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가 말하는 하나님나라
2011-05-25 18:14:03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행위는 사람을 지으신 것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으로 보아 사람이 마지막에 창조되어야 할 이유는 명백하다.
사람이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유일한 점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특별하게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것이엇다. 이것이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유일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자동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이후의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입증되었다.하나님은 사람에게 선악과 금령을 주셨다, 이 금령은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과 죽음을 갈라놓는 분수령이 되는 금령이었다.
그 금령의 내용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고 그 자체에 어떤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어쩌면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는 잘 납득하기 어려운 명령이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단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라고 명명된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는 단순한 명령이었고 만일 먹게되면 반드시 죽음의 결과가 따른다는 경고가 덧붙여진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명령에 덧붙여진 죽음의 경고는 이 명령을 지키기 위한 동인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 명령을 범하면 그 결과로서 주어진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 금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 금령 자체에 대한 이성적 납득이 아니라 이 금령을 주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이 금령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이 금령을 통하여 자신이 누구이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배워야 했다. 즉 인간은 이 금령을 통하여 자신은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할 자이며 하니님은 자신의 주인이심을 배워야 했고 이것이 금령이 주어진 이유였다. 이 금령에서 이런 것을 배워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제대로 다스려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금령을 통하여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창조목적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닮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에게 순종함을 통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었고 결국 인간 구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런 창조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이 창조질서의 회복의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대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라는데 현대 신학자들은 모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나라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데서는 그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으며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분명하게 성경에 기초하여 규명하지도 못하고 있다. 특히 구약에서 나타난 하나님나라와 신약에서 나타난 하나님나라의 관계 그리고 신약에 나타난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관계에 대하서는 여전히 불투명한 학설들로 넘쳐날 뿐이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을 통하여 우리는 창조목적과 관련하여 하나님나라를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와 이 땅을 떠난 역사초월적이고 피안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적어도 종말 이전에는 역사와 이 땅 가운데 나타나는 현실적 실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인되신 나라이지만 인간없이 하나님이 직접 이루어 버리시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시기를 기뻐하시는 나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역사와 이 땅 가운데 드러나게 되는가? 첫째,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야 할 것이며 둘째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야 할 것이다. 이 두가지가 전제되지 않고는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릴 수가 없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는 끊임없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후손이 충만하여 질 것이며 그 백성들이 땅을 차지하고 다스릴 것이 언약으로 주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창세기가 말하는 것은 언약을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나라의 약속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약속이 이루어 지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이 언약을 지켜 순종할 것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한 이 두가지 조건을 사람이 스스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신구약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이고 그래서 이 조건을 이루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그 성격과 내용이 후기 유대주의에서 세속적으로 변질되긴 하였지만 구약의 메시아 대망은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망이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의 지향점은 하나님나라를 이루실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선포였고 이에대한 믿음과 기다림이었다.
드디어 때가 차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역사 가운데 오셨다. 그분이 오셔서 처음으로 입을 열어 선포하신 말씀이 "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고 하신 것은 그분이 하나님나라의 메시아로 오신 것이며 곧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선포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복음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대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나라가 곧 도래한다는 것이고 이것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회복된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회복된 인간의 출현인 것이다.이렇게 하여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첫번째 조건이 이루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두번 째 조건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다. 과연 예수님은 성육신 자체도 그러하지만 역사 가운데 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순종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두가지 조건이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십자가상에서 죽어가면서 " 다 이루었다" 고 하신 것이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이겠는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다 이루었다는 것은 두가지 조건이 만족되었으므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권세의 시작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의 범죄로 인간 역사를 짓누르던 사망의 권세, 사단의 세력이 깨어진 사건이 바로 예수의 부활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은 이제 부활한 예수가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임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야 예수에 의하여 성취되었고 이미 도래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사명을 명하실 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늘과 땅의 권세를 예수님에게 주었졌다는 사실과 제자들이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것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 둘 사이에 " 그러므로" 라는 순접속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것은 앞의 사실이 뒤의 사실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게 주어졌으니 이제 너희들이 제자사역을 하라는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에게 그런 권세가 주어진 것과 제자들이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삼는 사역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이 관계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에게 그 권세가 주어졌다는 말은 그 권세가 예수님에게만 주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대표하여 성취하신 그 권세가 이제 제자들에게도 주어졌다는 중요한 선포인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이제 제자들이 그 권세를 가지고 제자사역을 하라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라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순종으로 하나님나라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그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간구하라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예수님에 의해 이미 이루어졌다. 이제 남은 일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가 증시되는 일인데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제자들에 의하여 역사와 이 땅 가운데 증시되어야 하며 종말론적으로 성부의 심판사역으로 증시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심판사역은 미래적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이미 도래하고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최종적이 증시인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의 사명 역시 이미 도래한 예수님에 의해 완성된 하나님나라를 이 땅과 역사 가운데 증시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와 이 땅 가운데 증시해야 할 제자 공동체인 것이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여기에 교회의 진정한 정체성과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역사와 이 땅 가운데 증시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정확하게 예수님이 이루신 방식을 따라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나라를 증시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성취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그것은 앞에서 말한 두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방식을 통하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하늘과 땅의 권세를 우리도 누리게 되며 그 결과 역사와 이땅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하나님나라를 증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는 일을 하여야 한다. 이것은 대사명의 첫부분, 모든 민족을 제자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일에 해당 되는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인쳐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하나님나라 백성이 없이는 하나님나라는 증시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사명의 둘째 부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가지 조건은 결국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계시며 하나님나라를 이루셨던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사명의 말미에 " 볼지어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고 하신 것이데 사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 대신 보내실 보혜사 성령을 가르치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교회는 비교적 첫째 조건에 대한 것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즉 예수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교회로 초정하는데는 비교적 열심을 낸다. 그러나 이 관심도 개인 구원 차원이지 하나님의 나라 차원에는 전혀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사실 복음은 개인 구원의 소식이기 이전에 하나님나라의 도래의 소식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더욱 심각한 것은 두번째 조건의 문제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순종하게 하는 일에 무력하고 무관심하기까지 한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나라를 증시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목적이라면 첫째 조건에 못미치고 둘째 조건에는 현저하게 무능한 교회들이 어떻게 역사와 이 땅 가운데 하나님나라를 증시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첫째 조건과 둘째 조건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조건없이 둘째 조건이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러나 첫 조건은 둘째 조건을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마치 중생하고 회심하면 둘째 조건도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순진한 생각이며 일종의 회심만능주의인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대사명은 첫부분으로만 끝났을 것이다. 오히려 둘째 조건은 첫 조건의 충분조건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진정으로 순종하는 자라면 참 하나님 백성이 분명하지만 거듭난다고 해서 모두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아니다. 순종이 없는 거듭남은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순종을 위해서 거듭남이 필요한 것이지 거듭남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순종의 문제에 대해서 다시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순종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순종의 성격을 예수님의 순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복종은 선악과 금령에서도 보듯이 납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뢰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부르짖은 것은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 앞에 자신의 납득이 아닌 절대적인 의탁의 심정으로 순종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숨을 거두면서 " 나의 영혼을 아버지께 의탁한다"는 절대의탁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러한 순종에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영적인 전투이고 고난이다. 순종이 없다면 고난도 영적인 전투도 따라오지 않는다. 고난은 순종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은 자발적인 고난이고 자취하는 고난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은 얼마든지 피하려면 피할 수 있던 고난이지 불가피한 고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고난은 순종을 하려다 불가피하게발생한 자취한 고난이요 자발적인 고난이었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없고 고난을 두려워 하는 것은 순종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 다음은 순종과 영적 전투의 문제이다. 순종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사단은 거짓으로 하나님의 뜻을 혼란시키고 왜곡시키며 그 뜻이 이루어 지지 못하도록 갖은 훼방의 역사를 자행한다. 예수님은 일생을 사단과의 전투가운데 지내셨다. 성육신부터 십자가의 죽으심 모두가 사단과의 전투였고 극적인 전투의 모습이 광야에서의 시험에서 나타났다. 사단과의 전투유형은 다양하지만 영적 전투의 현저한 성격은 무엇보다도 거짓과의 싸움이다. 사단은 진리를 왜곡하고 혼란시켜서 순종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하나님나라의 증시를 방해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순종하기 위하여는 거짓을 배척하고 진리를 분별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여야 한다. 창조시의 옛뱀이 그랫듯이 사단은 언제나 진리 비슷한 사이비를 가지고 진리에 도전한다. 진리와 사이비를 분별하기 위하여 우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의지하여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비유인 "씨 뿌리는 자 비유"를 통하여 계시하신 결실하지 못하는 세가지 경우는 모두다 사단과의 영적 전투에서 패한 결과이다. 특히 사단은 세상의 염려를 주고 그 염려를 재물이 해결해 준다고 속인다. 사단의 이 속임으로 수많은 자들이 말씀을 듣지만 숨이 막혀 결실치 못한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비밀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라도 순종하심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셨다면 그 나라를 증시해야 할 교회가 순종을 배우지 않고 어떻게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아무데도 쓸데 없이 내어버림 당할 까 두려워해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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