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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율법이란 무엇인가?

율법이란 무엇인가?

2014-06-10 04:57:02


 "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창세기 1:26)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다스리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언한다. 이렇게 사람은 다스리는 일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니 다스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존재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스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대하시고 명하신 다스림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려야 하는가? 

 

우리는 당연히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이 질문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것은 다스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인데 그것은 예수님이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가 자기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해달라는 부탁에 대답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었다. "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5-28)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다스린다'는 의미를 상식적인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가르치고 계심을 보게된다. 크고자 하는 자가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이렇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김으로 다스리는 것이며, 자신을 대속물로 줌으로 다스리는 방식이다. 이것은 분명 다스림에 대한 우리의 상식과는 배치되는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스림의 방식이 아니라 다스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다스림은 바로 그런 다스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친히 그런 모범을 보이셨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다스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다스려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뜻이 곧 통치 원리요 통치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배임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 진리를 계시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 금령이었다. 선악과 금령은 사람에게 주어진 통치권은 반드시 사람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계시한다. 그러므로 선악과 금령을 범한 결과가 사람의 죽음으로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 그에게 주어진 통치권은 무의미하게 되고, 통치권이 무의미해진다는 것은 곧 사람의 존재 의미기 상실됨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가나안 족속보다 편애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가나안 족속의 죄로 인하여 더럽혀진 가나안 땅을 빼앗아서 이스라엘에게 주심으로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새롭게 만들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지으신 땅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다스리는 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인데 가나안 족속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림으로 땅을 다스릴 자격을 상실한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쫒아 내시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심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대로 그 땅을 다스리길 기대하신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그 땅에서 쫒겨날 것이라고 하나님은 경고하셨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신 것이며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계명을 비롯한 세부법을 포함한 율법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다스릴 통치 원리로 주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바로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가나안 땅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율법이란 단순히 도덕법이나 윤리법이 아니며 또한 언약 관계를 규율하는 언약법을 넘어서 하나님나라의 통치법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먼저 이 법을 따라서 살고, 이 법을 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킬 때, 바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땅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이 주어지고, 이어서 21장부터 24장까지는 세부법이 주어졌는데, 이 세부법은 십계명을 어떻게 그 법정신을  살려서 삶의 구체적인 현장으로 가져갈 것인가를 고려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통치법으로서의 율법을 구체적인 통치 원리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율법의 법정신에 대한 바르고 깊은 이해와 그것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가져가려는 예민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율법의 이런 목적과 율법에 나타난 법정신을 알지 못할 때,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율법주의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이런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다스림이 나타났던 다윗의 시대를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탁월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한 모든 선지자들의 메시지도 바로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이 일치하여 지적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을 멸시하고 그 법을 헛되이 지킨다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패망의 원인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다스리는 일에 실패한 것이고 그래서 그들도 가나안 족속처럼 그 땅에서 쫒겨난 것이다. 약속의 땅이지만 그 약속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린다는 조건이 있었던 것이다.

 

"복있는 사람은"  으로 시작되는 시편 1편은  복의 근원이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시편에서 가장 길고 유명한 시편인 119편 역시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시편에는  하나님의 법의 중요성에 대한 고백으로 가득차 있는데 율법을 여호와의 법, 여호와의 증거, 주의 도, 주의 율례, 주의 계명, 주의 의로운 판단, 주의 말씀, 주의 입의 모든 규례, 주의 증거의 도, 주의 법도, 주의 율례의 도, 진리의 말씀, 주의 옛 규례,  주의 입의 법, 주의 의로운 규례, 이렇게 엄청 다양하게 반복적으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좇아 사는  삶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도  역시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법정신을 깊고 바르게 해명하면서 그 법을 그 시대의 삶의 자리로 가져가고 있음을 보게된다. 소위 팔복으로 부르는 복있는 자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율법의 법정신에 합당한 자가 바로 복이 있는 자라는 것이고 천국은 바로 이런 자들의 것이라는 선언이다. 그러니까,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란 율법의 법정신을 따라서 사는 자들을 통하여 그 법정신이 실현되고 성취되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하며, 애통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바로 맛없는 세상에 맛을 주는 소금이며,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과 같은 존재들이다. 이들이야 말로 바로 하나님이 창조시에 세우시려던 바로 그 통치자들이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듯이 하나님은 이들을 세상 모든 사람을 비추는 자리에 두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지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 5:17-18) 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어지는 살인, 간음, 맹세에 대한 해석은  율법의 법정신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드러내신 것이며 결국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으로까지 발전한다. 이어서 구제, 기도, 금식과 같은 종교 행위에서 법정신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보이려는 마음으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람에게는 당연한 듯한 ,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이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려는 것임을 지적하는 대목은 사람이 먹고 사는 염려를 하는 것이 십계명의 첫계명의 법정신을 어기는 것임을 갈파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먹고 사는 염려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요 인간의 존재 목적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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