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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에 대한 칭호- 김영한 교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칭호- 김영한 교수

2013-03-02 20:40:03


[김영한 교수]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초대 원장).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초대교회가 탄생하면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였다, 신앙고백을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새로운 칭호가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기독론적 칭호(christological title)이다. 이 칭호들은 이미 예수의 지상적 사역에서 예수 자신이 자기에 대해 사용하신 칭호에서부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 의해 붙여진 칭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이 칭호들은 바로 역사적 예수의 생애 전체를 포괄한다. 이 칭호들은 그 분이 누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결실이요, 훈장이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전리품과 같은 것이다.

 

예수의 지상적 사역을 가리키는 칭호들은 “선지자”, “고난의 종”, “대제사장”이다. 이러한 칭호들은 이미 유대교에 있었다. 그리고 예수가 즐겨 사용하던 칭호들은 “인자”와 “고난의 종”이라는 칭호들이었고, “메시아(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들은 비밀로 붙여졌다. 이 칭호들은 이미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서부터 있었다. 예수의 부활 이후에 이 칭호들 “메시아”(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은 더욱 활성화되었고, 새로운 칭호들, “주(Kyrios)”, “구주(Soter)”, “성육신하신 말씀(Word)”, “성자 하나님(God)”, “심판주”(오실 자)라는 칭호들이 더 붙여졌다.

 

I. 부활절 이전의 지상적 예수의 칭호

부활절 이전 역사적 예수의 지상에서의 사역에서 그에게 붙여진 칭호들은 “인자”, “고난의 종”,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였다.

 

1. “인자”

“인자”라는 칭호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예수께서 자신에 대하여 겸허하게 사용하신 용어였다. 이 칭호는 인간과의 본질적 연대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다.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는 섬기러 온 그의 사명을 가르치기 위하여 “인자” 칭호를 사용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는 병 고치는 권세와 관련하여 이 칭호를 사용한다:“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막 2:10). 예수는 변화산의 신비체험 후에 제자들에게 그가 받으실 고난과 관련하여 말씀하실 때 이 칭호를 사용하신다:“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앞으로 받으실 그의 고난과 관련하여 이 칭호를 사용하셨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31).누가도 이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눅 9:22).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앞으로 다가올 묵시록적 “인자(人子. the Son of Man)의 날”과 관련하여 “인자”가 영광 속에 나타날 것을 시사(示唆)하여 사용하신다. 이 인자는 다름아닌 예수 자신이다. 그 전(前)에 “인자”는 먼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어 이 세대로부터 버림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는 그의 재림과 관련하여 사용하신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눅 17:25).

 

2. “고난의 종”

예수는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후에 비로소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릴 때 이 칭호를 사용하신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배척과 고발과 심문과 사형언도와 죽임을 당하는 “고난의 종”의 직분이 자신이 부여받은 메시아적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공관복음서에서는 “고난의 종”이라는 칭호는 “인자” 칭호와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다(막 8:31, 눅 9:22, 마 16:25). 예수께서 “고난의 종”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고난의 종이라는 신분은 예수 자신이 독특하게 자신의 메시아 의식으로 스스로를 이해했던 메시아적 사명이었다. 이러한 “고난의 종”이라는 자기 이해 때문에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를 따르는 많은 군중으로부터 배척받았으며, 제자들에게도 배반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최후에 이르게 된다.

 

3. “메시아(그리스도)”

“메시아”(Messiah)라는 히브리말은 “그리스도”(Christos)라는 헬라말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왕이나 제사장은 기름 부음을 받았다. 기름 부음이란 그 직책을 위하여 성별되었고, 권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백성을 구원하는 사명을 수행하는 자이다. 이 칭호는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했던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공적으로 사용되었고 역사적 예수는 이를 시인하신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들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6-17). 지상적 예수는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고 난 후에 자신에 대한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비로소 인정하시나 곧 다시 비밀에 붙이라고 말씀하신다. 아직도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신 것이다.

 

4.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지상적 예수께서 직접 사용하신 것과 사도 바울이 사용한 것으로 나누어진다.

1) 예수 자신에게서 나온 호칭

지상적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칭호를 사용하심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관계를 나타내셨다. 이 칭호는 예수 자신으로부터 기원한다. 예수는 복음의 진리를 아는 일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을 감사하시면서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신다:“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누가도 지상적 예수께서 하신, 이와 거의 동일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눅 10:22). “아들”이라는 칭호 자체는 이미 예수가 갖는 아버지 하나님과의 가장 독특한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함의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자신을 “아들”이라 칭하고 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는 아들의 전권에 관하여 말씀하신다.“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 5:19-23). 예수께서는 이어서 자신이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요 5:25-27).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하신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자신을 아들로서 칭하고 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 17:1-2).

 

2) 사도 바울의 호칭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로마서와 고린도 전서에서 예수에 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를 영적 환상으로 체험함으로써 그가 바리새인이었을 때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상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였다. 역사적 예수는 이제 사도 바울에게는 더 이상 유대교의 율법을 파괴하려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는 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인되었다.

 

 

II. 부활절 이후의 예수의 칭호

부활절 이후 부활하신 예수에게 붙여진 칭호는 “주”, “구주”, “성육신하신 말씀”, “하나님”, “심판주”등이다.

 

5. “주” (Kyrios)

“주(퀴리오스)”라는 단어는 죽은 후 신이 된 로마 황제에게 사용한 칭호였다. 초대교회는 이 칭호를 로마 황제 아닌 그리스도에게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로부터 박해를 받기에 이른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바울은 예수를 “주”라고 부르고 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5-6). 당시 로마시대에는 각 신전마다 많은 신상들이 있었고, 각 나라마다 만신전(萬神殿, pantheon)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만가지 신들을 숭배하였다. 죽은 로마 황제는 “주”라는 칭호로서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초대교회는 로마 황제에 대하여 붙이는 “주”라는 칭호를 부활하신 예수에게 붙이고 예수만을 “주”라고 고백하고 로마 황제 숭배를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박해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2).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도 사도 바울은 당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 찬가(Christ hymn)를 인용하면서 예수를 주라고 부르고 있다:“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

 

6. “구주”(Savior, soter)

누가는 예수의 탄생과 관련하여 이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그리고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의 베드로와 사도들이 유대의 대제사장과 공회 앞에서 예수에 관하여 증언할 때 “구주”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서 예수의 재림과 관련하여 “구주”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그리고 디도에게 보낸 서신에서 바울은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초대교회 서신에서 보는 바같이 역사적 예수는 초대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그분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구주”라는 호칭을 받기에 이른다.

 

7. “성육신 하신 말씀”

사도 요한은 지상적 예수를 “말씀”이라고 부르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요한에 이르러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호칭되고 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예수는 이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사도 요한은 이 태초의 말씀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인간의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람, 즉 마리아의 아들이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지상적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논쟁하는 가운데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고 말씀하신다. 이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요 8:57)고 반문한다. 이에 대하여 지상적 예수는 대답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 이러한 요한의 기록은 예수도 자신이 “태초의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발언은 그의 메시아적 자의식(Messianic self-consciousness)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예수가“태초부터 계시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거듭 증언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8. “하나님”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도마의 신앙고백을 기록하면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고 의심한다. 8일 후에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 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한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9. “재림의 주”(심판주)

복음서 저자 마태에 의하면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시는데 이 인자는 세계 종말에 심판자로 오실 자이다. 인자는 세계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선인과 악인을 분별하실 것이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마 25:32). 그리고 인자는 영광의 보좌에 앉으사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실 것이다. 마태는 예수 자신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이러한 예수의 다양한 칭호는 그분이 행하신 구속 사역의 다양한 측면과 관련된다. 앞으로는 이러한 칭호를 그분의 역사성과 관련하여 보다 자세히 성찰해 보기로 한다. 십자가에서 예수의 죽으심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 시작은 부활과 더불어 개통되었고, 이어 성령의 오심과 초대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역사적 예수의 구속론적 영향력은 그의 제자들이 세운 교회를 통하여 세계선교로 뻗어 나간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퀴리오스”(Kyrios, 주, 主) 칭호

 

  퀴리오스”(Kyrios, 주, 主)라는 용어는 신약시대에 유명한 인물에게 존경을 나타내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헬라 이방세계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로마 황제나 이방신들, 예컨데 사랍시스(Sarapsis)나 이시스(Isis) 등을 가르키는 의미로까지 확대되어 사용되었다(마르틴 헹엘, 『하나님의 아들』, 164). 그러나 유대인들의 70인역에서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Adonai)를 가르키는 말로써 자주 사용되었다. 이것은 야웨(Jaweh)의 대체어로 사용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에 대한 특별한 호칭으로 “주”(퀴리오스, Kyrios)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존경을 나타내는 선생(Sir)이라는 표현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칭호는 존경 이상의 의미를 나타낸다. “주”(the Lord, ho kyrio)라는 칭호는 부활하신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70인역에서 이처럼 사용된 칭호가 부활한 예수에게 적용될 때에는 신적 본성의 의미가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Gutherie, 『신약신학』, 331).

 

1. 마가의 사용: 예수는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성에 입성하기 위한 나귀를 구하러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나귀를 사용하는 자를 묻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주”라고 칭하도록 하신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막 11:3). 여기서 “주”(퀴리오스)라는 존칭을 사용하심으로써 예수는 자기 자신을 구약에서 약속된 다윗이라고 소개하신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군중들은 예수를 따르면서 환호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 11:9-10). 여기서 군중들이 사용하는 ”주“라는 존칭은 다윗의 영광으로 오시는 정치적 메시아를 지칭하고 있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 시편을 인용하시면서,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단지 “다윗의 자손”이라는 유대인의 편견을 교정하시고자 하신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막 12:35-37). 예수는 자신의 사역이 메시아 사역이라는 의식(意識)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로서 왔다고 보는 것은 옳다. 그러나 예수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신다.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라면 왜 다윗은 메시아를 주라고 호칭했는가 질문하신다. 예수는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신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예수는 시편의 본래 구절의 “여호와”를 “주”로 바꾸어 인용하시고 있다. 그는 이 구절을 성부가 그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하신다. 이 구절은 아주 오래된 시편으로서, 유대 임금의 대관식 때 쓰던 예배의식문의 부분이었던 것으로 추측한다(성경전서 독일성서 공회판, 967). 성전 예언자가 자기 주인 왕에게 여호와께서 그를 나라를 관장하는 자신의 대리자로 세우셨음을 확실히 하는 말씀이다. 이러한 위엄은 그가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음으로써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발등상이란 굴복한 적의 목을 발로 밟던, 옛 중동의 관습에 근거한다. 예수는 이 시편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자신이 단지 다윗의 후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막 12:37). 후기 유대교에서는 이 시편을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에 관련시켰다. 초대교회는 이 시편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과 높아지심에 관련시킨다.

 

2. 누가의 사용: 부활하신 예수를 주로 호칭

누가는 예수를 즐겨 “주”(호 퀴리오스, ho kyrios)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세례자 요한 탄생 기사에서 하나님을 “주”로 묘사하고 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제사장 사가랴가 하나님의 제단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때 천사가 나타난다: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눅 1:9-11). 하나님의 성소를 “주의 성소”, 하나님의 사자를 “주의 사자”라고 호칭하고 있다. 천사는 사가랴의 아내에게 여태까지 수태하지 못한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나을 것인데,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명한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여기서 누가는 하나님을 “주”라고 호칭하고 있다.

누가는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엠마오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엠마오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주”라고 호칭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눅 24:33-34). 엠마오의 두 제자도 자기들이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증언하였다(눅 24:35).

 

3. 마태의 사용: 그리스도는 다윗의 주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주”라고 호칭하는데 이 호칭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가르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1-22). 이 때의 “주”라는 호칭도 존경의 호칭보다는 일반적인 주인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성에 입성하기 위하여 나귀를 구하러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나귀 사용자인 자신을 “주”라고 칭하신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마 21:3). 이때의 주는 존경의 호칭이기 보다는 일반적인 주인이라는 뜻이다(Gutherie, 333).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바리새인과의 대화에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지만 실은 다윗의 “주”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예수는 바리새인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시고 시편 110편 1절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신다. “이르시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22:43-46). 예수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다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 이상이며 “다윗의 주”라고 바리새인들을 가르치신다. 여기서 “주”란 신성을 표현하지는 않으나 메시아 직분의 존엄성을 나타낸다(Gutherie, 332). 그리고 “주”란 칭호는 예수의 독립된 하늘의 직분을 가리키는 데 적용된다(Ferdinand Hahn, The Titles of Jesus in Christology, 113)

 

4, 요한의 사용: 지상적 예수를 주, 부활하신 주를 하나님으로 호칭

 

1) 지상적 예수를 주로 호칭

복음서 저자 요한은 예수의 복음 사역 초기에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세례를 준 것인데, 예수의 세례를 베푸신 것이 세례자 요한의 세례보다 많다는 사실을 바리새인이 들은 사실에 접하였다. 이 사실을 기록할 때 사도 요한은 “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요 4:1).

요한은 디베랴 바다 건너편 광야에서 예수께서 축사하신 후 오천명이 떡을 먹던 곳을 표시하는 장면에서 예수에 대하여 “주”라는 존칭을 하고 있다: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요 6:23).

사도 요한은 베다니에 거주했던 죽은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에 대한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서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를 소개하고 있다. 그녀가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긴 사실에 대하여 기록할 때에 요한은 예수를 “주”로 칭하고 있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요 11:2).

 

2) 부활하신 예수를 주 하나님으로 호칭 : 종교다원주의를 거부하는 독특성

사도 요한은 예수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자신에게 나타난 체험을 한 후, 도마가 예수를 “주”라는 호칭으로 부른 것을 기록하고 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이 도마의 고백에서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은 주(퀴리오스)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이라는 신적 본성의 차원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예수가 성자(the Son)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에서 삼위일체의 모습을 잠재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종교사적인 신적 인물인 제우스(Zeus), 사랍시스(Sarapsis)나 이시스(Isis) 등에 비견할 수 없는 탁월한 존재로 드러난다. 그는 불교에서의 부처나 유교에서의 공자나 이슬람교의 마호메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그는 신적 존재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앎에 있어서 두 가지 차원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는 역사적 차원으로서 비교종교학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역사적 종교적 인물로서의 예수다. 이 차원에서 예수는 불교의 부처와 유교의 공자나 이슬람의 마호멧과 비교될 수 있다. 그는 하나의 우리와 같은 진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적인 인물이었고 하나님을 추구한 선생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역사적 예수의 진실은 다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의 차원이 있다. 이것은 역사를 넘어서는 초역사적 차원이다. 이 차원은 역사적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신앙적 인식의 차원이다. 이 차원에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그는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성자 하나님, 삼위일체의 2위이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역사적 예수의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은 이미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요 17장)에서 그가 드렸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일견될 수 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미 영원 전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삼위일체의 영광 속에 계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 17:8). 믿는 신자들은 역사적 예수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아논 줄을 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늘날 종교다원주의 시대에서도 예수 주 되심의 유일성을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역사 마지막에 모든 인간과 종교의 교주들, 영매(靈媒)들이 유일한 하나님의 흰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묵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본 것을 기록하고 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1-15). 여기서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신 자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책과 행위책(사망책)을 가지셨다. 행위책에 기록된 자는 자기 행위에 따라 구원을 얻으려는 자들이나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그의 십자가 대속의 피를 믿는 자들이다.

 

결론: 퀴리오스 칭호는 나사렛 예수의 유일성을 드러냄

퀴리오스 칭호는 예수의 존귀를 나타낸다. 퀴리오스 칭호는 부활하신 예수에게 붙은 칭호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부활했을 때 그의 제자들은 그를 퀴리오스라는 당시의 종교사회학적 존칭어를 사용하여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칭호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승귀시키고 있다. 신자들에게 퀴리오스 칭호는 신자의 삶의 모든 측면을 관할하는 예수의 절대적 주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당시 헬라의 신적 존재나 로마 황제에게 붙는 칭호였으나,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를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오로지 부활하신 예수에게만 독특하게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퀴리오스 칭호는 예수의 유일성과 탁월성을 드러낸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고난의 종" 칭호

 

나사렛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상을 “고난의 종”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이 예수 메시아상의 독특성이었다. 예수 당시 이미 유대교의 전승으로 내려오는 다양한 메시아상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오는 메시아, 그리고 묵시록적으로 구름 타고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인자” 메시아, 그리고 죄인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는 “고난의 종” 메시아였다. 이 가운데 유대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메시아상은 “다윗 왕권”을 가지고 오는 메시아였다. 그리고 묵시록적으로 하늘 구름을 타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인자” 메시아도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은 일반 대중들에게 즐겨 기대되는 메시아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는 이들 메시아의 전승 가운데 자신의 메시아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웃을 섬기고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간주하는 “고난의 종” 메시아로 생각하신 것이다.

 

I. 구약 이사야의 예언: 고난받는 종의 노래

주전 6세기 중반에 바벨론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종 예언자가 나타난다. 이 종은 하나님이 보내신 종으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는 자이다. 그는 포로되어 절망과 낙심 가운데 있는 그의 백성들을 위로한다.

 

1. “나의 마음에 기뻐하는 종”(사 32:1)

여호와의 종은 여호와 하나님이 마음에 기뻐하는 종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 42:1-4).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기뻐하시는 종을 보내신다. 이 종은 세상에서 약하고 쇠잔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진리를 베풀고 정의를 세울 것이다.

 

2. “사람에게 멸시당하는 자”(사 49:7)

그러나 여호와의 종은 “사람들에게는 멸시당하는 자”이다. 이사야는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너를 택한 바 신실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사 49:7). 이 종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미움을 받고 세상적으로 천한 신분에 처한 자이다.

3. “때리는 자에게 등을 맡기는 자”(사 50:6).

여호와의 종은 “때리는 자에게 등을 맡기는 자”이다. 이사야는 기록하고 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 여호와의 종은 높은 신분의 사람들과 관원들에게 수욕을 당하며 침 뱉음을 당하나 피하지 않고 묵묵히 고통받는 자신의 사명을 온유한 마음으로 다하는 자이다.

 

4. “우리의 허물을 짊어진 종”(사 53:12)

여호와의 종은 우리의 허물을 짊어진 종이다. 이사야는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르시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 53:10-12). 이 고난의 종의 노래에서 나오는 종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첫째, 이스라엘을 지칭한다. 둘째, 경건한 남은 자들을 지칭한다. 셋째, 개인이다(Wells, 155).

우리는 이 종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구속사적이고 기독론적인 해석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구절은 신약 성경의 대응절과 연관하여 해석하여야 한다. 이 종은 집단적인 이스라엘일 수 있고, 경건한 남은 자일 수 있으며, 어느 개인일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함축성을 넘어서서 이 구절은 앞으로 다가올 메시아를 지칭하고 있다.

 

II. “고난의 종” 나사렛 예수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이 여호와의 종은 신약성경에 와서야 비로소 그 구체적인 모습을 갖는다. 더욱이 예수는 복음 전파 사역을 하시면서 자신의 사역이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께서 하신 구약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해석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고난받는 종이 누구인가를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복음서 저자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이러한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이해하신 고난의 종에 대한 의식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기록하면서 해석하고 있다.

 

1. 마태의 인용

마태는 예수가 이미 병든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받아들이시는 곳에서 구약 이사야 52:13-53:12에 있는 고난의 종에 관한 예언을 성취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6-17).

복음서 저자 마태에 의하면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 때문에 바리새인이 예수를 살해하려고 의논하는 현장을 예수는 피하신다. 예수는 다른 지방으로 가셔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저들에게 “나타내지 말라” 하신다. 마태는 메시아 비밀을 지키려는 이러한 예수의 태도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마 12:15-18). 마태는 이사야 42장 1-4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를 인용하면서 이 여호와의 종의 예언이 바로 나사렛 예수의 복음 사역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는 평온함과 인내심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곤비한 사람들을 돌봐 주신다. 그래서 ‘여호와의 종의 노래’(사 42:1-4)에서 나오는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되고 있다.

 

2. 마가의 인용: “고난받는 종” 메시아상을 특히 강조

1)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말씀

예수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메시아의 비밀에 관하여 말하신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30-31). 메시아가 많은 고난을 받고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예언은 고난의 메시아를 지칭한다. 이것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용납될 수 없으므로 비밀에 부쳐야 한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2) 변화산 신비 체험 후의 말씀

예수는 변화산에서 내려오셔서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시고 갈릴리로 가시면서 고난받는 종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막 9:30-31). 고난받으시는 종의 사명을 지닌 자신에 관하여 예수는 제자들 외에는 알기를 원하지 아니하신다.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예수의 용모가 영화롭게 되는 신비 체험 후에 예수께서 자신의 고난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은, 이들이 다가오는 예수의 고난을 이기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예수는 제자들과 같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세번째 자신의 수난과 부활에 관하여 예고하신다. 이러한 수난의 예고는 제자들의 몰이해(沒理解)에 부딪힌다. 제자들은 예수가 가지신 진정한 메시아의 사명, 즉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시는 사명에 관하여 알지를 못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 10:32-34). 우리는 예수의 세번째 고난에 대한 예언에서 그가 지닌 “고난받는 종”(suffering servant) 메시아상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가지신 것을 알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메시아 비밀”(Messianic secret)이란 예수의 메시아 의식의 부재와 관련된다는 해석은 성경 해석학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4)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살인모의를 악한 농부들의 비유로 말하심

예수는 자기를 죽이려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사명이 “고난받는 종”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신다: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막 12:6-8).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한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엄한 결산을 의미한다. 측량할 수 없는 인내심으로 하나님은 재삼 자기의 종들, 즉 예언자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셨다. 하나님은 언약 백성의 선택에 상응하는 삶의 열매를 요구하기 위하여 자기의 종들을 그들에게 보내셨다. 포도원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들은 상속자이니 죽이고 포도원 밖으로 던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무덤에 던졌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는 사악한 농부의 비유를 통해서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미리 말씀하고 계신다.

 

3. 누가의 인용

누가에 의하면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에 시몬 베드로에게 그가 자기를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하시고, 제자들에게 앞으로 다가올 위험한 상황을 예고하신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불법자로서 체포되고 고난받게 되실 것을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눅 22:37).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가 죄수들과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4. 요한의 인용

복음서 저자 요한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의 공적 활동은 성공하지 못했음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일으키신 표적을 보았으나 이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 예수는 “고난의 종”의 직분을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으로 이해했으나, 군중들은 예수가 영광의 메시아가 되기를 구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신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 12:27).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 12:32). 요한은 이 예수의 말씀을 기록하면서 이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3). 요한은 예수의 죽음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대속(redemption)의 죽음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고난의 종이라는 메시아 사상에 대하여 백성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에게 질문한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요 12:34).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사실에 대하여 복음서 저자 요한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백성들의 몰(沒)이해와 메시아 배척이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구속의 경륜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요 12:38-40).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인자" 칭호

 

III.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나시는 모습

참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나타나시는 모습은, 종교 개혁자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처음에는 마귀가 나타나는 것 같다. 인간적인 생각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하여 고난의 종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생각할 수도 없는 거리끼는 일(scandalon)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자칭하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고, 자기들은 하나님에게 충성을 했다고 흥겨워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일반적인 생각을 너머서서 십자가의 거리끼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십자가의 대속에 의한 방법으로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진리를 터득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다음같이 진리를 설파한 것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인자(人子, Son of Man)”는 히브리 말로는 “벤 아담”으로 사람의 아들, 인류를 이루는 각 개인을 가리킨다. 후기 유대교에서는 경건한 유대인들 계층은 “인자”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 “인자”는 마지막 심판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의 통치권을 넘겨받으실 초월적 존재(단 7:13-14)를 가리킨다. 그러나 에녹서나 신약성경의 표준적인 견해에 따르면 “인자”는 하나님의 위탁과 전권을 받아서 몸소 최후심판을 주재하시는 분이시다.

나사렛 예수는 이러한 유대교에서 내려온 “인자” 칭호를 자신에게 사용하셨다. 그가 사용한 “인자”라는 명칭은 보통 인간과 동일시되는 겸허한 존재,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사하고 병을 고치는 권세를 지닌 존재, 그리고 묵시록적으로 이 세상에 올 초월적 존재, 세상종말에 의인과 악인을 심판할 존재 등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의 “인자” 칭호 사용은 그가 지니신 명료한 메시아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 구약에서의 “인자(人子)”

에스겔에서 하나님은 예언자 에스겔을 93번이나 “인자”라고 부르신다. 하나님의 신이 사람 에게 임재할 때에만 사람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을 할 수 있다(겔 2:1-2). 시편 저자는 “인자”를 사람 일반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여기서 “인자”는 일반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인자”란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견주어 볼 때 약하고 깨어지는 덧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다니엘서에서 선지자 다니엘은 그가 본 묵시록적 인물을 “인자”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단 7:13). 여기서 “인자”는 옛적부터 계신 자와 함께 기능하시는 인간의 형체를 가지신 분이시다. 구름을 타고 오시는 분이시다. 이 “인자”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구름타고 다시 오실 “인자”이신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

 

◯ 신약에서의 “인자”

“인자” 칭호는 예수 자신이 그의 지상적 사역시에 자주 사용하셨다. “인자” 칭호는 세 가지 범주(사역, 수난, 미래 오심)로 분류된다(David Wells, The Person of Christ, Crossway Books, 1984, 이승구역, 기독론-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엠마오, 1994, 169).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2장 6절을 사람 일반이 아니라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시킨다.

 

1. 복음서에서의 “인자” 칭호

1) 예수 사역과 관련된 사용

나사렛 예수는 지상적 사역에서 이미 “인자”의 전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예수는 일반적으로 경건한 유대인 계층에 널리 통하던 통념을 따르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 앞에 무엇이 허락되고 허락되지 않는 것(죄를 사하심, 안식일의 의미 등)을 스스로 결정하셨다

예수는 가버나움에 들어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 친구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자기가 있는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어 누운 상을 내리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고 말씀하신다. 어떤 서기관이 이러한 예수의 말씀에 대하여 “참람하도다”고 속으로 판단하는 것을 아시고 예수는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 여기서 “인자”는 병고치는 자일뿐 아니라 죄를 사하는 권세를 지닌 자이다. “인자”이신 예수는 실제로 하나님을 대행하는 자이시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에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라고 비난한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아비아달 제사장 때에 다윗이 배가 고파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 나누어 먹게 한 사실을 드시면서 예수는 비상한 상황에서 안식일 지킴의 자유를 요구하신다. 예수의 가르침은 마태가 언급하는 바 같이 “여기에 다윗보다 더 큰 분이 있다”(마 12:6)는 권위를 함축하고 있다. 예수는 안식일의 본질을 가르치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28). 여기서 “인자”란 최후의 심판 때에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실행했는지 여부에 대하여 결정하는 전권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분이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하는 것처럼 하지 않고 떡도 먹고 포도주도 마시는 것에 대하여 대답하실 때 예수는 자신을 인자라고 칭한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눅 7:34). 여기서 예수는 “인자”를 평범한 인간으로 이해하면서 자신을 낮추시고 있다.

예수께서 전도하러 가실 때 한 제자가 예수에게 나아와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쫓으리로다”라고 제자가 되겠다고 결심을 표명한다. 예수는 이 제자에게 말씀하신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이때의 “인자”도 이 세상에서는 소외된 평범한 인간으로서 겸허한 자신의 모습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예수는 여리고를 지나가시면서 세리장인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시면서 그 집에 하루를 유(留)하고자 하신다. 이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사회적으로 그 도덕성에 있어서 멸시를 받고 있는 자의 집에 스스로 들어가서 유하려는 예수의 태도를 보고 비난한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에 관하여 권위있게 말씀하신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여기서 “인자”는 가난하고 병약한 자와 유대하며 이들을 구원하는 자이다.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 사명을 “인자”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제시하고 있다.

 

2) 예수 수난과 부활을 지칭하여 사용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에게 나아와 하나님 나라에서 자기 둘 중 하나는 주의 우편에, 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달라고 청한다. 이 광경을 보고 다른 제자들이 분개한다: 예수는 이에 대하여 세상 집권자들은 권세를 부리지마는 제자들은 그렇지 않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3-44).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는 자기 자신의 삶으로 모범을 보이고자 하신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여기서 “인자”는 묵시록적인 권세자가 아니라 죄인의 중보자요 대속물이요, 섬기는 자이다.

예수는 밤에 자기에게 찾아온 유대공회의 일원인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도리를 가르치시면서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이 구리뱀을 쳐다보면서 목숨을 구했던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키신다. 이처럼 예수는 자신을 “인자”라고 지칭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달리시게 될 것을 예언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인자”가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야 함은 중보자인 “인자”를 믿음으로 믿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3) 미래 오심을 지칭하여 사용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난 후 예수는 자신의 수난과 부활을 첫 번째 예고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는 제자직의 도리에 관하여 가르치시면서 자신을 세상 끝에 오실 “인자”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인자는 세상 끝날에 하나님의 대리자로 오시며, 사람들의 참된 신앙을 판결하는 자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지상적 예수인 자신을 부인해도 용서를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 12:10). 예수는 자신을 겸허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인자”라고 칭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신 “인자”인 자기 자신일지라도 오인되고 비방받을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하신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종말에 다가올 재난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옴을 “인자의 옴”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 10:23).

예수는 제자들에게 세상 끝에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인자의 날” 로 표현하시고, 오시는 자는 바로 “인자” 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눅 17:22-25). 여기서 ”인자“란 번개처럼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나타나는 묵시록적 재림주이며, 이 세상에 대한 심판권을 지니고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초자연적 존재인 인자는 먼저 십자가에서 고난받아 대속의 제물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는 자신을 이러한 “인자”와 동일시하신다.

이어서 예수는 인자의 때를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동일시하신다. 노아의 때와 롯의 때는 사람들이 쾌락과 환락에 사로 잡혀 윤리와 도덕이 크게 문란해진 때였다. 불법이 성한 때에 “인자”는 불경건한 자들을 벌하고 의로운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다: 복음서 저자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26-30). “인자”는 죄와 불법이 관영한 종말의 때에 불경건한 자를 심판하고 경건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다. 예수는 ”인자“를 세상 종말 때의 심판자와 구원자로 이해하고 있다.

 

2. 신약 사도의 서신에서 사용된 “인자” 칭호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 시편 구절(시 8:4-8)을 사람 일반에게 적용시키지 않고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시킨다: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6-9).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인자”를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는 자요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히 2:10)로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인자는 곧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신”(히 2:10) 역사적 예수이다.

 

3. 부활하신 후에 확인된 “인자” 되심

예수의 “인자” 되심은 그의 지상적 사역에서는 일반 유대인들에게는 물론 심지어는 제자들에게까지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비로소 예수는 “인자”로서 인정되고 하늘에서 누리는 권좌에 오르시게 된다(마 28:18-20). 지상적 예수께서 “인자”가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마치 다른 사람, 제3자가 오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눅 12:8-9).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이 말씀에서 예수는 암시적 방식으로 자신을 인자와 동일시하고 있다. 인자의 판결 내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의 그의 입장 표명은 오직 사람이 예수에게 어떻게 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와 같이 예수만이 심판의 척도가 된다. 각 사람은 예수의 인물됨이 예수의 하나님 뜻 해석, 십자가를 향한 예수의 길을 진지하게 받아 들이고 자기의 삶을 그것에 맞추느냐 아니냐에 따라 스스로 심판을 내린다. 부활절 이전에는 예수의 인자 발언은 암시적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하신 후에는 다시 사신 예수 말고는 그 누구도 다시 오실 “인자”가 될 수 없다(막 13:26, 막 14:62)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이런 “인자” 이신 예수께서는 장치 누리실 권세와 아주 대조적으로 이 세상에서는 낮고 천하며 멸시받는 삶을 사셨다(마 8:20, 마 11:19), “인자”는 먼저 사람들에게 넘겨졌다. 하나님이 세우신 세상의 심판자가 사람들의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으신 것이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를 따라 일어난 사건이었다(막 8:31, 막 9:31, 막 10:33-34). 예수는 인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속죄물로 내놓은 인자이셨다(막 10:45). 세상의 심판자가 앞으로 자기 앞에 심판받을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인자를 “하늘에서 내려온 자”(요 3:13)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인자의 고난 당하심,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관하여 “높이 들리심”(요 3:14, 요 8:28, 요 12:34), 영광 얻으심(요 12:23, 요 13:31)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예수의 행적에 있어서 그의 인자되심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부활사건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분이 진정히 “인자”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메시아(그리스도) 칭호

 

“메시아”란 단어는 구원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이다. 메시아(Messiah)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그리스도(Christos)이다. 이 단어는 기름 붓다(to anoint)라는 어근에서 비롯된 것으로, 특별한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존재(the anointed)라는 뜻이다. 메시아란 유대 전통에서는 “기름 부음”을 받아서 왕의 자리에 오른 사람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들이 민족적 역경과 고난 가운데 구원과 해방을 기대하는 구원자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대리자에 대한 상징이었다.

 

◯ 구약성경

“여호와의 메시아”(Messiah)같은 표현이 구약성경에서는 왕, 제사장들, 선지자들, 족장들, 이방의 왕 고레스, 민족의 구원자에게 사용되고 있다(Donald Guthrie, New Testament Theology, 정원태, 김근수 공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266)

왕이나 제사장들

구약시대에는 왕이나 제사장의 임직식에 저들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기름은 직책에 대한 능력의 상징이었다. 열왕기서에 의하면, 예후를 왕으로 지명할 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고 명하신다: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왕상 19:16상). 레위기에서는 제사장은 그 직책을 위하여 기름 부음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레 4:3),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레 4:5). 회막에서 드리는 속죄 제물은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었다. 다윗이 엔게디의 동굴에서 숨어 있을 때 자기를 잡으러 들어온 사울의 옷자락을 베고 난 후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른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삼상 24:6). 기름 부음을 받음이란 하나님의 능력과 인정을 받은 것을 의미하였다.

 

선지자들

이세벨에게 쫓기어 호렙산에 피신해 있는 엘리야 선지에게 하나님은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의 직책을 잇게 하라는 명령을 하신다: “너는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6하). 선지자들은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임명을 받은 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자가 되었다. 엘리사의 경우는 엘리야에게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자기 스승의 영감보다 갑절의 영감을 받게 되었다.

 

족장들

시편 저자는 자기들의 조상인 열조들에 대하여 이들이 이 민족에서 저 민족으로 유리하는 유목민이었으나 이들이 해 받기를 용납하지 않으시도록 하나님이 열왕을 꾸짖으셨다고 노래하고 있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시 105:15). 하나님은 이 믿음의 조상인 열조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기름 부음을 받음이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印)치심을 받는 것으로 성별(聖別)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열조들은 이방인들 가운데 객(客)이 되었을 때 이방인들이 함부로 위해(危害)를 가할 수 없는 성별된 자로서 선지자와 같이 취급을 받았다.

 

이방인 고레스왕

이사야서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대한 제국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제국을 세울 초대 왕 고레스를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게 하신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사 45:1). 하나님이 고레스를 지명하여 기름부어 세웠기 때문에 그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사 45:2-3). 하나님은 이방(異邦) 지도자인 고레스, 이스라엘 신 여호와를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異邦人) 고레스를 지명하여 바벨론을 무너뜨리게 하시고 대제국, 페르시아를 건설하게 하신다. 이사야는 고레스가 비록 비유대인(非猶太人)이지만 하나님이 그를 불러 세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민족의 구원자 “메시아”

왕정 후기와 바벨론 포로기 이후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 대한 기대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 용어는 포로 상태의 현재를 벗어나게 해 줄 구원의 시대를 가져올 이상적인 인물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이 인물과 결부된 것이 다윗 왕국의 회복에 대한 희망이다. 그리고 다윗왕국이 세계를 다스릴 나라로 확장되리라는 희망이기도 하였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 강대국의 압박에서 정치적으로 질서를 바랄 뿐만 아니라 온 피조세계가 새로워 질 것을 기대했다(사11장). 그러나 미래의 구원의 시대에 대한 기대가 항상 “메시아,” 왕이 될 인물과 결합된 것은 아니었다(사65;17-22). 후기 유대교의 묵시록은 다윗의 자손인 정치적 “메시아”의 표상과는 달리 현재의 세계 질서를 끝낼 종말론적이고 초월자인 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 신약 성경

이러한 구약적 메시아 사상은 예수가 태어난 시대에 전승되어 새로운 모습을 갖춘다. 예수의 제자들과 동시대 사람들은 주로 정치적 메시아 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진정 메시아 의식을 각성한 나사렛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고난의 종이라는 독특한 메시아 상에서 이해하였다.

예수 사역 초기에 그의 제자들은 메시아 직분을 구약을 배경으로 이해하고 있었다(Guthrie, 275).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를 만난 후에 자기 형제 시몬에게 예수를 “메시아”라고 소개한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요 1:41).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에 관하여 증언한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란 유대인이 기대하던 메시아를 가리킨다.

 

마태의 사용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박사들이 유대에 태어난 아기 왕을 경배하려 왔을 때 헤롯왕은 종교 지도자들을 모아 메시아가 태어날 곳을 묻는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마 2:4). 유대인의 서기관들은 선지자의 글에서 그리스도(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사실을 찾아낸다: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2:5-6). 마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가 선지자(미 5:2)가 기록한대로 “메시아”(그리스도}라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의 고대문화와 사회에서는 미래의 이상적인 세계 통치자에 대한 기대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위대한 인물의 탄생을 지시하는 별들에 대한 사상이 있었다. 그래서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위대한 아기의 탄생지를 찾아 경배하러 온 것이다. 별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수단이다. 마태는 미가 5장 1절을 인용하면서 맨 끝부분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는 삼하 5:2에서 끌어오고 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조상의 마을인데 이는 또한 메시야가 세상에 태어날 마을이다.

 

누가의 사용

누가는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오인(誤認)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눅 3:15). 이에 대하여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한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눅 3:16).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고 자기 후에 오시는 자는 자기보다 능력이 나으시며,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요한의 예언은 예수가 승천하신 후 오순절날 불의 혀로 나타나는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재하심으로 성취되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 고소자들도 예수가 스스로를 “메시아 왕”이라고 주장했다고 진술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貰)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눅 23:2 ). 이에 빌라도가 예수에게 물으니 예수는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한다: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눅 23:3).

예수 자신은 자기가 “메시아”인 것을 알았지만 이것을 공인(公認)하기를 불허(不許)하셨다. 메시아라는 개념이 정치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메시아 개념을 철저히 비정치적으로 이해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국가와 백성들을 로마의 점령에서 해방시켜줄 해방의 메시아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예수에게 메시아란 많은 백성들의 허물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고난의 종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비정치적인 사고였고 행동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기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메시아 비밀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그러므로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독일의 신학자 브라데의 주장(W. Wrede, Das Messiageheimnis in den Evangelium, 1901, The Messianic Secret, 1971)은 근거없는 것이다(Guthrie, 269).

 

요한의 사용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그가 “메시아”인지 묻는다. 이에 대하여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증언한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요 1:20). 여기서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인 메시아에 상응하는 희랍어이다.

사도 요한의 복음서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제자들에게 예수가 “메시아”라고 증언한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요 1: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35). 요한의 증거를 듣고 예수를 좇는 사람들은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요 1:40 )이다, 안드레가 자기 형제 시몬 베드로에게 말한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요 1:41). 요한은 “메시아” 칭호를 아람어 형식을 보존하면서도 헬라어 번역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는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다가 수가성의 여인을 만난다. 예수는 여인에게 말을 건낸다. 대화를 하는 가운데 여인은 예수가 자신의 여태까지의 삶을 다 아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여인은 마치 메시아를 만난 것 같이 예수에게 말한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요 4:25). 예수께서 여인에게 이르신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요 4:26). 바리새인이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숨겼지마는 예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 여인에게 숨기시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신다. 여기서도 우리는 예수께서 분명한 메시아 의식을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가성의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른다(요 4:28 :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 예수는 여인이 전도하여 데리고 온 사람들을 피하지 않고 만나신다. 그 마음이 메시아를 맞이하기에 열려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항상 자신의 메시아적 정체성을 열어놓고 계신다.

 

베드로의 사용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메시아”라는 용어를 독특하게 사용하였다(마 16:13-20, 막 8:27-30, 눅9:18-21). “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공관복음서 모두가 다루고 있다. 동일한 내용이나 신앙고백의 표현방식이 복음서마다 다르다. 마가는 단순히 “주는 그리스도”(막 8:29)라고 말하는 반면, 누가는 “주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눅 9:20), 마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는 표현을 기록하고 있다. 이 신앙고백에 수난에 대한 예수 자신의 예언이 이어진다.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의 수난을 반대함으로써 예수의 책망을 듣는다(마 16:21하). 베드로는 예수의 메시아 직분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영광스런 “메시아” 개념을 가졌으므로,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 사상은 그에게 거침돌이 되었다. 예수 자신은 베드로가 원하는 정치적인 메시아상을 거부하셨다. 예수는 폭력을 피하셨으며, 정치적인 선동가로서가 아닌 원수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가르치셨다(M. Hengel, Was Jesus a Revolutionist?, 1971). 나사렛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 상을 민족주의적 정치적인 “메시아” 상이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에 나오는 고난의 종과 후기 유대교의 초월적 인자상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이러한 예수가 자기들이 바라는 메시아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이었다.

 

◯ 예수의 메시아 상이 주는 오늘날 의미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뿐만 아니라 종교지도자 그리고 사회지도자들에게 사명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보여준다. 당시 광야에서 예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오천명이 식사를 하도록 기적을 베풀자 군중들은 예수를 왕으로 옹립(擁立)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군중들의 인기에 연연하여 이들의 뜻에 따라 왕이 되려고 하시지 않았다. 예수는 역사상 나타났던 왕들이나 대통령이나 오늘날 정치나 종교지도자들처럼 대중들의 인기에 따라서 타협하여 자신의 소명을 변질시키는 대중영합주의(populism)에 빠지지 않았다. 예수는 당시에 팽배한 다윗왕권을 가지고 오는 정치적 메시아 상, 영광의 메시아 상에 자신의 메시아 상에 타협하여 자신의 고난과 대속의 메시아 상을 수정(修訂)하시지 않았다. 군중들이 기대했던 정치적 메시아상은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기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메시아는 영광의 메시아였다. 당시 군중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메시아는 인간의 죄 때문에 먼저 고난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에 반하여 예수는 자기의 메시아 사명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막 10:45)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예수는 대중적 인기를 잃고, 자기를 따르던 군중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으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만 그의 메시아적 사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아신 것이다. 나사렛 예수, 그분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구세주이신 것은 자신이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 사명에 죽기까지 충실하셨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