 빌 브라이트, 빌리 그레이엄, 오스 기니스). 헌터는 이런 관점이 개신교만이 아닌 가톨릭에서도 발견된다고 이야기한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테레사 수녀).
개인의 마음과 정신을 강조하는 관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치를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들에게 잘못된 정치나 잘못된 법은 관련된 행위자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이며, 행위자들의 잘못된 선택은 잘못된 행위자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다. 종교적 우파와 좌파,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압도적인 다수의 기독교인은 정치를 문화 변혁의 주된 수단으로 삼아왔다. 따라서 헌터는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교회의 지배적인 공적 증거는 정치적 증거였다고 말하는 것도 과장이 아니”라고 지적한다(31).
개인의 마음과 정신을 강조하는 관점은 마지막으로 시민과 국가, 시장을 매개하는 시민사회 영역을 갱신하고자 했다. 기독교인들의 자발적 사회 운동은 아버지 학교 운동, 결혼 운동, 성품 운동, 십대 금주 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헌터에 따르면, 이와 같은 전략들의 공통적 요소는 1)행위자를 개인으로 설정하고 2)문화 변혁은 가능하다고 보며 3)변화는 평범한 사람에게서 ‘아래로부터’ 시작된다는 관점이다.
3장 공통된 견해의 실패
헌터는 개인의 마음과 정신을 강조하는 전략이 결과적으로 문화 변혁에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예컨대, 오늘날의 미국인 86-88%가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지만, 미국의 문화(“사업과 문화, 법과 정부, 학문 세계, 대중오락”(40))는 물질주의와 세속적인 경향에 지배당하고 있다.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가장 열정적인 종교생활을 해온 다수는 정통적이고 보수적인 그룹이다. 그러나 헌터에 따르면, 이들의 영향력은 지난 2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축소되어 왔으며 "특히 사상과 상상력의 영역"(41)에서 더욱 그랬다. 반대로 유대인 공동체나 동성애 공동체는 각각 미국 인구의 3.5%, 3%를 넘기지 않았음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그렇다면 개인의 마음과 정신을 강조하는 기독교 진영의 전략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인가? 헌터에 따르면, 그 원인은 “그들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고, 충분히 결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며, 충분히 철저하게 혹은 기독교적으로 믿지 않기 때문”(45)이 결코 아니다. 헌터는 실패의 진정한 원인이 독일 계몽주의를 거쳐 플라톤에까지 소급되는 ‘관념론’(idealism)적 문화이론을 전제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관념론적 문화이론이란 역사를 움직이는 근본 요인을 관념으로 보는 이론이다. 미국 개신교는 관념론에 개인주의와 경건주의를 결합시킨 문화이론을 전제해 왔다. 미국 개신교적 문화 변혁 모델은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림1> 관념론적 문화모델
헌터에 따르면, 앤디 크라우치는 기존의 관념론적 문화모델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문화의 물질성을 인정하는 새로운 전략을 제시한다. 즉, 크라우치는 문화를 변혁시키기 위해 단순히 관념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적 인공물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크라우치는 문화 생산자들이 새로운 문화적 인공물을 많이 생산하면 새로운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개인들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는 개인들이 많아지고 그 총합은 문화 변혁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말한다. 헌터는 크라우치가 관념론을 적절하게 교정하려고 노력한 점은 칭찬할만 하지만 문화의 외적/가시적 측면에만 집중하고 문화 내적/비가시적 측면은 여전히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크라우치의 모델은 문화의 본질과 동력(dynamics)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크라우치의 문화상품 소비모델은 ‘시장 영합주의’(a market populism) 속에서 작동하는 또 다른 한계를 지니고 있다.
4장 문화와 문화 변혁에 대한 대안적 견해: 11개의 명제
제임스 헌터는 4장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문화 변동을 설명하는 대안적 문화 이론을 11가지 명제로 간략하게 제시한다. (1) 문화는 내러티브나 신화로 표현되는 규범적이고 지배적인 진리로 정의될 수 있다(“명제1: 문화는 일종의 진리 주장과 도덕적 의무 체계다”). 문화는 언어를 통해서 의식과 사회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2) 또한, 문화는 단기간에 생성/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고 지속되며 변화한다(“명제2: 문화는 역사의 산물이다”). (3) 문화는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는데, 이 상호작용은 사상과 제도 사이에, 개인과 제도간에 발생한다. 사상은 특정한 제도적/환경적 조건 안에서만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며, 개인이 제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제도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힘이 더 크다(“명제3: 문화는 본질적으로 변증법적이다”). (4) 문화는 상징 자본(symbolic capital)의 성격을 지니는데 상징 자본은 세대간, 개인간에 쉽게 전달될 수 없지만 돈처럼 축적이 가능해서 축적된 수준에 따라 권력과 영향력의 강도가 결정된다(“명제4: 문화는 자원이며, 그 자체로 권력이다”). (5) 따라서 자연스럽게 문화적 산물과 상징 자본은 계층화된다. 문화 상품과 관련된 개인, 네트워크, 제도는 주변이 아닌 중심에서 작동하게 된다(“명제5: 문화적 산물과 상징 자본은 '중심'과 '주변'이라는 엄격한 구조 속에 층화되어 있다”). (6) 문화는 개인의 천재성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통해 형성된 (새로운) 제도 안에서 형성되고 변화된다(“명제6: 문화는 네트워크 내에서 생성된다”). (7) 문화는 경제(시장 영역), 정치(정부), 학교(교육) 등 다른 제도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자율적이지 않다(“명제7: 문화는 자율적이지도, 충분히 일관적이지도 않다”). (8-9) 문화는 일반적으로 엘리트에 의해 중심에서 형성되어 주변으로 확산된다. 따라서 대중의 정치적 동원은 근본적인 문화 변혁을 일으키지 못한다. 실제로 문화 변동은 중심에서 약간 주변에 있는 엘리트들이 최고 중심에 있는 엘리트를 대체하면서 발생한다(“명제8: 문화는 가끔 아래에서 위로 변하지만, 대체로 위에서 아래로 변한다”, “명제9: 변화는 대개 명성 밖에 있는 엘리트에게서 시작된다”). (10) 따라서 변동 에너지의 극대화는 문화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 자원들이 중첩될 때 일어난다(“명제10: 세계변혁의 집중력은 엘리트들의 네트워크와 그들이 주도하는 제도들이 중첩될 때 극대화된다”). (11) 문화 변동은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권력 투쟁을 동반한다(“명제11: 문화는 변한다. 하지만 투쟁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헌터가 제시한 새로운 문화이론에 따르면, 문화는 행위자가 의도적으로 단기간에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전도, 정치, 사회 개혁, 창작”(79) 등은 문화에 간접적인 영향만을 미칠 뿐이며, 문화의 중심에 있는 엘리트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그 영향이란 미미한 수준에 그치게 된다. 그래서 19-20세기의 금주 운동, 20세기 기독교 우파의 동성애, 낙태, 포르노의 합법화 저지 운동 등은 문화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실패했으며, 복음주의 부흥운동이 문화의 흐름을 바꾸지 못했고, 경건한 청교도들이 세운 학교들은 세속화의 중심이 되었다.
5장 역사의 증거
헌터가 제시한 새로운 문화이론은 역사적 증거를 통해 뒷받침된다. 중요한 역사적 변동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한다. 기독교는 초기 3세기 동안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종교로 성장했는데, 이 성장은 유대교 디아스포라 회당과 그리스 로마 제국과 연결된 도시라는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이루어졌다. 교회의 지리적 중심은 제국의 중심인 로마였다. 교회는 부, 권력, 문화 엘리트에 의존하여 성장했다. 황제의 아내와 딸들이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에 우호적이었고, 대부분의 교부들이 부유하거나 교육을 많이 받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교부는 상당한 수준의 지성인이었고, 학교를 설립하여 수준 높은 지적 교육을 진행하고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2세기에 초기 교부들이 세운 학교들은 그리스 철학을 활용하여 이교도 철학에 뒤지지 않는 학문적 결과들을 생산했다. 그 결과 3세기에 당대 최고의 철학적 지성들은 기독교를 진지한 비판과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300년대 후반에 이르면, 기독교의 주교들은 대체로 좋은 집안 출신이었고 로마제국의 교육제도인 파이데이아(paideia)를 경험한 철학자로서 로마 제국 내에서 존경을 받는 자였고 정치적 자율권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주교들은 파이데이아가 유지하고 있던 사회질서에 대한 사상과 이해관계를 거부하고 ‘가난한 자의 돌봄’이라는 새로운 사회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점차 기독교의 주교들은 로마제국 내에서 기존의 권위를 능가하는 새로운 종류의 권위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헌터에 따르면, 고대 말에 기독교는 수도사와 수도원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리더십을 제시했다. 수도사는 “경건한 사람으로, 대중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 지위는 파이데이아와 그것이 섬기던 권력구조에 대한 직접적 도전이었다.”(96) 수도원 운동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수도원은 학문의 중심지로서 서구 세계 최고의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는 중심지였다. 둘째, 수도원은 “복음화의 전진기지”(99)였는데, 수사들은 평민보다 지방/지역 귀족들의 복음화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확산되었다. 사실상 유럽 주요 지역의 기독교화의 주된 요인 중 하나는 선교사들이 지주 귀족들의 물질적 자원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주교나 수도원 원장들은 주로 부자나 귀족 출신이었는데,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용감한 성인들은 부자나 귀족 태생이었다.”(101) 이 모든 역사적 과정 속에는 부정적 결과와 긍정적 결과가 혼합되어 있다. 그럼에도 헌터는 야만족이었던 유럽의 개종이 “교회가 지적 문화적 생산의 지도적 위치에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중첩되는 엘리트들의 자원들이 없었다면 결코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헌터는 16세기 종교개혁이 신학적/영적 요인을 제외한 사회/정치/경제적 측면들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정치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은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수많은 귀족들로 권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따라서 제국의 권력은 종교개혁자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 16세기에 팽창하던 국제교역은 새로운 대안적 상업 엘리트들을 출현시켰으며 이들에 의해 도시와 마을은 정치적 자율권과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은 당대의 일급학자들이었으며 중세 스콜라주의의 대가들이었다. 루터와 칼뱅, 멜랑히톤과 베자 등은 당대 아카데미 속에 있던 신학자들, 교수들, 학생들의 넓은 네트워크 속에 있었으며, 특히 베자의 제네바 아카데미를 비롯한 다양한 개혁주의 아카데미와 대학이 스위스,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네덜란드에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국제적 네트워크는 종교개혁 사상의 급속한 확산을 가능하게 했다. 헌터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지속적인 운동들이 이어졌으나, 이 운동들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문화를 변혁시키지는 못했다고 지적한다. 주변적이고 단기적인 성공에 머물렀음에도, 종교개혁 이후의 여러 운동들도 나름대로 문화 변동의 논리를 따랐다. 1차 대각성 운동을 주도한 조지 휘트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웨슬리 형제 등 다양한 지도자들은 주로 상인과 전문계급 출신들이었고 명문대학(옥스퍼드, 에든버러, 예일, 하버드)에서 탁월한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대안적 엘리트 집단을 구성했고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특히, 휘트필드는 대각성 운동의 전역에서 활동하면서 핵심적 부흥 운동가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주된 역할을 했다. 18세기 후반의 영국 노예제 폐지 운동은 주목할 만한 사례 중 하나다. 이 운동의 성공은 주로 윌리엄 윌버포스의 개인적이고 영웅적인 노력 때문으로 여겨지지만, 헌터는 그보다 더 복잡한 요인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헌터는 진정한 문화 변동이 사상만이 아니라 사회적/제도적/경제적/문화적 동력의 복잡한 결합을 통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즉, 엘리트와 네트워크, 기술, 새로운 제도 등이 적절한 조건을 형성했을 때에 새로운 사상이 새로운 문화를 낳는다는 것이다. 대중적 호소와 포퓰리즘적 수준의 대안문화 수용은 결코 문화를 근원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새롭게 생산된 문화적 생산물도 이런 여타의 사회적 조건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문화 변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특히, 정치는 새로운 문화적 의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가 탄생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6장 미국 기독교의 문화 경제
헌터는 자신이 제시한 새로운 문화변동 모델을 기초로 현재 미국 기독교의 위치를 추적한다. 헌터에 따르면, 오늘날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미국 기독교가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주요한 영역은 정치다. 특징적인 것은, 이들의 활동 영역이 정치의 중심부(고위직 정치가, 판사, 활동가, 싱크탱크 등)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주로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압력단체의 형태로 활동한다. 경제 영역에서의 사정은 완전히 다른데, 2차 세계대전 이후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백인 앵글로색슨 기독교도) 체제가 붕괴되면서 경제에 대한 개신교의 영향력은 사실상 상실되었다. 실제로 개인적/집단적 차원에서 다양한 성과를 내고 있는 여러 사례가 존재하지만, 주로 이들의 성공은 “미국 자본주의의 최정상이 아니라 중산층에서 일차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130) 헌터에 따르면, 미국 기독교의 문화적 위치는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후원의 규모와 방향을 통해 우선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신앙에 기초한 자선적 기부는 매우 활발하다. 예컨대, 미국의 자선적 기부의 거의 40%는 종교기관을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런 기부들은 대체로 소액의 개인후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톨릭 재단과 복음주의 재단들의 경우 대부분 대부분의 기부금을 내부적 전도나 구제, 선교, 신학교 등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사실상 가톨릭과 복음주의 재단에 지성인, 예술가, 사회 혁신가를 위한 장학제도는 없는 것이다. 헌터는 문화 자본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기독교 신앙의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식민지 시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의 주요한 문화 생산 기관들(교회, 대학, 학교, 사회 개혁 운동, 대중문화, 고급 문화 등)은 WASP 체제의 주도적인 역할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다. 그러나 WASP의 쇠퇴와 함께 미국 내 기독교 신앙의 문화적 영향력도 급속히 감소하게 된다. WASP의 붕괴 이후, 주류 개신교 정체성의 독특성은 사실상 해체되었고, 가톨릭교회는 다른 기독교 전통보다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지적이고 문화적인 생산 영역에서 통합되었음에도 주로 내부적인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영향을 미친다. 현대 복음주의 기관들은 주로 19세기 중후반의 주류 개신교의 세속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했는데, 이들 내부의 학자들은 미국 사회의 주류 문화(미국의 지성 그룹)와 복음주의 내부의 대중(반지성주의 그룹)에게 이중적으로 소외받는 상황이다. 또한, 복음주의 기관들은 책과 잡지, 출판, 라디오, 텔레비전 등을 통해 다양한 문화 생산물을 쏟아내고 있지만, 이 생산품들은 주로 신자들의 내적 필요를 타겟으로 하며 미국 사회에서 주로 주변에 위치하여 대중문화의 형태로 작동한다. 그 결과 이들의 문화적 활동은 “공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지적 논쟁의 핵심 중재자들에게 대체로 무시된다.”(139)
제도적인 영역에 대한 헌터의 비판은 더욱 단호하다. 한 마디로, “1960년대 이후 현대 기독교의 어떤 운동도 탁월한 방식으로 예술과 인문학, 학문 등을 창조하거나 공헌하여 조직해내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헌터는 20세기 말-21세기 초의 미국 기독교가 (복음주의, 개혁주의, 가톨릭을 모두 포함하여) 중산층의 신앙이었을 뿐이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 문화 자본의 활력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보다 회중석의 보통 사람들 속에, 문화 생산의 중심부보다 주변에, 특별한 것보다 대중적인 취향 속에, 지성인보다는 중급지식인들 속에, 그리고 이론적 상상적인 것보다 실천적인 것을 지향하는 것 속에 존재한다. 복음주의 내에는 “고급 문화”에 대한 취향이 약하고 일반적으로 번역(translation)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즉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142-143)
결국 미국 기독교가 미국 사회 내에서 문화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는 “문화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역에 그들이 없었기 때문이다.”(143) 헌터에 따르면, 사실상 정치 영역 이외에는 기독교인(지도자)들의 일치적 네트워크는 존재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지도력이 없다. 홈스쿨링이나 알파 같은 운동들도 근대세속문화에 저항할 수 있는 자원이 없는 방어적 행동에 불과하다.
7장 창조 명령에 대한 찬성과 반대
헌터는 7장에서 1부를 마무리하면서 창조 명령을 오늘날에 적용하기 위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려 한다.
헌터가 볼 때,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 하나는 인간의 보편적 중요성과 함께 ‘연약한 자들에 대한 돌봄’이다. 따라서 엘리트주의는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내세웠던 포퓰리즘은 일종의 ‘억압적 평등주의’로 변질되곤 했다. 쉽게 말해, “포퓰리즘이 일종의 문화적 평등주의가 될 때, 탁월해야 할 아무런 동기와 자극도 없어진다.”(149) 따라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탁월함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영향력과 특권의 위치에 있으면서, 엘리트주의의 덫에 걸리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149)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의 긴장에 대한 질문 속에는 '권력'의 문제가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사회참여적 활동에는 권력이 무엇이며 권력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있다. 헌터는 현대 기독교의 권력에 대한 이해는 미국 기독교를 최악으로 이끌어가도록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헌터는 권력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적 이해로서 '신실한 현존'을 제안한다. 신실한 현존의 구체적 내용은 3부에서 다뤄지지만, 그 핵심적 내용은 새로운 사회 이론 모델을 전제로 문화 생산과 사회생활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는 대항적 지도자들의 네트워크(와 공동체)가 포함되는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할 내용들
1. 헌터는 기독교의 기존 문화 변혁 전략이 포퓰리즘적으로 주변에 머무른 채로 파편화된 대중 운동과 정치적 권력 획득을 통해 아래에서 위로 문화를 변혁시키려 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국 기독교 사회참여 현황에 대한 헌터의 정교한 사회학적 분석은, 마치 마크 놀의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을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처럼 강렬하다. 마크 놀이 역사적 분석을 통해 복음주의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면, 제임스 헌터는 동일한 폭탄을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던진 것으로 보인다.
2. 종교와 문화 사회학자인 헌터의 공헌 중 하나는, 문화 변동의 메커니즘을 엄밀하게 제시하고 기존의 기독교 문화변혁 운동이 실제로 작동할 수 없었던 원인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해 낸 점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기독교 좌파와 우파, 신재세례파, 기독교 세계관 운동, 복음주의 등이 추구한 문화변혁 운동에서 사실상 문화 변동 이론 자체가 공허하게 비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일종의 관념론적 도식과 행위자를 철저하게 개인으로 설정한 문화 변혁론이 기존의 복음주의 사회 참여 방식을 지배해 왔다는 헌터의 지적은 피해가기 어려운 것 같다. 실제로 이런 관념론적 도식에 경건주의가 친화적이며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복음주의자치고 경건주의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2-1. 앤디 크라우치가 제시한 문화적 인공물 생산이라는 모델도 중심-주변이라는 계층화된 문화의 구조를 간과했기 때문에 효과가 없다는 지적도 예리하다. 복음주의의 문화적 생산은 대부분 '대중'을 향한 것이기에 주변에 머물고 말았으며 문화에 근원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마크 놀이 지적하듯, 미국(과 한국)의 창조과학 운동이 실제로 문화 변혁에 실패한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2. 헌터의 시각에서 보면, 복음주의 부흥운동에 문화적 영향력에 대한 평가도 다소 달라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17~8세기의 복음주의 운동을 촉발시켰던 대각성 운동의 여러 사회적 활동들은 윌버포스의 노예제 해방과 같은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문화의 중심으로 치고 들어가지 못했다. 실제로 복음주의 부흥운동이 사회의 근대적 세속화를 저지하지 못했던 이유가 이것일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복음주의 지성운동, 사회참여 활동을 어떤 식으로 기획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3. 헌터가 ‘지나친 정치화’가 복음주의 사회참여를 특징짓고 있다는 점은 (특히 미국 상황에서) 상당히 예리한 지적이다. 실제로 이 지적은 헌터에 대한 찰스 콜슨의 응답을 검토해 보더라도 확인된다. 콜슨은 헌터의 주장에 대해 ‘'정치가 헌터의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3-1. 개인적으로는 모든 문제를 정치적인 것으로 환원하려는 과도한 정치화의 한 가지 원인으로 ‘개인화’의 문제를 고려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근대화를 통해 철저한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정치 이외에도 기능해 오던 완층지대와 연대적 삶의 방식이 사라지고 파편화/개별화되면서 갈등의 조정자로 ‘국가’만이 남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4. 창조 명령과 관련하여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의 한계를 함께 지적한 내용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과거에 전개된 고지론이냐 미답지론(저지대론)논쟁은 이 비판을 고려할 때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다시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고지론이라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경계는 기독교적으로 정당하지만, 자칫 포퓰리즘에 머무를 수 있는 저지대론적 이해도 대안적 모델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5. 기존 복음주의 정치 참여의 세 진영에 대한 헌터의 비판은 매우 예리하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과연 기독교 우파와 좌파, 신재세례파 진영이 ‘동일한’ 강도로 지양되어야 하는가라는 점이다. 헌터가 말한 ‘다원주의’와 ‘언어에 대한 신뢰 상실’이라는 지점, 그리고 문화 변동의 동학을 고려할 때 실질적으로 행위자가 역사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신학적으로는 창조와 구속, 자연과 은총,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구분을 고려해 볼 때) 세속화의 진행을 막고 한 사회를 ‘기독교화’하겠다는 우파의 목표와 전략은 그 자체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불필요하고 해로운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기독교 좌파가 기독교 우파와 단순하게 ‘정치 과잉에 기대고 있다’라고만 평가받을 수는 없지 않을까? 왜냐하면, 기독교 좌파의 목표는 ‘공공선’에 대한 증진, ‘다원주의’에 대한 긍정, 주류 정치경제체제에 대한 반성 및 저항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재세례파 진영도 이점에서 다소 공통점이 있고 게다가 ‘콘스탄틴주의’에 대한 민감성은 그 어느 진영보다 강하기도 하지만, 사실 기독교 좌파가 기독교 국가를 세우는 일을 추구하지 않으며 다원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어느 정도 콘스탄틴주의에 대한 극복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헌터의 비판은 분명 일리가 있으나, 기독교 우파, 좌파, 재세례파 진영을 모두 동일한 수준에서 비난하고 폐기처분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 좌파의 모델이 (정치적 과잉의 문제를 다소 해결한다면) 비교적 신실한 현존, 샬롬의 추구에 가깝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예컨대, 짐 월리스가 재세례파 전통과 기독교 좌파의 주장을 결합시킨 것도 하나의 시사점이 크다고 보인다.
6. 또한, 한국의 상황에서 보자면, 중요한 이슈마다 ‘정치’의 문제가 걸려있다. 분명, 복음주의 사회참여가 곧 정치참여로 수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호 사건, 용산참사, 쌍용차사건, 위안부, 제주해군기지, 밀양 송전탑, 국정원 정치개입 등등의 문제들을 생각해 볼 때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는 주체가 ‘국가’인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헌터가 미국 복음주의권에 가했던 칼날을 그대로 한국에 적용할 수 있을까? 오히려 한국 복음주의의 다수(우파)는 국가-기득권 세력에 철저히 ‘동화’되어 있으며, 이것은 재세례파처럼 철저히 교회로 물러나서 대조사회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해결되지 않고, 국가를 철저히 견제할 수 있는 기본적인 체계와 문화를 확립하는 선결 조건이 필요하지 않을까? 과연 한국 복음주의자들에게 정치에서는 다소 물러나서 정치가 아닌 공공 영역의 문제에 집중하라고만 쉽게 말할 수 있을까?(이런 점에서 276쪽에서 첫번째 과제를 제시한 헌터의 지적은 유의미하다.)
7. 동의할 수 있는 결론은 정치 과잉에서 ‘공공성’으로의 방향전환이다. 정치로 환원될 수 없는 공공 영역에 대한 관심과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를 벗어난 참여가 필요하다. 그것을 신실한 현존이라고 한다면, 큰 그림에서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신학’과 ‘목회적 실천(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8. 헌터의 기본적인 신학적 입장은 사실상 전통적인 개혁파와 신칼빈주의적 입장에 가깝다. 1) 창조 명령에 대한 긍정, 2) 창조-타락-구속에 대한 이해, 3) 일반 은총, 4) 정치와 공공 영역의 구분(신칼빈주의) 6) 샬롬에 대한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관점을 공유.
9. 기독교 좌파의 경우 '르상티망', 즉 우파에 대한 적대감이 그 출발점이라는 지적만큼은 겸손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말 그대로, 적대감이 아니라 샬롬이라는 긍정적 이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10. 이번 교황 방한에 대한 한국 복음주의권의 대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 복음주의는 다원주의적 현실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 말로 누군가를 비판하기보다(종교적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오히려 존중과 관용, 그리고 윤리적 삶의 열매를 통해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선결 과제가 한국 기독교 앞에 놓여 있다.
제2부 권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최경환 (현기연 연구원)
문제는 권력이다
헌터에 따르면 그동안 사회참여와 변혁을 외치던 많은 기독교인들은 정작 그들이 변화시키고자 했던 대상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설령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 그리고 그런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다. 즉, 문제 설정과 진단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고, 결국 그런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자리에 접근하질 못했다. 그렇다면 복음주의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몰랐기에 헌터로부터 이런 혹독한 비판을 받은 걸까? 그것은 바로 ‘권력의 역동성’에 대한 민감함이다. 인간관계와 사회의 구조에 편재하는 권력을 진지하게 대면하고 성찰하지 않았던 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의 열정과 헌신에도 불과하고 사회변화에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 헌터의 비판이다.
그동안 사회과학에서는 다양한 구성원들을 하나의 사회로 결집시키고 모을 수 있는 근거와 요소가 무엇인지 밝히려했다. 근대 국가는 ‘국민주권’을 통해 권력의 합법성을 획득했고 국민들은 이를 승인하고 인정했다. 국가는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양도받음으로 폭력과 강제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가졌지만 동시에 그 권력은 언제나 국민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전복 당할 수 있는 것이다(158). 따라서 현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그 권력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투쟁을 주의 깊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권력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들이 과도하게 국가라는 단일한 권력집단에게 집중됨으로 “국가는 점차로 공적 행복의 화신”이 되었고, “정치의 언어가 우리의 공통 생활, 공적 목적,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 이해의 더 많은 부분”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영역이 되어 버렸다. 즉, 오늘날 우리들이 사는 사회는 국가의 후원을 받고, 국가의 권력을 통하지 않고서는 공적인 이슈들과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모든 문제를 국가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연스럽게 정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다양한 삶의 영역들이 축소되고 환원되고 말았다. 문제는 이렇게 과도하게 삶의 모든 영역들이 정치화됨으로 “정당정치의 언어가 우리가 타자를 이해하는 방식을 형성했다”는 사실이다(162). 모든 문제를 정치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결국 모든 이념들을 정치적 의미로 해석하게 만들었고 이는 ‘정체성의 정치’로 이어졌다: “정체성은 이념과 너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당파적 참여가 그들의 도덕적 의미를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한 개인이 선한지 나쁜지를 판단하는 척도 말이다. 이것이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얼굴이다”(163).
또한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동일시됨으로 정치적인 것을 배제하고서는 공적인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나 상상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동일시는 “공적 생활의 복잡성과 풍부함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와 더불어 공통된 문제와 이슈를 다루는 대안적 방법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축소시켰다”(164). 정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자발적인 시민들의 공적인 문화를 빼앗아 버렸고 정치적 당파에 기대어 타자를 평가하려는 권력의지를 만들었다. 대화와 협력, 타협과 설득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공론장을 통해 민주적 공론을 만들기 보다는 “법률적, 정치적 수단을 통해 타자에게 우리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훨씬 쉬운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165).
니체가 기독교인들의 노예의지를 비꼬면서 만들어 낸 ‘르상티망’(ressentiment)은 “정치적 행동의 동기로서 분노, 시기, 증오, 격노, 보복”과 같은 원한감정을 뜻하는 용어로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참여 동기를 설명하는 탁원한 정치 심리학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을 역사의 희생자이자 고난 받는 자로 규정함으로 상처의 서사를 만들어 낸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주도권을 악의 세력에 빼앗김으로 자신들이 누렸던 혜택을 박탈당하고, 그로 인한 상처가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이 되었다. 그리고 “더 많은 상처에 대한 두려움을 부추기는 것은 집단 내에서 연대감을 생성하고, 그 집단이 행동하도록 동원하는 전략이 된다”(166). 반대자의 위협을 과장하거나 극대화할수록 집단의 정체성과 연대는 더욱 견고해지고, 공격력은 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를 포기하는 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한 것만큼이나 심각한 것이 된다. 헌터는 이러한 원한감정이 그동안 복음주의 사회운동을 추동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고 분석한다. 세속화와 상대방에 대한 원한감정을 기초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사회참여의 신학적 정당성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들의 사회운동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2. 기독교 우파: 공포와 분노를 행동으로
기독교 우파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상상력의 원천은 ‘위협’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많은 신념과 원칙들이 현재 근본적으로 도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결혼, 부모 됨, 가족의 권위와 자율성과 같은 가치들이 도전을 받고 있다. 또한 “전통과 성경에 대한 도전뿐 아니라 진리 개념 자체에 대한 도전”에도 직면해 있다(172). 한 때는 이들이 중요시했던 가치들이 미국 사회에서 존중을 받고, 사회 전반에 걸쳐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던 시절이 있었다. 기독교 우파는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현재화하려 한다. 즉 자신들의 찬란했던 과거를 빼앗겼다는 섭섭함과 향수, 거기에서 발현되는 근심과 불평이 사회참여의 중요한 동력이 된 것이다.
기독교 우파의 과거에 대한 향수는 미국의 건국 신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에게 “미국의 건국은 현재를 측정하는 참조점이다”(173). 미국은 애초에 기독교 국가로 설립되었고 건국이념은 다분히 기독교적인 가치와 원리에 입각한 기독교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학교, 자선단체, 병원 같은 공화국 초기의 제도들은 내용은 그렇지 않지만 특성상 기독교적이었고, 그것의 도덕도 기독교적이었다”(173). 결국 이들은 민족탄생의 서사를 자신들이 선점해서 차용하려 했고, 미국 역사에서 자신들의 찬란한 영웅서사를 계속 재생산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공적 영역에서 종교는 노예제 폐지와 금주 운동, 그리고 시민권 운동을 일으키는 원초적 원동력이었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낙태, 동성애 반대 운동 속에서 현재로 이어진다. 즉, 가장 ‘미국적인 것’의 오리지날은 기독교 우파가 지니고 있으며, 자신들을 통해 그 영광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신앙이 미국의 위대함에 영적, 도덕적 토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미국은 믿음의 백성의 것”이다(176).
이렇게 기독교 우파의 관점으로 보면 현재 미국은 분명히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들이 볼 때, 현재 미국이 도덕적으로 쇠퇴하고 있는 이유는 “종교적인 모든 것에 대한 점증하는 적대감” 때문이며, “미국의 세속화” 때문이다(177). 그 결과 “이 나라는 세속적 자유주의자들과 인본주의자들에 의해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나라로 변질되고 말았다. … [우리 것과] 전혀 다른 의제를 가진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자부심과 위엄, 명예를 강탈해버렸다”(177) 이들은 “세속적 자유주의가 사법부를 장학한 것을 자치 정부가 지금까지 직면했던 최대의 공격이라고 불렀다”(178).
기독교 우파가 세속문화에 빼앗긴 자기들의 주도권과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사용하는 정치적 수사는 고난의 이야기를 확대재생산 함으로 동정심과 적대감을 동시에 유발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고 비난받는 해군 군목의 이야기, 졸업식장에서 학생대표가 주기도문을 암송함으로 감수해야 했던 야유와 비난, 동성애자에게 회원권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학생단체 지위를 상실한 단체 이야기 같은 것이다. 이들에게는 “국가와 문화, 신앙에 대한 피해의식이 대단하다”(182). 이들에게 오늘날의 위기는 단순히 신앙의 위기일 뿐 아니라 국가적 특성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 제임스 돕슨(James Dobson)은 이러한 공포와 분노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죽음을 향한 행진, 즉 낙태, 안락사, 난잡한 동성애와 이성애, 마약의 합법화를 대표한다고 선언한다. 오직 두 가지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정말 분명하다.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사회적 해체의 길을 선택하느냐(183).
상황의 심각성은 결국 진지한 결단을 촉구한다. 이제는 일어나서 ‘아니오’라고 말할 때이고, ‘이제 그만 더 이상 가만있지 않겠다’라고 말할 시간이다. 만약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 그 결과 이들은 2004년을 정점으로 정치 세력을 최대치로 끌어 모을 수 있었다.
기독교 우파가 참여를 호소하는 방법은 기도와 행동 두 가지이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이다”(184). 남침례교회는 “정치적 무관심은 죄”라는 말하면서 이들은 신자들로서 민주적 정치 과정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담은 공무원이 더 많이 나오고, 의회와 행정부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자리를 차지하고 그곳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188). 기독교 우파에 있는 모든 집단의 소원은 공공생활을 그들의 방식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들의 의도는 “미국 가치를 탈환하는 것”, “새로운 남북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191). 그래서 이들은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 통치해야 한다. 승리해야 한다. 그만큼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정치에 거는 희망은 놀라운 정도다. 그들은 “국가를 치료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겠다는 열망은 위협과 협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돕슨은 때때로 좌절이 너무 깊어져서 보수적인 사회 이슈들을 법적 우선순위에서 더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면 공화당을 붕괴시키겠다고 위협했다”(193). 결국 기독교 우파는 자신들의 운명을 미국의 운명과 동일시하고 앞으로의 생존도 함께 할 것이라 믿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기독교 우파가 자신의 힘을 가장 과시했던 2004년 대선 이후 이들의 세력은 급격하게 쇠퇴했다. 마치 20세기 초 원숭이 재판으로 알려진 스코프 재판에서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재판에서는 이겼지만 결국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듯이, 그들의 열망이 부시 대통령을 당선시켰지만, 미국 역사에서 기독교 우파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점차 고조되었다. 헌터가 예리하게 지적하듯이, “이 운동이 그 당시 미국인들에게는 강력한 반성직주의를,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젊은 신자들에게는 심각한 반감을 초래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젊은 복음주의자들 안에 정치적 좌경화 현상이 발생하였고, 2008년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를 대통력으로 열정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197).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스스로 정치에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정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가 더 큰 문제라는 인식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3. 기독교 좌파: 미워하면서 닮아가기
기독교 좌파라고 우파와 다르지 않다. 이들도 자기들 나름의 신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이 구사하는 신화는 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에서 도출하는 정의에 대한 갈망이다. 이들은 20세기 중반까지 가시성과 영향력 면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라든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에 영향을 받은 다양한 형태의 해방운동으로 드러난 이들의 사회참여는 1980년대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들의 교세는 점점 기울었고, 그들의 의제가 민주주의를 통해 어느 정도 성취됨으로 그 세력도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부활은 뜻밖에도 주류 교단이나 대표적인 기독교 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진보적인 복음주의자들을 통해 일어났다. 기독교 우파와 비교해 볼 때, 이들의 응집력이나 조직력은 미약한 수준이지만 지난 몇 년간 큰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기독교 우파가 세속화를 미국의 가장 큰 해악이라고 진단한 반면, 기독교 좌파는 빈곤과 불평등을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해악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해악을 조장하고 부추겼던 세력은 다름 아닌 기독교 우파의 지도자, 조직, 이념, 이슈였다고 분석한다. 당연히 기독교 좌파는 이들에 대한 적대감을 통해 운동의 동력을 이끌어 냈다. 기독교 우파가 미국의 세속화와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 분개하면서 내뱉는 공격적 언사만큼이나 기독교 좌파도 이에 못지않게 분노에 찬 수사를 구사한다. 또한 기독교 우파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자신들이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난 것은 안타까워하며, “우파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아”와야 한다고 말한다(219). 이들은 “극단주의자들로부터 기독교 어휘를 개선하고 기독교의 도덕과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고(219), 궁극적으로는 정치를 통해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기독교 좌파와 우파는 서로 방향을 다르지만 이들이 구사하는 수사는 동일하다. 문제와 진단은 다르다 해도 권력을 다시 장악하는 것이 해결방식이라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헌터는 진보적인 복음주의자로 잘 알려진 짐 월리스(Jim Wallis)의 정치 연설을 분석하면서 월리스 역시 “기독교 우파 안에서 발견되는 기본적 권력 의지와 다르지 않다”고 꼬집는다(220). 월리스는 대중 동원 능력이 탁월했고, 어떻게 하면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이상은 저항할 수 없는 바람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운동”에 있었고, 그 변화를 야기하는 틀은 정확하게 국가였다(222). 따라서 그에게 “정의와 평화의 목적을 성취하는 지배적 도구는 정치다”(222).
성서를 현실 정치에 적용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오히려 기독교 우파보다 더 직설적이다. 예를 들어, “미가 4:1-4을 미국 해외정책의 표준으로 인용”한다든가, “이사야 65:20-25을 연방예산 측정의 기준으로 사용한다”(224). 월리스는 현재 미국이 마치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신정국가라도 되는냥 고대 이스라엘의 율법과 예언을 미국 민주주의에 그대로 적용하려 한다. 따라서 결국에는 이들 역시 제국을 열망하는 것이라는 헌터의 비판은 날카롭다.
우파와 좌파 모두 의로운 제국을 열망한다. 따라서 그가 폴웰과 로버트슨에 대해 국가 권력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의제를 실행하려 한다고 비난할 때, 그와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다른 기독교인들도 똑같은 기준에 의해 심판받게 되어 있다(225).
결국 기독교 좌파는 “정치와 정치적 성향의 사회 운동을 통해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것”,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혼합하는 것”,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것”, “신학과 국가적 이해와 정체성을 혼동하는 것”에서 기독교 우파와 너무나 닮았다(225).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권력이기 때문에 이들의 “현실정치는 공화당이 미국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오랫동안 기독교의 보수적 유권자들을 이용한 것과 동일하다”(227).
4. 신-재세례파
기독교 좌파와 신-재세례파 사이에서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시장경제의 인간적, 환경적 결과들에 대해 공통의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든가, “중산층으로서 문화 양식을 공유하고 있는 경향”이 그것이다(229). 이는 월리스가 초기에 신-재세례파로부터 많은 신학적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의 차이점은 “그들의 국가관에서 발견된다. 전자는 강력한 국가를 원하고 국가에 압력을 가해 법과 정책 분야에서 자신의 뜻을 실현하고 싶어한다. 반면에 후자는 국가의 구조 행동, 권력 사용에 대해 기본적으로 불신하면서 국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230).
신-재세례파가 자신들의 신화로 삼고 있는 것은 “참되고 진정한 신약 기독교와 초대 교회의 이상”이다(230). 세계변혁에 대한 이들의 신념은 예수의 생애와 교회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들의 르상티망은 교회사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콘스탄티누스주의이다. “콘스탄티누스적 오류는 미국 기독교가 자본주의 논리와 관행을 자기 자신과 자신이 섬기려는 세상에 해를 끼칠 정도로 전적,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왔다”는 것이고 “미국 기독교가 그리스도와 함께, 자유민주주의와 소비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 모두에게 이중적 충성”을 바쳤다는 것이다(236). 이러한 세상에 대한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정체성과 사명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다”(237). 예수는 새로운 인류의 모델로서 강제와 폭력을 거절하고 당대의 통치 권력과 대안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그는 타락한 정사와 권세를 정복했고, 교회는 그것을 선포하고 실천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교회는 “하나의 대안적 공동체로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보여주어야 한다(240). 이들에게 비폭력에 대한 헌신은 “제자도의 근본적인 징표이자, 복음의 핵심적인 윤리적 가르침이다”(241). 이들을 평화주의자라 부르는 것은 바로 정사와 권세에 맞서 싸우는 무기가 비폭력이며, ‘힘없음’(powerlessness)이 그리스도와 그의 모범을 따르는 중요한 표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재세례파의 사회비판 속에는 기독교적 계시와 세상의 지혜, 교회와 지배 문화 사이의 강력한 대립이 내재해 있다. 교회와 세상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관점 속에는 “신학과 교회를 진정으로 탈세속적(postsecular) 자기이해로 인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담겨있다(244). 세상은 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타자이자 나그네로 존재해야 한다. 교회의 소명은 예배 공동체가 되는 것이고, 윤리는 다름 아닌 “예수를 따르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245).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탈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정치적 실천이라고 말한다. “교회의 시민권이 참된 시민권이며”, 교회는 “세상에서 대안적 공간과 대안적 실천을 창조한다”(245). 그럼으로 요더에 따르면 “기독교 공동체는 … 하나의 정치적 실재다”(247). 참된 기독교는 “십자가의 정치”(politics of cross)로 드러나야 한다.
헌터는 이러한 신-재세례파의 신앙적 동기 속에는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날카로운 이원론에 영감을 불어 넣는 것은 하나님이 교회에게 원하시는 모든 것이 되고 싶은 열망, 그리고 교회가 세속성에 오염되거나 그런 부패에 연루될 수 있다는 공포다”(245). 이러한 공포는 세상에 대한 저항을 넘어서 분노, 비난, 부정의 메시지로 뒤덮여졌다는 것이 헌터의 분석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살펴보면, 저항의 대상이나 비판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지만, 정작 대안을 제시하는 언어들은 상당히 신학적이고 종말론적이며 추상적인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는 기독교 우파나 좌파보다 그 대안이 훨씬 더 맹목적이고 허망한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이들의 신앙적 원천은 경건주의와 완전주의에 닿아 있고, 대체로 분리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신-재세례파에서는 자신들이 기존의 정치언어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오늘날 정치를 둘러싼 권력관계와 정치언어를 너무 단순하게 봤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불러 올 수 있다. 즉 이들이 사용하는 신학언어는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지 못하고 단순히 예수의 이야기만을 반복하기 때문에 정치언어와 의제에 그들의 논리가 잠식당할 위험에 놓이게 된다.
5. 권력 인 듯, 권력 아닌, 권력 같은 기독교
헌터가 보기에 그동안 기독교는 사회 속에서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을 너무 쉽게 봤다. 권력은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고, 인간 경험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인간은 근본적으로 ‘호모 포텐스’(Homo Potens)라 불릴 수 있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비대칭적으로 “모든 사회적 실재에 스며있기 때문에” 인간은 권력을 “회피하거나 초월할 수 없다”(269). “권력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고 상호작용적이며, 역동적으로 공유되고 전염성이 있다”(268). 이 권력은 모든 종류의 사회집단을 통해, 그리고 우리 자신의 주관성을 통해 모든 제도 속에 존재한다.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권력 분배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권력은 어느 곳에나 편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학은 이러한 ‘권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일단 신-재세례파는 “권력에 대한 이해를 정치적 혹은 경제적 권력에 한정함으로써 사람들이 권력을 포기하거나 ‘힘없게’ 됨을 상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272). 이들은 ‘교제’, ‘공동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자발적인 사회를 구성하고자 하는데, 이는 교회도 하나의 제도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제도는 본질상 권력을 소유하고 행사”하기 때문이다(273). 교회는 (그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다양한 상징과 형식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교회가 사람들로 구성된 인간적 제도인 한, 세상에서 작동하는 권력 구조에 참여하고 권력을 행사할 것이다”(274). 그래서 “교회와 세상 사이에 날카로운 선을 그으려는 모든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274). 사람들이 모인 곳은 어쩔 수 없이 그곳이 교회라 하더라도 세상과 공유하는 힘의 영역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헌터는 “권력 문제와 관련해서 ‘힘없음’은 일종의 허구”라고 날카롭게 비판한다(274).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권력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고, 창조 명령은 이러한 권력을 사용하라는 명령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권력은 부패하고 손상되었다. 이 사이에서 오는 갈등은 “신실한 기독교적 증거가 역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이”에서, “사회적 현실과 복음의 영적, 윤리적 요구 사이”에서, 그리고 “사회의 도덕성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항상 긴장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274). 이 긴장과 갈등을 서로 다른 이상을 가지고 ‘기독교화’하려고 했던 것이 세 가지 입장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타자들을 참된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의심”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만들었다(275).
하지만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말라’는 부름은 현 세상의 무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충실히 거하라는 부름이다. 그리고 그 충실함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긴장을 인정하고, (실패는 불가피하고 언제든지 용서할 수 있으며, 우리 노력을 일신하고 신성하게 만들기 위해 성령께서 항상 역사하신다고 믿으며) 그 긴장 속에 거하는 것이다(275).
헌터가 제시하는 기독교와 권력의 긴장은 다음의 세 가지를 인정하고 끌어안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적 실천과 세상 권력 간의 내재적이고 끝없이 복잡한 결합, 세상에서 충실하게 활동하는 교회 속의 불가피한 내재적 긴장, 하나님 나라 복음에 순종하고 증거하려는 신실한 기독교인에게도 실패는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는 것”(276). 이러한 인정과 승인이 패배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자들이 권력 및 권세와 더 나은 관계를 발견하기 위해 계속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가능한 한 많은 은혜와 용서를 통해 일한다는 뜻이다”(276).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헌터는 복음주의 사회운동의 근본적인 문제를 모든 사회문제를 정치로 환원해서 해결하려는 태도와 사회적 상상력의 빈곤으로 봤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가 세상에서 탈정치적(postpolitical) 운동에 힘써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교회의 정체성의 미국의 정체성과 분리하는 것이다. 그동안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의 미래를 특정한 정치 신화, 이념, 의제의 성공과 연결”시켜서 설명하려 했다. 우파와 좌파 모두 자신들이 진정한 ‘미국적인 것’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 신앙을 미국의 정치문화와 결합시켰다. 하지만 “이제는 분리할 때다”(277). 둘째 과제는 “교회와 기독교 신자들이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정치는 항상 공적 생활의 조잡한 단순화이며, 공공선은 언제나 공적 생활의 정치적 표현 그 이상이다”(277). 헌터는 정치를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정치 만능주의’를 지속적으로 비판하면서 “정치는 세상에 관여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라고 말한다(278). 따라서 올바른 사회변화는 “정치를 비신화화하고 그것에 비현실적 기대를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278). 정치는 공동선을 향한 열망을 해소해 줄 수 없고, 다만 “이 세상의 삶을 좀 더 정당하고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뿐이다”(278).
‘공적인 것’이 정치라는 울타리로부터 벗어날 때,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예술, 교육, 환경보호, 시장, 구제에 참여할 기회가 생기고, 새로운 대안적 공간이 생겨나며, 정치권력을 상대화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는 먼저 상상력의 도전이고, 이어서 실천의 도전이다”(279).
생각할 문제들
1. 일단 헌터의 분석과 비판은 불편하고 아프다. 복음주의 사회운동에 대한 헌터의 비판은 전방위적이면서 너무나 날카로워 그의 비판으로부터 벗어날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미국 복음주의 사회참여에 대한 헌터의 현상적 비판은 두 가지다. 첫째는 그동안 복음주의가 근본주의의 오명을 벗어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어느 정도 지적인 성과를 이룬 것 같지만, 실상은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학계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차원에서도 복음주의는 지적담론에서 완전히 외면을 당했다. 둘째는 복음주의가 그동안 대중을 동원해서 하나의 정치적인 세력으로 집결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선거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평가는 완전히 잘못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실제로 정치적 의제를 형성하는데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시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것이 헌터의 평가이다. 하지만 헌터의 더 뼈아픈 비판은 그가 단순히 복음주의 사회운동의 신학과 행동을 비판하는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숨겨진 욕망과 정치적 심리까지 모두 들춰내 폭로해 버린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근본적인 동기는 다름 아닌 분노와 르상티망이었다는 것이다.
2. 헌터의 가장 탁월한 공헌은 후기현대사회에서 권력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다양한 담론들을 입체적으로 분석해 주고, 국가와 시민사회, 그리고 교회의 역학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었다는 것이다. 기독교 우파와 좌파, 그리고 신-재세례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분석해 보면 이들이 상상하는 사회가 보인다. 즉, 이들의 정치적 수사와 담론분석을 통해 이들의 사회적 상상을 유추해 내는 작업은 (신학이 제공할 수 없는) 사회학과 문화이론을 전공한 학자만이 제공할 수 있는 탁월한 혜안이다. 헌터는 분노와 르상티망이라는 분석 틀을 가지고 기독교 우파와 좌파의 사회참여 논리를 분석한다. 헌터는 이미 『문화전쟁: 미국을 정의하기 위한 투쟁』에서 현대 미국의 문화를 추동하고 있는 힘은 극단적인 정치적인 이념의 대립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과연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참여가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로만 설명될 수 있을까? 특별히 복음주의 좌파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변화에 대한 비전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력과 대안을 만들어 내는 구체적인 행동에 있는데, 이러한 긍정적인 상상력을 르상티망이라는 정치 심리학으로 모두 설명해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월리스에게는 우파에 대한 분노도 분명 존재하지만,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안적인 비전이 훨씬 강력하다.
3. 헌터는 그동안 복음주의자들이 후기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 ‘차이’와 ‘해체’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은 것에서 그 실패의 원인을 삼았는데 이는 아주 정확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분출되는 욕구들을 어떻게 대체하고 받아들어야 하는지 몰랐으며, 가치와 세계관이 해체되는 다원주의 사회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이들은 ‘권력’을 단순하게 끌어안던지,무시하기만 했을 뿐이다. 헌터는 우리가 권력이라는 자장 아래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창조적으로 활용하고 저항하고 전유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권력을 피하려고 하지도 말고, 권력을 극복하려다 실패하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그의 말 속에는 어떻게 해서든 복음과 세상의 긴장과 갈등을 끌어안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복음주의 사회운동이 환골탈퇴하기 위해서는 1) 기독교의 정체성을 미국의 정체성과 분리하는 것과 2) 공적인 것을 국가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헌터의 제안 또한 적절하다. 과도하게 정치적인 이슈와 문제로 사회참여를 유도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고 사회적 상상력의 빈곤을 초래할 것이다. 그럼에도 헌터가 그렇게 ‘권력’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과연 정치적인 문제들을 도외시한 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오늘날 사회참여를 둘러싼 다양한 이론적, 실천적 문제들은 대부분 정치적인 의제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정의와 평등의 문제를 제도적인 차원에서 다루든지, 아니면 광장에서 만들어지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다루든지, 이 모든 것들은 ‘정치적인 것’과 분리해서 다뤄질 수 없다. 정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문제를 풀 수도 없다.
4. 역시 복음주의 사회참여의 신학은 이론적으로 가난하고 상상력은 부재한다. 그동안 복음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신학과 유산으로부터 정치신학적 함의를 보다 정밀하고 예리하게 만들어 내질 못했다. 제임스 돕슨이나 짐 월리스와 같은 탁월한 대중 운동가는 있을지 모르지만 이론가는 없었다. 어쩌면 복음주의자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실천과 행동이 아니라 이론과 학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복음주의는 그동안 사회참여에 대한 진지하고도 치밀한 지적담론을 형성하지 못한 결과 어설픈 참여와 섣부른 행동을 확대 재생산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크 놀이 지적한 것처럼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4-1. 헌터가 복음주의 사회참여의 신학을 분석하면서 신칼빈주의나 공공신학을 제외한 것은 1) 이들의 신학이 자신의 이론적 분석 틀인 ‘르상티망’에 포섭되지 않았거나, 2) 이들의 신학에는 사회과학이나 정치학적인 논의가 풍성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연구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이론적인 영역에서는 복음주의 사회참여의 신학을 보다 깊이 있게 다루었다는 이들의 신학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5. 헌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지속적인 현존을 통한 임재와 참여(presence)의 신학을 도출하고, 구체적인 장소와 사람에게 집중함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부르심을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와 훈련을 강조한다. 그런데 헌터가 대안으로 제시한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다소 모호하고 애매한 부분이 없지 않다. 행동양식에 대한 규범이나 기준이 제시되지 않은 실천은 행위자에게 과도한 선택과 결단의 부담을 줄 위험이 있으며, 보편성을 부여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헌터는 1부와 2 부에서 복음주의 사회운동의 다양한 형식들을 사회학자의 예리한 시각으로 비판의 칼날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안을 제시하는 3부에서는 정교한 이론을 제시하기 보다는 두루뭉술한 신학적 설명으로 도약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회참여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나 신학적 윤리를 기대했던 사람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하지만 그가 제안하는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오히려 그러한 기대를 불식시키기 위한 전략적 대안이다. 어떠한 원리나 원칙에 맞춰서 삶의 양식과 행위의 당위성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저항하고, 매 순간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고 고뇌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실하게 공동체와 타자를 위해 책임있는 자아로 자신을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형성하는 길이다. 이 훈련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책임있는 정치적 주체로 탄생하는 것이고 결국에는 이러한 주체들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6. 헌터의 ‘신실한 현존’이라는 대안은 오늘날 어떤 모습의 신학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까? 본인은 본회퍼를 통해 구현될 수 있다고 본다. 본회퍼가 기존의 윤리학을 비판한 부분은 헌터의 분석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본회퍼는 기존의 기독교사회윤리를 비판하면서 기독교가 어떠한 프로그램과 세력형성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영향력을 끼치겠다는 모든 시도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한 사회참여와 변혁은 결국 승리주의로 귀결되며,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라 말했다. 본회퍼에게 기독교윤리의 핵심은 “현실(reality)과 그 현실을 만들어 가는 것(becoming real)”이다. 한마디로 기독교윤리의 과제는 하나님의 현실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현실에 참여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 즉 자신의 존재를 그리스도의 삶의 양식에 맞추는 것이라 말한다. 행위의 법칙이나 원칙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와 신실함을 통해 참여의 형식이 구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현실에 참여하는 것은 타자를 위한 책임을 수용하는 순간 구성된다고 본회퍼는 말한다. 이 순간에 윤리적 “상황”이 발생한다. 구체적인 타자와의 만남이 윤리적 책임의 원천이다. 본회퍼는 “자신의 특정한 시간과 자신의 특정한 공간”에서 기독교윤리를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 그래서 그에게 윤리학의 과제는 다름 아닌,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홈즈(Holmes)가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본회퍼의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는 바로 ‘윤리적인 행위가 발생하는 장소’이다. 본회퍼에게 윤리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이고, 그것은 “스스로 한계선을 설정하며, 자신을 청종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신실한 현존은 히틀러 암살이라는 자리로 그를 이끌었던 것이다.
제임스 헌터의 신실한 현존
2016-05-20 19:10:43
신실함의 부르심 그리고 도전
헌터는 신실함에 대한 부르심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및 증거와 교제하며 성실하게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일상의 다양하고 타협적인 현실위에 떠다니는 추상적 경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신실함이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사회적, 경제적 정체적 문화적 세력 안에서 자신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헌터는 후기현대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도전은 차이와 해체의 도전이라고 지적하면서 이 도전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실함에 대한 맥락이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헌터는 차이의 도전은 현대다원주의 현실에서 기독교인이 어떻게 다른 세계에 대해 생각하고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라고 말한다. 헌터는 후기현대사회에서 다원주의의 발생은 거대하게 증가해서 인간 역사의 그 어느때보다 더 빈번하고 강력하게 대두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헌터는 이제 기독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고 다원주의는 현대사회질서의 근본적이고 영구적인 특징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헌터는 현대 다원주의는 세상을 감지하고 이해하는 방법의 다중성을 대표할 뿐 아니라 그 감지를 신뢰할 수 있게 만드는 타당성 구조의 다중성도 대표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문화체계의 수가 많고 다양하다는 것은 특정한 신앙체계를 지지하는 사회조건이 열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헌터는 이렇게 다원주의 사회에서 차이는 신실함을 어렵게 만들고 불신실함을 거의 자연스럽게 만드는 사회조건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신실함에 대한 두 번째의 강력한 도전은 해체의 도전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해체란 실재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견해들의 파괴를 가리킨다. 그는 근대세계는 본질상 인간적 담론과 세계의 현실을 연결하는 신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 결과 단어들의 객관화되고 공유된 의미가 붕괴됨으로써 단어들이 의미하는 실재에 대한 확신이 무너진다고 말한다. 헌터는 더 큰 문제는 단어의 의미를 결정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호소할 권위가 없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기의와 기표 사이의 계약이 파괴된 문화에서 단어의 의미는 비어있게 되고 해체의 힘들이 우리는부재의 장소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헌터는 이런 차이와 해체의 도전이 새로운 것은 아니고 그것들은 모두 현대세계의 오래된 붙박이들이지만, 문제는 이런 도전들이 후기현대의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강력하게 우리의 의식구조를 형성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이렇게 오늘날 신실함이 추구되는 맥락은 이전에 우리가 경험했던 것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신실한 현존을 위해서는 그 도전의 거대함과 복잡함을 인정하고 그 결과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헌터는 그동안 신실함이 개념화되고 추구되는 지배적 모델들인, 기독교 우파의 방어모델, 좌파의 적합성 모델 그리고 신재세례파의 정결모델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그것들이 후기현대사회의 차이와 해체의 도전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한다. 헌터는 차이와 해체의 도전은 믿을 수 있는 능력, 즉 일관되게 철저하게 효과적으로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킨다고 말하면서 이런 참여 패러다임들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신실함을 이해하거나 추구하기에는 충분하고 적절한 방법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형성의 비전(a vision of formation)
헌터가 이 지점에서 제기하는 질문은 이렇다. 이렇게 본질상 신앙의 신뢰성과 일관성을 약화시키는 환경에서 우리는 어떻게 진정으로 기독교적일 수 있는가? 기독교가 다른 문화들 가운데 하나의 문화일 뿐인 다원주의 세상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성경적인 세상 참여 방식인가? 헌터는 그동안의 수많은 다양한 기독교 봉사활동들과 운동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실함을 증거하는 가능성의 아주 적은 부분만을 대표한다고 말한다. 헌터는 교회가 우리 시대의 신실함에 대한 도전을 이해하고 이런 때을 위해 교인들을 훈련시키는 형성의 비전(a vision of formation)을 제공해주지 못했고, 오히려 너무나 많은 에너지와 자원을 정치에 집중하여 부차적인 문제들과 잘못된 해법에 관심을 고정시켰다고 말한다. 헌터는 형성은 삶의 총체성 속에서 신실함의 양성을 지향하는 것인데 성경의 대위임령이 바로 형성의 과제라고 말한다. 헌터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문제는 그들의 믿음이 약하거나 부적절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형성의 비전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들이 이런 시대에 신실함의 요구에 반응하여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도록 모든 지혜로 형성되지 못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헌터는 형성에 모양과 표현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문화의 공동체이며 공동체의 씨줄과 날줄에 뿌리 내린 건강한 문화없이 형성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헌터는 이 문화 공동체의 비전은 샬롬의 비전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셨고 언제가 그분이 회복하실 우주적인 샬롬, 곧 새하늘과 새땅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샬롬을 이룩하는데 자신과 협력하도록 부르신다고 말한다. 헌터는 이 하나님의 샬롬을 하나님나라와 동일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바로 이 샬롬을 이룬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땅을 이룩하실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자신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실천하도록 부르신다고 하면서 그것은 구 체적으로 기독교인이 기독교 공동체 안과 밖의 모든 사람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헌터는 기독교 공동체와 세상 간에는 긴장이 존재하며 이런 긴장은 불가피하고 해결할 수 없지만 그 긴장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교회와 신자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기독교인들은 긍정과 대립의 변증법 속에서 세상과 관계를 맺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로 이 긴장을 설명한다. 그는 이 변증법의 첫번째는 긍정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세상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대한 긍정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그는 세상에 대한 긍정은 문화와 문화형성이 하나님 앞에서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타락으로 그것이 무효화되지 않았다는 인식에 기초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헌터는 분명히 개혁주의 노선의 일반은총 사상을 수용하고 있다고 보인다. 헌터는 세상을 형성하는 작업은 하나님이 창조시에 인류에게 명하신 작업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며 이런 작업은 신앙 공동체 밖의 사람들과 공통적으로 추구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헌터가 일반은총의 영역을 중립적 공간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헌터는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나라 규범에 어느정도 순종하는가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헌터는 기독교 공동체와 타자들 사이에 공통된 명문과 접촉점이 있지만 그런 공통점에 대한 세심한 분별이 요청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문화형성 활동이 하나님 앞에서 타당성을 갖지만 그것이 본질상 구속적이거나 구원과 관련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헌터는 문화는 하나님나라가 될 수 없으며 문화속에서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하나님나라를 성취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나라를 영원 속에 설립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주권의 행사를 통해 종말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헌터는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문화사역을 하나님나라 건설로 간주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문화를 장악해야 한다는 콘스탄타누스적 전제라고 비판한다. 헌터는 기독교인들이 자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장차 도래할 샬롬을 선포해야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나라를 성취하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다만 그것은 도래하는 하나님나라 가치들을 구현하는 것이며 도래하는 그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참여하는 것은 그 참여가 세상을 개선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복종의 현현이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의 완수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이 지점에서 헌터는 긍정은 변증법의 두 번째 단계 즉 대립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헌터는 타락의 총체성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는 이 대립은 현재의 역사에서 모든 사회조직들은 종말론적 희망의 패러디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독교인들이 인정한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헌터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긍정할 것이 아무리 많아도 교회는 언제나 저항 공동체라고 말한다. 하지만 헌터는 이런 대립은 부정적이거나 허무주적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현대와 현대의 지배적 제도들에 대립적 태도를 견지하지만 그것을 위한 대안적 비전과 방향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헌터는 형성의 과제를 다시금 강조하면서 교회의 중심 사역은 예배와 말씀 선포뿐 아니라 형성이라고 말한다. 그는 형성은 현재의 세계 질서 속에서 하나님나라의 대안적 현실을 신실하게 살아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신자들이 자신의 삶 자체를 신실한 소명에 적합하게 드리도록 가르치고 훈련하고 격려하는 과업이라고 말한다. 물론 헌터는 이런 형성의 사명이 쉬운 일이 아님을 인정하면서 그것은 지혜, 분별, 근면 그리고 그 모든 것 안에서 성령의 역동적 인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신실한 현존의 신학
헌터는 후기현대사회에서 물리적 현존과 장소는 이전만큼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이것은 우리가 현실로 간주하는 것이 해체되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런 변화는 믿음의 핵심적 의미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그러나 헌터는 창조 이야기에서 말씀과 세상 간의 다른 관계를 발견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이 존재함으로써 말과 현실간에 신뢰가 헝성되며 거기에는 해체가 전혀없다는 것이다. 헌터는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의 신뢰성이 가장 극적으로 역사 속에 드러난 것이 성육신 사건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의 특정한 장소와 시간 속에서 재연되며 성육신보다 이것이 더 분명한 경우는 없다고 말한다, 헌터는 이것이 바로 신실한 현존의 신학의 토대라고 말한다. 헌터는 성육신적 방식이 차이와 해체의 도전에 대한 유일하게 적절한 대응이라고 주장한다. 헌터는 하나니의 성품과 말씀의 핵심은 그분이 온전하고 신실하게 우리에게 임재하신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하나님의 신실한 임재에는 그분의 찾으심, 그분의 동일시하심, 그분의 희생적 사랑을 통한 생명주심이란 헌신의 표현이 있다고 말한다. 헌터는 이러한 추구, 동일화, 희생적 사랑을 통한 생명의 제공이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임재가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은 적극적이고 의도적이며 언약적인 성질의 헌신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임재에서 신실한 현존의 신학을 도출하면서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우리 주변의 세계에 참여하고 헌신하고 약속하는 신학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이 신학의 개념은 지극히 단순하지만 그 내적 함의는 교회의 문화참여에 대한 지배적 패러다임에 도전한다고 말한다. 헌터는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실하게 현존하시며, 그분에 대한 우리의 소명이 우리도 그분에게 신실하게 현존하는 것임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헌터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신실하게 현존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분에게 신실하게 현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헌터는 이것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거나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시길 기대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분이 하나님이시고 우리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신실한 현존은 신앙 공동체 안과 밖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신실하게 존재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헌터는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모방하여 모든 사람을 향해 서로를 찾고, 서로 동일시하며, 희생적 사랑을 통해 번영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헌터는 또한 신실한 현존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일에 신실하게 참여하고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헌터는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맡은 일에 전심을 다할 뿐 아니라 그것을 정말 잘하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헌터는 세상에서 신실한 현존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 헌신한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력을 성육신적 방법으로 모든 사람의 번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헌터는 기독교의 기존 문화참여 패러다임에 반대하여 성육신에서 상징된 다른 토대와 다른 종류의 헌신을 주장한다. 그는 성육신은 말과 세상이 하나가 되는 대안적 길을 대표하며 이것이 차이와 해체의 도전에 유일하게 적합하게 대응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샬롬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육신이 되고 우리를 통해 모든 사람들을 향해 우리의 일들 속에서 우리가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역 속에서 실천되는 것이 바로 신실한 현존의 신학이라고 말한다.
신실한 현존의 신학 실천하기
헌터는 신실한 현존의 실천이 일상에서 어떤 모습을 취할까?라는 질문을 제기하며 리더십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정도의 차이는 크지만 리더십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다양한 영향력이라고 말하면서 리더십을 대위임령과 관련시키고 있다. 그는 대위임령을 지리학적이 아닌 사회구조적으로 해석하면서 교회는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들 속으로 사람들을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헌터는 교회는 다양한 분야에 있는 사람들을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 신학적 자원들을 제공하며 그런 분야로 부름받은 재능있는 청년들에게 멘토링과 재정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헌터는 교회가 이런 분야들로 사람들을 파송하지 않는다면 대위임령의 사명을 완수할 수 없다고 말한다. 헌터는 하나님의 샬롬은 모든 삶과 경험의 영역들로 확장되기 때문에 대위임령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다양한 리더십을 발휘할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불기피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헌터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신실한 현존의 추구는 사회적 결과를 만들어 내며, 이것을 격려하고 인정하는 것은 엘리트적이지 않고 오히려 대위임령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헌터는 권력남용의 위험과 지위가 갖는 유해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현대교회가 신실하게 현존해야 할 세상의 엄연한 현실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가장 명백한 위험은 리더십의 위치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엘리트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려는 유혹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지위를 사용해 타자들을 배제하거나 자기 권력과 이익을 확장하려는 유혹이다. 헌터는 기독교인들이 리더십을 발휘하고 신실한 현존을 추구하는 것과 성취의 사회적 결과 사이에, 다시 말하면 리더십과 엘리트주의 사이에 불가피한 역설에 직면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헌터는 이 역설을 피해갈 방법은 없으며 교회는 이 역설에 직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헌터는 바울의 예를 들면서 엘리트주의가 리더십에 고유한 것은 아니며 예수의 리더십을 본받는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한다. 헌터는 신실한 현존을 실천하는 것은 삶과 활동의 모든 영역과 수준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사람의 풍성함, 온전함, 번영을 지향하는 헌신을 대표하므로 엘리트주의와 그것이 내포하는 지배와는 정반대라고 말한다. 헌터는 신실한 현존은 헌신과 약속의 신학이라고 말하면서 헌신은 언약 즉 우리가 맺은 관계,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드러나는 강력한 의무로서 그것은 우리 주변 세계의 번영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헌터는 신실한 현존의 실천은 근본적으로 언약적 관계와 제도를 헝성하며 그것의 목적은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샬롬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신실한 현존의 근저에서 언약적 헌신은 믿음, 소망, 사랑을 양성하고 후기현대세계의 문화적 토대인 세속성과 허무주의에 급진적으로 도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헌터는 그 도전은 단순한 부정이 이나라 그 안에서 새로운 창조가 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이런 신실한 현존의 도전은 일의 세계에서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 혹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가 단순한 계약에서 언약으로 나아가는 관점의 재개념화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헌터는 이런 재개념화는 근본적으로 지본주의 시장관계의 확립된 개념들을 바꿀 것이며 역으로 작업환경도 철저히 인간화할 것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신실한 현존은 예술과 문학에서 미학적 탁월함과 예술품 생산에 대한 헌신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건축과 도시계획에서는 안전과 사회성, 인간적 삶에 가장 깊은 필요에 반응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뉴스미디어와 학계에서는 지식을 권력추구의 도구로 만드는 일이나 지식의 가치를 시장가치로 측정하는 일에 저항하고 새로은 지식창조의 공간을 만드는 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헌터는 신실한 현존의 실천은 언약적인 관계와 제도를 만들고 나아가 이것들은 의미와 목적과 소속감을 육성하는 공간을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세계에 고유한 도구화에 저항한다고 말한다. 헌터는 모든 세대에 걸쳐 리더십의 과제는 우리의 개인 삶과 관계 속에서 천국의 질서를 구현하는 것이며 따라서 신실한 현존의 실천은 우리가 지닌 관계, 우리가 수행하는 과제,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실현도록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이것이 모든 기독교인이 개인적으로 짊어져야 할 부담이기도 하지만 제도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책임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헌터는 각각의 직업이나 소명에서 지도자들은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다양한 자원들을 공통된 명문 속에 동원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헌터는 그렇게 할때 이런 노력은 기독교 공동체의 이익이 아니라 모두의 선을 위해 하나님의 샬롬을 구현할 구조들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신실한 현존에서 이런 제도적 측면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결정적이라고 강조하면서 일상생활의 물질적 조건과 사회제도를 다루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현재의 기독교적 삶의 증거를 치명적으로 붕괴시키는 개인주의와 관념론으로 끝나고 만나고 경고한다. 그래서 헌터는 공동체적 제도적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회는 예배와 형성의 공간으로서 이런 네트워크의 적극적 구성을 위한 촉매일 뿐 아니라 중첩된 네트워크 중에서 결합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헌터는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새로운 목회나 새로운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광범위한 환경과 영역에서 인간 번영의 비전을 실현하는 방법들에 대한 창조적 생각과 상상력 그리고 근면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진실로 삶의 모든 영역과 중요한 모든 질서에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지적, 경제적, 경영적 자원들이 교회와 기독교인들 안에 있으며 이것은 협력과 네트워크, 상호의존, 제도형성의 가능성을의미한다고 말한다. 헌터는 공공선이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에 반대하며 타인의 번영을 지향하는 기됵교인들의 삶은 타인과 삶의 모든 영역에 있는 공동체와 도시를 위해 건설적이고 점증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도시 광장을 향해
헌터는 기독교인들은 문화들이 일반인들의 마음과 생각에 있는 축적된 가치와 믿음으로부터 형성된다고 믿고 그래서 충분한 수의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변화시켜 종극에는 사회질서속에 그들이 신봉하는 가치와 믿음을 반영하려고 해왔다고 말한다. 헌터는 바로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자주 사회변화를 복음전도, 시만적 갱신, 민주적 정치행동을 통해 추구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그러나 헌터는 역사와 사회학의 증거는 이런 종류의 문화와 문화변혁 이론이 틀렸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 근거한 모든 운동은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데 실패했다고 말한다. 헌터는 가장 심오한 수준의 문화변혁은 문화생산의 최고 중심에 위치한 제도들 안에서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엘리트들의 긴밀한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헌터는 세계변혁에 대한 모든 이야기와 그것에 동기를 부여하는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공동체는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지위에 좀처럼 근접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헌터는 기독교인들이 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해도 그 결과는 대체로 치명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의 세계변혁에는 권력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들의 권력이론이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헌터는 기독교 우파든 좌파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종국에 정치적 지배로 귀결되는 것 외에는 다른 식으로 권력을 상상할 수 없으며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현 시대의 정신에 순응해서 권력을 정치권력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헌터는 대부분의 현대인처럼 기독교인들도 공적생활과 사적생활의 모든 측면을 정치화했다고 비판한다. 헌터는 기독교 우파와 좌파 그리고 신재세례파의 정치신학들이 현대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작동하지만 그 패러다임들은 모두 후기현대사회의 차이와 해체라는 근본적이고 심각한 도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헌터는 차이와 해체라는 도전에 구식 모델들은 충분히 대응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헌터는 방어, 적합성, 정결 패러다임에 반대하며 신실한 현존이라는 참여 모델을 제안한다. 헌터는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치시킨 환경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실행하고 타인을 위해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라고 요청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이것이 교회의 비전이며 모든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수행하는 과제와 직업 속에서 감당해야 항 부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헌터는 샬롬의 실행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속한 제도 속으로 그리고 삶의 모든 영역 내에서 새로운 제도를 형성하는 것으로까지 확장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헌터는 이런 견해의 전제는 기독교인이 타인과 세상을 공유하고 세상의 번영에 기여해야 한다는 인식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그것은 공적 영역은 자울적이고 방해받지 않는 다양한 개인으로 구성된다는 현대의 지배적인 자유주의 개념에 반대하여 공적 다양성은 다중적 전통과 공동체의 의해 집단적으로 정의된다는 인식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새로운 도시광장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다원주의적 세계에서 인간의 번영이라는 최고의 이상과 실천에 헌신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위해서 헌터는 교회는 콘스탄티누스적 유혹을 극복해야 하며 기독교는 문화구원, 하나님나라 확장, 세계변혁에 대한 일체의담론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헌터는 정복과 지배를 의미하는 그런 언어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헌터는 탈콘스탄티누스적 참여로 이동하는 것이 이상적이며, 그것은 지배를 추구하지 않고 지배에 반대하여 자신의 정체성과 증언을 정의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적 유혹과 더불어 그것을 옹호하는 권력추구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헌터는 기독교인들은 법, 정책, 정치적 동원을 통해 신앙을 표현하려고 시도하기 보다 잠시 침묵하며 샬롬의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공적으로 실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헌터는 교회가 세상과의 긍정과 대립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수용될 수 있는 좋은 것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도시광장의 추구가 우리 시대에 대단히 비인간적인 경향과 운동에 대해 그리고 정사와 권세가 이런 파괴적 경향에 영감을 불어넣고 제도화하고 합법화하는 방식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비판하면서 전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헌터는 교구나 지역교회의 중심성을 긍정하는 가운데 세상과의 이런 긴장을 초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교회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신 선물인 이유는 그것이 공동체요 제도라는 사실 때문이며 제도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총합보다 더 큰 하나의 사회적 실재라고 말한다. 그래서 헌터는 오직 강력한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현대세계에 만연한 곤경들을 견딜 수 있는 관계적 수단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헌터는 이것이 형성의 과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헌터는 하나의 공동체요 제도로서 교회는 하나의 타당성 구조이며 또한 대중문화가 제공한 것에 대안적 형성을 제공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유일한 구조라고 말한다. 그러나 헌터는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세상에 의를 확립하거나 선한 가치를 창조하고 정의를 확보하며 평화를 이루는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헌터는 물론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열정적으로 추구하고 돌보아야 할 일이지만 이것은 모두 하나님니라는 일차적 선과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서 그분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과업에 비교하면 이차적이라고 말한다. 헌터는 정사와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는 억압적 제도들에 대한 승리였으며 이것은 현실은 있는 그대로이고 모든 것은 본래 있어야 할 모습 그대로이며 세상의 질서는 변경될 수 없고 세상의 작동 규칙에 우리는 도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에 대한 승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헌터는 우리가 역사와 사회의 필연성들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된 것은 그분이 정사와 권세를 깨뜨린 결과라고 말한다. 헌터는 바로 이런 현실이 모든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관계와 과업, 영향력이 범주, 도시광장 안에서 적극적, 창조적, 건설적으로 선을 추구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헌터는 실제로 무엇을 성취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고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한 세상을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기독교인들이 모든 타인을 위해 신실한 존재로 샬롬을 추구하고 실천할 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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