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가는 길- 김홍전
2011-07-05 17:06:18
모델 처치(model church)의 가는 길 -교회에 대한 봉사와 관련하여-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두신 크신 뜻은 가장 교회다운 교회, 모델 처지라고 할지 전형적인 교회가 되길 원하시는 것이지 적당한 교회가 되길 원하시는 것이 아니올시다. 그 시대에 있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모델 처지냐 할 때 깨달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 안 깨달은 사람은 못하는 것이오. 그런고로 자기 시대에 있어서 정통이라, 이것이 바르다 하는 것으로 그냥 대거 큰 세력을 만들어 가지고 있을 때 거기 그냥 따라가는 것으로 그대로 전형적인 교회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역사의 얘기요.
그렇다면 우리도 이런 시대에 보통 말하는 복음주의네 정통이네 이런 정도에서 얘기를 끝내려고 않고 어떻게든지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이 세대에 마땅히 있어야 할 교회의 상태로 있어야 하겠다는 그것을 늘 지향하고 또 그것을 원하는 것이라 말씀이오. 그러기 위해서 교회에 대한 봉사라는 것을 자진해서 모두 하도록 하였지요. 사람의 어떤 규범에 얽매여서 하지 않고 자진해서 내는 자를 기뻐하시느니라 하는 말씀의 원칙대로 자진해서 모두 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계라고 하면, 그 주변으로 그냥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세계가 있고 그 바깥에는 하나님이 금지하시는 세계가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뜻이라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요컨대 허용치 아니하시는 것은 하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게고 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 엄위로써 막으시는 거고. 허용하시는 세계는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만족하고 기쁘다 하시는 것은 아니나 그러나 네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정도다 하는 것을 그냥 용허해 주시는 것이오. 제일 좋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이 받으시는 제사를 드리는 세계, 그런 경계로 들어가는 것인데 분명히 이 전형적인 교회라고 하면 모두가 그렇게 기뻐이 받아 주시는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의 존재도 그래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는 이런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요컨대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라 말이오.
하나님이 내신 바,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바 나는 기뻐하는 바가 있고 싫어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싫어하는 데서 기뻐하는 데로 향해 오는 도중의 길이라는 것은 뭐 그 중간에서 네가 힘이 모자라서 못 하는 것이야 인간이니까 인간적인 제약 가운데 속해서 그러는 것이다. 내가 그대로 용인은 하지만 그게 원칙은 아니다 하는 거요. 과거 시대에 있어서 율법의 여러 가지 제도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원칙은 모르고 그대로 껍데기로만 할 때는 그 껍데기 한 것은 용인은 하지만, 그러니까 이것도 저것도 버리지 말지니라는 말을 해서 용인은 하지만 기뻐이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더 중한 의와 인과 신을 버리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행하고 저렇게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그것을 버릴 것은 없다 그 얘기요.
그러니까 우리의 생활 가운데도 많은 경우 이게 하나님 뜻이다 저게 하나님 뜻이다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마땅히 지금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찾는 것이에요. 말하자면 그게 십자가를 진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한 자격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오. 그러지 않고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남에게 말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이 중간 지대라는 것은 사실상 해보는 시기요. 거기서 빨리빨리 이리로 들어오너라 그거요. 네가 거기서 해보느라고 하지만 깨달음이 그 정도에서 주저앉아 있는 것은 옳지 않다 그거요.
그런데 이제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요게 하나님의 뜻인가 조게 하나님의 뜻인가 그렇게 하나님이 기계적으로 만들어 놓고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어떤 좋은 일이든지 내게 은사를 주신 것이 첫째 심히 중요한 판단의 척도요. 그게 내게 주신 바 은사라면 그 은사라는 것은 아주 독특한 것도 있고 일반적인 것도 있어요. 그런 사람이 별로 드문데, 그 사람 아니면 할 수 없다는 독특한 것이 있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한 사람만이 독특하게 가지는 큰 은사라는 것이 드문 것이오. 가령 이사야 하면 이사야를 하나님이 불러서 선지자로 세울 때, 선지자로서의 은사는 반드시 독특한 것은 아니지만, 이사야 같은 인물이 나온 것은 독특한 일이고, 엘리야 같은 인물이 나온 것도 특이해서 그 개성이라는 것과 그 개인의 그릇에 적당하게 또 하나님의 특수한 은사를 주셨다는 것이 있는 것이오.
그러나 그런 것을 찾기 전에 먼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을 하는데,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스스로 정하고 그리로 가는데 뒤쪽으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 거기서 자꾸 발생한다면 그게 정당한 것이 아니다 그거요. 싫어하시는 일을 않는 데서부터 시작을 해야지 한쪽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고 한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고 자기가 스스로 정한 것을 하면 그게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될는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요. 왜냐하면 똑같은 선행을 하더라도 옛사람적인 인간에서 나와서 하는 것도 있고 참으로 성신을 의지해서 하는 것도 있는데, 그 표면상 결과나 상태를 보시는 게 아니니까 똑같이 선을 행했더라도 옛사람적인 데서 나온 것은 하나님이 기뻐이 받으시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나 세상에 살면서 악을 행하는 것보다 선을 행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오. 말하자면 용인해 주시는 거요 그게. 그냥 인정해 주시는 것이오. 그러니까 가령 교회에 덕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 하는데 일은 열심히 하지만 교회에 덕이 안 된다고 가정하면 그 덕 안 되는 것으로 그만두어야지, 교회에 무슨 보탬이 되겠다고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보탬에다 주력하면 그것은 정신은 어디 가고 등신만 남는 거요.
교회란 참 정신과 능력이 움직여야지 정신과 능력은 없고 형식만 자꾸 바깥으로 나와 가지고 사업도 남고 일도 남고 그러면 무슨 큰 열매냐 하면 그거 대단한 것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참된 표준적인 전형적인 교회가 되려면 이렇게 무엇이 가장 기묘한 교회의 생명과 같이 귀중한 것들이냐? 그러한 본질, 질이라는 것을 가져야지 질은 떠나고 그냥 교회란 형태만 자꾸 꾸려나가고 어떤 사업 효과를 앞세우고 그것만 행하는 식이라면 그게 큰 의미가 없는 것이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사업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한 교회도 있으니까 그런 데 비교하면 다소 사업이라도 하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합니다 하고 무엇도 주장하고 하는 것이 좀 나을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요새 얘기를 많이 들어 보면 결국은 그 정도 안에서밖에 생각을 못 하는 거요. 요렇게 하면 정통이고 요렇게 하면 큰 부패가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거든요. 그럼 그런 사람들보고 어떤 모델 처지라는 것에 큰 표준을 자꾸 제시하면서 이래라저래라 해야 소용이 없는 것이니까 구태여 그런 사람들을 일일이 따질 필요가 없는 거고.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 의혹하는 일로 변론하지 말라(롬 14:1) 했으니 뭐 변론할 것 없어요. 앞으로도 무슨 일을 주님께서 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일을 함으로 덕이 되겠나 해가 되겠나? 덕이 되겠다고 나는 실컷 계산해 가지고 했지만 결과에 있어서 교회에 큰 덕을 안 끼치는 일이 많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결함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오. 그 결함이 가령 나의 성격에 있다든지 나의 습관에 있다든지 나의 생활의 방식 가운데 있다든지 하는 것을 생각하여 않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무엇을 쌓아올리려고 하는 생각을 하면 쌓아올리기 전에 쌓아올릴 만한 자격을 먼저 내가 구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오. 쌓아올릴 자격을 구비하지 못했다는 것은 요컨대 자기 하나의 존재도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빛이 안 될 때는 그 빛 안 되는 사람의 존재에서 제작해 놓는 생산이라는 것은 특별히 빛 되는 것은 아니오. 존재는 시시한데 생산은 빛난다고 그렇게 안 돼요. 이게 항상 중요한 원칙이오. 그러니까 먼저 신자들이 있어야 할 것인데 자기가 기본적인 일을 못하고 교회의 특수한 일을 맡아서는 못 해요. 왜냐하면 교회라는 것이 그런 비즈니스로 여러 일을 하는 것이 교회가 아니고 모여서 서로 교통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 교통하는 가운데 사람 대 사람의 성품과 서로의 교통과 서로의 사랑과 서로의 인격적인 것을 교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요 교회는. 그것 떠나 가지고 다른 사업을 자꾸 축적해 보아야 좋을 것이 없어요. 하나님이 받으셔야지 안 받으시면 소용이 없는데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고 좋아하지 않고 서로 관계를 받아 주지 않으면서 무슨 사업만 한다고 떠드는 것은 그것은 참 형식만 번드레하게 갖추는 것이지 하나도 마음의 순결과 통일이 없는 것이오.
그것이 모델 처지로서는 첫째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모델 처지를 하려면 교회가 자기 사명을 각성해 가지고 해야 한다는 것이 있어요. 자기 사명을 각성하려면 우선 존재의 양상이 당연히 있어야 할 상태에 있어야 할뿐더러 그 존재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도전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게 모델 처지요. 그러니까 네로 시대의 모델 처지는 모여 가지고 순교를 했어요. 어디로 도망 다니는 것이 아니고 그때는 감연히 나가서. 그렇게 되면 그 신절을 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충실하겠다는 것이 모델 처지의 일이지만, 모든 시대에 그것만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개혁시대에는 개혁을 해놓는 것이, 종교개혁을 하는 것이 모델 처지요. 그렇지 그냥 가톨릭만 붙들고 있는 것이 전형 교회가 아니다 그거요. 그리고 어떤 배교 시대에 있어서는 배교의 양상에서 무엇이 진리다 하는 것을 자기 교회에 우선적으로 먹이고 후대에 먹여 가면서 그러면서 자기네 생활을 순결한 교인답게 순결한 교회의 지체답게 서로 교통하고 아름다운 본질을 잘 드러내는 데가 의미가 있지 스스로 무슨 빛을, 뭐 발광체도 아닌데 억지로 내려고 해도 빛이 안 나는 것이오. 그러니까 교회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일은 많지만 이렇게 적으면 적은 것을 한 단위로 결집을 해야 하는 것이오. 이것이 중요한 일이올시다. 그러니까 그런 관점으로 볼지라도 이 교회가 모든 일에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다 알고, 또 공동으로 합해서 해야 할 것을 조직해서 해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바로 알아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가 요새 강조하는 것이 교회가 담당할 것은 교회가 담당하지 저절로 되는 줄로 알지 말라 하는 것을 강조했어요.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요. 교회의 봉사는 그렇게 원칙대로 순리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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