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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마가복음

마가복음 12장 성전에서 논쟁하심

마가복음 12장 성전에서 논쟁하심

Tolle Rege/마가복음

2013-06-02 20:22:19


 

  예수님이 하시는 이 비유의 대상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들 곧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의 출처가 어딘자를 묻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한 것은 백성을 가르치고 종교적 행위를 지도하는 권세는 자신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을 내포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바로 이들을 향하여 이런 비유를 하신 것이다. 그 비유의 내용은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다는 것이다.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을 얻으려고 종을 보내었는데 농부들이 그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내어쫒았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이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도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다. 또 다른 종을 보내니 농부들이 그를 때리고 죽였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었는데 농부들은 이는 상속자는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가 빼앗자 하고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 밖으로 내어던졌다. 이런 상황에서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할 것인가? 와서 그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포도원 비유는 사실 현실에서는 일을 법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 하나님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엄중하게 지적하신 것이다. 여가서 농부는 말할 것도 없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이 여러번 보냈던 종들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보내어진 선지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을 보낸 아들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 포도원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몇가지 중대한 계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물론 이 비유에서 촛점은 악한 농부로 비유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악함과 반역을 지적하는 것이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자들이 예수님에게 무신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 것은 마치 악한 농부들이 포도원주인의 아들에게 무슨 권세로 우리에게 세를 거두려 하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계시는 몇가지인데 첫째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포도원이고 하나님은 결코 자신이 만든 포도원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그포도원에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가 맺힐 때까지 하나님은 역사히실 것이다. 두번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포도원을 잘 돌보라고 세를 준 농부일 뿐 이스라엘을 좌지우지 하는 권세를 가진 자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신들의 본분을 망각하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세번째는 하나님은 종들을 보내어 그들에게 경고하셨고 이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셨는데 아들을 보내신 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점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여러부분과 모양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고 이 마지막 날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런데 농부들이 아들의 죽였듯이 아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일 것이다. 이것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된 일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다"는 시편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쓸모 없다고 버린 돌인 예수를 하나님은 하나님나라의 모퉁이돌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들은 이 비유가 자신들을 비난하는 비유인 것을 알고 예수를 잡으려고 하였지만 무리를 두려워하여 잡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말을 책잡으려고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받치는 문제를 가지고 시험하였다.이 질문은 매우 정치적으로 예민한 질문이엇고 긍정이든 부정이든 어떤 대답이든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교활한 질문이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라"는 말이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은 성과 속 혹은 정치와 종교를 구별을 하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부당한 해석이다. 이 말씀은 가이사의 것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것이 따로 있다는 일반적인 진리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교활한 질문을 예상치 못한 답변으로 부수어 버린 것일 뿐이다.

 

 그들은 또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곤경에 밀어넣으려고 시도하였다.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이 와서 이스라엘의 형사취수법을 예로 들면서 부활이 없다는 증거로 주장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신다. 그리고 죽은 자가 부활하였을 때는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이 없이 하늘의 천사들과 같이 된다고 가르쳐 주셨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고하신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므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두가지 중대한 신학적 계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첫째로 인간의 죽음은 원래 창조질서가 아니었다.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끊어짐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에게 죽음이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은 죽음을 이기는 것이고 원래의 창조질서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활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사실 죽음이 이상한 것이다.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바로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시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이스라엘이 허망한 죽음의 권세에 매여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다가오셔서 끊어졌던 관계를 다시 언약의 형태로 회복시키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백성이라는 사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그러하듯이 다시는 사망의 권세가 그들을 주관하지 못함을 보증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결혼제도에 대한 것이다. 창세기의 기록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우신 것은 인간 세상에 결혼제도를 세우신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결혼제도는 창조질서인 셈인데 여기서 예수님은 부활의 때에는 결혼제도라는 창조질서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부활의 때에는 자신이 세우신 창조질서를 폐기하신다는 말인가?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도전을 던져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가 불변하는 고정된 것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창조의 목적을 향하여 발전되어 나가는 것임을 계시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말은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가 불완전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만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고정된 완전성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비유컨데 씨와 열매는 그 자체로는 각각 완전하지만 씨의 궁극적인 발전은 열매인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제도는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질서였지만 창조의 궁극적인 질서는 결혼제도에 머무르지 않고 더 탁월하고 풍성한 인간관계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물론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그리스도를 머리로한 교회의 유기체적 상호연합의 모습은 부부관계나 가정이라는 최초의 창조질서를 뛰어넘은 궁극적 인간관계가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닐까?

 

  서기관중의 한사람은 예수님의 이런 대답을 듣고 놀랍게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율법학자 답게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에수님과 신학적 토론을 하려고 하였다. 물론 그가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인자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닐 것이고 그 질문을 가지고 신학적 논쟁을 하려는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한 듯하다. 특히 예수는 미천한 갈릴리출신으로서 학문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기에 신학적 논쟁으로 궁지에 빠뜨리려고 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즉시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첫째 가는 계명임을 거침없이 증거하셨다. 예수님의 이런 거침없는 말씀에 아마도 이 율법학자는 감명을 받은 듯하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첫째 계명을 지키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 보다 더 낫다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그가 지혜롭게 대답함을 보시고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침묵하게 만드셨으니이후에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그들을 향하여 질문을 하신다. 공세가 뒤바뀐 것이다.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치는데 그렇다면 시편 110편에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질문하신 것이다.아마도 이 질문에 율법학자는 당황하여 아무 대답도 못했을 것이며 백성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율법학자들이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못하면서 긴 옷을 입고 시장에서 문안받고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자들임을 지적하신다. 심지어 그들은 율법을 범하여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의 엄한 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예수님은 지금  성전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셨으므로 자연히 사람들이 성전안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 때 부자들은 많은 돈을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겨우 두 렙돈, 곧 동전한잎을 넣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 얼마를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다. 이 말씀은 헌금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계시한다. 곧 헌금은 단순히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대표된 자신을 드리는 것이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전적인 신뢰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남의 눈을 의식하는 헌금은 외식에 빠지는 길일 것이다. 헌금방식에 무기명과 유기명의 두 가지가 혼용되고 있으나 무기명 방식이 헌금의 정신을 살리는 더 나은 방법일 것이다. 헌금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헌금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앞에서 벌어진 긴 논쟁의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을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마음이 없이 체면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외식이 얼마나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