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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기독교 강요- 존 칼빈

2014-03-17 16:21:55

 

[목   차]

 

제1권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제1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 그 연결의 본질

 

제2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그를 아는 지식은 어떤 목적을 이루는가?

 

제3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사람의 마음속에 본성적으로 심겨졌음

 

제4장 무지나 악의에 의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짓눌리거나 더럽혀짐

 

제5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주의 창조와 그 지속적인 운행에서 분명히 드러남

 

제6장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에는 성경이라는 안내자와 교사가 필요함

 

제7장 성령의 증거가 성경 권위의 확립에 필수적임.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달려있다는

논리는 사악한 거짓임

 

제8장 성경의 신빙성은 인간 이성의 범주내에서도 충분히 입증됨

 

제9장 성경을 버리고 계시들을 좇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시킴

 

제10장 성경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제시하여 모든 이방 신들을 물리치고 모든 미신을 교정함

 

제11장 하나님께 눈에 보이는 형상을 부여하는 것은 불경스런 행위이며 우상을 세우는 것은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임

 

제12장 하나님은 우상과 전적으로 구별되시므로 오직 그에게만 완전한 존귀를 드려야함

 

제13장 성경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한 본질이시며 그 안에 삼위가 계심을 가르침

 

제14장 우주와 만물의 창조에 있어서까지 성경은 명확한 표지들로써 참되신 하나님을 거짓 신들과 구별지음

 

제15장 사람의 창조된 본성, 영혼의 기능,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원시의

 

제16장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계를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유지하시며 섭리로 그 모든 부분을 다스리심

 

제17장 섭리 교리의 올바른 적용

 

제18장 하나님은 불경한 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심판하시며 동시에 스스로 부정함이 없이 순결을

유지하심

 

 

제2권 율법아래에서 조상들에게 나타났고 복음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구속주 하나님,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제1장 아담의 타락과 반역으로 온 인류가 저주를 받았고 원시 상태에서 부패하였음. 원죄론

 

제2장 사람의 비참한 현 상태: 의지의 자유를 빼앗긴 채 종의 상태에 매여 있음.

 

제3장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다 저주 받을 것 뿐임

 

제4장 사람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제5장 자유의지를 변호하여 제기되는 흔한 반론들을 반박함

 

제6장 타락한 인간은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구해야 함

 

제7장 율법은 구약백성을 그 아래 가두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소망을

그가 오시기까지 견고히 하기 위함임

 

제8장 도덕법(십계명)의 해설

 

제9장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에서 유대인들에게도 알려지셨으나 오직 복음 안에서 분명히

알려지셨음

 

제10장 구약과 신약의 유사점

 

제11장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

 

제12장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자의 직분을 행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셔야 했음

 

제13장 그리스도께서 인간 본성의 참 본질을 취하셨음

 

제14장 중보자의 두 본성이 한 위격을 이룸

 

제15장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알기위해서는

그의 삼중직분을 보야야 함

 

제16장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자의 기능을 어떻게 행하셨는가 :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에 대한 논의

 

제17장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우리를 위해 얻으셨다는 진술은

올바르고 적절함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 그 유익과 효과

 

제1장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령의 은밀한 역사로 말미암아 베풀어짐

 

제2장 믿음 그 정의와 특성

 

제3장 믿음으로 말미암는 중생 그리고 회개

 

제4장 스콜라 신학자들의 회개론: 복음의 순결성과는 전혀 다름 : 고해와 보속에 대한 논의

 

제5장 보속설을 보충하기 위한 장치들 : 면죄부와 연옥

 

제6장 그리스도인의 삶과 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제7장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체 : 자기를 부인함

 

제8장 십자가를 지는 일 :자기 부인의 일부

 

제9장 영생에 대한 묵상

 

제10장 이 세상의 삶을 사는 자세

 

제11장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 용어 정의와 문제의 요점

 

제12장 값없는 칭의 교리를 확실히 납득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우러러 하나님의 심판대를

바라보아야 함

 

제13장 값없는 칭의 교리에서 유념해야 할 두가지 사실

 

제14장 칭의의 시작과 그 이후의 과정

 

제15장 행위의 공로에 대한 자랑은 의를 베푸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림

 

제16장 칭의 교리에 오명을 씌우기 위한 교황주의자들의 거짓된 비난에 대한 반박

 

제17장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의 일치

 

제18장 행위의 의는 상급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됨

 

제19장 그리스도인의 자유

 

제20장 기도 : 믿음의 주요 활동 그리고 기도로서 얻는 일상적인 유익

 

제21장 영원한 선택 : 하나님은 어떤 이들은 구원에 또 어떤 이들은 멸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음

 

제22장 성경적 증거들을 통하여 선택 교리를 확증함

 

제23장 이 교리를 공격해온 거짓된 비방들에 대한 반박

 

제24장 선택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확증되며 악인은 그들에게 정해진 공의로운 멸망을 자초함

 

제25장 최후의 부활

 

 

제4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회(會)에 들이셔서 그속에서 지키시는

외적인 수단 혹은 목표

 

제1장 모든 경건한 자들의 어머니로서 연합을 유지해야 할 참된 교회

 

제2장 거짓 교회와 참 교회의 비교

 

제3장 교회의 교사들과 사역자들 그들의 선출과 직분

 

제4장 고대 교회의 상태와 교황제 확립 이전의 교회 정치의 형태

 

제5장 고대 교회의 정치 형태가 교황제의 횡포로 완전히 붕괴됨

 

제6장 로마 관구의 수위권

 

제7장 로마 교황제의 기원과 성장: 스스로 최고의 자리로 부상하여 결국 교회의 자유를 억압하고

모든 제어장치를 무너뜨림

 

제8장 신조에 대한 교회의 권세, 교황제의 무절제한 방종으로 인한 순결한 교리의 부패

 

제9장 공의회들과 그 권위

 

제10장 법을 제정하는 권세, 그 권세를 빌미로 영혼들에게 저질러진 교황과 그 신복들의

야만적 횡포와 살육

 

제11장 교회의 재판권과 교황제에서 저지른 남용

 

제12장 교회의 권징 : 징계와 출교로 나타남

 

제13장 서원 : 경솔한 서원은 자신을 비참하게 얽어매는 것임

 

제14장 성례

 

제15장 세례

 

제16장 유아 세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바와 일치함, 그리고 그 표징의 본질

 

제17장 그리스도와 성찬, 그리고 성찬으로 말미암는 유익

 

제18장 교황제와 미사 : 그리스도의 성찬을 더럽히고 말살시키는 모독행위임

 

제19장 다섯가지 다른 의식들 : 성례로 잘못 인정되어 왔으나 그 허구성이 입증됨 :

그 의식들의 진정한 본질을 규명함

 

제20장 국가의 통치

 

서문

2014-03-17 16:23:14


1. 독자에게 드리는 글(1559)

 

  나는 이 책의 초판에서 일반적으로 소책자에서 다루는 것 처럼 주제를 간략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뜻밖에 이 소책자가 경건한 사람들에게 크게 받아들여지고 호의적으로 평가를 받게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찬사와 기대에 부응하려고 주제들을 더욱 풍부하게 다루기 위하여 판이 거듭될 때마다 모든 수고를 기울였고 그 결과 독자들이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이 책을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이 책을 집필하는 일에 모든 열심과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지난 겨울 간헐열이 나를 죽음으로 부르며 압박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하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를 확장하시고 공적인 선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나의 마음에 열심을 불어넣으셨다. 나는 경건에 관한 순수한 교리를 유지함으로써 교회를 유익되게 하는 일 이외에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만큼 그릇된 비난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서문이 인쇄될 때 아우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 내가 교황권으로 변질되었다는 소문이 유포되었고 군주들은 이 소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더러운 거짓말이 나를 억압하고 모욕하면 내가 약해지고 주눅이 들거라고 생각한다면 마귀와 마귀를 따르는 자들이 오판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이 내가 그 거룩한 부르심의 길에 확고하게 서서 끝까지 인내하도록 도우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집필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쉽게 다가서고 흔들림없이 말씀안에서 진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읽을 수 있도록 훈련시키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기독교의 핵심을 모두 다루고 그것을 순서있게 배열하였으므로 누구라도 바르게 포착하기만 하면 성경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고 또 그 내용들을 어떤 목적과 관련시켜야 하는지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2. 본서의 주제(1560년 불어판에서)

 

 

  성경이 어떤 것도 첨가할 수 없는 완전한 교리를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성경을 많이 학습하지 않은 사람은 방황하지 않고 확실한 길을 붙들 수 있기 위하여 인도와 안내를 받아야 한다. 먼저 나는 그들이 어떤 나라에 속해 있든지 간에 배우려고 하는 자들을 돕기 위하여 이 책을 라틴어로 저술하였고 그 후에 우리 프랑스 국민을 위하여 우리 말로 번역하였다. 나는 이 책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성경에 대한 선하고 바른 이해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할 수 있다. 이 책은 나의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진실로 이 책에 대한 모든 칭찬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마땅하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알기 바라며 신구약 성경을 읽음으로써 크게 도움을 얻는 방법을 알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고 기억속에 부지런히 각인시키기를 권면한다.

 

헌사

2014-03-17 16:24:13


 헌사 (프랑수와 왕에게)

 

  지극히 위대하시고 지극히 영명하시며 지극히 기독교적인 프랑스의 왕 프랑수와 폐하께 존 칼빈은 주 안에서 평강과 문안을 드립니다. 이 책을 저술한 저의 목적은 기독교의 기초적인 사실들을 전달하여 종교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특별히 우리 프랑스 국민들을 위하여 이 일에 착수하였는데 그들중 상당수는 제가 보기에 그리스도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었지만 그리스도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라도 가진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의 반대와 핍박이 프랑스에 너무나 파급되어 건전한 교리가 발붙일 수 없게되었습니다. 저는 그 사악한 자들이 박멸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그 교리의 대부분을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주저없이 고백하는 바입니다. 저는 그들이 이 교리를 가능한 혐오스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끔직한 모함들로 당신의 귀와 마음을 채웠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들어보지도 않고 이 교리에 대하여 피비린내 나는 선고를 내리는 것은 폭력입니다. 지극히 존귀한 왕이시여 우리가 이런 것들에 대하여 터무니 없는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중상 모략들이 매일 당신 앞에 고해지고 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마치 이 교리가 모든 질서와 시민의 정부를 전복하고 평화를 깨뜨리고 모든 법률을 폐기하고 모든 신분과 재산을 박탈하려는 것,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려는 것외에 다른 목적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처럼 모함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악한 비난들이 믿어지고 있는 때에 그 교리에 대한 일반의 증오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합심하여 우리와 우리의 교리를 정죄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교리를 방어하는 보루는 그들이 정죄하는 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라고 지지하는 것입이다.

 

  무적의 왕이시여 저는 정당하게 당신에게 이 송사를 충분히 심리해 주시기를 청원하는 바입니다. 이 송사는 지금까지 적법한 절차없이 사법적 진실보다는 폭력적인 광기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이나라에서 사악한 자들이 득세를 하여 그리스도의 진리는 추방되고 흩어졌으며 가련한 교회는 잔인한 살육으로 피폐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러한 광분에 대항하여 교회를 지키고자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극히 현명하신 왕이시여, 이처럼 정당한 변론에 대하여 당신의 귀나 마음을 닫아 버리지 않는 것이 당신을 위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땅위에서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의 왕국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 온전하게 유지될 것인가하는 아주 중대한 문제들이 걸려있을 때 말입니다. 실로 이 문제는 당신이 듣고 인지할 가치가 있는 것이며 당신의 왕관에 어울리는 일입니다. 자신의 왕국을 통치하는데 있어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식하는 것, 정말이지 이러한 생각이 진정한 왕을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 왕국을 통치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왕이 있다면 그는 왕의 법도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도적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왕국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통치되고 있지 않는데도 그것이 번영하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속고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천하고 낮고 미미한 존재들이지만 우리의 교리는 세상의 모든 능력들 위에 우뚝 솟아아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난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에게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대적들은 우리가 거짓되이 하나님의 말씀을 핑게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힌다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소유하고 계신 분별력을 발휘하여 우리의 고백을 읽어보시면 그들이 얼마나 악의에 찬 무고와 파렴치한 말을 하는지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적들은 단지 맹목적 신앙으로 자신을 교회의 판단에 맡기기만 하면 되다고 하며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무슨 신앙을 견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습니다. 교황청의 수위권과 거룩한 어머니되시는 교회의 권위에 대항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명백한 불경으로 더럽혀진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고통스러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들은 미사, 연옥, 성지순례 따위의 시시한 문제들을 위하여 그토록 모질고 독하게 투쟁하는 것입니까? 요컨대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한가지 자기들의 지배권을 보존하고 자기 배를 채우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의 교리를 공격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비난하며 거기에 온갖 이름을 붙여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우리의 교리가 증오와 의심의 대상이 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교리를 새롭고 또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우리의 교리를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많은 교구들의 동의와 아주 오랜 전통에 대항하고 전통을 부정한다고 공격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교회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종파 분리의 죄를 범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도무지 그런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던 수세기 동안 교회가 죽어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교리를 새로운 것이라 부름으로 하나님께 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안간에게 새로운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우리의 교리가 그들에게는 새롭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도 그의 복음도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리가 알려지지 않은채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던 것은 인간의 불경건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우리가 그것을 되찾았으므로 오히려 그것이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라는 주장이 마땅히 인정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새로운 복음을 날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행한 모든 기적들이 확증해 주고 있는 진리의 복음을 견지하고 있는데도 대적들은 우리에게 기적을 요구하여 자신들은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기적에 의해 자기들이 신앙을 확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기적은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우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들이 자신을 뒤받침하기 위하여 주장하는 기적들은 순전히 사탄의 미혹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로 부터 허망한데로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부당하게도 고대의 교부들이 우리를 반대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교부적 권위에 의해 승부가 결정된다면 승리는 우리 편에 있습니다. 그들은 교부들의 훌륭한 글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왜곡시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마치 황금 가운데서 쓰레기를 모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를 교부들의 대적이요 교부들을 멸시하는 자라고 몰아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부들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저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우리의 교리가 교부들의 사상과 일치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관습에 호소하지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의 판단이 정확하기만 하다면 선한 사람들에게서 관습을 찾아야 할 것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선한 사람들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관습에 굴복하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불가필하게 실수가 인정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만이 청종되고 준수되어야 합니다. 그 진리는 세월이 많이 지나갔다고 해서 혹은 어떤 관습이 오래 계속되었다해서 좌지우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악하면 악한 관습이란 일종의 전염병과 같아서 사람이 그 병이 걸리면 모두가 다 멸망하는 것입니다. 대적들은 우리가 교회가 수세기 동안 생명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우리가 교회를 대항하여 싸우고 있음을인정하든지 둘중에 하나를 인정하라고 압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살아있는 교회에 대항하여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적들은 자신들의 육안으로 보이는 교회가 아니면 인정하지 않고 결코 한정시킬 수 없는 교회를 자신들이 정한 한계내에 두려고 하는 점에서 진리로 부터 멀리 이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논쟁은 다음과 같은 점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첫째, 교회의 형태는 항상 드러나 보이고 관찰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둘째, 그들은 교회의 형태를 로마 교회와 그 계급제도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견해에 반대합니다. 교회는 어떤 가시적 외형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외형은 저들이 우매하게 흠모하는 외적 장엄함 속에 담길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는 아주 다른 표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는 것과 성례를 올바르게 집행하는 것입니다. 저는 헛된 자랑으로 교회의 형태를 판단하려는 그들의 욕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사도적 지위를 가진 로마 교황과 나머지 주교들이 교회를 대표하며, 교회로 간주되어야 하며 그런고로 그들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교회라는 미명하에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들을 세상에 오만하게 선전해온 그들은 교회가 외적 허식과 무관하다는 증거를 우리에게 제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우리의 글들을 읽어보신다면 그들이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 바로 그 교리 자체야 말로 영혼을 죽이는 도살장이요, 교회의 선동자요, 파괴자임을 틀림없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대적들은 우리 교리의 전파로 수많은 소요와 다툼이 일어나고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쳤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악들을 부당하게도 우리의 교리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사실은 사탄의 탓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면 사탄도 반드시 활동하게 마련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 교리들과 구별하는 가장 확실하고 믿을 만한 표지입니다. 거짓교리는 모든 사람들이 귀 기울여 받아들이고 칭송하며 청종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깊은 흑암속에 잠겨있던 지난 수세기 동안 인간들은 사탄의 농락을 당했던 것입니다. 사악하고 반역적인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여 일으키는 폭동이나 광신적인 분파들의 소동을 하나님의 말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얼마나 악한 일입니까? 오류를 널리 퍼뜨리거나 소요를 불러일으키는 자는 우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그들입니다. 자비로우신 왕이시여 우리 대적들이 당신속에 공포를 불러 일으키려고 만든 거짓 고소에 조금도 동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새 복음( 그들이 우리 교리를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에서 소요와 모든 범죄에 대한 면책을 찾고 있다는 고소말입니다. 짐작컨데 그들은 우리가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번도 선동적인 발언을 한 적이 없으며 펴하의 통치하에서 단순하고 고요한 생활을 추구하였습니다. 만일 어떤 자들이 복음을 핑게로 소요를 일으킨다면 법으로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파렴치한 자들의 사악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복음이 모독을 당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 폐하시여 저는 단지 변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폐하께서 우리의 송사에 대한 실제 형편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현재 폐하의 마음은 사실상 우리를 떠나 등을 돌린 상태에 있으며 심지어 진노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고요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우리의 이 고백을 읽어주신다면 우리는 폐하의 은덕을 되찾을 자신이 있음을 첨언합니다. 그러나 만일 악의로 충만한 자들의 속삭임만이 폐하의 귀를 가득채워 우리는 변론의 기회도 없이 폐하의 묵인하에 투옥, 고문, 화형을 받는다면 우리는 도살당할 양처럼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내로 영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때가 되면 주의 강한 손이 반드시 나타나 우리를 환란에서 건지시고 멸시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왕 중 왕이신 주께서 폐하의 보좌를 의 가운데, 폐하의 통치를 공평 가운데 견고케 하시기를 기원하나이다

 

1536년 8월 1일 바젤에서  존 칼빈

 

1-1. 두가지 지식

2014-03-17 16:26:21


제1권 :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1)

 

제1장 :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서로 관계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두 지식이 상호 연관되는가?

 

 

1.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2.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3.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의 인간

 

 

  위의 1항과 2항의 제목을 언뜻 보면 서로 상반된 얘기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을 아는 지식’의 논리적 선후관계가 서로 반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절 서두 부분에서 칼빈은 “어느 쪽이 먼저 다른 쪽을 낳는지를 식별하기는 쉽지 않다.” 2) 고 말함으로써 그러한 상반된 선후관계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이렇게 선후관계를 명확히 밝힐 수 없음은 둘의 관계가 매우 밀접함을 역설적으로 강변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도대체 알 수는 있는가? 안다 해도 그것이 왜 인간에게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사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이성적 활동 초기에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던지면서 그 답은 물음표로 대신하는 질문일 것이다. 더욱이 인간의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서도 “무지, 공허, 궁핍, 무력(無力), 게다가 타락과 부패”는 그것이 혹 인간의 특성이라 발견된다 하더라도 의도적으로 회피할 만큼 인정받기 어려운 특성들일 것이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교만”에 빠져 인간만이 보이지 않고 인간만이 존재의 전부인양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

 

  “무지” 중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는 참으로 깨닫기도 어렵고 인정하기도 어려운 듯하다. 그런데 이때의 무지는 전적 무지와 진리의 무지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할 듯하다. 전적 무지는 능력에서의 무지이다. 즉 ‘알 능력이 없음’이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두 번째 진리의 무지는 존재하는 진리를 모르는 것이다. ‘능력은 있으나 아직 모르는 상태’라 풀이할 수 있겠다. 3)  이 두 무지 모두 우리의 주제와 관련되어 고찰할 수 있다. 전적 무지는 ‘알 능력이 없음’이다. 칸트의 이율배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우주의 무한성에 대해서 과연 알 수 있는가? 과학자들은 언제까지 물질을 쪼개어서야 물질의 기본 입자를 찾아낼 것인가? 그럴 능력이 아예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철학자와 과학자들 중에서 자신의 탐구 말미에서 전지자를 인정함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다음으로 인간은 존재하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체 진리의 몇 분의 몇이나 알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과연 얼마나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가? 알 수 있는데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해서 깨닫고는 있는가? 자신의 몸과 마음은 또 얼마나 알고 있는가? 밝은 빛이 비추기 전에는 “무지”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러한 무지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우리 인간에게 “말씀의 빛”이 어둠을 비출 때 우리 앞에 보일 것이다. 그 빛이 처음 우리에게 비추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됨에 대한 참회의 눈물을 보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쁨의 눈물을 맛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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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제목에 대한 영문 번역판의 주석을 소개한다.) 제목에서 하나님의 “존재”(being) 혹은 하나님의 “현존”(existence)이란 단어 대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란 단어가 사용된 것은 칼빈 신학의 구조와 내용 모두에 있어서 계시가 중심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론과 창조론과 예정론을 포함하는 “창조주”라는 용어는 하나님 자신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적인 활동이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다. 중세와 그 이후의 “칼빈주의자들”의 스콜라적 신론에서는 후자가 보다 더 두드러진다. 제1권과 제2권의 제목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인식론은 <기독교 강요>에서 제3권의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길”에서야 비로소 완전하게 전개된다.… 여기서 “지식”이란 말의 라틴어는 “Cognito”인데 1장의 제목에서는 “notitia”라는 말이 나온다. 칼빈은 이 두 단어를 상호대체할 수 있도록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칼빈은 두 단어를 모두 “cognoissance”라는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1541) 칼빈에게 “지식”이라는 말은, 그 단어가 어떤 의미를 포함하든지 간에 단순히 혹은 순수하게 객관적인 지식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제3권 2장 14항을 보라. 그것은 종교적인 상황에서의 지식의 의미에 관해 가장 명확하고 간결하게 언급한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의 말로는 “실존적 이해”라는 말고 가장 가까운 말일 것이다. (Ford Lewis Battles의 주석)

 

2) 큰 따옴표는 앞으로 <강요>의 문구를 직접 인용하는 경우에 쓸 것이다.

 

3)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구가 보통 ‘자신에 대한 무지의 자각’을 이야기할 때 많이 언급된다. 그런데 이 무지는 둘째 무지에 해당한다. 그리스 당시의 사람들이 감각적인 능력만을 사용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인하여 사회의 정의가 무너져내린다는 결론을 내린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구비하고 있는 ‘이성적 능력’을 강조하면서 그 이성을 발견하여 사용하라는 의미에서 예부터 내려오던 격언을 이용한 것이다.

 

1-2. 하나님 지식

2014-03-17 16:26:43


제1권 :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 2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고

또한 그를 아는 지식은 어떤 목적을 이루는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나 경건이 배제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분시며 권능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섭리로 다스리시며 선하심으로 우리를 양육하시는 분이심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 신앙과 경건이 샘솟게 된다. 경건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온갖 은혜들을 아는데서 생겨나는 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를 향한 사랑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덕분이요. 하나님의 보살핌으로 양육을 받으며 자기들의 모든 선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시요 따라서 하나님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절대로 하나님께 기꺼이 복종하려 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처럼 세상의 모든 문제에서 물러나서 혼자서 한가하게 신에 대해 노닥거리는 그런 류의 신이 우리에게 대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요컨대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으로 인하여 첫째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생겨나야 하고 둘째로 그 지식의 안내와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모든 선을 찾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 덕분으로 돌리기를 배워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법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직시하고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우리의 삶을 드리는 일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악하고 부패한 상태임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경건한 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그런 신을 아무렇게나 상상하지 않고 오직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또한 자기가 좋아하는 특성을 아무렇게나 그 신에게 갖다 붙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그대로 붙잡는 것을 좋아한다. 나아가 그는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혹은 분별없이 경솔하게 하나님의 뜻을 넘어서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조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렇게 아는 자는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고서 그를 자신의 인도자요 보호자로 신뢰하며 그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게 된다. 순결하고 순전한 신앙이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두려움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 율법이 제시하는 정당한 예배가 생겨나는 그런 것이다. 우리가 명심하고 주의하여야 할 것은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향하여 어렴풋이 희미한 공경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며 또한 화려한 의식들이 즐비한 곳에서는 진실한 마음을 찾기가 정말 힘들다는 사실이다.

 

1-3. 선천적 지식

2014-03-17 16:27:18


제1권 :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3장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선천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혀 있다1)

 

1. 이 선천적 지식의 특성

2. 종료는 임의로 창조해 낸 것이 아니다.

3. 실제적인 불신앙은 불가능하다.

 

1항의 요점은 “그 어느 누구도 무지를 가장해 도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그의 신성한 위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모든 사람 속에 심어주셨다. 또한 그 기억을 계속 새롭게 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새로움을 더해 주신다.”는 말 속에 담겨 있는 듯하다. 이러한 연고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거나” “삶을 그의 뜻에 따라 바치지 않으면” 즉 믿음을 갖지 않으면 “스스로의 증거에 의해 정죄를 받는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어야만 영혼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듣는 비기독교인들이 자주 하는 항변에 대한 강력한 변증이 될 것이다. 즉 자기들은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러니 기회도 안 주어졌으니 정죄를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는 항변에 대한 강력한 변증이 되는 셈이다. “아무리 미개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더욱이 “짐승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심지어는 “우상숭배”자들까지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인간에게는 “신적 존재에 대한 아주 생생한 인상이 있다”고 칼빈은 말한다.

 

이러한 점을 생각한다면 종교를 “순박한 백성을 속박하기 위해, 몇몇 사람이 교활함과 간계로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반박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종교에서 믿는 신을 인간이 자신의 약함을 보충하기 위한 허상으로 만드는 일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자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왜냐하면 그러한 그들의 허망한 일이 어느 정도 “성취”되는 이유가 바로 “종교로 향한 마음을 일으키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인간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 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칼빈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던 사람들이” “떨어지는 나뭇잎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제일 크게 놀”라는 모습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의 보복”을 볼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렇게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지우려고 해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내쫓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에게 불신앙이 본래 가능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반증이라 할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창조된 이상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과거의 철학자들이 진리를 탐구한 결과로 내놓는 이론에서도 그같은 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나온 당연한 귀결이라 칼빈은 말한다.

칼빈이 3장 마지막 구절에서 말하였듯이,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존재 없이 살아간다면, 죄악을 범하는 일에 무슨 제약이 있겠는가? 자신이 본래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창조되었음을 모르고 살아간다면, 인간은 그 ‘어떤 못할 짓도 없는 상태’의 삶을 살지 않겠는가?2)

 

 

1) (다음은 영역자의 주석이다)“Hominium mentibus naturaliter … inditan”.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3장) 인간의 죄로 인해 소멸되었다(4장). 이것은 외부의 자연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표적(insignia, specimina)을 통하여 인간에게 올 때에도 마찬가지다(5장 14). 그래서 칼빈은 3-5장에서 인간론을 상세히 다룬다(인간창조 1권 15장, 죄로 인한 타락 2권 1-5장).

2) 여기에서 ‘어떤 못할 짓도 없는 상태’는 ‘panougia’라는 헬라어를 풀어 쓴 말인데, 이 단어는 눅 20:23절에는 ‘간계’로 해석되어 있고, 고전 3:19에는 ‘궤휼’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한데 원래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못할 짓도 없는 상태’의 의미로 쓰고 있는 단어이다. 인간이 최고로 악한 상태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1-4. 왜곡된 지식

2014-03-17 16:27:50


제1권 :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4장 무지에 의해서나 악의에 의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짓눌려지거나 더렵혀짐

 

 

    인간들은 미신에 빠진 자들도 있고 악의로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들도 있다. 이렇게 모두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서 타락하여 세상에서 진정한 경건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육신적인 어리석음의 잣대로 하나님을 재려고 하며 건전한 탐구를 무시하고 호기심에 이끌려 허망한 사색에 이리저리 휩쓸린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는 대로 깨닫지 않고 자기들이 추측하는 대로 하나님을 상상하며 꾸며내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그릇된 관념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하나님을 높이고 섬기려는 태도로 무슨 일을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대로 꿈꾸어 지어낸 것이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려고 한다. 다윗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라고 말하였는데 많은 인간들은 본성적인 지각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우러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완악하여지고 습관적으로 죄를 범하여 하나님에 대한 모든 관념을 없애려고 몸부림친다, 그러나 악인들이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자기들의 지각을 거스르려고 발버둥 친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결코 심판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미신은 무지와 맹목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인간들의 헛된 교만과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다. 참된 종교란 하나님의 뜻을 보편성 있는 규범으로 여기고 그 뜻에 일치하여야 하는데 사람들은 아무리 터무니없는 것이라도 종교적 열심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식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을 마치 자기들의 변덕이 맞추어 이리저리 바뀌는 유령이나 환영처럼 생각한다. 미신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들에만 온통 사로잡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분명히 계시하고 명하신 것들을 멸시하거나 노골적으로 거부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한다는 핑계로 거짓된 의식들을 세워놓는 자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의 환상을 경배하고 찬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와 결합하지 않은 종교는 결코 순전하다 할 수 없다는 락탄티우스의 말은 사실이다.

 

  또 하나의 가중되는 잘못은 위선과 외식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런 생각을 끔찍하게 혐오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세상의 신들을 만들어냈다는 스타티우스의 말은 이런 유의 불경건에 아주 잘 들어맞는 말이다.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며 그 심판대가 전복되기를 갈망한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서 두려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하여 신앙과 비슷한 행동을 취한다. 그러나 이것은 헛되고 거짓된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외식하는 자들은 이처럼 뒤틀린 길을 가며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그들은 거룩한 삶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시시한 방법들과 하찮은 것들을 준수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고 헛되이 애쓰는 것이다. 심각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온갖 어리석은 행위로도 속죄를 이룰 수 있으며 하나님을 향한 의무를 얼마든지 이행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는 점이다. 이로 보건데 신에 대한 지각은 본성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새겨져있으므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인간에게는 어떤 신적 존재에 대한 관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관념은 너무나 부패하여 그 자체로는 지극히 악한 열매밖에 맺지를 못한다.

 

1-5.신적 계시

2014-03-17 16:28:36


제1권 :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5장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천지창조와 그 지속적 통치에 의해 빛이 난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사역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셨다. 1항-10항)

 

1. 하나님의 명쾌한 자기 현현은 모든 변명을 불가능케 한다

2.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제시되었다

3. 인간은 신적 지혜의 최상의 증거이다

4. 그러나 인간은 배은망덕하게도 하나님을 대항한다

5. 창조주와 피조물의 혼동

6. 창조주는 자신의 주(主) 되심을 창조를 통해 계시하신다

7.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8.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생활을 지배한다

9.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서 생각하려고 머리를 짜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묵상해야 한다

10.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목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예배하지 않고 미신과 혼란에 빠진다. 11항-12항)

 

11.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우리에게 유익이 없다

12.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의 미신과 철학자들의 오류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오류를 고집하는 한 우리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13항-15항)

13. 성령은 인간이 지어낸 일체의 숭배 행위를 거절하신다

14.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15. 변명의 여지가 없다

 

칼빈은 이 5장을 통해서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의 실제적 지식을 위해서는 성경이 필요하다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을 포함한, 이 우주 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은 단지 변명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을 뿐이라고. 더욱이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하게 드러내고 있는 그 분명하고도 단순한 증거를 통해서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우주에 관하여 숙고하고 신성(神性)을 조금이라도 맛보면 그 즉시 우리는 참 하나님을 무시하고, 대신 자기 머리고 생각해 낸 꿈이나 환상을 세우며, 의, 지혜, 선, 권능에 대한 찬미를 그 참된 원인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게 돌리기”까지 한다고.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날마다의 사역을 악하게 판단함으로써 모호하게 하거나 뒤집어엎거나 해서, 하나님의 사역에 돌려야 할 영광과 마땅히 창조주에게 보내야 할 찬미를 강탈해 가고 있다”고.

 

우주의 광활함과 인간의 신비함을 일면으로나마 알고난 후 전지전능한 신을 생각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난 글에도 언급하였듯이, 인간 이성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탐구한 독일 철학자 칸트의 의견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이성의 능력으로는 이 두 신비스러운 현상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어느 정도까지는 과학의 도구를 사용하여 물질 세계의 비밀을 밝힐 수는 있을지라도 그 정도는 극히 미미할 것이다.1)

인간의 비밀을 생각하여 보면 그 신비로움은 배가된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관계가 그것이다.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끼치고, 육체가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현상은 볼 수 있는데, 도대체 그 원리가 무엇인가를 탐구하다가 결국에는 정신의 실체를 포기하는 사상가들이 많다는 사실은, 매일 정신 차리고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허무한 학적 결론이 아닐 수 없다.2)

 

이렇게 인간은 이러한 신비스러움에 대한 판단을, 중생치 않고서는, “모호하게”하여 해답 없는 미로를 걸어가거나, “뒤집어엎”어서 미신적 숭배로 나아간다고 칼빈은 역설한다. 인간의 탐구가, 지식이, 제멋대로 내버려두게 되면 그 결과가 언제나 스스로의 파멸로 이어지는 역사의 예를 우리는 많이 볼 수 있다. 그 놀라운 신비의 현상들의 배후에 선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는 깨달음의 은혜가 없다면 말이다. 그 깨달음의 단초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칼빈의 가르침이리라.


1) 단적인 예로 생물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인 단백질의 구성 원리는 알게 되었지만, 그것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고 한다.

2) 정신과 물질 사이의 관계는 ‘mind-body problem’이라는 주제로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논제가 되고 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철학자인 김재권의 연구를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1-6. 성경의 역할

2014-03-17 16:29:13


제1권 :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6장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에는

성경이라는 안내자와 교사가 필요함

 

 

  하나님께서는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임재를 그의 피조물들 속에서 보여주셨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사람이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 바르게 인도되기 위해서는 보다 더 나은 다른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이라는 빛을 비추어 주셔서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신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눈이 어두운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지만 안경의 도움을 얻으면 아주 또렷하게 그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관한 갖가지 혼란스런 지식을 우리에게 제대로 바로잡아 주고 참되신 하나님을 분명히 계시하는 안경과도 같은 것이 바로 성경이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자기 교회를 위하여 이를 계획하셨고 자신의 말씀을 주셨으니 이 말씀이야 말로 하나님을 깨닫는데 더 직접적이고 확실한 수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이라는 이 지극히 영광스러운 극장에서 관객으로 앉아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두 눈으로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도 좋겠지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큰 유익을 얻게 해주는 것이다. 참된 신앙이 우리에게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늘의 가르침에서 시작해야 하며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누구든지 올바르고 건전한 교리를 조금도 맛볼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친히 자기를 증거해 놓으신 것을 경건한 자세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참 깨달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데로 빠지기가 얼마나 쉬우며 온갖 종교의 오류에 이끌리는 경향이 얼마나 심하여 새로운 인위적인 종교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픈 욕망이 얼마나 큰가를 생각해 보면 하늘의 교리가 잊히거나 왜곡되거나 부패되지 않도록 이것을 기록하여 증거로 남겨두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순전하게 바라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와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행하시는 역사들을 통하여 자신을 생생하게 묘사하셨는데 그 역사들을 가늠하는 기준은 우리의 부패한 판단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규범인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우리의 마음에 심겨지기 전에는 절대로 오류가 그 마음에서 제거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마음이 연약하고 무능하므로 말씀이 없이 하나님을 찾을 때 필연적으로 허무와 오류 속에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의 도움 없이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께 이룰 수가 없다.

 

1-7.성경의 권위

2014-03-17 16:29:53


제1권 :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7장 :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증거에 의해 확증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권위는 확실한 것으로 확립될 수 있다.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좌우된다는 것은 사악한 것이다.

 

 

 

1.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교회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2. 교회는 성경의 기반 위에 서 있다.

3. 어거스틴의 말을 반증(反證)으로서 인용할 수 없다.

4. 성령의 증거는 모든 증거보다 강하다.

5. 성경은 자체의 보증을 지니고 있다.

 

 

칼빈은 “일반 대중”(multitude)이라면 할 만한 질문들을 열거한다. “즉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확신시킬 수 있는가? 그것들이 우리들의 시대까지 온전히 그리고 손상없이 전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 우리에게 보증할 수 있는가? 만약 이들 모든 것들에 대해 교회가 확실한 규범을 정하지 않는다면, 한 책은 존귀하게 받아들이고 다른 책은 배제하도록 누가 우리를 설득할 수 있는가? 그리고 성경이 어떻게 존귀히 되어야 할 것이며, 또 어느 책들만을 정경(正經) 가운데 편입시켜야 하는가?” 이에 대한 칼빈의 대답은 확고하다. “논쟁을 통하여 성경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세우려 애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성령의 증거는 모든 이론보다 우월하다고 답변한다.1)왜냐하면 하나님 자신만이 그 하신 말씀에 대한 적절한 증인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하여 인쳐지기 전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위탁받은 것을 충실히 선포한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셔야 하는 것이다. … 어떤 선한 사람들은 벌을 받지 않은 불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왈가왈부 지껄여댈 때 그들을 반박할 만한 명백한 증거가 가까이에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고민한다. 이것은 마치 성령께서 경건한 자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한 ‘인’(seal)이요, ‘

보증’(guarantee)이라는 사실(고후 1:22)을 망각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조명해 주기까지는, 의혹(疑惑)의 바다에서 이리저리 표류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성경을 증명이나 논리에 종속시키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지녀야 할 확신, 그것은 성령의 증거에의해 얻어진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 자체의 위엄에 의해 스스로 존중받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인쳐질 때에만 우리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 우리는 성경 속에 하나님의 위엄이라는 확실한 능력이 살아서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이 힘에 의해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또 자발적으로 이끌리고 자극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되, 어떤 인간의 의지나 지식에 의한 것보다 더 생생하고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 결론적으로 이것은 오직 하늘의 계시에 의해서만 생겨날 수 있는 그런 감정인 것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을 정확히 설명하기에는 훨씬 부족하지만, 나는 다만 신자 개개인이 체험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 하나님은 이 특별한 특권을 모든 인류로부터 구별하여 내신 그의 선민에게만 주신다. … 특별히 택함을 받은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이 몸된 교회에 접붙여지기 전까지는 이 ‘일반 대중’에 포함된다. … 우리가 언제든지 믿는 자의 수가 적은 것에 실망이 될 때마다, 하나님의 비밀은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역으로 기억하도록 하자(마 13:11).”


1) 대부분의 논리학 책에 ‘선결문제요구의 오류’(petitio principi, begging the question, circular argument), 즉 일명 ‘순환논리’의 범례로 성경에 대한 예가 나온다. ““성경에 적힌 것은 진리이다.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이 진리인 이유가 성경 말씀은 진리라고 성경에 쓰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전제로써 결론을 제시한 경우이다.”(『논리와 비판적 사고』, 김광수, 철학과현실사, 2002) 논리적으로는 분명히 오류이다. 인간의 학문으로는 오류이다. 인간의 어떤 이론으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신 성령님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이성으로 과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우리가 순수한 눈과 진실된 의식을 가지고 성경을 본다면, 하나님의 존엄이 즉각 보일 것이고, 우리의 주제넘은 거절은 제압될 것이며, 복종하기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칼빈은 말한다. 그 눈과 의식은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눈이요, 의식임을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체험하여 알리라.

 

1-8. 성경의 신빙성

2014-03-17 16:30:29


제1권 :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8장 성경의 신빙성은 인간의 이성의

범주 내에서도 충분히 입증됨.

 

 

  이렇게 인간의 모든 판단보다 더 높고 더 강력한 확실한 성령의 내적증거가 없다면 아무리 논증을 통해서 성경의 권위를 수호하고 교회의 동의로 그 권위를 세우고 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확증하려고 하여도 소용이 없다.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인 후에 면밀히 성경을 읽는다면 우리는 성경에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모든 재능과 품위를 완전히 뛰어넘는 무언가 신적인 것이 거기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고대성(antiquity)에 있어서도 성경이 여타 저작들을 완전히 능가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모세는 레위를 저주하는 야곱의 예언을 소개하면서 자기 가문의 시조가 수치스런 존재임을 이를 감추지 않고 성령의 말씀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자기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이 악하게 비방한 사실을 기록하기도 하였는데 이것도 역시 모세 개인의 육신적인 느낌이 아니라 성령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다.

 

  우리는 모세 오경의 이곳저곳에서 모세가 과연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사지였다는 분명한 확증들을 접하게 된다. 또한 모세는 무수히 놀라운 이적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들이 그가 받은 율법과 그가 공포한 교리를 확증해 준다. 이 모든 이적들은 모세가 과연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주신 증거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주목할 것은 모세가 이야기 하는 이적들마다 언제나 그것에 저항하는 상황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틈만 있었다면 백성들 전체가 반대하고 일어날 수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이적을 인정하게 된 것은 자기들이 그것을 직접 체험하였으므로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모세의 예언을 보면 신적 권위를 부인할 수 없다. 야곱의 유언에서 유대지파에게 최고의 위치를 부여한 것이 나오는데 이 예언이 기록된 후 사백년이 지난 때까지도 유다 지파에 왕권이 주어진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일이 하늘의 예언의 성취가 아니라 인간의 조작이나 노력으로 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이뿐 아니라 모세는 이방인들이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올 것을 예언하였는데 이 예언이 이천년이 지난 후에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과연 모세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예언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다른 선지자들의 경우에는 성경의 신빙성에 대한 더 분명한 증거가 나타난다. 이사야는 유대 왕국이 평안하던 시대에 먼 훗날 유대 왕국의 멸망을 예언하였는데 이뿐 아니라 그들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다시 돌아올 것까지 예언을 하고 있으니 이 예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서 온 것이겠는가? 더구나 이사야는 갈대아를 정복하고 유다 백성들 해방시킬 인물의 이름까지 고레스로 거명하고 있다. 이사야의 예언으로부터 고레스의 등장까지는 일백년의 간격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꾸밈이 없는 역사만으로도 이사야의 예언이 인간의 추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가? 또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기도 전에 그 포로기간이 칠십년 만에 끝나고 해방되어 고토로 귀환할 것을 예언했는데 이것이야 말로 그의 혀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포로시대에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예언 사역을 했는데도 그들의 예언은 서로 말을 불러준 것처럼 일치하고 있으며 다니엘은 향후 육백년 동안 일어날 일들을 과거의 사건을 기술하듯이 상세하고 예언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진리를 공격하는 사악한 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이름으로 되어있는 책들이 정말 그들이 기록했는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것이다. 또 마카베오서에 의하면 안티오쿠스가 모든 책들을 불사르라고 명했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성경의 필사본들은 대체 어디서 온 것들이냐는 것이다. 이 논쟁꾼들은 모든 역사들을 통하여 그 고대성이 확실히 입증되고 있는 성경을 가짜라고 하며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으니 이것이 자신들의 파렴치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얼마나 면밀하게 보존해 오셨는지 모른다. 주님은 말씀을 악독한 폭군의 불길에서 건져내시고 경건한 자들이 목숨을 걸고 이 보배를 후손들에게 전수하게 하셨다. 유대인들은 거듭되는 비참한 역사 가운데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지만 거룩한 책들은 전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안전하게 보존되어 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이적이 아닐 수 없다.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 그 진리를 뒷받침하는 기둥들이 얼마나 견고한지 모른다. 공관복음의 기자들은 미천하고 평범한 문체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지만 그 중심 교리들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 복음서 기자들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늘의 신비를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위엄 속에서 우레를 발하듯이 완고한 자들을 강력한 벼락으로 내려친다. 교만하고 완악한 자들에게 요한복음을 읽게 하라. 그러면 좋든 싫든 그들의 무딘 마음을 도려내고 그 악한 양심을 달순 쇠로 태워 줄 말씀들을 일천 개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태는 백성들의 돈을 취하던 세리였고 베드로나 요한은 무식한 어부출신이었으니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것이 전혀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의 위엄을 그들 속에 드셔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글에 끌리게 하고 거기에 매이게 한 것이다. 또한 교회의 철천지원수였던 바울이 회심하여 하나님의 사도가 되어 과거에 자신이 파괴하려고 하였던 바로 그 교리를 전파하는 자가 되었으니 이런 것들이야 말로 성령께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이끄신 것이 틀림없다는 진리를 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가?

 

    사탄은 세상과 더불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성경을 파괴하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성경은 요동치 않고 종려나무처럼 번성하였으니 만일 인간의 보호에만 의존하였다면 성경이 과연 그렇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이 땅의 모든 권력들이 성경을 파괴하려고 무장하고 일어났으며 인간들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대적하는데도 불구하고 성경이 그 자체의 능력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야 말로 성경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게다가 성경을 받아들이고 동의한 것이 비단 한 도시나 국가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데 합의해 온 것이다. 이러한 일치는 하나님의 섭리 외에 그 어떠한 것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거룩한 사람들이 피를 흘려서 확증하고 증언하고 있으니 과연 얼마나 큰 확신을 가지고 교리를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외적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성경 속에서 그 위엄을 드러내시고 그리하여 성경을 높이는 확고한 마음을 주시기 전에는 이 사람들 스스로는 성경에 대하여 그렇게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확신에 기초하여 성경의 확실성을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서 성경이 하나님을 아는 구원 얻는 지식을 주기에 충족한 것이다. 몰론 성경을 확증하기 위한 인간들의 증언은 성령이 주시는 내적 확신이라는 최고의 증거를 따라 보조적인 증거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조적 증거를 가지고 불신자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해 주려고 하는 행위는 실로 어리석은 짓이다. 성령이 주시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1-9. 직접 계시

2014-03-17 16:38:30


제1권 :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9장 :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뛰어드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깨뜨린다

 

1. 광신자들은 그릇된 방법으로 성령에 호소한다

2. 성령은 성경을 받아들임으로써 인식된다

3. 말씀과 성령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다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무는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계시들을 만들어 내거나 또는 우리를 이미 받은 복음의 교훈으로부터 멀리 떼어놓기 위해 새로운 종류의 교훈을 지어내지 아니하고, 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훈을 우리들의 마음에 인쳐 주는 데에 있는 것이다.”(1항 끝부분)라고 칼빈은 성령과 성경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 9장에서 칼빈이 인용하고 있는 성경구절을 정리해 보자.(인용 순서임)

 

(사 59:21)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고후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딤전 4: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벧후 1: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갈 1:6-9)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후 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 3: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눅 24:27,45)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살전 5:19-20)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사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 때 끝없이 스스로 질문하는 내용 중 하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때 가장 조심스럽고 신중하여야 함을 칼빈은 역설한다. 성경을 떠나지 말라고. 물론 성령의 가르치심이 없으면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지만, 성경을 떠나서는 또한 성령의 가르치심이 나의 마음에 인 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새기게 된다. 그 성령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접할 때에만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중생시키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더 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겠다.2)

1) 회심하고 가장 먼저 떠오른 궁금증이 바로 이 질문이었다.

2) 회심했을 때의 설교 말씀 중 오직 성경 구절만이 기억에 남는 체험을 한 바 있다.(그 말씀은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이다.)

 

1-10. 성경의 계시

2014-03-17 16:39:44


[요약]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모습이 자연 만물에서 나타내시는 자신의 모습과 동일한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계시는 하나님 자신의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와 관계하시는 그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비롯된 신관은 허망하고 과장된 사색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에서 열거된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이미 본 하늘과 땅에서 빛나는 능력과 동일한 것이니 곧 인자하심, 선하심, 자비하심, 공의, 심판 그리고 진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과 관계하시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이런 능력을 볼 수 있다.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피조물 속에서 빛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지극히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교도들은 자연을 보고 자신들의 신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성경은 이교도들의 모든 신들을 명확하게 제외하고 거부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모든 이교도들은 한사람도 예외 없이 자신들의 허망함으로 인하여 자기들이 만들어낸 거짓 신에게 이끌려 하나님을 깨닫는 참된 자각들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그들이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본성적으로 무언가를 느꼈더라도 그 모든 것들은 그저 그들로 하여금 변명하지 못하도록 해주는 것 외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생각할 점]

 

1.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 방식이 하나님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피조물과 관계하시는 모습이라는 언급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기독교 신학은 성경의 이런 계시방식을 떠나 하나님 본연의 모습을 알아내려고 하지만 그런 시도는 자칫 사변에 빠지기 쉽고 결국 성경의 계시를 떠날 위험이 있다.

 

2. 이교도들의 신관은 자연관찰과 그 체험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교도들의 신은 만들어진 신일 수밖에 없고 지극히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은 성경에 계시된 신이며 인간의 생각이나 체험을 뛰어넘는 신이신 것이다. 이런 계시에 의하여 형성된 신관을 가지고 이제 자연과 세상을 바라볼 때 성경에 계시된 신의 모습은 자연에 계시된 모습과 동일함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의 계시를 가지고 인간과 세상과 자연을 해석하는 것이 바로 신자들에게 맡겨진 과제일 것이다.

 

1-11. 가시적 형상

2014-03-17 16:40:41


제1권 :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11장 : 하나님을 가시적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은 불경건한 일이며

우상을 세우는 자는 누구나 참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다1)

 

(예배에서의 형상을 배격하는 것에 대한 성경의 논증, 1-4)

1.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회화적 표현도 해서는 안 된다

2. 하나님에 관한 어떤 형상적 표현도 그분의 존재와 모순된다

3. 신적 임재의 직접적인 표징이라도 형상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4. 형상과 화상(畵像)은 성경에 위배된다

(성경과 교부들의 주장으로 교황 그레고리의 오류를 논박함, 5-7)

5. 성경은 다르게 판단한다

6. 교회의 학자들도 부분적으로 달리 판단했다

7. 교황주의자들의 형상들은 전적으로 부적절하다

(비록 조각과 회화는 하나님의 은사이지만 그것은 형상들 사용의 기원과 예배의 타락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8-16)

8. 형상의 기원 : 유형적인 신성(神性)에 대한 인간의 욕구

9. 어떤 형상을 사용하든 우상숭배에 이르게 된다

10. 교회 안에서의 형상 숭배

11. 교황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회피

12. 예술의 기능과 한계

13. 교리가 순수하고 유력한 동안에는 교회는 형상을 거부했다

14. 니케아 회의(787년)에서의 형상물에 대한 유치한 논쟁

15. 성경 본문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오용

16. 형상들에 대한 불경하고 충격적인 주장

 

  칼빈은 11장과 12장에서 ,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에서 쉽게 빠질 수 있는 믿음의 오류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쉽게 빠지는 오류이기에 넓게 퍼져 있는 오류이기도 하다.2)

  비기독교인들이 돌이나 나무 등의 자연물에 대하여 어떤 소원들 빌며 그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모습을 비난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천주교인들은 두말할 필요 없이)이 같은 믿음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그들이 목석(木石)으로 더불어 간음한다고 반복적으로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렘 2:27; 겔 6:4 이하; 참조, 사 40:19-20, 합 2:18-19, 신 32:37).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매일같이 행해지고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나무나 돌로 만들어 놓고 육적으로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칼빈이 설명하고 있는 어거스틴의 지적은 매우 적확한 듯하다.

 

“어거스틴이 말하는 바, 형상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거나 예배하는 자 치고 우상이 자기의 기도를 듣는다고 생각하고, 또 그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소망을 갖지 않는 자는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칼빈은 인간의 본성에서 그 기원을 캐낸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물리적으로 그 임재를 나타내시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기원이며, … 천지 창조 이래로 거의 모든 세대에 걸쳐서 인간은 이러한 맹목적 욕구에 복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상징을 세우고, 이로써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이 나타났다고 믿어온 것이다.

 

이런 종류의 환상 뒤에는 곧바로 숭배가 뒤따르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일단 형상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생각하면 또한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마침내 그들의 눈과 마음을 그 형상에 고정시키고, 더욱 어리석어져서 그것들 속에 어떤 신적인 것이 실재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들에 대한 탄복에 압도되는 것이다. … 사실 그들은 우상을 신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 속에 신의 어떤 능력이 깃들어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이해에 만족하지 않고, 형상을 통하여 더 확실하고 더 밀접한 이해가 올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단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 사악한 모방이 마음에 들자, 곧 새로운 계교에 미혹되고, 하나님이 자신의 권능을 형상을 통해 나타내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더 나아가 우상 숭배를 지키지 않는 교인들을 파문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그 오류의 깊음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케 한다.

 

아모리 감독 데오도시우스는 형상 예배를 싫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파문을 선언했다.

-다른 어떤 이는 희랍과 동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재난은 형상을 예배하지 않은 죄의 대가라고 했다.

-키프러스 섬 콘스탄스의 감독 콘스탄티우스는 … 이를 거절하는 자를 모두 마니교파나 마르시온파와 동류로 선고하고 파문했다.

-동방교회 사절 요한은 … 형상 예배를 거부하는 것보다 차라리 도시 전체에 창녀들이 들어오도록 허용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마침내 그들은 모든 이단자들보다 사마리아 인들이 더 악하고, 또 우상 반대자들은 사마리아 인들보다 더 악하다는 결론을 만장일치로 내렸다.

 

  그럼 칼빈은 이러한 우상 숭배를 막을 방법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올바른 교리 교육이라고 한다. 진리에 의한 예방책이자 치유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교리를 바르게 그리고 충실하게 가르쳤다면 교회 안 여기저기에 세워진 나무, 돌, 은, 금으로 만든 수많은 십자가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갈 3:13) 자기의 몸을 드려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히 10:10), 그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계 1:5), 그리하여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 화목케 하신(롬 5:10) 사실을 충분히 가르쳤다면 말이다.

 

칼빈이 지적하듯이 이러한 우상 숭배의 오류는 사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도 맞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지하고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데에 완전하신 하나님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말이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    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이든지 만들지 말며’(출 20:4)

 


1) 여기서 편집자는 다음과 같은 주를 달았다. “11-12장은 하나님 예배에 관한 내용인데 삼위일체론, 창조론, 예정론의 훌륭한 서론이 된다. … 그러므로 진실되고 하나님께 용납될 만한 예배는 창조주에 대한 지식의 기본 요소가 된다.”

 

2) 이 오류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예로 생각해 본다. 우리가 주시해야 할 대상은 ‘달’인데, 그것을 지시하고 있는 ‘손가락’을 주시하기만 하기에 그렇다.

 

1-12. 우상의 문제

2014-03-17 16:41:21

 

칼빈은 우상의 문제를 예배의 차원에서 다룬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려면 우상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다른 우상과 구별되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 것을 절대로 다른 것에게 적용시켜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려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바르게 알아야 하고 그 분께 합당한 방식으로

예배하여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율법에서 합당한 예배의 규범을 정해 주셨다.

하나님은 자신이 거짓 신들과 혼동되는 것을 질투하시며 엄하게 갚으시는 분이심을 선언하신다.

한마디로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위엄에 합당하게 예배하여야 하는 것이다.

 거짓과 오류로 인하여 종교가 부패되고 왜곡되는 것은 모든 시대마다 동일하다.

칼빈은 특별히 우상의 문제가 신관의 문제임을 환기시킨다.

 

그러므로 

잘못된 신관을 가지고 예배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된다.

칼빈은 미신적 행위는 아주 은밀하고 교묘하다고 지적한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최고의 자리를 부여하지만 그 주위에 다른 저급한 신들을 세우고

그 신들에게 하나님의 기능을 분배함으로써 결국 온전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미신적 행위의 예로서 칼빈은 성인 숭배를 언급하는데 그것 역시 온전히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 우상숭배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칼빈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모시려면 그의 영광을 

티끌만큼이라도 우리가 취하거나 다른 것에 돌려서는 안됨을 기억하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에 중요한 두가지 요소를 보게되는데 하나는 바른 신관이고 다른 하나는

바른 예배 규범이다. 물론 이 두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계시하셨고 동시에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것인지도 가르치신 것이다.

 

 

3-11 칭의의 용어와 문제점

2014-10-08 16:58:35


칭의 교리의 개념

  칭의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그의 사랑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칭의는 죄는 씻는 일(the remission of sins)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일(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갈라디아 3장 8절, 로마서 3장 26절, 로마서 8장 33-34절에 언급된 "의롭게 하다"라는 말이 칭의와 관련되어 사용된 것인데 이는 고발을 당한 자의 죄책을 사면하여 그 사람의 무죄를 확인시킨다는 뜻 이외에 다른 뜻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중보로 우리를 의롭다하신다는 말은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킴으로 우리를 사면하신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스스로 의롭지 않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칭의는 일차적으로 죄를 사하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래서 로마서 4장은 먼저 칭의를 가리켜 의의 전가라 부르고 이어서 그것을 죄사함속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칭의는 죄사함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수단이다. 로마서 5장 21절은 화목하게 하다라는 단어가 의롭게 하다라는 의미를 분명히 나타낸다.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 의 오류를 반박함

  오시안더가 소개하는 본질적 의(essential righteousness)라는 개념은 칭의 교리를 오해하게 만든다.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적 죽음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질과 품성 모두를 주입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본질적으로 의로운 자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그리스도의 본질과 우리의 본질의 혼합을 주장하면서 우리가 중보자의 은혜로만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본질 속에서 우리와 연합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을 값없이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된다는 뜻만이 아니라 실제로 의롭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오시안더는 하나님이 사람을 의롭다하실 때에 그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고 그렇게 하시겠느냐는 논지를 편다. 이 논지는 쉽게 답변할 수 있다. 즉 태양의 빛과 열기를 분리시킬 수 없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는 상태로 우리가 지각하는 두가지 칭의와 성화는 서로 나눌 수 없다. 하나님은 값없이 의롭다하신 자들을 새롭게 하셔서 의를 배양하게 하신다. 그러나 태양의 열과 빛은  서로 분리되지는 않지만 구별되는 것이다. 오시안더는 이 두가지 은혜를 서로 혼동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셨다는 바울의 진술(고전 1:30)은 칭의가 성화와 다른 의미임을 분명히 시사한다. 

 

  나아가 오시안더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의가 되신 것은 그의 인성이 아니라 신성과 관계된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의가 되시는 일은 그가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 신성이 있지만 중보자라는 칭호는 아버지나 성령과 구별되이 그리스도만이 갖는 독특한 칭호이다. 따라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것은 그의 신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에게 부여된 직분의 본질에 따라서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그가 우리를 위해 제사장 직부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큰 임무는 사람이 절대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그가 이 모든 임무들을 그의 인성에 따라서 수행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면(로마서 5:19) 그가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심으로 순종하신 것 말고 하나님께 순종하실 다른 방법이 무엇이 있겠는가? 

 

  오시안더는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은 법적인 용어라고 가르치는 자들을 비웃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질적으로 의로워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가  값없는 전자를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을 경멸한다.  그러나 바울의 교훈을 보면(고후 5:19,21 ; 롬8:33 ; 로4"6-7) 사람이 본질적으로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전가 받아서 의롭운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가리켜 복되다고 인정한 것이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칭의의 은혜가 중생과 서로 구별되지만 (여기서 칼빈은 중생을 성화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과 분리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경험으로 알수 있듯이 칭의가 새생명으로 변화되는 것과는 매우 다를 수 밖에 없다. 중생은 삶의 전과정을 거쳐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시기 때문에 칭의의 은헤가 없다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심판대에 선다면 언제나 죽음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런 칭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누구라도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없다. 행위를 주목하면 믿음이 흔들리고 만다. 아무리 거룩한 사람도 자기 행위에서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시안더는 칭의와 중생을 이중적인 의(double righteousness)라는 용어로 뒤섞어 버리지만 로마서 8장 24절에서 바울의 고백은 이 둘이 구별된다는 것을 멋지게 표현한다. 오시안더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한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아주 장황하게 주장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의롭지 않은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의로운 생명으로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홀로 그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의 손을 통하여 그 일을 하신다는 사실이다.

 

칭의에 대한 스콜라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비판함

  사람들 가운데 의가 믿음과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행위로 말미암는 의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그 중 하나가 세위지면 다른 하나는 넘어지고 만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기 자신의 의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빌3:8-9 ; 롬 10:3)  믿음이 모든 자랑을 제거해 버린다면(롬 3:27)  행위로 말미암는 의는 절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연관이 없는 것이다.(롬4:2, 4) 은혜로 말미암는 의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행위의 공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왜곡하려는 어떤 궤변가들은(스콜라 신학자들)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고 또한 그 행위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물이요 중생의 열매인 경우에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서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의 대조에는 어떤 수식어를 붙이든지 간에 모든 행위가 제외된다는 사살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를 분명히 구별하여 가르친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능력이 믿음에 있다는 문제를 거론할 때 심지어 영적인 행위라 할지라도 거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믿음을 자기들의 공로에 대해 하나님이 상급을 주시기를 바라는 양심의 확신이라 부르고 또한 하나님이 값없이 의를 전가시켜주시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데 성령께서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면 롬바르드는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선행을 하도록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울법은 행위에 근거하여 의를 인정하고 복음은 행위와는 무관하게 값없이 의를 베풀어 준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래서 바울은 약속을 율법과 정반대에 놓고 둘을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격해야 할 의는 사람들이 자기 힘과 자유의지로 행하여 하나님께 뻔뻔스럽게 자랑하는 그런 의일 뿐이라고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율법은 믿음과 다르다고 한다. 왜냐하면 율법의 의는 행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믿음의 의는 행위를 요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바울이 여하한 모든 "행위"를 다 제외시키고 있다는 우리의 견해는 확고하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만 그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 역사하므로 결국 의롭다하심이 사랑 여부에 달려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다. 물론 우리도 바울과 미찬가지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만이 의롭다함을 얻게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의롭다함을 얻게하는 능력이 그 사랑의 역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 의롭다하는 능력이 있는 것은 그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의 교제속으로 이끌어 준다는데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만 죄사함을 얻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과의 화목이며 이 화목은 오직 죄 사함에 있다. 죄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으며 하나니의 의로서는 그 죄를 처리하지 않고 묵과할 수가 없다. 그리하며 주께서는 자기와 연합된 상태로 받아들이시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꾸어 놓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은혜의 상태로 받아드링거나 그와 연합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은 죄사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의롭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죄사함" 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바울은 의와 화목을 서로 구분하지 않고 말함으로써 이 둘이서로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이 의를 얻는 것은 우리의 죄가 우리에게 돌려지지 않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 말은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를 의롭다하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시도는 죄사함과 의를 서로 긴밀하게 연관지어서 그 둘이 서로 동일한 것임을 보여주며 또한 그 의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다고 말한다.

 

  이로써 분명해지는 것은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의 중보로 말미암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이 스스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하여 그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그가 의로운 것이란 말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을 함께 나누게 되고 그 영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식의 이해는 헛된 것이다. 우리의 의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의를 소유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마치 우리 자신의 순종처럼 우리의 것으로 돌려진 것이다. 

 

2-7 율법에 대하여

2015-01-03 20:15:21


   칼빈은 율법을 십계명뿐만 아니라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전수하신 신앙의 모든 형식으로 넓게 이해한다. 그래서 모세가 율법 제정자로 세워진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약속된 축복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통해 조상들에게 값없이 주어진 약속을 확인하고 유대인들이 바로 그 언약의 상속자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율법이 주어진 것은 택한 백성들이 그리스도로 부터 멀어지게 만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마음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리스도를 찾기 위한 참되고도 유일한 준비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정죄받은 처지를 납득하고 자신을 완전히 낮추는 것인데 율법이 바로 이런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가 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으니 결국 율법을 통하여 사람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더 잘 알게되고 오로지 절박한 죽음만울 깨닫게 된다는 의미이다.

  칼빈은 율법의 첫번째 기능으로 정죄하는 기능을 언급한다. 율법 특히 도덕법에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남으로써 각 사람에게 자신의 불의에 대해 경계하고 알리고 깨우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율법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부패한 본성이다. 율법은 의롭고 신령하지만 사람의 부패한 본성이 하나님의 신령한 법에 대적하기 때문에 본래 구원을 위하여 주어진 율법이 죄와 사망을 이루는 것으로 바뀌어지고 만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의 정죄하는 기능이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율법의 정죄는 우리를 심판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의지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고 기다리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율법의 두번째 기능은 범죄자들에게 율법에  부가된 형벌의 두려움을 갖게하여 그들을 억제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억제는 강압적인 것이지만 공공사회를 위하여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율법의 이런 두가지 기능은 모두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율법의 세번째 기능은 성령이 그 마음에 거하시고 다스리시는 신자들과 관련된 것인데 칼빈은 율법의 세번째 기능이 율법의 가장 주된 기능이고 율법의 고유한 목적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말한다. 성령을 통해서 신자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사모하는 상태에 있는데 율법은 그들이 사모하는 바 주의 뜻의 본질을 배우고 또 그 뜻을 깨닫고 있음을 확인해주는데 최고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율법을 묵상하여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깨움을 받으며 돌이킴을 받으므로 율법을 통해서 발전하고 전진을 계속하게 된다고 말한다. 칼빈은 일부 무지한 자들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내 던지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만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운 모범이 율법에 제시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바르고 정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율법에서 떠나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칼빈은 신자들에게는 이제 율법은 엄격한 재판관처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완전한 삶을 권고함으로써 우리기 열심히 지향하여야 할 목표를 제시해준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칼빈은 율법의 첫째, 둘째 기능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이고 세번째 기능은 그리스도께 인도된 신자들의 규범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고 세번째 기능이 율법의 가장 주된 기능이고 율법의 고유한 목적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첫째 둘째 기능은 율법의 본래의 목적이나 고유한 기능이라기 보다는 사람의 부패한 본성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율법이 도리어 정죄하는 것으로  변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구약의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의미는 율법이 신자들에게 무엇이 옳바른가를 명령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의 정죄하는 기능이 사라졌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신자들에게 율법의 첫번째 두번깨 기능이 사라졌다는 의미이지 율법의 고유하고 본래적인 기능인 세번째 기능은 사라지거나 폐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의식법들은 그 효과는 폐지되지 않았지만 그 사용은 폐지되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 의식들의 사용을 폐지하였고 또 그 의식들의 효력을 확증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의식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으므로 폐지가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