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스 스킬더의 문화관
2014-06-11 13:31:55
다음은 헨리 반틸이 그의 책 '칼빈주의 문화관' 에서 소개한
스킬더의 문화관을 간단한 요약한 것이다.
하나님과 자연, 하나님과 역사, 하나님과 피조물, 은총과 자연 사이에는 어떠한 대립도 없다. 대립이 있다면 그것은 죄와 은총이며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대립이다. 하나님은 역사와 자연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단지 죄를 정죄하실 뿐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연과 역사가 원래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회복시키신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첫째 아담에게 주어졌던 문화명령을 우리가 성취할 수 있도록 우리를 회복시켜 놓으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에 서 계시며, 역사의 모든 의미를 부여하신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 이후의 섭리가운데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역때문에 역사와 관련이 된다. 역사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위한 틀이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으심으로 첫번째 아담의 합법적인 상속자로 선포되셨고, 첫번째 아담이 성취하지 못했던 일, 곧 하나님의 창조 세계속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수행하시는 당대의 하나님의 직분자(God's officer of the day) 로 위임되셨다. 이와같이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가져오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었던 것을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시며,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계획하셨던 일을 실제로 일어나게 하신다. 그래서 첫째 아담이 산 영(a living soul)이었다면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영(life-giving spirit)이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당신과의 교제로 부르시고, 또 부르신 자들을 창조시에 첫 아담에게 주어졌던 그 의무를 성취할 수 있도록 만드신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기름부으심에 참여한 자이기 때문에 문화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다. 문화사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문화적 추구를 회피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결국 스스로 결핍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문화 활동에 참여를 포기하는 것은 언제나 죄악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담지자(image-bearer)로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직분 담지자(officer-bearer)이다. 이것이 참된 종교이고, 이것이 원래의 우주의 질서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개발하고 다스리는 일이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은 창조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지만,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고 인간의 문화적 활동으로 촉진되는 진화(evolution)와 발전(development)을 통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죄는 분리를 야기시킨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료 인간들, 종교와 문화, 이 모든 관계들을 단절시킨다. 분해가 일어나고 우주의 아름다운 전체적 조화는 산산조각나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하나님의 창조규례(the creative ordinance) 를 폐지시키지 않았다. 창조규례는 행위언약 속에서 모든 피조물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의무(common obligation)이기 때문이다. 행위언약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직분을 담지한 자인데, 그 직분은 하나님을 위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문화란 인류전체가 지속적으로 생산해야 할 자원개발노동의 총체(the aggregate of exploitive labor) 를 향한 조직적인 노력이다. 인류에게는 창조세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성들을 역사의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범위안에 들어오는 대로 드러내야 할 과제, 그것들을 각자의 본성들의 법칙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개발해야 할 과제, 그리고 그것들을 원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과제가 있다. 인류는 이 과제를 수행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의 기준에 복종하여야 한다. 이 과제의 목적은 과제를 수행함으로 얻어진 보물들을 예배적 피조물인 인간에게 유용하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이제 더욱 철저하게 구비된 인간과 그것들을 하나님의 발 앞에 가져오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이 영원토록 돌려져야 한다. 문화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타락이후에 시간의 연장은 은혜를 포함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연장하신 것은 천국과 지옥에 들어갈 사람을 번성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연장, 그 자체는 축복도 저주도 아니라 단지 역사가 잰행되고 문화가 산출될 수 있는 기층을 제공할 뿐이다. 인간에게는 문화를 추구하는 본능(the instinct to culture)이 심겨져 있는데, 낙원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활동이었지만 타락 이후에는 자아중심적이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래서 타락 이후에는 대립이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이 대립은 자연 자체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 곧 문화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비중생자들의 문화적 태이블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부정적이고 반동적인 것이다. 우리가 일반은총에 대해 말하려면 반드시 일반저주도 함께 말해야 한다. 일반은총과 일반저주는 모두 알곡과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자라도록 완전한 저주와 완전한 축복을 잠시 제한(억제)하는 것이다. 인간은 저주받기에 마땅하지만, 일반은총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좋은 문화의 유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문화의 문제를 너무 제한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게 되면, 낙원에서 시작된 명령과 약속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역사의 파국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일반은총의 영역으로서 불신자들과 신자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영역을 말한다면, 그 영역은 세상과 교회의 두 대립하는 세력의 중립지대가 되어 그 영역에서는 대립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과 공통의 작업장(a common workshop) 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의 문화(a common culture)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나의 자연이 있는데 그 자연이 이중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며, 하나의 재료가 있는데, 그것이 이중적으로 활용되며, 하나의 영역이 있는데 그것이 이중적으로 활용되며, 하나의 문화충동이 있는데 그것이 이중적으로 추구되는 것이다.
인류가 참된 종교와 참된 문화로 되돌아 오는 것이 가능하기 위하여 두가지 일이 성취되어야 한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공의와 분노가 해소되어야 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셨던 순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구속주로서 하나님의 공의의 복수자로서 역사에 개입하셨으니, 이 이중적 측면에서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주이시고 문화적 성취에 이르는 미래를 보장하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의 공동체, 곧 자신의 종들을 값을 지불하고 사서 동력화시키심으로 낙원에서 시작되었던 인류의 행군 명령을 새롭게 선포하신 것이다. 첫째 아담의 마음에 새겨져 있던 과업은 이제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에게 넘겨져서 구속받은 공동체의 마음에 말씀과 성령으로 이 과업의 명령을 다시금 새기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구원의 역사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구속주와 심판주가 되시는 분의 사역을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적 인간을 생간하심으로 문화를 회복시키신다. 엄격하게 말해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문화 건설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문 이뤄진다. 사람들이 동일한 본성(sunousia)과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된 교제(koinonia)를 보장하지 못한다. 동일한 번성이 동일하게 공유하고 있는 원리를 향한 사랑을 통해서 공통의 목표를 지향할 때만 침된 교제가 성취된다. 그러기에 문화의 교제는 신앙의 교제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의 공통의 인간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서 교제를 형성하는 것, 비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문화이다. 그리스도야말로 문화의 유일하게 참된 원천이시며 또한 개인들을 함께 묶어주는 교제(koinonia)를 가능케 한다. 이런 교제가 목적론적으로 지향하는 문화 건설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이다.
문화를 위한 문화, 순수문화란 있을 수 없다. 자연을 하나이지만 자연을 사용하는 문화추구는 두 종류이다. 죄와 저주로 인하여 이런 이중성이 존재하게 되었기에 우리는 그 대립을 인식해야 한다. 세속화 과정의 비극적 드라마가 전개되는 죄많은 세상에서는 오직 문화적 단편들만 생산될 뿐이다.기본적 통일성이 상실되어 버렸는데 이는 죄인들은 엄청난 종파주의자이고 분리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자연적 빛과 빛의 사용을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한다. 일반은총에 근거하여 문화를 말하는 것은 문화 사명(mission)을 문화 허용(permission)으로 좁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타락한 인간에게 남겨져 있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결국 문화적 낙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자연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죄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갈등, 그리고 세상에서 나오지 말라는 명령으로 부터 일어나는 긴장은 사람들과 계속 접촉하면서(sunousia) 살아가는 존재로서 우리의 몫과 교제에 대한 우리의 의무(koinonia)사이에 생기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크리스챤 문화철학자는 문화적 낙관주의나 문화적 금욕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문화를 부르심의 개념으로 부터 논리적으로 추론하여야 한다. 문화 활동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직문 담지자(office-bearer), 곧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계시의 말씀을 좇아서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의식해야 한다. 자연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말씀의 빛으로 조명되지 않으면 자연은 그저 불가사의할 뿐이다. 세상은 더 이상 에덴이 아니라 일해야할 장소, 싸워야 할 경기장, 건축해야 할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갈급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종말론적 문화이다. 문화의 진정한 가치는 생산된 작품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르내리는 과정의 긴장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경기장을 마련하는데 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택하신 마지막 사람까지 세상을 이기게 하시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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