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바울과 유대전통
바울의 신학은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유대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여러 수준에서 유대 경전에 철저하게 의존한다. 성경의 거대한 서사적 구조와 심오한 신학적 주제들은 바울이 마음껏 사고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 주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날카롭게 비판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메시아인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바울에게 있어 이스라엘과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유대전통 안에 속해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도래했다는 확신을 가진 이후부터는 그의 독특한 해석을 전개해나갔다. 사실 바울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많은 유대교 분파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경전을 놀라우리만큼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바울 당대에는 표준적인 정통교리를 강요하거나 그럴만한 권위를 가진 그룹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유대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유대인의 모습을 표출했으며 유대 전통에 대해서도 수많은 해석이 공존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유대교 안에서도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기원후 70년에 파괴되기 까지 수많은 유대인 순례자가 방문하곤 했으며 멀리 사는 유대인들조차도 납부했던 세금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또 하나는 시내산에서 주어진 유대 율법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하지만 이 율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바울의 유대경전 해석은 동시대 유대인들에 비해 크게 두드러지거나 독특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이례적으로 두드러진 부분은 유대 관습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그는 우상숭배에 대하서는 동려 유대인들처럼 비타협적이었지만 음식법이나 안식일, 할례에 대해서는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새 창조(갈6:15)라고 부르는 것이었는데 이 새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나타난 새로운 현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바울의 새로운 경험은 그의 가치 체계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놓았으며 그의 유대전통에 대한 해석 방향을 새롭게 재조정했다.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을 통해 전적으로 바뀌었다. 그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진술 안에서 예수를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킴으로써 유대인들의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대대적으로 수정한다. 바울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그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동인을 발견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에 비추어 생각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결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 사건을 경험한 이후에는 이스라엘 역사와 세계 역사를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예수의 부활이 미래에 나타나리라 예상했던 바로 그 마지막 시대가 비로소 시작된 것으로 이해했다. 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의 손길이 조건 없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유대교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중시하는 일은 흔히 볼 수 있지만 이 자비가 각자의 자격과 무관하게 주어진다는 사상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다.
바울의 유대전통의 재편성과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 및 경계를 뛰어넘는 그의 이방인 선교경험은 문화적으로 상당히 모호한 현상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직도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신학과 실천적 행동이 유대 유산과 일관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유대전통을 재편성하고 독특한 유대관습을 상대화한 그의 사고방식은 동시대 유대인들에게 반감을 조성했다.
4장 로마 세계에 위치한 바울의 교회들
자신의 좋은 소식에 반응하여 개종자들이 생겨나면서 바울은 신자들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를 세웠는데 그는 이 공동체를 “에클레시아”라고 불렀다. 이 단어는 어느 건물을 의미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바울의 이 작은 모임들은 이러한 가정과 도시와 제국이라는 환경에 어떻게 적응해 나갔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그리 잘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울이 세운 교회들의 구성원은 대부분 비유대인이었고 현지 유대인들과 의절하거나 대립하면 할수록 그들은 로마세계에서 사회적으로 볼 때 점점 더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정상적인 종교행위를 정당한 이유 없이 거부하는 것은 무척 모욕적이었으며 심지어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런 행동은 사회적 유대감을 와해시키고 공동체의 안전을 담보하는 공동체와 신들 간의 미묘한 관계를 위협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무신론은 어떠한 역사적 문화적 근거에 따른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정치 당국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바울이 로마에서 처형당한 이유도 아마도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부적격자라는 사실을 로마인들이 깨닫게 된 계기가 한 몫을 담당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리스도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의 대화재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어쨌든 로마 종마종교에 대한 그리스도교 운동의 도전과, 로마의 통치권을 강화하는 시각적 선전행위 및 시민종교의 제사의식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저항은 궁극적으로 로마문명이라는 거대한 체제를 완전히 정복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5장 바울의 초기 이미지들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 시초부터 그 어떤 이보다도 더 서로 상반되는 견해를 갖게 하는 인물이었다. 이 정도로 논란이 많은 인물은 자신에 대한 각양각색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일쑤다. 사실 바울 자신도 자기 주위로부터 들려오는 다양한 소문과 비판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는 차원에서 사건 경위를 설명한다. 그는 자신이 받은 소명은 독립적인 것이었으며 자신이 수행하는 선교사역은 소위 기둥으로 여겨졌던 이들과 이미 합의된 것이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은 자신의 이미지를 새로운 각도에서 관리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고난 받는 사도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이 이미지는 박해받는 것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졌던 초기 그리스도교의 열렬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영웅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영웅화된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실 바울은 수많은 유형의 진리를 대변하는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바울과 테클라 행전”에서 그는 성적 금욕주의를 설파하고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에베소서나 디모데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급진적인 바울의 이미지는 “바울의 순교”에서 적절하게 완성된다.
이와 유사한 유형의 급진적인 바울의 모습은 그를 기원후 2세기 그리스도교 버전의 영웅으로 발전시킨 마르키온이 주도했다. 마르키온은 그리스도교가 첫 세대를 지나면서 세상과 타협하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에게는 오직 단 한 명의 권위 있는 사도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바울이었다. 마르키온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결함이 있는 물질세계를 창조한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그보다 더 위대하며 이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마르키온은 그리스도 및 그가 가져단 준 자유에 관한 진리를 유일하게 이해한 인물로 바울을 제시했다.
마르키온과 영지주의자들을 반대하던 이들은 바울에 대한 이런 해석에 당혹스러워했다. 그들은 바울의 권위에 반대할 수는 없었지만, 바울에 대한 대안적 이미지와 그의 편지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레나이우스나 테르툴리아누스는 사람들이 보다 더 공감할 수 있는 바울의 이미지를 제시하며 마르키온 및 거짓된 지식을 옹호하는 이들에 대응했다. 마르키온의 순수 바울주의는 그들에게 위협적이었다. 왜냐하면 거대한 성경적 모체로부터 그의 신학을 분리해 내는 시도는 위험스러울 정도로 한편으로 치우친 그리스도교 신학을 낳은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2세기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바울의 이미지는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결국 바울은 거의 모든 사람이 원하는 인물이 되었다. 문제는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바울을 그리며 또는 그를 어떤 방법으로 묘사하고 싶어 했느냐는 것이었다. 바울은 사람들이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단 하나의 그림에 담거나 한 가지 방식으로 해석하기에는 너무나 모호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로써 장차 오랜 세월에 걸쳐 그리스도교 신학과 역사를 통해 꾸준히 나타나게 될 각양각색의 바울들은 전시할 무대가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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