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재

『창세기 1장의 잃어버린 세계』 (존 H. 월튼)

『창세기 1장의 잃어버린 세계』 (존 H. 왈튼)
 
서론~
 
구약 성경은 현재 우리와 소통할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으며, 모든 인류를 위해 기록되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해 기록되지 않고 이스라엘을 향해 기록되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계시이며,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차적으로 다른 모든 이에게 주어진 계시이다. 이것이 명백한 사실인 만큼 우리는 이 간단한 진술이 암시하는 바를 잘 알아야 한다. 다른 문화권에 전달되었고 다른 언어로 기록된 문헌을 우리가 알고 완전히 이해하기 원한다면 그 언어와 함께 문화도 번역해야 한다. 그러나 그 누가 문화를 번역하려 드는 순간 그 텍스트가 결코 말하려고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만드는 위험을 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문화를 번역하기보다 오히려 문화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문헌은 그것을 생산해낸 문화의 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문헌과 친숙해짐으로써 문화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문헌을 해석할 수 없고, 문헌을 해석하지 않으면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성경만을 다룬다면 실로 순환논리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성경을 우리에게 오랫동안 친숙해온 문화적 사고방식에 맞추어 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대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많은 개념과 관점을 공유했었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은 비록 그들 자신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표현되지만, 세계가 어떻게 있어왔고, 어떻게 있으며,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진정으로 믿는 바를 나타낸다.
 
명제1 창세기 1장은 고대 우주론이다
 
창세기 1장은 고대 우주론이다. 창세기 1장은 현대 용어로 우주론을 기술하거나 현대의 질문들을 검토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주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갱신하거나 수정하도록 어떤 계시도 받지 않았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창세기 텍스트 안에 현대 과학이 들어있거나 현대 과학이 그래야 하도록 강요한다고 연구한다. 창세기 1장을 이런 식으로 연구하는 것은 “컨코디즘”(역자주, concordism 조화주의 : 창세기 본문과 과학이 일치 혹은 조화된다고 믿는 생각)이다. 이것은 현대 독자를 위해 문화와 텍스트를 “번역”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들의 우주론을 우리들의 우주론으로 번역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현대 우주론으로 전환시키려 한다면, 텍스트가 결코 말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말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텍스트에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에, 텍스트가 결코 말하려고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것으로 의미를 변경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컨코디즘의 또 다른 문제는, 텍스트를 최신의 과학적 합의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지난 세기의 과학적 합의 뿐 아니라 다음 세기에 개발될지 모르는 합의와도 일치하지 않게 됨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오늘날의 과학에 끌어들여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주 지리학의 세부 사항을 계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우주 지리학은 우주의 형태에 대한 사고방식으로 정의된다). 지구의 형태, 하늘의 속성, 해 달 별의 위치들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의 우주 지리학에 개의치 않고 원하시는 바를 전달하실 수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지성, 감정, 의지에 대해 말씀하기 원했을 때 그들의 생리학적 아이디어들을 수정하지 않으셨고, 뇌의 기능에 대해 계시하도록 강요받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대신 하나님은 그들이 이해하는 용어로 소통하시기 위해 문화 언어를 채택하셨다. 전체 성경을 통틀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문화 이상으로 과학을 계시한 예는 한 군데도 없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나머지 명제들을 통과해 나가기 전에 위의 목록에 있는 쟁점 하나는 즉시 검토해야 한다. 그것은 고대 근동 사고에서 “자연적” 세계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가르는 이분법은 비교적 최근의 것이다. 신(deity)은 고대 세계에 충만했다. 어떤 일도 신과 관계되지 않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신들은 개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말은 신들이 드나드는 외부 세계가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대 세계의 다른 사람들을 따라 모든 일을 신의 행동으로 믿었다. 어떤 “자연적” 법칙도 우주를 지배하지 않았고, 신은 우주를 운행했으며 본래부터 우주 안에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차원이 어떻게 “자연적” 세계(소위 자연론적 과정 혹은 자연의 법칙)에 관련되는지 토론하기 위해 성경 구절이나 고대 근동의 문헌을 사용하도록 기대해서는 안 된다. “자연적”과 “초자연적”범주는 그들과 아무 관계가 없고 관심도 없다(현대 세계에서 그런 질문들이 무대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만).
 
우리는 텍스트를 그 자체의 용어로써 취해야 한다-그것은 우리에게 써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텍스트의 의제를 선택했고, 우리는 그것들을 선택하신 지혜에 만족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텍스트로 하여금 우리들의 쟁점을 토론하도록 제멋대로 사용한다면, 그 과정에서 텍스트를 왜곡하는 것이다. 메시지는 그 배경 문화를 초월하지만 메시지가 박혀 있는 형태는 고대 문화에 완전히 물든 것이다. 비록 고대 문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항상 제한적이겠지만, 고대 문헌이 텍스트를 적절하게 해석하는 열쇠이며, 고대 문헌이 우리의 이해를 진일보하게 해줄 만큼 충분한 양이다.
 
명제2 고대 우주론은 기능 지향적이다
 
세계 혹은 우주(그 안에 있는 물체들)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우주 존재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가 우주 존재론을 말할 때, 존재를 관찰하는 것으로 비쳐지기 때문에 그 의미는 물질적 용어들의 의미이다. 존재론에 대한 우리의 물질적 관점은 뒤이어 창조에 대한 우리의 사고 방법을 결정하는데, 그런 식으로 보기 쉽다. 만약 존재론이 존재의 용어들을 정의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창조가 어떤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한 사람의 존재론은 그가 창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가지고 한계를 설정한다. 우리 문화에서 존재가 물질로 구성되었다고 믿는 한, 결과적으로 어떤 것을 창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의 물질적 특성들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래서 기원에 관한 우리의 토의가 물질의 기원에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어리석은 토의처럼 들릴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어떤 것은 물질적 특성 때문에 존재한다. 당연히 창조가 어떤 것에 물질적 특성을 부여함을 의미한다! 그 밖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어요?라고 화가 나서 물을 것이다.
 
우리가 고대 세계의 창조 기사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들이 “창조”라고 했을 때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제공하는 대신에 그들의 우주 존재론을 검토해야 한다. 이 책에서 나는 고대 세계의 사람들이 물질적 특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서 정연한 체계 속에서 기능을 가짐으로써 어떤 것이 존재함을 믿었다고 제안한다. 기능적 존재론에서, 어떤 것을 존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물질적 특성을 부여하기보다 오히려 질서 정연한 세계 안의 역할이나 기능을 부여하는 것이 요구된다. 결과적으로, 어떤 것이 물질적으로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기능적이 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적 창조행위는 어떤 것을 질서 정연한 체계에서 기능적인 역할을 하도록 임명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어떤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것이 기능을 받을 수 있으려면 먼저 물질적 특성들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중대한 질문은 어떤 단계가 “창조”로 정의되는가? 라는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존재를 이해하는데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했던 것은 우주의 부분들이 기능하는 방법이었지 그것들의 물질적 상태가 아니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증거는 성경 텍스트와 고대 세계의 문헌 양쪽으로부터 나온다. 전자가 당연히 더 중요한 이유는 성경적 텍스트가 고대 세계와 다른 존재론적 관점을 취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헌에서 발견한 것들에 기초해 창조 활동들로 간주해온 것을 수정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어떤 우주 지리학이든, 그들이 경험하고 관찰했던 대로 기능과 가동을 이해하기 위해 구조에 대한 이론들이 개발되었다. 창조 텍스트들은 이런 구조들이 제 위치에 놓이는 것을 묘사했다. 신의 역할은 신들의 기능에 더 관심을 가졌다. 신들의 기원이 우주 요소들의 기원과 연결되어 있고, 기원들이 일치하는 것은 그 기원들이 본질상 기능적임을 가리킨다. 거의 모든 고대 세계의 창조 기사는 아무런 작동 체계도 제자리에 없는 채 이야기를 시작한다(비기능적). 종종 창조는 물에서부터 드러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름 짓기는 창조 네러티브의 전형적인 한 부분이다. 하늘들과 땅이 가장 자주 분리되었다(분리하기). 살아있는 피조물들이 거의 창조 기사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흥미롭다. 많은 창조 기사에 사람들이 들어 있다. 결론적으로, 고대 근동의 창조 문헌 분석가들은 종종 이들 기사에서 실제로 어떤 물질도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는 고대 근동의 사람들이 창조에 대해 물질적인 것들을 만든다는 의미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대신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기능 지향적이었다. 신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들이 우주의 모든 구성요소들로 하여금 기능을 다하게 한다. 그리하여 창조는 우주를 원래의 비기능적 여건에서 질서 있는 상태가 되게 한다. 결과적으로, 고대 세계에서 무엇을 창조하는 것(존재하게 만드는)의 의미는 그것에 물질적 특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을 부여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 장에서는 존재에 대한 우리의 물질적 정의가 존재를 정의하기 위해 가능한 방법 중 하나라는 점에 주목했다. 나는 고대 세계의 사람들은 다르게 정의했다고 제안해왔다. 그들은 존재가 질서정연한 체계 속에서 하나의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 정의된다고 생각했다.
 
명제3 “창조하다”(히브리어-바라)는 기능들에 관한 것이다
 
우리에게 모든 단어들에 대해 정의를 내려주는 히브리어 고대 사전은 없다. 그 대신 우리는 수세기에 걸친 주석가들과 번역가들의 주의 깊은 작업에 의존한다. 단어의 뜻은 언어 사용자들의 방법에 의해 정착되고 결정된다. 여기에는 그들이 사용한 문장의 종류들, 그들이 비교할 수 있는 단어들, 그들이 통상 연결해서 사용하는 단어들이 포함된다. 한 단어가 은유적으로 사용되었는지 관용어와 함께 사용되었는지, 기술적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은 문맥이다. 어떤 학자가 히브리어 단어가 이것 혹은 저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려면 관용법의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런 분석 자료 목록이 제공됨으로써 심지어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그 데이터를 이중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바라” 동사가 나올 때마다 하나님이 주어나 암시적 주어가 된다고 말할 때, 영어 독자들도 그것을 관찰할 수 있고, 이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분석을 시작할 수 있다. 1절에서 창조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바라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가? 첫째로, ‘바라’에 대해 구약성경에서 ‘바라는 X를 의미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주석이 달린 구절은 한 군데도 없다. 그래서 평소대로 우리는 주어, 목적어, 관련용어 같은 정황적, 문맥적 분석에 매달려야 한다. 신(deity)은 항상 ‘바라’ 동사의 주어이거나 암시된 주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유한 신적 활동이다. 이 동사의 목적어를 분석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쟁점이다. 우리가 창조 활동을 구성하는 것(특히, 물질적이냐 기능적이냐)에 대해 탐구하기 때문에, 창조된 것의 본질은 극도로 중요하다. 구약에 나타난 50번 가량의 ‘바라’ 동사의 목적어에서 물질적 용어들이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이 동사를 물질적 관점으로 보아야 할 분명한 예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문맥들의 큰 부분이 기능적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바라’가 無로부터의 창조(ex nihilo)를 암시한다고 하는 것은 흥미롭다. “창조하다”가 물질적 활동으로 보더라도(그들 쪽에서 전제한 대로), 문맥이 결코 물질들이 사용되었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물질적 대상은 다른 물질들을 사용함이 없이 존재하게 되었어야만 한다. 결국, 물질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무로부터 물질을 창조했기 때문이라고 제안하기보다, 오히려 ‘바라’가 물질적 활동이 아니라 기능적 활동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통해 더 잘 설명된다. 그들의 물질적 존재론이란 어떤 대안도 검토해본 적이 없는 맹목적 전제였다.
 
태초. 히브리어 관용법에서 이 단어는 전형적으로 한 시점(a point in time)이라기보다 한 기간(a period of time)을 소개한다.(욥8:7; “네 시작은 .... 네 나중은 ...”) “태초”가 7일 이전의 어떤 시점에 대해서보다 7일 기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라 결론짓는다. 1절이 언급한 창조는 사실상 7일 동안 상술된다. 이 말은 1절이 1장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문학적 서문 역할을 한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이번 장의 제안들은 다음과 같이 1절에 대해 확장된 해석적 번역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시작하는 기간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통틀어 기능들을 부여하심으로 창조하셨고, 이것이 그가 행하셨던 방법이다.” 창2:3은 7일 기간에 걸쳐 “바라” 활동이 완성되었음을 가리키는 요약으로 되돌아온다.
 
명제4 창세기 1장의 시작 상태는 무기능적이다
 
창세기 1장은 땅이 혼돈하고(토후) 공허하다(보후)라고 묘사한 2절을 출발점으로 한다. 히브리어 단어 ‘토후’(구약성경에서 20번 나와)의 관용법을 살펴보면, ‘토후’가 물질적 형태와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단어가 무기능적인, 인간과 관계된 용어일 때 목적이 없거나 비생산적인 것들을 묘사한다고 시사한다. 의미론적 정보와 기술적 문헌을 통해, 우리는 ‘토후’와 ‘보후’가 함께 무 존재(그들의 기능적 존재론에서)의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즉, 땅이 아직 질서 잡힌 체계 속에서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는 물질 없이라기보다 기능 없이 시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대 세계에서는 기능이 물질적 특성들의 결과가 아니라 목적의 결과였다. 태양은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정의의 신과 관계있다. 태양은 시간과 계절에 대한 표지 기능을 한다. 고대 텍스트들이 질서 정연한 체계 안에서 어떤 것이 작용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할 때, 논의하는 체계는 우주적이거나 생태학적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들이 거주하는 체계이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사람들을 둘러싼 기능성에 초점을 맞추신다. 결과적으로, 그 그림에서 기능성은 사람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 결론은 내가 ‘적절하게 기능함’으로 언급하기를 제안하는 반복적 공식 좋았더라의 의미를 통해 한층 더 지지된다. 이 말은 종종 윤리 도덕적 용어들이나 솜씨의 품질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해왔다. 저자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낼 수 있으려면 어떤 것이 좋지 않다고 할 때의 의미를 조사하면 된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2:18). 이 구절은 도덕적 완벽함이나 솜씨의 품질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기능과 관계된 논평이다. 인간의 여건은 여자 없이 기능적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창세기 1장 전체에서의 “좋았더라”는 후렴은 우주가 인류를 위해 기능적으로 준비되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구약 성경과 고대 근동의 증거는 모두 창조 전 상태를 비슷한 용어로 정의하며, 물질의 부재보다 기능의 부재를 특징으로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한 정보는 그들의 존재에 대한 개념이 기능성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아이디어를 지지한다.
 
명제5 창세기 1장의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기능들을 앉힌다
 
첫째 날
 
고대 근동에서는 빛이 결코 물질적 대상으로 취급되지 않았다는 것을 관찰해야 한다. 어둠이 그러하듯 빛은 오히려 하나의 상태에 대한 생각이다. 텍스트 저자는 우리들에게 “빛”이라는 단어가 빛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을 의도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절은 이해가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이 빛의 기간을 ‘낮’이라고 부르시고 어둠의 기간을 ‘밤’이라 부르셨다.” 존재하도록 이름 붙여진 것은 어둠의 기간과 구별되며 ‘낮’으로 이름 붙여진 기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첫째 날을 시간의 창조에 대한 묘사로 간주해야 한다. 시간을 위한 토대는 빛의 기간과 어둠의 기간사이의 바꿀 수 없는 변화이다. 이것은 창조 행위이지만, 물질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기능적 의미에서이다. 이 해석은 왜 저녁이 아침보다 먼저 명명되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해결한다. 창조 이전 상태에서 어둠이 있어왔다. 하나님이 빛의 기간을 앞으로 나오도록 명령해서 어둠의 기간과 구별했을 때, 그 설정된 ‘시간’ 체계는 이들 두 기간 사이의 전환을 요구했다. 빛의 기간이 앞으로 나오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그 첫 번째 전환은 저녁(어둠의 기간 속으로)이었고, 두 번째 전환은 아침(빛의 기간 속으로)이었다. 그래서 창조주는 거대한 시간의 주기를 제자리에 놓으셨다. 그는 첫 번째 행위로 시간을 우주의 모습 속에 섞었다. 만약 창조를 기능적 용어로 이해한다면, 일어난 일들의 순서는 물질적 쟁점과 관계 되지 않고 기능적 쟁점과 관계된 것이다. 시간이 태양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사실, 태양이 곧 기능이 아니라, 기능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단순히 직분에 불과하다.
 
둘째 날
 
거기에 실제로 우주적 물이 단단한 천정으로 지탱하고 있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물질적 우주 지리학은 단순히 그들에게 친숙했고, 본질상 기능적인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물 장벽을 객관화 하는 대신, 우리는 그것이 다루었던 중요한 이중의 우주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첫 번째 역할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이자 더 중요한 기능은 강수량을 통제하는 기계장치로서의 역할이었다. 즉, 기후작용을 의미했다. 우리가 단단히 장벽이 물을 붙잡아 두는 모습의 고대 세계 우주 지리학을 유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창조주의 역할 가운데 기후 체계를 설정하고 유지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이 바뀌어 지지 않는다. 둘째 날에 남아 있는 요점은, 하나님이 기후를 위한 토대로서 기능들을 앉히셨다는 것이다.
 
셋째 날
 
어떤 해석가들은 셋째 날에 하나님이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곤혹스러워 한다. 그것은 셋째 날이 물질의 기원 기사일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 그것을 기능의 기원에 대한 기사로 이해할 경우, 하나님이 어떤 것을 만드셔야 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우리는 둘째 날 우주 공간이 분리되고 구별되었던 것처럼, 셋째 날 지구 공간이 구분되는 것에 주목한다. 기능적 관점에서 핵심적 창조 활동인 분리하는 행위는 현저히 계속된다. 어떤 주석가들은 셋째 날의 물질적 창조의 부재 대신 그 날이 두 번의 분리 행위(물/마른 땅과 식물)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관찰한다. 기능적 관점에서 토양, 물, 씨 맺는 법칙은 모두 먹을거리 생산에 필수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마른 땅이 드러나는 것은 음식의 늘어남과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첫째 날에는 시간을 위한 토대를, 둘째 날에는 기후를 위한 토대를. 셋째 날에는 먹을거리를 위한 토대를 창조하셨다. 위대한 이 세 가지 기능들-시간, 기후, 먹을거리는 삶의 기반이다. 우리가 창조주의 가장 위대한 작업을 보기 원한다면, 그가 함께 만든 물질들에서는 찾을 수 없다. 즉, 그 위대한 작업은 바로 창조주가 그들이 작동하는 그런 방식으로 함께 창조하신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첫 삼일 동안 소개된 세 가지 주요 기능들이 고대 근동 텍스트들에서도 현저하게 발견되는 사실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성경이 옛날 세상의 과학을 사용하는 것으로 간주된 ‘진실’에 대해 질문하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대상 청중의 틀을 차용했다는 것이 가장 논리적이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들도 하늘이 파랗다든가, 해가 뜨고 진다는 것을 진실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과학적으로 잘못된 진술들임을 안다. 하지만 과학이란 단지 세상을 보는 방법 하나를 제공할 뿐, 진리를 독점하지 않는다. 성경에 있는 옛날 세상의 과학은 땅에 붙어 있는 관찰자의 관점을 제공한다. 이 말은 많은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가 아니고, 각각 진실한 정보를 제공하는 다른 많은 가능한 관점들이 있음을 암시하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수정판 우주 지리학을 주지 않으시고,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는 우주 지리학을 통해 자신의 창조주 역할을 계시하셨다. 물질세계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 작업은 기능들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우리가 물질적 형태를 상상하는 방법에 개의치 않고, 그가 그 기능들을 앉히고 작동을 유지시키는 분임을 알렸다.
 
명제6 창세기 1장의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직원들을 세운다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기사에서 우리는 초점이 바뀌는 것을 본다. 기능적 지향이 아직 분명한 반면, 하나님은 직원들을 임명시키고 있는 만큼 기능들을 앉히고 있지 않다. 일부 경우에서 그 직원들이 기능을 수행하는데 연루될 것이지만(특히 시간의 기간을 표시하는데 있어서 천체들의 역할), 대부분의 경우 그 직원들은 첫 3일 동안 윤곽이 그려진 천구(sphere) 속에서 단순히 자신들의 기능을 수행한다(시간, 우주 공간, 지구 공간). 직원들의 임무와 분야에 대한 임명 또한 창조 행위이다. 넷째 날에서 여섯째 날은, 오래전부터 인식된 것처럼, 첫째 날에서 셋째 날과 대구를 이룬다.
 
넷째 날
 
다시 한 번 우리는 이것들이 과학적 기능들이 아니라 인간 지향적 기능들임을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기능들에 대한 사중 묘사(징조들, 계절들, 날들, 해들)는 오직 인간과만 관계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창조주의 명령이 기능들을 창시하고 직원들에게 역할을 준다. 이런 선포된 명령들 또한 창조 행위들이다. 고대 근동의 다른 지역 상황과는 달리, 이 직원들은 비인격적 실체들이다. 창세기 텍스트는 그들을 고대 근동 다른 지역의 신들 이름과 일치하는 이름보다 “광명”으로 언급함으로써 적어도 암묵적으로 주장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도하신대로 직원들이 관장할 수 있도록 자신의 일을 행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의 위치를 지정하셨다. 결론은 우리가 앞 장에서 “좋았더라”로 토의했던 것이어서 친숙하다. 그것은 곧 제자리에 세워질 인류를 위한 기능이 모두 준비되었음을 가리킨다.
 
다섯째 날
 
넷째 날에는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던 천구와 결합된 기능들을 성취하도록 직원들(역자주, 새, 바다 생물)이 돕고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다섯 째 날에는 직원들(역자주, 새, 바다 생물)이 거주하는 우주 공간에서 단순히 자신들만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 텍스트는 그들에게 맡겨진 역할보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충만하고, 날고)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기능도 축복으로 주신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그들을 창조하셨고, 각자의 영역을 채우는 것이 그들의 기능이다.
 
여섯째 날
 
다섯째 날 우주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피조물들처럼, 여섯째 날 육지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동물들은 셋째 날에 지시했던 기능들을 수행하는 직원들이 아니다. 그 대신 그들은 그 공간에서 자신들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 텍스트는 그들의 기능이 다른 거주자들과 관계되기보다 자신들의 종(kind)과 관계된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자신들의 범주 안에서 관찰되고, 하나님의 축복의 한 부분으로서 자신들의 종을 따라 생육한다. 그들의 기능은 생육하고 땅을 채우는 것이다-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라고 시킨 일이다. 같은 종의 새로운 세대가 부모 피조물들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창조의 경이로움이다.
 
인류
 
우리의 논의가 사람의 창조에 다다를 때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세상에 거주하기 위해 기능하는 한편(물고기, 새, 동물들처럼), 하나님의 나머지 피조물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기능도 가진다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존재함으로써 하나님과 관련된 기능을 가진다. 또한 그들은 남자와 여자로 지명됨으로써 상호 관련된 기능을 가진다. 이 모든 것들은 물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기능적 지향을 보여준다. 창세기 1:26-30에서 언급된 모든 기능적 요소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은 가장 중요하며 그 단락의 주안점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인류와의 유대관계 속에서 구실을 하고, 인류는 하나님의 부통치자(vice regent)로서 나머지 피조물들을 다룬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살게 하신 세계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닮은 역할(기능)이 맡겨졌다는 것이다. 다른 고대 세계에서 창조란 신들을 섬기기 위해 설정된 신 중심의 견해인 반면, 창세기에서 창조는 하나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즉, 인간 중심의 견해라는 것이다. 인간이 창조 기사의 클라이맥스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을 만든 물질
 
고대 근동의 수많은 문헌들에는 인간이 다양한 소재로 창조되었다는 참고자료가 들어 있고, 우리는 그런 기록들과 성경 텍스트 사이에 상당량의 연속성이 있음을 발견한다. 고대 근동에서 증언된 소재나 성분은 신의 눈물(이집트), 신의 비(아트라하시스), 가장 공통적인 것으로는 진흙(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이다. 고대 근동이 모든 인간을 묘사할 때 같은 종류의 물질들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그 물질들이 갖는 원형적 의의(archetypal significance)를 암시한다. 기본형(prototype, 뒤에 만들어질 것들의 모델이 되는 원제품)과 달리 원형(archetype)은 그 항목에 있는 나머지 모두의 대표 역할을 하고, 그 항목을 정의한다. 그래서 고대 근동의 텍스트들이 사람이 흙으로부터 혹은 신의 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말할 때 단지 한 개인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고, 모든 인간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흙(dust)은 원형적 특징이기 때문에 물질적 성분으로서 관찰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숙명과 죽을 운명에 대한 직설법이다. 그러므로 물질적이 아닌, 기능적 논평이다. 여자를 창조하는 상황도 다르지 않다. 남자의 갈비뼈에서 뽑아낸 존재로서 원형적 의의를 가질 뿐, 해부학적 의의를 가지지 않는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이것은 모든 남성과 여성에게 진리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첫 인간의 물질적 기원에 대한 차원의 관심을 창세기가 가지고 있지 않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는 관심을 인류 즉, 남성과 여성의 원형적 기원에 대해 주의를 집중한다. 이런 관심은 기능적 기원의 한 부분이다.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우주의 직원들이 적절한 위치와 적절한 역할로 임명된다. 회사에 대한 유추를 사용하자면, 그들은 사무실에 배정되고, 그들이 보고서를 제출해야 할 상사에 대해 듣고, 그들의 사내 위치에 대한 아이디어를 받는다. 그들의 근무일이 시계로 결정되고, 그들이 생산적이 될 것이라고 기대된다. 현장 감독들이 배치되고, 공장은 가동 준비 상태이다. 그러나 회사가 가동을 준비하기 전에 오너가 도착해서 집무실에 들어가려고 한다.
 
명제7 신은 신전에서 안식한다
 
창세기 1장이 물질의 기원에 관한 기사라는 전통적 견해에서는 일곱째 날이 당혹스럽다. 그러나 고대 세계의 독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마 즉각적으로 알고 일곱째 날의 역할을 알아챌 것이다. 이것이 신전 텍스트이고 일곱째 날이 7일 중 가장 중요하다. 신은 신전에서, 오직 신전에서만 안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전들이 건축된 목적이다. 신의 안식이 함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대 세계에서 안식은 난국이 해결되거나 안정이 확보될 때, 사안들이 ‘진정’되었을 때 생겨난다. 그 결과 정상적 일과가 확립되어 누릴 수 있다. 신에게 안식이 의미하는 바는 우주가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책임 없는 해방이라기보다 더 나아가 장애 없는 참여의 문제이다.
 
창조 후에, 하나님은 그가 계신 곳에서 안식을 취하며 통치한다. 이것은 고대 세계를 향한 새로운 신학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들이 신들과 신전들에 대해 이해했던 바다. 고대 세계에서 신전의 역할은 오늘날 교회들처럼 우선적으로 예배 회중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신을 위한 장소다. 신이 신전에서 안식할 때 통솔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정당한 장소에서 적절한 역을 맡기 위해 보좌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여덟째 날에, 그리고 이후, 하나님은 통제실에 계시면서 설치해놓으신 우주를 운전한다. 이것은 지속적인 창조 작업이다. 창세기 1장을 기능의 기원 기사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고 이해할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명제8 우주는 성전이다
 
몇몇 고대 근동 텍스트에서, 신전은 우주 창조의 결과로 건설되었다. 창조 행위가 권위의 표현이고, 신전은 그 권위가 지속적으로 행사될 장소라는 점에서 둘이 결합되어 있다. 텍스트의 이데올로기적 결합인 것이다. 이외에도 텍스트들이 창조 활동에 대해 전하는 대로 신전의 부재가 곧 우주 질서의 부재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따라서 신전의 부재는 때때로 창조 전 상태에 대한 묘사의 부분이었다. 우주와 신전이 함께 잉태됨으로써 그들의 기원이 사실상 동시적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즉, 신전이 원시부터 있어왔고, 시대마다 우주의 기원이 신전 요소의 용어들로 정의되었다는 것이다. 신전들은 고대 세계에서 우주를 묘사했다. 가장 오래된 예는 수메르인의 케스 신전의 찬가로서, 가장 오래된 문헌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다. 수메르와 이집트 텍스트 모두 신전을 태양이 뜨는 장소와 동일시한다. 이집트 신전들은 바닥이 땅을 나타내고 천정이 하늘을 나타내는, 우주의 모델 구실을 한다. 기둥과 벽의 장식들은 식물의 삶을 상징했다. 얀 아스만은, 신전은 “편재하는 신이 한계까지 채운 세계였다”고 결론지었다. 실로 신전은 그 모든 의도와 목적을 위한, 우주이다. 이 상호관계는 신전으로 하여금 우주에서의 질서를 유지하는 중심이 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휘장은 궁창과 동일한 상징적 기능을 갖는다. 뜰은 조직된 우주의 바깥에 있는 우주 구체를 상징했다. 대기실은 빛과 음식의 상징을 갖고 있었다. 휘장은 하늘과 땅을 분리했는데, 하나님의 임재 장소를 인간이 거주하는 장소로부터 분리시켰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에덴동산이 성소였고 성전/성막은 에덴동산과 우주에 대한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고 결론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성전은 소우주이고, 에덴은 하나님의 임재와 인접해 있는 신성한 공간 역할을 하는 대기실(역주, 성소)에서 원형적 성소(archetypal sanctuary)로 상징된다.
 
우주를 성전으로 보는 구약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는 열왕기상 8:27도 들어있다. 성전을 봉헌하는 기도를 드리면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또 다른 구절, 이사야 6:3에서 스랍들이 노래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했다. 온 땅에 충만한 그 ‘영광’은 출애굽기 40:34에서 지성소에 와서 거주하시는 것과 동일하다. 이 장은 다음과 같은 증거를 제시한다. 1. 성경과 근동에서 성전을 소우주로 본다. 2. 성전은 우주의 이미지를 따라 설계되었다. 3. 성전은 우주의 기능들과 연관된다. 4. 성전의 창조는 우주의 창조와 평행을 이룬다. 5. 성경에서 우주는 성전으로 볼 수 있다.
 
창조 기사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는 이 세계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라는 것이다. 비록 모든 기능들이 인간의 필요에 맞춘, 인간중심적이지만, 우주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존재 요소를 정의하는 역할의, 하나님 중심적이다. 이것은 7일 동안 일어났던 변화를 상징한다. 첫째 날 이전에, 하나님의 영은 무 기능적 우주 위에서 활동했다. 하나님이 간여하셨지만 아직 자신의 거처를 취하지는 않으셨다. 기능적 우주 성전의 설립은 하나님이 일곱째 날 자신의 거처를 취하심으로써 유효하게 되었다.
 
명제9 창세기 1장의 7일은 우주 성전의 낙성식과 관계있다
 
성경과 고대 세계에서 우주와 성전의 공통적 연결은 창세기 1장을 우주 성전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한다. 신이 신전에서 안식을 취하기 때문에, 이것은 일곱째 날 하나님의 안식으로 한층 더 확증된다. 창세기 1장이 물질 기원의 기사라면, 전혀 연결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능적 기원의 기사라면, 창조와 성전 낙성식은 잘 들어맞는다. 성전은 낙성식의 예식들 속에서 기능적이 되기 때문에, 성전은 낙성식의 예식 속에서 창조된다. 성전이 물질적인 것을 사용하지만, 성전이 물질적인 것은 아니다. 목재 더미, 돌, 금, 의복을 성전으로 변하게 하는 것은 낙성식의 예식이다. 기능들을 명명하고 직원들을 임명함으로써, 마침내 신이 안식처에 들어감으로써, 신전은 존재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낙성식의 예식 안에서 창조된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창조와 성전에서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매년 되풀이되는바, 성전으로서의 우주의 기능적 기원을 설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견해에서는 날들이 더 이상 지구의 물질적 나이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 점에서 날-시대 이론은 설득력이 없다. 7일의 힘을 누그러뜨리려는 날-시대 이론이나 다른 견해들이 7일을 오랜 기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땅과 우주가 매우 오래 되었다는 과학적 증거와 물질 창조에 24시간짜리 7일이 소요된 것을 조화시킬 방법을 못 찾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7일이 물질적 우주가 존재하는데 걸린 시간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주 성전에 대한 기능들의 낙성식에 헌신된 기간이다. 그것은 성전의 창조를 상징하는 성전 건축의 물질적 단계가 아니다. 그것은 기능들의 낙성식이고, 안식하시기 위해 성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입구이다. 창세기 1장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우주적) 성전이지, 물질적 준비 단계가 아니다.
 
명제10 창세기 1장의 7일은 물질의 기원과 관계없다
 
물질적 관점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노력으로 이렇게 질문한다. 왜 양쪽 다일 수 없는가? 창조 기사가 기능지향적인 것은 알겠는데, 물질적인 측면이 모두 제거되어야 하는가? 기능적 요소와 나란히 물질적 요소가 들어있다고 말하려면, 그것에 대해 증명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중대한 장애물을 발견하게 된다. 7일 동안, 3일은 어떤 물질적 성분의 창조에 대한 진술도 없다(첫째 날, 셋째 날, 일곱째 날). 둘째 날은 잠재적으로 물질적 성분을 가지지만(궁창), 누구도 거기에 실제 물질적인 것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넷째 날과 여섯째 날이 물질적 성분을 가지지만, 텍스트는 단순히 기능적 차원에서만 다룬다(징조, 계절, 날, 연을 위한 천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남자와 여자를 복종하고 다스리는 임무와 함께).
 
만일 7일이 7일간의 성전 낙성식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날들이 물질의 기원이 아닌 기능의 기원에 관한 것이라면, 7일과 창세기 1장은 전체적으로 지구 연대에 관한 토의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성경 텍스트가 지구가 오래되었음을 지지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지구의 연대에 대해 어떤 성경적 입장도 텍스트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 성경에 물질적 우주 연대에 관한 정보가 없다면, 이제 성경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으로서, 성경 기사를 방어하지 않아도 되고 과학이 제공하는 선택을 고려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어떤 것 때문에 과학이 말하는 오래된 지구 견해에 맞서 싸우도록 강요받는 자리에 있지도 않다. 성경은 젊은 지구를 선언하지 않는다. 설령 어떤 사람이 지구가 오래되었다는 과학적 증거로부터 결론을 내리더라도 성경적 믿음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이 점에서 매우 명백한 진술이 있어야 한다. 창세기 1장을 성전으로서의 우주의 기능적 기원에 대한 기사로 보는 것은 하나님이 물질의 기원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어떤 식으로든 함의하거나 암시하지 않는다. 단지 창세기 1장이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창세기의 저자와 청중에게, 물질의 기원은 단순히 우선적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물질적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우리의 확신은 신학적 논리로써뿐 아니라 때때로 신약 성경의 참조 구절들을 통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신학적 요점은, 물질적이거나 기능적이거나 무엇이든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석자들로서 우리가 할 일은 텍스트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어떤 측면을 토의하는지 알기 위해 그것들을 낱낱이 평가하는 것이다.
 
기능적 관점은 기능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의 인류우주 성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임재, 그 두 구성 성분 없이 우주는 무 기능적인 것으로 간주될 것이기 때문에 무 존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단계는 오랜 기간 발달해왔을 수 있고, 그런 경우 과학이 우리에게 밝혀준 것처럼 선사시대의 묘사와 상응할 수 있다. 거기에 태양이 빛나고 있지 않았었고, 식물들이 자라고 있지 않았었고, 동물들이 나타나지 않았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실제 공연으로까지 안내하는 리허설과 같았다. 그것들은 오직 청중들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그때 공연은 존재하며, 공연이 존재함으로써 리허설들을 의미 있게 한다. 우주는 이제 하나님의 작품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안식하기 위해 임재하시는 장소로서 선택하시고 준비하신 주거지가 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아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 세계의 부통치자로서 하나님을 섬긴다. 예, 학생들이 없는 대학은 무엇일까? 대학이 존재하기 전에는 물질적 ‘건설’ 단계가 있었다. 시간은 처음부터 줄곧 있었지만, 교육과정은 학생들과 대학에 시간이 의미가 있게 한다.
 
명제11 “기능적 우주 성전”은 표면 가치의 주석을 제공한다
 
만약 우리가 표면 가치에 따라 텍스트를 해석하려 한다면, 고대의 저자가 의도하려 했고 고대의 청중이 그렇게 들으려고 했던 것처럼 텍스트를 읽을 필요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비록 표현에 있어서 문학 양식과 신학적 토대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신학 문학보다 고대세계 연구에서 훨씬 멀리 진행되고 있음을 고대 세계의 연구가 나타낸다고 나는 믿는다.
 
컨코디스트는 의도적으로 고대 텍스트를 현대 용어들로 해석하려고 접근한다. 컨코디스트의 해석은 물리학, 생물학, 지구과학 등의 상세한 설명을 성경 텍스트로 끌어들여 해석하려 한다. 이것은 성경 텍스트를 표면 가치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거부이다. 컨코디스트의 연구방법에 대한 문제점은 텍스트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반면, 인간 저자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 이론이 신적 의도를 결정하는 기반으로 사용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 저자들과 그들의 의도를 통해 소통해오셨다. 인간 저자의 소통은 영감을 받은 것이며 권위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현대적 사고 때문에 함부로 내동댕이쳐서는 안 된다. 인간 저자는 우리에게 신적 메시지에로의 통로를 제공한다. 만약 추가적인 신적 의도가 있다면, 우리는 추가된 신적 의미를 주는 또 하나의 영감된 목소리를 찾아야 할 것이고, 그런 영감된 목소리는 성경의 저자들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 과학 이론은 그런 영감된 목소리로서의 자격이 없다.
 
우리는 텍스트가 범위를 넘어 말하도록 강요할 권리도 없고 필요도 없다. 명제1에서 말한 것처럼,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청중의 이해를 초월하여 주신 과학 정보의 예가 단 한 건도 없다. 성경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라면 성경이 주장하는 진리나 성경의 신뢰성을 구출하기 위한 ‘과학 말하기’는 필요 없다. 우리가 텍스트를 공손하게 해석하는 것은, 텍스트의 표면 가치에 가장 충실하게 해석하는 것이며, 원한다면 가장 ‘문자적인’ 이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세계로부터 오고 우리들의 세계로부터 오지 않는다. 우리는 텍스트가 말하고 있는 것을 회피하려고 시도하고 있지 않으며, 다른 의미를 끄집어내려고 행간을 읽지도 않는다. 컨코디스트와 대조적으로, 우리의 표면 가치 해석법은 다음과 같다. 1. 창세기 1장을 있는 그대로의 고대 문서로 인식한다. 2. 그 텍스트에 물질적 존재론을 부과하는 어떤 이유도 찾지 않는다. 3. 행간에서 과학 정보를 발견하도록 요구하는 어떤 이유도 찾지 않는다. 4. 창세기 1장을 기껏해야 문학적이나 신학적 표현으로 축소시키기를 피한다. 5. 텍스트가 과학적 설명들을 제공하지 않는 것을 인식하는 한, 과학적 사고와 더불어 어떤 갈등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명제12 창세기 1장에 대한 다른 이론들은 지나치거나 충분하지 않다
 
짧은 기간 지구 창조론(young earth creationism, YEC)
 
YEC의 입장은 창세기 1장의 날들이 연속적인 24시간의 날들로서 전체 물질적 우주가 이 기간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나는 이 견해가 성경을 방어할 필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지나치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성경을 과학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믿음은 지나치며, 적당한 대체 과학을 제공하려는 시도도 지나치다. 그 견해는 성경 텍스트에 특정한 해석을 가한다. YEC 입장의 출발점은 창세기가 물질 기원의 기사이며 무엇을 ‘창조’했다는 것은 어떤 것에 물질적 형태를 부여했다는 의미라는 가정이다. 이것은 성경 텍스트의 표면적 의미 해석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고 있다. 성경 텍스트를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고대 텍스트에 현대적 사고를 부과하는 것이며, 본질상 영감 받은 인간 저자의 아이디어를 보여줄 수 없는 일종의 시대착오(anachronism)이다. 그들이 “날”(욤)을 24시간의 날로 해석하는 것은 정확하지만, “창조하다”(바라)와 “만들다”(아싸) 같은 단어들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지나치게 협소하다고 나는 강력히 주장하고 싶다. 이 책에서 소개해 온 기능적 관점에서는, YEC의 과학적 곡예가 일절 필요 없이 텍스트를 표면적 의미로 다룰 수 있다. 그들의 과학적 시나리오들은 과학적으로 훈련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용하기에 극히 힘들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오랜 기간 지구 창조론(old earth creationism, OEC)
 
휴 로스(Hugh Ross)는 성경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된 과학적 지식으로 특징지어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날들이 오랜 시대를 상징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지구와 우주의 오랜 연대를 창세기 1장과 쉽게 맞출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문제는, 그것이 창세기 저자가 말하려고 했던 것인가라는 것이다. 우리가 과학적 귀결과 텍스트의 귀결 사이에 모종의 양립성(compatibility)이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텍스트를 (텍스트 속에 숨겨진) 진보된 과학적 내용과 함께 과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증거는 아니다. 텍스트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것은 현대 과학과의 상호 관련으로써 표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텍스트를 고대 문맥 속에서 이해함으로써 표현된다.
 
구조 가설(framework hypothesis)
 
구조 가설은 창세기 1장의 문학적/신학적 연구 방식을 상징한다. 문학적 측면에서 7일의 기사는 고도로 구조화되어 있어서, 첫 삼일은 거주 영역을 규정하고 둘째 삼일은 이 영역들을 거주자들로 채운다. 첫째 날과 넷째 날, 둘째 날과 다섯째 날,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이 각각 평행을 이룬다. 그 다음으로는 그 단락에서 모두가 동의하는바 신학적으로 중요한 요점들을 끄집어내는 토의가 전형적으로 뒤따른다: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주권, 선포된 말씀의 능력, 창조의 ‘선함’,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안식일의 중요성. 그러나 이것의 문제는, 문학적 구조에 대해 아무 반대도 일어나지 않고 신학적 요점들에 아무 불일치가 제기되지 않을 수 있는 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단지 텍스트를 문학적/신학적 용어들로써만 생각했는지 하는 것이다. 이미 과거에 구조 가설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위해, 이 책에서 제안한 이론은 그런 해석을 버리도록 요구하지 않고, 단지 그것과 함께 기능적 관점을 받아들이기만 하도록 요구한다. 대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추가하라는 것이다.
 
다른 이론들
 
20세기를 통틀어 많은 이론 중에서, 인기 있었던 하나의 견해는 간격 이론혹은 파괴-재창조 이론으로 알려졌으며, 스코필드 주석 성경(SRB)을 통해 활성화되었다. 이 이론은 창세기 1:1이 사탄이 타락하기 전 통치했던 창조 이전을 진술했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되면 오래된 우주와 지구를 수용하는 장점이 있지만, 창세기의 날들은 현세의 것이 되고 만다. 이 견해에 의하면, 사탄의 타락과 함께 첫 번째 창조가 파괴되었다. 이것이 창세기 1:1과 1:2 사이의 간격이다. 1:2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로 번역되었다. 이 이론에 대한 대답은 히브리어 텍스트를 그런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 이론 또한 점차 시야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입장들은 양보함 없이 성경의 기록을 물질적 우주에 대한 과학적 발견과 양립시키기 위해 공통적으로 힘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성경 기사가 물질 기원의 기사로 취급될 필요가 있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물질의 기원에 대한 과학의 ‘다른’ 설명은 성경 기사의 신뢰성을 해결해야 할 위협이 되는 것이다. 그 대신 이 책에서는 창세기 1장이 결코 물질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려고 의도하지 않으며, 원 저자와 원 청중도 텍스트를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다고 제안해 왔다. 과학은 물질의 기원에 대한 비 성경적 견해를 제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 일어났든, 언제 일어났든, 어떻게 일어났든,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셨다는 지극히 일반적인 아이디어 외에 물질의 기원에 대한 어떤 성경적 견해도 없기 때문이다.
 
명제13 과학과 성경의 기원 기사(origin accounts)에 대한 차이는 본질상 형이상학적이다
 
성경과 과학의 알려진 기원 논쟁에 붙들렸다고 느끼는 많은 사람들은 잠재의식적으로 기원에 관한 문제를 파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 ‘기원의 파이’를 잘게 썰면 각각의 조각이 ‘초자연’이거나 ‘자연’의 인과관계가 된다. 과학적 진보를 통해 불가피하게 얻어지는 결과는 하나님의 몫이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침내 하나님은 용도폐기 되거나 불필요하게 된다.
 
우리가 좀 더 성경적 견해를 받아들이기 원하면, 레이어 케이크의 용어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견해에서 과학적 조사의 영역은 아마 케이크의 아래층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과학이 작동하기 위해 선택한 층이며, 과학이 가장 유용한 장소이다. 대조적으로, 꼭대기 층은 하나님의 일을 상징하며, 그 아래층들 전체를 포함한다. 과학은 꼭대기 층을 탐색할 수 없다. 과학은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것에만 관계된다. 과학은 보여줄 수 있는 것들과, 더 중요하게는 반증이 가능한 것들로 자신을 제한함으로써, 신의 활동 영역으로부터 제거되었다. 비록 과학자들이 신앙을 가졌다 해도, 그 신앙은 자신들의 과학 작업과 틀림없이 별개로 보인다. 과학적 조사의 영역은 과학이 설명해줄 수 없는 영역을 계속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증거의 한계가 아니라, 과학의 한계에 대한 증거일 뿐이다. 신자들은 비록 과학이 탐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꼭대기 층이 있다는 믿음을 굳게 붙든다. 꼭대기 층은 궁극적 원인에 초점을 맞추지만, 결국에는 목적에도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은 언제나 궁극적 원인이시다. 과학은 하나님께로 가는 통로를 제공할 수 없고, 이성적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존재를 입증하지도 못할뿐더러 반증할 수도 없다. 의심의 여지없이 과학은 그들이 관찰하는 것을 목적이 관장하는지 관장하지 않는지 입증할 수 없다. 하나님이 최종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심중에 자신만의 목적들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일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목적론(teleology)의 영역과 관계되거나, 좀 더 넓게는, 형이상학적이며, 경험 과학의 부분이 아니다.
 
케이크의 아래층을 구성하는 과학적 관찰과 이론들은 그들 스스로 목적론적 결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의 층과 세계관과 형이상학에는 하나님을 위한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반목적론적이며, 과학적으로 내려진 결론이 아니라 과학의 한계로부터 내려진 것이다. 대조적으로, 꼭대기 층이 있다고 믿는 과학자들이 많이 있다. 즉, 우주의 자연적 작동을 통해 목적을 성취하시며 궁극적 원인들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이다. 이 믿음은 그들의 과학적 연구방식을 바꾸지 않는다. 그 믿음은 바닥 층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바닥 층에 대한 연구 방법들에 영향을 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형이상학적 입장은 목적론적으로 기술될 것이다. 아무것도 무작위적이거나 우연적이 아니다.
 
창세기는 목적론(목적)을 요구한다. 창세기가 꼭대기 층 기사이기 때문에 기제들을 설명하는데 관심이 없다(비록 그 기제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선포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할지라도). 성경적 사고와 맞서는 것은 과학적 기제(자연주의)의 견해가 아니라, 성경적 가르침을 부정하는 배타적 물질주의다(그리스도인들은 자연적 작동을 부인할 필요가 없지만, 물질주의는 배격해야 한다). 이 책에서 창세기 1장을 위해 제안한 기능적 지향은 예리한 목적론과 충분히 조화된다. 창세기 1장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진술을 제공할 것이다. 성경적 견해는 지배적인 목적론으로 특징지어 지며, 목적론은 기능 지향 안에서 분명하고, 기능 지향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명제14 창조주와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은 우리가 생각해왔던 것과 별 차이 없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기 위해서는 양 극단을 피해야 한다. 첫 번째 극단은,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일은 단순한 과거의 일로 끝났다(자연신론을 위한 가능성)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대중적 기독교에서 가장 흔하다. 창세기는 기원의 기사로서 물리적 우주의 창조는 과거에 일어났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역할은 특정한 때와 특정한 임무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완성된 것이다. 이 견해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자연의 법칙과 물리적 구조를 만들어 지배받게 하심으로써 이제 우주는 사실상 ‘자가 운영’ 된다고 일반적으로 가정하는 실천적 자연신론으로 쉽게 귀결된다. 젊은 지구를 주장하는 창조주의자들도 자연의 작동에서 하나님이 떨어져 계시다고 보는 데서는 예외는 아니다.
 
두 번째 극단은,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일은 영원히 반복되는 현재이다(세부사항까지 관리 가능성)는 것이다. 이 견해는 창조와 작동 사이의 단절을 받아들이기보다, 시작과 끝을 배제하는 연속성 같은 것이 있음을 검토한다. 창조는 부단히 발생하는 과정이고, 하나님은 창조하시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에 대한 즉각적인 반대 하나는 명제13에서 제시된 목적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목표와 목적(telos)이 있다면, 시작과 끝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 행위와 지속적 창조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것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본질을 탐구해야 한다. 성경에서 창조의 언어는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하시는 일에서보다 유지하시는 일에 더 많이 사용된다. 나는 창세기 1장을 과거에 있었던 구분된 시작으로 만들면서, 창세기 1장의 7일과 그 이후 역사 사이에 하나의 선이 그어진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유지하기는 기능적이고 운영적인 것과 관련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속적인 유지 사역의 신학적 입장과 기원에 대해 기능적인 연구방식을 취할 때, 시작하기와 유지하기 모두를, 비록 그 둘이 전적으로 함께 합병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창조주의 일의 변이로 볼 수 있다. 창세기 1장은 과거에 있지만, 미래와 현재에 창조주의 지속적 활동들은 분명코 과거 사역의 지속이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킴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역할을 인정하는데, 스스로의 삶을 통제하는데서 의식적으로 손을 떼므로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심을 인정한다.
 
명제15 지적 설계에 대한 최근의 논쟁은 궁극적으로 목적에 관한 것이다
 
최근 몇 십 년 동안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라고 부르는 운동이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지적설계운동은 이 설계의 외양이 가공적인 것이 아니라 미확인 지적설계자로 인한 결과로 주장한다. 그것의 논거로 제시해온 주요 방법들 중 하나는 그들이 돌이킬 수 없는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이라고 부르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구조가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고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당장 기능적이어야 할 여러 부품들이 요구되는 구조들을 확인해왔다. 따라서 그 구조가 한 번에 한 부분씩 진화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들은 설계자의 본질에 대해 일관된 주장을 하지도 않는다. 지적 설계는 자연세계를 관찰해서 얻은 결론을 제공하고, 그 관찰들이, 즉 돌이킬 수 없는 복잡성들이 신다윈주의(Neo-Darwinian evolution: 생물학적 기원의 이해를 위한 지배적 패러다임)의 약점이라며, 그들과 맞서 논쟁하게 한다. 지적 설계는 과학적으로 실증과 반증이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학적 이해의 진보에 기여하지 않는다. 지적설계운동은 과학의 영역을 떠남으로써, 근래에 추적 가능한 과학에 대한 추론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들은 기원에 관한 어떤 이론도 제공하지 않으며, 신학적 사고에 기여하거나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지적 설계는 간격의 하나님 연구방식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간격의 하나님’은 만약 관찰 가능한 자연현상에 대해 알려진 자연주의적 설명이 없다면, 그 현상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사고방식의 불행한 결과는 과학적 지식이 증대되고 더 많은 현상들이 설명되어 하나님의 역할이 움츠러든다는 것이다. 지적 설계가 간격의 하나님을 극렬히 부인하지만, 만약 그들이 자연주의적 설명이 불충분하다고 믿는다면, 모든 자연주의적 설명에 배제되어 왔을 경우에만 자연 속의 설계가 이성적 의문을 넘어 입증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논리적 장애이다. 부정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모든 가능성이 검토되었음을 요구하며, 결국 모든 가능성이 드러났음을 요구한다. 그 결과 설계는 이성적 의문을 넘어 입증하지 못한다.
 
명제16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들은 목적의 빛 안에서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못마땅하지 않 다
 
과학자들이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제공할 수 있는 어떤 설명일지라고, 이론적으로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수작업에 대한 묘사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만약 다른 어떤 설명이 더 나은 것으로 판명된다면, 하나님이 그 방법으로 일하셨을 것이다. 만약 우주가 팽창 중이라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중이다. 과학적 이론들은 하나님이 설계하고 만드셨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에 대해 설명해준다. 진화에 대한 반론은 왜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행하시겠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인간이 주제넘게 개입하려는 논의들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은 지혜로써 행하셨던 방법으로 행해 오셨다. 우리가 그것을 판단할 자리에 있지 않으며,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여전히 ‘무엇을’ ‘어떻게’라는 질문을 탐구할 수 있지만, ‘왜’라는 질문은 항상 우리의 이해 너머에 우리의 모델 너머에 놓여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질을 강하게 만드시려고 고난을 사용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선을 이루시려고 악을 사용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어떤 인격적 혹은 비인격적 대리인들의 행위를 통해서도 나타나며, 하나님은 그것을 취해서 그의 목적을 위해 돌려놓으신다. 그래서 우리의 질문은 우주와 기원을 위한 하나의 모델이나 설명이 하나님의 본질과 조화될 수 있는지 없는지가 되면 안 된다.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단지 법칙 같은 성질을 취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주의 작동 속에서 일관되게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지적인 것으로 만드셨고, 인간들에게는 우주의 일부 신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 이 원동력에 대해 언급한 예를 보자. 시편 139:13, “주께서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이 진술에서 첫 번째로 관찰할 것은 이 창조 행위가 순간적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에 관여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관찰할 것은 이 과정이 과학으로 잘 이해된다는 것이다. 수정, 착상, 태아의 발달, 출산의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설명이 가능하고, 예측 가능하며 규칙적인 것을 찾는다. 우리의 성경적 신앙은 하나님의 일을 단지 신비를 유지하는 그런 측면에만 관련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함께 어머니의 자궁에서 만드셨고, 과학자들이 관찰한 과정들은 단지 하나님의 일을 조사할 뿐이다. 우리가 과학을 거부할 이유가 없지만, 여전히 과학은 하나님의 역할을 인정하거나 확언할 능력이 없다.
 
이런 동일한 현상들이 역사에서도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며 순간마다 사건을 계획하신다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것을 믿지만, 역사학자들이 자연적 인과관계 과정에 대해 말할 때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각자 인간을 모태에서 창조하신다고 믿지만, 발생학자들이 자연적 인과관계 과정을 제시할 때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후를 주관하신다고 믿지만, 자연적 인과관계의 예측가능성에 바탕을 두고 매일 매일 기상도를 만드는 기상학자들을 규탄하지 않는다. 진화도 이와 비슷한 용어들로 생각될 수 있을까? 하나님 없는 과정으로서의 진화론적 견해는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없는 과정으로서의 역사학, 발생학 혹은 기상학도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진화를 도매(wholesale)로 받아들이도록 제안하고 있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모든 차원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을 알며 우리의 신학적 확신에 대한 인식을 유지하는 한, 특히 창세기 1장도 그리고 성경적 신학도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하나의 모델로서 진화를 거부할 이유를 주지 않는다고 제안하고 있을 뿐이다.
 
명제17 창세기 1장의 이 견해로 인한 신학은 더 강할 뿐, 약하지 않다
 
창세기 1장의 기사가 기능의 기원 기사로 취급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물질 기원의 원인 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성경적 견해는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어떤 관점에서든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견해는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감소시키지 않고, 단지 창세기 1장이 하나님 작품의 어떤 측면을 나타내는가에 관한 초점의 변화를 제안한다.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즉시로 실행되었다기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났을 수 있다는 제안이 하나님의 능력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적합하다고 여기시는 어떤 방 법으로든 창조하실 수 있고, 설령 수억 년의 세월에 걸쳐 그 일을 하기로 선택하였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리는 권능의 행위 그 자체이다. 그것은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성취되고 있다. 아무것도 하나님의 역사에서 배제되지 않고 그의 주권도 위축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인격이나 행위와 관련된 어떤 신학적 위협도 없는 것이다.
 
매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
 
하나님의 일이 우리의 과학적 세계관과 완전히 통합되고 과학은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며 어떻게 행사하시는지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그 일에 대해 보다 성경적 관점, 신학적으로 더 건강한 관점을 되찾게 된다.
 
진행 중인 창조주의 역할
 
우리는 자연이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관점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단지 과거의 어느 한 경점에서 창조하신 것만 아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이 기능들을 다스리심
 
성경적 사고에서는, 우리 세계의 사물과 현상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 때문에 그렇게 작동한다. 성경적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목적이 가장 중요한 등식 부분이라는 것을 주장하여 물질주의를 논박한다. 우리들의 세계는 기능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물질은 기능의 하위개념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물리적인 것들을 만드셨다고 말하는데 만족하기보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작동하게 만드셨다고 말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목적, 목적론은 물질적인 것에가 아니라 기능적인 것에 위치하고 관찰된다.
 
신성한 공간
 
우리가 우주 성전의 성경적 관점을 받아들이면, 세계(혹은 우주)를 더 이상 세속적 견지에서 바라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개발해야 할 우리 소유가 아니다. 우리가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주는 하나님의 장소이고, 그 안에서 우리가 특혜를 받은 장소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주 성전의 아이디어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소유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세계를 존중하는 기초가 되는 신학이고, 우리가 키워야 할 생태학적 민감성이다.
 
인식일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안식일 안식을 흉내 내어 기능들을 다스리도록 요청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라 그분이 다스리고 계심을 우리가 알기를 요청하고 계신다고 나는 제안하고 싶다. 우리가 안식일에 ‘안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질서의 입안자요 세계와 우리의 삶에 안식(안정성)을 가져오시는 분으로 인식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데서 손을 떼므로 하나님이 우리 삶을 통제하시는 분으로 인정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이 우리에게 일상의 세계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도록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 일상의 세계는 우리 스스로 필요를 공급하고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안식일은 우리 삶에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공급하시는 분임을 인식하기 위한 날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시고, 이 세계가 그의 세계이며, 우리들의 시간이 선물로 주어진 하나님의 시간임을 인정하는 방법이다. 온 우주의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사랑과 감사와 존경과 경외심을 반영할 수 있다면 무엇이나 하라. 예배는 위대한 아이디어이지만, 기계적이어서는 안 되며, 단지 시작에 불과할 수 있다.
 
질서
 
지혜는 고유한 질서를 수반한다는 것과 자신을 질서에 순응시킨다는 것이다. 지혜문헌의 해석자들은 일관되게 그 문헌 속에서 창조가 얼마나 두드러진 주제인가를 주목해왔다. 그 두드러짐은 지혜와 질서의 연결을 통해 설명된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다른 모든 영역들에서 질서를 세워온 것처럼 우주에서 질서를 세워왔다. 과학은 그 질서를 관찰해왔고, 질서가 얼마나 깊게 우주를 관통하고 있는지 우리의 경탄을 자아낸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무질서 때문에 씨름할 때, 이 세상의 무질서와 깨어짐이 인간의 죄와 타락의 결과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창세기 1장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신학적 참여는 하나님이 질서의 입안자라는 것이다.
 
인간의 역할
 
창세기 1장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우주 성전에서 일하도록 특별한 역할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우리의 필요에 맞춰 재단하셨고, 그의 필요에 맞추지 않으셨다. 세상은 하나님의 장소이지만, 우리들을 위해 설계되었고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다. 창세기 1장의 신학은 이 세계에서 우리의 정체성과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결정적이다.
 
“좋았더라”의 신학적 암시
 
명제4에서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좋았더라”가 기능적이 되는 것에 대한 언급이지, 도덕적인 선함의 문제가 아니라는 아이디어에 대해 토의했다. 우리가 “좋다”에 대해 도덕적이 되기보다 기능적이 되는 것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잡아먹는 것(predation)이 어떻게 도덕적으로 선한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우주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이 세계를 관찰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추론할 수 있지만, 그 진리들이 우리가 ‘자연 세계’라고 부르는 곳에서 하나님의 속성들이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중력은 정의롭지 않다; 피조 세계도 ‘공평하지’ 않다. 물론 하나님이 물질을 만드셨지만, 성경은 물질의 기원에 대해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창세기 1장에 대해 제안된 해석은 우리에게서 어떤 선언을 기대하는가? 1. 세계는 야훼의 설계대로 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그의 감독 아래서 작동된다. 2. 우주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3.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역할과 기능을 부여 받았다. 4.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위해 제 구실을 한다.
 
명제18 공공 과학 교육은 목적에 관해 중립을 지켜야 한다
 
기원은 목적론인가 아니면 반목적론인가? 믿음으로 성경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또한 믿음으로 기원에 대한 목적론적 견해를 받아들인다. 경험 과학은 목적을 정의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경험 교육의 결과로서, 생물학적 진화가 무목적을 인정할 수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진화가 목적에 대해 논쟁할 수 없다. 생물학적 진화는 목적론으로 중립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생물학적 진화는 목적론적 긍정 혹은 부정에 관해 단지 불가지론적이다. 왜냐하면 목적이 어떤 경험적 방법론으로도 확인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은 물질적 우주의 폐쇄된 체계 속에서만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다. 따라서 과학이 물질적 우주의 외곽에 어떤 것이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면 안 된다. 과학이 만약 타당한 과학으로 스스로를 제한하려 한다면 반목적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경험 과학은 반드시 목적론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 결과적으로 창세기는 경험 과학 교실에서 가르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창세기가 경험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험 과학은 목적론이나 반목적론을 편애해서는 안 되며, 가능한 한 충분히 쟁점으로부터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 과학 교실에서 경험주의의 역할을 인정함으로 인해, 만약 교육과정이 형이상학을 무시한다면 우리의 공공 교육 체계는 비참하게 무능하다. 단순히 과학적 훈련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철학적, 심지어 신학적) 소양이 요구된다. 만약 과학자들이 과학을 사회에서 이용하는 방법을 찾도록 결정하는 사람들이라면, 형이상학적 측면들을 생각할 때 마치 과학적 쟁점들을 생각할 때와 마찬가지로 통찰력이 날카로워야 할 것이다. 자연 과학은 단지 교육의 한 가지(branch)이며, 자연과학을 인간성으로부터 격리시키려 하거나 자기만족적인 것으로 고양시키려 해서도 안 될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적론적 의무들을 공공 과학 교육에 부과하려는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믿음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탈목적적 의무를 공공 과학에 부과하려는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 성경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마치 성경이 물질의 기원을 설명하는 기제를 제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공공 교육 안으로 밀어 넣기보다, 오히려 성경이 기능적 우주론으로서 자신의 신학적 확언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맡겨야 한다.
 
요약과 결론
 
창세기 1장에 관해 내가 제안해왔던 입장은 아마도 우주 성전 낙성식 견해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과학이 제안하는 그 무엇에 대해서든 우리의 대답은 그저 “좋아,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솜씨를 아는데 도움이 된다”여야 한다는 것이 신학적 핵심이다.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비록 생물학적 진화를 선전할 이유를 주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생물학적 진화의 조사 결과들을 거부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생물학적 진화는 성경과 과학의 적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성경과 신학에 대해 불필요하다.
 
과학의 위신이나 종교적 진리의 위신을 거는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신다윈주의 지지자들은 경험 과학이 물질의 기원에 대해 제안하는 것과 관련해서 아무것도 양보할 필요가 없다. 다만 반목적론이 과학에 대한 본질적 귀결인 것처럼 선전하기를 중단하면 된다. 창조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창조에 전적으로 관여하셨다는 신학을 포기할 필요도 없고, 창세기 1장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 단지 그들은 전통적 해석이나 영어 단어에 대한 이해가 텍스트를 해석하는 가장 성실한 해석법을 구성하지 않는 것만 시인하면 된다. 우리는 이 책이 제안하는 해석법이 정확히 창세기 저자와 청중이 이해했었을 방법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성경 자체의 권위와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면 우리가 건방지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누구도 오류가 없는 해석자가 아니므로, 우리는 항상 새로운 정보의 조명 안에서 우리의 해석을 재고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해석이 성경적 권위의 자리에 있게 하면 안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를 잘못 제시할 위험에 빠지면 안 된다. 만약 이성이 실패하는 곳에서 우리의 신앙이 믿기를 요구한다면 기꺼이 이성을 묶어 두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믿음 안에서 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배우는 것이 성경 해석을 재고하는 원인이 될 수 있지만, 결코 성경의 내재적 권위나 본질에 질문하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끝)
 
 
 
 
 
 
 
 
 
 
 
 
 
 
 
 

 
  고대근동의 인지환경
존 H 월튼

 
1. 기능창조론
 
a. 고대 근동, 성서의 세계에서 사물은 그것이 물리적 형태를 가졌을 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 잡힌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이름과 역할을 가질 때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이것은 물질(material) 우주존재론이 아니라 기능(functional) 우주존재론이다. 따라서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즉 무언가 존재하게 한다는 것은) 그것에 기능이 주어짐을 의미할 뿐, 물질적 가치가 부여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이렇게 기능 존재론을 중시하는 경향은 수메르, 아카드, 이집트 문학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b. 성서의 우주론은 물질의 부재에서 시작하지 않고 기능의 부재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창조가 시작되는 창세기1장2절에는 이미 어떤 물질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기능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래서 토후 바보후(혼돈하고 공허)했다. “토후”는 형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기능의 부재를 나타난다. 창세기1장을 물질중심의 해석이 아니라 기능중심으로 해석하면 물질창조 활동의 시간 순서는 중요하지 않으며 창조의 날 대부분에는 물질과 관련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명백히 물질과 관련된 질문이다. 만약 창조기사가 물질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우리는 창조기사에서 “무로부터 창조”를 언급할 만한 어떤 근거로 기대하기 어렵다. “무로부터 창조는 철학적, 논리적 결론일 뿐, 창조기사에서 직접 도출된 결론이 아니다.
 
c. 기능적 관점에서 물질적 관점으로 넘어가게 된 이유는 알렉산더 이후 헬레니즘과 그리스 사고가 고대세계에 유입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향으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우주의 물질 양상에 과심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과학의 발전으로 물질우주라는 개념이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헬레니즘이 고대 근동의 사고방식을 지워버린 것이다. 고대문헌들이 발견되기 전까지 이 사실은 숨겨져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들을 분석하여 고대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기능창조의 관점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물질우주를 창조하시기 위해 진화과정으로 인식되는 방법들을 사용하셨을 가능성을 고려하도록 허용한다.
 
2. 우주성소론
 
a. 고대 근동 인지환경에서 우주는 성소와 관련되어 이해되었다. 성전은 단순히 어떤 사소한 점에서 우주와 비슷한 게 아니라 본질상 우주다. 성전을 우주로 간주하는 증거는 고대근동 문헌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함으로 나온 결과다. 성전은 미시 우주(micro-cosmos)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성전건축은 때때로 창조와 관련된 텍스트의 일부로 관찰된다. 이런 방식으로 성전은 우주에 내재하며 그 중심을 차지한다. 현대인은 창세기1장을 읽으면서 성전이나 성소를 연상하기 거의 불가능하지만 고대 독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b. 어떤 고대인이라도 인식할 수 있었지만 현대 독자가 거의 인식할 수 없는 것이 성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안식이다. 창세기1-2장에서 우주는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성소로 간주된다. 고대 근동에서 신들은 성전이 세워짐으로 그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성전이 신들의 집이고 거처였음을 나타낸다. 이런 문맥에서 신의 안식은 무관심이 아닌 관련성을 의미하며 휴식이 아닌 활동을 의미한다. 이 관점은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창조기사의 일곱째 날을 해당 단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우주에 궁극적으로 질서와 기능을 가져오는(창조하는) 행동이 우주적 성전을 만드시고 그 안에서 안식하시는(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c. 고대근동에서 신이 성소의 가운데 위치하고 안식을 누릴 때 성전은 기능하게 되었으며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창세기1장의 모든 기능과 질서들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과 관련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인간이 제자리에 있지 않다면 기능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이 없다면 성전은 무의미하며 이는 우주도 마찬가지다. 성전은 본질상 관계적(하나님과 인간의 언약관계))이며 창세기1장은 우주를 같은 관점으로 대한다. 우주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였으며 하나님은 우주가 인간을 위해 기능하게 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이 세우신 부통치자였으며 그분 자신의 형상으로 옷 입혀졌다.
 
3. 결론
 
a. 창세기 본문은 우주성전이 지닌 기능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로서 물질의 기원에 관한 현대과학의 관심과 상관이 없으며 물질의 기원에 대한 성서의 관점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만약 창세기1장이 기능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것은 물질에 대한 어떤 견해도 제시하지 않으며, 그 경우 성서는 지구의 나이에 대해 어떤 견해도 제공하지 않는다. 첫 번째 창조기사(창1:1-2:3)과 두 번째 창조기사(창2:4-25) 사이에 서로 충돌이 있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주로 두 창조기사가 물질의 창조를 알려준다고 기대하는데서 나타난다. 두 창조기사는 성소의 질서수립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아주 잘 들어맞는다. 첫 창조기사는 우주적 단계에서 이 주제를 다루며 둘째 기사는 지상적 단계에서 동일한 주제를 다룬다. 첫 기사에서 우주는 곧 성소이며 인간을 위해 기능한다면 둘째 기사에서 사람들은 성소 안에 위치하며 성소를 위해 기능한다.
 
b. 과학과 공리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우주를 객관화하고 대상화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청지기로 묘사하는 성서 텍스트에 의하면 인간은 우주에 질서를 가져오는 창조행동에 이바지할 책임이 있는 자이다. 이것은 지구를 이용만하고 그것을 무질서에 빠뜨리는 인간의 역할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개념이다. 우주기원에 대해 오직 물질적 관점만 수용된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먼 과거에 수행되고 완성된 과업일 뿐이다. 이 경우 하나님을 창조주로 묘사하는 것은 현재와 거의 완전히 단절된 일종의 역사적 진술이 될 뿐이다. 그러나 기능창조론과 우주성소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우주의 통치지이시며 무질서의 위협에 맞서 질서를 유지하는데 활발히 관여하신다. 창조를 이렇게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은 우주의 질서를 세우시며 다스리시기 위해 우주성소의 중앙에 거하시는 분이심을, 그리고 부통치자인 인간은 하나님의 성소인 우주에서 책임 있는 자세로 청지기 역할을 감당해야 할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