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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문화명령이란 무엇인가?

문화명령이란 무엇인가?

2014-06-06 15:05:30


  우리는 흔히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명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문화활동을 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통치명령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그들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에게 다스리라는 명령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 문화명령이라는 애매한 말보다는 통치명령이라고 함이 더 옳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람에게 두가지 명령을 하셨는데 첫째가 문화명령이고 둘째가 선악과 금령으로 나타난 종교명령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문화명령은 사람과 만물의 관계에 대한 명령이고 종교명령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명령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도대체 왜 하나님이 두가지 명령을 사람에게 주신 것인지? 그리고 그 두가지 명령의 상호관계는 무엇인지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두가지 명령을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한가지 명령을 주신 것이며, 그 한가지 명령도 문화명령이 아니라 통치 명령을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사람을 만드신 것이지 단지 사람에게 문화활동을 시키려고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물을 지으신 것도 그 만물이 사람의 다스림을 받게 하시려고 지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만물의 존재목적은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데 있으며 사람의 존재목적은 만물을 다스리는데 있는 것이다. 이만큼 다스림이라는 키워드로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지으신 만물을 직접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다스리기를 기뻐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을 통한 간접통치인 셈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가 간접통치라는 말은 사람의 통치가 하나님의 뜻을 반영한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통치하지 않고 제멋대로 한다면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간접통치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 편에서 보아도 사람의 통치권은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위임된 것이므로 사람은 그 통치권을 자기 멋대로 사용해서는 안되고 그 통치권을 위임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바로 이 당연한 통치원리를 가르쳐 준 것이 선악과 금령인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 금령은 통치명령에 당연히 전제되는 것이지 별도의 명령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문화명령과 종교명령이라는 두가지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한가지 명령, 곧 통치명령을 주신 것인데 그 통치명령이란 하나님 대신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스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계시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계시하고 있다. 인간은 비록 피조물이지만 통치하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특별한 피조물인 것이다. 바로 인간이 이런 사명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을 따른 특별한 존재로 지으신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되 사람을 통하여 다스리시길 기뻐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의 다스림을 받게 하시려고 만물을 지으신 것이고, 마찬가지로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는 통치라는 목적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니 창조와 통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창조없는 통치가 없듯이 통치 없는 창조도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 존재의 근본목적은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질서있게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과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이렇게 인간은 통치적 존재로 지어진 것이며 그 통치란 위임된 통치권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치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통치는 사실 통치가 아니며 불법이 되는 셈이다. 선악과 금령은 바로 이 진리를 계시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인 순종을 해야 한다는 것을 선악과 금령은 가르친다. 선악과 금령은 단순하고 간단한 명령이지만 사실, 납득하기는 쉽지 않은 명령이다. 그러므로 그 명령은 자신의 납득에 기초한 순종이 아닌,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 기초한 순종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뱀은 납득에 기초한 순종을 제시하였고, 납득하지 못하면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순종의 원리를 가르쳤던 것이다. 결국 불순종을 택한 인간에게 죽음이 임한 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목적인 통치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정당한 의미에서의 통치권을 상실한 것이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심각한 죄가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그저 인간의 순종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시길 기뻐하셨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창조원리이기 때문에 인간의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고, 인간의 순종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순종이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불순종이 심각한 죄가 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란 바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거스리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고 그러기 때문에 죄의 결과는 죽음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떠난 인간 존재의 의미는 상실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결코 포기 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인간을 사랑해서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어야 할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을 다시 새롭게 하시며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역사의 무대에 뛰어들어오셨으니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며, 인간을 짓누르던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이며 또 다시오사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일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일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성령의 역사나 , 이 모든 것이 그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합심하여 창조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 혹은 구원이란 창조목적에서 떠난 인간을 다시 그 목적을 이룰 주인공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통치에 다시 참여하는 인간 존재로 세우시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구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림, 곧 창조목적을 위한 수단이고 과정인 것이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된 것이 해방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해방된 이스라엘이 이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것이  해방의 목적이었던 것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해방된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 정탐 이후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것은 해방의 의미를 부인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들의 존재의미를 상실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의 잔인한 세월동안 소멸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가나안 땅에 출애굽 2세대가 들어갔지만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약속의 땅에서 내어쫒긴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통치를 감당하지 않을 때, 인간존재와 역사의 의미는 상실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떠난 인간존재와 역사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에서는 문화명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명령을 말하는 것이고, 문화명령과 종교명령, 두가지를 명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나의 명령, 곧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명령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목적이고, 곧 인간 존재와 역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떠난 모든 것은 거짓이며 허무일 뿐이다. 이 목적을 지향하지 않는 구원이란 거짓일 뿐이다. 구원이란 바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과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칭의와 성화라는 사변적 구조로 이해하기 보다는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출발로서 구원을 이해해야 한다. 그럴 때, 열매없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운다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이 궁극적 목적이 될 때, 구원은 우상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의 목적은 통치이다. 그리고 통치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순종이 없는 통치는 이미 통치가 아니라 불법이며 통치권의 남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치의 선결 조건, 필수조건이 순종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결국 구원의 목적은 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통치는 순종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순종이란 곧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고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인간만이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에게 이제 그들 맘대로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제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주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십계명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율법이 주어진 것이니, 그것인 바로 해방된 이스라엘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이 법에 순종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족속의 죄로 더럽혀진 땅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 율법이 주어지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자유가 없이 종살이하는 신세인 이스라엘에게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나 여건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먼저 해방시켜 자유를 주신 것이고 그 후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명령과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율법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린다는 말은 인간이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며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십계명의 첫계명은 이 진리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이것이 모든 순종의 근본이다. 하나님만을 신으로 섬기려면 다른 것들이 신 노릇하는 것을 배척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진정한 통치가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법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 순종을 가르치는 것이며, 나아가 만물을 그 원리로 다스릴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려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통치의 대상에는 만물 이전에 자기 자신이 먼저 해당되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여 먼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 이것이 통치명령의 출발이며 이것이 바로 구원의 목적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제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한 이후에는 인간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명령이 통치명령보다  우선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 영혼 구원을 궁극적 목적으로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전도명령이라고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본문은 바로 마태복음 28장 18-20절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전도명령인가?  우선 이 명령의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통치의 근본이며 출발인 순종을 명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런 명령의 근거가 되는 18절, 역시 인간이 범죄함으로 빼앗겼던 통치권을 이제 예수님이 되찾아주셨다는 의미가 아닌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결코 변함이 없으며 영원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 이전이든 타락 이후든 창조목적을 이루는 통치명령 또한 변함없이 동일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목적이며 역사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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