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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야고보서

야고보서 1장 말씀을 듣고 행하라

야고보서 1장 말씀을 듣고 행하라

Tolle Rege/야고보서

2013-10-21 20:59:45


 

  야고보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형제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었던 야고보라고 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저자인 야고보는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글은 편지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특정 교회가 수신자가 아니며 특정한 이슈를 다루고 있지 않으므로 히브리서와 같이 한편의 설교라고 볼 수 있다. 수신자로 지칭한 열두지파도 그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이지 특별히 누구라고 특정할 수는 없다.

 

  야고보는 시험을 당하는 문제로 서두를 시작한다. 시험을 당할 때 기뻐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시험이란 믿음의 유무를 테스트하는 시험이다. 이런 시험을 통해서 인내가 형성되고 온전하고 성숙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험을 당할 때 필요한 것이 지혜이다. 저자는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시험을 당할 때 필요한 지혜란 하나님이 주시는 신적인 지혜이다. 그런데 지혜를 구할 때 믿음으로 구하여야 한다.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은 자인데 이런 자들은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이다. 야고보는 이런 자는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낮은 형제란 이어서 나오는 부한 자와 대조되는 가난한 자를 의미할 것이다. 야고보는 교회내에서 가난한 자와 부한 자, 가진 자와 못 가진자의 문제를 다룬다. 이 세상에 가장 풀길이 없으며 가장 오래된 문제, 인류의 영원한 숙제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문제가 교회에서는 풀려야 하고 풀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먼저 가난한 자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말한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낮은 자이지만 그의 본질적인 정체성은 높은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으니 어찌 높은 자가 아닌가? 외적인 물질이 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의 정체성을 결정해 주기 때문이다. 문제의 해결은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임을 야고보는 설파한다.  마찬가지로 교회내에 부한 자도 자기의 부를 자랑하지 말고 그 부를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진정한 정체성은 소유한 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간다고 말한다. 이 말을 하는 것은 교회에서 시험을 당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부의 소유 여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야고보는 시험을 참는 자, 즉 시험을 받을 때 인내로 견디는 자가 복이있다고 말한다.시험을 견디고 이겨낸 자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생명의 면류관이 시험을 견딘 댓가로 주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생명의 면류관은 시험을 견디는 과정을 거쳐서 주어진다는 말이다. 그것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지만 아무 과정도 없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자도 시험을 견디어 이겨야 하고 부한 자도 시험을 견디어 이겨야 한다. 그 시험을 이기는 요체는 자기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럴 때 낮은 자(가난한 자)는 자기의 높아짐을 기뻐할 수 있고 높은 자(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 길이 바로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제시한다.

 

  그런데 이런 시험, 특별히 물질의 문제로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물질로 인한 시험은 자기 욕심에 끌려서 미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욕심은 죄를 낳는 것이며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결국 물질로 인한 시험은 욕심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아야 한다.  물질에 자족함을 누리지 못하면 참된 경건에 이르지 못한다. 욕심과 소망의 차이는 그 대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자기의 뜻을 추구하면 욕심이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 소망이 된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추구하느냐는 것이 문제이다. 선악과 금령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의 뜻을 추구한 것이 바로 죄악의 뿌리임을 보여준다. 사망은 죄의 열매이다. 죄는 반드시 사망을 가져온다. 모든 죄인은 사망의 권세아래 놓여있다. 하나님은 그런 죄인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시험을 견디고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다. 시험을 이기려면 자기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해야 한다. 그래서 야고보는 지혜를 구하라고 한 것이다. 하늘로 부터 오는 지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속지 말라고 경고한다. 온갖 선한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다 위로 부터 빛들이 아버지로 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야고보는 하나님은 피조물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말한다. 엄청난 진리를 한마디로 응축하여 선포한 것이다. 피조물중의 첫 열매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피조물 중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되는 것이 매우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야고보가 그 의미를 달리 설명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 말은 아마도 당시에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다 알아듣는 말이었을 것이다. 문맥상으로 보면 피조물의 첫 열매란 아마도 생명의 면류관 곧 영생을 가리키는 것인 듯하다. 그러니까 인간의 범죄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고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사망의 권세에 사로잡혔는데 피조물중에 처음으로 그 사망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 이것이 바로 피조물중의 첫 열매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다는 표현이 나온다. 물론 이것이 생물학적인 의미는 아닐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영생이고 이것이 바로 신자들이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듣기를 속히하고 말하기를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권면한다. 특별히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야고보는 하나님이 진리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말한다. 이는 진리를 듣고 깨달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나 성내는 것 보다 듣기를 속히 하라고 말한다.  말하는 것이나 성내는 것은 자기의 생각을 주장하는 것인데 반해 듣는 것은 진리를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배우려면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이는 마치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고 나서 곧 자기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을 행하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들은 것을 행하는 자이다. 이런 자가 복이 있다. 

 

  여기서 야고보는 자유케 하는 완전한 율법이란 말을 하는데 이는 복음을 구약의 율법과 대비시켜 하는 표현일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정죄하지만 정죄로 부터 자유케 하지는 못하는데 복음은 믿는 자를 자유케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여전히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복음이 단지 듣는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듣고 행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과 아울러 동질성을 발견하게 된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고 그 뜻에 순종하는 행함이 요구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다만 그 차이점은 구약의 법이 정죄하고 속박하는 율법이라면 신약의 법은 죄로 부터 자유를 누리게 하는 법이라는 것이다.  다시 야고보는 교회에서 말하기를 더디하라는 교훈을 다시 거론한다.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는 자의 경건은 헛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만 하고 행함이 없다면 이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고 경건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진정한 경건의 한 예를 든다. 그것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