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바라던 복은 무엇인가? -최낙재
2012-01-23 15:58:54
아브라함이 바라던 福은 무엇인가?
최낙재 (강변교회 목사, 전 총신대 교수, 신약신학)
소고(小考)에서, 4,000여 년 전에 중동지방에서 살던, 한 유목민이 바라던 바를 규명함으로써 우리의 믿는 바를 확고히 하려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랴?”(창 18:18). 그리고 신약의 복음서는, 예수께서 땅에 태어나신 것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실현이라고 한, 사가랴의 말은 옳은 것으로 인용한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눅 1:68,69,72,73).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먼저는 유대인에게 그리고 이방인에게도 전파한 내용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따라 이제 복주신다 함이었다(행 3:25,26).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고 한다(롬 4:11; 갈 3:6).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기도 하고, 이슬람교도에게는 위대한 선지자이지만 계시의 역사상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조상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다. 따라서 그가 약속받은 복이 어떠한 복인가 규명하면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규명되고,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도 규명이 될 것이다. 이는 또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우리 믿는 자의 의지할 언약을 규명할 것이요, 우리의 믿을 바 믿음을 확립하게도 될 것이다.
I. 아브라함의 복은 현세적 복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1장 27절부터 25장 11절까지 “데라의 후예”로서 나온다(창 11:27). 전체 50장의 책에서 삼분지일이 조금 못 되는 14장 이상을 차지한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 이외의 누구에게도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부분이 집중되지 아니하였다. 아브라함의 위치의 중요성을 표시하는 한 실례이다.
거기 담긴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여호와께로부터 가나안 땅에 가서 큰 민족을 이루고 복된 나라를 이루라는 약속을 받고, 가나안에 가서 유목민으로서 장막을 치면서 이곳 저곳 옮겨다니며 살고-따라서 자기 땅은 한 치도 없어서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매장지가 없어서 토인에게 막벨라굴을 사서 장지로 삼았다-또 아들이 없어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첩을 얻어 아들을 얻기까지 하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지 25년 만인 100세에 이삭을 얻었고, 그 후 시험을 받았을 때 그 귀한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를 서슴지 않음으로 시험에 인정을 받았으며, 그 아들이 아내를 얻고 가나안 땅에서 자기의 유업을 잇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의 대략은 가나안 땅과 그의 자손에 관한 것이다.
그 뒤의 이스라엘 역사도 이 점에 유의하여 기록되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 최고도에 달했을 때, 곧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 왕이 되었을 때는 창세기에서 관심을 모았던 것들이 실현된 때임을 열왕기 저자는 특기(特記)한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 솔로몬이 하수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땅에 이르기까지와 애굽지경에 미치기까지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므로 그 나라들이 공을 바쳐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섬겼더라”(왕상 4:20,21). 아브라함이 약속대로 바라던 것이 다 이루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사도 바울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면서 아들을 얻는 일에서 그의 믿음을 찾는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가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 4:18-22).
그러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자손을 많이 두고 번영하는 것이 그이 복이었는가? 하나님은 그것을 그에게 약속하시고 그는 그것을 믿고 바랐던가? 일견하여서 그것이 그의 복이었고 또한 그것이 사실임을 부인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아브라함이 바라던 복이 현세적인 복이 아니라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
첫째로,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최초의 명령과 복에 대한 약속을 보자.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1-3). 여기서 약속한 복이 현세적인 복, 곧 세상에 생존한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다소간에 다 있는 복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현세적인 복은 노아홍수 이래 땅에 흩어져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누리고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또다시 이런 유의 복을 약속하셨다면 계시로서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 말이 계시로서 의미가 있으려면 이 복은 현세적이 아닌 독특한 복이어야 할 것이다.
또 이 약속된 복은 배타적인 성격을 가졌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3절).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 “오직 너만을” 사랑하여 내리신 복이다. 그런데 이 복으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 배타적인 복이 마침내 보편성을 띨 것이다. 따라서 이 복은 이미 보편적으로 있는 복을 대치할, 이미 보편적으로 누리는 복과는 다른 복이요 특별한 사랑에서 오는 복이다. 그것이 보편적으로 누리던 현세적 복 이었다면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어떻게 이해했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아브라함은 현세적인 복에서 뛰어난 복의 약속을 받고 본토 자기 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나그네의 생활을 감수했으며, 영원한 복을 바라고 그 일환으로서 자식 얻기를 바랐었다. 기타 모든 생활과 행동은 이 뛰어난 복을 바라던 신앙의 표출이었다.
둘째로, 신약 성경이 이를 뒷받침한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죄와 하나님의 진노와 의롭다 하심과 화목, 영광의 소망 등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일을 논의하는 중에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고, 그가 믿어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 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을 맺는다. 아브라함과 우리 사이의 믿음의 동질성을 말한다. 우리의 믿음은 현세적인 복을 믿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브라함도 현세적인 복을 믿은 것이 아니다.혹은 믿는 내용은 달라도, 믿는 태도만 같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할 것인가?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는 이질적인 목표와 소망을 가진 자들이 함께 모이고 동거 한다는 말인가?
바울 사도의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은 더 분명하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신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7,9,14). 만방의 성도가 믿어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고 바로 그의 복을 누리게 되어 성신을 받는다. 신약 성도가 받는 복은 현세적 복에서 뛰어난 복이다. 성신을 받는 것은 현세적 복보다 뛰어난 복이다.
II. 아브라함이 바라던 복은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나라다.
아브라함이 바라던 복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는 나라요. 의의 나라, 복의 나라, 능력의 나라임을 창세기에서 배울 수 있다. 어떠한 역사의 시점에서 어떤 약속을 하셨는가를 살필 때, 이것이 분명하게 된다.
홍수 후에 노아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복주심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 갔다.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 하리라”(창 8:21b,22) 하신 하나님의 결의에 따라 땅에서 살아 갈 수 있었다. 살되 다투고 싸우며 흩어져서만 살 것이 아니요. 인간은 통일된 사회를 이루고 찬란한 문화를 건설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이를 허락지 아니하시고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을 온 땅에 흩어 버리셨다. 그 이래로 이 땅에서 여러 나라와 민족과 방언으로 나뉘어 살게 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저주였다. 그들은 대홍수 후에 하신 축복의 말씀을 따라 내리시는 복으로 살아간 것은 사실이다. 그 복 없이는 누가 하루인들 살 수 있겠는가? 이 복 없이는 인류역사는 벌써 종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였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1.이것은 하나의 의로운 나라를 약속하심이다.
당시에 큰 민족들이 많이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인정과 기뻐하심을 받는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다 바벨에서 흩으신 결과로 생긴 민족들이다. 이들이 지상에서 번영할지라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물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셔서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계속되지만 그것은 홍수 후의 세대를 기뻐하셔서 그리함이 아니었다. 이 말씀 바로 앞에 의미 있는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그 중심에 이르시기를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약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라고 하셨다. 이로써 홍수 후의 세상의 성격이 정하여졌다.
홍수 후의 세상은,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행하지 않고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도록 허락하시고 그 한도 내에서 복을 주신 세상이다. 하나님께서 허물치 아니하신 시대요(행 17:30), 모든 족속으로 자기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신 세상이다(행 14:16). 바울 사도가 로마서 3장 25절에서 말한 대로, 죄를 간과하신 때다. 간과나 허물치 않음은 죄를 문책 및 심판치 않음을 말하고 의롭다고 인정함이 아니다. 온 세상,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런 태도를 취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을 통하여 한 민족을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이 나라에 대하여는 적극적으로 복을 주시며 그 대적을 저주하시기까지 하시면서 보호하실 것이다. 이 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나라일 것을 분명히 하셨다. 옛 세상을 죄로 말미암아 멸망시키고, 홍수 후의 세상을 죄 때문에 기꺼이 인정하지 않으시고, 단지 어떠한 계획하에서 묵인 하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나라라면 이 나라가 의로운 나라임이 틀림없다. 홍수와 바벨탑의 큰 사건 후에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 큰 나라를 약속하신 것은 그 나라가 의로운 나라임을 충분히 시사한다.
2. 그 나라는 또한 영원한 복의 나라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셨을 때는 현세적인 복보다 뛰어난 영원한 복이 가득한 나라를 약속하셨다. 현세적인 복은 이미 노아 홍수 후에 충분히 나타나 야벳과 함과 셈에게서 많은 자손이 나오고 번성하여 땅을 충만케 하여 갔다. 여기에 독특한 복을 약속하셨다.
현세적인 복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어서 그것 없이는 아무도 땅에서 하루라도 살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는 땅의 그것만으로는 참 복이 될 수 없다.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여 나갈지라도 그 복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극복하지 못하고, 마침내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고 모든 사람을 정복할 뿐이다. 인생에게 참 복이란 이러한 죄, 원수의 세력인 죽음을 제거하고 승리하는 복이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인정하심 없이 이런 복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약속받은 이 복된 나라가 곧 의로운 나라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의로운 나라인 동시에 죽음을 극복한 생명의 나라, 부활의 나라를 바랐던 것이다. 가나안 땅을 터전으로 하여 출발하겠지만 가나안 땅이 전부가 아닌 영원한 나라를 그는 알았다. 그가 고향과 기성의 문화를 등지고 알지 못하는 땅으로 나아갔던 것도, 약속의 땅에 이르러서는 강점에 주력하지 않고, 나그네로 장막에서 살기로 만족한 것도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영원한 나라를 바랐기 때문이다(히 11:8-10 참고).
3. 아브라함이 바란 것은 능력의 나라였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약속하신 때는 하나님이 인정치 않으시는 불의의 나라, 열강들이 한편에 있는 가운데 그들과 성격이 대립되는 의로운 나라를 따로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불의의 세상에서, 한 나라가 하나님 편에 설 것이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온 세상과 맞서서 홀로 하나님 편에 서 있었다. 친척, 아비집을 포함하여 온 세상에서 나와서 그에 맞서서, 하나님 편에 서서 걸어가는 아브라함에게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힘이었다. 현상계에서 사람의 타산으로 승산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세우시겠다고 하셨으므로, 세워질 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로서 능력 있는 나라일 것이었다.
모든 인류가 바벨탑을 쌓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11:2-4). 온 인류가 다 합력해도 그것은 사람의 힘이다. 시작한 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흩어졌다. 여기에 비하여 여호와께서는 “내가... 하리라” 하셨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세워질 큰 나라는 하나님에 세우시는 나라다. 흥하되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후 여호와께서 당신을 아브라함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셨거니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얻는 일에 있어서나 자식을 얻는 일에 하나님을 믿었고, 그점을 창세기나(15:5,6) 로마서가(4:17,19-21) 내세웠는데,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단순히 인간적인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이용하려는 기적적인 신앙도 아니요, 현세의 복에 안주하는 현세적 신앙도 아니요, 죄악의 세상에 새로이 의로운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은 것이다. 그에게는 바른 신관과 정당한 세계관 내지 인간관이 구비되어 있었다. 백세에 아들을 주시리라는 믿음은 단순히 노경에 아들을 얻으리라는 기쁨과 그것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이 아니요, 하나님이 터가 있는 성을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그의 한 발자국으로 믿은 것이다.
오늘날 신약의 성도들은 이 나라의 왕이 땅에 오심을 받아 그 나라가 의롭게 복되고 능력이 충만한 나라인 사실을 더 공고히 함을 받았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그 천국에 앉을 때(마 8:11) 옛 아브라함이나 신약의 성도나 다 같이 아브라함이 바라던 복은 과연 의가 거하는 땅이요, 복된 나라요, 마침내 온 땅을 가득 채우는 나라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정암 박윤선 목사 성역 50주년 기념논총
『경건과 학문』, 영음사, 1987, 474-481.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약신학- 마이클 호튼 (0) | 2023.04.30 |
---|---|
서양문명과 하나님나라- 로널드 웰즈 (0) | 2023.04.30 |
문화명령 - 서철원 (0) | 2023.04.29 |
언약과 하나님나라 -김성수 (0) | 2023.04.29 |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김성수 (0) | 2023.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