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와 구약의 언약사상
2012-11-15 23:25:00
구약을 관통하는 언약사상이 신약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알게된다면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언약신학적 관점으로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약의 가장 중심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일 것이고 이것은 신약의 중심사상일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 이어져 내려온 역사의 절정이며 구약 예언의 최종적 성취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을 어떻게 언약신학적 관점으로 이해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사역, 그 자체가 복음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부터 공생애 사역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사역이 신자에게는 기쁜 소식, 복된 소식, 곧 복음의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도처에서 발견되는 언약이라는 말이 신약에서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신약이 언약사상과 무관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이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 신약의 교훈 역시 구약의 언약사상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자신의 죽음을 죄사함을 얻게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으며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언약의 중보자라고 소개하였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사역이 언약과 관련된 행위, 곧 언약적 행위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고 소개하였는데 중보자라는 말 자체가 언약적인 표현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언약관계를 전제하고 이 언약관계를 회복, 유지 발전 시키는 역할을 중보자라고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부터 승천까지의 모든 사역이 중보사역이라는 말인데 어떻게 그것이 중보사역이 되는 것인가? 먼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 곧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이 구약 예언을 따라 이루어진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백성에게 언약적 자비를 베푸신 사건인 것이다. 우리는 요한 복음의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일반적인 의미로 생각하기 쉬운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언약적 원리를 따라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도 우리는 단순히 죄사함을 위한 대속적 사건으로만 이해하는데 사실은 십자가 사건이야 말로 하나님의 언약적 행위의 극치인 것이다.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과 그가 죽음의 형벌을 당하신 것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과 성실함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방법외에는 다른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복음에서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헤세드와 에메트)가 충만하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은 언약적 관점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바르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은 깨어진 언약관계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편에서의 언약적 행동인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새언약의 중보자이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역을 하나님 편에서의 언약적 행동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물론 일차적으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표하신 분으로서 그의 사역은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지만 그의 사역의 의미를 거기에만 국한 시킨다면 우리는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고 말한 의미의 절반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그 분이 하나님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대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성육신 하신 것은 사람을 대표하여 하나님앞에 언약의 당사자로 서기 위하신 것이고 그의 십자가 죽음은 사람을 대표한 언약당사자로서의 죽음인 것이다. 이 말은 언약을 배반한 언약 당사자는 반드시 죽어야만 되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을 배반한 언약당사자인 인간이 되시어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편에서의 언약적 행동이었던 것과 동시에 인간편에서의 언약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 편에서는 언약적 자비를 베푸신 것이라면 인간 편에서는 언약배반에 대한 언약적 공의를 담당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양편을 대표하여 언약적 행동을 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언약관계를 회복시키신 것이므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경이 그분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고 말한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내어주신 언약적 사랑의 행동이었으며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언약을 배반한 인간이 언약적 책임을 지고 언약적 공의를 성취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깨어진 옛언약을 갱신한 새언약이며 그러므로 예수는 새언약의 중보자가 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의 이런 이중적 혹은 쌍방적 차원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 곧 그의 피흘리심을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세우신 새언약 역시 구약의 옛언약 처럼 피의 언약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곧 그의 피흘림은 새 언약 역시 구약의 언약처럼 언약 당사자가 피의 맹서를 하고 언약에 참여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생명을 걸고 인간과 새언약에 참여하신 것이며 인간 역시 자기의 생명을 걸고이 새언약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피의 언약이란 말은 언약 쌍방이 생명을 걸고 참여하는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언약에 참여하셨다면 언약의 상대방인 인간 역시 생명을 걸고 언약에 참여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단지 예수가 하신 사역을 받아들이고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걸고 하나님과의 언약에 참여하는 결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구약의 언약사상적 맥락에서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믿음과 행위의 이원론적 틀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을 언약맺음으로 이해한다면 거기에 대응하는 행위는 당연히 언약적 삶이 될 것이므로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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