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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창세기

창세기 3장 뱀의 유혹

창세기 3장 뱀의 유혹

Tolle Rege/창세기

2011-04-29 19:52:25


  3장은 악의 근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한다. 그러나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일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선과 악의 이원론은 단호히 거절한다. 뱀과 하와의 대화는 순종의 본질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은 결코 쉽지 않은 것임을... 거기에 거짓과의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뱀의 말은 거짓은 언제나 진리를 교묘하게 뒤틀은 것임을 보여준다. 분별력이 없이는 거짓을 이길 수 없는 것 이다. 뱀의 첫마디는 진리를 뒤틀은 것이다. 이에 대한 하와의 대답은 뒤틀은 진리를 수용한 것이고 뱀의 두번째 말은 반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잽을 던져보고 허점이 보이자 카운터 펀치를 날린 격이다.  하와의 실패는 결국 분별의 실패일 것이다. 왜 실패했을까? 선악과 금령의 의미가 무언지 숙고해 보지 않은 자의 어리석음이 아닐까? 

 

  선악과 금령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금령을 주신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다. 금령을 지키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왜 그 금령을 지켜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은 순종이다.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분을 향한 순종이며 복종이다. 그 순종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로 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관계적 순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 그 자체가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순종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여기에 언약과 언약법의 긴장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약법을 볼 때 반드시 언약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언약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오직 언약 관계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언약을 생각할 때 언약법을 중시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약은 반드시 언약법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약없는 언약법은 거짓이듯이 언약법 없는 언약도 거짓인 것이다. 하와의 실패는 언약을 생각지 않고 언약법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 언약법이 그에게는 굴레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즉 복음없는 율법이 위선적 율법주의이듯이 율법없는 복음 역시 위선적인 반법주의임을....

 

  불순종의 결과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의 심각한 훼손을 초래하였다. 성경은 그 결과 나타난 현상을 증언하고 있다.   첫째는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 하게되었다는 것이고 남자와 여자의 한 몸됨 그 연합의 관계가 깨어졌음을 계시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문책에 아담과 하와는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서로 갈등하고 지배하는 비참한 관계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인간관계의 깨어짐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깨어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존귀한 존재이지만 오히려 음성을 듣고 그 닟을 피하여 숨게된 것이다. "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을 향한 벗은 것에 대한 두려움,, 아담과 하와 서로를 향한 벗은 것에 대한 부끄러움 이것은 하나님과의 연합, 사람과의 연합의 파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을 타자로, 아담과 하와는 각각을 타자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결국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 즉 언약법 어김의 결과는 언약적 관계의 파괴를 가져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언약관계가 모두 일그러지고 두 가지 연합은 파괴된 것이다. 그래서 해산의 고통과 먹고 사는 수고가   더해진 것은 이제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동산, 하나님의 나라에서 쫒겨난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생을 책임져야 하는,,, 수고롭고 불안한 운명이 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창조목적과는 관계없이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기는 커녕 죽기를 무서워 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사람을 에덴에서 내어 보내면서 하신 이 말씀,,,, 과연 사람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인가?  과연 인간은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으면 영생하는 것인가? 이것은 거짓을 쫒은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있음 그것이 영생이고 언약법에 순종하는 것 그것만이 선일 뿐이다.

 

 

추기 2011. 11. 6 주일

 

  선악과 금령은 그 자체로는 단순하고 쉬운 계명이다. 동산 나무의 모든 실과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며 오직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만 먹지 않으면 되므로 이것은 무거운 명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과 금령을 주시면서 왜 그것을 먹으면 안되는지 설명하지 않으셨다.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은 먹지 말아야 할 이유가 아니라 먹으면 발생한 결과를 알려준 것 뿐이다. 그러므로 이 금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금령은 주신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 선안과 금령이 요구하는 순종은 바로 금령 자체의 의미보다는 금령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령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선악과 자체나 선악과 금령이 가져올 결과에서 찾을 수 있는 것아 아니라 금령을 주신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금령을 지켜야 하는 자신은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금령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존경심과 무조건적인 순종 그리고 자신은 순종을 통하여 그 존재목적을 이루하는 피조물임을 인식하는 일이 없이는 지킬 수 없는 금령인 것이다. 

 

  하나님이 이 금령을 주신 이유도 바로 이것을 가르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선악과 금령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뱀의 거짓이라는 도전앞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책임을 뱀에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물으셨으며 그 결과는 인생의 수고와 죽음으로 요약되는 바, 인간의 창조목적의 상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주어지는 구원의 실체를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구원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원래의 창조목적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런 창조목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인간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 구원은 인생의 수고와 사망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안식과 부활의 능력으로 인간 역사 가운데 나타나야 할 것이다.

창세기 3장

2019-10-10 20:39:23


창세기 3장

  3장은 인간 역사의 분수령이 된다. 첫 사람이 선악과 금령을 어김으로써 이후 모든 인류는 심각한 파국에 들어가게 된다. 첫 사람을 범죄하도록 부추긴 존재는 뱀이었다. 성경은 이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 하나인데 그 중에 가장 간교한 들짐승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뱀은 하나님을 대적하였지만 하나님과 동등한 어떤 악의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범죄는 하나님이 모르셨거나 아니면 막을 수 없었던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창조 경륜 가운데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가진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수하시고 사람을 만드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순종을 요구하셨지만 사람의 불순종을 막지 않으셨고 사람을 불순종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이 요구하신 순종은 자발적인 것이었다.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미 순종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종할 수 있는 자유는 물론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도 가진 존재로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뱀과 하와가 나누는 대화를 보면 하와는 선악과 금령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고 또 그 금령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뱀의 유혹하는 말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물론,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하와의 경우는 잘 보여준다. 에덴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도 있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 그 나무들의 이름을 붙이신 분은 하나님이실 것이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마음대로 먹어도 되었고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라고 하셨다. 아마도 생명나무라는 이름은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있음을 의미할 것이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선이고 불순종하는 것이 악임을 의미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무 이름을 그렇게 지으신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뱀은 전혀 반대로 그 이름의 의미를 해석한다. 뱀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마치 지금 눈이 어둡다는 거짓된 전제를 가지고)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된다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결코 죽지 않는다고 단언함으로써 반드시 죽는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선악과 금령을 범했을 때, 즉각적인 죽음이 임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 즉각적으로 임하였다. 첫 사람의 범죄는 중대한 두 가지 결과를 초래했는데 첫째는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은 것이고 둘째는 사람이 자기가 벗은 것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린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심각한 훼손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관계의 훼손은 사람이 자신의 창조 목적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것이고 결국 인간은 그 존재 근거나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이야 말로 육체의 죽음보다 더 본질적인 죽음인 것이다. 두 가지 관계의 훼손으로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의 창조 목적인 다스리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담을 돕는 배필로서 다스리는 일에 동역해야 하는 하와는 오히려 아담을 망가뜨림으로 사람은 다스리는 일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았고 그러므로 사람은 평생에 수고하여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람은 결국은 수고롭게 일하다가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셨다. 사람은 땅을 다스려야 할 존재인데 사람이 범죄함으로 땅을 다스릴 수 없게 된 것이다. 다스릴 자가 없게 된 땅, 순종할 대상이 없어진 땅, 이것이 바로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땅은 더 이상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음으로 사람이 먹기에 좋은 나무대신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수고롭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수고의 결과는 오직 육체의 죽음뿐인 허무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창조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결국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사람이 범죄하여 타락했지만 악에게 압도되게 버려두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사람을 통해 이루어져야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어떤 경우라도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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