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 by 고재수(N.H.Gootjes)
2013-04-16 23:33:48
4장 에덴동산의 강들(창세기 2:10-14)
천지창조에 관한 창세기 기록에서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않은 네 강에 대한 구절을 만난다.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이 왜 창조 이야기에 포함되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낙원에서 흐르는 강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동산에 강이 흐르게 하신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낙원을 매우 아름답게 만드셨지만 물이 흐르지 않으면 이 동산은 이내 말라버리고 황폐해 질 것이다. 낙원에 흐르는 강은 낙원만 적신 것이 아니라 네 강으로 나뉘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이것은 낙원에 생명을 가져다 준 강이 낙원을 벗어나서도 생명을 공급하는 일을 계속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낙원에서 이 강을 따라서 다른 지역으로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낙원은 단지 에덴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일부일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에 충만하라고 축복하셨으므로 사람들은 낙원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낙원 밖으로 나가야 했을 것이다. 강이 낙원에서 발원하여 낙원 너머까지도 흐르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세계를 사람들에게 열어주신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역사가 시작될 때 부터 그리고 죄가 들어오기 전 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낙원에만 국한하여 살기를 원하신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시면서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 사람은 낙원에서 아무 일도 안하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경작하여야 했던 것이다. 에덴 동산은 사람이 일을 하고 살 것이 예상된 곳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경작은 에덴 동산만 아니라 강을 따라서 에덴을 넘어서도 이루어질 것이었다. 이것은 창조시부터 예상된 일이었다. 우리는 죄가 없었던 세계의 삶에 대하여 종종 그릇되게 생각한다. 낙원에서는 하는 일 없이 유유자적하게 거닐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고 손에 닿는 나무에서 아무 열매든지 따먹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지내는 것으로 상상한다. 그렇지만 그때에도 삶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낙원에서도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하여 땅을 경작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낙원에서의 삶을 엄격하게 실용성만 추구하는 것으로 한정해서는 안된다. 강이 있었기 때문에 낙원을 떠나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도 있고 금이나 베델레엄이나 호마노 같은 보석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이런 것을 가공하여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즐길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2장의 본문은 타락 이전의 기록이므로 그것이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우리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살고 있으므로 이 본문이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느냐는 반문인 것이다.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이야기 하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물론 우리는 창세기의 이 본문을 그 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발생한 변화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고려하여야 한다. 이런 단서를 달고서, 우리는 오늘날 죄가 들어온 세상에서도 창세기 2:10-14의 본문을 여전히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야 한다. 만일 창세기의 이 본문이 죄로 타락한 것과 그리스도의 계시보다 앞선 상황을 묘사하기 때문에 오늘날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실이나 혹은 혼인 제도를 정하신 것도 오늘 우리의 삶과 무관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저주를 더하셨는데 여자에게는 잉태하는 고통을 더하셨고 남자에게는 땀을 흘려 일하여야만 겨우 먹고 살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빼앗아 가신것이 아니라 출산의 고통만 더하신 것이고 남자에게도 경작하는 일을 빼앗아 가신 것이 아니라 단지 땅에서 일할 때 고통을 더하게 하신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이야기 하자고 말하는 것은 매우 경건하게 들린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의 맥락에서 분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가 먼저 온다. 사람이 범죄하고 타락한 이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시작의 전부도 아니고 마지막의 전부도 아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사역의 시작과 마지막의 중간에 오셨다. 물론 기독론이 성경계시의 중심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중심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교리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구원과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교리는 모두 허공에 매달린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근본적으로 창조목적의 회복이지 새로운 시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방식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창조의 일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창조의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두가지 함정에 빠질 것이다. 첫째는 우리의 신앙과 매일의 생활을 분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서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즉 일상의 일을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만 한다면 매일의 생활은 무엇이든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두번째 함정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싶지만 일상 생활에서 그것을 잘 실천할 수가 없다. 그래서 돈은 먹고 살 만큼만 최소한도로 벌고 나머지 시간은 가능한 많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일을 전파하려고 한다. 마치 매일의 일에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은 영적인 예배가 아닌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창조와 구원을 결합할 때만 우리는 매일의 삶에 대하여 바른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일을 바라보았을 때에만 우리는 매일의 삶에 대한 바른 관점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하나님이 창조시에 정하신 규례를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6장 스킬더의 '그리스도와 문화'
"우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물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내것이라 주장하지 않으시는 영역은 단 한치도 없다" 카이퍼의 이 말은 스킬더 자신의 확신이기도 하였다. 스킬더는 하나님의 백성이 문화적으로 활동적이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강조하였다. 1920년대에 사회의 여러분야에서 펼쳐졌던 개혁파 세계는 카아퍼의 작품이었다. 카이퍼는 문화라는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문화라는 단어는 경작(cultivation)이라는 관념과 연결이되므로 카이퍼는 문화라는 단어가 하나님편이 아니라 사람편에서 시작하는 사람들이 사용한다고 생각하였다. 문화라는 단어가 인간중심적이라는 이유로 카이퍼는 그것 대신에 일반은총(common grace) 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를 원한다. 카이퍼는 칼빈과 종교개혁의 선배들이 일반은총에 관하여 말했으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편에서 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이퍼에 따르면 문화는 은총의 문제로서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자격없는 사람들에게 내려주신 은총의 결과이다. 카이퍼는 인간 문화의 발전이 무엇보다도 일반은총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은총은 일반적이기 때문에 문화는 하나님의 백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문화는 모든 곳에서 발전해 왔다. 그러나 일반은총에 근거한 문화는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에 특별은혜가 덧붙여져야 문화는 충분한 장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카이퍼의 견해이다.
카이퍼는 일반은총은 그리스와 로마에서 나타난 바대로 기독교를 위한 준비였다고 한다. 기독교가 그리스와 로마문화에 덧붙여졌을 때 이 문화는 유례없이 비약적으로발전하면서 꽃을 피웠다. 카이퍼는 서양문명의 확대는 그리스도의 통치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기독교 신앙을 그리스 로마 문화에 덧붙이셨다. 그래서 일반 은총은 서양문명의 뿌리에서 작용하였는데 이제는 그리스도의 특별은혜로 인하여 훨씬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하였다는 것이다. 카이퍼에 따르면 서양문명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역(특별은혜)과 문명의 발전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럽과 미국의 기독교 세계는 역사를 통틀어 인류가 도달한 최고의 발전이라고 말한다. 카이퍼의 이러한 관점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영혼을 구원하거나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국한되지 않고 그리스도는 문화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취하여서 그 안에 기독교의 능력을 주입해 넣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문화가 다른 문명들 보다 더 높이 상승할 수 있었다고 한다. 카이퍼는 이런 방식으로 다른 문명들의 퇴보와 서양문명의 진보를 설명하였다. 기독교 문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영향을 받은 서양문화가 있을 뿐이며 그러므로 기독교 문화를 지향하며 일할 필요가 없고 다만 서양문화를 더 기독교화하려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카이퍼가 정치와 고등교육을 위해 벌인 활동은 이러한 문화관과 떼어 놓을 수 없다. 반혁명당과 자유대학교는 서양사회를 좀 더 기독교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었다.
카이퍼 당대의 사람들이 서양문화의 위대함에 대하여 품고 있던 거의 무한한 신뢰가 스킬더 시대에 와서는 산산조각 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서양문명은 위기에 처하였다. 이제 서양문화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이 문화가 고대문명에 대한 기독교적 영향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주장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신학자 스킬더였다. 카아퍼와 마찬가지로 스킬더도 문화에 대하여 논할 때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한다.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그의 논문의 원래 제목은 '그리스도와 문화적 삶'이었다. 스킬더는 그리스도의 직분의 본질은 구원하는데 있는데 그리스도는 문화의 관계에서도 구원하시는 주님이시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반역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며 그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임부이다. 세상은 합법적인 주인에게 돌려져야한다. 그 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자신과 함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새롭게 하신다.
문화에 관하여 말할 때 카이퍼와 스킬더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하지만 그리스도가 문화에 대하여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서로 견해가 다르다. 카이퍼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로마 문화에 특별 은혜를 부으시는 문화의 구주로 보는데 비해 스킬더는 그리스도를 인간의 구주로 바라본다. 스킬더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불순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금 그들의 문화적인 활동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만드는 일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스킬더는 인간의 문화 의무는 낙원에서 받았다고 한다. 인간의 문화의무는 창1:28의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창2:15의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충분히 발전된 상태로 창조하시지 않았다. 낙원에서 살게된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일하여야 했다. 아담의 범죄이후에 인간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두신 구조들을 피할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은 불순종하면서 이 세상에서 일한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가 개입하셔서 죄인을 거듭나게 하는 일을 하신다. 스킬더의 확신은 그리스도가 문화적 삶을 위해서도 자비의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시에 선언된 하나님의 명령앞에 인간을 다시 세우시는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문화적 일을 해야 한다.
이상의 논의에서 우리는 '문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스킬더의 견해를 묻게 된다. 스킬더는 문화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사역의 총합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이 땅에서 수행하는 모든 유형의 노동이 문화에 속한다는 것이다. 스킬더의 문화관에서 두번째 중요한 면은 문화명령이 세상을 계발해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다는 것이다.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완전히 발전된 형태로 창조되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여러 가능성을 지닌 세상을 지으셨고 인간은 일을 하여 그 가능성들을 실현하여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킬더는 창조에 근거한 발전(evolution)에 관하여 말한다. 세상은 인간의 문화 활동에 의하여 변할 것이다. 스킬더 문화관의 세번째 특징은 문화 명령은 온 인류의 의무라는 것이다 문화명령은 최초로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졌고 그 다음에 그들의 후손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문화활동에 참여하여야 하고 자신들의 일상의 과업을 문화활동으로서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범죄이후에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재료들과 자신들에게 주신 재능을 가지고 일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 이 불순종의 결과로 그들의 문화활동은 상당부분 더럽혀 질 것이고 종국에는 그들의 문화적 성취들이 토르소스 혹은 끝이 잘려나간 피라미드들 뿐임이 자명하여 질 것이다. 물론 거듭난 사람들도 있고 그들의 문화활동에서의 순종이 가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완성된 문화발전으로 이어지지는 못할 것이다. 기독교 문화 역시 끝이 잘린 피라미드로 남는다. 그 이유는 거듭난 자들이 소수이므로 그들이 세상에서 사명을 수행하는데 제한된 인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그들 안에 여전히 죄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해야 할 마지막 면은 문화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 순간 부터 그의 문화 행위도 하나님에게서 이탈되었고 문화 발전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문화의 산물들이 오히려 위험하게 될 수가 있다. 또힌 죄는 문화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갖게 만든다. 문화에 대한 스킬더의 시야는 카이퍼 만큼 넓지 못하다. 그는 세게사를 카이퍼 처럼 거시적 관점으로 개관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성찰은 카이퍼보다 깊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그들에게 일상의 과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음 명령으로 알고 수행하라고 격려한다.
스킬더의 관점은 신랄한 비판을 받아왔다. 스킬더가 언급한 문화명령은 성경적인 토대가 없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노르드만스는 스킬더의 문화관이 복음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며 그는 스킬더의 문화관을 일반은총 교리를 일반화하고 성경을 폄훼한 행위라고 비난하였다.문화명령에 대한 스킬더의 주된 증거는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후 하신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그에게 요구하신 최초의 순종으로 인간을 되돌리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다. 문화명령은 인간이 죄가 없는 세상에서도 일을 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발명하여야 할지 상상해 보게 한다. 그러한 의무가 낙원에서 인류에게 실제로 주어졌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은 땅을 경작을 해야했고 이것은 낙원에서조차 인간은 과일이나 따 먹으면서 한가하게 살도록 되어있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 문화명령이 인간의 타락이후에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는가? 시편 8편은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 시편은 창세기 1장을 상기시킨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뒤에도 인간은 여전히 창조 세계에서 그가 최초에 지녔던 것과 동일한 지위를 지닌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고 그 의무를 수행하도록 재능과 자원이 주어졌음을 보여준다. 스킬더는 '너희는 하나님과 함께한 동역자들이라' 는 구절도 사용하였다. 문화명령이 성경적 근거를 가진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할 만큼은 이야기 하였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수행하여야 할 의무가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잠재적인 것을 개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문화 명령에 대하여 가해진 또 다른 비판은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 그릇된 관점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낙원에서 인간에게 문화명령을 내리셨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의무가 더 이상 우리가 사는 죄악된 세상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늘 날 필요한 것은 문화 발전이 아니라 복음전파이다.주님의 재림은 문화 명령이 성취될 때가 아니라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리가 문화명령을 성취하는데 달려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스킬더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스킬더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문화적 노력이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지니는 성격이다. 이 시기가 오직 복음 전파의 의무만 수행하고 이 세상에서 일할 의무는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인가? 이러한 견해는 신약성경의 교훈에 분명히 어긋난다. 창조와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의 시간이 갖는 의무는 복음 전파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시기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그들 안에서 일하시는 시간이기도 하다. 또한 성령께서는 더 이상 낙원이 아닌 죄악된 세상에서도 우리가 일상의 과업을 창세기 1,2장에 비추어서 바라보고 수행하도록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서 중생은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일상의 과업을 수행하는 방식에서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이며 동역자로 일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스킬더의 문화명령에 대해 가해지는 세번째 비판은 좀 더 실천적이다. 세상을 개발하는데 따르는 위험들이 가시화된 시대에 문화명령을 어떻게 주장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세계는 문화명령하에 죽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지구의 자원들을 사용한 과정에서 자연이 고초를 겪어 온 것은 사실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일부분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문화명령이 어떻게 그 주범으로 비난을 받을 수 있겠는가? 물론 우리는 창조 세계를 남용하는 행위에 대하여 스킬더가 예상할 수 있었던 것 보다 더 강력하게 경고하여야 한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정상궤도를 벗어난 성장, 불법적이고 더러운 성장이지 창조세계 자체의 사용과 개발이 그릇된 것은 아니다.
문화명령에 대한 스킬더의 견해가 원칙상 성경적이고 바르다면 그 결과들은 무엇인가? 세가지 결과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의 문화적 과업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를 인식해야 한다. 모든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를 무시해서는 인되고 이 세상에서 일하라는 명령안에서 서로 협력하여야 한다. 문화명령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직종에서 일할 수 있다. 교회에서는 직종 때문에 다른 사람을 업신 여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상대는 동료 사역자요 자기 분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다. 두번째 결과는 우리의 일상의 과업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 순종의 일부분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우리의 일상의 직업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다. 물론 모든 직업에는 단조로움과 수고가 따른다. 하지만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도 우리가 주님 앞에서 날마다 수행해야 할 과업의 일환으로 알고 수행해야 한다. 문화명령은 주중의 날 들에 대한 올바른 관점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말의 자유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되고 매일의 과업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무의 일부분이다. 이런 확신은 우리의 일의 질을 향상시킬 것이다. 세번째 결과는 교회에서 목사들과 장로들의 의무에 관계된다 복음은 신자들을 다시금 시초에 재정된 의무에 직면하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일상의 직업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에 비추어 설명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의 설교를 신자들의 내면의 삶에 제한해서는 안된다. 일상의 과업이 설교의 범위안에 들어와야 한다. 설교는 목사가 섬기는 회중의 일상의 삶을 다루어야 한다. 일터와 교실에서의 윤리가 강설에서 언급되어야 한다. 스킬더는 다시금 우리에게 문화명령을 가르친 하나님의 도구였다. 우리는 그것을 이런 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 여러분의 일상의 과업을 하나님께서 태초에 주신 의무의 일부분으로 바라보십시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된 사람들로서 행하십시요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일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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