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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세미펠라기안주의

세미펠라기안주의

2014-05-13 15:12:59


 

         세미펠라기안주의 : 용어의 기원과 이단 역사로의 변천

 

 

이레나 바쿠스와 아자 하우드리안

제네바 대학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

 

 

세미펠라기안주의라는 용어는 통상 5세기와 6세기의 하드루멘툼과 마실란 수도승의 가르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 용어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로부터 기원하는 것으로서, 은혜와 더불어 사람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관을 표현하는데 이것을 사용하였다. 데오드르 베자가 1556년경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는데 은혜와 사람의 의지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견해를 가리키는데 그 말을 적용하였다. 이 용어는 루터란의 신인협력설을 지칭하는 말로 1577년의 루터란 일치신조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원래, 이 용어는 동시발생에 대한 교훈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1571년에 니콜라스 샌더스를 필두로, 이 용어가 5세기 마실리안의 가르침을 주로 함의하는 것으로 의미를 변화시켰다.

 

 ‘세미펠라기안주의 혹은 세미펠라기안 이라는 용어의 정의를 기독교회 옥스퍼드 사전(ODCC)”에 나오는 표준적 참고서에서 찾아보면, 구원을 위해 은혜가 필요함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번째 발걸음은 사람의 의지로 이루어지며 은혜는 단지 나중에 발생한다고 주장한 5세기의 일단의 신학자들이 인간 본성에 대해 주장한 교리를 지칭한 것임을 알게 된다. “세미펠라기우스의 믿음의 내용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스콜라 후기 세대가 세미펠라기우스를 의미한 것과 일치하지만 세미펠라기우스 운동이나 관련된 운동들의 역사적 실체를 정확하게 묘사한 것은 아니다. 로버트 마쿠스, 콘라드 레이서 등을 따라서, 우리는 ODCC의 정의에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왜냐하면 ODCC는 그 이름이 그 교리와 동시에 발생한 것으로 암시할 뿐만 아니라 5세기 세미펠라기안들이 자신들의 교훈을 펠라기우스 자신의 가르침과 동일시한 일관된 운동을 형성한 것으로 암시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26] ODCC에 나타난 견해는 은혜에 대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사이에(반대하는 사람 중 주동 인물은 존 카시안과 리츠의 파우스투스였다.) 논쟁이 5세기에 고울 지방에서 일어났다는 추정에 기초하고 있다. 당시에 논쟁은 6세기까지 지속되었고 세미펠라기안들은 529년에 오렌지 공의회에서 정죄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어거스틴이나 오렌지 공의회는 세미펠라기안이라는 운동을 언급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콘라드 레이서가 언급하듯이, 토마스 스미스, 로버트 마쿠스, 카를로 티빌레티 같은 1980, 1990년대 학자들의 연구는 5세기 고울 지방에서 은혜와 예정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이 없었으며, 430년에 이 주제에 대한 약간의 논문으로 약 40년 후에 리츠의 파우스투스의 저술이 등장했고 오렌지 공의회가 파우스투스를 정죄하였지만 이것이 논쟁거리가 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문제가 5세기와 6세기 내내 때때로 특별히 수도원의 상황에서 어느 정도 논쟁이 되었음을 이런 산발적인 불일치가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특히 로버트 마쿠스도 카시안이나 레린의 빈센트나 리츠의 파우스투스가 자신들의 입장을 펠라기우스와 동일시하거나 혹은 부분적으로라도 펠라기우스와 동화시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오렌지 공의회가 파우스투스를 거론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아리우스가 제기한 논지에 따라 결정된 유사본질의 일반 교리를 옹호하며 일관된 그룹을 형성한 신봉자들인 또 다른 세미-헤러시, 세미-아리안주의와는 대조적인 이야기를 제공한다.

 

이런 가설은 논쟁의 전개와 국지성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 제기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어거스틴의 첫 번째 논문은 Degratia et libero arbitrio 그리고 De correptione et gratia 이다. 이 글은 어거스틴이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하고 이 문제가 하드루멘툼의 수도승의 행동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음을 재 확언하려고 작성한 것 같다. [27] 비록 현대 학자들 중에는 펠라기안주의가 다시 등장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어거스틴이 이런 글을 썼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하드루멘툼의 수도승들이 에크라눔의 줄리안이나 그의 추종자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연대는 불분명하지만 비슷한 논쟁이 마르세이유 지역의 수도승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을 때, 그들이 줄리앙의 영향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은 꽤 발견된다. 존 카시안이나 레린스의 빈센트에게 보내는 것으로 추정되는 프로스퍼의 편지(어거스틴, ep. ccxxv.2)는 마르세이유가 이런 견해의 중심지이며 적어도 마르세이유 사람들이나 마르세이유 수도승의 일단의 그룹이 펠라기안의 견해에 가깝다고 언급하고 있다.(ep.ccxxvi.2) 프로스퍼의 동료, 힐러리의 편지(어거스틴, ep.ccxxvi.2)는 이런 위험한 견해가 마르세이유 밖의 수도승에게 퍼졌음을 지적하고 있다. 어거스틴이 이런 경고에 대응하여 쓴 두 개의 논문이 De dono perseuerantiae  De praedestinatione sanctorum.이다.

 

주제에 대한 최근 지식의 상태를 간략히 요약한 이것은 수도원적 삶의 방식과 예정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어떤 문제들이 하드루멘툼과 남부 프랑스에서 거의 동시에 제기되었으며 특히 아퀴타인의 포로스퍼가 이 후자의 문제들을 옳건 그르건, 에크라눔의 줄리안 이 주로 주창한 펠라기안주의의 재탄생과 연결키시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단의 수도승들이 펠라기우스의 저술을 알았는지 혹은 자신들의 견해를 그것과 동일시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De praedestinatione sanctorum에서 프로스퍼의 편지에 대응한 어거스틴 스스로 마실리안들은 원죄를 믿었고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의지를 실제로 예견한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이 마실란과 펠라기안의 주된 차이점이라고 하면서 마실란과 펠라기안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더구나 펠라기안과 대조적으로, 마실리안들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인간 의지가 어떤 선한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펠라기안의 잔재를 나타낸 것은 프로스퍼이지 어거스틴이 아니다. 마실리안들과의 논쟁은 칭의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것은 중요한 언급이다. [28] 펠라기안과는 대조적으로 원죄의 문제는 그들에게 논쟁이 되지 않았다.

 

 

세미펠라기안 그리고 세미펠라기안주의의 출현과 이단의 역사적 형성

 

이 논문의 목적은 세미펠라기안 그리고 세미펠라기안주의 라는 용어의 기원을 탐구하고 가능한 어떻게 이 용어들이 5-6세기에 있었던 (하드루멘툼과) 마실란의 논쟁을 지칭하게 되었는지, 그래서 완전한 이단으로서 세미펠라기안주의가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는지 조사하려는 것이다. “세미펠라기안주의이란 용어는 16세기 중반에 처음에는 당시의 가르침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된 체계적이고 논쟁적인 신학개념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5세기의 은혜에 대한 이론과 관련된 역사적 의미를 함축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가설이 있다. 만일 후자의 역사적 명칭이 엄격한 의미에서 시대착오적일지라도, 시대착오라는 사실 그 자체가 완전한 펠라기안도 어거스틴도 아닌 은혜에 대한 어떤 견해를 묘사하는 이 용어가 체계적인 관점에서 무가치하다고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 주제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용어는 근대 초기의 신조어인데 우리는 또한 사람이 자기 힘으로 회심을 시작할 수 있지만 성령의 은혜 없이는 회심을 완성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 세미펠라기안의 오류를 거부한다고 선언한 1577년의 루터란 일치신조 2 10절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너무도 자주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 이 구절은(일치신조 2 10)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을 겨냥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는데 아마도 암암리에 이런 것들을 겨냥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된 겨냥은 루터란 교회 자체 안에 있었다. [29] 여기서 언급된 세미펠라기안은 회심의 행동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주된 동인이라고 주장하며 정통 루터란에 반대하는 요한 페핑거와 그 추종자들처럼 신인협력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이것은 페핑거가 추종하였던 필립 멜란히톤의 견해였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멜란히톤의 가르침이 많은 점에서 세미펠라기안주의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중대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이중적인 시대착오인 것 같은데, 왜냐하면 1577년에 신인협력설을 지칭한 것으로 사용된 16세기 신조어인 세미펠라기안주의는 신인협력설이 초기 이단인 세미펠라기안주의에서 끌어낸 것이라는 견해를 실제로 낳았기 때문이다. 세미펠라기안주의가 고대의 교리라고 생각한 프레우스는 일치신조에 이 용어가 등장한 것을 마틴 켐니츠의 탓으로 돌렸지만 일치신조 본문을 주로 작성한 야콥 안드레의 탓으로 마찬가지로 돌릴 수 있었다. 페핑거의 자유의지의 명제는 1555년에 나왔는데, 한편으로는 페핑거가 암스도르프와 다른 한편으로는 페핑거를 지지하는 빅토리누스 스트리겔이 플라시우스와 벌인 논쟁에서 그리고 1560년 바이마르 논쟁에서 펠라기안주의라는 용어가 나타났지만 페핑거를 세미펠라기안주의라고 비난한 흔적이 없다.

 

이렇게 이 문제에 관한 루터란의 입장을 보면, 야콥 안드레(혹은 마틴 켐니츠) 1577년 일치신조에 이 용어를 집어넣었고 이 용어를 루터란이나 필립주의자들의 신인협력설에 적용하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분명히 이 용어는 전부터 쓰이고 있었지만 가용한 증거에 의하면 이 용어는 루터란의 어떤 공적인 문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점점 자주, 콘라드 레이서를 비롯한 현대 역사가들은 이 용어의 기원과 이 용어가 마실리안 논쟁에 적용된 것을 1590년의 몰린주의자들의 논쟁으로 거슬러 찾는 경향이 있다. [30] 엠 쟈킨이 1907 처음으로 이런 시도를 했는데, 그가 이런 연구를 하게 된 계기는 한편으로는 노리스가 이 용어를 모호하게 scolastici recentiores에 귀속시킨 것과 또 한편으로는 1906년에 루프가 제기한 가설 때문이었다. 자킨은 로마 가톨릭의 자료에만 의존하여 내린 결론을 근거로, 이 용어가 예정을 옹호하는 마이클 바이우스의 입장이 상당한 불만과 논쟁을 일으킨 1580년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고 잘못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용어는 분명히 1580년 이전에 알려졌고, 이것은 이 용어들이 나중에 만들어지기 전에는 예수회 도미니칸의 은혜에 대한 논쟁에 도입되지 않았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이와 같이 세미펠라기안이라는 호칭의 기원은 루터란 내부에서, 혹은 우리가 주장하듯이, 종교개혁 시대에 자유의지에 관한 칼빈주의자와 가톨릭과 논쟁 속에서 찾아야 한다. 더구나 이 용어는 트리엔트 공의회 시대나 그 이전에 로마 가톨릭과 루터란 신인협력주의자들이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 은혜와 은혜의 역할에 펠라기우스보다 더욱 능동적인 역할을 인정하는 교리를 옹호하였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펠라기안주의와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것 같다. 어거스틴의 관점으로 읽어보면, 펠라기우스는 그의 Epistola ad Demetridem에서 은혜를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이해하고 그 법에 따라서 고결하게 행동하는데 이르는 순전히 지적인 현상으로 보았다. 이것은 요한 에크가 Enchirdion locorum communium adversus Lutheranos et alios ecclesiae 에서 계획적으로 진술하였듯이 당시 로마 가톨릭이 자신들의 신학을 연관시키려던 관점은 아니었다.

 

우리가 받는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하나님은 어떤 것은 자유 의지의 활동을 통하여 주시고 어떤 것은 자유의지와 관계없이 주신다. [31] 우리의 공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은 미연에 방지하고, 협력하며, 보장하기 위하여 선물을 주시지만, 이것이 자유 의지가 이 선물과 능동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로마 카톨릭 교회가 새로운 펠라기안주의라고 공격받을 때 에크는 종교개혁의 신봉자들을 금욕주의자와 마니교도라고 비난하면서 맞대응하여 방어하였지만, 분명히 1527년에 에크는 로마가톨릭이 세미펠라기안이라고 비난받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 용어의 기원을 다루기 전에, 이 용어가 근대 초기의 모든 주요 신앙고백서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면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자유 의지와 예정의 문제에 대한 현대 신학적 관점에서 이 용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한다. 사실, 아직도 세미펠라기안주의라는 현재의 명칭은 주요 고백서들 안에 다양한 입장들을 펠라기안이나 세미펠라기안 그리고 어거스틴주의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런 경향들은 역사적으로 세 개의 초기 교리적 경향들 중의 하나에 기초하고 있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낳았다. 비록 이 용어의 실제 이름이 나중에 만들어졌다는 점을 인정하는 역사학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카시안을 세미펠라기안주의의 창시자로 보는 것은 여전히 일반적 견해이다. 이 용어 자체의 기원과 이 용어가 주로 가리키는 마실리안 사상의 기원을 재구성하려고 할 때, 고려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은 세미펠라기안주의라는 용어가 존 칼빈 진영 주변에서 나타났다는 점이다.

 

 

칼빈과 피기우스

 

1542년에 칼빈은 알버트 피기우스에 반대하는 논문을 썻고 1543년에 발간하였다. 칼빈은 마실란이나 자기 동시대 사람들에 관하여 세미팔라기안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32] 그러나 칼빈은 칭의에 대한 로마가톨릭의 통설에 대한 피기우스의 변호가 어리석고 사실 무근이라고 논박할 때 세미펠라기안 논쟁에서 어거스틴의 저작으로 알려진 것에 주목하였다. 칼빈의 반응에서 두 가지 점이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첫째는 프로스퍼, 힐러리와 어거스틴이 논쟁한 것을 언급할 때, 칼빈은 마실란을 만개한 펠라기안으로 비유하면서 Massilienses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첫째, 칼빈은 의심스러운 그룹이 펠라기안의 잔재라는 프로스퍼의 주장을 자기 식으로 해석한 것 같다. 둘째, 칼빈은 어거스틴이 은혜에 대한 마실리안의 견해를 펠라기우스의 견해와 구별한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이 구별에 대하여 의문을 갖지 않았다. 칼빈이 보기에, 피기우스는 펠라기안주의의 잘못을 약간 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가 전적으로 자율적이라고 인정한 전적인 펠라기안 이단이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피기우스는 자신이 펠라기안과 공통점이 전혀 없다고 큰소리치지만, 나는 그가 여기서 어떤 펠라기안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피기우스는 어거스틴이 묘사한 자들(예컨대 마실리안)과 상당히 공통될 뿐 아니라 그들보다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고울 지방의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만 죄책을 벗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럭저럭 믿기는 하지만 그들이 어거스틴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어거스틴에게 주의를 주었다. 또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의지에 앞서고, 어떤 사람도 자기 힘으로 선행을 시작하거나 완성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ep. ccxxv3-6; De praedestatione sanctorum 1,2] 어거스틴이 이들을 비판하기 시작했을 때, 사실 어거스틴은 그들을 펠라기우스와 구별하였지만 그들이 고백하는 교훈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피기우스는 사람이 의지와 소망과 기도로 미리 스스로 준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떠들어댔다.

 

칼빈은 피기우스가 자신의 책, De lobero hominis arbitrio  5권에서 진리로부터 근본적으로 이탈되었다고 어거스틴이 생각하지 않았던 미실리안 보다 당대의 가톨릭의 가르침이 더 정통적이라고 주장한데 대해 답변하고 있다. 마르세이유 지역과는 대조적으로, 피기우스와 다른 가톨릭 신학자들은 선재적 은혜를 확고히 하지 않고는 자유 의지의 돕는 힘을 확고히 할 수 없다고 믿었다. 따라서 피기우스는 누구도 칭의에 대한 가톨릭의 가르침이 펠라기안주의와 조금이라도 비슷하다고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피기우스는 자유 의지와 칭의에 대해 에크의 입장을 대체로 반복하고 있다. 모든 항변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받기 위해 준비가 필요하다는 피기우스의 주장을 고려해 볼 때 피기우스는 펠라기우스의 추종자일 뿐이라는 칼빈의 조롱하는 주장이 피기우스의 생각을 정확하게 재현하지는 않는다. [33] 루벤의 신학자(피기우스)는 준비가 필수적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 자체에 은혜의 도움이 특히 필요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적 준비가 하나님의 은혜를 손상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 이것은 칼빈이 자기 독자들에게 믿도록 유도한 것 보다 훨씬 완화된 표현이다.

 

칼빈은 어거스틴이 마실리안과 분명한 펠라기안을 구분하였으며 마실리안의 견해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이단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칼빈이 보기에, 피기우스의 오류는 단지 마실리안의 견해를 옹호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마실란을 넘어서 펠라기안주의라는 전적인 이단을 옹호했다는데 있다. 마실리안에 대한 칼빈의 실제적인 묘사에 의하면 마실리안에게 세미펠라기안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기에 알맞지만, 이 용어는 칼빈과 피기우스의 논쟁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칼빈의 저작 어디에도 이 용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실리안 논쟁에 대한 칼빈의 이해 때문에 약 15년 후에 칼빈 진영에서 세미펠라기안주의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것인가? 이것이 이제 간접적으로 다루려는 문제이다.

 

 

게오르그 카산더와 마실리안

 

무엇보다도, 충분한 논의도 하지 않고 5세기 논쟁을 분리시킨 근세 초기의 학자들에 대해 한마디 할 필요가 있다. 게오르그 카산더는 고백적 화해(confessional reconciliation)의 신봉자였는데 지금까지 연구되지 않았던 사람이다. 16세기의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교회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카산더는 교부들에 관심을 가졌고 특별히 어거스틴에 관심을 가졌다. 주목할 만한 그의 교부학 저서들은 B. Vigilii martyris et episcopi Tridentini [Vigilius of Thapse] Opera (1555) and Honorii Augustodunensis ecclesiae presbyteri de praedestinatione et libero arbitrio dialogus nunquam antehac typis expressus; Epistolae duae ad B. Augustinum . . . Senientiae ex libris B. August. De praedestinatione sanctorum et bono perseueraniiae (1552) [Dialogue by Honorius Augustodunensis on predestination andfree will never published hitherto; Twoletters to St Augustine; Sayings by St Augustinefrompredestination of thesaints

and the virtue of persevering]이다.

 

 

[34] 카산더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결코 떠나지 않았지만 칼빈이나 루터란의 종교 지도자들의 종교적 불관용을 반대한 것만큼 교황주의와 교황주의의 권력에 대한 지나친 주장을 반대하였다. 교부를 연구한 결과, 카산더는 초기 교회가 기독교의 연합을 위한 최고의 지침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카산더는 초기 5,6세기의 교회는 신자들이 성경을 당연시하도록 만들 정도로 교회의 정통성에 대한 유일한 기준이 되었다고 여겼다. 사실, 카산더는 성경 연구는 별 관심이 없었고. 성경 주석도 쓰지 않았다. 카산더는 레린스의 빈센트( Commonitorium 2. 1-5)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자기 책 De officio pii viri에서 이단에 빠지지 않으려면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정경의 권위와 교회의 전통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카산더는 성경의 말씀이 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해석되지 않으면 왜곡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와 마찬가지로, 이단들도 경건하고 부분적으로 그 견해가 옳을 수도 있으며 자비의 원칙이 지켜지는 한 의식과 예식의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음을 카산더는 기꺼이 인정하였다. 카산더가 보기에 참된 믿음은 성경이나 로마 카톨릭이 대변하는 권위적 전통이 아니라 교리의 핵심에 대한 기록된 전통의 일치에 있었다.

 

카산더는 어거스틴과 자유의지와 예정에 관한 어거스틴의 견해를 존중하였다. 카산더는 어거스틴이 선을 행하는데 있어, 은혜와 사람의 타고난 능력의 균형에 대한 바른 입장을 보인 합의된 모범이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카산더가 종교적 관용과 신앙 고백적 입장의 조화에 관한 자신의 관점에 비추어 어거스틴을 받아들였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본문을 선택하면서 카산더는 마실란을 반대하는 어거스틴의 논문이 전적 예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너무 많은 것을 돌리는 것(프로테스탄트)과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돌리는 것(가톨릭과 재세례파)사이에 중간적 입장의 전형임을 보여주려고 의도하였다. 카산더의 선집은 호노리우스 어거스토두네시스의 논문과 함께 카산더의 견고한 지지자의 한명인 브룬와일러의 수도원장, 헤르만 폰 바우하임에게 헌정되었다. 카산더는 서문에서 논쟁의 역사를 ‘reliquiae Pelagianorum’ ,에 대한 것으로 서술하는데 이것은 프로스퍼가 처음으로 묘사한 것과 같다. [35] 동시에 카산더는 어거스틴이 자유 의지에 대한 자신의 초기 입장을 철회한 것은 옳았으며, 프로스퍼나 풀겐티우스처럼 당대에 어거스틴을 변호한 사람들이 잘 보여주듯이 어거스틴이 초기 저작에서 보다 나중에 은혜에 더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 사실이 어거스틴을 결정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서문 전체에서 카산더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엄밀한 의미의 펠라기안주의와 마르세유 수도원 지역에서 일어난 운동과의 차이점을 자신이 잘 알고 있음을 드러낸다. 카산더는 또한 철학의 영향을 받아 펠라기안주의가 중세기에 다시 나타났다는 것에 독자들의 관심을 끌면서, 예정에 대한 후기 어거스틴의 중도적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로서 토마스 브래드와딘과 리미니의 그레고리와 함께 호노리우스 어거스토두넨시스와 끌레보의 버나드를 나열한다.

 

카산더의 선집에는 De praedestinatione sanctirum  De dono perseuerantiae.. 으로부터 인용한 글과 함께 프로스퍼와 힐러리가(epp. ccxxv-ccxxvi) 어거스틴에게 새로운 이단을 알리는 두 개의 편지가 포함되어 있다. 카산더는 논쟁의 본질과 어거스틴의 입장을 분명히 보여주고 인용문을 발췌하였다. 카산더는 성경 인용의 대부분과 주된 논점에 부차적인 사항은 생략하였다. 근본적으로 카산더는 어거스틴에 의하며,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어떤 행위보다 앞선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이렇게 1552년대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고백적 입장과 무관하게, 마실리안의 교리와 엄격한 펠라기안주의의 차이점을 알고 있었고 마실리안의 교리가 완곡한 형태로 나타난 펠라기안의 잔재라고 대체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마실리안을(혹은 사실 어떤 다른 것을) 지칭하는 세미펠라기안이란 용어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데오드르 베자가 말하는 세미펠라기안은 누구인가?

 

세미펠라기안주의  세미펠라기안 이란 용어에 대한 최초의 사용은 데오드르 베자와 그의 반 가톨릭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시 분별할 수 있는 이단으로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정죄된 펠라기안주의 의 완화되고 교묘한 형태를 가리키는 이 용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베자는 마실란의 5세기 상황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이 용어를 사용한다. 베자는 세미펠라기안주의 세미펠라기안이란 용어를 발명한 사람인 것 같다. 그러므로 베자가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베자는 1556년 자신의 신약성경 주석에서 처음으로 세미펠라기안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베자는 인간 본성이 죄를 짓기 쉽지만 중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세미펠라기안을 동일시한다. [36] 관련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마침내 우리 시대의 펠라기안들이 행위의 의와 믿음의 의를 타협하려고 이 구절을 붙잡으므로, ( 불게이트의 번역자가 사실상 말하는 것은 이렇다 : ‘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않는다면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 , 어떤 행위로도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믿음에서 나오는 것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 다시 말하면, 어떤 선행으로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고 믿음에서 나오는 것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펠라기안들이 붙들고 으르렁거릴 구실을 막기 위하여, 먼저 바울이 믿음과 결부시킨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의 행위가 무엇인가를 묻고자 한다.(갈라디아서 2:6)

 

그러므로 바울은 죄로 인해 전적으로 죽은 인간의 본성에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다. 세미펠라기안 궤변가들이 붙들려고 하는 절반 죽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죽었다고 나는 말한다.(에베소서 2:3)

 

autou (그의 그에게 속한) 라는 대명사는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다. 이것은 단순히 약화된 인간 본성이, 은혜의 도움을 받는다고 상상하는 세미펠라기안들을 반박한다.(에베소서 2::10)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은혜를 자연스런 것으로 만드는 펠라기안이거나 자연이 은혜와 일치하고 은혜는 약화된 자연을 돕는 일을 할 뿐이라고 하는 세미펠라기안이다. (디모데전서 2:4)

 

그 외에는, 다시 말해, 악으로 돌진하면서 선에 관해서는 둔하고 허약할 뿐 아니라,(세미펠라기안 궤변가들이 그렇듯이) 선한 의지의 모든 원리를 전적으로 결여하는 것이다.(베드로후서 1:5)

 

베자는 로마서 8:10에 대한 카스텔리오의 번역과 관련하여 (‘ 만일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이다’), 카스텔리오의 성경 번역인, Ad Sebastiani Castellionis calumnias, 을 비판하면서 다시 세미펠라기안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37] 베자는 카스텔리오가 교황주의 팔라기안 궤변가들을 방치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카스텔리오가 칭의에 대하여 그리고 더우기 원죄에 대하여 세미펠라기안의 견해를 가진 교황주의자를(‘ ad papisticos sophistas semipelagianos tranfigies’) 옹호한다고 비난하였다. (베자는) 1560 Confessio christianae fidei에서 세미펠라기안들 우리의 다치고 연약한 자유 선택에 하나님의 감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인성의 타락한 상태를 완화시켰다. 오히려 인간은 그 모든 기능과 함께 전적으로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1563년에 헨리 에스티네가 제네바에서 출간한 베자의 Responsio ad defensiones et reprehensiones Sebastiani Castellionis 서문에 덧붙인, 바질의 목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베자는 세미펠라기안들을 원죄의 실재를 부인하는 자로 묘사하였다. (거기서 베자는) ‘독실한 모든 사람들은 원죄에 대한 논쟁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그것은 한때 교회와 펠라기안 사이의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이제는 우리와 세미펠라기안 사이의 논쟁이다 라고 말했다.

 

이 책에서 베자는 당대의 세미펠라기안주의(카스텔리어가 그 숫자에 들지 않으면 좋으련만)’ 에 대해 말하면서. 카스텔리오를 로마 가톨릭의 세미펠라기안주의와 연관을 시키고 있다. 그러나 베자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38] 베자는 서문에서 자신이 보기에 카스텔리오는 다름 아닌 펠라기우스의 충실한 제자였던 에크라눔의 줄리앙과 같은 자라고 말한다. 특히, 칼빈의 후계자(베자)는 어거스틴이 마실리안을 반대하여 쓴 논문을 자기 글에서 사용하지 않는다. 베자는 De dono perseverrantiae  De praedestinatione sanctorum 그리고 프로스퍼와 힐러리의 편지, 어디에서도 인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베자는 어거스틴이 에크라눔의 줄리앙의 Contra duas epistolas Pelagianorum 에 대해 대답한 글에서 나온 광범위한 증거를 제시하여 카스텔리오가, 이전의 줄리앙과 마찬가지로, 원죄로 영원히 더렵혀진 인간 속의 악한 본능이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으로 막지 않으면 스스로 무제한의 자유를 가지려는 본성을 가진 피조물의 상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베자가 가톨릭 신학자들을 세미펠라기안과 동일시한 사실과 이 용어에 대해- 베자는 이 용어를 마실란의 교훈에 대한 어거스틴의 글과 관계없이 만들어 냈다- 베자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는 베자의 학생인 마커스 빌드러의 필사노트 덕택에 알려진 1564-6년 베자의 로마서 강의에서 특히 분명히 나타난다. 마커스 빌드러의 노트는 문법도 잘 맞지 않고 뜻이 항상 분명하지는 않지만, 1564년경으로 추정되는 로마서 2장에 대한 노트는 아주 논리가 정연해서 베자가 실제로 말하려고 한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교황주의자들은 가르치길, 하나님은 [원죄로 인하여] 모독을 당하셨고... [인간]의 의지는 타락함으로 은혜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회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은 자유 의지와 은혜를 결합하며 세례로 인하여 원죄가 사라진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인간이 정욕은 어디서 나오는가? 교황주의자들은 대답하기를 세례가 원죄를 제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죄의 감정과 불씨가 남아있어서 우리를 시험하지만 우리를 파멸시키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교황주의자들의 견해이다. 교황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은 펠라기안이 말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은 세미펠라기안들이다.

 

이 글은 베자가 펠라기안주의에 비유하여 세미펠라기안이란 용어를 만들었으며 이 용어를 사용하여 세례를 받은 후에는 단지 죄의 불씨와 성향만 남게 된다고 가르치는, 원죄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이해를 표현했다는 증거가 된다. [39] 당연히 베자는 펠라기안을 반대하는 어거스틴을 지지하면서, 원죄가 아담의 후손에게 유전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펠라기안과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이 근본적으로 동일하지는 않고 다르다는 것을 베자는 고려하였다.

 

베자는 자신의 Quaestionium et responsionum christianarum libellus 에서 구원에서 인간의 공로의 여지에 대한 주장은 은혜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베자는 인간이 협력하지 않으면 최초의 은혜는 효과적일 수 없다고 말하는 세미펠라기안 궤변가들의 개념을 배척하였다. 베자는 자신의 다른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고 완전한 구주이시라고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인간이 자신의 의로움으로 스스로 의롭게 만드는 도구라는 생각은 세미펠라기안 궤변가들의 혐오스러운 오류라고 베자는 말한다. 베자에 따르면, 세미펠라기안주의가 가진 중심 교리는 구원을 일부는 하나님의 덕으로 돌리고 일부는 인간의 노력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미펠라기안은 믿음은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의지의 선택에서 믿음이 나온다.’ 생각한다. 1588 8월의 편지에서, 베자는 다시금 세미펠라기안들은 공로와 은혜의 협력을 옹호하는 당대의 무리들임을 분명히 하였다. 베자는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를 융합하는 반 펠라기안은 펠라기안주의가 표방하는 것,  autexousion 관념에 축약된 바,. 인간 능력에 대한 신뢰를 단지 완화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베자가 아콥 안드레에게 대답한 글에서도 확인되는데, 거기서 베자는 어거스틴의 글들은 과거에(‘olim’) 펠라기안을 효과적으로 논박하였듯이 여전히 오늘날의(‘nunc’) 세미펠라기안들도 효과적으로 논박한다고 말했다.

 

[40] 이렇게 볼 때, 베자가 은혜와 자유의지의 협력을 옹호하는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을 묘사하려고 세미펠라기안이란 용어를 일관되게 사용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베자는 완전한 펠라기안과 어떤 측면에서 펠라기안적인 것’( ‘prorsus vel aliquatenus Pelaginus’)을 구분하기 위하여 이 용어를 만들어내었다. 베자가 자기 글에서 세미라는 접두사를 사용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베자는 루터란 신학자은 요하네스 브렌츠의 추종자들 가운데 Brentiani  Semibrentiani를 구별하기 위하여 그 접두사를 사용했다. 칼빈은 피기우스가 그랬듯이 마실란을 반대하는 어거스틴 글에 실제로 의존하였지만 베자는 분명히 그렇지 않았음을 고려해볼 때, 베자는 세미펠라기안주의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만드는데 피기우스를 반대하는 칼빈의 논문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중반과 후반에 종교개혁의 신념을 찬성하는 신학자들은 마실란과 철저한 펠라기안의 차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미펠라기안 이란 용어는 마실란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 용어를 만들어낸 베자는 그 용어가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을 지칭하는데 사용되는 논쟁적인 용어로 보았다.

 

 

새로운 지시대상의 단계: 마실리안

 

1556년 이후에 루터란과 칼빈주의 자료에서 나온 증거에 의하면 세미펠라기안이란 용어는 처음에는 5세기의 교리적 구조가 아니라 오히려 16세기의 가르침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에 대한 더 이상의 증거가 있다. 1578년에 어거스틴의 논문, De haeresibus의 주석판을 발간한 램버트 단노는 펠라기안 이단의 근절할 수 없는 뿌리의 증거가 되는, 당대의 통상적인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을 묘사하는데 ‘Semipelagianismus’ 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583년에 처음으로 예정에 관한 책을 발간한 개혁주의 작가인 허버트 슈트름은 교황주의자들의 세미펠라기안주의를 반대하였는데 여기서 슈트름은 분명히 자신과 동시대의 인물을 의미하였다. ( 그러나 이들 [펠라기안과 세미펠라기안]에 대해서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를 참고한 것을 보면 슈트름은 좀 더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전례들도 생각한 것 같다.) 마찬가지로, 루터란인 야콥 안드레와 마틴 켐니츠는 이 용어는 마실란 논쟁과 관계없이 신인 협력적 필립주의자들에게 적용하였다. 1592년에 개혁주의 신학자인 야코부스 키메돈시우스는 인간 의지는 비록 약하지만 선을 행하려는 성향이 있고 은혜의 도움을 받는다고 말함으로써 어떤 세미펠라기안 에 대한 견해를 묘사하였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키메돈시우스의 대답은 어거스틴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키메돈시우스가 세미펠라기안주의를 반대하여 마실란을 생각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는 없다.

 

초기 로마 가톨릭이 종교개혁 시대에 가지고 있던 이단 목록에는 세미펠라기안주의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은혜와 자유의지에 관한 동시대의 로마 가톨릭의 견해를 언급하기 위하여 1556년경에 베자가 처음으로 말을 만들어 낸 후에 마실란 논쟁을 언급하기 위하여 세미펠라기안 세미펠라기안주의 라는 용어를 실제로 사용하였던 때가 몰리니스트 논쟁이 처음이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세미펠라기안주의라는 초기 이단이 1590년대에 출현하였음을 암시하면서 자킨은 세미펠라기안 이런 용어는 몰리니스트 논쟁의 맥락에서 마실란 논쟁을 지칭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1740년 비엔나에서 발행된 J.H Serry De auxiliis divinae gratiae 에 주로 의존하여, 쟈킨은 1594년으로 추정되는 세고비아의 대주교가 행한 예수회의 견책이 이 용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주장하였다. [42] 쟈킨은 동일한 의미에서 각각 1597년과 1600년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다른 로마 가톨릭 공식 문서에서 이 용어가 등장한다고 언급하였다.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을 본떠서 지은 De visibili momarchia ecclesia 의 로마 가톨릭 작가인 니콜라스 샌더나 샌더스(c. 1530-81)가 증언하듯이, ‘세미펠라기안이란 용어는 사실 그 용어가 등장하기 적어도 2세기 전, 몰리니스트 논쟁 중에 마실란의 교훈을 지칭하는데 적용되었다.

 

1571년에 루뱅에서 발간되었고 여러 번 재 발간된 이 책에는 세미펠라기안주의 라는 용어가 마실란과 440년 경 고울 지방의 기타 사람들의 견해를 지칭하는데 적용된 포괄적인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샌더스는 당시(c. 440)의 가톨릭 안에서 제기된 예정에 대한 어떤 의문들 이라는 제하에서 몇 가지 잘못된 사상을 구별하고 있는데 거기 대부분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잘못된 사상을 완강히 옹호한다면, 그 사람은 세미펠라기안으로 간주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아직 샌더스가 보기에는, 마실란은 이런 명백히 잘못된 견해들을 완강하게 주장하지 않았으므로, 샌더스로서는 어거스틴의 이전 기록이나 다른 가톨릭 교부들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 그들이 언급한 방식으로 마실란이 어거스틴의 의견에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그들을 이단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샌더스는 마실리안은 초기에는 이단의 목록에 거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샌더스는 만일 마실리안이 완강하게 주장하였다면, 어거스틴을 옹호한 자들이 마실란에게 전가시켰을 수 있는 6가지 잘못된 사상을 규명하였다. 마실리안은 은혜가 의지하려는 자에게 주어지지만 이 의지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43] 두 번째로 마실리안은 예정된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잃어버리거나 보전할 수 있다고 추정하였다. 더군다나 마실리안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거나 하나님이 저주하시기로 선고하신 자들의 수가 정해졌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네 번째 오류는 세례와 관련된 것인데, 세례받기 전에 죽은 아이들, 죽기 전에 세례 받은 아이들에 관한 진술이었다. 마실란은 주장하길, 이 구별은 이 아이들이 성인으로서 어떻게 살았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다고 하였다. 다섯 번째는 예정에 대해 설교하는 것은 격려보다는 절망을 낳는다는 견해를 잘못된 사상이라고 규명하였다. 마지막으로 마실리안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므로 아무도 제외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피의 성례에 나타난 속죄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예외 없이 제공된다고 믿었다. 샌더스의 이런 규명은 마실리안과 유사한 견해를 표명한 로마 가톨릭 신학자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 견해가 로마 가톨릭주의에서 단독적 의견이 아니었고, 그 견해를 완강하게 옹호하지 않았으므로 이단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샌더스의 책 De visibili monarchia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책은 여러 번 재 발간되었고 세미펠라기안의 오류에 대한 그의 분류가 호평을 받았다는 여러 가지 암시가 있었다. 로마 가톨릭의 논쟁가인 게오르그 엘더는 샌더스의 마실란에 대한 6가지 평가를 잉골슈타트에서 1581년에 발간된 자기 책 Metaeologia haereticirum 에 인용하면서 샌더스에게 빚졌음을 인정하였다. 이 책에서 엘더가 주고 겨냥한 것은 재세례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실란의 교훈과 세미펠라기안주의가 초기와 후기의 이단들을 구체적으로 다룬 글들이 등장한 것은 적어도 이 시기였다. [44] 그러므로 16세기 말에 로마 가톨릭 학자들의 글에서 세미펠라기안주의 라는 용어를 5세기 마실리안에게 적용한 것은 이런 전례를 따른 것이었다. 예수회의 가브리엘 바즈케가 아퀴나스에 대한 자신의 주석에서 세미펠라기안과 마실란의 견해를 토론하는데 상당한 부분을 할애할 때 까지, 이 용어에는 이단성을 내포하는 의미가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바즈케가 보기에 마실란은 어거스틴, 프로스퍼 그리고 힐러리가 반대했던 예정론을 주장한 펠라기안이었다. 바즈케는 단지 역사적 관심으로만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조직신학자로서 바즈케는 몰리니스트 논쟁의 많은 후기 신학자들이 세미펠라기안 마실란들이 옹호한 것과 비슷한 견해를 가졌음을 언급하였다.

 

세미펠라기안주의 라는 용어가 사용된 최초의 자료들은 5세기 마실리안의 교훈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당대의 로마 가톨릭의 견해를 지칭하기 위하여 데오드르 베자가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신교도의 것이다. 로마 가톨릭 작가들이 세미펠라기안주의라는 용어가 5세기 마실란에게 구체적으로 적용된 최초의 자료들을 기록한 것은 단지 우연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는 어려우나 한 가지 기억해야할 것은 16세기 후대는 신앙고백의 입장이 다양할 뿐 아니라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신앙고백에 반대하는 자들을 초기의 어떤 형태 이단과 동일시하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샌더스가 마실리안의 견해를 이단이 아니라고 옹호하는 방식은 샌더스가 자기 관점에서 신앙고백 논쟁의 맥락에서 그렇게 논쟁적으로 (그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당대의 신학자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여기에 덧붙여야 될 사실은 가톨릭이 펠라기안주의나 세미펠라기안주의를 반대하며 예정론을 강조하는 신교도들을 거의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바즈케의 경우는 로마 가톨릭 작가들이 세미펠라기안 인 마실란의 관점과 은혜에 대한 어거스틴주의나 도미니칸의 견해를 거스른 후기 스콜라 학자의(특히 예수회) 관점이 서로 일치하는데 대한 의문을 충분히 제기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신교도 역사학자들은 즉시 전례를 따랐으며, 마실란을 역사상 있었던 세미펠라기안 이단 종파와 동일시하는 것이 통상적이고 지배적인 관행이 되었다. 신교도 진영에서는 요하네스 라티우스(1617)와 게라두스 요아네스 보시우스(1618) 지은 17세기 초의 역사서에서 볼 때 마실리안이 이단적 세미펠라기안이란 사실은 분명하였다.

 

[45] 세미펠라기안주의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작가들 가운데, 그 용어를 만들어낸 공을 누구에게 돌렸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론적으로 이 용어를 만든 사람이 서로 관계가 없는 여러 명일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베자가 시작한 Begriffsgeschichte가 상당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최초의 증거가 베자의 글에서 발견된다. 작가, 학자 그리고 외교가로서 베자의 영향력을 보면, 베자가 이후에 사용된 이 용어의 기원이 될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별히 베자의 신약성경 주석은 이 점에서 중요하다. 더구나 안드레가 이 용어가 사용된 일치신조의 개요를 작성하기 전에 베자와 야곱 안드레는 여러 번 개인적으로 만났다.( 1557년 괴핑겐에서, 1557년 보름스에서, 1661년 포이시에서) 마찬가지로 세미펠라기안주의를 마실리안과 연관시킨 샌더스조차 이 용어를 베자로부터 받았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샌더스가 베자의 신약성경 주석과 신앙고백서를 인용한 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히 베자가 이 용어를 사용한 출판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베자가 이 용어를 만들어 내었지만, 그것이 이 용어의 의미가 처음부터 고정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여러 작가들이 이 용어의 새로운 의미를 고안하여,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소간 상정하는 당대의 다양한 입장들에 적용하였을 것이다.

 

1670년대에 세미펠라기안 운동을 펠라기안주의라는 일반적 제목아래 확대하여 다루었던 헨리(혹은 엔리코) 노리스는 이 용어를 발명한 것이 scolastici recentiores 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이 용어는 이미 100년 이상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680년에는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16세기의 원래 의미와 용법은 완전히 잊혀졌다. 다른 작가가 아닌 라이프니츠도 이후에 루터란과 칼빈주의자들이 공동으로 반대하였다고 생각되는 온갖 종류의 세미펠라기안들이 교회에 나타났음을 인정하였지만, 529년에 오렌지 공의회에서 정죄된, 세미펠라기안주의라는 초기의 유사 이단이 있었다고 믿었다. 요약하면 세미펠라기안주의 는 데오드르 베자가 은혜와 원죄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교리를 지칭하기 위하여 발명한 용어인데, 1556년 이후로 다양한 의미가 부가되었다. 적어도 1571년부터 이 용어는 특별히 몰리니스트 논쟁동안에 구원에 관한 어떤 형태의 신인 협력적 가르침을 일반적으로 암시하게 되었지만, 5세기 마실리안의 사상과 관련되어 사용하게 되었다. 이 용어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단의 성격이 가변적이며, 그리고 이단의 형태를 구별하는데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