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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개혁교의학(1/3)- 헤르만 바빙크

바빙크 개혁교의학 목차

2014-09-19 18:44:20


서론편

1장 교의학의 명칭 및 개념

2장 교의학의 백과사전적 위치

3장 교의학의 방법론

4장 교의학의 구성

5장 교의학의 역사와 문헌

 

원리편

(1부 일반 원리)

6장 원리의 의미

7장 학문의 원리들

8장 종교의 원리들

(2부 외적 원리)

9장 계시의 본질과 개념

10장 일반 계시

11장 특별 계시

12장 계시와 자연

13장 계시와 성경

14장 성경의 신적 영감

15장 성경의 속성들

(3부 내적 원리)

16장 내적 원리의 의미

17장 역사 변증적 방법

18장 사변적 방법

19장 종교 경험적 방법

20장 윤리 심리학적 방법

21장 신앙

22장 신앙의 근거

23장 신앙과 신학

 

교리편

(4부 하나님)

24장 하나님의 불가해성

25장 하나님의 가지성(선천적 신 지식)

26장 하나님의 가지성(획득된 신 지식)

27장 하나님의 이름들

28장 하나님의 이름들의 분류

29장 하나님의 호칭들

30장 비공유적 속성들

31장 공유적 속성들

32장 거룩한 삼위일체

33장 하나님의 경륜

(5부 원래 상태의 세계)

34장 창조

35장 영적 세계

36장 물질적 세계

37장 인간의 기원

38장 인간의 본질

39장 인간의 목적

40장 섭리

(6부 타락한 상태의 세계)

41장 죄의 기원

42장 죄의 확산

43장 죄의 본질과 영향

44장 죄의 형벌

(7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45장 은혜언약

46장 그리스도의 인격

47장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사역

48장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사역

(8부 언약의 유익들)

49장 구원의 서정

50장 소명과 중생

51장 믿음과 회심

52장 칭의

53장 성화와 견인

(9부 교회)

54장 교회의 본질

55장 교회의 통치

56장 교회의 권세

(10부 은혜의 방편들)

57장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말씀

58장 성례들

59장 세례

60장 성찬

(11부 종말)

61장 중간 상태

62장 그리스도의 재림

63장 세상의 완성

1장 교의학의 개념

2014-03-17 17:34:03


종교개혁은 성경에 있는 오직 하나님의 권위 위에 있는 것 외에 어떤 진리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모든 신학적 도그마들이 귀착되는 원리는 ‘하나님이 가라사대’이다.

 

하나님이 인식될 수 없고, 스스로 계시하지 않았거나, 친히 자신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교의학과 신학뿐만 아니라 종교는 몰락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하나님의 지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식될 수 있으려면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행위로 뿐만 아니라 언어로 계시해야 한다. 이 계시 안에 하나님의 지식이 객관적 의미에서 파악되고 있는 것처럼 똑같이 그것은 신학 특별히 교의학의 대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그의 말씀 안에서 계시하셨던 그 지식의 자국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신학과 교의학은 주님의 뜻 때문에 존재한다.

2장 교의학의 위치

2014-03-17 17:33:31


신학적 진리는 그 자신의 힘 곧 계시로부터 이끌어질 때, 자신을 그 자체로부터 그리고 그 자체를 통하여 존립하고 그 확립을 위해서 철학적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변증학은 교의학을 선행할 수 없고 선행해서도 안 되며, 도그마에 속하여 해답을 얻고 이 도그마를 모든 논쟁으로부터 보존하고 옹호하는 영광스러운 과업을 받는다.

 

교의학은 인간을 위한, 인간과 관계해서 그리고 인간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묘사요, 윤리학은 새 사람이 하나님의 행위의 근거 위에서 그리고 그것에 힘입어 지금 행하는 행위를 묘사한 것이다. 교의학에서는 인간이 수동적이고 받으며 믿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학에서는 그 스스로 행위를 계속한다.

 

교의학은 하나님이 무엇이고, 인간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셨으며,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그의 창조자로, 구주로, 성화시키는 자로 알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개시키고, 윤리학은 인간이 지금 무엇이고,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며, 인간이 전적으로 오성과 의지와 힘을 다하여 감사와 사랑으로부터 어떻게 하나님께 헌신할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교의학은 하나님 지식의 체계요, 윤리학은 하나님 섬김의 체계이다.

3장 교의학의 방법

2014-03-17 17:32:43


도그마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하여 가르쳐 주었던 것이지, 철학을 통하여 고안해 낸 것이 아니었다. 성경은 믿음의 규범이다.

 

성경은 충만한 모든 신적 진리, 즉 만세 전에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었고 세계의 창조와 보존이 그 안에 기초하고 있으며 죄에도 불구하고 타락 후 지금도 세계 안에서 자신의 내적인 신적 능력을 통하여 현실화되고 있는 진리를 내포한다는 것이다.

 

교의학의 의무는 첫째로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지식의 마지막 물음을 묻는 것이 합리적이고 필연적임을 증명하는 것이고, 둘째로 기독교 신앙의 마지막 물음에 관련하여 어떤 지식이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가를 가리키며, 셋째로 신앙의 명제들은 공인된 과학적 결과들과 모순되지 않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 계시 안에서, 그것을 자세히 발견할 수 있는 곳에서, 교회 안에서, 성경 안에서, 기독교가 기초로 두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기독교 교의학은 자신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

 

교의학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생각을 표현하는 이외에 다른 것에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교회 안에서 (신앙)고백은 교회의 합의로서, 교회 공동체의 신앙의 표현으로서 권위를 갖지만, 그들의 고백을 믿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근거에 의해서만이다.

 

교의학은 종교적 영역에서 무엇이 진리로서 타당하지 않고 무엇이 진리로서 타당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 즉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고, 신조학은 교회의 고백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신학의 유일한 원리로서 성경론만이 순수히 종교개혁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이다.

 

교의학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학자들의 사고하는 의식을 통하여 수용되고 묘사된 성경에 대한 진리이다.

 

성경론이란 객관적인 계시가 주관적인 조명 안에서 완성된다. 개혁주의 성경론은 성령의 증거론과 아주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외적 말씀은 우리 밖에 있지만, 신앙을 통하여 내적 말씀이 된다. 성경을 주신 성령이 역시 신자들의 마음에 성경에 대한 증거를 주신다.

 

4장 교의학의 구분

2014-03-17 17:32:11


계시 곧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는 것은 신앙의 열매요 행위이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성경으로부터와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신약만이 아니라, 역시 예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 온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의학의 내용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말씀을 통하여 계시하셨던 대로 하나님의 지식이다.

 

교의학 안에서는 항상 신자 즉 그리스도인은 말씀 위에 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사변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추상적·철학적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며, 자연신학을 통하여 계시신학에 이르지 않는다.

 

교의학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던 대로 하나님의 지식의 체계이다.

 

교의학은 결코 무미건조한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정론이요, 하나님의 모든 덕과 완전성에 대한 찬양이며, 열납과 감사의 노래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안에서의 영광이다.

5장 교의학 역사와 문헌

2014-03-17 17:31:46


교황의 무오성이 성경과 전통의 무오성을 따돌리고 있다. 경쟁은 전자가 후자를 점� 더 궁지에 몰거나 혹은 후자를 천천히 이름만 남기게 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교황이 계시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역시 어떤 것이 계시의 내용임을 결정한다.

 

예수가 참되게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리고 성령으로 잉태되지 않고 부활하여 승천하지 않았다면, 동시에 그 근원적 복음에 내포하지 않았다면, 어떤 교회도 그것을 신적인 진리로 선포하고 인간의 양심에게 추천할 만한 자격이나 권리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성령)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것, 역시 그의 진리의 지혜의 충만한 것이 교회 안에 거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충만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으신다.

 

기독교는 인간적인 탐구와 성찰의 열매가 아니었고, 계시의 열매였다. 그 때문에 처음에 신앙이 요구되었다. 사람들은 구두와 기록으로 주어진 사도들의 교훈들을 가능한 한 수용하고 묘사하고자 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긍정적이고 절대적인 내용이 결여되어 있어서 교회를 통하여 거절되었지만, 변증가들은 그것들이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인정되었다. 전자(영지주의자들)는 다양한 철학들을 기독교에서도 받아들이는 어떤 종교적인 과정으로 생각하였고, 후자(변증가들)는 그것들을 인식하고 수용하였던 그리스도적인 종교가 옛부터 내려온 모든 진리들의 요소들을 자체 안에서 합병한 최고의 진리요 철학임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하나님은 옛부터 로고스(말씀)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였고 이방인에게도 진리의 지식을 전하였으나, 그러나 특별히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하셨다. 그 안에서 모든 옛 진리가 확증되었고 완성되었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신성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가 되셨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였으나 성부와 성자를 동일시하였으며, 역시 성부고난주의에 이르렀다. … (이 견해와 주장은) 히폴리투스,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 디오니시우스, 유세비우스 등에 의해서 강하게 논박되었다.

 

313년 관용칙령(고대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이 교회에 평화와 안식을 선물하자, 곧 바로 신망과 명예가 뒤따랐다. … 그러나 외부로부터 오는 대적들이 극복되었을 때, 안으로부터 대적자들이 발생하였다. … 4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기간은 거의 전부 기독론적인 싸움으로 이어졌다.

 

하나님은 완전한 진리요 존재와 선과 미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 분 안에서만이 인간과 그의 사유와 의지에 대한 안식이 있다. … 하나님은 영혼들의 태양이시다. 우리는 그의 빛 안에서와 그 빛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진리도 볼 수 없고 인지할 수 없다.

 

교의들이 단순하고 명제적인 형식으로 제시되는 실증신학과는 구별되게 스콜라 신학은 교의적인 자료가 어떤 과학적이고 학교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 따라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 스콜라 신학은 그것의 원리로서의 이 교의들로부터 출발하고, 그로부터 출발하여 추론을 통하여 교의들의 연합을 찾고자 하며, 더 깊이 계시된 진리에로 파고 들어가 모든 반론으로부터 그것들을 변호하고 있어서 매우 부진한 상태에 있었다. … 믿음이 스콜라주의의 출발점이었다. 사람들은 교의적 자료를 성경과 전통에서 찾았고,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였다. 그것에 있어서 종종 많은 것이 정당하게 성경으로부터 기원하지 않았다.

 

칸트가 순수이성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을 통하여 교의학의 합리적 기초를 전적으로 깎아내린 첫 사람이었다. … 순수이성을 통하여 잃어버렸던 것을 실천이성을 통하여 회복하려고 하였다. 무조건적 명령, 도덕적 의식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 자유, 불멸성을 가정할 수 있는 근거를 주었다. 교의학은 도덕에 기초하게 되었고, 종교는 덕을 위한 수단이 되었으며,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비상수단이 되었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서 종교는 감정이다. … 하나님은 그에게 세계의 통일성이지, 사고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고는 항상 모순대당(矛盾對當, 한쪽이 참이면 다른 쪽은 반드시 거짓이고, 한쪽이 거짓일 때 다른 쪽은 반드시 참인 관계) 속에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만 감정 안에서 향유할 수 있다. 그리고, 감정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향유하는 것이 종교다.

 

개혁주의 그리스도인은 신론적으로 생각하고, 반면 루터주의 그리스도인은 인간론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자는 역사 안에 서서 머물지 아니하고 이념 즉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에까지 끌어 올라간다는 것이요, 루터주의자는 그 입장들을 구원사의 중심에서 취하고 더 깊이 하나님의 성정에까지 꿰뚫고 들어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의 경우 선택이 교회의 핵심이고, 루터주의자들의 경우 칭의가 교회의 항존적이고 항상 출발하는 조항이다. 전자의 경우 첫째 되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에 이르시느냐에 있고, 그와 대조적으로 후자의 경우 어떻게 인간이 축복에 이르느냐에 있다.

 

개혁주의자는 그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결정에 되돌리고 물(物)의 원인을 추적하여 앞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유익되게 하기 전에는 쉬지 않는 반면에, 루터주의자는 현상에 만족하고 그가 신앙을 통하여 부여받은 축복에 안락하는 자들이다.

 

개혁주의 교의학의 역사는 루터주의 교의학 역사보다 묘사하기가 아주 어렵다. 개혁주의 교회는 어느 한 지역 한 민족에 제한되지 않고, 다양한 땅에서 다양한 민족들 아래 퍼져왔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형(形)은 하나의 신앙고백 안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신앙고백들에서 표현되었다.

 

칼빈은 모든 철학적이고 인문주의적인 이념들을 청산하고 가능한 한 엄밀하게 성경과 결합시켰다. 무엇보다도 그가 기꺼이 주장한 것은 그리스도적인 종교의 객관성, 하나님의 언약,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성경, 교회와 성례에 관한 객관성을 주장하였고, 따라서 강하게 재세례파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 그의 사상에 통일성과 체계를 이룩하였는데, 루터나 쯔빙글 리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칼빈과 불링거의 신학 사이에는 단 하나도 사실적인 차이는 없고, 다만 형식적이고 방법론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사이의 차이요, 엄밀한 신학적 출발과 언약론적인 출발 사이의 차이이다.

 

미국에서도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은 진지한 위기에 들어선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 삼위일체, 인간의 타락과 무능력, 제한된 구속, 선택과 유기,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의들은 은밀히 부정되거나 역시 공공연히 거절되고 있다.

 

6장 근본원리의 의미

2014-03-17 17:31:06


트뢸치가 종교철학을 교의학의 기초로 두려고 했을 때, 이것은 그럴 것 같다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궁극적으로는 결코 기독교 교의학을 제시 못하는 것이다. 처음 교의학의 기초를 놓아야 하고 그것의 권리를 옹호해야 하는 철학적 원리론을 위한 자리가 참으로 없다. …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다르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은 그의 계시로부터 우리에게 이르고, 우리가 우리 편에서 신실하고 어린애와 같은 신앙을 통하지 않고는 이 계시의 내용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가리키고 있다. 다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왕국을 본다.

 

계시가 하나님의 지식의 유일한 샘이고 영적 인간은 다만 영적인 것들을 인식하고 구별할 수 있다는 교리는 그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도그마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하나님의 지식도 가능하지 않다(마 11:2; 고전 2:10 이하).

 

우리가 유일한 의미에서 배워 알 수 있도록 그가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현현과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보여주셔야 한다.

 

그는 절대적 의미에서 본질적인 원리요, 우리의 신지식의 근원적 요인이다. 왜냐하면, 그는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자의식적이고 참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자의식 없이는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의 지식이 없다. 범신론은 신학의 죽음이다. … 우리의 신지식의 본질적인 원리는 스스로 자유롭게 의식적으로 그리고 참되게 계시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의 지식은 오직 그의 계시로부터 우리에게 흘러내린다. … 계시는 다만 그의 나타남이요, 말씀이요, 행위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인식 원리는 그의 피조물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거나 자기 전달이다.

 

신학의 목적은 이성적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잠 16:4; 롬 11:36; 고전 8:6; 골 3:17)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목적은 그의 지식을 인간 밖에서 영광과 영예를 돌리는 것이다. … 그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 밖에서, 인간 앞에서, 인간과 더불어 종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이다.

 

내적인 말씀이 원리적 말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식을 인간 안에 가져오기 때문이요, 그것이 모든 신학의 목적이며, 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 원리를 알도록 가르치고 있다. 처음에는 신학의 본질 원리로서 하나님이, 그 다음이 그것이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는 이상 기구적이고 시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 곧 외적 인식 원리이다. 마지막으로, 내적인 인식 원리인 하나님의 영을 통한 사람의 조명이다.

 

7장 학문의 근본원리

2014-03-17 17:30:39


어떤 시대든 서로 정반대에 있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라는 두 경향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그리스 철학(그리스 철학은 일반적으로 같은 것은 같은 것을 통하여서만 인식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에서 일어났었다.

 

과학은 밖으로부터 오지 않고 인간 정신의 산물이다. … 과학은 가상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물(物)의 본질에 관한 지식이다.

 

우리는 본성으로부터 실재주의자들이고, 관념론자 자신들도 실천에 있어서는 실재주의자들이다. 사실 관념론은 삶과 경험과 직접 충돌하고 있는 탁상학문의 사실이요 견해이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우리 손으로 준비하지만, 그 재료는 우리 밖의 자연으로부터 가져오는 것처럼, 우리는 지성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자료를 받는다.

 

합리주의는 객관적인 세계를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인간의 정신에 따르도록 할지라도, 경험주의는 의식을 전체적으로 완전히 우리 밖의 세계에 종속시키고 있다.

 

사물의 원인과 목적, 근원과 결정은 우리 밖에서 얻게 된다. 사물들의 상호관계, 연속과 유사의 매우 귀중한 관계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다.

 

과학의 목적은 사람들이 세계 해명을 준다는 데 있지 않고, 우리가 그것에 따라 우리의 생을 구축할 수 있고 거기에서 실제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현실성에 대한 많은 지식을 향하여 스스로 연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의 원인과 본질, 그들의 목적과 종국을 통찰할 때, 우리가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 왜를 알고 사물의 원인들을 분별할 때, 비로소 과학이 존재한다.

 

인간은 오성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하고자 하고 느끼는 존재들이다. 그는 결코 사고 기계가 아니라, 그의 머리에 역시 마음, 지각들과 감정들의 세계들을 갖는다.

 

인식론의 출발점은 습관적이고 일상적 경험, 곧 그의 지식의 객관성과 진리와 관련하여 인간의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확실성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지력과 지식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금 해명하고자 노력한다.

 

터툴리안이 바르게 말한 대로 철학자나 시인보다 인간이 선행한다. 첫째는 사는 것이고, 그 다음이 철학하는 것이다.

 

자연적인 확실성이 과학의 절대 필요한 기초이다.

 

지식 능력에 대한 이론의 차이와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차이는 다음 두 가지 안에 있다. 첫째로 고유한 지성에 대한 독특한 견해에 있고, 둘째로 이런 지성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하면서도 지각된 것으로부터 논리적인 것 즉 본성으로부터 물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추론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행하지 않는다. 합리주의는 스스로 지향하는 것이 참된 것으로 사물들을 강요하고,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형식들 속에서 그들을 압박하거나 거기에 적응을 압박하며, 세계를 몇 가지 개념들에 따라 구성하고 있다. 경험주의는 스스로 지각적 세계를 향하도록 영혼을 강요하고, 상상적인 비상(飛翔)에는 자신을 무력하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그 자신을 소여로부터 설명한다.

 

인간에 있어서 모든 지식의 출발점은 감각적인 지각이다. 이성은 지각을 통하지 않고 외부적인 존재를 알지 못한다. 모든 지성적인 인식은 지각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의 지성은 표상들 없이는 아무 것도 인지하지 못한다.

 

직관은 모든 엄밀한 과학의 원천이다.

 

과학적 지식은 지각 기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영혼들의 태양이라는 이런 그림을 전용하였다. … 태양이 그 빛을 분산하지 않으면 우리가 육체적 눈을 가지고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지식의 태양인 하나님의 빛 밖에서 결코 진리를 볼 수 없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그로부터, 그리고 그를 통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비추고 그 앞에 만물을 이해할 수 있게 조명하는 이해의 빛이시다.

 

그의 신적 의식으로부터 진리의 지식을 피조물들을 통하여 우리 영혼 안에 들어오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8장 종교의 근본원리

2014-03-17 17:30:04


종교에 있어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길 것을 하나님 자신이 원하시고 명백히 하였던 방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痼甄�. 따라서 그에게 우선에 있는 것이 그의 율법의 첫째 돌판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유지하시는 의무다.

 

주관적 종교(섬김, 경배 / 성령으로부터 부어진 덕)는 무엇보다도 객관적 종교(하나님의 계시)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행동으로 옮겨진 인간 안에 있는 확실한 소양(素養)이다. 그러한 소양은 모든 인간 안에 있다. 종교의 씨가 모든 이들 안에 주어져 있다. 그러나 이런 소양은 타락한 인간 안에 부패되고 참되지 않고 불확실한 객관적 종교로 말미암아 수태되어 역시 우상숭배인 하나의 예식을 낳고 있다.

 

인간은 피조물일 뿐 아니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피조물이다. … 인간이 하나님과의 서 있는 완전한 의존성은 자유를 배제하지 않는다.

 

믿음 안에는 다음 두 가지 요소들이 함축되어 있다. 즉, 첫째로 인간은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대해서 전적으로 수용적이고 완전히 하나님께 의존적이라는 것, 둘째로 그가 바로 이런 의존의 인식을 통하여 은총으로부터 용서와 양자됨과 축복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 있는 이런 주관적 종교의 유사성이 다른 종교 안에도 확실히 존재하지만, 인간과 하나님의 주관적 관계는 다만 기독교 안에서만 완전히 정상적이다.

 

죄를 통하여 부패된 주관적 종교, 종교의 소양으로부터 중생은 바로 신자들이 하나님의 몇 가지 계명들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따라 완전하게 살도록 진실된 기쁨을 받는데 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그들의 양식이다. …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공로로부터 돌이켜 다시 그의 본질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의 뜻이나 객관적인 종교가 그 안에 기록된 율법과 일치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그를 중생시킨다.

 

참된 종교는 한편으로 창조주로서 구주로서 성결케 하는 분으로서 하나님께 의존하는 그 절대적 의존성의 깊은 의미에서 뿌리를 박고 있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모든 규정에 따라 정직함 가운데 행하며 나아가는 그런 인간의 성향 안에 존재한다.

 

계시 없는 종교는 없다. 성경도 역시 주관적 종교를 계시로부터 이끌어 내고 있다(히 1:1).

 

인간은 그가 알지 못하거나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만 무관심하다. …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무관심할 것이 없다.

 

과학을 통하여 그는 그의 종교적인 욕구를 결코 만족시키지 못한다. 과학이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가 어떻다는 것에 불과하다. 오직 종교를 통하여 그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고, 그의 성부라는 사실을 안다. 과학은 그에게 죄란 것이 있고, 은총이란 것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를 통해서만 그는 용서의 축복과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 과학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주는 것은 이론적인 지식에 불과하며, 구원의 유업에 대한 인격적인 참여를 주는 것이 아니다. 구원적 축복은 지식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믿음과 결합되어 있다. … 참으로 과학은 하나님이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심리적인 방법이 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지 않고, 외부로부터 자연의 확실한 결합을 통하여 자연의 영향 하에 종교를 발생케 하는 인간의 요소들로부터 종교가 설명된다는 것이다. … 심리학적인 방법은 사실 하나님의 존재 없이 종교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 종교의 본질과 근원은 역사적 방법과 심리적 방법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다. 거기에서는 그것의 정당성과 가치가 주장될 수 없다. 하나님 없이 종교를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종교는 그 본질과 근원에 있어서 계시의 산물이다. …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시작한다. … 계시는 종교의 외적 인식원리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합리적인 피조물들을 통하여 섬겨지기를 원하실 때 종교가 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말씀과 행위 속에서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고 있다. 그것이 외적인 인식원리이다. 그리고,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그에게 주관적으로 자격을 갖추게 한 것이 바로 내적 인식원리이다.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그리고 주관적으로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는 것 밖에서 종교는 없다.

 

9장 계시의 본질

2014-03-17 17:29:19


종교 속에서 인간은 항상 구원을 추구하고 있다. 종교에서 가장 큰 물음은 항상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이다. 인간은 종교 속에서 어떤 관능이나 쾌락, 어떤 과학이나 예술, 어떤 인간이나 천사, 전세계라도 그에게 선물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찾고 있다.

 

교의학의 내용을 이루는 모든 종교적 표상들은 세 가지 중심점을 중심으로 한다. 즉,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에 관한 교리, 그리고 두 가지 의미에서 즉 그 관계가 사실적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존재해야 한다는 것, 경험적 의미와 관념적 의미에서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과 보존을 위한 수단들에 대한 교리를 포함한다. 따라서 신학은 인간론과 구원론을 총괄하고 있다.

 

계시에 대한 이신론의 위험은 … 첫째로 계시로서 행사하였던 어떤 것이 권리와 진리에 따라 이것을 행하였는지를 조사하고 결성할 수 있는 권리를 계시 밖에 독립적인 자리를 얻었던 이성에게 부여하였다. 둘째로 계시의 내용에 대해서도 판단할 수 있는 힘을 점점 더 이성이 얻었다. 왜냐하면 계시는 이성과 충동할 수 없고 이성 안에 원리적으로 그리고 잠재적으로 있고, 따라서 역시 이성을 통하여 판단될 수 있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 셋째로 계시는, 현실적으로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 한, 곧 바로 어떤 것으로 즉 더 많은 권위를 가지고 그리고 넓은 영역에서 이성이 스스로에게 맡겨 오랜 기간 동안 그리고 더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신의 수단들로부터 발견할 수 있었던 그와 같은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신론과 현대 유신론은 똑같이 어떤 일반적인 계시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진지함을 보이나, 그것은 그의 입지를 유지할 수 없고 전진하거나 후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인격적이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분은 결코 의식 없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항상 생각하여 행하고 모든 것에 있어서 어떤 목적을 갖는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때 계시는 결코 무의식적인 감화력이나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있는 부지불식간의 하나님의 반투영이 아니라, 항상 자유롭고 도덕적이며 능동적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다양한 태도들에서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시는 방식들과 형식들도 다양할 수 있다.

 

계시란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신학적 개념이다. 과학은 계시가 무엇이고 그것에 어떤 사실이 대응하고 있는지를 미리 말할 수 없다. 그때 그것은 월권을 행사할 것이고, 종교에 대항하여 가장 큰 편파성에 책임이 있게 된다.

 

10장 일반계시

2014-03-17 17:28:37


종교개혁자들은 자연 속에 하나님의 계시를 가정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그의 총명에 있어서 그렇게 부패되어 역시 이런 계시를 정당하게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두 가지는 필연적이다. 즉, 하나님께서 본래적으로 자연으로부터 인식할 수 있는 진리들을 다시 역시 특별 계시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 필연적이고,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다시 자연 속에서 관찰하기 위해서 처음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조명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모든 계시는 근원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것이다. … 외부를 향한 하나님의 사역은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 창조가 하나님의 첫 계시오, 모든 충만한 계시의 시작이요 기초이다. 계시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창조의 계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직접적인 계시는 없다. 자연 속에도 없고, 은혜 속에도 없다. 하나님은 항상 피조물로부터 취하여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수단을 사용하신다. 표적과 싱징들을 통하여 주께서 그의 덕들을 선포한다. 말과 언어를 통하여 주께서 그들에게 그의 뜻과 사상을 알리신다. 주께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의식 속에 계시하실 때조차도, 항상 이 계시는 유기적으로 일어나고, 따라서 간접적인 수단에 따라 일어난다. … 모든 계시는 신인동형주의요, 하나님의 어떤 방식의 인간화이다.

 

주는 민족들과 사람들의 역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주님은 역시 각 사람의 마음과 양심 속에서도 자신을 계시하신다.

 

일반계시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에게 불충분하다. … 일반계시가 전달할 수 있는 지식은 미미하고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계속 오류로 혼합되었고 단연 대부분 인간이 도달할 수 없다. … 자연 계시의 불완전성이 어떤 단 하나의 민족도 소위 자연종교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명백히 나타났다.

 

기독교는 참된 종교이고, 그 때문에 역시 가장 높고 순수한 종교이며, 그것이 모든 종교들의 진리이다.

 

아무도 일반계시의 힘을 피할 수 없다. 종교는 인간이 본질에 속해 있다. … 일반 계시는 특별 계시가 그 위에 올려지는 기초이다. … 일반 계시의 풍부한 의미는 그것이 자연과 은혜, 창조와 재창조, 현실성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를 서로 깨뜨릴 수 없는 결합을 유지시킨다는 것에 나타나고 있다. 일반 계시 없이는 특별 계시는 전우주적인 존재와 생명과의 결합을 잃는다. 그 때 자연의 왕국과 하늘의 왕국은 서로 결합하는 고리를 상실한다.

 

일반 계시가 자연과 은혜, 세상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 자연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 창조와 재창조, 물질세계와 윤리, 덕과 행복, 성화와 축복의 통일성, 그리고 이 모든 것 안에 신적 본질의 통일성을 보존한다. 일반 계시에서 어떤 이에게도 빈틈없이 행하시고, 특별 계시에서 은혜의 하나님으로서 인식하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요, 같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는 서로 함께 역사한다. … 자연이 은혜에 선행하고, 은혜가 자연을 완성한다.

11장 특별계시

2014-03-17 17:27:50


성경은 특별 계시의 책이다.

 

“계시”는 어떤 것이 감추어지는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고, “현현”은 사실 자체가 계시되게 하는 것이다. “현현”은 항상 객관적인 계시에 대하여, “계시”는 객관적인 계시와 주관적인 계시 모두에 대해서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그의 말씀들을 통하여 뿐만 아니라, 그의 역사들을 통하여 계시하신다. 말씀과 행위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행위요(시 33:9), 그의 행위가 말씀이다(시 19:2; 29:3; 사 28:26).

 

표적이나 이적은 그 자체로서 어떤 예언의 징표를 위해서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적들을 행하는 분은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뿐이다. … 역사 안에 나타난 이적들은 무신론자들에게 진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과 치유를 행하기 위해서, 선지자들의 말씀의 진리와 역시 그들의 증거에 대한 신앙을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그(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원의 성취, 부활과 승천은 하나님의 커다란 구원적 행위이다. … 이런 구원의 사실들은 어떤 것을 계시하기 위한 수단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 자체이다. …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하나님의 중심적 계시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알도록 하는 계시는 … 역사적이고 유기적인 전체요, 하나님의 증거들과 행위들의 세계를 지배하고 세계를 새롭게 하는 체계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영화롭게 하여야 하는 것이 항상 계시의 목적이다. … 계시의 목적은 인간을 가르치고 그의 오성을 조명할 뿐만 아니라(합리주의), 그에게 덕들을 실천하도록 하고(도덕주의), 그 안에서 종교적 감정들을 일깨우기 위해서 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임하는 특별 계시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그의 타락한 피조물에 얼마나 깊이 비하(卑下)하실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

 

특별 계시는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의 찾으심이요, 인간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가까이 오심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그 모든 영역에 빛을 비추는 특별 계시의 중심적인 사실이다. 이미 창조 시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의 형상으로 창조하실 때 친히 인간으로 자신을 닮게 하셨다. 그러나, 재창조 시 그 분은 인간이 되셨고, 전적으로 우리의 본성과 우리의 상태로 들어오셨다.

 

죄가 모든 것을 즉 오성과 의지, 윤리적, 물질적인 세계를 부패시켰고 황폐케 하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게 중요한 것은 전인류와 전우주의 구원과 회복인 것이다.

 

특별 계시의 새로운 구성적인 요소들이 지금은 더 이상 첨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살아계시고, 그의 사역은 성취되었으며, 그의 말씀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계시는 말씀과 행위를 포함할지라도, 성령의 활동은 인간의 의식과 존재에로 향하도록 해야 하고, 따라서 동시에 오성의 조명과 마음의 새롭게 함에 있어야 한다. 객관적인 계시는 전인의 재창조에 목적을 두고, 따라서 전인간을 통하여 받아들이고 전유(全癒, 온전히 낫다)되어야 한다.

 

일반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연과 역사의 수단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특별히 전능과 지혜, 진노와 선에 대한 그의 은택들 안에서 타락한 인간에게 알리게 하시는 것인데, 이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그의 법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되, 그렇지 않고 그것이 없어도 죄 없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식되고 자유로운 행위이시다. … 특별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집중되어 있는 특별한 수단들(신현, 예언과 이적)의 전체 역사의 길에서 특별히 의와 은혜의 그의 은택들 안에서, 율법과 복음의 선포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이런 특별 계시의 빛 아래 사는, 이 같은 인간에게 알리게 하시는 것인데,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함이되, 회심하지 않을 경우에 무거운 심판을 받는 하나님의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하나님의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일반 계시를 통하여 계속 모든 인간들에게 알리시는 것처럼, 역시 성경을 통하여 매일 특별한 방식으로 복음 아래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계시하시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객관적이고 특별한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었다. 그의 재림에서 인류의 역사에 그 영향은 끝마쳐진다.

12장 계시와 자연

2014-03-17 17:27:12


초자연적인 것은 피조된 자연의 힘들을 뛰어넘고, 자신의 원인이 피조물들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전능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자연적인 것에 세속적이고, 불결하며, 귀신적인 것이라는 낙인을 찍고 있다.

 

계시와 창조는 그 자체에 있어서 거의 대립이 아니었고, 오히려 창조 자체가 이미 계시가 되고 있다. 계시는 타락 전에도 이미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자연과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모든 사역들 안에도 계시는 있다. 그의 영원한 힘과 신성이 피조물을 통하여 이해되고 꿰뚫어 보여진다.

 

성경의 계시 안에서는 말씀과 사실, 예언과 이적이 항상 곁에 뒤따른다.

 

진화론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없다. 무(無)는 무로부터 생기지 않는다.

 

계시는 영원히 그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 인간에게 오신 하나님의 임재이다.

13장 계시와 성경

2014-03-17 17:26:30


계시는 기독교에 있어서 하나의 역사이다. … 역사는 하나님의 사상의 현실화요, 하나님의 작정이 그의 피조물들에게 미친 영향이다.

 

계시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 계시의 목적이 그리스도는 아니다. 그리스도는 중심이며, 수단이다. 목적은 하나님이 다시 그의 피조물 안에 거하시고, 우주 안에 그의 영광을 계시하는 것이다.

 

신의 감동을 부정하고 기록을 무시하는 자는 역시 아주 큰 범위로 계시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는 인간적인 기록 이외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다. … 성경의 무시나 버림은 계시에 관련한 인간적인 증거의 관점에서 무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 행위에 대한 부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계시가 주어졌을 때, 그 안에서 신현, 예언과 이적은 그 최고점에 도달하였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고, 그 후 바로 기록의 완성이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우리에게 성부를 충만히 계시하셨고, 그 때문에 성경 안에 계시가 우리에게 충만히 기록된 것이다.

 

성령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취한다. 그 분은 계시에 어떤 새로운 것도 첨가하지 않았다. … 그(그리스도)의 사역이 성도들의 선행을 통하여 완성되거나 증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씀이 전통을 통하여 첨가되는 것이 아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친히 충만히 계시하셨고, 충만히 선물하셨다. 그 때문에 성경은 성취되었고,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다.

 

성경은 교회의 빛이요, 교회는 성경의 생명이다. 교회 밖에서는 성경은 수수께끼요, 괴롭히는 것이다. 중생하지 않고는 아무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성경은 메마른 이야기나 오래된 연대기가 아니라, 항상 살아있고 영원히 노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현 시대에도 항상 하나님께서 그것이 그의 백성에게 미치도록 하신다.

 

성경은 경향책(een tendenz-book)이다. 전에 기록된 모든 것이 우리의 교훈을 위한 것인데, 이는 우리가 인내와 기록들의 위로를 통하여 소망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성경이 성령을 통하여 기록된 것은 그가 교회를 인도하시고, 성도들을 완전케 하시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이바지하기 위함이다.

 

성경은 하늘과 땅 사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사이,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 있는 항존적인 기사(記事)이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과거에 확고히 서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늘에 살아계신 주님과 결합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소리요, 그의 피조물에게 보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편지이다.

 

성경들이 신적으로 영감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 받아 기록자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감 받고 성경으로 자신을 영감함으로 읽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14장 성경의 영감

2014-03-17 17:25:58


구약성경은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그들의 동시대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신적인 권위를 얻고 있다. … 항상 구약은 신약의 기자들에게 신적인 기원에 속한 것이고 신적인 기원을 입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교의적으로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구약의 교리의 좌소요, 해결의 샘이며, 모든 모순들의 한계이다. 구약은 신약에서 성취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기록으로 남기시지 않으셨다. 주님 자신은 떠나셨다. 그리고나서 그의 참된 증거가 잘못되지 않고 순수하게 인류 안에 유전되도록 배려를 해야 했다. 이를 위해 주께서 사도들을 택하셨다. … 예수님은 그들을 도구와 같이 사용하시고 계신다. 주님 자신처럼 신실하고 참된 유일한 증인은 성령이시다.

 

360년 라오디게아 공의회, 393년의 히포 레기우스 공의회,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가 역시 이 반론(각 책들에 대한 이견)을 받아들여 정경을 결정하였다. … 정경은 인간들에 의해서 일시적 한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영혼들과 시간을 다스리시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산출되는 것이다. … 하나님 혹은 성령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성경에서 제1저자이시다. … 하나님이 성경의 제1저자였다는 것은 교회의 절대 확실한 이론이었다.

 

교회는 성경 없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구약을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신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았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구약의 신적 권위에 대한 신앙을 그 자체 안에 내포하고 있다.

 

영감 행위는 성령이 몰고 이끄시는 것으로서, 그러나 특별히 종종 성령이 받아쓰게 하시는 것으로 표상되고 있다. 그들은 저자들이 아니라 단지 기록자들이요 대필자들이다. 성경의 저자는 오직 하나님만이다.

 

성경에 대해 가장 세세한 것은 보나벤투라(Bonaventura)에 의해서 그 책 [요람]의 서문에서 다루어졌다. 성경은 그 근원을 인간의 탐구로부터 취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성자로 말미암아 성부에게서 나온 계시로부터 취한다. 신앙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장이요(성부), 하나님의 입이요(성자), 하나님의 혀요(성령), 하나님의 도관(導管, 송수관, 통로)이다.

 

칼빈은 성경을 완전하고 축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 생각하였다.

 

사도들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진리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증인들로서 생각하는 자는 예수님 자신이 가르치셨던 것을 알고자 하는 길을 가로 막는 자이고, 동시에 사도들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증인들로 세우고 그의 영으로 그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실 것이라 하신 예수님 자신을 대적하는 것이다.

 

계시와 영감은 구별되고 있다. 전자는 더 성자의 사역이고, 후자는 성령의 사역이다. …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은, 그의 증인으로서 세상으로 들어가야 하는 그의 사도들은 성령을 통하여 그들 자신들이 보고 들었던 것에 관하여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고, 성령이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것들을 취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현현 안에 파악되는 것이지만,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전에는 품을 수 없었던 것들을 그들에게 주께서 계시하게 하신 것으로부터 성령의 이 사역을 명백히 구별하신 것이다. 그러나, 계시와 영감 사이의 명백한 차이가 있을지라도, 영감을 전적으로 계시로부터 분리할 수 없고, 그 밖에 놓을 수 없으며, 따라서 사실 전적으로 부정하기 위해서 이 차이가 오용될 수 없다.

 

성경은 모든 시대의 교회 앞에 계시 즉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 안에서 알려질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인 것이다.

 

신적 영감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래서 그들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 영감은 성경의 권위 위에 기초하고 있고, 모든 시대의 교회의 증거가 되었다.

성경에 따르면, 한 마디로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는 이신론적이거나 범심론적인 것이 아니라 유신론적이며, 따라서 그것은 신적 영감 어디에도 그러하여야 한다. 성경은 이 자체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성경에 대한 그의 신뢰성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신앙과 더불어 자라난다. 그 반대로 성경에 대한 무지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같은 척도로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이다(히에로니무스).

 

계시와 영감에 대한 유기적 견해가 전달하는 것은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습관의 삶이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상에 이바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적인 종교와 그리스도적인 신학을 위한 책이다. 저를 위해서 그것이 주어진 것이다. 저를 위해서 그것이 보내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선물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남아 있다.

 

15장 성경의 속성

2014-03-17 17:25:21


성경의 효과에 대한 교리는 전체적으로 로마 가톨릭과 재세례파와의 논쟁에서 발전되었다.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고백에서 로마 가톨릭과 종교 개혁 사이에는 일치가 있으나, 나머지 성경의 교리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다.

 

로마 가톨릭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나 그것의 다른 속성들을 부정하고 있다. … 교회와 성경의 관계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교회 혹은 더 구체적으로 교황은 성경에 앞서가고 성경 위에 있다. 교황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 지금까지 로마 가톨릭의 일반교리처럼 교회는 시간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성경에 선행한다. 그것(교회)은 성경보다 훨씬 전에 있었고, 그 근원과 존재 및 권위를 성경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 자체를 통하여, 즉 그리스도 혹은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현존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성경은 바로 교회로부터 발생하였고, 지금도 교회를 통하여 인정되고 있으며, 확증되며, 보존되고, 해석되며, 옹호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교회를 필요로 하였으나, 교회는 성경을 결코 필요로 하지 않았다. 교회는 전통과 더불어 무오한 계시를 지키고 전달하기 위한 근원적이고 만족스러운 수단이다. 성경은 후에 거기에 첨가되었고 본래 불충분하지만, 전통의 지지와 확증으로서 유용하고 선한 것이다. 사실 로마 가톨릭에 있어서 성경은 전적으로 교회에 의존하게 되었다.

 

성경은 그 자체에 의존하고 자체가신적이며, 교회와 신학에 대해서 규범하는 규범이다. … 성경은 어떤 증거를 내포하고 자체에 대해서와 그것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어떤 교리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증거들을 받아들이고 확증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행한 것이 없다. …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기초이다. 참으로 교회는 말씀에 대해서 증거할 수 있고, 말씀이 그 위에 서 있다. 교회는 어떤 이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을 그 마음에 선물할 수 없다. 자체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과 반대로 성경의 자체가신성을 주장하였고,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하도록 하였으며,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얻었다.

 

종교 속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라는 사실이다. 이런 확신 없이는 삶과 죽음에 있어서 어떠한 위로도 없다. … 성경의 권위가 흔들리면, 믿음이 흔들릴 것이다. … 참으로 성경의 권위가 의존할 수 있는 한 근거만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영감이다. …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모든 의심은 버려야 한다.

 

성경의 권위는 인간 전체보다 위에, 그리고 전인류보다 위에, 넓게 미치고 있다. 그것은 이성과 의지 위에 있고, 마음과 양심 위에 있다. 그것은 어떤 다른 권위와도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은 신적이기 때문에 절대적이다. 그것은 모든 시대의 누구에 의해서든 믿고 순종해야 할 정당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존엄에 있어서 다른 모든 권세 위에 빼어나다. 그러나, 자신이 인정받고 통치권을 발휘하는데 어떤 이로부터 도움을 호소하시지 않으신다. 그것은 관원의 강한 팔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의 지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성경이 그 자신의 권위를 가진다.

 

로마 가톨릭은 성경과 교회 사이에 받아들이는 관계, 즉 성경의 필연성에 대해서 통찰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 로마 가톨릭에 있어서 교회가 자체가신적이고 자충족적이며, 성령으로부터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것이다. 교회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고, 교황의 무오한 교도직으로 말미암아 신실하고 순수하게 그것을 보존한다. 그와 반대로 성경은 교회로부터 나와 진리의 규범으로서 유용하고 좋은 것이지만, 진리의 원리로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교회의 존립을 위해서 필연적이지 않다. 교회는 고유하게 성경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의 권위, 그의 충족과 해석 등 교회를 위해서 성경이 필요하다.

 

다양한 신비주의 운동들이 교회와 신학에 대해서 성경의 의미를 약화시키고, 잘못 이해하였다. 영지주의는 구약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신약에 비유적 방법을 적용하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체계를 성경과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 몬타누스주의에게 신약시대의 계시를 완성하고 수정한 새로운 계시가 나타났다. … 성경이 몬타누스에 의해서 선포된 새로운 예언을 위해 양보해야 했다. … 중세 시대에 프랑스와 독일에서 번성하였던 신비주의는 황홀, 명상, 사색의 수단을 통하여 성경이 놓칠 수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도달하고자 한 것이다. … 재세례파들은 외적인 말씀을 희생으로 내적인 말씀을 높였다. … 로마 가톨릭, 재세례파주의, 신비주의, 합리주의, 레싱, 슐라이어마허 등의 모든 이런 사상들은 상호 가장 밀접하게 밀착되어 있다. 특별히 슐라이어마허는 성경과 교회의 관계의 역순을 통하여 로마 가톨릭에게 강한 지지를 보냈다. 성경이 필연적이지 않고 아주 유용하고, 교회는 그 자체로부터, 그리고 그 자체로 말미암아 존속한다는 그 점에서 모두가 일치한다.

 

성경은 종교개혁의 필수물이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교회나 공의회들이나 교황의 권위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권위를 앞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교회의 근원에 있었다. 아주 확실히 성경 없이도 모세 전에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쓰여진 말씀이 되기 위해서 쓰여지지 않은 말씀이 있었다. 교회는 한 번도 자신으로부터 살지 않고, 자신 안에 의존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그 말씀 안에 있다. … 교회는 기록된 것보다 오래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선포된 말씀보다는 뒤다.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에 대립하여 성령의 특별 역사는 지금까지 계속하였다는 입장, 다시 말하면 사도직은 더 이상 존속하지 않고 교황직에서 계승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로마 가톨릭에 따르면, 성경은 애매하다. … 성경의 모호성에 관한 이런 교리를 통하여 학문적인 주석이 교황에게 종속되는 것만이 아니다. 그를 통하여 평신도는 훨씬 더 의존적이고 결속되는 것이다. 성경은 그 모호성에 따라서 평신도들을 위한 적합한 도서가 아니다. 백성들에게 해석 없이는 그것이 이해될 수 없다. 그 때문에 자국어로 성경의 번역과, 평민을 통한 성경 읽기가 그 이래 중세시대와 그 뒤 오용 이후 로마 가톨릭에 의해서 점점 더 제한되었다. … 성경 읽기의 제한성은 처음 12세기 이래 다양한 분파들이 교회에 반대하여 성경에 호소하였을 때 일어난 것이다. 평신도들의 성경 읽기가 이단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는 생각이 생기게 된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점점 더 성경의 애매성을 가르쳤고, 그것의 강독을 교회 고위성직자의 동의에 매었다.

 

로마 가톨릭과 종교개혁은 성령만이 말씀의 참된 해석자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성령만이 교황을 통하여 무오하게 가르친다고 생각하고 있고, 종교개혁은 성령이 각 신자의 마음에 거한다고 믿었다. 즉, 하나님의 자녀마다 성령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다. 그 때문에 성경을 모든 손에게 주고, 그것을 설명하고 보급하며, 교회 안에서는 자국어 외에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경이 부분적으로 불완전하고, 전통을 통하여 보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 성경은 유용하지만, 전통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 어떤 것이 항상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신뢰되는지, 혹은 얼마나 신뢰되는지 하는 판단은 교회에, 즉 듣는 교회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교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오직 무오한 교황에게 달려 있다. … 교황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고, 거기에 기독교가 있으며, 성령이 있다. 교황을 넘어서 더 높은 호소는 없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조차 아니다. 교황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이 인류에게 말씀하신다.

 

로마 가톨릭과 종교개혁 사이의 차이는 오직 성경이 완성된 이후 지금도 기록되지 않은 상태로 하나님의 다른 말씀이 그 곁에 존재하느냐, 다시 말하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명시적이든 함축적이든,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필연적으로 알아야 될 모든 것을 포함하느냐, 따라서 믿음과 도의의 충분하고 모든 규범인지, 아니면 그리고 그 때 참으로 그것과 더불어 종교와 신학에 있어서 어떤 다른 인식원리가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여기에 관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다룬다면, 어떻게 성경의 불충분성이 가르쳐질 수 있는가? … 성경의 충분성은 역시 신약시대 경륜의 본성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육체가 되셨고, 모든 사역을 이루셨다. 그가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오, 최고의 계시이다. 그 분이 우리에게 아버지를 설명하였다.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 분은 지극히 높은 유일한 선지자이시다. …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기록들이 아직도 발견될지라도, 그들은 성경으로서 더 이상 기여할 수 없을 것이다. … 계시는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보다 양적으로 더 풍부하고 컸으나 질적으로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절대 충분하였다. … 성령은 더 이상 새로운 교리를 계시하지 않으셨고,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취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성취되었다. 그와 같이 구원의 말씀은 성경 안에 안전하게 포괄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회의 전통을 통하여 충만되지 않는다. 그리스도 자신은 교황을 통하여 계승되거나 대신 될 필요가 없다. 전통에 대한 로마 가톨릭적인 교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성육신의 부정이요, 그의 희생의 전적 만족성에 대한 부정이며, 그의 말씀의 완성에 대한 부정이다.

 

전통의 견해에 있어서 로마 가톨릭과 종교개혁 사이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데 있다. 즉, 로마 가톨릭은 성경과 독립적으로 병존하는 어떤 전통, 성경과 더불은 전통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으로부터 기초된, 그리고 그로부터 계발된 전통, 성경으로부터 흘러나온 전통을 원하고 있다. 종교개혁 사상에 따르면, 성경은 거기에서 모든 전통 즉 설교, 신앙고백, 예식, 의식, 신학, 종교문헌 등 속에 계속 살아있는 것이 성장하고 영양공급을 받는 유기적 원리요, 거기서부터 종교적 삶의 개울들과 운하들이 급유되고 유지되는 모든 생명수의 순수한 샘이다. 그런 전통은 성경 자체 안에 기초되어 있다.

 

16장 내적원리의 의미

2014-03-17 17:24:45


신학자에게 철학적 훈련은 필수불가결한 것일지라도, 그가 신학자로서 등장할 수 있기 전에 꼭 모든 철학적 인식이론을 탐구해야 할 필요는 없다. 신학은 자신의 고유한 지식론을 수반하고 있고 참으로 철학에 의존적이지만, 어떤 철학적 한 체계에 의존적이지 않다.

 

종교의 본질에 대한 연구는 하나님의 계시에 있어서만 그가 자신의 샘을 가질 수 있고, 그 안에서 역시 항상 실재함을 밝히고 있다. 종교는 하나님의 존재, 계시와 인식의 가능성을 가정하고 요구한다.

 

성경 안에 있는 계시는 인간이 역시 그의 이 종교적 성향에서 상실되었고 재창조를 요구한다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 안에 어떤 지지나 정당성을 묻지 않는다. 그는 큰 권위 아래 제창하고 자신을 주장한다. 그 권위는 규범적이고, 그러나 역시 인과적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 마음을 정복하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 저항할 수 없게 만든다.

 

성자 곧 객관적인 계시의 경륜이 끝났을 때, 성령의 경륜이 시작된다. 역시 주관적인 계시 혹은 다른 말로 조명과 중생의 계시의 주장자는 하나님이시다. 그 분으로부터 행동이 시작한다. 그 분이 처음과 마지막이시다. 인간은 계시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는다.

 

성령은 객관적으로 성경 안에서, 주관적으로 인간 자신의 영혼 속에서 크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증인이시다. …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알려질 수 있다. … 하나님은 종교와 신학의 본질적인 원리이다.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객관적 계시가 그것의 외적 인식원리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 부어주시고 그를 중생시키며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은 그것의 내적 인식원리이다. … 객관적 계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확실한 의미에서 주관적 계시 속에서 진척되고 발전된다. 참으로 전자는 단지 수단이고 후자는 목적이다. 외적 원리는 기구적이고, 내적 원리는 형식적이고 원리적이다.

 

로마 가톨릭에 따르면 … 교회가 성경을 받고 보존하며 권위화 하고 해석한다는 것이다. 신도들에게 주어진 모든 계시들은 교회제도를 통하여 중재된다. … 교회가 중재자요, 은혜의 수단이며, 외적 원리이다. 그것이 성령의 전이다. … 자신으로부터 온 성령의 증거는 오직 제도로서의 교회를 통하여, 가르치는 교회를 통하여, 관원을 통하여, 교황을 통하여 이다.

 

개신교에 따르면, 성경 곧 계시는 역시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유기체로서 교회, 회중, 신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들이 성령의 전이다. … 로마 가톨릭의 경우 제도가 교회의 본질이다. 개신교에 따르면 이것은 일시적인 도움 수단이고, 교회의 본질은 신도들의 모임에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처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전이다.

 

17장 역사 변증법적 방법

2014-03-17 17:24:08


변증학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시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리스도적인 진리의 변증에 있어서 그들은 회의나 중립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어떤 확고한 신앙과 흔들릴 수 없는 확신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대적자들을 대면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인 우수성에 대한 강한 느낌을 가지고 대면하였다.

 

비교 연구는 모든 종교들을 초월하는 기독교의 탁월성이 밝혀지고 진리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증명하고 있는 대로 그것에 대해서 이바지 할 수 있는 일련이 다양성을 얻게 한다. 오직 기독교 안에서 계시된 유일하시고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되었고 선물 받게 된 죄와 죽음으로부터 완전한 구원,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된 영생의 소망이 이런 내적인 기준에 속한다. …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성경의 고대성과 통일성, 지고성과 단순성, 부요성과 다양성, 그것의 성취가 있는 예언들과 모든 의심을 넘어서 교리의 진리성을 높이는 이적들이 내적인 기준들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내적인 기준과 더불어 외적인 기준들이 있다. 신앙의 규범과 전통 속에 있는 교회의 증거, 이적들, 특별히 아직도 계속해서 일어났던 신유의 이적, 순교자의 확고부동성, 금욕주의자들의 거룩성, 무엇보다도 기독교로 말미암아 가족과 사회 및 국가에게 선물하였던 많은 부요한 축복들이 있다.

 

종교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은 교회를 성경과 계시에 대한 신앙의 가장 강력한 근거로 삼았다. … 종교개혁은 … 자신의 입장을 단계적으로 신앙으로 이끌어 가는 자연적 이성에 두지 않고,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에 두었다. …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고, 오직 성령을 통하여 역사된다는 것을 가능한 분명하게 그것이 표현하고 있다. … 칼빈은 이르기를, 성경의 신성을 증명하는 것이 그에게 쉬울 것이고 그에 대한 다양한 근거들을 제공하고 있다고 하였다.

 

변증학은 신앙을 앞서지 못하고 선험적으로 계시의 진리를 증명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리를 가정하고, 신앙을 그 진리에 종속시킨다. … 그 자체가 신앙과 교의학에 종속하고 있고, 지금의 교의들을 보존하며, 그것이 맞게 되는 논박들에 대해서 변호하는 철저히 신학적인 학문이다.

 

그리스도적인 신학은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근거들에 대해서, 그로부터 그것이 세워지는 원리들에 대해서, 그 자체 안에 내포한 내용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잘 사려해 주도록 저를 통하여 강요되는 이런 유익을 그것이 바로 제공하고 있다. … 그것이 어떤 이에게 신앙을 선물하지 못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논박자에 대항하여 부끄러워하지 않고 침묵할 필요가 있음을 그것이 가르치고 있다. … 그리고 종국적으로 그것이 진지하고 신중하게 그 관업을 성취하였을 때 그것이 도달한 것은, 참으로 철저히 대적자를 기독교 계시의 진리에 대한 인상 아래 가두어 놓고 그를 논박하고 그 입을 다물게 하는 일이다.

 

변증학의 결점 - 그 자체가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자유롭고 역시 신학 밖에와 그것 위에와 그것에 앞서 위치하고 있다. … 그것이 신앙과 지식을 그렇게 분리하여 종교적 진리가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순수히 합리적 증명에 의존하게 되었다. … 그런 과학적인 작업의 결과로 마치 그들이 오성을 통하여 마음을 변경할 수 있고 추론을 통하여 경건을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계속 과장된 기대들을 품었다는 점이다.

 

참으로 영원성은 거미줄에 의존할 수 없다. 종교 안에서 하나님과 나의 영혼 사이에 어떠한 인간과 어떠한 피조물도 보증일 수 없다. 내가 인간적이고 유오한 증거에 의존하고 있는 이상 위로받고 축복 있게 살고 죽은 것은 가능하지 않다. 종교 안에서는 과학 안에서보다 더 적은 확실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강하고 확고한 어떤 확실성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서는 다만 하나님의 증거에 의존하고 있다. 교회의 증거도 만족스럽지 않다.

 

18장 사변적인 방법

2014-03-17 17:23:34


신, 덕, 불멸성 등 합리적인 교리들이 아니라 삼위일체, 성육신, 성취와 같은 기독교의 가장 높고 깊은 교의들은 대담한 철학적 사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성경과 어떤 권위 밖에서 교의들은 필연적인 것으로, 그리고 가장 높은 합리적 증거들로서 이성으로부터 유출되고 있다. 신학과 철학은 분명히 화해되고, 신앙은 사변적 이성에 의해서 절대적 지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슐라이어마허에 있어서 신학은 전적으로 철학에 의존적이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해서 화해의 신학은 극서의 입장을 의식 속에서, 신앙 속에서, 교회의 고백 속에서 취하고 있으나 저를 통하여 신앙이 지식에게까지 높아지고 독립적이고 이성적인 통찰을 위한 권위를 트기 위해서 헤겔의 사변적인 방법을 그것과 결합하였다.

 

18세기에 진리의 표준이라 생각하였던 판명성이 계시를 하나의 교리로, 교회를 하나의 학파로, 중생을 도덕적 갱신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나사렛의 방식으로 바꾸었다. 합리주의가 전기독교를 변조시켰다. 교육받은 자들은 멸시함으로 계시와 종교, 교회와 신앙으로부터 떠나갔다.

 

헤겔과 슐라이어마허는 두 가지를 통찰하였다. 즉 종교는 인간의 생에 있어서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요, 그것은 독특한 현상이기 때문에 역시 인간 본성 안에 대응하고 있는 자기의 유기체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 한편은 이성 안에서 그것을 찾고 있고(헤겔), 다른 이는 감정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슐라이어마허). … 그러나 헤겔과 슐라이어마허는 사고와 존재가 서로 상응한다는 입장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 둘을 동일시하였다. 사고와 존재의 이런 일치는 사변철학의 첫 사이비이다.

 

신학은 인간론이요, 신앙론이며, 교회론으로서 그가 항상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던 것 위에 하나님의 지식을 보유하는 것이다.

 

의심할 것도 없이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이념 즉 하나님의 계시가 종교에 선행한다. 모든 종교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계시에 종속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념은 하나의 결론으로서 어떤 추론으로부터 결코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므로, 그리고 그것과 상응하는 인간의 종교적 본성 때문에 모든 추론과 증명에 앞서 확고히 계속 서 있다. 종교에 대한 탐구는 항상 다시 종교의 씨로 되돌아가고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돌아간다.

19장 종교경험적 방법

2014-03-17 17:22:52


아마 신신학에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이 이런 주관적 출발점의 수용에서보다 더 강하게 나타나는 곳은 없다. … 종교는 어떤 지식이 아니고 어떤 행위가 아니라, 감정의 일정한 상태라고 슐라이어마허가 가르쳤고, 이에 따라서 교의학을 경건한 감정상태의 하나의 묘사로서 파악하였다. … 사람은 종교적 경험 안에 입장을 취하여 기독교 신학이 다시 세속 학문 속에서 큰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품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점점 더 19세기의 과정에서 모든 사변과 형이상학에 등을 돌렸고 스스로 칸트의 비판주의와 콩트의 실증주의에 호소함으로 순수 사실의 기초 위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호프만(Hofmann)은 교의학을 감정상태의 묘사로서 파악하거나 성경론과 교회론의 재생으로서 그와 똑같이 일반적인 원리로부터 기독교 신앙론의 발전으로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슐라이어마허처럼 기독교적 경건성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에를랑겐 대학의 교수 프랑크(Fr,J, R, Frank)는 좋은 목적을 신철학의 기독교적인 주체의 자율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 프랑크는 비록 경험론적이거나 감각주의적인 의미에서는 아닐지라도 객관적인 세계의 실재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은 물 자체와 관계하지 않고 항상 우리에 대한 물과 관계하고 있다. 우리가 대상에 관련하여 존재 자체를 접촉한다는 것은 그로부터 멀리 우리 스스로 그 대상을 그와 같이 그리고 다르지 않게 촉발함을 만족히 여긴다는 사실로부터 오는 것이다. … 그(프랑크)에게 전치(前置)의 필연성은 객관적 실재성의 마지막 근거이다. 확신은 그에게 근본적으로가 아니라, 인식이론적으로 진리의 보증이다. 실재성은 참으로 확신의 존재근거이지만, 이것은 실재성의 핵심근거이다. … 그가 지금 철학에서 인간의 자기의식을 출발점으로 취하고 있는 것처럼, 신학에서도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기의식, 중생된 자의 경험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출발과 이런 방법에 반대하는 많은 이의들이 있다. … 그리스도인의 이런 중생과 자신의 확신까지 포함하여 모든 다른 영적인 체험들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리고 계속적으로 성경의 객관적인 요소들과의 결합 속에서 생기는 것이다. … 질서가 지금 바뀌어졌다는 인식으로 말미암아 프랑크 자신이 중생이 기독교 신앙의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충분한 확신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첨가하였다. … 프랑크가 객관적인 교의들을 그리스도인의 확신으로부터 구성하는 방법은 기독교와 그 신학에서 일어나지 않은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변적인 철학에서 빌려온 것이다. … 이 방법은 모든 기독교적인 경험과 모순적이다. 그와 같이 어떠한 그리스도인도 객관적인 진리에 관련하여 확신에 이르지 못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현실성 밖에서 맴돌고 있다. 이것을 넘어서 그것은 비실천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프랑크에 따라 다만 그의 신앙에 대한 객관적인 진리가 그에게 보증될 수 있는 확신을 바로 의심과 불신앙 안에 혼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에 그는 바로 그를 가로막고 그것에 그가 매어달려 있으며 깊은 의심과 유혹으로부터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객관적인 말씀, 객관적인 행위를 필요로 하고 있다. … 프랑크 체계에 반대하여 다양한 다른 이의들을 제출할 수 있다.

 

기독교 진리에 관련된 확신은 그리스도인 자신이나 그의 중생 안에 근거를 갖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경험의 길에서 우리에게 진리로서 증거 되고 우리 편에서 신앙으로 인정되고 받아들여지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는 확신이다.

 

종교적 경험은 종교적 영역에서 여러 가지 변덕에 대한 문을 열고 사실무정부주의, 개인적인 사실로서의 종교를 권좌로 올릴 만큼 그렇게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원리이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과 증거를 좇으라! 그와 같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않으면 정녕 그들이 아침 빛을 보지 못하리라(사 8:20)고 말하였다.

 

20장 윤리 심리학적 방법

2014-03-17 17:18:41


많은 관점에서 윤리 심리학적인 방법은 종교 경험적인 방법과 일치하고 있다. 그들은 종종 함께 통하거나 서로 안으로 통할 만큼 많이 일치 하고 있다. 두 사이의 차이는 주로 첫째 시인은 슐라이어마허에게 서 있고, 둘째 시인은 칸트에게 서 있으며, 따라서 전자는 종교 안에서 좀 더 감정 경험에, 후자는 더욱 윤리적 자기주장에 강조를 두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후자의 방법을 따르는 그들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증명되어지는 어떤 교리나 논증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향하고 있는 어떤 종교 윤리적 힘이다. … 도덕적 신앙이 말하는 것은 그것이 확신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도덕적으로 확신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것은 도덕적 성찰들의 전제에 의존하고 있다.

 

신학에 대한 칸트의 의미는 특별히 그가 현상계와 가상계 사이, 설명가능적 현실성과 체험가능적 현실성 사이, 존재와 가치의 세계, 지식과 신앙 사이, 과학과 종교 사이, 이론적 이성과 실천적 이성 사이를 구별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 초자연주의는 초월적인 것의 불가지성에 근거하여 계시의 필연성을 논증하고 있다. 합리주의는 칸트의 합리적 도덕과 도덕적 종교 안에 연결되어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초자연적인 것의 불가지성과 종교와 과학의 분리에 대한 칸트의 교리를 전수받았으나, 종교의 경우 안전한 피난처를 감정에서 찾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역사 변증적인 논증과 사변적 논증의 불충분성을 보여주고 있는 이상, 많은 사람들이 칸트로 돌아갔다. … 좀 더 새 시대에는 현대인 중 많은 사람들은 종교의 기초와 지식원천을 감정에서, 감정생활에서, 종교적 경험에서 찾고 그로 말미암아 슐라이어마허에게 되돌아가고 있다.

 

신학에서는 칸트주의가 리츨(Ritschl)과 립시우스(Lipsius)에 의해서 새롭게 되고 있다. … 리츨은 종교와 학문 사이에 그리고 더 자세히 신학과 형이상학 사이에 엄밀한 구별을 하고 있다. … 비록 종교와 학문이 그와 같이 완전히 구별되고 역시 분리될지라도, 리츨도 역시 도덕적 증거로 말미암아 둘 사이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 선행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리츨학파에 있어서 신앙의 내용은 종교적 윤리적인 것에 제한되고 있다는 결과이다. 리츨 자신이 이르기를 종교적 방식의 모든 인식들은 직접적인 가치판단이다. 역시 철학도 판단하기는 하나 거기에 가치판단은 부수적이고 동반적이다. 그러나 종교는 인간 그 전체에 있어서 세계와의 관계를 갖는 독립적인 가치의 판단들 안에서 성립한다.

 

모든 종교들의 핵심은 신념과는 독립적인 신앙이다. 혹은 더 분명하게 표현된다면, 그에게 새겨진 본성에 대응하는 신개념의 도움에 의한 인간적인 영혼의 자기주장이요 자기보존의 충동에 대한 많은 언설들 중 하나이다. 일찍이 증명되었던 것은 종교는 그렇게 발생될 수 없고 역시 그 안에 자신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기독교가 이 점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연과 정신의 대비(對比)나 이론적 이성과 실천적 이성의 대비에 의존하지 않고, 죄와 은혜의 대립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갈등으로부터 해결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에 있다.

 

우리의 모든 종교적 지식은 확실히 불충분하고, 의인화적이며, 유비

21장 신앙

2014-03-17 17:17:57


지금까지의 탐구는 기독교와 신학의 내적인 원리는 오성이나 이성, 육을 가진 인간의 마음이나 의지 안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왔다.

 

그것(성경의 가르침)은 우리 밖에 있는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어떤 조명에 대해서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후,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서 성령이 임하셨다. 하나님은 한 성경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을 통하여 받아들이고 고백하고 있는 교회를 역시 세우고 보존하고 계신다.

 

사고는 사상의 샘이 아니고, 표상은 사물의 원인이 아니며, 자아는 비자아의 창조자가 아니다. 그와 같이 역시 신앙, 중생, 경험은 우리 종교적 지식의 샘이 아니요, 우리 신학의 원리도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알려지는 고유한 수단은 의식의 행위 즉 신앙이다. … 오직 신앙을 통하여 약속은 우리의 소유이다. 그 때문에 신앙은 계시에 대해서, 그리고 역시 종교와 신학의 인식할 수 있는 내적인 원리이다. …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신앙으로 시작한다. 우리의 자연적인 경향은 믿는 것이다. … 믿는다는 것은 종종 증명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바로 통찰에 의존하는 그런 확실한 모든 지식에 대해서 사용되고 있다.

 

신약에서 믿음은 그 대상과 근거와 근원에 있어서 완전히 종교적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것 자체가 인간과 하나님의 어떤 종교적 관계를 표시하고 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소망하는 것, 보이지 않은 것의 실상’이 기독교 신앙의 일반적인 대상이 되고 있다. … 기독교 신앙은 가시적이지 않고, 지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신앙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의 근거 아래 있는 말씀들과 행위들이다. … 신앙은 성경과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대상으로 삼고 있으나 그것은 성경 안에 증거한 대로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렇지 않으면, 칼빈이 증거한 대로 그것은 그의 복음에 의해서 장식된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삼는다. 그 때문에 신앙은 하나의 행동과 같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향하여 뻗칠 뿐만 아니라, 성경을 향하여 뻗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그리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경에 이르고,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이른다는 것이 모두 진리이다.

 

우리의 의식 앞에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증거에 의해서 소망하는 세계 전체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구원적 신앙은 항상 역시 지식을 포함한다. … 신자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은 직접적으로 얻거나 자신의 통찰을 통하여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과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는 것과 똑같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증거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이 직접적인 확실성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저절로 인간 본성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서이다.

 

로마 가톨릭에 있어서 신앙은 성경과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하여 계시의 진리성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찬동이다. 실제로 신앙에 대한 이런 견해는 아주 해로운 결과들을 얻고 있다. 특별히 신앙은 사실 이성을 초월한 신비적인 교리에 대한 오성적인 동의, 즉 명시적으로 모든 다양한 교의들과 함축적으로 몇 가지 필연적인 교의들에 대한 오성적인 동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 로마 가톨릭은 역사적인 신앙 이외에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로부터 좀 더 발전하여 이 신앙이 오성적인 찬동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닌 이상, 구원에 이르기에 절대 불충분할 수 있다.

 

종교개혁은 만장일치로 구원적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들의 열매나 혹은 일반은총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특별한 열매요 새롭게 중생된 사람의 역사요, 그 때문에 역시 구원에 이르기에 완전하고 충분하다.

 

종교개혁에 신학에 있어서 신앙은 몇 가지 교리적인 진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것은 성경에 따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서의 성경과 결합된 영혼의 하나의 띠였음을 확고히 하고 있다. 구원적 신앙은 줄곧 철저히 종교적이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대상이었으며, 그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증거가 그것의 근거였고, 성령이 그것의 저자이었다.

 

어거스틴 이래 구원의 확신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신학에 의해서 부정되고 논박되었다. 구원의 완전한 확신은 단지 소수 신자들에게 특별계시를 통하여 주어지고 신앙의 본질로부터 결코 초래되지 않는 그들의 몫임을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고 있다. 일반신자들은 그들의 구원과 관련하여 단지 도덕적 확신, 추측된 확신만 가질 뿐,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한다. 로마 가톨릭 입장에서는 이런 확신의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 속에서 가능할 수 있고, 그것이 평신도들을 교회와 사제로부터 독립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칼빈)에게 신앙은 확실하고 확고하며 명백히 고정된 확신이요, 이해보다는 확신이요, 마음의 의지적 신뢰와 안전성이다. 루터교 신학자들에게나 칼빈주의 신학자들에게나 신앙은 확고한 찬동이요, 모든 의심과 불확실한 모든 것을 배제하는 확실한 인식이다.

22장 신앙의 근거

2014-03-17 17:17:26


기독교 신학이 신앙의 마지막 그리고 가장 깊은 근거에 대해서 심사숙고하자마자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계시의 진리를 위해 제공된 오성적인 증명이나 역사적 증명이나 어느 것도 최종적으로 그것을 위해서 타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거스틴이 내적인 은혜의 필연성을 명백히 통찰하고 고백하였던 첫 사람이다. … 내적인 은혜에 대한 그의 교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그의 신앙에 대한 마지막 그리고 가장 깊은 원인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그 원인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신적인 계시의 진리에 대해서 누구나 내적으로 확고하고 확실하게 확신케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뿐이다. 로마 가톨릭의 경우에도 신앙의 가장 깊은 근거는 성경이나 교회가 아니라, 내적인 빛이다. … 대전제에 대해서 어떠한 차이가 없다. … 차이는 바로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셨는지 혹은 어디에서 계시하셨는지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다. … 만약 증명들에 근거하고 믿을 수 있는 동기에 근거한다면, 그 근거는 인간적이요 유오하며 그 신앙은 순수하게 종교적이고 확신적이지 않을 것이다. 종교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하여 믿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위는 나 밖에 그것의 마지막 신앙근거를 내가 바로 연구하고 있는 성경이나 교회 안에서, 혹은 그렇지 않으면 내 안에 나를 신앙에 이르도록 감동시키는 은혜 안에, 내적 빛, 성령의 증거 안에서 오직 듣도록 한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를 신앙의 마지막 근거로서 따라서 신앙을 자신의 종교적 본성 안에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이 둘 중 하나의 입장을 택하여야 한다. 내적으로 그를 신앙에 이르도록 감동시키는 은혜 안에 마지막 근거가 있었다는 것을 요즘 카누스(Canus)가 주저함이 없이 말하였다. … 카누스의 경우 그의 신앙을 위한 마지막 근거는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증거 안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 증거를 신적인 것으로 인정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의지와 오성을 신앙에 이르도록 감동하셨던 은혜 덕분이다. …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신앙의 마지막 근거를 내적인 빛에서보다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을 사려하였다.

 

계시는 믿는 이유임과 동시에 믿는 내용이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인하여 믿는 것은 하나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 성경을 믿게 되는 것은 그것이 계시되었기 때문이요, 그것이 계시되었다는 것을 다시 믿게 되는 것은 성경이 그것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증거는 신앙의 마지막 근거이다. 당신은 왜 믿는가에 대한 신앙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대답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자신의 입장을 종교적 주체 안에, 그리스도인의 신앙 안에, 성령의 증거 안에 취하였다. … 칼빈의 주장에 따르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교회로 말미암아 확고히 된 것이 아니라, 그 결정 전에 확고히 되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기초 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자신의 권위를 동반하고 그것은 그 자체에 의존하며 자체가신적이다. 빛이 어둠으로부터 구별되고 흰색이 검은색으로부터 구별되며 단 것이 쓴 것으로부터 구별되듯이, 성경도 그와 같이 그 자신의 진리를 통하여 구별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 안에서 확실성을 얻는 것은 오직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된다. … 성경의 권위는 그 자체에 의존하고 어떤 증명으로 가능하지 않다. 성경은 자체가신적이고, 그 때문에 그것이 신앙의 마지막 근거이다.

 

칸트를 통한 합리주의의 비판, 레싱이 호소하였던 영과 힘의 증명, 야코비와 슐라이어마허의 낭만주의, 변증학의 무용론이 기독교 종교의 정당화가 교회의 신앙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는 확신을 탄생시키도록 하였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을 인간과 세계 안에 있는 만물의 원리와 저자로서 인식하도록 한다. 특별히, 역시 지적이고 윤리적이며 종교적인 삶에 대한 원리와 저자로서 인식하도록 한다.

 

진리의 모든 지식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영혼이 그것에 관하여 제시한 증거요 가장 깊은 의미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된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영의 증거이다. … 주로부터와 주로 말미암아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역시 선지자들과 사도들로 말미암아 말씀하셨던 같은 영만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진리에 대한 증거를 주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의심을 넘어 이들을 높이고 완전한 확실성에 이르게 한다.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이런 증거는 성경 안에서 매우 명백하게 가르쳐지고 있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들에게 충분히 알려질 수 있고, 역시 또한 그를 피하는 자들에게 충분히 감추어지고 있다. 그것은 알기를 원하지 않는 자에게 충분한 빛이요, 반대 기질을 가진 자에게는 충분한 모호성이며, 택자를 드러내기에 충분한 명료성이요, 모욕하는 자에게 충분한 애매성이다. 버림을 받은 자를 어둡게 하는 데 충분한 애매성이요, 비난하고 변명할 수 없게 하기에 충분한 명료성이다. - 파스칼(Pascal)의 글 인용

 

일반적으로 성령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위로자로서, 처음에는 사도들을 그러나 그 후 그들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역시 모든 신자를 진리로 인도하시며, 그리스도로부터 그들에 의해서 증거되고 그를 영화롭게 할 진리의 영으로서 약속되었다. 그 목적 때문에 그는 죄에 대해서 확신하고,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양자직과 하늘의 유산에 대해서 확신하고, 신자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모든 것을 알게 하며, 교회 안에 계시된 모든 기독교적인 덕들과 모든 영적인 은사들의 창시자이시다. … 신자들이 받았던 영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취하고 복음의 선포로부터 받게 되는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것(성령의 증거)은 성령이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 자신의 영을 통하여 신앙으로 얻는 증거이다. … 성령의 증거는 맨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다. 그것이 중심적인 진리요, 이 증거에 대한 핵심과 중심점이다. … 성령의 증거가 관계하여 온 유일한 것은 그 신성이다. 그러나, 그 때 역시 성경 안에서 계시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통하여 선물로 주신 그 모든 진리에 대한 신성이다. … 권위도 아니요 정경성도 아니며 영감조차도 아닌 성경의 신성, 그것의 신적인 권위성이 여기에서 성령의 증거의 유일한 대상이다. … 확고하게 확실하게 우리는 기독교의 진리와 성경의 권위에 관해서 오성을 조명하고 이성을 개방하며, 영이 진리라는 것을 보증하시는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다만 확신하게 된다.

 

성령이 성경 안에서 성경 자체에 관해서 주는 증거가 이해되고 있다. … 성령의 증거 아래 성령이 모든 세대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성경에 대해서 주는 증거가 해당된다. … 성령의 증거는 역시 성령께서 각 신자의 마음속에 성경의 신적인 권위에 관련하여 주는 증거 속에 보유하고 있고, 이 증거는 신자가 자신의 영적인 삶 속에서 자기증거를 가지고 성경과, 그리고 자신의 고백을 가지고 교회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하는 그 띠 안에 포함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개인적인 확신 속에 표현되어 있다.

 

성경 안에서의 성령의 증거가 믿음에 이르는 주된 동인이거나, 그로부터 인과된 원리이거나, 규범적이고 명증적인 원인논증이다.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증거는 다른 동인,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게 되는 수단, 즉 호소할 수 있고 요긴한 수단이다.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증거는 믿음의 유효한 원인이요, 그로부터 혹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는 원리 즉 근원적이고 역사하는 원리이다. … 성령의 증거는 마지막 근거가 아니라, 신앙의 수단이다. 신앙의 근거는 오직 성경이고, 성경일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역시 더 내용에 있어서는 질료적으로, 성경의 증거에 있어서는 형식적으로 신자에게 이르는 하나님의 권위이다. … 성령의 증거는 신앙의 움직이는 원인이요 혹은 유효한 원인이며, 수단적 원리이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 것은 성령의 증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이다. 성경과 성령의 증거는 객관적인 진리와 주관적 확실성으로서, 제일 원인과 그것의 증명으로서, 빛과 눈으로서 관계한다. … 성령의 증거는 특별한 견해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의 증거요, 전체 기독교의 증거이며, 중생된 인류 전체의 증거이다. … 교회의 모든 고백은 성령의 어떤 증거이다. … 성령의 증거는 십자가의 미련한 것이 세상의 지혜에 대해서 승리한 승리요, 인간의 사색들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사상이 영광이다.

 

23장 신앙과 신학

2014-03-17 17:16:53


기독교는 신앙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거의 처음부터 종교적 진리의 지식을 추구하였고, 어떤 특별한 과학 즉 신학이 존재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향한 이런 열망이 그러한 것으로서 신앙 속에 내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앙은 확신이고 모든 의심을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의 호기심어린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있고, 탐구로 인하여 복음을 따르지 않고 있다.

중세 시대 말쯤에 신학에 대한 혐오가 일반적이었다. 스콜라주의는 모든 신뢰들을 잃었다. …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요설(饒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거닐었던 대로 죄인들은 거닌다고 츠빙글리는 말하였다. 그와 똑같이 칼빈은 신앙의 이런 실천적인 면을 강하게 강조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개혁자들보다 더 나아갔고, 모든 신학을 버렸다.

 

신학이란 용어는 참으로 성경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천천히 비로소 현금의 의미를 얻었다. 신학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처음 발생한 것은 어린애와 같은 천진성은 지나고 사고하는 의식이 깨어났을 때이다. 점점 더 계시에 대한 사색에 들어가 나머지 지식들과 결합하고 모든 공격에 대해 변호해야 하는 요구가 일어났었다. 그를 위해서 사람은 철학을 필요로 하였다. … 교의들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교부들은 철학을 넓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충만한 의식을 가지고 그것과 결합 속에 있는 위험들 속에 밝은 통찰을 가지고, 그들이 행하는 근거들에 대한 더 밝은 사려를 가지고, 그리고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서 사도들의 말씀에 대한 맹백한 인식을 가지고 그들은 그것을 행하였다. 그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 철학 전체를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떤 선택을 행하였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진리를 심사숙고하고 변호하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철학을 사용하였다. … 그들은 철학을 다만 도움수단으로 사용하였다. … 교부들의 판단에 따라 철학은 신학에 종속이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신학에 철학의 사용은 실수에 의존하지 않고, 확고하고 분명한 확신에 의존하고 있음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 모든 시대를 통하여 교회는 철학의 오용에 밴대하여 파수하였다. 그것은 영지주의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오리겐주의를 정죄하였다.

 

이제 신학이 어떤 특별한 철학적 체계를 사용해야 하는지는 여기에서의 물음이 아니다. 기독교 신학은 어떤 특별한 체계를 비판없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진리로서 날인하지 않았다. 플라톤의 철학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어떤 신학자에 의해서도 진리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철학적 체계를 좋아했던 그 원인은 이들이 진리를 발전시키고 변호하기에 최선의 것을 빌려오고 있다는 데 있다.

 

신학의 특징적인 내적인 인식원리는 그러한 것으로서 신앙이 아니라, 믿는 사고요 기독교적 이성이다. 신앙은 스스로 의식되는 것이고 확실하다. 그것은 계시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지식을 내포하고 있으나 그 지식은 전적으로 실천적 본성을 가지고 있고, 성경의 의미에서 아는 것이다.

 

믿는 자들은 아직도 제도적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것보다 다른 더 풍부한 삶을 갖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로서 가족과 국가, 사회에 살고 있고 학문과 예술을 연구한다. 직책을 통하여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은사들이 아직도 그들에게 선물로 주어졌고, 지식과 지혜와 예언의 은사가 주어졌다. 그들 중에는 탐구와 지식에 대한 강한 충동을 자신 안에 느끼고 하나님의 진리를 심사숙고 하고 체계로 세우는 은사들을 받았던 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 교회 안에 신학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제도화된 교회가 아니라 유기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주제로 삼았다. 그것에 기독교에 대한 사고의 열매이다.

 

맹목적인 신앙에 대한 교리가 명백히 증명하고 있는 사실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내용과 범위에 있어서 신앙과 신학 사이를 구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 종교개혁은 맹목적인 신앙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리를 결정적으로 던졌다.

 

로마 가톨릭의 경우에 신앙은 계시되었고, 조항에 따라 덧붙여지며, 시간의 과정에서 그 수가 증가해 가는 각종 진리에의 찬동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특별한 중심적인 대상을 가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인 특별한 믿음으로서 신앙을 파악하였다.

 

(신앙과 신학) 둘 사이에는 강한 일치가 있다. 그들은 원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며, 서로 공통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가지고 있다. 학문으로서 신학이 역시 신앙의 기초에 있다. … 다른 면에서 신앙과 신학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본질에서가 아니라, 그 정도에 있어서. … 신앙은 그렇다는 것으로 충분하고 신학은 왜, 어떻게를 묻는다. 신앙은 항상 개인적이고, 대상을 항상 인간 자체에 관련하여 세우고, 그것은 교의들의 종교적 내용에 있어서 직접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신학은 확실한 의미에서 대상을 대상화하고 그것이 객관적으로 자체 안에 존재하는 대로 진리를 관조하고자 하며, 그것의 통일성과 내적인 연결 띠를 추적하고 한 체계에 이르도록 추구한다. 신앙은 중심적인 대상을 향하고, 신학은 그 탐구를 원의 테두리 전체를 따라 확장한다. … 신앙이 신학을 사변으로부터 보호하고, 신학이 신앙을 부리주의로부터 보호한다.

 

믿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자연적 호흡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의 그의 순종은 노예행위가 아니라 자유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지성의 희생이 아니라, 정신의 건강성이다. 그 때문에 신앙이 그리스도인을 탐구하고 사색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한다. 차라리 그것이 저를 하도록 자극한다. … 그 때문에 신학에 헌신하고자 하는 신자는 그에게 맡겨진 과업을 위해서 미리 사색함으로 준비하여야 한다. 신학이라는 성전에 들어가는 길은 일반학문을 통할 뿐이다. 철학적, 역사적 그리고 언어학적인 몽학선생은 신학을 연구하는 자에게 필수적이다.

 

성경이 신학의 원리이다. 그러나, 성경은 법전이 아니다. 그것은 유기적 전체이다. 신학을 위한 자료, 특별히 교의학을 위한 자료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흩어져 있다. … 하나님, 인간, 죄, 그리스도 등에 대한 교리는 단지 몇 가지 진술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성경을 통하여 흩어져 있고, 몇 가지 증명본문들에서만 아니라 다양한 묘사들과 비유들, 의식들과 역사들 안에서도 나타나 있다. 성경의 어떤 부분도 무시될 수 없다. 성경 전체가 전체계를 증명하고 있다. … 신학에서도 분리주의는 피해야 한다. 모든 이단들은 성경의 적은 부분에서 출발하고 그것의 나머지 전체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인표이다. 가장 나쁘고 가장 많은 분열은 구약을 버리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교의들은 성경 안에 그대로 진술된 말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의도에 따라 세워진다. …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두 본성, 만족, 성례 등의 교리는 성경의 단 하나의 표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하여 흩어져 있는 많은 자료로부터 세워진 것이다.

 

단 하나의 본문도 문자적으로 해석되지 않고 전체 진리로서 모든 본문으로부터 파악되고 종합되며 교의로 재현될 때, 그 때 바로 그들의 생각대로 성경은 그것의 충만한 영예에 이르렀다. 그 때문에 신학은 사유적인 학문일 뿐만 아니라 성찰적인 학문이요, 직각적(直覺的)인 학문이 아니라 추리적인 학문이다. 그것은 사색하고 비교하며 비판하고 종합하며 비교된 것으로부터 다른 진리를 이끌어 낸다. 예수님도 사도들도 그렇게 행하였다. 교부들과 스콜라 신학자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과 개신교 신학자들은 그 모범을 따랐다. 하나님은 친히 그의 계시에서 우리에게 미리 말씀하셨던 것을 문자적으로 반복하고 그대로 생각하도록 우리를 부르시지 않았다.

 

계시 안에는 경건의 신비,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가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다. … 신약적 ‘신비’는 … 처음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고 후에 복음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지금 신자들에 의해서 이해되는 하나의 사실을 표시하는 것이다. … 교의들은 이성과 모순되기 때문이 아니라, 높이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신앙의 파악되지 않고 불가해적인 진리들이다.

 

로마 가톨릭의 경우 … 그 신비들은 인간의 오성을 그렇게 크게 능가하는 다른 높고 초자연적인 질서에 속해있기 때문에 불가해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강조를 신비의 불가해성에 두고 있고, 이들을 방어하며 주장하고 있다. … 그러나 종교개혁은 자연적인 질서와 초자연적인 질서 사이의 대립을 죄와 은혜의 대립으로 대체하였다. 그것은 신비의 본질을 그것이 본래 인간에게 불가해적이라는 점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인간의 오성에게 불가해적이라는 것에서 찾고 있다. … 그것이 자연적 인간의 눈에 모순일지라도, 그가 아무리 현명할지라도, 그것은 신적인 지혜와 은혜를 통찰하는 믿는 자들에게 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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