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장 선악과 금령
Tolle Rege/창세기
2011-04-29 00:40:54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소위 선악과 금령이다. 하나님의 이 금령은 창조 이후 모든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왜 이 금령을 주셨을까? 이것이 우리가 갖는 어줍잖은 질문이다. 그리고 이 어줍잖은 질문속엔 억울함과 원망이 숨겨져 있다. 과연 아담은 이 명령을 어떻게 이해하였을까? 이후의 실패의 역사는 이 명령에 대한 오해가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 아담에게 하신 이 명령은 과연 아담에게만 주어졌고 이제 우리완 상관이 없는 명령인가? 하나님은 창조주, 우린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창조주에겐 명령의 권리가 있고 피조물은 명령을 순종해야 하는 의무기 있다. 그러나 이 당연한 사실을 사람은 인정하여 하지 않는다. 이 명령은 단순히 인간의 권리와 의무 이상의 심원한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명령애 대한 오해, 이것인 인간 역사의 비극의 원인이 되엇다면 오늘날의 인간 역사의 비극의 원인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가 아니겠는가?
사실,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명령도 없을 것이다. 맘대로 먹어라 그리고 절대 먹지 말라. 순종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을 것인가? 죽음의 위협이 아니다. 죽음 때문에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순종의 동기가 아니라 불순종의 결과일 뿐이다. 이 명령 자체에 무슨 복잡한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을 것인가? 이 명령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순종을 거부하였다. 그렇다면 왜 순종을 요구하신 것일까? 하나님은 왜 우리의 순종을 필요로 하셨던 것일까? 우리는 1장으로 돌아가서 이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이 엄숙한 사싫은 하나님과 사람은 특별한 관계, 떨레야 델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준다. 순종의 요구는 이 관계에서 발생한다. 이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순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관계가 없었다면 순종이 요구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 관계는 순종을 통해서 유지 발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 금령은 관계의 유지 발전법령이다. 사람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는 유지 발전되는 것이고 그 관계가 유지 발전되어야만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야만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목적이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현대 신학자들 대부분이 동의한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나라임을,,,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이 땅과 역사가운데 나타난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를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통하여 이루어 지는 것이다. 결국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이 땅과 역사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이것이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이었다. 그런데 사람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창조목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수하시려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것은 매우 불충분한 말이다. 아니 핵심을 놓치고 변죽만 울리는 말이다. 예수님 그는 사람이 되시고 이 세상에 사시고 행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모든 것이 철저한 순종 그 자체였다. 예수님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고 창조목적이 화복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이것이 바로 창조의 목적이다. 그 나라는 인간의 순종을 통하여 인간의 통치의 모습으로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란 2장의 계시를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나라이다.]
"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이것은 1장27절에 대한 주석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지만 그들을 동시에 지으신 것도 아니고 남자를 먼저 지으시고 그 다음에 여자를 별도로 지으신 것도 아니다. 남자를 지으시고 남자로 부터 여자를 지으셨다는 것이다. 이 계시는 여성의 열등성을 증명하며 여성신학자들의 심기를 불편케하는 대목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대목은 결코 남녀의 우월성, 열등성을 가르치는 대목일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통치권을 주실 때, 남자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 즉 남자와 여자에게 동일하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가 남자에게 나왔듯이 모든 남자는 여자에게 나오지 않는가?
성경의 이 계시가 말하려는 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나온 종속적 존재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는 독립된 두 실체가 아니라 한 실체의 두 존재임을 말하려는 것 아닐까? 아담이 하와를 보았을 때 "이는 내 뼈중의 뼈요 내 살중의 살" 이라고 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와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상대라는 의미 보다는 차라리 자기의 분신, 아니 자기 자신과 구별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러므로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이어지는 창세기 기자의 주석은 이를 암시한다. 남자와 여자는 원래 한 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결혼제도도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하지 않은 것 아닌가? 누가 자기의 벌거벗은 몸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낄 것인가! 남자와 여자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설명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 무엇인지 계시하는 것이 아닌가? "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추기 2011. 11. 6
사실 2장의 선악과 금령은 1장의 인간 창조의 목적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이다. 1장은 분명히 인간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것임을 말한다. 그렇다면 2장의 선악과 금령은 바로 인간 존재의 목적인 만믈을 다스리는 일이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되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그 분의 뜻대로 만물을 다시리는 것이 인간 존재의 목적임을 가르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위임하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이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져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도록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추기 2014. 4. 12
창세기 2장 15-17
가수 이장희의 "나는 누구인가" 라는 자작 노래가 있다. 그는 노래에서 전설속에 선악과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치워주지 않았냐고 묻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매우 중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선악과는 인류 역사의 분수령이 된 사건이며 성경 계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왜 동산의 모두 나무의 열매는 마음대로 먹으라 하시고 동산중앙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만들어 놓고 그 열매는 먹지 말라고 금하신 것일가? 사람이 그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런 시험거리도 만들어 놓으신 건가? 아예 그런 나무가 없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왜 하나님은 사람이 그 열매를 먹는 것을 막지 않으셨나? 이런 질문과 의문은 불신자들만의 것일까?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신 이유는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려 하심이었다. 사람에게 엄청난 권세가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권세는 위임된 권세이지 사람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권세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만물을 다스리되 권세를 위임하신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 뜻대로 만물을 다스려만 한다. 이것이 엄청난 권세에 부가된 한가지 조건이다.
선악과 금령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선악과 금령은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여야 할 존재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악과 금령으로 사람에게 이것을 가르치시려 한 것이다. 이것이 사람 창조의 목적이며 이것이 사람 존재의 이유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악과 금령을 어긴 것은 창조의 목적을 거스린 것이며 따라서 자기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이다. 죽음은 불순종하는 사람의 존재 이유가 상실되었음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한다.
오늘도 사람들은 죽고 죽고 또 죽는다 아무도 죽음의 권세를 벗어날 자가 없다. 그리고 죽기를 두려워 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으니 바로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이 바로 복음이며 유일한 희망이다.
선약과 금령은 하나님은누구이시며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최고의 계시이다.
추기 2014. 4. 11
창세기 2장 1-4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여기서 좋았다는 것은 선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선한 것이며 거기에는 악이 전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선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기뻐하셨으니 창조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셨을 때 안식하셨으며 그 날을 복 주시어 거룩하게 구별하셨다. 창조가 마친 그 날을 복주시어 다른 창조의 날들과 다르게 거룩하게 구별하신 것이다. 이는 창조가 완성되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창조의 목적지를 향하여 진행해 나아갈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창세기 2장
닥치고 성경/창세기
2019-10-10 20:35:32
창세기 2장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이 사람이기 때문에 2장은 사람의 창조에 대하여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이라는 특정한 장소에 두시고 그곳에서 다스림을 시작하게 하셨다. 그런데 2장에서 부터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한다. 원래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로 처음 계시된 것은 출애굽기 3장이다. 그러니까 여호와라는 이름은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앞두고 있을 때 주어진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2장에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으신 들짐승과 각종 새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면서 아담에게 이름을 짓게 하신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다스리는 행위를 대표한다. 하나님은 아담이 무엇이라고 이름을 짓는지 보고 싶어 하신다. 만물을 지으셨지만 그것을 다스리는 일은 사람에게 맡기시는 분, 이분이 바로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이시다.
1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하였는데 2장에서 그것을 자세히 설명한다. 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로 사람을 창조하셨는가? 그것은 남자를 도울 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남자를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으신 것이다. 남자의 일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일이므로 여자가 남자를 돕는다는 것은 바로 다스리는 일을 돕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는 인격적이니 신분적으로 남자를 돕는 보조자가 아니라 다스리는 일에 남자의 동역자로 지어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따로 따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남자를 먼저 지으시고 나중에 남자를 돕는 배필로서 남자로 부터 여자를 지으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것은 두 사람이 서로 협동하여 사람을 지으신 목적인 다스리는 일을 잘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스리는 일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다스림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가 이루는 최소의 공동체인 가정의 목적도 다스림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것은 사람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인간관에는 외로운 개별자로서의 인간은 없다. 인간은 창조로부터 공동체적 존재로 지어졌고 이후의 모든 출생도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와의 관계를 가지고 태어나는 공동체적 존재인 것이다. 공동체적 존재인 사람의 목적은 공동체를 이루어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는 개별자인 개인들이 모인 단체나 집합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그렇듯이 생래적으로 뗄레야 뗄 수 없는 필연적인 관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각각 만드시지 않고 아담으로 부터 하와를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하면서 하와라는 존재가 자신과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는 운명적으로 결합된 한 몸임을 표현한 것이다.
2장에서 중대한 계시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악과 금령을 명하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명령을 어길 때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경고가 덧붙여졌다. 죽음은 불순종에 대한 형벌이라기보다는 불순종의 당연할 결과로 경고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할 때, 사람은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하다는 엄중한 경고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악과 금령을 명하시고 엄중하게 죽음으로써 경고하신 것일까? 선악과 금령의 의미는 1장 26절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진 다스림의 권세는 원래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위임하신 권세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그 권세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는 자명해진다. 사람은 그 위임받은 권세를 권세의 원래 주인이신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 뜻에 따라서 사용하여야 한다. 선악과 금령은 바로 이것을 보여준다. 선악과 금령에는 그 열매를 먹지 말아야 하는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다. 오직 하나님이 금하셨다는 그 이유뿐이다. 그러니까 선악과 금령이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고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다스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게 하기 위하여 천지를 지으셨고 또 특별히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다." 이것이 창조 목적이며, 이 창조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는 창조로 부터 시작되었으며 종말론적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말은 창조의 종말이 아니라 창조 목적이 이루어지는 창조의 완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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