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교리란 무엇인가?
2013-06-24 01:00:33
삼위일체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출발한다. 메시야이신 예수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라는 신앙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다. 사실 구약 성경에는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할 직접적인 본문이 없다. 심지어 신명기 6장4절은 명시적으로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심을 말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한 분이란 말의 의미는 존재적 의미라가 보다는 관계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당하다는 것이 밝혀졌으므로 이 구절이 삼위일체 교리를 반대하는 것으로 인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구약성경은 삼위일체 교리를 반대하는 본문은 없을지 몰라도 지지하는 본문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삼위일체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이어진 성령의 강림으로 형성된 것이다.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 그리고 자신과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 이 세분의 관계를 이해하려던 신학적 노력이 삼위일체 교리로 헝성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관은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계심을 믿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를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구별하는 결정적 교리가 바로 삼위일체 교리인 것이니 그만큼 기독교는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신관은 모든 신앙의 토대인 만큼 바른 신관을 떠나서 바른 신앙을 이야기 하기 어려울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기초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의 교리와 연관된 교리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근본교리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삼위일체 교리가 현대 교회에서는 가르쳐지고 있지 않으며 신자들의 신앙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지 않다. 더구나 삼위일체 교리가 신자들의 실천적 삶에 어떤 함의를 갖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삼위일체 교리가 그동안 성경에 바탕을 두고 발전되어 오기 보다는 너무 철학적 사변에 치우친 결과가 아닌가 한다. 특별히 서방신학은 하나님의 하나됨을 전제로 삼위일체를 사유해 왔기 때문에 한 분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셋이 될 것인가를 설명하는데 치중하였고 그 결과 양태론이나 종속론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사실 오늘날 현대의 신자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막연한 생각은 양태론이나 종속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동방신학의 전통은 하나님이 세분 이심을 전제하고 어떻게 세분이 하나가 되시는지를 설명하려고 하였고 그 설명은 신비한 연합이나 상호 교통(페리코레시스) 들의 교리로 발전되었다.
이제 우리가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되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되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삼위일체 교리에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성경의 계시일 것이다. 앞서 인용한 신명기 6장을 필두로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끝임없이 강조하였다. 그리고 신약성경도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음을 여러곳에서 말하고 있다( 고전8:4, 엡4:6, 약2:19 등) 그 결과 서방신학은 말할 것도 없도 동방신학도 하나님의 숫자적 하나됨을 설명하는 일에 골몰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유일성이 존재적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으로 다시 생각하여야 한다. 즉 하나님의 유일성이 강조된 것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신이란 점 그리고 구약적으로는 이스라엘 신약적으로는 그리스도인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유일하시다는 언약적 유일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삼위일체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적 유일성에 억매이지 않고 삼위일체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점에서 삼위일체에 관해서는 동방신학의 전통이 성경적 토대에 근거한 바람직한 접근이라고 생각된다. 그 다음에 생각할 점은 삼위일체 교리를 형성한 성경의 계시가 역사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삼위일체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의 강림하심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의미는 역사 초월적 계시가 아니라 역사적 계시이며 마찬가지로 성령이 하나님의 영이며 혹은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의미도 초역사적 계시가 아니라 역사적 계시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역사 너머에서 삼위 하나님이 서로 어떤 존재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은 역사적 존재인 인간과는 무관한 일이며 인간이 알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삼위일체 교리는 너무 하나님의 초역사적인 존재면에 골몰하였고 그 결과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의 계시를 떠나 사변적인 교리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이 창조경륜을 이루시기 위하여 역사 가운데 함께 일심동체로 일하신다는 점이다. 성경은 삼위하나님이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창조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역사 가운데 함께 일하신다 것을 말한다. 이런 사상은 구약의 3대절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출애굽에서 유래된 유월절 절기가 하나님나라의 출발을 의미한다면 일곱 안식일이 지나 첫 곡식을 거두는 오순절은 하나님나라의 첫 결실을 의미하며 한 해의 추수를 마치고 곡식을 저장하며 추수의 즐거움을 나누는 축제인 장막절 절기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가리킬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삼대절기는 신약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시는 삼위하나님의 공동 사역의 예표였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에 죽으셨으며 성령님은 오순절 절기에 강림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부하나님은 장막절 절기에 심판을 행하실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신약적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시작되었으며 성령님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아 역사 가운데 하나님나라를 진행해 나가시고 계시며 성부 하나님은 성령하나님의 사역을 이어받아 하나님나라를 종말론적으로 완성하실 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 교리를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공동사역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성경의 계시에 합당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의 실천적 함의에 대하여 생각할 차례가 되었다. 도대체 삼위일체 교리는 신자들의 실천적 삶에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므로 인간관은 신관에 기초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동 역시 하나님의 행동에 근거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삼위일체와 관련된 성경의 계시로 부터 존재와 사역의 두가지 면에서 교훈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인간은 개채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 존재라는 점이다. 삼위 하나님이 각각 구별된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면서도 마치 한 분이신 것처럼 공동체를 이루시듯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 역시 개체적 존재이면서 공동체적 존재라는 성경적 인간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에서 개인이 존중되면서도 동시에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이런 인간관에서 출발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역사에서 개인과 집단의 갈등은 해결된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런 성경적 인간관은 개인과 집단이 갈등하지 않고 하나가 되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는 삼위 하나님이 하나가 되어 함께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일을 하신 사역적 면이다. 삼위 하나님이 함께 일하신 사역의 목적이 창조목적 곧 하나님나라를 이루시는 일이라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인간 역시 인간 활동의 긍극적 목적은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일에 무관심하다면 그는 이미 존재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이렇게 존재와 사역의 양면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본받게 될 때 하나님은 그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이루실 것이다.
[추기]
구약에 삼위일체에 관한 명시적 반대본문 없다고 하더라도 명시적인 지지 본문이 없다는 것은 이미 언급하였다. 이것은 계시의 역사적 성격상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 강림 사건이 역사적으로 성취되기 전에는 성경은 삼위일체에 대한 계시를 명시적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기독교의 근본 교리인 삼위일체가 근거하는 성경은 주로 신약성경인 것이다. 그런데 삼위 일체 교리를 명시적으로 지지 하는 신약 성경에는 내재적 삼위일체보다는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계시가 더욱 근본적이고 풍부하게 나타난다. 역사 이전에 삼위 하나님이 내재적으로 어떤 관계로 존재하시는가에 대하여 신약성경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은 역사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께 순종한 사건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된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함께 고통을 당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성을 철저히 숨기시고 전적으로 어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지금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에서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그 사역에는 항상 성부와 성령이 함께 하신 사역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단독적이고 독립적인 사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성령의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무엇보다도 성령은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내셨다고 표현되고 있다. 나아가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면서 동시에 아들의 영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작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숨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을 하시고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를 신자들에게 적용시키시는 일을 하신다. 성령의 독자적인 일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으니 성령도 철저히 자신을 숨기시고 아버지와 아들의 뜻을 성취하려고 일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사역에는 항상 성부와 성자가 함께 하셨고 성령의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사역은 없었다고 말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부의 심판 사역이다. 요한계시록은 심판의 주체가 성부하나님이심을 분명히 계시한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이 직접 나서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인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심판 사역을 행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심판 사역의 주인공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사역에 성자와 성령은 함께 하셨으니 성부의 독립적이고 단독적 사역 역시 없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상의 간단한 고찰에서 삼위 하나님이 항상 동일한 목적을 향하여 함께 사역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각 사역에서 구원 사역은 성자가 앞장 서시고 적용 사역은 성령이 주도하시며 심판 사역은 성부가 주체이시지만 각 위의 하나님이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사역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된다. 우리는 여기서 삼위 하나님의 내재적인 관계에 대하여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삼위 하나님이 따로 계시거나 독립하여 일하시거나 다른 목적을 각기 가지고 계신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언하였을 때 우리는 신약의 계시를 따라서 그 창조사역은 어느 한 분이 앞정서서 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사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창조 이후에 삼위 하나님이 하신 사역도 공동 사역이며 (비록 역사 가운데 순서가 있고 앞장 서신 분은 계시지만) 이 공동 사역은 최초의 공동 사역인 창조사역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고 창조의 계속 내지는 창조목적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 역시 창조의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하고 성경이 구원을 새 창조라고 부르는 이유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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