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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주 기도문 - 채영삼 교수

주 기도문 - 채영삼 교수

2014-05-19 20:16:02


마6: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9 Οὕτως οὖν προσεύχεσθε ὑμεῖς·

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

아버지여, 우리의

인격에 대하여 부르는 기도. 그 대상이 선명하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다.

아버지와 우리의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οὖν(그러므로) - 이전 문맥 7~8절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기도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 이유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현대 교회에서만연된 -내가 내 가치관으로 미리 결정하고 구하는 기도-

원하는 리스트를 놓고 확신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상하는 것을 벽에 붙이고 기도

의심치 말라고 한다.

중언부언 — 의미없는 말을 되풀이, 헛된 말을 되풀이/ 신들의 호의를 받기위한 나열들

 

이전문맥 5절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께 하지 않는 기도 -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기도는 소통이다.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구하고, 그 뜻을 내가 실행하기 위해 하는 간구이다. 하지만, 외식하는 기도는 기도의 본질인 ‘하나님의 뜻’에 관련이 없다.

그것은 사람에게 인정 받는 것, 사람들의 ‘영광’이다. 얼마나 부패했으면 기도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가?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하늘에 계신)

본문에서 ‘하늘’은 철저하게 ‘땅’과 대조되어 있다. 하늘에서는 이미 ‘뜻이 이루어져 있다’ 반면에 땅은 아직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영역이다. 뜻이 이루어져 있는 하늘처럼, 땅도 그렇게 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매우 놀라운 통로요 방식이 된다.

눅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Πάτερ ἡμῶν(우리의 아버지) -- 주기도문은 나에게 주신 기도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기도이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번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매일의 우리의 양식)을 주시옵고 - 2번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우리에게서) 사하여 주시옵고 - 4번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번

주기도문 안에 ‘우리’가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가?

단지 5구절 밖에 되지 않는데, 모두 9회나 등장하는 단어이기에 상당히 강조된 단어이다.

따라서 주기도문은 새언약의 공동체를 위한 기도이다.

우리의 기도에 공동체적인 관심이 녹아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기도문은 가르친다.

 

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심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과 그분의 의지가 존중받고, 받아들여지며 찬양을 받게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남겨둔 이유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위해서이다.

정말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이름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교회에게 기회를 주시고 그들을 회복시키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아끼기 때문이다. 열방가운데 알려지는 자신의 이름이 곧 그들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겔39:25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야곱의 포로를 돌아오게하여 이스라엘 온 집에 자비를 베풀고 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시는 소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열방들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는 그것이, 열방들이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것은 교회가 더럽혀진 복음, 세속적인 복음으로 자신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 시대의 신은 ‘행복해야하는 나’이다. 누구든 ‘나의 기분을 불쾌’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신학이든 신앙이든 신이든, 모두 틀린 것이다. 맛있는 것이 진리이다. 기분좋은 것이 진리이고, 그래서 오락이 곧 종교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이 구절을 기도로 드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은, 오늘 날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 것에 대하여, 교회가 그 영광을 잃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것에 대하여 참회하고 또 공분해야 한다. 내 명예가 실추된 것보다 더 안타깝게 억울하게 생각해야한다.

 

10 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당신의 통치가 임하소서)

당신의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가 임할 것에 대한 간절한 기원은 ‘당신의 나라’가 실현되지 않은 세상을 전제한다. 죄와 죽음과 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못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그를 영화롭게 하지도 않는다.

10절 첫 대목의 기도는 9절 끝의 기도와 연결된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되면, 그의 나라와 통치가 임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 그의 통치는 이처럼, 그의 이름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임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교회는 이 땅에서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해야만 한다.

 

γενηθήτω τὸ θέλημά σου ὡς ἐν οὐρανῷ καὶ ἐπὶ τῆς γῆς(하늘에서와 같이 땅위에서도 당신의 뜻이 이루어이다)

교회는 어떻게 해서,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구체적으로 ‘당신의 뜻’ 곧 ‘하나님의 뜻’ 그가 원하시는 바의 그 뜻, 의지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그대로 되는 길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는 이미 이루어져있다. 이 사실은 그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이 그렇게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증거 한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격려이고 확신이고 담대함 가운데서 할 수 있는 간구이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이제 모든 만물들과 함께 이 세상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 온전히 임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로 변하기를 기대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회복하시시를 원하신다. 재창조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행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성령의 충만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성령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 실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여 우리가 그의 뜻에 순복하게 되기를 간절히 간구하는 기도이다.

 

이 땅에서 먹을 것의 문제, 용서하는 문제, 시험에 관련된 문제는 모두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에 관련된 문제들을 다룬다. 

과연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인생들이 갈등하는 핵심적인 세 가지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일용한 양식’을 구하는 기도, ‘용서에 관한 기도’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기를 구하는 기도’ 등은 신자가 세상 속에서 세속에 함몰되어 세상의 신인 마귀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드려야 하는 핵심적인 주제들로서 단순한 기도 제목에 그치지 않는다.

 

11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매일 필요한 우리의 양식)을 주시옵고

ἐπιούσιον-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매일 필요한 == 무절제한 탐욕을 거절하라는 기도

(딤전 6: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탐욕을 부추겨서 소비를 조장하는 무한 소비의 사회에서 절제된, 하나님을 뜻을 행하기에 합당한 양식을 구하자.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내가 무엇으로 만족을 삼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며, 성령께서 나의 심령을 다시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이다. 오늘날 교회를 가장 공격하는 것은 ‘세속’이다.

 

ἡμῖν 우리에게- 세상을 보라. 누구는 남아서 버리고, 누구는 없어서 굶어죽는다. 양식을 나누지 못할 때 나만 먹을 때, 그것을 만족스러울 것 같지만 공동체의 비참을 초래한다.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우리의 양식- 성도는 우리의 양식을 구해야 한다.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단순한 생존, 더 나은 생존’이 아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때문이다.

 

δὸς 주옵소서 –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지만 ‘주셔야만 하는 분’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법칙을 따라 요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기계적으로 주셔야 한다고 믿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 이지만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일 때 우리의 기도는 능력있게 응답될 것이다.

12καὶ 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ὡς καὶ ἡμεῖς ἀφίεμεν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우리에게서) 사하여 주시옵고 -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통치, 즉 생명의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는 기도인 것처럼, ‘죄사함’을 구하는 기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간절히 구하는 기도이다. 마귀의 통치는 회개치 못한 심령, 용서치 못한 심령 속에 역사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을 간구한다면 당연히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여 주는 삶이 마땅히 따라야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 된다.

 

오늘날 자신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이웃에게 잔인하고 자신이 고용한 사원들에게 야박하고 자신과 다소 신념이 다른 이웃들에게 잔혹한 그리스도인을 볼 때 하나님의 이름은 어떻게 되겠는가?

 

13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 ἀλλὰ ῥῦσαι ἡμᾶς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 ὅτι σοῦ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καὶ ἡ δύναμις κα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ῦς αἰῶνας ἀμήν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 시험에 드는 일은 곧 악한 자의 속임에 넘어가 파멸 가운데로 들어가는 골목에 서 있는 것이다.

영원히 먹고 쓰고 남을 양식을 대대로 비축해두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하는 크리스찬이 있다면 그는 시험에 든 자이다. 항상 부요 풍요를 갈구하며, 그것을 얻는 것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 자는 항상 시험에 든다. 돈 때문에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과 명예 때문에 그것을 얻고자 말씀을 버리는 자는 시험에 드는 것이다. 성도들의 헌금을 도적질하고 물질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시험에 든 자이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나라에 거해야하는데 예수 믿고 세상으로 가는 교회, 그러니 시험이 끝이 없다.

13절은 더욱 더 의존적 자세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무엇을 해달라고는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를’ 어떻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더 매달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간청하는 낮은 자세의 기도이다.

 

λλὰ ῥῦσαι ἡμᾶς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 (다만 악에서 (우리를) 구하시옵소서)

-- 기억해야하는 것은 ‘악한 자’가 모든 권세를 가진 것도, 통치와 영광을 누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악한 자에게서 건짐을 받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재물의 우상을 섬기지 않고 용서와 화평의 삶을 살아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ὅτι σοῦ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καὶ ἡ δύναμις κα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ῦς αἰῶνας ἀμήν

왜냐햐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직역- 왜냐햐면 그 나라와 그 권능과 그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이기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나 인간관계의 문제, 용서하지 못하고 반목하며 다투고 싸우는 문제들,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권세가, 힘에 그에게 있으시다. 또한 악한 자가 결코 영광을 차지하지 못한다.

주기도문을 따라 간구하는 성도들은 누구나 그의 나라와 능력과 영광에 대한 확신으로 끝나야한다. 소망으로 끝나야한다. 악이나 악한 자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들은 결국 통치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패할 것이다. 그들은 영광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수치와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영원토록 하나님께서만 영광을 얻으시고 그가 능력으로 다스리시고 그가 통치하는 나라가 온전히 임할 것이다. 주기도문을 따라 간구하는 모든 성도들은 이런 확신으로 끝나야 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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