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계명의 구약적 의미와 현대적 적용- 송제근
2011-07-05 17:29:28
제 4계명
송제근,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두란노, 2003, 제 17장
제 4계명의 구약적 의미와 현대적 적용
일하는 것과 쉬는 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필요한 현상이다. 동물과 인간의 다른 점은 동물을 본능적으로만 (먹는 것을 위하여) 일하는 것과 쉬는 것을 찾을 뿐이나 인간은 어떤 필요성을 따라서 일하는 것과 쉬는 것을 조절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쉬어야 하는 때에 일하기도 하고 일해야 하는 때에 쉬기도 한다. 사람이나 인간이 만든 문화가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에 더 큰 목적을 위하여 이 패턴을 뒤바꾸는 경우가 있다. 즉 낮에 일하고 밤에 쉬는 것(晝耕夜息)이 정상이나, 그것을 참고 주경야독(晝耕夜讀)하여 큰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나 문화가 정상적이 아닐 때에 거꾸로 진정한 쉼을 모르고 일만 강요하거나, 스스로를 강요하기도 한다. 역사 전체를 통하여 정상적으로 일하고 쉬거나 주경야독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비정상적인 삶의 형태가 더 많았을는지 모르겠다. 인간에게 정상적으로 노동하며 쉬는 것을 조절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본능적으로 일과 쉼을 반복하는 동물보다도 더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문명은 정반대로 진정한 일이 없는 쉼, 즉 게으름이 주도하기도 하지만, 특히 현대문명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 문제 해결에 점점 더 무능하여 가는 것 같다. 이루기를 원하는, 변하지 않는 인생과 문화의 큰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밤이 늦도록 일하며 아침 일찍 일어나서 수고하는 도시인들의 생활은 무엇보다도 진정한 의미의 안식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을 통해서 최초에 이 지상에 임한 고대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규율한 십계명 속에서 안식에 대한 규례를 명확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신약시대 이후 현대의 하나님 나라의 삶에서 어떤 안식을 누릴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이 고대의 제도를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A. 제 4계명의 구약적 의미
1. 중요한 패턴 : 하나님의 일하심과 안식하심 / 인간의 일함과 안식함
신론은 인간론의 기본이 되며, 인간이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야야 한다는 칼빈의 기본적 명제는 여기서도 진리인 것 같다. 인간과 그 문화 속에서 일함과 쉼의 의미를 알기 위하여 하나님의 일하심과 쉼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과연 성경은 이런 신학적 명제에 부합이나 하듯이 그것을 소개한다. 인간의 일함과 쉼과 유사한 행동을 하시는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보이신다는 것이다.
1.1. 창 2:1-3
가장 먼저 창 2:1-3에서 이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사실을 그린 듯이 그리고 쉽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신인동형론적(anthropomorphic)으로 표현한다. 여기 쓰인 단어들은 인간이 손으로 무엇을 만드는 작업실의 상황을 충분히 느끼게 한다. 특히 1장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으나, 2:2-3에서 3회나 집중적으로 사용된 melakto('그의 손작업')이라는 단어이다. 그 의미는 인간이 하는 일상적인 일을 나타내는데, 이것이 2:1에서 "하늘과 땅과 그 속의 천체(별들)"로 표현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라는 점이 특이하게 보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또 이 본문이 인상적일 정도로 반복적이라는 점을 누구나 지적하는데, 그 반복의 중요한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셨음과 이제 그것을 쉬심이다 :
melakto asher asah (bara) (3회) // shabat 혹은 barak / qadash (3회)
그가 만드시던(창조하시던) 손작업(일) 쉬심 혹은 축복과 구분하심
이 신인동형론적 표현은 하나님의 닮은 꼴인 인간이 어떻게 일하고 쉬어야 할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echo)한다.
1.2. 출 20:8-11
출애굽기의 시내산언약이나 신명기의 모압언약의 십계명중의 제 4계명은 하나님의 행동을 근거로 인간의 행동을 명하는 것이 다른 계명에서 볼 수 없는 특징적인 것이다. 다른 계명에서 동기절(motive clause / ki-clause)이나 그 명령을 내리는 부연설명들이 있으나, 제 4계명처럼 동기절과 함께 명확한 하나님의 행동을 근거로 인간의 행동을 명하는 경우는 없다.
출 20:8-11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은 6일동안 창조하시고 그 다음 날은 쉬었다는 것인데, 이것에 맞는 인간의 행동은 6일 일함과 그 다음 날의 쉬는 것이다는 논리적 구조가 여기에 있다. 이 구절과 창 2:1-3의 상관성은 뚜렷하다. 창 2:1-3을 통해서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암시를 받은 고대 독자들은 이제 명확하게 그 안식을 실제적으로 누리게 되었다.
이것은 특히 이스라엘이 종으로 있던 집(slave house)에서 부당한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일하면서 정해진 결과를 만들어 내야했던 과거(출 1장, 20:1)가 확실히 반영되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추수 때와 같은 긴박한 시간 속에서도 안식일이 되면 다 손을 놓고 쉬어야 했을 정도로 쉼이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출 34:21). 그리고 자신보다 소와 나귀가 쉬며,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까지도 일하느라 가쁜 "숨을 돌리는"(출 23:12 nafash nif.) 기회를 주어야 했다. 이스라엘에게 이것은 혁명적인 조처였을 것이다. 이제야 말로 참된 일함과 참된 쉼이 무엇인가를 체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쉼은 이스라엘의 일함과 쉼의 근본이 되었는데, 이것은 더 깊은 전제 위에 서 있는 진리일 뿐이다. 즉 이스라엘은 이제 그 자유케하시는 분의 '존귀한 자녀'(segullah 출 19;5, 신 26:18)가 되는 공적 언약관계를 법적으로 맺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언약의 당사자가 가지신 속성을 이스라엘도 그 속성을 가져야 할 것이었고, 그 속성의 첫 번째가 참된 쉼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그 노예의 굴레에서 해방되자마자 아무 것도 안해도 되는 무규례의 삶과 그 결과인 허무 속에 들어갈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신적인 규례, 일함과 쉼에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삶의 법칙에 들어가게 되었다. "노예된 집에서" (mibbeit abadim 출 20:1) 일시적인 주인이었던 애굽인이 만들어주는 종의 법을 따라서 살다가, 이제는 착취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최고로 높이는 진정한 주인인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기쁨가운데 들어가서 일하고 쉬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날을 "기억하고 구분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이 두가지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행동인 "축복하고 구분하셨다"는 표현에 상응하는 평행법적인 것이다. 즉 그 날이 어떤 풍요와 해방의 날인지를 잘 알고 다른 날과 구분해서 맞이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1.3. 신 5:12-15
여기서도 동일한 하나님의 행동 - 인간의 행동의 패턴이 나타나나, 그 내용이 시내산언약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즉 동기절(motive clause) 속의 내용이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쉬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자유하게 하심에 근거가 놓여진 것이다. 신명기 전체에서 상투적으로 나타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명령(말)하신(대로)"란 소위 신언공식(神言公式 divine speech formula)이 신명기의 십계명에서도 3번이나 사용되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신명기가 그 어떤 이전의 문서를 의존하고 있음을 명확히 한다고 보는 것이 그 역을 의미하는 것보다 낫다. 제 4계명에서만 신언공식이 2회나 반복된 것으로 보아서 신명기의 제 4계명은 출애굽기의 제 4계명을 명백히 의식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렇게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천명하면서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표현하였다. 즉 다른 어떤 계명보다 제 4계명에서 두 십계명의 동기절의 차이가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서 신명기의 십계명의 근본태도를 읽을 수 있다. 신명기는 출애굽기의 제 4계명의 실제적인 근거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사실이 명백하게 묘사되었다 :
(1) 네가 애굽에서 노예였다,
(2)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구원하였다.
이런 해석은 출 20:8-11의 우리의 해석과 맥을 같이 한다. 즉 출 20장, 이제 막 출애굽했을 때나 신 5장,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순간에나, 이스라엘이 깨달아야 할, 동일하게 중요한 것은, 일과 쉼을 애굽인이 결정하는 노예의 삶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시며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그 자유의 구체적인 모습이 이제 구체적인 어떤 날에 쉼으로서 아주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주기적 규칙적으로 다가오는 쉬는 날들은 쉼에 대한 소망을 가져도 되는 낙관적 삶을 만들어낸다. 특히 쉬는 날 동안에는 일을 안해도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을 완벽하게 보장함으로, 적어도 이 날만큼은 삶의 이런 기본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에서 해방되었다. 이것은 애굽에 노예된 상태에서의 해방보다 더 깊은 축복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애굽 훨씬 이전의 인간의 태초의 상태, 하나님의 조성하신 동산에서 씨맺은 채소와 씨가진 열매를 먹었던 때로의 부분적 회귀를 의미한다 (창 1:29, 2:16). 인간의 계속된 타락으로 인간과 같이 저주받은 땅에서 인간이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으나, 이 날만큼은 그 저주가 풀려서 노력하지 않아도 먹고 마실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본래적 낙원으로의 회귀조차도 부분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 5장에서 이 날을 "지키고 구분하라"라고 출 20장보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나 의미는 동일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출 20장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이런 인간의 행동은 하나님의 행동인 "축복하고 구분하셨다"는 것의 반향이다.
2. 쉼 / 축복하심 / 구분하심
이제 이어서 생각해야 할 내용은 그 안식일과 관련하여서 하나님이 하신 구체적인 행동이 무엇이며 그것이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행동은 세가지이다 : (1) 쉬다, (2) 축복하다, (3) 구분하다(거룩하게 하다).
2.1. 쉬다
창 2;1-3에서는 특이하게도 shabat(qal.)라는 동사만 쓰였으나, 십계명에서는 shabbat라는 명사와 함께 nuach(qal.)라는 동사가 쓰였다. 창세기는 안식일 제도 자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원리적으로 하나님이 특정한 날에 안식하심을 표현함으로 안식일 제도를 암시한다. 창 2:1에 제 7일에 완성하셨다고 직역할 수 있는 것은 제 7일에 가서야 완성한 것이 아니라, 선포적 의미를 지닌다. 즉 제 7일에 창조완료를 선언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십계명에서는 안식일이 명확하게 제도화되었다. shabat (안식하다)는 동사 대신에shabbat(안식일)이라는 명사만 썼으며, 동사는 단순한 쉬다(수;nuach)로 표현되었다. 출 20장과 신 5장은 표현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난다 :
하나님의 행동 ----> 이스라엘의 행동
출 20 쉬심(nuach) ----> 일하지 말라
신 5 쉬심(nuach) ----> 일하지 말라 + 너,남종,여종이 쉬도록 (nuach)
출 20장은 하나님의 행동에 대응하는 긍정적 표현이 없으나 실제는 이스라엘이 쉬는 것을 의미한다. 신 5장은 이 점을 더 명백하게 한다. 그러므로 제 4계명은 단순히 일을 정지한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쉼이 궁극적 목적임을 나타낸다.
2.2. 축복하다
하나님의 이 축복하는 (barak) 행동에 대해서 신명기만 예외적이다 :
창 2장 : 축복하다 / 출 20장 : 축복하다 / 신명기 : (없음)
신명기에서는 그 다음 단어인 '구분하다'(qadash pi.)도 쓰지 않는데, 이것은 신명기가 전혀 새로운 문장을 동기절에서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리라.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닌 '어떤 날'을 축복하신다고 하나님이 선언(포)한 것은 특이한데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창 1:22,28에서 표현된 내용을 원용하면 축복하여 그 결과가 풍성한 생육과 번성을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인간이 어떤 조처를 취하지 않고 쉬어도 (예 : '정복하고 다스리는' 1:28), 또는 땀을 흘려 경작하지 않아도, 이 날 분량의 풍성한 생육과 번성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인간이 타락하고 나서 출애굽하여 언약백성이 되었을 때 더욱 그러한 것이었다. 출 16장에서 보듯이 보통 날에는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으나 그 날에는 그렇지 않아도 생존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하나님의 행동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해야 할 행동은 그 축복을 믿고 그 날에 쉬는 것이다. 그 날에 보통날에 할 수 있는 일상의 일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축복한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이 되고, 언약백성으로서의 참된 가치를 깨닫기 못한 것이 되고 죽음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그 외적인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언약적 신뢰가 근본적으로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므로 된 결과인 것이다.
2.3. 구분하다
'축복하다'라는 단어와 쌍으로 표현된 이 단어 ‘구분하다’(qadash pi.)도 창 2:1-3과 출 20장에만 쓰였고 신 5장에서는 새로운 표현으로 대체되었다. 이 의미를 일반적으로 거룩하게하다 라고 번역하기보다 그 날을 다른 날과 '구분하게 하였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명확할 것이다. 즉 이 날은 다른 날과 다른 구분된 날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축복된 날로 선포되었기 때문에 이 날이 특별한 날이라는 축복하다와 함께 평행법(parallelism)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인간의 행동은 인간도 그 날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날을 '거룩하게 한다'로 번역하면 단지 외적인 행동만을 절제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날을 (다른 날과) 구분한다'로 번역하면 그 날의 본질적인 의미를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 날이 다른 날과 구분되는 것이 풍성한 축복의 날이며 (일과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의 날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날을 누려야 할 것이었다.
3. 오경속에서의 제 4계명의 적용들
이제 오경의 법체제 속에서 어떻게 제 4계명이 실제로 적용되었는지를 살펴볼 때가 되었다.
3.1. 증거막(성막)을 만들 때 고려된 제 4계명 (출 31:12-18, 35:1-2, 24:16)
언약의 증거막(성막)을 건조할 때에 안식일이 철저히 지켜졌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표현한다. 즉 증거막 건조의 규례를 받고 난 뒤에 안식일 지킴이 언급되었고 (출 31:12-18), 증거막을 건조하기 시작할 때 안식일을 지키면서 증거막을 건조하였다는 것을 초두에 소개하였다 (출 35:1-2). 이 뿐 아니라 모세가 증거막 규례를 받으러 시내산으로 올라갈 때에 6일동안 구름이 있다가 제 7일에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공간의 거룩과 시간의 거룩을 같이 고려한 것이었다. "증거막은 공간의 거룩을 보증하고, 안식일은 시간의 거룩을 형상화한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경륜, 즉 제한된 영역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방식에 정확하게 일치된 것이다.
3.2. 제도적인 삶에 나타난 제 4계명 : 3절기, 안식년, 희년
(출 21,23장, 레 23,25장 신 15-16장)
출 20장의 십계명은 시내산언약의 근본법이며 출 21-23장의 세부법의 근간이 된다는 사실과 함께, 신 5장의 십계명은 모압언약의 근본법이며 신 12-26장의 세부법의 근간이 된다는 사실이 점차로 밝혀져 가고 있다. 이 말은 각 세부법들은 십계명의 순서대로 각 계명을 세부적으로 발전시켜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 4계명에 대해서도 그러한 발전을 볼 수 있는데, 안식일뿐 아니라, 안식년 그리고 희년까지도 같이 취급되었다.
출 21:1-11, 23:10-19은 안식일뿐 아니라 안식년과 3절기까지 안식일 개념 속에 포함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날들이 공통으로 7이라는 숫자와 관련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숫자 자체에 어떤 신비적인 의미가 있다기 보다, 꼬박꼬박 일정한 숫자가 지나면 마치 태양이 규칙적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그리고 태고와 창조의 규칙처럼 그 날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진정한 축복과 해방을 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레 23,25장은 이 모든 날들을 아주 체계적으로 언급하면서 모든 것이 최종단위인 안식년 그리고 희년까지 발전하는 것을 소개한다. 그리고 희년(레 25:8-55)에 대해서는 안식년(레 25:1-7)에 대해서 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언급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최종적으로 안식일의 의미를 이스라엘에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신명기는 안식일 개념을 아주 독특하게 발전시켰다. 즉 신명기의 세부법(신 15:1-18)에는 안식일 자체에 대한 언급은 아예 빠져있고 대신에 안식년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특이한 것은 안식년이란 표현을 버리고 '면제년'(remission to YHWH shemittah leYHWH)으로 명명한다는 것이다. 내가 7년마다 빚에 대해서 면제받을 권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면제해주어야 할 의무를 기술함으로 대단히 적극적인 의무수행 과정을 묘사한다. 그리고 신 16:1-17에서 3절기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이스라엘이 노예되었던데서 해방되는 것을 기억하고 어떻게 이스라엘 속에 사는 약자들에게 물질에서 해방을 주어야 할 것인가를 적극적으로 말한다.
3.3. 삶의 기본들 : 먹고 마시는 것과 제 4계명 (출 16장),
불피우는 것과 제 4계명 (출 35:1-3, 나무하는 것 민 15:32),추수때의 쉼 (출 34:21)
먼저 출 16장에서 이스라엘이 아직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공적으로 맺기 전에 하나님은 애굽에서 시내산까지의 짧은 여행기간동안에 안식일 계명을 먼저 연습 시행하였다. 안식일법의 내용은 주어졌으나 아직 법의 권위가 행사될 수 없었던 것은 아직 공적 관계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안식일을 범한 죄도 처벌되지 않았다. 내린 만나를 거두어 들이는 것은 먹는 것을 위해서 일하는 행동에 속하였다. 그러나 이 첫 이스라엘에 중요한 것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통한 의미였다. 즉 이 안식일은 우리가 이미 1.1.,1.2.,1.3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풍성의 축복이 있는 날인 동시에, 그 날은 이스라엘이 노예적인 일을 하도록 강요당했던 것에서 해방을 의미하는 날이었다. 그 날에 하나님의 풍성의 축복이 주어진다는 사실에 대한 근본적 믿음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많이 가지고 와도 넘치지 않고 작게 거두고 와도 모자라지 않는 신비를 체험해야 했다. 그리고 제 6일에 더 많이 가져오나 그것이 그 다음날에 썩거나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것과 그러므로 제 7일에는 나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경험해야 했다. 그러므로 제 7일의 문제는 단순히 일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지키고 안지키고의 문제를 훨씬 뛰어넘는 차원에서의 의미를 지닌다.
출 35:3에 안식일에 불을 피우지 말라는 명령을 본다. 고대인이 불피우는 데에는 노력이 많이 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엄격한 유대인들(예를 들면 카라이트파)의 생각과 같이 안식일에 어두움과 냉기 속에 지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안식일 전에 불을 피운 상태를 유지하여야지 안식일에 새롭게 불을 피우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모든 세상에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행동을 안해도 살 수 있도록 조처한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게 하기 위한 세심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민 15:32에 안식일에 나무하러 가지 말라는 배려와 관련되었다. 그 나무로 불을 피우는 것이 목적이므로 결국은 이것은 출 35:3의 규례와 동일한 내용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출 34:21은 물질에 매일 수 있는 삶에 혁명적인 규례이다. 안식일이 밭갈기 좋은 날과 추수하기 좋은 날이 되었을 경우 유혹이 만만치 않았을 그 당시에 그 날을 쉬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에서의 재리의 염려나 그것을 쌓아놓고 행복을 누리려는 태도 자체를 막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애굽에서의 해방은 이제 재물에서의 해방까지도 의미하게 되었다. 이런 것이야말로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해방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는 연단이 되었을 것이다.
3.4. 안식일의 쉼을 자신의 권위아래 있는 존재와 나눔
(출 23:12, 신 15,16장, 3절기, 안식년, 희년)
안식일은 이스라엘 개개인에게 하나님이 해방을 주시는 날뿐 아니라 이스라엘 상호간에 해방을 주는 날을 의미하였다. 출 23:12은 이스라엘 각 개인보다 소나 나귀나 계집종의 자식, 그리고 같이 거하는 나그네까지 사느라 가쁜 숨을 돌리는 때였다는 것을 소개한다. 신 15,16장은 특별히 사회적 약자(객, 고아, 과부, 레위인)를 배려함으로, 내가 하나님께 받아서 누리는 안식에서 내가 다른 존재에게 나누어주는 안식으로 더 많이 발전시키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3절기와 안식년, 희년에 대한 제도에서도 권위아래 있는 존재와, 동료인 히브리 인이지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일시적으로 종이 된 자들에 대한 배려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소개한다. 내가 받고 누리는 안식이 많은 것처럼 다른 사람과 내 권위 아래있는 존재에 대해서 단순히 너그러운 정도에서 나아가 규칙적인 안식을 적극적으로 처방하는 것을 규례로 정한 것이다. 신명기에 더 많은 동기절(motive clause)를 사용하여서 그렇게 해야할 언약적 이유를 적극적으로 설명한다. 즉 풍성의 축복과 해방의 원리를 내가 누리니 다른 사람도 누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3.5. 안식일 규례를 어긴 자에 대한 처벌로서의 죽음 (예 : 민 15:32-36)
위에서 다룬 본문들 속에서 우리는 안식일과 관련된 규례들을 어긴 자들에 대한 처벌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고의로 죽인 자들이 받는 사형과 같은 형량이라는 사실은 세속사회 속에 사는 현대인에게는 놀랍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 자체를 지키고 안지키고의 문제가 아니라, 안식일법의 신학적 근거를 알면 쉽게 수긍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축복으로 풍요롭게 창조하시고, 특별히 이스라엘과 자비의 언약을 맺으셨다는 근본적인 사역이 안식일과 관련된 법의 배경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언약백성의 삶을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언약백성으로서의 삶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삶과 죽음이 관건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4.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의 제 4계명의 적용들
이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제 4계명이 어떻게 적용되어졌는지를 살펴볼 때가 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위하여 제 1성전시대와 제 2성전시대로 구분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이유는 양 시대가 안식일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대는 안식일을 지키되 형식화, 외식화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시기였으나, 두 번째 시기는 정반대로 안식일 자체가 지켜지지 않는 위험이 있는 시기였다. 첫 번 시기는 이스라엘이라는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가 외적으로 독립적으로 주어진 가운데 생길 수 있는 문제를 함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둘째 시기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독립적이지 못하고 페르샤에 의존적일 수 밖에 없는 시대에 생기는 문제를 담고 있는 것이다.
4.1. 제 1성전시대의 절기와 제 4계명 (호 2:11, 왕하 4:23, 사 1:13, 66:23, 암 8:5)
솔로몬 성전이 아직 건재할 때와 관련된 본문들 속에서 안식일에 대한 시대인들의 태도를 약간 알아볼 수 있다. 이 본문들은 안식일은 명확히 다른 절기들과 함께 하나의 지켜야 할 날로 여겨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호 2:11, 왕하 4:23). 그러나 이것이 벌써 형식화되어 갔는데 그 이유는 안식일과 관련된 법의 언약적이고 내면적 가치가 잊혀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이 문제로 투쟁해야 했다.
아모스는 이미 이스라엘이 쉬도록 만든 안식일과 월삭들이 더 많이 돈을 벌고, 속이고 착취하는 것을 진행하는데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는 현상들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암 8:5). 풍성의 축복이 안식일 자체에 있고 애굽에서의 해방에서 지나 물질에 대한 해방이 안식일의 근본임을 이미 잊은 것을 나타낸다.
호세아는 아예 모든 절기와 함께 안식일도 폐할 것이라고 심각한 위협을 한다 (호 2:11). 이것은 그 제도 자체가 없어진다기 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살지 못하도록 함으로서 그 절기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서도 그 외식적인 절기들과 안식일 지킴에 대해서 혐오를 나타내었다 (사 1:13). 그러나 절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과 함께 악을 행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하시는 하나님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래서 비록 절기들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해도 (1:14), 그것은 제도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문학적인 강력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난 뒤에는 오히려 그 제도가 다시 설 것이었다 :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사 66:23).
제 1성전시대에 하나님의 종들이 싸워야 했던 것은 안식일 제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근본 정신과 원리는 잊혀지고 형식으로 지키려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그것이 새로워지면 다시 그 제도에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4.2. 제 2성전시대와 제 4계명 (겔 20:10ff. 22:8,20, 23:38, 느 9:14, 10:31,33, 13:15ff.)
그러나 제 2성전시대는 그 이전과 정반대의 문제로 씨름하여야 했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어느 누구도 외적 이스라엘이라는 정해진 울타리 속에서 살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외적 규율로 보일 수 있는 것들이 의미가 없으면 순식간에 지켜지지 않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 중에 두드러지는 것이 안식일과 성전건축의 문제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가 일정한 공간과 일정한 시간에 이루어지는 경륜에 따라야 하기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즉 공간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구분됨의 가장 중요한 상징은 성전이었고, 시간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구분됨의 가장 중요한 상징은 안식일 관련법이었다. 이 두가지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도전이 되었다.
에스겔은 이미 포로를 경험하였으며 성전파괴가 예견된 가운데 새로운 성전과 거기서 드리는 깨끗한 제사에 대한 환상으로 새 소망을 선포하였다. 에스겔 전체 속에 중요한 새 성전에 대한 소망은 그가 가진 '나의 안식일'에 대한 소망과 같은 맥락 속에 있는 것이었다. 그가 계속해서 '나의 율례, 나의 규례', '나의 성물' '나의 성소' 라고 함으로 옛 언약책(토라)에 애착을 가지시는 하나님을 선포함으로 옛언약의 근본질서에 돌아가는 것을 소망하고 있다 (겔 20:10ff., 22:8, 23:38).
에스라와 느혜미야는 이 두 문제 성전재건과 안식일 문제와 현실속에서 씨름하였다. 에스라는 성전재건을 위하여 근본적인 투쟁을 하였다. 또 느혜미야는 성전을 보호하는 예루살렘성곽을 구축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고 안식일을 '구분된 (거룩한) 안식일'로 인식하고 모세를 통해서 주신 계명과 율례와 율법을 지킴을 통해서 페르샤 시대에도 하나님 나라가 존재할 수 있는 오래된 방식을 선포한다 (느 9:14). 구체적으로 안식일에 물화를 성안으로 들여와서 상업행위를 하는 문제로 씨름하였다 (느 10:31). 느 13:15-22는 이 사실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실례를 보여주면서, 그 안식일 법을 지켜낸 자신의 의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까지 소개한다.
이것은 종교의 외면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정신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세상에 드러나야 할 종교의 외향성을 정당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선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는 것이다.
B. 제 4계명의 현대적 적용
1. 하나님나라의 경륜의 펼쳐짐 속에서의 제 4계명의 의미변화 및 발전
우리는 어떤 문제를 다룰 때에 궁극적인 출발점을 찾아서 그것부터 해결해야 그것에서 파생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제 4계명 문제는 궁극적인 출발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경륜(經綸)이다. 하나님 나라의 경륜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펼쳐가시는 전략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경륜은
(1) 궁극적 목적과,
(2) 그 목적을 이루는 합법적/역사적 방법과,
(3) 그 방법을 유지/성취하는 도구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황무지에 말뚝 박듯이 당신의 나라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경륜을 통하여 이루신다. 먼저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라는 변함없는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이 목표를 이루는 합법적이고 역사적인 수단으로서의 인격당사자끼리 공적관계를 법적으로 맺는 언약(berith)를 사용하신다. 그리고 그 언약을 유지하고 성취하는 수단으로서 법을 가지신 것이다. 그러므로 제 4계명이라는 법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경륜의 펼쳐짐에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아야 한다.
1.1. 경륜의 펼쳐짐
이 세가지가 역사적으로 어떤 관계를 이루고 전개되었는가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
경륜 궁극적 목적 합법적/역사적 방법 유지/성취도구 성 경
(하나님 나라) (언약 berith) ( 법 )
제1경륜 소극적/수동적 xxx xxx 창1-11
제2경륜 능동적/적극적 시내산언약/모압언약 제한된 법 창12-말
제3경륜 혁명적/폭발적 새언약 / 평화언약 확대된 법 신약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카테고리가 하나님 나라이다. 이것에 따라서 방법과 도구의 의미가 결정된다. 이 하나님 나라의 존재방식 자체가 세 단계로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
소극적/수동적인 나라 --> 능동적/적극적인 나라 --> 혁명적/폭발적인 나라.
이렇게 된데는 악과의 전쟁에서 비롯된 것을 알 수 있다. 악은 항상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아벨 대신에 셋으로 세워도, 노아시대에 홍수를 보내도, 바벨사건을 일으켜도 인간사회 속에 악의 전염성은 너무나 강하여서 하나님 나라가 거의 소멸할 정도가 된 것이 바로 소극적/수동적으로 임한 하나님 나라(창 1-11)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나라는 한 지역에는 적어도 완전하게 임하며, 외적이 침투하는 것에 대해 견고한 방어막이 형성되도록 한 능동적. 적극적인 나라 형태를 만들었다. 이것이 구약시대에 경륜된 적극적/능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이 때에 이것을 만드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 예비적 족장언약을 거쳐서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이다. 그리고 이 수단을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십계명이고 제 4계명이다. 그런데 이 나라도 역시 붕괴되었고 다시 회복되어 다시 시작해 보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고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시점에 혁명적/폭발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시대가 경륜되었다. 이 시대를 이루는 방법은 새 언약과 평화의 언약으로 이미 옛시대의 경륜에서 예견되었던 것들이었다 (렘 31장, 겔 36-37장). 그리고 이 언약을 유지하는 도구가 새로운 법인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라는 법"("생명의 성령의 법" 롬 8:2)이다. 이제 이런 경륜의 펼쳐짐의 관점에서 제 4계명의 의미변화 및 발전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1.2. 마지막 경륜속에서의 제 4계명의 의미
이 때 까지는 두 번째 경륜에서 주어진 제 4계명이 어떻게 구약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 기능하였는지를 보았다. 그런데 먼저 고려되어야 할 내용은 제 4계명의 내용 자체는 이미 첫 번 경륜의 때에 암시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을 때에 그 날 자체가 풍요의 축복을 받았는데, 이 사실이 장차 인간타락 이후 새로운 경륜이 펼쳐질 때, 한 날을 정해서 그 날로 창조시의 풍요의 날의 의미가 전면에 나타나며 새로운 의미, 즉 해방의 의미가 발전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해 볼 수 있다. 만약에 제 4계명이 구속질서(salvation order)뿐 아니라 창조질서(creation order)에 속하는 것이라면, 마지막이며 새로운 경륜의 세계에서도 제 4계명은 그대로 유효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 2경륜 때와 같은 방식으로 제 4계명은 제 3경륜 때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신약에서의 안식일의 의미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혹은 지나치게 구약적으로 해석하는 쪽에서 선호하는 이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제 4계명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계명에도 적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는 제 6계명은 이미 창조질서 속에 내재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여기서는 창조질서와 구속질서라는 개념 구분이 불필요하다.
그러면 제 4계명의 현대적 의미는 이렇게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제 2경륜의 시대에 주어진 제 4계명이 제 3경륜의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 제 2경륜의 시대에 특징적인 것은 공간과 시간의 제한성이다. 즉 공간의 거룩을 위해서 성전이 중요하였고, 시간의 거룩을 상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안식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제 3경륜의 시대에 있어서는 이 공간과 시간의 제한성이 철폐되고 확대되어서, 장차 제 4경륜의 시대, 즉 주님이 재림하셔서 성부께서 우주의 역사를 마감하실 때, 온 공간과 온 시간대가 모두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 3경륜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제 4계명은 제 2경륜인 구약적 차원을 뛰어넘는 의미를 지닐 것이다.
이 시간의 거룩을 공간의 거룩과 연관지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요 4장에 나타난 대로 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의 대화를 통해서 공간의 거룩이 제 2경륜의 시대처럼 어떤 일정한 장소에 국한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셨다 : "거기서(예루살렘)도 말고 여기서(그리심산)도 말고". 오히려 영인 아버지와, 영인 이스라엘이 만나는 태도가 중요한 것임을 나타내었다. 결국 공간의 거룩이 초월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간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제 3경륜의 시대에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시공의 한계 속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가 처하는 모든 종류의 공간속에서 그러한 영적 만남이 일어나도록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시간의 거룩도 제 3경륜의 시대에 새롭게 초월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제 2경륜의 시대에 주어진 제 4계명이 가진 풍요와 해방이라는 근본원리는 여전히 제 3경륜의 시대에도 유효하다. 다만 그 때는 제한적 시간속에서라도 최소한의 거룩을 유지하는 조처가 취해졌다면, 이제는 모든 시간대 속에서 그러한 풍요와 해방의 원리가 드러나는 것으로 하는 투쟁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제 3경륜의 시대에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그리심에서도 말고"라고 말할 수 있다면, 똑같이 "안식일에도 말고 또 다른 날에도 말고"라고 혁명적/폭발적으로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말고'라는 말을 그 의미를 전폐하자는 뜻이 아니라, 전혀 제 2경륜의 시대에서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제 3경륜의 시대에 그 의미가 전개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것은 제 3경륜의 하나님 나라에 사는 우리가 제 4경륜의 시대에 전개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계시록에 표현된대로 비유적(예 : 12진주문)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임과 같고, 그것이 막상 우리 눈앞에 펼쳐지면 전혀 상상하지 못했고 너무나 새로운 모습에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할 것과 같다.
1.3. 제 3경륜아래서의 옛제도들의 변화와 발전
제 2경륜 아래서 주어졌던 제 4계명의 의미변화는 제도의 변화를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고대의 유월절의 양잡는 의식은 성찬식으로, 그들의 할례는 어떤 의미에서 세례로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되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이제는 혈통으로 나는 씨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나는 씨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었다. 또한 언약을 회복,유지,발전을 위해서 마련된 구약의 제사들이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엄청난 다양성을 의미함과 동시에, 이제는 성도들의 자발성을 통하여 언약관계의 발전을 이룩한다는 사실도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구약의 화목제에 있던 감사제, 자원제, 서원제의 신약적인 의미가 현대교회에 더 많이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왕/선지자/제사장으로 분류되던 직분들이 아주 다양화되었서 사도/(신약의)선지자/전도자/목사/교사로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엡 4:11). 절기들도 유월절을 성자께서 완성하셨고, 오순절을 성령께서 완성하고 계시며, 장막절을 성부께서 장차 완성할 것을 기다리는 놀라운 차원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이런 것들과 함께 십계명과 그 속의 제 4계명이 같이 패러다임이 변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십계명의 내용들은 거의 대부분 부정적으로 표현되었다 : "..... 하지 말라". 그러나 제 3경륜의 표현들은 혁명적이다 : "선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것이 죄니라". 십계명의 근본정신은 창조부터 있었고 경륜이 지나도 있을 것이지만, 제 2경륜때에 주어진 십계명을 제 3경륜의 시기에 쓰여진 신약에서 다시 인용하듯이 표현한 경우가 한번도 없는 이유가 이런 데 있다. 그러므로 제 2경륜의 법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지만, 제 3경륜의 법은 포괄적 영적이며 우주적인 차원을 지향한다. 이런 제 2경륜에서 주어진 십계명을 제 3경륜의 시대에 사는 우리가 볼 때에 혁명적 관점에서 재해석해야 한다.
2. 신약에 있어서의 제 4계명 해석과 적용
이제 이런 신학적 추론이 어떻게 신약의 본문에서 드러나는 지를 보려고 한다. 이 본문시리즈에서 다른 분들이 이 문제를 다루므로 깊이 다루지않고 원리적이고 결론적인 부분만을 고려하려고 한다.
2.1. 마태 11-12장
이 장에서는 세가지 차원에서 제 3경륜에서의 안식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설명한다 : (1)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함), (2) 안식일의 원리 (자비), (3)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 과연 예수님은 안식과 안식일의 근본원리인 풍요와 해방을 사람들에게 주셨고, 제 2경륜의 패러다임 속에서조차도 위선적으로 안식일법을 적용하던 사람들에게 제 3경륜의 시대의 해석으로 과감하게 도전하셨다. 예수님은 안식을 주시는 분일 뿐 아니라 안식 자체이심을 보이신 것이다.
2.2. 행전 10,11,15장, 갈 4:8-11
바울은 신약교회에 실제로 생기는 논쟁을 다루었다. 실제로 신약교회는 행전 10,11,15장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제 2경륜의 시대에서 제 3경륜의 시대로 옮아온 사람들의 삶의 규례에 대해서 심각히 토론하였고, 이 토론에 바울이 직접 관계하였다. 그 구체적인 문제의 하나가 바로 제 4계명, 안식일과 관련된 법에 대한 것이었다.
갈라디아교회에 생긴 심각한 문제를 바울은 처리하여야 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좋지만,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예수와 그 사역의 유일성이 없어지므로 로마서와는 완전히 다른 입장에서 이것을 처리하고 있다. 제 3경륜의 시대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일성이 모호해질 정도로 제 2경륜의 시대의 법들을 그 시대의 방식으로 이루기를 고집한다면 이것은 명확히 없어져야 할 것이었다.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나는 징조인 날짜와 절기에 집착하는 것들의 어리석음을 정죄하듯이 판단한 것이다.
2.3. 롬 14:5-6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는 바울은 평정된 마음으로 저 위에서 내려다 보듯이 이 문제를 서술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바울의 태도는 행전 10장에서 성령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이 문제를 부드럽고 확신있게 처리해 가시는 것과 유사하다. "날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서 바울이 완전히 부정적인 태도로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보다 더 신약적이고 심지어 바울적인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배열하는 과감함을 보인다. 왜냐하면 그런 신학적 이해보다 더 중요한 것, 주를 위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여기서 날을 초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심각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거나 형제를 판단하는 지경까지는 가서는 안되는 것을 말한다.
2.4. 골 2:16ff.
여기서 '안식일들'이라고 복수로 표현된 것은 안식일 뿐 아니라 안식년, 희년을 포함한 구약적으로 제 4계명을 다루는 방법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여기서도 여전히 바울은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붙들라고 하며 이 날짜 문제 때문에 어린아이 장난과 같이 저차원에 머물러 있지 말고 고차원적인 태도를 보이라고 말한다.
2.5. 히 4장
여기서 안식일의 전혀 새로운 차원, 안식일이 제 4경륜의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소개한다. 아직도 완전한 안식은 주어지지 않았고 그 안식의 차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삶을 제 3경륜 시대의 사람들이 살아야 할 것을 소개한다. 그래서 제 2경륜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서 죽은 사람들이 있듯이, 제 4경륜에서 진정한 안식을 체험하지 못할 사람들이 있을까를 주의하라는 경고를 하고 있다. 즉 안식일의 종말적 차원을 소개한 것이다.
3. 제 4계명의 현대적 의미
이제 우리는 제 2경륜의 시기에 주어진 제 4계명이 제 3경륜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야 한다.
3.1. 경륜을 초월한 의미의 고정성
그러면 제 4계명과 관련하여서 제 1경륜 때부터 제 4경륜때까지 그 시기와 관계없이 항구적인 뜻은 무엇인가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살핀대로 창조시에 보여주었던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의 축복과, 제 2경륜의 시기에 시작된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방의 기쁨이 가장 중요한 주제이었다. 모든 풍요의 기원은 하나님 자신이며, 모든 해방은 어떤 것으로부터의 자유이면서, 최종적으로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이며, 진정한 자유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속박당할 때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역사가 흘러갈수록 이런 내용들이 더욱 더 신비하고도 급격한 변화의 차원으로 깊어질 것이다.
3.2. 날짜의 초월성
안식일 문제를 고려할 때에 우리 속에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는 한가지 우려는 현재의 우리가 가지는 안식일에 대한 전통적인 태도가 없어지면 우리가 구축한 기독교 세계가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우려를 제 2경륜의 시대의 사람들이 제 3경륜의 시대의 시작즈음에 대해서 가졌을 것이다. 그 변화의 시대에 악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착한 가말리엘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행전 5:33-42). 이런 후자의 사람들이 냉정하게 염려할 수 있는 내용은 바로 위와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옛 경륜의 울타리는 새 경륜의 방어막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물이 될 수 있다. 공간의 거룩이 명확하게 초월되었으면, 시간의 거룩도 분명하게 초월될 것이다. 이제는 예루살렘 성전이란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예배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면, 특정한 날이 아닌 모든 날들에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고 그 나라를 이루어가는 태도가 중요할 것이다.
안식일의 날짜 개념은 명확하게 초월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사탄이 날마다 새롭게 준동하는 역사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 아직 진정한 하나님 나라로 정복되어야 할 공간과 장소는 너무나 많이 남아있다. 공간자체를 정복하기 위해서 교회가 세상의 모든 부동산을 다 사들여야 되는 것은 아니듯이, 시간자체를 정복하기 위해서 모든 시간들을 교회가 규율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처하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진정한 제 3경륜의 시대가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노력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미 풍성으로 축복하시고 해방의 기쁨으로 마련하신 모든 것을 다 사용하는 것이다.
3.3. 인간 실존의 문제, 먹고 마시는 문제의 해결로서의 제 4계명의 성취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때에 입이 없고 따라서 영원히 영양공급이 필요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다. 입을 통해서 어떤 것을 먹고 배설하는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이것은 열등한 창조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 하더라도 절대적인 존재가 아님을 알리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래서 인간을 만들자마자 하나님은 인간의 먹는 것부터 해결해 주셨다 (창 1:29). 그런데 이 먹는 것의 유혹을 통해서 인간 타락이 시작되었고 (창 3:6-7), 그 후에도 계속해서 인간을 더욱 타락시키는 근본통로가 되었다.
이제 제 4계명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다. 먼저 인간창조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제 7일을 축복하고 쉬심이라는 신인동형론적으로 표현한 것은 우주 전체의 영양공급을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선포였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의 먹을 것도 챙기신 하나님은 (창 1:29-30), 제 7일을 축복하고 그 날에 쉬심을 통해서 모든 자연계가 하나님에게 의존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축복으로 충분히 살아간다는 것을 선포하셨다.
이제 제 2경륜의 시대에 주어진 제 4계명은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하나님이 조율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스라엘이 생활이 불가능한 광야에서 오랫동안의 삶이 가능했음을 보임으로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인다. 그 중에서 안식일은 이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이 되었다.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고,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이런 제 4계명은 제 3경륜의 시대에 혁명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제 2경륜의 시대에는 소유가 명백하였으나, 제 3경륜의 시대에는 소유가 거의 문제가 되지않는 시기인 것이다. 이것은 제 7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엄청난 확장이자 명확한 적용이다. 먹고 마시는 문제를 창조부터 책임지신 하나님은, 당신의 경륜이 더욱 펼쳐질수록 이것을 더 명확하게 혁명적으로 나타내실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 나라에 하늘의 문을 찢고 금을 쏟아주심으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셨다. 그것은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게"함으로 이루셨다 (행전 4:32). 최초의 교회속에 소유의식 자체가 포기되고 진정한 공유의식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소유 자체가 죄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제 3경륜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첨예한 양심의 표현이었다. 소유라는 죄가 처리되자, 하나님의 축복인 풍성이 곧 찾아왔다 :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행전 2:43-47, 4:34).
그래서 그 나라와 그 의를 최우선적으로 추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문제는 마치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이 초월하여야 하고, 우리의 100퍼센트의 관심을 그의 나라와 의에 집중해야 하는 환상적인 제 3경륜의 세계의 삶이 우리에게 펼쳐진 것이다 (마 6:33).
4. 현대의 신약교회에서의 주일(the Lord's day, sunday)의 의미
그러나 이제 현실적으로 제 3경륜의 시대를 지나는 현대의 기독교회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주일(主日 the Lord's day)이라고 불리는 일요일과 제 2경륜 때에 주어진 제 4계명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
4.1. 청교도신학의 오해 청산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들이 귀하다 해도 그들의 생각은 다시 성경으로 판단을 받아야 하고, 우리 시대에 주시는 새로운 뜻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같은 성경을 늘 새롭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지난 400년 동안의 종교개혁 신학은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아는 것에 근거로 만들어졌다 (sola scriptura).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가서 66권이나 신구약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생각하였고, 그 하나됨만을 고려한 가운데 신학을 발전시킨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대신에 일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자연히 눈에 보이고 제도적인 구약적인 삶 자체를 무리하게 신약에 가져오는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의 규례를 너무나 쉽게 그것이 신약의 주의 날의 규례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게 되었다. 엄숙과 정적과 지킴의 의미가 아주 강조되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전통적인 교회들 속에 남아있는 안식을 거룩하게 지키듯이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전통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이런 청교도들의 신학적 유산 속에는 하나님 나라와 언약과 그 법의 발전과 전개라는 경륜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오해들이 있게 된 것이다.
4.2. 주일은 교회사적 승리의 날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축복과 해방은 이 세상은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런 우리가 완전히 세상과 격리되어서 살면 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우리와 그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세상은 우리가 누리는 고차원적인 삶의 원리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이런 점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어려움을 준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인간이 만든 종교들에서 발견하듯이 어떤 특정한 날짜를 중요하게 여기는 차원에서 벗어나서 공간과 시간의 초월된 거룩을 찾는 자임을 그들은 알지도 못한다. 또 우리가 시간에 대해서 자유하고 공간에 대해서 자유하는 자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상업적 목적으로 성지라고 표현할 때에 세상사람들은 우리가 정말로 예루살렘을 성지로 여기는 줄로 알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시간에 대해서도 자유한 자임을 그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공간의 거룩성보다 모든 시간의 거룩성에 대해서는 우리는 세상과 더 많은 충돌을 경험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공무원 승진시험을 우리가 공동체로 모이는 날인 주일에 침으로서, 우리 중에 있는 공무원 형제들이 그 시험을 포기하거나, 공동체의 모임을 포기하거나 해야 하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인간들만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세속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그동안 이룩한 주일의 전통은 위대한 승리의 날이다. 이 날은 우리에게는 제 2경륜의 시대와 같이 더 이상 지켜야 하는 날 정도의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과 접해있는 교회와 성도가 세상을 향해서 그들의 저차원적인 수준에서 기껏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포기할 수 없는 날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세상종교에서 특정한 날을 귀한 날로 여기듯이, 우리도 그렇게 여긴다고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우리가 누리는 축복과 해방을 알지 못하는 그들을 향해서 쓰는 잠정적인 임시 대응방안에 불과하다. 우리의 진리를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궁극적으로 그것을 이해하는데는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낮은 차원의 설명보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 공간과 시간의 초월적 거룩성을 체험하게 된다는 전도를 하는 것이 낫겠지만, 복음을 거부하는 완악한 자들을 향해서 우리는 진리의 최소치를 가지고 거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주일은 이 완악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세상을 향해서 2000년 교회역사가 이룬 금자탑과 같은 유산이고 이것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아마 시간의 초월적 거룩성을 단순하게 주장하는 분들이 가장 간과하기 쉬운 것은 이런 교회사적 승리일 것이다. 그런 분들은 우리가 원리적으로 누리는 이 축복과 해방이 가장 중요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 속에 있는 교회가 그 동안 이 무식한 세상을 향해서 거둔 승리인 주일에 쉬도록 만든 것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향해서는 이 날을 우리의 날로 표현하고 주장하되, 동시에 우리 자신을 향해서는 날짜를 초월하여 주를 중히 여기는 삶의 기쁨을 누려야 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이중성은 세상에 보내어진 하나님 나라 스파이로서의 교회가 취할 지혜일 것이다.
4.3. 주일은 육체적 안식을 누리는 날
세상 종교 중에서 이렇게 아주 가깝게 자주 다가오는 날을 쉬는 날 혹은 기쁨의 축제날로 정한 경우가 별로 없다. 그래서 거의 모든 문화속에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하고 또 그 결과를 산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속에 살게 되었었다. 그런데 지금 세계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주일을 휴일로 정한 것은 하나님이 기독교를 통해서 세상에 내린 역사가운데 나타난 일반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끊임없는 욕심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이 날이 어느 정도 막아주며 그 결과 육신이 혹사당하고 고통 속에 지내는 것도 막아준다.
그러나 우리 자유자에게 있어서 이 날은 단순히 쉬는 날 정도가 아니며, 또 제 2경륜 때에 제 4계명이 쉬라고 말하기 때문에 쉬는 것은 아니다. 이미 쉼의 의미는 훨씬 더 고차원적인 곳으로 넘어갔다. 우리의 모든 짐을 예수께로 가져가는 것이 진정한 첫 번째 쉼이다 (마 11:28). 오히려 그 예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멜 때에 두 번째 쉼을 얻는 역설적인 진리를 누리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마 11:29-30). 그래서 주일날 다른 사람들은 6일동안 열심히 산 삶을 내려놓고 쉬지만, 오히려 주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서 육신을 쳐서 다른 사람을 더욱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이 두 번째 쉼을 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늙은 바울이 은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남은 늙은 육체조차 관제로 부을 것을 결단하는 것이 진정한 쉼이라는 것을 더 깨닫는 것이다 (딤후 4:6).
4.4. 주일은 주님의 승리를 기념하는 날
주일에 대해서 신약교회와 교회사의 전통이 주는 또 다른 대단히 중요한 점이 있다. 그것은 안식 후 첫날 주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으며, 초대교회가 그것을 기념하여 새벽에 혹은 저녁에 모이는 전통을 마련하였고, 그 전통의 다양한 변형발전된 모습을 우리는 본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주께서 우주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하신 사실이다. 2000년 장구한 세월을 통해서 이 사실이 계속해서 기념되어온 것은 교회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내용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로 바뀌었다는 설익은 주장을 하지는 않아야 한다. 그런 경직된 청교도적 사고는 이미 지난 세월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날에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근본적인 축복을 선포하신 것을 재삼 기억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것을 나누고 선포할 뿐이다.
4.5. 주일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날
이제 우리는 이런 주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형성할 수 있다. 공동체 성원 전체가 다 같이 모이는 것은 현대문명이 발전할수록 더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2000년 교회역사가 주일이라는 승리를 이룬 것을 이용하여서, 우리는 이 날에 형제와 자매들을 얼굴로 보고 교제하며 나누고 세상을 향해서 어떻게 영적 전투를 해야 할 것인가를 결단한다. 구약의 안식일과 절기들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모였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쳤고 행했다는 것이 중요한 표상이 되기는 하다. 그러나 더 나은 경륜의 때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날이기 때문에 공동체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악한 세상조차도 허용한 주일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잡아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지혜를 발휘할 뿐이다. 물론 지역공동체는 모든 다른 날들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날로 만드는 일에 세상과 싸우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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