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왕국 논쟁의 조명 by John Bolt
2013-11-16 22:03:07
원제 : The Imitation of Christ as Illumination
for the Two Kingdoms Debate
by John Bolt

The_imitation_of_Christ for the two kingdom debate.pdf
두 왕국에 대한 개혁주의 교리를 변호하고 표현하는 일로 인하여 대중적인 개혁주의 종교잡지나 블로거에는 많은 독설들이 유발되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두 왕국 이론을 반대하는 것이 정통적 개혁주의의 일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그것(두 왕국 이론)은 궁극적으로 세속화를 부추키는 루터의 이원론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태도 자체는 이중적인 오해와 와전을 반영한다. 그 비판은 개혁주의 전통과 두 왕국 이론의 옹호자들을 잘못 설명한다. 그것은 또한 기독교 교육과 기독교인의 시민적 책임에 대한 그릇되고 혼란된 태도를 나타낸다. 나는 비판자들의 우려를 요약하고 문제를 재구성하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을 제안함으로 두 왕국 이론을 새롭게 고찰하여 이 문제를 전개하려고 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윤리적 이상으로 사용된 것인데 두 왕국에 대한 생각을 돕는 방법으로 제시될 것이다.
두 왕국 이론에 대한 정당한 이해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만유의 주재이시라는 고백으로 왕국 이론에 대한 설명을 시작 하고자 한다. " 우리하나님이 다스리신다!" 두번째 확신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으며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세상으로 나아가 "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 (마28:18-20) 고 위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사명을 하나님이 부르시고 성령으로 구비케 하신 교회와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주신다. 왕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위임하셨으며 그의 확고한 통치를 확신하므로 우리는 소망 가운에 이 사명을 수행한다. " 실로 내가 이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존 칼빈 이래로 개혁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확언하였지만 그리스도의 통치 형태를 두가지로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칼빈은 유명한 기독교 강요의 결론부에서 "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과 시민정부"를 구별하였다. 그는 말하길 "그것은 완전히 구별된다" 고 말한다. 칼빈의 관심은 한편으로는 "하나님 세우신 질서를 뒤엎으려는 광포한 미치광이나 야만인들" 을 규제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통치위에 군림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권력을 은근히 칭찬하는 권력의 아첨꾼들"을 규제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시민 정부의 권위를 존중하려는 것이다. 자신의 의도를 제시한 후에 킬빈은 먼저 자신의 독자들에게 그가 이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부분에서 수립한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과 시민 정부에 대한 구별을 상기시킨다.
위에서 우리는 사람이 이중적 통치 아래 있음을 확인하였고 [III. xix.15] 영생과 관련되어 영혼이나 속사람안에 거하는 것에 대하여 다른 곳에서 충분히 길게 논의하였으므로, [IV.iii-xi] 이제는 시민 정부와 외적인 도덕성의 수립과 관련된 다른 것에 대하여 말할 차례이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이렇게 완전히 구별하고 있다. 칼빈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이 두가지를 어리석게 혼합하는" 자들에 대하여 우려하였다. 여기서 그는 복음의 자유를 모든 지상의 통치를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하거나 " 온 세상이 법정이나 법이나 재판관이나 그들이 보기에 자유를 제약하는 어떤 것도 없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안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칼빈은 즉각 이런 견해를 반대하면서 " 몸과 영혼 그리고 덧없는 삶과 영원한 삶을 구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쉽게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과 시민 정부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것임을 안다" 고 말하였다.
칼빈은 또한 왕국(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에 대한 신정통치의 비전을 반대한다. 그는 "모세의 정치제도가 아니라 국가의 관습법으로 통치되는 국가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위험한 견해를 언급한다. 칼빈은 이런 관념을 "거짓되고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고 선동적"이라고 간주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적이다.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정통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왕국 이론을 그리스도의 삼중 중보직무의 전례를 따라서 다룬다. 예를 들면 프랜시스 튜레틴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다스리며 모든 대적으로 부터 교회를 지키고 보존하는 권세와 위엄" 이라고 정의한다.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를 설명하기 전에 튜레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엄안에 그의 신적 위격의 힘으로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통치와 성육신한 신인으로서 집행하는 중보적이고 경륜적인 통치 사이의 중요한 구별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중적 왕국을 구별하여야 한다. 하나는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왕국이고 다른 하나는 중보적이고 경륜적 왕국이다. 그리스도는 성부와 성령과 동등한 영광과 위엄으로 모든 피조물위에 군림하는 전자의 왕권을 가지고 계신다. 후자의 왕국은( 은혜의 경륜을 따라서) 신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독특한 방식으로 다스리신다. 전자가 모든 피조물위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면 후자는 교회에 특별하게 국한된다. 전자가 섭리에 기초한다면 후자는 선택에 기초한다. 전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로고스이기기 때문에 다스려지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리스도가 신인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자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 중보적이고 경륜적인 왕국"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중보자에게 고유한 통치이며 그 나라는 은혜의 섭리를 따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자연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므로 "자연적" 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중보적 왕국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제정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왕으로 임명하셨기 때문이다.(시2:6)
그리스도가 왕이심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관건은 왕국의 성격과 방식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을 세상적 요소로 둘러싸려는 것"은 유대인적 망상이라고 말한 칼빈과 마찬가지로, 튜레틴도 메시아적 통치에 대한 일시적이고 지상적인 개념을 날카롭게 배척한다.튜레틴은 고난받고 죽는 요셉의 아들로서의 메시야와 승리하는 다윗의 아들인 메시야라는 "이중적 메시야" 전통의 발전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랍비 유대주의에 대한 방대한 지식에 익숙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문제는 그리스도 혹 메시야가 왕이냐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왕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우리와 동의한다. 문제는 차라리 그 왕국의 형태에 대한 것, 즉 왕국이 현세적이며 지상적인가 혹은 영적이며 천상적인가하는 것이다. 전자는 메시야의 영광을 예언한 것에 대한 잘못된 관점으로 일시적이고 지상적인 왕을 기대하는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기대에 의하면) 메시야는 대적들을 살육하고 (추방되어 있는)그들을 고토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며 모든 복락을 주실 것이다. 이런 생각은 그리스도 당시에도 유대인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 이스라엘의 왕국을 화복하실 때가 이때 입니까? (행1:6)라고 묻는 사도들에게도 유행하였다. 그런데 ( 그 나라의 영광과 일치하지 않는)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구약의 다양한 암시때문에 후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는 미천하고 가난하며 여러가지 핍박에 노출된 요셉의 아들, 메시야와 다른 하나는 강하고 능력있으며 세상을 권능으로 다스릴 다윗의 아들, 메시야 라는 이중적 메시야를 고안하였다. 이런 정신없는 소리는 고대의 합의나 비천과 영광이라는 두가지 상태가 오직 한분에게 속한 것으로 말하는 성경 자체로 부터 쉽게 반박된다. 그러므로 정통 신앙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현세적이거나 지상적이 아니라 영적이고 천상적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국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 튜레틴은 그리스도가 " 대적들 가운데" (시110:2) 다스리심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 다스림의 기원과 방식이 모두 모든 지상적 왕국이나 통치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적인 방식으로 다스려지므로 의로움과 거룩함과 양심의 평화, 그리고 구원과 영생외에 다른 영예나 자원을, 그리고, 말씀과 성령외에 다른 무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외에 다른 성벽을 인정하지 않는다." 빌라도가 예수가 시저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로 정죄하기를 거절하고 그가 시기로 넘겨졌다고 한 것은 그가 이것을( 그리스도의 왕국이 영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 그리스도가 말한 왕국이 시저의 지배에 반대하는 일시적인 왕국이라고 빌라도가 믿지 않았음을 넉넉히 입증한다."
튜레틴의 이해는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루이스 벌콥의 다소 애매한 설명을 분명히 해준다. 이 세상을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가 지상에서 일하는 어떤 것으로 하나님나라를 생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벌콥은 은혜의 왕국( 말씀과 성령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권)과 권능의 왕국(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주를 다스리는 보편적 통치, 교회를 위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섭리적, 심판적 통치)이라는 고전적인 구분을 사용한다. "어떤 인간의 노력도 하나님의 통치를 개인의 마음에 세우거나 하나님의 통치를 사람이 인식하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방법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죄인의 마음에 인식시키시고 자신이 다스리시며 위대한 특권과 선택된 축복을 나누어 주시는 영역을 직접 창조하신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성경의 은유를 현세의 사회정치적 삶에 직접 적용하는 것이 오류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의 언어와 계명을 미국방부나 유엔에 적용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이러한 지상의 기구들을 다스리는 것이 무엇인가? 칼빈은 " 국가들의 관습법" 이라고 한다. 국가들이 모세의 정치제도로 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신에 칼빈은 도둑질, 살인, 간음, 거짓증거를 금하고 배척하는 자연법의 몇가지 근본적인 요소들을 지적하면서 환경에 따라 변경 가능한 적절한 제도를 제시한다. " 주님이 모세를 통하여 주신 법은 모든 국가에 선포하고 모든 것에 시행하라고 하신 아니다. 모세가 유대인 국가를 보호하고 지키는 일을 맡았을 때, 그는 특별히 그 일에 관련된 법의 수여자가 되려고 하였다. 법을 제정할 때 모세의 주된 관심은 그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왕국, 그리스도의 통치는 지상적이 아니라 영적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역은 세상의 왕국에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카이퍼의 " 모든 영역" 은 어떻게 되는가?
두 왕국 이론에 대하여 대다수 개혁주의자들이 반대하는 중심에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유명한 슬로건이 유보되어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다. 유보될 것인가? 많은 현대의 개혁주의 신자들이 기독교 교육은 물론이고 카이퍼와 하나님의 왕국을 이해하는 방식을 이론적이고 신학적으로 바로잡을 필요는 상당히 있지만 그것(카이퍼의 슬로건)은 유보되지는 않는다. 카이퍼는 자신의 슬로건을 확증하는 듯이 "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 라는 제목의 책에서 사회, 국가, 학문,예술을 포함한 인간 경험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비젼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카이퍼가 그 책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의 왕국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으 구원을 받은 사탄의 왕국과 대치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가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서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긴 사실에 있다."(골1:13; 501)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적인 수단,특별히 하나님의 말씀(505, 508)으로 어둠의 왕국을 이긴다. 마지막 완성의 때까지 우리는 소망 가운데 살아간다. 주님의 승천과 재림의 중간기간 동안에 교회는 중생의 특별은혜와 세상의 무대-일반은혜의 무대-에서 새로운 삶에 충성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런 설명은 카이퍼가 말한 기독교 사회, 기독교 국가, 기독교 학문, 기독교 예술 등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카이퍼는 그리스도가 은혜와 구원으로 다스리는 통치의 내용과 언어를 이런 영역에 직접 적용하거나 산상 수훈을 국가의 법과 집행을 다스리는 일에 적용하길 원치 않았다. 사실 그는 어떠한 신정 개념도 반대하였다. 오히려 카이퍼는 복음의 특별 은혜가 어둠의 왕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전달되어 그들의 마음과 삶이 변하고 세상에서 순종하며 살도록 그들을 해방시키는 방식을 마음에 두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사는 변화된 사람들이야 말로 세상에 나가서 그들의 문화와 사회에 건설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나? 어떻게 그것이 일어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카이퍼의 성경 묵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카이퍼의 성경 묵상은 잘 알려지 않았고 그이 주요 작품들처럼 자주 언급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카이퍼가 자신의 좀 더 이론적 작품에서 말한 것을 보충하므로 그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눅17:20b-21에 대한 그의 묵상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사람들이 말하듯이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지 못하리니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안에 있느니라" 카이퍼는 이제 이미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하게 아직 오지않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친숙한 구별을 한다. 전자는 모든 자율적 인간의 허세를 규제하며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후자는 고난 가운데 용기와 희망의 원천이 된다. 세상에서 "악한 가라지"가 의로운 "선한 씨"를 압도할 때에 "가라지는 맹렬한 풀무에 던져지고 의인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마13:42-43) 미래의 왕국은 완성의 때에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심으로 도래한다. 이러한 두가지 상반되는 생각의 흐름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고 하신 말씀에서 조화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적- 영적-실재,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은 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실재이다.(요3:3) "살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사도 바울이 말, 또한 그 의미이다.( 고전15:50) 요약해서 말하면 이미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안에 살아있으며 오직 그들만이 볼 수 있는 내적인 실재이다.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이 눈으로 볼 것이며 빛나고 영원한 영광으로 관 씌워진 미래의 영광스러운 왕국이다. 카이퍼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단순히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도덕적인 행위를 함으로 세상의 어둠을 극복하는 "그리스도의 정신, 믿음 소망 사랑의 정신"으로 축소시키는 것도 경계한다. 카이퍼는 분명히 자유주의적 개신교를 향하여 책망하면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미래의 소망과 종말론적 의미를 제거한다고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왕권을 비인격적 사상의 영역으로 용해시키는" "근대주의"를 명백히 거부한다.
카이퍼 말년의 주저, 드 헤라우트를 위해 쓴 "완성에 관한" 306개의 묵상 시리즈도 동일하게 유익하다. 여섯개의 시리즈에는 예수님의 종말론 교훈에 대한 묵상이 있다. 카이퍼는 예수님이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널리퍼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오해를 고쳐주신 것이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그는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준다는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이 마카비 반란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에게는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중간기애 대한 기대가 없었다. 그는 독자들이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을 쉽게 비판하는 것을 경계한다. 현재에 이르는 기독교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마카비 사람들처럼 이 새상을 배타적으로 생각한 적이 수없이 많다. 비록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속임을 당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지만 세상의 역사에 나타난 사건들로 그들은 혼란에 빠지고 두려워 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을 그들은 단순하게 믿었고 세상의 끝이 오기전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모든 나라에 증거되기 위하여 전파될 것을 확신하였다.(마24:14;31)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지며 그 나라는 제자들의 고난을 포함한다. 보라 거짓 메시야가 많은 사람들을 속이리니 주의하라; 거짓으로 평화를 말하나 속지말라; 이 세상이 첫째이고 장차 올 하나님 나라는 두번째라는 생각에 빠지지 말라 ; 적그리스도의 맹렬한 분노와 핍박에 대비하라; 무엇보다도 예비하고 있으라! 교회는 거룩한 삶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지만 카이퍼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장로교인들의 그리스도를 위한 지나친 열심을 경계한다.
카이퍼는 복음의 종말론이 산상 수훈이나 요한복음 14-17과 동일함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묵상을 마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를 위하거나 혹은 대적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별하라는 것이다. (모래위가 아니라) 바위 곧 그리스도위에 집을 짓는 것은 "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것이다"(마5:24-27) 이것이 마25:31-46에 양과 염소에 대한 예수님의 엄격한 말씀을 이해하는 적절한 방법이다. 주린 자를 먹이고 벗은 자를 입하고 갖힌 자를 돌보라는 명령을 생각할 때에 중요한 요점은 이 모든 것이 예수님에 대한 결정이란 것이다. ; 너는 나를 위하는 자인가? 대적하는 자인가? 이것은 요한복음 14-17을 생각나게 한다. 예수님에 대한 결정이란 암시적으로 그의 나라이며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오는 나라이며 성령과 교통하는 나라이다.
사회적 복음이 아니다.
충격적이게도 이것은 카이퍼와 동시대 사람들이 외친 사회복음과 매우 다르게 들린다. 미국 교회사에서 사용되어온 하나님나라의 다양한 상징에 대한 리차드 니버의 고전적인 연구는 유익한 유형을 제공한다. 니버에 의하면 "하나님나라의 사상은 실로 미국 기독교에서 지배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매우 다양한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것은 식민지 시대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대각성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의미하였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지상의 왕국"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세가지는 분명히 게신교의 이념인데 사실 니버는 하나님나라 사상을 개신교 개혁주의의 현저한 특징으로 간주하였다. 니버는 교회의 정적이고 제도적이고 보수적인 사상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비판적, 혁명적, 역동적 심지어 분파적 사상으로 생각하는 그의 스승 에른스트 트뤨취가 개발한 범주들을 견지한다. 그러므로 니버는 미국 역사에서 세가지 구별되는 왕국 주제를 퇴보로 묘사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나라 사상이 운동으로 타협되어 제도속으로 중독되어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은 법으로 성문화되고 그리스도의 통치는 경쟁적이 기독교 단체들간의 경쟁속으로 퇴화되었다. 장차 오는 왕국의 사회복음이 진보의 신앙으로 변질되었고 진보는 미국의 정치와 교회제도의 확대와 보존과 동일시 되었다. 사회복음의 선동가들은 전세계가 지상에 하나님나라의 축복을 공유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무력에 호소해서라도 민주주의 제도의 확대를 추구하였다. 니버가 하나님나라의 이런 극단적인 제도화나 세속화에 동조하지 않았음을 언급해야한다. 니버는 월터 라우센부쉬를 존중하였지만 미국의 자유적인 문화개신주의에 대한 위축된 비판을 했을 뿐이다. 그들은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이 죄없는 인간을 심판없는 왕국으로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인도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분석을 커이퍼에게 적용하면서 하나님나라와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대한 그의 이해가 미국인들이 경험에서 니버가 규명한 첫 두가지 형태와 부합한다고 결론을 내릴수 있다. 카이퍼가 미국인들의 질서있는 자유속의 실험을 사랑하고 칭찬했음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차이점은 매우 충격적이다. 카이퍼의 추종자들이 카이퍼에게 " 지상에 건설하는 하나님나라" 혹은 지상에 앞당겨지는 하나님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지지를 요청하였는데 그것은 타당한 이유가 없는 요구였다. 카이퍼에게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는 명백히 기독교적 문화와 사회정치적 순종을 포함하였다. 비록 그가 추종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호소하였지만 그가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이며 이 세상의 특정한 실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카이퍼가 이런 확신을 국가 통치에 적용하였지만 그는 성경의 원리를 정치 영역에 직접 적용하기를 거부하였고 단지 통치자들의 양심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호소하였다. 카이퍼가 작성한 반혁명당 강령의 제 3조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반혁명당]은 정치 영역에 하나남의 말씀의 영원한 뜻이 있음을 고백한다.그러나 국가의 권위를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시키는 일은 교회의 직접적인 선포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통치자 개개인의 양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카이퍼는 비록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명백하게 공적으로 선포하여 주시길 바라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우리는 그 사실에 만족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자연적 삶에서 중요한 것에 근거한 경험적인 조사로 충분하다. 이것이 바로 모든 민족들과 그 통치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어느정도의 인식과 도덕법의 요구를 수용하는 양심 그리고 어떻게 선행이 자신들을 손해에서 보호하며 왜 이런 모든 것이 존중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일반적이 감각이 있는 이유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의 보다 높은 뜻을 온전하고 정당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카이퍼는 모든 신정과 기독교 이상국가 개념을 반대한다. 동시에 그는 국가의 무신론적 개념을 반대하며 분노를 터뜨린다. 그러나 그의 주장하는 것은하나님에 대한 계시된 지식이 아니라 창조물 특별히 창조된 인간을 보고 배우는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 지식이다. " 하늘의 왕국밖에" 속한 이런 자연적 지식은 과거에 종교개혁 신학자들이 인정하였고 모든 사람에게 불가피한 영향을 미쳤다. 특별 계시와는 달리 이 자연 계시는 초자연적 조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비기독교 국가가 성령을 통한 특별한 조명을 받기 위한 초자연적 기관이 없기 때문에 방침을 구하러 성경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그 국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연적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직접적인 감각으로 자연적 지식의 인도를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카이퍼에게 교회와 국가는 결코 서로 섞일 수 없는 다른 성격을 가진 구별되는 기관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는 국가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명확한 구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국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정치의 협소한 영역으로 축소되어서는 안된다. 경계나 한계도 없이 교회를 국가와 혼합시키거나 나아가 국가를 하나님나라와 혼합시키는 이론을 주장하는로데와 같은 자들을 우리가 단호하게 반대하듯이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기독교 국가"를 이루려는 모든 시도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오히려 카이퍼는 서로 다른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 " 국가와 교회간의 살아있는 소통" 을 꿈꿨다. 카이퍼는 국가와 교회간의 세가지 가능한 관계를 간락하게 설명하면서 그의 ons Program"의 제5장을 마무리한다.
a. 자유주의적 무신론 국가 지연적 지식과 계시된 지식 모두를 거부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강령을 가진 자유주의적 무신론 국가. b.국가를 자연지식과 계시 지식의 두 기초위에 동시에 직접적으로 놓고 국가를 하나님나라의 보호자와 선양자로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예를들면 중세 시대나 비록 부분적이지만 오늘날의 프로이센 같은 로마카토릭 국가들 및 일관성 없는 개신교 신정국가들. c. 마지막으로, 정치적이지만 하나님을 인정하고 국가를 자연 지식의 기초위에 직접 세우며 그 결과 국가 권력이 하나님에 대한 자연 지식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권리를 허락하지만 계시된 지식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청지기로는 단지 수동적인 개신교나 청교도 국가들. 국가 기관은 한편으로는 기도의 날이나 주일 준수 등의 규정을 정하지만, 동시에 교회에 대해서는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 중립적은 태도를 취하는 미국이 이런 사례이다.
국가 권력은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 지식의 영역에 제한되어야 한다는 카이퍼의 주장에 주목하면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결론에 도달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하나님의 나라를 주 예수께 순종하며 사회와 국가가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시민의 자연스런 시민의 삶에 적용되며 자연적 계시의 덕택에 어느정도 알수있는 하나님의 뜻- 살도록 돕는 개인들의 마음과 삶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통치로 이해하였다. 이런 삶의 넓은 영역에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이란 그들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자연적인 뜻에 따라서 사는 것이다.
이점을 부정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나라는 어느정도는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의 구체적인 삶의 내용을 제시히여야 한다는 명제를 방어하기 위하여 아브라함 카이퍼를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헤르만 바빙크의 견해
네델란드와 네델란드 개혁교회에서 칼빈주의를 부활하는 일에 아브라함 카이퍼와 동시대에 함께 일했던 헤르만 바빙크(1854-1921)는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이고 초월적실재로 이해한 카이퍼의 견해를 공유하였다. 바빙크의 저작에 하나님나라 주제의 중요성은 그가 교회 신학자로서 초기 20년 동안에 이 주제에 관하여 두개의 중요한 논문을 썻다는 사실로 보아 분명하다. 이 초기 저작들에서 놀라운 점은 바빙크가 하나님나라를 명백히 윤리적 주제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로 영적, 영원적, 불가시적, 미래적, 종말론적 실재이며 어느정도는 현재적이며 내재적이다. 바빙크는 신약성경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으로 만든다는 주장을 거부하지만, 그는 예수와 사도들이 하나님과 영생의 소망과 같은 하나님나라에 허락된 영적인 복을 강조했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삶을 위한 하나님나라의 윤리적 영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는 왕이 강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윤리적 단체나 민주적 사회가 아니라 종교적 사귐이다. 사실 우리가 가장 선한 것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한 것으로 생각할 때, 인간 단체의 사상은 완전히 실패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이나 분투로 성취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스스로 알리실 하늘에 간직된 유업이며 자녀가 받아야 할 선물이고 구원의 상태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이 인간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외적으로 보이는 조직의 형태가 아니지만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대비하여 준비하는 것은 허용되며 또한 필요하다.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 실재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의 모든 것이 포함된 개념일 수 없으며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동일된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왕국의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이 되었고 십자가의 복음으로 사도들은 장차 올 하나님나라의 길을 닦았다. 만물에게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교회는 왕국을 세운 것이 아니라 왕국의 도래를 위한 길을 준비하였다. 왕국의 도래를 위하여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과업에서 신자들이 스스로 보이는 공동체를 조직하는 것이 팔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이런 공동체를 지칭하기에는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왕국은 어느정도는 현재적 실재이지만 영적이고 내적이기 때문이다. 교회 혹은 회중이라 불리우는 공동체의 책임은 사람들에게 장차 올 하나님나라를 제시하고 인도하는 것이다.요약하면, 교회는 이미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오고 있다. 교회는 역사적이고 가시적 조직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비가시적이고 영적이다. 그리고 현재적 실재로서의 하나님나라도 가시적인 교회에 전적으로 매이지 않는다.
분명히 기독교는 우선적으로 종교이지만 단순히 종교만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삶의 형태와 영역으로 침투하고 생기를 주는 전적으로 새로운 삶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교회와 시공은 같이 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가시적 공동체인 역사적 조직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기독교 시화나 기독교 학교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불릴 수 있다. 만물위에 주권을 행사하시는 그리스도가 다스리고 생기를 불어넣는 교회안밖의 모든 것이 하나님나라를 구성하며 하나님나라에 속한다.
바빙크에 의하면 교회는 총체적으로 하나님나라 자체가 아니지만 하나님나라에 필요한 기초이며 하나님나라의 가장 중요하고 최상의 도구이며 지상의 기구, 핵심, 살아있는 중심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만물위에 미치며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여기서 바빙크의 주장을 두 왕국 이론을 거부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는 다음과 같이 애써 주장한다.
인간을 위한 최고선으로서의 하나님나라는 실로 본질상 모든 일시적이고 지상적인 왕국을 뛰어넘지만 이것이 하나님나라가 모든 지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대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도구로 사용하고 도구가 되도록 준비한다.
다시 말하면 그의 왕국 백성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의 참된 목적이 인식된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단지 부분적이다. 왜냐하면 거룩과 구원, 덕과 행복, 영적 물적 유익은 아직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여기 지상에서는 종종 왕국의 의로움이 십자가에 매여있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행14:22) 재물, 명예, 번영과 같은 지상적 유익은 부자 청년의 경우처럼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죄로 인하여 이 모든 유익들이 통일성을 잃어버리면 그 각각은 서로 고립되고 분리되어 쉽게 죄의 도구가 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바빙크는 덧붙이길, 그러나 하나님나라 자체는 이 모든 유익들에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모든 외적인 것들로 부터 독립적이므로 그것들 위에 존재하며 그것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원래의 목적에 돌아오게 한다. 이렇게 하나님나라는 보편적 범위를 가지고 있다.
사람을 이질적으로 보지 않고 본질을 영적으로 바라보면 하나님나라는 시간과 공간에 매이지 않고 전 지구와 모든 인간을 포용하며 국가와 나라, 인종과 국적, 언어와 문화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가진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당한 것은 예외없이 새롭게 지음을 받은 것뿐이다. 이것이 왕국의 복음이 모든 나라와 모든 피조물 사람뿐 아니라 모든 창조물에 전파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막16:15) 그것은 그리스도가 다스리며, 그리스도가 영으로 계시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깨끗하여 지고 구별된다면 모든 지상적인 것들이 하나님나라를 구성한다.
이상의 논의에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성경적 사상에서 사회 윤리적 함의를 도출하는 것이 왜 잘못인지 명백해졌다. 카이퍼와 바빙크에게 동일하게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자리잡은 초월적이고 영적인 실재이다. 바빙크의 용어로는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안의 모든 것이 사람의 영적이고 영원한 본질에 굴복하함으로써 사람이 진정으로 사람다워지는데 있다. 요약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각 인격들이 최고의 발전에 도달한, 자유로운 인격들의 나라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자유로운 인격들이 개체로 분리되어 살지 않고 함께 나라를 이루며 가장 완전하고 순수한 공동체로 서로 연합된 나라이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사회윤리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이 논문의 다음 단락에서 다룰 관심사인데 동일하게 도전적인 개념인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써 두 왕국 이론을 조명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를 본받음
이전 단락에서 두 왕국 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사회 윤리나 국가의 책무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두려움, 이른바 이원론에 대한 비판자들의 우려에 대답하기에는 아직 만족스럽지 않다. 이것은 이런 논의에서 종종 표면화되는 군주의 칼은 마땅한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루터주의에 대한 반대이다. 고전적인 사례가 1525년 루터의 "살인자, 도적자인 농민들에 반대하여" 이다. 이 시나리오에서 그리스도의 이루신 일이 군주를 누구러뜨릴 수 없다. 냉혹하고 자연적인 정의를 자유로이 집행할 뿐이다. 여기서 복음이 아니라 법이 적용되며 법은 종종 거칠고 불신자처럼 나타난다. 두 왕국 이론에 반대자들은 은혜의 왕국 혹은 영적 왕국에서 권능의 왕국 혹은 지상의 왕국으로 가눈 통로가 없기 때문에 애를 먹는다. 두 왕국이 받는 혐의는 이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서 세상의 개선이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당한 우려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군주나 정치의 변화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국가의 시민 생활에 미치는 어떤 영향을 기대할 것이다. 이 논문의 서두에서 나는 하나님나라의 종말론적 실재가 정치영역에 미치는 영향을 배제하였다. 우리는 인간의 정치적 활동이 어떻게 해서든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 왕국 이론이 영적 왕국과 지상의 실재 사이의 옹호될수 없는 이원론으로 인도한다는 반대에 대답하기 위하여 관련된 신약성경의 그리스도를 본받는 윤리적 주제를 이용하여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주제를 통하여 두 왕국이 영적 왕국에서 지상의 왕국으로 가는 적절하고 제한된 통로를 장려한다는 것을 논증할 것이다.
바빙크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주제에 대하여 두개의 중요한 논문을 작성하였다. 바빙크가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회적 삶을 포함하여 제자도적 삶의 필수적인 차원으로 간주하면서, 그는 또한 그것이 포괄적인 문화윤리의 주제로 기여할 수 없고 불가피하게 부분적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우리가 말하려는 촛점이다. 첫 연구(1885-1886)에서 바빙크는 4가지 형태의 본받음의 영성을- 순교자, 수도승, 신비주의자, 현대 합리주의자-적당치 않다고 비판하였다. 처음 세가지에서 바빙크가 반대한 것은그들의 문자주의(형식주의)이다. 그는 중세의 본받음 신비주의 " 대다수가 그리스도롤 본받음이 단순히 흉내내야 하는 일련의 행동이나 일들에 있다고 이해하였다고 말한다. 네번째 형태인 합리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모범으로 축소한다고 바빙크는 반대하였다. 합리주의에 의하면 예수는 단지 모범일 뿐이며 그가 오신 목적은 모범이 되고 모범을 제시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바빙크는 네번째 형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리스도를 단지 모범으로 보는 자는 궤멸되고 좌절되었다.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양심을 심판하고 그를 진실로 본받는 일에 우리의 무능함을 체험하게 된다. 실로 그가 단지 모범이라면 그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심판하러 오신 것이다.우리가 그의 고난이 우리의 죄를 덮고 그의 성령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법을 성취시키는 구주로 그를 알고 경험할 때만 우리는 감히 그를 쳐다보고 그를 우리의 모범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본받음의 주제를 모두 폐기하여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반대로 예수의 모범은 총체적이고 완전하다는 것이다. 바빙크는 계속하길 :
그리스도가 모든 삶의 환경가운데 우리의 모범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모든자의 모범이며 모든 것의 모범이다. 예수는 모든점에서 우링하 같으나 죄느 없으신 참된 사람이시다.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시어 율법은 그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 자체로서 자신이 말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므로 존재와 의식, 말과 행동사이에 아무런 긴장이 없다. 율법의 모든 요구, 지식과 신뢰, 의와 거룩함,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그 분안에 구현되었다. 그의 안에서 율법 자체가 의인화되었고 우리안에 살게되었다. 그의 안에는 모든 덕이 완벽하게 조화되었다.
예수는 대중과 사회적 과업이나 관계에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 주장을 바빙크는 일축한다. 그것은 매우 근거가 없으며.우리의 삶이 예수의 삶을 모방, 반복, 단순 재생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정당한 본받음은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도덕법이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덕과 의무를 요구한다. 그러나 도덕적 삶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다양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본받음이] 그의 개인적 말과 행동을 맹종하거나 편협하게 모방하는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것은 그가 살았던 원리를 자유롭고 영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도덕법을 온전히 성취하는데 있다.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이 있다. 이러한 신비한 연합과 그리스도와의 영적이고 살아있는 교제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주된 요소이다.
바빙크는 본받음의 타당성을 확증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시도에서 명백히 금지된 방법들을 배제한다. 창조, 선택, 부르심, 중생, 등,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리고 모든 이적들은 유일하고 모방할 수 없다. 이런 행위를 모방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독교 제자도 안에서 제대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바빙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행동은 그것이 하나님의 법과 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영광스러운 완전함을 나타냄을 기억하라고 대답한다. 그리스도가 말과 행동으로 우리에게 모범으로 남기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에 일치하는 덕과 의무들이다.
이렇게 보면 도덕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삶을 위한 감사의 규칙으로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여기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매우 만족스러운 답을 준다. 요리문답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을 정당하게 인정한다.(답 32,43,45,49) 그러나 문답이 그리스도인의 감사의 삶에 대하여 말할 때, 십계명에 제시된 덕과 의무를 고려한다. 십계명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의 규칙을 제시하며 예수의 삶에서 본받아야 할 것과 아닌 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해준다.
바빙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주제를 윤리면에 제한적으로 사용한 것과 두 왕국에 대한 우리의 논의와의 관련성은 그것을 좀더 공식적인 방식으로 요약하면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소명은 그와 영적으로 연합한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안내하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전적인 순종이다. 우리가 어떻게 본받음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것인가는 하나님의 계시된 법에 의하여 결정된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하나님의 나라/두 왕국 사이에 몇가지 유사점이 마음에 떠오르게 된다. 첫째, 두가지 모두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들에게 심겨진 영적인 실재라는 점이다. 둘째는 어떤 것도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구체적인 내용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오직 구체적인 안내로서-하나님의 법- 무엇인가 다른 것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경우에 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법에 대한 완전한 일치를 보고 그 모범을 따라서 신자의 제자도적 삶을 안내받을 수 있다. 두 왕국 이론을 통하여 신자들은 예수가 그들의 최고의 왕이요 주이시며 그들의 시민적 의무가 그 영적 실재에 의하며 인도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신자들은 종말로 달려가는 모든 노력을 거절하고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소망을 현재의 시민적 의무의 내용으로 사용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주제에 대한 바빙크의 두번째 연구는 1921년의 그의 사망 3년전인 1차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에 발표되었는데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원숙한 사상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그는 현대 사회 특별히 현대 전쟁으로 야기된 도전의 상황에서 해석학적 질문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떻게 일반적으로 영적인 삶을 살 것이며 어떻게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신자들에게 현대 세상에서 삶의 방식에 대하여 지침을 줄 것인가? 기독교와 전쟁 사이에 많은 경험의 갈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국가 직업, 산업, 사업, 과학,예술 등의 다양한 인간 문화사이의 엄청난 긴장의 한 국면일 뿐이다. 바빙크는 이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이 모든 의문들 가운데 일어나는 한 질문은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현대 세상의 삶에 대한 것이다. 현대의 문화적 삶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여지가 있는가? 우리는 국가, 산업, 사업, 시장, 주식거래, 사무실, 공장, 과학, 예술, 전쟁, 심지어는 후론트에서본받음을 여전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질문이나 그와 유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있다.
바빙크는 이어서 초대 교회의 역사적 상황의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한다. 두번째 논문에 나타난 바빙크의 새로운 지혜는 예수를 따르는 소외되고 핍박받는 자들에게 필요한 정확한 지침이 주어진 방식에 주목한 것이다. 바빙크는 산상수훈이 선포된 환경을 염두에 둔 정당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산상수훈의 내용은
전 이스라엘 국가나 심지어는 유명한 지도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높은 계층이 아니라 거의 이름도 영향력도 없는 낮은 계급인 상대적으로 소수의 제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비록 그의 제자들은 예수가 자신에 대하여 인자는 머리둘 곳도 없다고 말한 정도로 가난하고 결핍하지는 않은 듯하나, 제자들 대부분이 구약 성경이 말한 가난한 자, 온유한 자, 핍박받고 외로운 자(시10:2,9,12,17; 22:26; 25:9, 16)들의 사회적 부류로 부터 나왔다.
이것이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지침을 제시한 특수한 상황이다.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둘 때, 왜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그의 제자들이 처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덕들을 칭송하였는지 쉽게 이해된다. 그들에게 소위 문화명령과 같이 과학과 예술에 참여, 지상의 상품의 축적, 산업과 상업의 발전에 대한 소명을 제시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당하였을 것이다. 예수 자신도 그러한 문화 활동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며 자신의 생명를 사람을 위한 속전으로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따르도록 부름받은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의 섬김이었다.(마20:26-28)
문맥을 숙고해 보면 문자주의에 빠지지 않고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런 말들을 그것이 실제 말하는 것과 정 반대를 의미하는 식으로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예를 들면 예수는 마음의 성향에만 관심을 가졌고 구체적인 행위는 덜 중시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반대로 비록 그의 명령에 내포되어 있지만 예수의 산상수훈 어디에도 단지 마음의 성향만을 언급한 것은 없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는 구체적인 행위를 다루었고 그것들을 제자들에게 모범으로 제시하였다.
문자주의도 영적해석만큼 옳지 못하다.
다른 한편, 예수는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구체적인 행위들을 누구도 문자적으로 받거나 적용하지 않도록 이미지의 형태로 그들에게 제시하였으므로 우리는 그의 말씀을 너무 축소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이것은 눈을 뽑거나 손을 자른다는 뿐 아니라 악에 대항하여 빰을 돌려대라 그리고 요한복음 13:14의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는등의 말에 적용된다.(마5:29,30). 우리가 이런 것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들은 실천적이고 구체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모든 것에서 예수는 그가 말하는 것을 정확히 의미하였고 그가 의미한 것을 정확히 말하였다. 그는 제자들이 그의 교훈을 따르기로 작정할 뿐만 아니라 말한대로 실제 행하기를 요구하였다.
산상보훈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신약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1세기의 교회는 대부분 무지하고 어리석은 세계로 부터 출현하였다. 교회를 반대하는 대중적 의견들이 팽배하였으므로 드러내놓고 교회와 연계하기 위하여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와 시민 질서를 해치는 염세주의자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공적인 숭배의식에 참여를 거부하였고 자신들이 모이는 곳에 모였으므로 불신자와 우상숭배자, 마법사, 영아살해자, 그리고 다른 수치스런 관습을 가진 자들로로 고발되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버린 바되고 만물의 조소거리가 되었다.(고전 4:13)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세상에서 편함을 누릴 수 없는 나그네요 이방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하 기다리는 이방인과 나그네로 스스로 간주하였다. 우상과 불의로 가득찬 공적인 생활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작고 외로운 자신들만의 모임으로 물러났다. 세상은 악한 자에게 속해앴으며 사탄과 악마가 지배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상속하기를 원한다면 세상과 그 즐거움에서 피하여야 한다.
교회의 주된 관심은 단지 그 독립적 정체성을 보전하고 세상에서 자기 위치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것은 바빙크가 "수동적 덕"이라 부르는 덕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도들은 신자들이 세상에 어떤 중요한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 겨우 가능한
바로 이러한 덕들을 칭송하였으니 그것들은 진리, 의로움, 거룩함(엡4:24) ; 순결함 겸손함, 참음(엡5:3-5) ; 기도, 철야, 금식(행14:23 ; 롬12:12 ; 고전 7:5 ; 벧전 4:7,8) ; 믿음, 사랑, 오래참음(딤전6:4) 형제사랑, 안자함, 친절함( 롬12:3) 동정, 겸손, 온유, 인내(골3:12) 이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성령의 열매로 인정하며 육체의 열매와 대조하였다.(갈 5:19-22).
이로부터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신약성경의 윤리는 핍박받고 억압받는 신자들의 공동체에 유리한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 나아가 이러한 덕을 실천함으로써 기독 교회는 1,2세기에 세상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니 이는 하나님이 십자가로 권세와 정사를 이기신 것 처럼 교회가 십자가로 세상을 이긴 것이다.(골2:15)
여기서 바빙크가 한 일은 신약성경의 윤리를 상대화하여 그것을 영구적 원리나 뜻의 범주에서 빼내어 적용의 범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초대 교회가 복음으로 승리하였을 때 새로운 상황에 새로운 조치가 필요하였다.그러나 이것을 성취한 후에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다른 태도를 취하여야 했다.기독교 원리에 따라서 세상을 새롭게 하고 개혁하는 새로운 과업을 감당하기에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덕을 실천하는 것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오래참음, 온유함, 인내, 긍휼히 여김 같은 수동적인 덕이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새 시대에 맞는 기독교적 지혜로 보완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를 수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강조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바빙크는 성육신,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의 표인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강조한다. 신자들이 종말에 이를 완성을 소망하면서 기꺼이 지상에서의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하고 불의를 견디고 참는 것은 그들이 정의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핍박한 자에게 원수를 반드시 갚아주시며 핍박당한 자들을 영원한 생명의 유업으로 보상해주실 하나님께 맡기기 때문이다. (골3:24 ; 살전1:6,7 ; 딤후 2:12) 이제 그리스도를 본받음은 예수의 인격, 말씀, 행위에 덜 집중하며 더 깊은 의미와 더 풍부한 중요성을 갖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예수의 지상 삶의 모범이 아니라 완전한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의 그리스도, 못박히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 선지자와 교사뿐 아니라 왕과 제사장으로 기름부은 그리스도에 집중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거꾸로 뒤바뀐 관계를 의미한다. 처음에 예수의 초대를 듣고 그를 본받은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었다. 그는 성령으로 제자들을 그의 형상으로 점점 영광스럽게 변화시키고 그들이 그를 있는 그대로 보게될 때 그들의 낮은 몸을 그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키신다.(롬8:29; 고후3:18; 빌3:21 ; 요일 3:2) 우리는 이것을 바빙크 자신의 말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사도의 이러한 가르침으로부터 우리는 산상수훈이 새롭고 완전한 법이며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인 예수의 삶이라는 관념을 분명히 버리게된다. 그리스도의 모범은 사도들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바, 가장 중요한 덕인 사랑을 선명하게 조명하여 주었다.(롬12:9 ; 갈5:14)
하나님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본받음은 제자도적 삶의 내용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핵심이고 중심이다. 구체적인 지침은 다른 곳, 특별히 하나님의 법에서 나온다. 바빙크는 기꺼이 기독교와 문화의 통합에 대하여 말하지만 그 통합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특징이었고 종교개혁인 원칙적으로 바르다고 수용한 것과 동일한 윤리적 토대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비록 바빙크는 현대의 세속적이 전반인 자연적 삶이 성경과 신앙고백으로 부터 모두 이탈하여 유럽 문화가 고집불통이고 제멋대로 이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이 된 것을 비판하지만, 그는 또한 자신의 독자들에게 사회와 문화는 창조와 섭리의 열매가 아니며 복음과 구원의 특별한 열매도 아님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넓은 의미에서 결혼, 가족, 사업, 직업, 농업, 산업, 상업, 과학, 예술, 정치 그리고 사회를 포괄하는 문화가 기독교의 특별한 열매가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문화는 모든 사람들에게 발견된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복음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기독교는 결코 모든 문화의 원천이라거나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기독교의 과업이라고 자처하지 않았다. 반대로 신약 성경은 구약성경을 존재로 삼으며 구원은 창조의 토대위에 이루어지고, 아들의 사역은 아버지의 사역에 의존하며, 은혜는 자연에 이어 나타나고, 중생은 탄생이후에만 나타난다. 결혼, 가정, 국가 등 문화의 모든산물은 빛의 아버지로 부터 내려오는 선하고 온전한 선물이다. 그것을 주신 분은 선하신 하나님이니 그는 불의한 자에게나 의로운 자에게나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시며 음식과 즐거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신다.
바빙크는 인간의 다양한 문화는 스스로의 삶이 있고 스스로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문화적 삶을 경시하거나 그것의 내적 규칙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삶의 규칙대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이다. 은혜는 자연을 억누르지 않고 회복시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창조의 삶은 성경이나 특별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발견과 경험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와 구조에 매인 삶이다.
복음은 모세의 법 그리고 의 자연적 차원에서 하나님이 자연에 세우신 법에 대한 새로운 법이 아니다. 국가, 사회, 예술, 과학, 농법, 산업, 상업 등은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따라서 그것에 적용되는 하나님의 뜻에 종속된다. 하나님의 이러한 뜻은 사람의 탐구와 경험을 통하여 발견된다. 누구든지 자연을 이해하기 원하는 사람은 자연을 연구하고,농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농업에 실제로 종사하여야 하며,장사를 하려는 사람은 상업 로 분주하여야 한다. 이런 일들을 제대로 준비하려면 성경 연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와 섭리로 가르치신 것을 세심하게 탐구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책무는 자연과 문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타락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오직 마귀의 일을 폐하시고 아버지의 일을 회복하고 새롭게 하기 위하여 세상 오셨듯이 복음은 오직 그러나 전적이고 보편적으로 죄에 반대하는 것이다. 죄와의 싸움에서 교회는 오직 자신의 성격에 일치하는 영적 무기만을 사용하도록 허용되었다. 강압, 무력, 재물, 권세, 회유 그리고 위선은 교회에 사용 금지된 무기이다. 유일하게 합법적인 무기는 말씀과 믿음, 진리와 의로움이다. 이 무기만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바빙크는 초기와 21세기의 지상 교회의 투쟁을 비교하여 보았을 때, 서로 유사하지만 서구 문명에 기독교가 영향을 미친 장구한 역사로 인하여 큰 차이점도 있다고 말한다.
현대의 문화는 사도 시대에 그랬듯이 단지 이교주의로 가득찬 것이 아니다. 비록 현대 문화는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는 많은 범신론이나 물질주의적 경향을 포함하고 있지만, 우리의 문화의 기원은 이런 경향들에 있지 않다.... 현 시대에 나타나는 모든 도덕적 반대들을 단순히 이교적이라고 지칭할 수 없다... 정부, 입법기관, 사법부, 모든 공적인 삶은 여전히 기독교에 기원한 윤리 규범의 영향을 받고 있다. 심지어 현대 국가와 시민질서의 대부분이 기독교적 원리에 기초하여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초대 교회가 직면한 사회와는 달리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진실로 은혜가 틀림없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교회는 압제와 핍박의 희생자가 아니다.
그의 시대의 문화에 대한 바빙크의 판단은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거의 100년이 지난 오늘날과 관련성이 있다. 두 왕국 이론에 대한 비판은 종종 시민 질서를 온전하게 세우는 일에 미치는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에 대한 불만족에서 나온다. 성경이 묘사하는 샬롬의 비전과는 너무 멀다는 것이다. 바빙크는 본받음에 관한 그의 두번째 논문에서 완전주의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오늘날도 타당하다. 그는 정의는 사랑의 이상에 항상 못미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외적인 관계에 치중하며 그것을 실천하는데 일반적인 윤리적인 일반 원칙뿐 아니라 툭정 시대의 환경과 사람들의 관계를 늘 고려하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이러한 환경과 관계는 항상 완전하고는 거리가 멀다. 바빙크는 결과적으로 완전히 건강한 문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그런 문화는 어떤 민족에게도 없었고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개인과 공동체의 완전함은 다른 시대에 속한다. 바빙크는 현 시민 사회와 정치의 변화를 보고 싶어하는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종말론적 유보와 그들이 이원론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인해 고민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는 이것을 특별히 전쟁에 관한 의문에 적용하고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거부하여야 할 이원론으로 간주하고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원칙은 급진적이고 지속적으로 국가와 시민 사회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그들은 이런 원칙들은 전쟁의 경우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십계명의 제 6계명, 산상수훈, 혹은 불교도나 일반적 인본주의적 고려에 근거하여 양심적 반대자들은 모든 전쟁은 악이라고 판단한다. 당국자들은 이런 양신적 반대를 가능한한 많이 고려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양심은 실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양심은 매우 타락할 수 있으며 이런 타락은 전혀 순수하지 않고 심각하고 위험하다는 사실도 기억하여야 한다.
바빙크는 모든 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을 모든 시민 질서에 대한 동일한 비판과 연관시키는 것은 심각한 위험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운동에 대한 비빙크의 판단은 단호하다.
만일 군대가 해체되어야 한다면 정치와 사법적 활동이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이 두 기능이 하나는 내적으로 다른하나는 외적으로 강압에 의해 정의를 유지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나라의 명령을 준수해야 하므로 시민 질서는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기독교 도덕과 아무 관련이 없는 무정부주의자나 정적주의 도덕론자들이다.
바빙크가 보기에 기독교와 전쟁이 서로 양립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이런 이유로 어설픈 질문이다. 국가와의 관계를 포함한 인간 행위에 대한 복음의 영향력은 다르게 표현될 필요가 있다. 즉 모든 전쟁을 완전히 초월하며 모든 사람과 국가가 서로 사랑하고 평화하며 살기를 바라는 복음.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무력으로 전파하거나 옹호하는 것을 금하였다.왜냐하면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하기 때문이다. 그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가능한 최상의 평화를 추구하여여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권력자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러므로 최선을 다하여 평화를 유지하고 추구하여야 할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 있다. 군비를 축소하고 국가간 이견을 중재하며 전쟁을 막고 평화를 확보하는 노력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지지와 격려를 받을 가치가 있는 일이다. 과거와 현재의 그런 노력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여도 그런 시도를 두려워하지 말라야 한다.
고통, 질병, 그리고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죄와 질병, 비참, 죽음과 투쟁에서 완전한 승리는 불가능함을 알지만 어느정도 혹은 상당한 성취도 경험하였다. 그러므로 가능한 전쟁과 그 결과인 물질적 영적인 비참함을 반대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악은 완전히 정복될 수 없다는 사실이 침묵하고 반대하지 않음으로 전쟁이 진행되도록 방치하는 구실이 될 수 없다. 궁극적인 목적은 달성할 수 없으리지라도 우리는 차선책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전쟁이 정당하고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는데 전쟁의 무기는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두 왕국 이론은 성경에 기초한 개혁주의 윤리에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기독교 교육과 시민의 의무
이 논문의 서두에서 나는 두 왕국 사상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이 이 주제에 대한 개혁주의의 전통적 가르침을 오해하고 왜곡한 것이며 또한 기독교 교육과 기독교인의 시민적 의무에 대한 혼란과 오류에 빠진 태도를 나타낸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제 간단히 나의 두번째 관심을 개진하겠다.
두 왕국 이론의 비판자들이 제기하는 주된 우려중 하나는 기독교 교육에 대한 잠재적인 포기였다.아브라함 카이퍼의 모든 영역은 보류되어야 하는 듯 하다. 이런 결론은 부당하지만 기독교 교육에 대한 이해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 여기서 너무 단순화할 위험이 있지만 두 왕국 이론의 대부분의 비판자들이 내가 "관점주의" 라고 부르는 렌즈를 통하여 기독교 교육의 구별되는 성격을 이해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기독교 교육에서 기독교적 요소가 현저하게 인식론과 관련된다는 관념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창조에 대한 우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관념은 글씨쓰기 부터 시민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제에 특별한 기독교적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기독교 교육은 대체로 구별되는 기독교적 생각, 즉 구별되는 기독교적 사고방식을 개발하는 것이다. 두 왕국의 비판자들은 두 왕국 이론은 교육이 이른바 자연적 왕국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기독교 교육 사업을 모두 중단시킬 위험이 있다고 강조한다.
이런 우려는 칭친할 만 하지만 전적으로 정당하지는 않다. 이론이나 사상을 오용하여반대하는 경우가 항상 있으므로 주의하는 것이 옳다. 동시에 비판자들은 두 왕국 이론 의 지지자들 스스로 내리지 않는 결론을 도출하면 안된다. 두 왕국 이론의 지지자로서 나는 물론 나의 견해를 말하고 이어서 두 왕국과 기독교 교육에 대한 간단한 변호를 할 것이다. 나는 두 왕국의 강조점이 기독교 교육을 옹호하는 지나친 관점주의를 교정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하는 것, 예를 들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심, 은 기독교 교육의 필수적 측면이다. 그러나 기독교 교육에는 구별된 기독교적 사고를 계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제임스 스미스가 지적하였듯이, 기독교 교육에 관한 대안적이거나 더 낫고 보완적인 비전은 우리에게 가능하다. 비판을 누그러뜨리는 스미스의 논지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며 무엇을 아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스미스는 만일 고등교육을 포함해서 교육의 중점이 사상과 정보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욕망을 형성하는 것이라면 어쩔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교육에 대한 그런 재고의 주된 결과는 학교가 교회에 더 근접하도록 만들며 우리로 하여금 학교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기독교적 관습에 대하여 교회와 예배의 차원에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학생의 특징은 성격은 기독교 교육의 목적에 대해 생각하는 사고의 방향점이 된다.
기독교적 사고라는 개념에는 또다른 문제가 있다. 성경의 계시가 말하자면 곱셈이나 분자의 주기율표를 배우는데 지식적 특권을 제공한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기독교 교육은 그 내용도 학생이 알고 이해하여야 하는 창조의 실재에 종속된다. 예컨데 축구팀을 배보낼 것인지 여부를 기독교 학교가 결정하려고 할 때, 청지기 정신이나 왕국의 우선순위, 사람 몸에 대한 적절한 보호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의사 결정과정에 필수적일 것이다. 만일 학교가 풋볼팀을 허락한다면, 코치나 선수, 학생 그리고 팬이 그들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요구하시는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기대가 남아있다. 그러나 게임 자체는 자연적 왕국의 규칙에 따리 진행되므로 팀이 이기려면 쿼터백은 정확하게 던져야 하고 타이트 엔드는 제대로 잘 막아야 하고 리시버는 루트를 빨리 달려야 하며 라인 백커는 오픈필드 태클에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 학교의 풋볼 팀은 세속적인 공립학교의 탐과 동일한 기준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두 왕국 지지자들이 기독교 학교의 모든 커리큘럼에 대하여 말하려는 요점이다. 커리큘럼에 포함할 것을 성경신학, 교회사, 라틴어중에서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독교인이 선택하여여 한다 그러나 물리나 수학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학교에는 창조에 기초한 객관성과 주관적 가르침이 있으며 선생의 과업은 학생들이 하나남의 창조의 실재와 언어와 문화로 표현되는 창조에 대한 인간의 참여를 보고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적 관점에 직면하여 이것은 가능한 강력하게 확인되어야 하며두 왕국 이론의 비판자들은 기독교적 관점의 미명으로 우리시대의 지적 장애를 일으키는 위험을 무릅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두 왕국 이론은 한편으로 승리주의와 과열된 미사여구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주의에 대한 부지중의 지지를 경고한다.
그런 경고를 기독교인의 시민적 의무에도 적용할 수 있다. 모든 학교의 과목에 구별되게 기독교인의 관점을 주장하는 형태와 유사하게 "미국의 질서있는 자유의 시험" 처럼 아직 실현되지 않은 제3의 기독교적 대안이라는 미명으로 현 정치 질서의 오류를 항상 찾는 현상이 있다. 샬롬의 비젼은 미국식 자본주의,사회주의,군사주의 등을 비판하는 도구가 된다. 이미 실현된 차선의 선이 평등, 공정 혹은 사회정의 같은 더 큰 선의 이름으로 폐기된다. 두 왕국 이론이 모든 기독교적 완전주의를 책망하는 만큼, 두 왕국 이론의 비판자들도 두 왕국 이론의 지지자들을 정적주의나 보수주의라고 고발한다.
이런 비난에 대한 정당한 반응은 헤르만 바빙크와 함께 하여 사회적 완전주의가 시민 질서에 심각한 오해와 위협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사회적 완전주의) 집요하고 가차없는 비판은 시민 질서 자체의 기반을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사람이 오직 하나님의 나라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시민질서는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은 결과적으로 기독교 도덕과 아무 상관도 없는 무정부의자나 정적주의적 도덕이다. 더구나 건전한 종말론적 유보는 무관심을 수반하지 않는다. 우리가 최종적이고 절대적으로 죄, 질병, 죽음을 제거할 수 없음을 인식한다고 그런 것과의 싸움을 전적으로 포기하지는 않는다. 악이 완전히 정복될 수 없다는 사실이 침묵과 무대응으로 그것이 진행하는 것을 허용하는 구실이 될 수 없다. 궁극적인 목표는 달성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차선책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두 왕국 이론은 기독교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의 담지자로서 창조주와 구원자를 바라보며 지상의 소명에 따라 기쁨으로 살 수 있도록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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