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분 한 하나님- 손 성은
2013-12-25 16:06:50
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부록2)
삼位일體 용어에 대한 소고: “세 분 한 하나님”으로의 이해를 제언함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고백한다고 하면서, ‘삼’과 ‘일’은 너무도 잘 알면서 그 ‘삼’과 ‘일’의 관계를 나타내는 ‘위’와 ‘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 한국 신학계이다. 외국신학계의 용어들을 번역하는 차원에서 이제는 한글 자체의 의미들을 상고하고 혹은 반성하면서 한국 신학계가 한 단계 성숙해져야 할 때이다. ‘삼위일체’라는 용어자체가 언제쯤 형성되었는지도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의 확인에 의하면 현재로서는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에도 이 용어가 나오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번역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위’라는 말은 영어권의 person이라는 단어의 번역어이다. 중국에서는 ‘위’(位)라는 말이 ‘(벼슬)자리’, ‘순서, 차례’와 함께 어떤 사람을 높여서 부르는 일종의 경칭이다. 한글로 치자면, ‘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체’(體)라는 말은 ‘몸’, ‘바탕’, ‘사지’, ‘모양’, ‘물건’, ‘자체’, ‘나눔’, ‘형성함’, ‘친함’, ‘본받음’, ‘행함’ 등을 나타내는데 쓰여서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영어의 being, 혹은 nature나 essence라는 단어(혹은 헬라어의 ousia, 라틴어의 essentia)를 번역했음을 감안한다면, ‘바탕’이나 ‘자체’라는 의미를 담으려고 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겠다. ‘몸’이나 ‘모양’ 등의 다른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한다면, 이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겠다. 오히려 어떤 집단에서 사용하고 있는 ‘삼일’이라는 단어가 그런 모든 오해들에서 벗어나게 하는 장점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삼일’이라는 단어는 그런 잘못된 오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장점은 있어도, 추천할 수 없다. 그 ‘삼’과 ‘일’의 관계에 대해서 아무 것도 제시해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곧, 교회사를 통해서 제기되었던 수많은 논쟁의 의미를 무효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라는 말을 ‘바탕’이나 ‘자체’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로 본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바탕’이나 ‘자체’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바탕’, ‘자체’라는 말의 의미, 곧 ‘체’라는 단어가 이런 뜻을 담아서 사용되고 있는 맥락들을 유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이런 단어들을 유학과 신유학, 노장철학과 불교에서 어떻게 사용해 왔는가도 검토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삼위일체논쟁이 헬라신학에서 라틴신학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전개되었던 엄청난 오해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신유학에서 만개하였던 理氣논쟁이나 불가에서의 금강-화엄논쟁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런 논쟁을 통해서, 이런 ‘체’라는 개념이 (신)플라톤주의의 관념적 추상적 ‘바탕’이나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신)플라톤주의가 비록 멀리 헬라세계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인간의 사상이라는 것은, 뜻밖에 지리나 역사를 뛰어넘어서 유사한 측면이 흔히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인도를 통해서 매개되었을 헬라철학의 중국유입가능성은 무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도와 중국의 철학과 사상이 페르시아를 통해서 헬라와 로마사회에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또한 그렇다.
다행스럽게도, 중국어의 ‘체’라는 단어가, 삼위들과는 별개의 존재로서의 제 4의 어떤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받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삼위이면서도 또한 그 삼위인 세 persons이 하나의 체, 하나의 바탕, 하나의 자체를 의미함을 가리킨다고 보아서 그렇게 무리가 없는 결론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심이 좀 더 집중되어야 할 것은, 바로 ‘위’라는 단어와 그 개념이다. ‘분’이라는 한글로 번역될 수 있겠다고 말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글로는 “세 분 한 하나님”이라고 이해되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분’이라는 용어를 ‘삼위’(three persons)에 적용시켰지만, 하나님에게는 적용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한글개역판의 신명기6장5절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이시니”라고 되어 있지 않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이시니”라고 되어 있는 것은 탁월하다고 하겠다.
여기에 풀기가 여간 쉽지 않은 고민이 있다. 하나님이 과연 한 분이신가 세분이신가? 이 논의를 자칫 잘못 전개하면, 아무리 잘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삼신론(three-theism), 다른 한편으로는 양태론(modalism)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 이런 고민을 안고 반틸 같은 개혁주의 변증가는 “God is one person.”이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본질이 비인격적인 어떤 추상적 관념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반틸,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p.220,229.).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로서의 그 무엇이 ‘person’이라고 한다면, 그 ‘person’은 도대체 무엇에 대해서, 혹은 누구에 대해서 ‘person’이 되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답변하기가 용이하지가 않다. 하나님은 절대유일하신 ‘person’인데, 어떻게 다른 어떤 그 무엇, 혹은 그 누구를 상정할 수 있겠는가? Person이라는 개념 자체가 ‘관계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유일한 존재의 그 본질자체가 관계적인 person이어야 한다면, 그 본질 자체로서의 person이 도대체 누구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에 대해서 관계적인가 하는 질문에 답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의 person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마찬가지 논리가 한글에도 적용될 수 있다. ‘삼위’가 ‘세 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하나님은 ‘한 분’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이시지, ‘한 분’이시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 아니고, “세 분 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세분이시고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는 말도 이런 면에서 적당치 못하다. ‘분’이라는 말을 ‘삼위’에도 적용시키고, 또한 ‘하나님’에게도 적용시키게 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의 곤란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첫째, 하나님이라는 ‘분’이 세 ‘분’의 성부, 성자, 성령과 과연 어떤 관계를 가진다고 하여야 하는가? 함이다. 그렇다면, 결국 네 분의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식의 결론이 나온다. 이단적이다.
둘째, 하나님이 한 ‘분’으로서 존재한다면, 이 ‘분’으로서의 하나님은 ‘세 분 한 하나님’으로서의 한 ‘분’이시기 때문에, 이 ‘분’이라는 개념이 관계적인 것임을 고려할 때에, ‘세 분 한 하나님’이라는 ‘분’과는 다른 별도의 또 다른 존재를 상정해야 한다. 이단적이다.
셋째, 한 하나님이 ‘분’이라고 한다면, ‘세 분’으로 표현된 three persons들은 비록 세 ‘분’이라고 표현은 되었지만, 결국, 한 하나님의 부속적인 성품이나 속성들로 격하되어 버리게 된다. 양태론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역시 이단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가 ‘세 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면(반드시 이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한 하나님을 표현하는 용어로는 ‘분’이라는 말과는 다른 그 어떤 용어가 필요하게 된다. ‘분’이라고 해서는 혼동만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제안은, 결코, 하나님께서 personal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personal하시다. 하지만, person이라고 하기는 조심스럽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personal하신 것은, 하나님의 본질 자체로서가 아니라, 바로 삼위(three persons)로 존재하시는 그 특별한 존재양식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personal하신 것이다. 특별히, 삼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three persons로 이해할 때에, 한 하나님을 같은 용어로 사용해서 동시에 하나의 person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조심성이 없는 노릇이다. “세 분 한 하나님”이시지, “세 분 하나님 한 분”이라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곧 “삼위일위”라는 말도 잘못이요, “삼체일체”도 잘못이다. ‘삼위일체”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이고, 우리의 하나님이다. 그것을 ‘세 분 한 하나님’으로 표현해 본 것이다.
성부는 한 ‘분’으로서의 ‘person’이시다. 성자도 한 ‘분’으로서 ‘person’이시다. 성령도 그렇다. 그래서 세 분이시다. 그러면서 한 하나님이시다. Three persons in one being이라는 공식이 한글로 표현되었을 때 “세 분 한 하나님”이라는 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person’이라는 개념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가 요청된다. 우선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우리는, 우선 두 가지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이 단어의 어원과 관계해서, 원래 연극배우들이 얼굴에 덮어쓰던 “가면”(mask)을 일러서 ‘프로소폰’(헬라어), ‘persona’(라틴어)라고 하였는데, 이 ‘연극배우의 가면’을 나타내는 용어가 우리가 지금 현재 사용되는 ‘인격’이라는 말의 ‘person’개념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은, 이 person의 개념 속에 그 person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역할과 기능을 전제하였다는 것이다. 배우의 얼굴에 쓰고 있는 그 가면을 통해서 그 배우의 역할과 기능을 알게 되고, 또한 그 배우가 대리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의 person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역할과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의 사람됨이 동일시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person이해의 배경을 고려할 때에, 고대사회로부터 이해되어져 왔던 person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회나 집단이 어떤 사람에게 요구하였던 ‘역할’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곧, person은 어떤 신비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비밀과 암호에 둘러싸여 있는 어떤 심층적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Person은 어떤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가치와 덕, 공동적 이상 속에서 각 개인이 담지하고 있었던, 혹은 있어야 한다고 보았던 어떤 역할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곧 Person은 전체 사회와 집단 속에서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개념이라는 것이다.
둘째, 이 person이라는 개념은, 결코, 현대적인 개념인 personality라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실상, personality라는 용어자체는, 19세기 중반까지는 영어권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용어이다. 그 당시까지는 character라는 단어가 어떤 사람의 개인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였었는데, 그 특성을 표현할 때 언제나 전제되었던 것이 ‘선악간’의 도덕적 평가였었다. 그런데 이런 character라는 단어가 personality라는 단어로 점차적으로 대체되어간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한 특성의 표현에 있어서 도덕적인 판단을 담는 것에 대해서 주저해 왔음을 보여준다. 대신, 중립적인 대체개념이나 용어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person이라는 단어에 또 다른 명사 형태를 만들어서 personality라는 단어를 조합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 당시 일어난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나, 정신분석학의 유행이 크게 이런 용어의 대체에 편승했다고 볼 수 있다.
person이라는 용어나 개념을 personality라는 용어나 개념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또한 도덕적 평가를 주저하는 중립적 개념이 담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이 personality라는 단어에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어 보여주는 일종의 외부적 표현이 중시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혹은 현시될 수 있는 이미지나 인상과 관계되는 것이 바로 이 personality이다. 반면, character는 그 사람의 내면적 덕성(virtue)이나 혹은 악성(vice)가 드러나는 도덕적 자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person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근대사회의 개인주의화된 사회 속에서의 자기표출이나 자기의식 등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personality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결국 person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그 실상 그 용어 속에 personality의 개념을 넣어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person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쉽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Person은 무엇보다도 관계적이다. 결코, in-dividual(개인)이라는 개념이 앞서서 이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존 지줄라우스(John Zizioulas)라는 동방교회신학자는 person를 상호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여 그것이 성경적인 person개념임을 역설하였다. 그의 책 제목 자체가 [Being as Communion]이라고 하였는데, 아주 인상적이다. 그에 의하면, 원래는 사회적 역할을 의미하는 ‘프로소폰’(헬라어의 person)이나 ‘페르소나’(라틴어의 person)라는 단어가 성경의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나타내는데 적용되면서 혁명적인 의미변화를 겪게 된다고 한다. 곧 person이라는 단어와 성경의 삼위의 그 ‘위’(한글의 ‘분’)를 나타내는 hypostasis라는 단어와 결합되어서 동일한 개념을 갖는 것으로 취급되면서, 그 이전의 헬라나 로마사회에서 사용되던 person의 개념에 혁명적인 변화가 불었다는 것이다.
원래 헬라사회에서의 hypostasis라는 단어에는 역할이나 가면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person과는 전혀 무관하게 사용되었었다. hypostasis라는 단어는 오히려 사물이나 어떤 존재의 실재를 나타내는 ‘substance’라는 용어의 헬라어와 연결되어 사용되었었다. 이 복잡한 용어문제에 대한 논의를 접어두고, 간단히 말해서, 이 person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역할’을 나타내는 용어가 아니라, 어떤 사람의 substance를 나타내는 단어가 되었고, 또한 그 사람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그 무엇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person이 person이 되려면 하나의 존재, 곧 자신만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내가 나라는 person이 되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 유아독존 하는 식이 되어서는 결코 person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한 분’(one person)으로서 불릴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절대 유일한 존재로서의 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 하나님은 결코 ‘person’이 될 수 없는 것이다. person이 되려면 그와 다른 어떤 존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절대 유일한 하나님 한 분 외에 또 다른 존재를 상정하게 되는 “한 분 하나님”은, 다른 말로 하자면, 동그란 사각형이 되는 셈이다.
어떤 존재가 person이라고 하는 것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존재가 person이 되게 하는 다른 존재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바로 이 관계가 그 존재의 person이 person이 되게 하는 요소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다른 존재가 존재하는 것 없이는 나라는 존재는 결코 person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 그러니, person은 그 자체로서 관계이고, 그 자체로서 communion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개념으로서의 person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 바로 성경의 삼위 하나님의 세 hypostasis들을 세 persons로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성경의 하나님이해와 인간이해에 일종의 혁명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런 person의 이해를 지금까지의 논의와 관련해서 정리한다면, 삼위 하나님은 세 분 한 하나님이신데,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 세분은 한 하나님이시면서, 서로가 없이는 각각 존재하실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영원토론 자존하시면서 영원토록 관계하시는 그런 식으로 세 분이시면서 한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이 “세 분 한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사랑이실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고, 세 분 안에서 영원한 작정과 언약을 맺으시고, 영원토록 상호내재하시면서 한 하나님으로서 역사하신다는 면에서, 세 분의 세 persons되심은 우리 인생들의 ‘person’된다는 것에 엄청난 도전과 혁명적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 혁명적 메시지가 현대사회에 제공하는 함축된 의미가 무엇일까? 이 주제는 또 다른 시리즈로 글을 써야 할 만큼 넓은 주제이다. 그런 기회가 혹시 다음에 있을 것을 기대하고 우선 약속했던 시리즈 글을 서둘러 마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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