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와 주기도문
2011-06-14 17:25:45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OUR FATHER IN HEAVEN
주기도문의 첫 시작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기도자와 어떤 관계에 있는 분인지를 천명하고 있다. 우선 그분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다. 그분이 하늘에 계시다함은 기도자처럼 땅에 있는 존재가 아님을 의미한다. 즉 그분은 기도자와는 차원이 다른 분이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비록 하늘에 계시고 기도자는 땅에 있지만 기도자와 그분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라는 것이다. 이 관계야 말로 기도자가 하늘에 계신 분에게 기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 관계가 없다면 땅에 있는 기도자가 하늘에 계신 분에게 기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HOLLOWED BE THY NAME , THY KINGDOM COME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만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하늘에서 이미 거룩히 여기심을 받고 있으니 이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아야 되는 곳은 하늘이 아니라 땅일 것이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에 대한 간구에 이어서 그 나라가 임하시길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진 간구는 그 나라의 임하심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설명해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라는 의미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AS THY WILL IS IN HEAVEN
하늘에 계신 그 분, 곧 기도자의 아버지이신 분의 뜻은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졌다. 그 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은 늘 자신은 자신을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게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죽으시면서 이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것을 보아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 졌다는 것인가?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하나님나라가 임박했다는 복음이었다. 즉 예수님은 구역에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에언된 하나님나라를 이루시려고 오신 분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란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성육신부터 십자가에 죽으시기 까지 예수님의 전생애적인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셨다는 말씀은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나라가 완성되었음을 증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부활사건은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증거하는 것이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은 다름이 아닌 예수님에 의해 왼성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THY WILL BE DONE on EARTH.
그런데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에 의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라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간구는 그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자태가 이 땅과 역사 가운데 나타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간구는 구하는 자가 적극적으로 추구하여야 할 의무를 동반하는 기도이다. 즉 이 기도를 하는 자는 예수님에 의해 이루어진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과 역사 가운데 증거해야 할 책임을 가진 자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것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의를 추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그 나라를 이 땅과 역사 가운데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에수 믿고 구원을 받은 후 우리가 이 땅과 역사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도무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나라를 만들거나 이루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것은 우리의 책임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이 완전히 이루신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뜻을 하늘에서 이루어졌다 우리의 책임은 이미 주님이 이루신 그 나라를 어떻게 이 땅과 역사와 증시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할
이유이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단지 살아 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땅에 사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먹고 사는데 필효한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더구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으시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 하고 그런 것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우리 힘으로 벌어서 먹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므로 일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이 간구는 이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의 성격을 보여준다. 하나님나라는 무엇보다도 사람들 사이에 임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인간 세상이듯이 이 땅의 가장 본질적 요소는 인간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인간은 공동체적 존재이므로 관계를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야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용서를 통하여 증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용서는 우리 자신의 관용에 기초한 것이 아니며 인간적인 동정은 더구나 아닌 것이다. 이것은 법적이고 공적인 용서이며 무조건적이며 내면 깊은 사랑으로 부터 나오는 용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용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에 기초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사실이 우리가 서로 용서함을 통하여 입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문제는 서로가 용서하지 않는데 있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갈등은 서로 용서하지 않고 사랑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이다. 세상은 절대 이 문제를 풀 길이 없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교회는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이 용서를 가지고 서로 용서함을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증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추구해야 할 하나님나라와 그 의인 것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LEAD I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일에 그 존재의 근거와 사명이 있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교회는 무엇보다도 세상의 유혹과 싸워야 한다. 세상의 정신은 끊임 없이 언약백성에게 도전하며 넘어뜨리려고한다. 교회가 직면하는 세상의 시험은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이 그 시험을 받으신 것은 교회도 동일한 시험에 직면하게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시험의 우선적으로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세상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하는 염려를 주며 그 염려를 해결하는 것이 재물이라고 속인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를 자기 힘과 지혜로 해결한다고 한다고 부추키며 두려움을 준다. 사단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며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게 만든다. 이런 시험과 싸우지 않는다면 그래서 이 시험을 이기지못하게 될 때 교회는 필연적으로 악에게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시험과 싸워야 되고 악에 빠질가 두려워 하여야 하며 이런 일들이 개인적 차원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FOREVER.
기도자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 하늘에 계시나 기도자의 아버지이신 그분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교회가 이 땅에서 증시해야 할 그 나라는 아버지의 나라이고 그 나라의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에게 속하는 것이다. 그 나라의 권세는 교회의 것이 아니며 그 나라의 영광 또한 교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것이다.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증시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지만 그 나라를 이루시는 분은 오직 교회가 아버지라 부르는 그 분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인 것이다. 교회는
단지 그분이 이루시는 나라를 이 땅에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궁극적으로 아버지에게 돌리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목적인 것이다. 그 나라의 권세와 그 나라의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이루시고 하나님이 소유하시며 하나님을 위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추기 2011. 10. 31 주일
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2. 나라가 임하옵시며
3.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를 공동번역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받들게 하시며"로 번역하였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라는 번역보다는 이 기도의 의미를 더 잘 살린 번역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이 청원의 핵심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세상이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한 대답이 그 다음에 나오는 "나라가 임하옵시며" 라는 구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될 때 비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인데 하나님의 통치는 온 세상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다스림에 순종할 때 이루어 질 것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그리고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일 것이며 이렇게 될 때 비로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옵시며" 라는 이어지는 두번째 청원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라는 첫번째 청원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번 째 청원 역시 첫번째와 두번째 기도의 내용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보인다. 세번째 기도는 두번째 기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인데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둘째로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요약하면 하나님의 통치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주기도문을 여는 이 세가지 청원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실상 한가지 청원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는 것은 그 분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며 그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그 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결국 그 백성의 순종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므로 이 세가지 청원은 다시 역으로 부연한다면 그 백성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해석이 맞다면 주기도문을 시작하는 이 세가지 청원은 단순한 청원이라고 힐 수 없을 것이다. 즉 자신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세상을 만드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자의 적극적인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짐으로 그 나라가 임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도록 하겠다는 자신의 소원과 의지를 아뢰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마태복음 6장에서 주 기도문이 소개된 이후 이어지는 예수님의 교훈에 의하여도 지지를 받는다. 이어지는 교훈의 결론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고 그리하면 이 모든 것 즉 세상에 살면서 필요한 것들을 더하신다는 것이었다. 이 결론적 교훈의 두 부분은 주기도문의 두 부분을 반영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옵시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주기도문의 첫 부분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로 시작되는 두번째 부분의 관계는 분명히 주기도문 이후 이어진 교훈의 결론의 두 부분의 관계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주 기도문의 첫부분이 목적이라면 두번째 부분은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주기도문의 첫부분의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겠다는 소원과 의지를 아뢰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안일하고 수동적으로 앉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죽어서 가는 어떤 장소로 생각하고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가장 중요한 첫 부분이 심각한 도전으로 다가오지 않으면서 그저 주 기도문을 습관적으로 읇조리고 있다면 그것은 주기도문을 모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추기 2011. 11. 6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께서 기르치신 기도의 첫 부분은 기도를 들으시는 분에 대한 호칭으로 시작된다. 먼저 그분은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기도자가 땅에 거하는 존재라면 기도를 들으시는 분,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기도자와는 완전히 구별되시는 분, 기도자가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곳에 계시는 분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초월하심에 대한 간단명료한 언급일 것이다. 특별히 이 호칭은 하나님의 창조주되심을 잘 드러내며 동시에 기도자가 피조물임을 인정하는 표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하늘에 계신 분이시라는 사실은 기도자에게는 엄청난 장벽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땅에 거하는 기도자가 하늘에 거하시는 분에게, 일개 피조물은 기도자가 우주의 창조주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기도문의 첫부분은 하늘에 계신 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기도자의 아버지이시라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고백은 기도자와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관계가 떼어놓을 수 없는 가장 친밀하고 본질적인 관계에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들의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의 유비를 통하여 기도자와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관계를 분명하게 설정한 것이다. 이 관계가 없다면 땅에 거하는 일개 피조물인 기도자가 하늘에 거하시는 우주의 창조자에게 기도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거하시는 그 분은 동시에 기도자의 이버지가 되신다는 놀라운 계시가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들으시는 분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시작되는 주 기도문은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얼마나 초월하시고 피도물과 구별되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신가를 가리키는 동시에 하늘에 계신 그분인 오직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지만 기도자의 아버지가 되시는 친밀하고 자비로운신 분이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첫 부분은 정당한 기도는 거룩하시고 초월하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기도자를 자식으로 받으시고 용납하시는 아버지되신 하나님에 대한 친밀함과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시작되어야 함을 가르키는 것일 것이다.
추기 2011. 11. 13 주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첫 부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기도자들의 아버지이심을 분명히 하고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라고 소개된 것은 기도자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수식어일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기도자는 당연히 아들이라는 신분에 위치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라는 호칭은 하나님이 기도자와 어떤 관계이신가를 알려주는 동시에 기도자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말이다. 즉 기도자는 이제 아들의 신분을 가진 자로서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기도자의 위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기도자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특권을 가진 자라는 자기 의식을 가지고 기도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기도자가 이런 정체성이 없다면 이어지는 청원이 기도자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수 없을 것이다. 이어지는 청원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서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 것 즉 그 분의 통치가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실 이 청원은 3가지로 이루어졌지만 그 내용은 하나이니 곧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으로 요약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일과 기도자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기도자는 단지 그런 청원을 할뿐이고 그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면 주님이 이런 기도를 가르치신 의도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거하는 기도자를 통하여 임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거하는 기도자들을 통하여 임하게 하여 달라는 청원인 것이니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 거하는 아들들을 통하여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청원인 것이다. 그런데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방식은 먼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방식으로 둘째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방식이 이러하다면 이런 방식이 이루어지는 첫번째 대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아들이라는 자기인식을 가진 기도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자들의 청원은 자신들 가운데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그리고 자신들 가운데 먼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처럼 이루어지길 소원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기도자들 가운데 임한 하나님나라가 온 세상에 증거되고 온 세상으로 퍼져나갈 것을 갈망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주기도문의 핵심 청원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것 곧 창조목적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며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란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의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사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된 메시아는 다윗의 왕권을 이어서 다스리는 왕적 통치자였으며 구약에서 아들의 일차적인 의미는 아버지의 권한을 이어받는 법적 상속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인 아버지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관계를 의미하기 보다는 만유의 통치자요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호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보아야만 우리는 이어지는 청원인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기도자들의 신분인 아들의 의미도 생물학적인 아들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왕적 권세를 이어받은 이 땅에 거하는 대리왕들의 신분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즉 기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왕적 권세를 대신하여 이 땅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하는, 이 땅에 거하는 대리왕으로서의 신분을 자각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정확히 창세기에서 주어진 창조목적의 회복을 의미한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회복을 위해서 오신 것이며 그러므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도 당연히 창조목적의 회복을 지향한 기도인 것이다.
2012. 1. 8 주일
마태복음
1.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3.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5.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서소
6.(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누가복음
1.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나라가 임하시오며
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5.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을 비교해보면 두번째 청원기도인 나라가 임하시오며를 마태복음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부연설명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네번째 청원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역시 마태복음은 악에서 구하시는 것이라고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또 누가복음에는 아예 없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청원은 주기도문 전체를 요약하는 결론적 청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에 나타난 주기도문의 청원의 내용이 본래적인 주기도문에 더욱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주기도문의 내적 구조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첫번째 청원은 가장 근본적이고 기도의 출발점이 되며 기초가 되는 청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주기도문의 근본이요 출발점임을 가르키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손종, 믿음 경배, 경외, 예배 등의 다양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표현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동일한 사상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두번째 청원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일은 당연히 첫번째 청원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될 때 인간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요 인간들이 하나님을 순종하게 될 때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세번째 이후의 청원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을 때 나타나는 구체적인 하나님나라의 성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세번째 청원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을 때 인간들에게 먹고사는 문제로 부터의 해방이 일어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즉 이제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느라 일생을 종노릇하는 인간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는 나라, 먹고 사는 걱정과 염려가 사라지는 나라가 하나님나라의 성격임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아담의 범죄이후 인간에게 임한 첫번째 현상이 일생을 먹고사느라 고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먹고 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시는 양식으로 사는 존재였는데 범죄이후에 먹고 사는 문제가 인간의 최대의 숙제가 되어 버렸고 이로 인한 염려로 안하여 평안과 안식을 누룰 수 없게 된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로 부터의 해방이야 말로 인간을 지배해온 죄의 결과로 부터의 해방일 것이며 죄의 문제가 해결된 구체적인 증거일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하나님의 노릇하려고 한데더 생긴 문제이므로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시는 하나님나라에게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네번째 청원 역시 하나님나라가 임할 때 드러날 하나님나라의 성격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 간의 갈등이 근본적으로 해소된 나라인 것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 사회에 편만하게 퍼짐으로 인간 사이에 더 이상 미움과 싸움이 없는 세상일 것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인간 관계의 회복으로 나타나는 나라인 것이다. 사실 인간의 범죄이후 즉각 나타난 현상이 인간 관계의 파괴였다. 이것은 결국 분노로 동생을 죽인 가인의 살인으로 이어졌다. 인간 역사를 물들여온 살육의 역사는 결국 인간 관계의 파괴의 문제였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나라가 임한다면 즉각적으로 나타나여 할 현상이 인간관계의 회복일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네번째 청원 역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 드러날 하나님나라의 현저한 성격이 어떠함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청원인 다섯번째 청원은 어떠한가? 그것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하는 청원인데 마태는 이것을 악에서 구하옵시고,, 라고 부연 설명하였다. 이 청원이야말로 하나님나라의 가장 근본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인간 범죄의 일차적인 책임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시험하는 자 곧 마귀에게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마귀의 시험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데 우여곡절을 겪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시험의 문제인 것이다. 만일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완전히 임하지 못할 것이요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불완전한 나라일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에 시험하는 자 마귀가 결박되어 무저갱에 던져진다는 것은 바로 시험의 문제가 근본적이고 영원히 해결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나라가 영원히 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012. 1. 15 주일
주기도문의 네번째 청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일과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는 일이 긴밀하게 상관하고 있다는 사상을 명백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힘입어 우리는 아무 값을 치르지 않고 죄 용서를 받는다는 사상에 익숙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기도문의 이 대목은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이야 말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하여야 할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진리를 가르치지만 주기도문은 그 대속의 진리가 일방적인 것이 아님을 또한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진리는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회복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지은 인간의 죄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중차대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의 십자가 사역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위대한 진리의 선포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회복은 동시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회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또한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이기도 하다. 전자가 역사초월적이고 개인적으로 적용되는 진리라면 후자는 역사적이고 공동체적으로 적용되는 진리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속의 진리를 전부인 것으로 붙들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주장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역사초월적인 진리는 언제나 역사적 진리로 증거되어야 하듯이 대속의 진리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의 회복으로 증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기도문의 교훈이 이렇게 표현되었다면 차라리 납득하기 쉬웠을터인데 문제는 주기도문의 교훈이 마치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이 우리가 남의 죄를 사하여 주는 행위에 달린 것 처럼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유독 주기도문의 이 대목을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게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라고 부연 설명함으로써 이 교훈을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없애버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교훈은 분명히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다면 우리 죄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교훈이야말로 대속의 진리만을 붙들고 구원의 확신에 안주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대속의 공로가 값없다는 것은 값으로 매길 수 없이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지 대속의 공로에 합당한 우리의 반응을 면제한다는 의미로 값없다고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은 용서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속의 진리에 대한 오해요 남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속의 진리를 우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함을 통하여서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대속의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부질없는 자기 주장이거나 거짓된 죄사함의 확신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주기도문의 하나님나라
2017-06-12 01:55:31
주기도문의 주제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다. 그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하기를 구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될 그 때,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이며 그 나라는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임하는 나라이다. 다시 말하면 주기도문이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나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짐으로 이 땅에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이어지는 간구는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그 나라는 일용할 양식이 공급되는 나라이다. 일용할 양식이 보장됨으로써 미래를 위해 염려하고 비축할 필요가 없는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거나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루어 주시는 일이 아니라 그 나라의 백성된 자들의 적극적인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자기 살길만 찾고 자기 먹을 것에만 탐욕을 부리면서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수 없다. 그 나라의 백성들은 먹을 것을 고르게 나누어야 한다. 적어도 그 나라의 백성 중에는 일용한 양식을 결핍하는 자가 없어야 한다. 가진 자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그 나라의 백성 누구에게나 일용할 양식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럴 때 그 나라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할 자들이 없을 것이며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야 종노릇하는 자들도 없을 것이다. 그 나라에는 재물을 모으고 지키려고 탐욕을 부리는 자들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용한 양식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모든 자들이 나누고 돕는다면 일용한 양식이 없어 핍절하는 자들이 없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가난한 자의 문제이고 가난한 자와 부자간의 갈등의 문제다. 인류가 한번도 해결해본 적이 없는 그 문제가 하나님나라에서는 완전해 해결될 것이다.
그 다음의 간구는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갈등과 증오가 없는 나라임을 보여준다. 그 나라의 백성들은 서로의 죄로 용서해주고 서로의 짐을 나누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남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그 나라에는 오직 남의 죄를 용서해주는 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는 사람들간에 갈등이나 증오가 없다. 인류 역사상 사람들간의 갈등과 증오는 개인이나 국가나 민족들 간에 끊임이 없었고 그것은 수많은 전쟁과 비극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에는 전쟁과 비극이 없고 무한한 평화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람들간에 갈등과 증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그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시험에 빠질 일도 악에 사로잡힐 일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샬롬이 그 나라를 지배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이런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나라이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나라는 즉어서 가는 천당이 아니라 이 땅에 임하는 나라이다. 이것은 이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이적적 역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백성된 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한다면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야 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구한다면 그 뜻에 순종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면 양식이 있는 자들은 일용한 양식이 없는 자들을 돌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자기 죄를 용서하시기를 구한다면 자기에게 잘못한 자들을 용서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자가 어찌 하나님에게 자기 죄 용서를 구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나라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통해 이루어지는 나라다. 하나님의 통치는 강압적인 다스림이 아니라 그 백성의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나타나는 다스림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부지런히 살피고 분별하여 그 뜻에 순종해야 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부르신 이유일 것이다.
하나님나라와 기도
2015-04-16 19:13:42
구약성서에서 기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샤알" (청하다, 원하다, 강요하다, 신10:2,삿5:25,삼상12:13, 욥31:30), "팔랄"(기도하다, 청하다, 중재하다, 창20:7) "이슈타하바" (굽히다, 머리를 숙이다, 무릎을 꿇다), "할랄"( 노래하다, 축복하다, 선포하다)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구약성서에서 기도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 관계속에서 다양한 기도의 형태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시편은 감사, 찬양, 탄원, 저주, 부르짖음, 하소연 중재, 질문 등등 기도의 이 다양한 차원을 잘 보여준다. 신약성서에서 기도에 해당하는 가장 일반적인 헬라어는 :프로슈코마이" (기도하다, 간청하다, 탄원하다) 인데 이 용어는 하나님과 만나는 모든 형태의 행위를 의미한다. 그 외에 "데오마이"(부족한 무엇을 청하다), "데에시스"(도움을 청하다), "아이테오"(무엇을 얻기를 요구하다) 등도 시도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출발하며 그 관계에서의 교제를 누리는 방편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일방적이 아니라 항상 쌍방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말씀을 드리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레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기울여 듣는 것을 포함하여야 한다. 기도에서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나의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순종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따라서 기도를 통하여 변화되어야 하는 상대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기도하는 기도자 자신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의 자발적인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구하여야 하며 또한 그 뜻에 순종하기를 구하여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이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주제가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리고 하나님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는 이유임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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