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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하나님은 어떻게 왕이 되셨나? - 톰 라이트

하나님은 어떻게 왕이 되셨나? - 톰 라이트

2019-05-21 16:15:41


서문

 

우리 모두는 사복음서가 말하는 핵심 내용을 잊어버렸다. 나는 복음서를 연구하면 할수록 서구 기독교 전통에 속한 대부분의 교회가 복음서에서 실제로 말하는 내용을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우리는 복음서가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복음서를 읽는 최선의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하다. 특별히 복음서에 맞추어 우리의 삶과 일을 어떻게 정돈해야 할지에 관해서도 다시금 성찰이 필요하다. 복음서의 저자들이 말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하나님은 어떻게 왕이 되셨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은 네 단계로 진행될 것이다. 1부에서는 내가 문제로 여기는 내용들을 제시하고 그것을 더 명확하게 정리하려고 한다. 2부에서는 복음서들이 지닌 네 가지 차원을 탐험할 것인데, 이 차원들은 현대 서구의 해석에서는 보통 배제되었지만 복음서가 말하려는 의도를 들으려면 반드시 복원되어야 하는 내용들이다. 3부에서는 2부에서 정리한 네 가지 차원들을 동원해서 종종 분리해서 다루어진 두 개의 핵심주제인 왕국과 십자가가 복음서 안에서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그 다음 4부에서는 교회의 위대한 신조들이 복음서의 핵심 메시지를 배제하기 쉬운 사고의 틀로 이끌어 왔다는 주장을 펼칠 것이다. 어디에서나 서로 얽혀있는 두 개의 질문이 있다. 1) 예수는 누구이며, 그는 무엇을 행하고 말하고 생각했는가, 그는 왜 죽었는가,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2) 네 개의 복음서들이 예수의 이야기를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책에서 내가 탐구하려는 질문은 사복음서가 전하려고 애써 노력했던 이야기는 무엇인가이다.

 

1부 빈망토

 

1장 실종된 중간: 몸통이 사라진 빈 망토

 

평생의 수수께끼

복음주의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있는 기독교 집단들 속에서 복음은 복음서가 아니라 바울서신, 특별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발견하는 내용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보통 이 복음은 예수가 그의 구속적 죽음에서 성취한 내용에 대한 진술(속죄)과 그 성취가 개인에서 어떻게 전용되는지에 대한 진술(이신칭의)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속죄와 칭의가 복음의 핵심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정작 복음서들은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물론 복음서들이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속죄를 언급하지만, 교회가 그 단어를 사용해 온 것과 같은 의미에서 중요한 주제로 상정한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보통 복음을 예수의 구속적 죽음과 바울의 칭의교리로 보지만 복음서의 문맥은 그런 의미에서 복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예수의 일생이라는 수수께끼,  그의 생애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이제껏 서구 기독교전통에서 복음서들은 바울서신에서 추론해 낼 수 있는 내용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사용될 뿐, 복음서의 진짜 메시지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그동안 우리가 복음서를 제대로 읽지 않고 다른 자료에서 얻은 사상과 신념의 체계에 복음서를 끼워 맞춰왔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나는 복음서들이 스스로 이야기하게 하려고 한다.

 

정경과 신조

복음서와 기독교의 위대한 신조들 사이에도 이런 측면이 반영되어 있다. 리처드 헤이스는 정경의 예수는 당연히 교회의 신조 속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에 관하여 복음서가 보여주는 그림과 신조가 제시하는 그림이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조들은 예수에 대해 언급할 때, 그의 동정녀 탄생에서 시작해 곧바로 그의 고난과 죽음으로 이동하지만 복음서들은 그렇지 않다. 내가 보기에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의 탄생과 죽음 사이의 기간에 예수가 행한 일들을 충분한 분량으로 제시하는 것을 굉장히 중시한다. 특별히 복음서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했다는 이야기를 엄청나게 많이 하지만 신조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신조들이 애초에 어떤 이유로 형성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대 교회는 많은 문제들과 싸움들에 직면했다.  3세기 동안에 많은 순교자가 생겨났고 내적인 분열도 있었다. 2-3세기에는 영지주의와, 4-5세기에는 아리우스주의와 큰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런 논쟁들은 초대 기독교가 당시의 그들에게 중요한 내용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형성하는데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논란이 되는 내용의 목록들을 작성하고 합의를 이루어 갔으며, 이 목록들은 믿음의 법칙을 공유하는 신조로서 성문화되었다. 이 신조들은 때로는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지난 천오백년 동안 기독교 신앙과 삶의 증표이자 상징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해 왔으며, 그 특출한 간결함과 명료함, 그리고 신앙을 일깨우는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오늘날까지 그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신조들이 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가 그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 행한 혹은 말한 어떤 내용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초대 교회는 복음서는 읽고 믿었을 것이지만, 그들은 복음서의 중요 내용들을 신조 안에 동일하게 언급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이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오늘날까지 복음서가 진정으로 말하는 바를 파악하는데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신조의 목적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라면, 예수가 행하고 말한 것들을 길게 진술하고 있는 복음서들은 시간을 낭비한 것이 되고 만다. 복음서들이 들려주려던 이야기는 초대교회의 위대한 신조들 속에서는 거의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복음서들은 하나님나라에 대해 언급할 때, 어떤 의미로든 그 나라가 예수의 사역 속에 현존했던 실재로서 이야기를 하지만 신조들은 예수의 삶과 관련지어 이 특징을 언급하는데 실패했다. 니케아 신조는 오히려 그와 반대로 예수의 나라는 그가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에야 수립될 것이라고 암시한다. 신조들은 모두 예수가 승천하여 아버지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하는데, 다니엘 7의 내용을 반영하는 이 구절은 고대 유대 사상에서 예수가 온 세상의 통치를 맡은 아버지의 오른팔이란 의미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승천은 예수가 죽어서 하늘나라로 갔다고 말하는 표현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승천을 이 세상에 대한 예수의 권세라는 관점이 아닌, 초자연적 영광이라는 모호한 의미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승천은 예수의 보편적 임재와 주권적 통치가 아닌 예수의 부재를 암시하는 개념이 되었다. 하지만 사복음서에서 예수의 통치는 그가 승천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된 일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가 그의 공적인 생애를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이미 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나는 신조들과 복음서는 애초부터 나란히 함께 걸어가도록 의도되었기 때문에 신조에는 예수의 말과 행동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 그리고 하나님나라 선포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고 본다. 복음서와 그 안의 구체적인 가르침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그 내용들을 신조 안에서 재차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면 신조 안에 복음서의 내용이 언급되지 않더라도 용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신조들이 작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신조는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성령에 대해 꼭 알아야 할 내용이라고 선언되었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어버렸다. 그리하여 교회가 자신의 삶의 기반으로 줄곧 간주해 온 그 위대한 신조들이 결과적으로는 복음서들이 본래 전하려고 한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그 대신 그 외의 내용들(복음서가 사실 말하지 않는)을 전달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 성경과 신조 사이를 가로지르는 엄청난 심연을 보고 있다. 복음서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예수의 모습은 하나님나라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신조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예수의 모습은 그의 기적적 출생과 구속적 죽음, 초자연적 부활, 내세적 승천과만 관련되어 있다. 복음서들은 전적으로 왕이 되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신조들은 하나님이 되신 예수에게 집중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 위대한 신조들이 복음에 대해서는 속빈 강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신조와 정경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교회는 주저없이 신조를 선택했고 정경은 혼자 힘으로 살아남도록 내버려 두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이신칭의 교리를 강조하는 종교개혁의 다양한 공식적인 진술들이 믿음의 법칙으로서 초기 신조들을 암묵적으로 대체했다. 종교개혁의 공식적인 진술들이 결국 핵심을 차지했고, 사복음서는 그 진술들을 증명하면서 그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만 소중하게 다뤄졌다.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문장에서의 용법이 결정한다. 한 문장의 의미는 단락에서의 용법에 좌우된다. 그리고 한 단락의 의미는 그 단락이 기여하는 더 큰 문서 안에서의 용법이 결정한다. 구체적인 내용도 지극히 중요하지만, 전체 그림의 일부로서 중요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 큰 그림의 진정한 모습을 잊고 있다.

 

2장 반대편의 문제: 몸통은 다 있는데, 망토가 사라졌다

 

신조가 없는 예수?

역사와 관련된 질문, 즉 그 일은 실제로 발생했는가? 라는 질문을 가지고 복음서에 접근하는 방식이 18세기 이후로 유행하고 있다. 이 유행이 질문에 대해 답변하는 방식은 이렇다. 예수는 분명 실존했지만 그의 기적적 탄생, 죽음이 지닌 구원의 의미, 그리고 부활과 승천 같은 일들은 결코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 아니고 후대 교회가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덧붙인 것이다. 예수와 초대 기독교 그리고 복음에 대한 이런 자유주의적 견해는 학술서적과 대중서적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책들 속에 등장하는 환원주의 안에 계속 살아서 숨 쉬고 있고, 이것은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통이 되었다. 이런 견해의 강점은 교회의 신조들이 간과해 온 복음서들의 내용에 어느 정도는 주의를 기울이려고 노력한다는데 있다. 그리고 그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서 나온 결과가 강력한 사회복음 강령이다. 이 강령은 복음서가 예수에 관해 강조하는 많은 내용들, 즉 예수가 가난하고 아프고 약한 자들을 돌본 내용들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이 강령의 약점은 그 속에 중간 부분, 즉 예수는 왜 사셨는가에 관한 부분을 가장자리의 신조적인 질문들, 즉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 재림과 통합하려는 의지나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자유주의적 환원론은 신조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고 복음서의 중간내용을 하찮게 여기는 대신, 복음서의 중간내용들을 소중히 다루고 양쪽 끝에 있는 이상한 초자연적 내용들, 나중에 신조들 속에 포함된 사상들을 걸러내 버리려고 한다. 물론 우리는 이 가장자리 없는 몸통 그림이 지닌 더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할 필요가 있지만 복음서에 대한 이런 환원주의적 해석도 복음서 자체가 간절히 전하기 원하는 이야기를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 점은 물론 그와 반대되는 이유 때문이기는 하지만 자칭 정통적 해석이 저지른 일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복음서를 자유주의적으로 읽는 집단에게는 예수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다녔지만 그의 제자들과 초대교회는 예수에 대해 말하고 다닌 것처럼 보였다. 이 점이 바로 신조들의 해석에 맞서 복음서를 자유주의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옹호하는 핵심강령이다. 이들에게 신조들은 당사자인 예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들에 집착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주장은 극단적인 교리주의자들의 우월감을 깎아내렸지만, 그들이 채워 넣은 내용 역시도 그들 나름의 현대적 우월감의 표현이었다.

 

숨겨진 배후의 도전: 신권정치(Theocracy)

복음서들이 자유주의적으로 읽힌 배경에는 18세기의 사상적 문화적 운동이 있다. 스스로 계몽주의란 이름을 붙인 이 운동의 핵심에는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혹은 그의 대변자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통해서건 더 이상 이 세상의 일에 간섭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결의가 자리 잡고 있다. 인류가 이제 성년에 도달했으니 더 이상 신권정치를 위한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럽과 미국의 계몽주의에서 하나님은 영향력이 전혀 없는 윗자리로 명예퇴직을 당했다. 라이마루스를 위시한 계몽주의자들이 예수의 가르침 속의 하나님나라는 폭력적인 군사적 반란 혹은 세상의 종말, 이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한다고 주장했을 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을 현실세계에서 확실하게 추방해 버리겠다는 결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결의는 새로운 연구를 통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런 식의 철학적, 정치 신학적 전제를 가지고 추진한 연구의 결과물일 뿐이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 이후의 역사적 회의론이 당면한 진정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시대를 주도한 사람들은 홉스, 루소, 볼테르, 제퍼슨 같은 사람들인데, 특히 제퍼슨은 믿음과 공적인 삶 사이에, 그리고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했고, 그것은 라이마루스를 비롯한 사람들이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박아놓은 분리와 정확히 동일한 것이었다. 이런 철학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계몽주의의 주류철학은 단순히 신들이 인간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존재하며 이 세계의 일에는 무관심하다고 가르쳤던 고대 에피쿠로스 철학의 한 아류일 뿐이다.

 

이런 생각을 정치에 적용하면 우리는 민주주의, 즉 그 자체의 내적인 욕망에 따라 질서를 잡아가는 사회에 도달하게 된다. 이제 정치는 통치자에게 부여되었던 신적인 권리를 거부하고 대신 세계의 질서를 엄격한 정교분리라는 기반 위에 세워가고 있다. 라이마루스가 주장한 유대인의 실패한 혁명, 슈바이처가 주장한 실패한 묵시적 선지자, 이 둘 가운데서 하나만 선택하라는 것은 잘못된 양자택일이다. 라이마루스도 슈바이처도 다른 가능성을 고려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복음서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왕이 되신다고 주장함으로써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나 계몽주의자들에게 진정한 당혹감을 줄 가능성이 있다. 복음서들의 전체 요지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왕이 되셨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신권정치라는 주제였다. 그러나 계몽주의 세계에서 신권정치는 부패하고 게으른 목회자가 대중들을 겁주고 괴롭히는 말로 들렸을 뿐이다. 회의적인 개혁주의자도 경건한 정교회 교인도 신권정치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코흐바 반란 이후의 랍비들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가 이뤄지는 꿈을 포기하고 개인적인 경건과 종교의 세계로 숨어들어 갔다. 예수를 예수 본인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논의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는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모두 복음서에 대해 그릇된 질문을 던져왔다는데 있다. 복음서들이 그런 질문에 답하려고 기록된 것이 아닌데 그런 질문들만 계속 제기되었고 정작 복음서들 자체가 던지던 질문들은 무시되어 왔다. 이제 새롭게 복음서를 들여다 볼 때가 되었다.

 

정통의 반응

예수는 진정으로 신적인 존재였는가?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 18세기 교회는 그가 신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 결과로 복음서 안에서 그릇된 내용을 찾아내려는 복음서 읽기가 나타났다. 그래 기적들이야! 기독교 옹호론자들은 바로 이거야를 외쳤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구약 시대에도 기적을 행했던 사람은 많다(모세, 엘리야, 엘리사). 그렇지만 그런 기적을 행했다고 해서 그들이 삼위일체의 제2은 고사하고 신적인 존재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서구 기독교 전통을 연구하면서, 적어도 20-21세기를 통과하는 시기에 복음서들의 강력하고 도전적인 메시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왕이 되셨다는 메시지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예수가 이제 세상의 합법적인 주이시며 다른 주들은 그의 발아래 엎드려야 한다는 종말론적 메시지다. 이것은 세상의 마지막을 알리는 그런 하찮은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소망이 성취될 때 일어날 것으로 기대된 일들에 관한 의미에서 종말론적 메시지다. 이스라엘의 소망들은 시공간상의 우주의 종말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것이다. 복음서는 바로 사람들이 상상하던 것과 다른 이 중대한 사건이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실제로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조들은 이 내용을 완전히 무시한 것 같고, 후대의 복음주의 운동 역시 개인구원을 설파하는 복음에 열중한 나머지 이 내용을 대체로 무시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펼치려는 주장은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떻게 예수를 통해 왕이 되셨는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잊어버린 복음서 이야기의 핵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서를 오독함으로써 바로 이 내용이 복음서들이 애써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한 내용이란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3장 불충분한 답변들

 

그렇다면 교회는 보통 이 중간부분들, 즉 망토 안의 몸통을 가지고 어떤 작업을 해 왔는가? 교회의 전통은 여러 가지 형태의 답변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나는 그 답변들 모두가 복음서들이 실제로 이야기하는 내용에 근접하지 못한, 불충분한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치유 사건과 잔치, 산상수훈,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폭풍을 잠잠케 한 사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 등 예수가 태어난 때 혹은 적어도 그가 세례를 받았던 때로부터 그가 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한 때 사이에 일어난 일들, 복음서들이 제시하는 이 풍부한 자료들이 전달하려는 요점은 무엇인가? 교회의 전통은 네 가지 형태의 답변을 제시하고 있지만, 답변 모두 사복음서가 실제로 이야기하는 내용에 아주 근접한 내용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천국에 가는 것

불충분한 답변들 중 첫 번째는 예수가 사람들에게 천국에 가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것인데, 나는 이 답변이 심각한 오류라고 생각한다. 이런 오류가 발생한 주된 원인은 수세기 동안 서구 기독교는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핵심이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그 관점에 맞추어 모든 것을 해석한 데 있다. 서방 교회는 전통적으로 복음서들에서 말하는 천국 혹은 하늘나라를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복음서에서 말하는 하늘나라는 인간이 천국에 가는 것과 관련된 단어가 아니라 하늘의 통치가 땅에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나라라는 이 구절은 사실 교회에서 굉장히 이른 시기부터 이렇게 다른 의미로 이해되어 왔다. 이와 관련해 통상적으로 오해되는 다른 표현은 영생인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천국에 가는 방법이라는 이해가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육체에서 분리된 영원이란 개념은 플라톤적 사고이지 성경적 사고가 아니다. 누가복음에서 젊은 관원이 예수에게 영생을 상속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 관원은 자신이 죽을 때 천국에 가는 방법을 물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장차 가져오실 세계, 즉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공의와 평화와 자유의 새 시대에 관하여 물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서구 기독교가 처음 출발한 곳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표류해 왔는지를, 그래서 스스로 표류해 왔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

복음서의 중간 부분에 대한 불충분한 답변의 두 번째는 그 내용을 윤리 혹은 어떻게 행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다. 서구 기독교에서는 산상수훈을 일종의 성명서처럼, 즉 진정으로 선한 인간의 삶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예수의 교훈을 정리한 성명서처럼 들먹인다. 탈기독교 문화에 접어든 영국에서는 대부분 예수를 도덕 교사로, 복음서를 그의 도덕적 가르침을 모아놓은 책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런 주장에도 일말의 진리가 들어있다. 예수는 분명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친 교사였다. 그러나 예수는 단순한 도덕교사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다가온다고, 그리고 그 새로운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도덕적 모범이신 예수

세 번째 불충분한 답변은 예수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모범을 제시한다는 주장이다. 예수의 순전하고 관대한 사랑, 그리고 악의와 억압에 대한 그의 두려움 없는 질책은 이런 주장에 매우 적합한 내용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온 목적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만약 예수가 세상에 온 목적이 완벽한 삶의 방식을 가르치거나 그 본보기가 되려는 것이었고, 자신을 보고 사람들이 모방하기를 바랐다면, 우리는 그 목적이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 물론 모방이라는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는 그냥 모방해야 할 본보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상황이 흘러가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전혀 새로운 일을 행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큰 틀 속에서 모방해야 할 본보기이다.

 

완전한 희생 제물이신 예수

부적절한 네 번째 대답은 첫 번째와 세 번째 대답을 묶어 보려는 시도였다. 예수의 목적은 여전히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는 것이지만, 여기서 예수는 단순한 윤리적 본보기가 아니라 완벽한 희생제물이라는 것이다. 이 답변과 관련하여 일부 개혁주의 분파에서는 예수가 모세의 율법을 성취함으로써 자신의 축적된 공로 혹은 의를 획득했으며, 그 의를 믿는 자들에게 전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바울 신학의 일부 내용에서 특히 칭의에 관한 가르침에서 주요 주제가 되었다. 즉 예수의 죄 없는 삶과 완벽한 율법 준수로 구성되는 능동적 순종과 그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수동적 순종이 합하여 그리스도의 순종을 구성하여,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에서 가르치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그 내용이 정말로 복음서들이 우리에게 애써 이야기하고자 했던 내용이라면 복음서 기자들은 그 작업을 그다지 잘 해내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동일시할 수 있는 이야기

다섯 번째 불충분한 대답은 완전히 다른 노선을 택한다. 사람들은 복음서들이 기록된 목적은 우리가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우리를 동일시하고 그들에게 발생하는 일들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길을 찾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말에도 일말의 진리는 있지만 복음서와 관련하여 제기해야 할 올바른 질문을 놓치고 있다. 우리가 복음서들과 관련하여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질문은 그 책들을 어떤 다양한 목적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책들의 이야기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예수의 신성을 증명한다?

여섯 번째 불충분한 대답은 복음서가 예수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내용을 복음서의 일차 목적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수세기 동안 사람들이 예수에 관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 중요한 내용이 예수가 완전한 신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복음서가 예수에 대해 진정으로 말하려고 했던 바도 그 내용이 틀림없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이야기한 시기는 1세기가 아니라 초대 교회가 그리스 철학이라는 더 넓은 세계로 옮겨간 후대였다. 5세기에 작성된 칼케돈 기독론은 예수는 진정으로 완전한 신이자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고 선언했다. 이 추상적인 기독론은 그 당시에는 논의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칼케돈 신조의 내용과 복음서들의 내용은 서로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문서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말하려는 요지는 복음서가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복음서는 그것을 당연한 사실로 전제하고 있었다), 그것이 복음서가 우리에게 간절하게 전달하려고 한 내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서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가 하나님인지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 무엇을 하셨는가에 있다. 과거에 학자들은 요한복음은 신적인 예수를 보여주고, 공관복음은 인간적 예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요한복음은 자신의 기록 목적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신성을 믿게 하려고 기록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그것을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 마침내 이루셨음을 믿게 하려고 기록되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전위활동

이런 부적절한 답변들 때문에 오늘날의 복음서에 대한 온갖 종류의 자료들은 넘쳐나는데도, 그 배후에 있는 중요한 이야기들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우리는 그 모든 비유들, 윤리적 가르침들, 비범한 행위들을 자료로 사용하여 완벽하고 훌륭한 신학적, 실천적 의미들을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복음서들의 핵심 요점은 정작 무시되고 말았다. 물론 교회는 복음서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는 복음서들이 애써 말하는 바,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왕이 되셨다는 놀랍고도 거대한 주장을 거의 잊고 있다. 교회는 복음서를 이해할 대안적인 전략들을 수없이 개발해 왔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복음서들이 실제로 제시하는 그 위험하고도 도전적인 메시지를 차단해 버렸다.

 

2부 음량 조절하기

 

4장 이스라엘의 이야기

 

傳記로서 복음서

음향시설의 네 스피커처럼 4복음서를 잘 조정해야만 음악의 균형이 깨지지 않고 온전한 복음의 오케스트라가 제대로 연주되어 들릴 것이다. 복음서는 저마다 차이를 지닌 전기들이고 네 개의 더 큰 이야기들이 있는 것이고, 이 이야기들 모두가 함께 돌진해 달려오는 꼴이다. 우리가 이 복음서들 전체에서 귀 기울여 듣는 선율은 당연히 예수 그분의 삶이라는 거대한 선율이다. 복음서들은 엄청나게 많은 내용을 생략하고 있다. 어떤 역사도, 어떤 전기도 당신에게 모든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복음서는 스스로를 전기로, 예수의 전기로 제시한다. 하지만 복음서들은 저마다 차이를 지닌 전기들이다.

 

전편과 속편

오늘날 복음서를 읽는 많은 사람들은 마치 그 배경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심지어는 완전히 다른 배경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복음서를 읽는다. 4채널 입체 음향시스템 중 첫 번째로 켜야 할 스피커는 바로 이것이다.  4복음서는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이야기의 절정으로 제시하고 있다. 저자들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하려고 의도적이게 특정한 틀에 맞추어 자료를 제시한다. 이 소리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당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전하던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기이한 이야기

이스라엘 고대 성경의 틀을 잡고 있는 것은 하나의 내러티브, 즉 아직 끝나지 않은 내러티브, 끝나지 않은 계획표(agenda)이다. 나그네가 지도를 잘못 보고 길을 잃어, 결국 적군들에 둘러 싸인 채 헤어 나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만 여행 이야기에 가깝다. 영광스러운 시작과는 달리 그 뒤로는 지속적인 퇴보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곤혹스럽고 수치스러운 다양한 실패들에 봉착하고, 결국에는 물음표로 마치고 만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복음서를 단순히 보편적인 인류의 곤경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 정도로 읽어왔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해결책이 아닌 문제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신조들이 불길한 간극을 남겨놓는다. 신조들은 이스라엘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즉 복음서를 이스라엘의 이야기 전체에 대한 해답으로 보는 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 대한 해답으로 보는 경향을 더 강화시킨다. 그 신조들은 창세기 3장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4복음서 저자들이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개작하여 이제는 예수의 이야기 안에서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절정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일이 그들에게 중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1번 스피커다. 이 소리는 상당히 큰 소리로 음량을 높일 필요가 있다.

 

마태 : 목표에 도달한 이야기

마태에게는 족보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족보를 통해서 마태 자신이 스스로 어떤 종류의 이야기를 전한다고 생각했다. 예수 당시 유대인 대부분은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포로 상태가 제대로 종식된 것으로 믿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땅에서 여전히 노예 상태였다. 이사야와 에스겔의 위대한 약속들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마태는 햇수가 아닌 세대의 수로, 즉 열네 대가 세 번 지나갔다. 일곱이 여섯 번 지나간 것이며, 이제 예수와 함께 일곱 번째 일곱에 도달한 것이다. 예수 자신이 몸소 희년인 것이다. 마태가 강조하는 개념, 즉 예수의 삶이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 핵심적이었던 요소들을 요약해서 되풀이하고 있다는 개념이다. 예수가 모세, 다윗, 야곱, 엘리야나 엘리사를 만난다. 이러한 회상 장면들은 모두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의 단일 이야기가 이제 마침내 그 결론에 도달했다는 거대한 의미다. 마태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에 이스라엘이 공헌한 유일한 내용은, 그 당시 그들의 상황이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을 해방시키러 오셔야만 할 상황, 즉 반역과 혼돈 상태에 빠져 있던 상황이었다는 것 뿐이다.

 

우리가 1번 스피커를 켜면, 그 음악을 통해서 4복음서 모두가 구약을 언급하며 예수를 예언의 성취로 제시한다는 간단한 설명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 사실이다. 즉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부르신 이 세상의 창조주께서는 그들을 통해 세상을 구속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에 관한 사건들을, 특별히 왕국을 개시하는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단순히 먼 과거의 예언자들이 멀리서 가리켰을 고립된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오랜 이야기가 길을 잃어 정체되고, 완전히 잊힌 것처럼 보였지만, 그 사건들이 그 이야기를 올바른 목적지로 데려가고 있다고 보았다. 이스라엘의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부르신 이 세상의 창조주께서는 그들을 통해 세상을 구속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온 세상 이야기의 축소판이자 박동하는 심장이며, 또한 세상을 구원하는 궁극적인 힘의 원천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시는 일은 곧 하나님께서 전 세계를 위해서 하시는 일이기도 하다.

 

마가 : 예수,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의 침입

마가복음은 예수의 도착과 세례 이야기를 궁극적 구속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백성을 구출하러 귀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사야와 말라기의 예언이 마침내 실현되는 순간이라는 생각을 내비친다. 마가는 고대 히브리 성경에서 유래한 주요 주제를 취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자신의 옛 약속을 성취하려고 움직이실 때에 극적이고 철저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그 일을 하실 것이란 주제이다. 지금 성취되는 것은 급진적이고, 예견되지 않았으며, 아마도 환영받지 못한 심판과 긍휼의 약속이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줄곧 약속하셨던 새 일이라는 의미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마가는 연속되는 극적인 사건들을 핵심적인 순간이 될 때까지 차곡차곡 쌓아간다. 예수의 죽음까지도 성경의 약속이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방식으로 성취되는 것의 일부로 여겨질 것이다. 예수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성취하고 계신다.

 

누가 : 성경은 틀림없이 성취되었다

누가는 서문을 작성할 때, 우리가 사무엘과 다윗 왕의 위대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서문을 듣도록 구성해서 모든 내용이 참된 왕의 등장을 가리키도록 했다. 제자들조차 그의 체포와 재판과 죽음 속에서 어떤 성취의 흔적을 읽지 못하여, 엠마오 이야기를 통해 예수가 그들에게 거대한 이야기를 풀어 설명해줄 때, 비로소 새롭게 성경이 열리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누가는 예수와 관련된 사건들을, 그 안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이전 역사가 요약되고 하나님이 지정하신 목적으로 이끌려 가는 사건들로 보았던 게 분명하다. 복음서 저자들이 열렬하게 이해시키려 했던 핵심 내용은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이 사실상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하셨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요한 : 창조와 새 창조

요한복음의 서문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에서 거한다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는 천막을 치다라는 의미이며, 광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성막을 건설했던 것과 같은 의미를 반영하는 내용으로, 그의 간결하고 심오한 서문의 틀을 잡았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이스라엘 역사가,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 세계의 역사가 운명적인 순간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이 백성은 다른 길을 찾고 있었다. 요한도 역시 예수 이야기를 이스라엘 이야기의 역설적인 절정으로 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메시아직(Messiahship)이라는 주제가 반복해서 강조되는 이유이다.

 

요한은 예수가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고대해왔던 그 사람인지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 대다수는 마음속에 그와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성경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는 그 전망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고대 성경 이야기가 어떻게 이야기 되어야 하며, 특별히 그 이야기가 어떻게 그 목적에 도달하는가에 대해서 예수와 그 당시 이스라엘은 서로 상충하는 전망을 내세우고 있었다. 예수는 모세가 성경을 기록할 때 자신에 대해서 기록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도 자신을 바라보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는 단순히 상이한 관념이나 이론이 아니라 정치적 충돌로 드러난다. 요한은 예수가 옛 선지자들과 같은 노선을 따랐다고 주장한다. 옛 선지자들의 말 속에는 이스라엘이 보고, 듣고, 이해하는 데 실패할 것이라는 예언이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역설적인 의미에서 왕위에 등극한 것이다. 이 사건은 그 위대한 성경 이야기를 완성하는 최종적인 순간이었다.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이야기가 완결되었고, 창조의 이야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의 이야기가 완성되었고, 예수의 부활과 함께 곧바로 시작된 바 이제 새 창조가 시작될 수 있고, 이제 새로운 언약이 개시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목적에 도달하고 이제 온 세계 안에서 열매를 맺는다.

 

결론

도마복음 같은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성경의 복음서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거부하는데, 이는 실제로 예수의 말과 행위를 이해하는 틀로서 하나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관념 자체를 거부한다. 또한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에 대한 언급을 회피한다. 이는 그들이 주님과 달리 세계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의 구원을 제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복음서 저자들이 이스라엘 이야기를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예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복음서들 속에서 울려퍼지는 딱 맞아 떨어진 화음을 결코 들을 수 없다. 대제사장 가야바와 당시 이스라엘 공적인 대표들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외에 다른 왕을 원치 않는다는 선언 대신에,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선언하고 말았다. 요한은 그들이 못박게한 예수가 그들의 참된 왕이고 십자가 처형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완전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다. 우리 음향체계의 2번 스피커의 소리를 미리 듣게 된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그저 하나님의 백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야기- 이스라엘과 세계 온 인류의 창조주 하나님의 이야기인 것이다.

 

5장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야기로서 예수의 이야기

 

왜곡된 잡음

1번 스피커가 이스라엘 이야기가 곧 예수의 이야기라면, 2번 스피커는 약속대로 자기 백성에게 되돌아오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야기로서 예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해준다. 2번 스피커의 문제는 1번과는 반대로 이 스피커의 음량이 너무 크게 틀어진 나머지, 이 스피커가 만들어내는 잡음은 왜곡되고, 다른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까지 거의 압도해 버렸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일들을 행하시겠다고, 특히나 이스라엘과 전 세계에 대한 그의 주권적인 통치를 확립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이야기와, 예수가 바로 그 의도를 실제로 구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전할 때, 그 이야기가 이스라엘의 이야기와는 관련이 없고, 단순히 창세기 3장에서처럼 인간의 죄의 이야기에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성경의 하나님 이야기

창조주 하나님은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그의 피조세계라는 성전에 그 자신의 형상”, 곧 인류를 세운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오늘날로 치면 이라크에 살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유목민처럼 유랑하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으로 향하라고 지시한다. 이 하나님은 극적이고 위대한 약속들을 포함하는 언약을 아브라함과 체결한다. 창세기부터 출애굽까지 네러티브의 핵심은 자신을 위하여 거처를 세우시고, 자기 형상을 따라 인류를 세워 그의 세계 안에서 창조성을 발휘하도록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반역으로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출애굽 관련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여행에 동행하셨고, 나중에 성막”, “회막을 짓기 위한 지침을 내리셨다는 점이다. 이러한 패턴, 즉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 가운데 살기로 뜻하셨는데, 그들의 반역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해졌지만, 마침내 그 의도를 이루시려고 은혜롭게 되돌아 오시는 패턴은 어느 정도는 구약 전체의 이야기다. 우리는 복음서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위대한 성경의 주제를 발견한다. 그 하나님은 아무 이 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과도하게 크게 켜 놓은 2번 스피커,  그는 신입니다! 그는 신입니다라고 단순하게 외치는 스피커의 소리를 일단 줄여보자. 그러면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가 야훼가 자신의 백성에게로 마침내 어떻게 되돌아오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딱 맞는 이야기를 찾아서

요한복음은 고기독론 즉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생각했지만, 공관복음은 저기독론 즉 인간으로 오신 예수에 더 초점이 맞추어졌다고 보는 시각이 수세기동안 있어 왔다. 이러한 대조는 양쪽 모두를 잘못 본 것이다. 마가복음 첫장에도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즉 고기독론을 가리킨다. 마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마침내 돌아오신다는 말라기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구약의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된다는 구절들을 통해, 요한의 기독론만큼이나 높은 기독론을 보여준다. 즉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현존하셨고, 인간이 되셨고, 자기 백성 가운데 살기 위해 오셨고, 그의 나라를 세우셨고, 그들의 곤경과 참상 전부를 자신에게 지우셨고, 오랫동안 기다려온 그의 새로운 세계를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마태와 누가 : 예수를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다

마가에게서 예수 이야기를 마침내 귀환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야기로 읽는 방법을 배웠다. 마가복음을 기초로 한 마태, 누가는 더 쉽게 이 작업을 이루려고 하였을 것이다. 마태는 자신의 이야기를 위해 스스로 창조한 틀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아주 분명하게 펼쳐 나간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 예수라는 이름을 야훼가 구원하신다란 의미로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를, 그가 자기 백성들과 동거하고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이 처한 곤경에서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오셨음을 보아야 한다. 마지막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이 예수가 우리와 함께 계시다가 된 것이다. 누가는 1944절에서 너는 하나님께서 너를 방문하시는 순간을 알지 못했다.” 즉 방문의 날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백성이 수세기나 된 그들의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는지 감찰하기 위해서 그가 마침내 돌아오시는 날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누가가 의도한 그 비유의 의미다. 예수는 그 자신이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그 시점에 진행되는 일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자신의 백성에게 다시 돌아오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는 예수가 행하던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이라고, 혹은 역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이 바로 예수가 행하던 일이라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세 공관복음서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가운데, 의식적으로 어떻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심판과 긍휼을 베풀면서 자신의 백성에게로 돌아오고 계신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일을 벗은 영광 : 요한의 성전 기독론

요한은 처음부터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에게 예수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이 되셨는지, 창조자가 어떻게 그의 피조세계의 일부가 되셨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 우주만물을 자신의 소유물과 거주를 위한 성전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신실한 은혜의 행위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성전을 지으셨다. 광야에 성막을, 나중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으셨다. 하나님의 현존은 위험천만한 거룩이면서 동시에 놀랍도록 힘을 북돋아주는 실제였다. 기원전 587년 바벨론이 성전을 파괴한 사건은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재앙이었으며, 그 사건의 의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의 집을 버리셨고, 그 성전과 그 도시를 그들이 오랫동안 받아 마땅한 운명에 내버렸두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스겔의 판결이었고, 그 시대의 다른 작가들의 말에서도 메아리쳐 울리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 이야기의 끝일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다시 돌아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요한은 이 약속이 예수 안에서 실현된다고 처음부터 주장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카이 에스케노센 엔 헤민,  우리 가운데 그의 스케네(skene), 즉 그의 천막을 세웠다.”(장면(scene)이 이 단어에서 파생) 요한의 예수는 세 가지 의미, 즉 구약의 살아있는 말씀, 유대인의 소망 속의 쉐키나(성전 안에 천막을 친 하나님의 현존), 그리고 지혜의 결합이다. 이스라엘에게 이 세계의 고통과 공포를 품고 이 세계와 함께 하라고 명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자신이 몸소 그 고통과 그 공포를 품은 피조물이 되셔서 그 안에서 자신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하실 것이다. 복음서는 매 페이지마다 마음속에 이 내용을 간직하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6장 하나님의 갱신된 백성의 출범

 

3번 스피커도 종종 너무 크게 틀어져 있다. 이 스피커는 복음서를 초기 교회의 삶을 반영하는 내용으로만 읽는다. 따라서 복음서는 이스라엘의 내러티브와는 아무런 진정한 연관성이 없으며, 예수의 이야기가 사람의 모습을 입은 하나님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초기 기독교 신앙의 투사 결과물인 복음서를 소유하고 있을 뿐이며, 복음서는 초기 교회의 논쟁들과 위기들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고 본다.

 

높은 음량, 위험한 왜곡

사람들은 복음서의 진술 일부 혹은 전체의 역사적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지적인 성숙의 지표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 이야기들이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반영한다고 대답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 이야기들은 신화. 또다른 선입견은 20세기 초반 신약 학계에서 다수를 차지했던 학파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속성은 외부의 어떤 요소에도, 즉 인간의 업적이나 신분에도, 또한 역사적인 사건에도 의존하지 않는 데 있다고 믿었다. 십자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영국과 미국의 독자들이 이 개념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러한 선입견들은 복음서 전승 전체를 왜곡해왔을 뿐이다. 이것은 복음서 안의 이런저런 요소들이 실제로 역사적이 신빙성이 있는지 없는지 증명해내는 문제가 아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를 따르겠다는, 계속해서 그를 따르겠다는, 그가 살았던 대로 살고, 필요하다면 그가 죽었던 대로 죽겠다는 그리스도인들의 단호한 결심을 뒷받침하고 강화시키기 위해서 예수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초 문서들

3번 스피커를 적당한 음량으로 조절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사복음서를 새로운 운동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작성된 기초 문서로 생각하는 것이다. “공동체들이 그들 자신의 삶의 의미를 설명하고, 그들의 삶에 방향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전하는 이야기라는 의미에서 신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복음서가 전달하는 신화가 현실과 일치하는지의 여부가 핵심 질문이다. 메시아의 이야기 안에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는 것이 바로 교회의 기초 헌장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복음서를 하나님의 갱신된 백성의 출범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하는 이유다. 이스라엘은 대체되는 게 아니라 완성되어야 했다. 복음서들이 기초 문서가 된 것은, 이 책들이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가 그 놀라운 절정에 어떻게 도달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셨다.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단 얘기다.

 

미래 교회의 이정표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그들은 장차 이 책들을 그들의 집단적 삶의 기초 문서로 읽게 될 공동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복음서들은 의식적으로 메시아 예수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단 한 차례의 행동이 어떻게 새로운 세계 질서를 도입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세계 질서 안에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은 그러한 삶을 살도록 위임을 받았다. 이제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임무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그것도 그들이 예수의 생애 동안에 수행했던 임무를 뛰어넘는 임무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들려주고 있다. 복음서는 교회의 삶을 위한 기초 헌장이기 때문에, 그 책들은 일차적으로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이어야만 한다. 교회의 삶과 임무가 예수의 역사적 성취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만한 혹은 우매한 것, 혹은 둘 다일 것이다. 하지만 복음서가 기록된 방식과 관련하여 가장 신비롭고 또한 강력한 내용은 아마도 복음서들이 끝맺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끝이 곧 시작

복음서의 마지막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시작으로 구성되었다. 요한의 경우, 한 문장으로 가장 감동적이게 내러티브 부분을 마무리한다. 누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우리가 핵심을 놓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딱 한 번만 일어나는, 반복될 수 없는 그 순간은 단 한 번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대한 패러다임이자 견본 역할을 한다. 그는 예수 이야기를 하나님의 갱신된 백성의 출범에 관한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복음서 저자들이 하나님의 갱신된 백성을 위한 기초 문서를 작성하는 그들의 직무를 지속적으로 인식하면서 복음서를 집필한 것이다. 복음서는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랬고,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의 헌장으로 고안된 것이다. 즉 예수의 첫 제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헌장으로, 또한 그들의 증언을 통해, 그때 그리고 그 이후에 그 공동체로 들어와서, 말씀과 성례 속에서 예수를 듣고, 보고, 아는 법을 배운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의 헌장으로서 역할 하도록 기록된 것이다.

 

7장 나라간의 충돌

 

4번 스피커는 단순히 소리가 줄여져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꺼져 있었다. 그것은 카이사르의 나라와 충돌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로서 예수의 이야기.

 

하나님과 카이사르

예수는 우리에게 그저 육체만을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일깨운다. 왜냐하면 그 배후에는 더 위험한 세력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카이사르 사이의 갈등은 상대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때마다, 그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어떻게 그들의 하나님이 사악하고 강력한 이방 제국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카이사르의 제국에서 사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1번 스피커의 이스라엘의 이야기 전체는 최소한 한 차원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의 오만한 군주들과 싸움을 벌이고, 그들의 권력을 타도하고, 그 무자비한 억압에서 자기 백성을 구출해 내셨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은 인간 권력의 오만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이사야 40-55장과 다니엘(초기 기독교는 이 두 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의 핵심 내용은 나라 간의 충돌이다. 즉 세상의 나라들과 참된 하나님의 나라 간의 충돌이다.(* eternal vs temporal)

 

요한복음 18-19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예수는 카이사르의 나라를 대표하는 빌라도와 대결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서로 맹렬한 기세로 나라와 진리, 권세에 관한 논쟁을 벌이고, 결국 빌라도는 예수의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이란 문구를 새겨 처형함으로써 그의 주장을 인정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헤롯 왕가가 그 세력이었다. 복음서가 예수의 이야기를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간의 충돌로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상황은 다르다. 지상의 왕들은 자기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그와는 다른 방식, 즉 종의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예수가 이 새로운 유형의 권력을 바로 그의 죽음을 통하여 세우신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이 이사야의 의 사역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출하시는 목적은, 바로 전 세계에 그의 통치를, 그분 자신의 완전히 다른 방식의 권력을 수립하시기 위해서다. 우리가 지금 4번 스피커에서 듣는 음악이 1번 스피커에서 들었던 음악과 정말 조화로운 화음을 이룬다. 예수의 이 이야기가, 절정에 도달한 이스라엘의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계몽주의 이후 세계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기로 결정했고, 처음부터 복음서에 대한 정치적 읽기와 유대적 읽기에 대한 거부는 서로 붙어 다녔다. 이제 복음서를 우리가 정치신학으로 부를 수밖에 없는 내용으로 다시 읽어야 할 때가 되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그 소명을 예수가 담당했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의 권력, 이 세상의 통치 방식의 전복으로 간주된다. 예수는 빌라도 앞에 선다. 이 재판은 바로 세상의 지배자가 심판을 당하는 순간이다. 카이사르의 나라는 카이사르의 나라가 늘 해 오던 일을 또 다시 벌이겠지만, 이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다. 예수의 나라는 분명히 이 세상을 위한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다. 만약 예수의 나라가 통상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면, 즉 현재의 세상에서 너무나 쉽게 생겨날 수 있는 성격의 (사실 야고보와 요한도 원했던 그런 모습) 나라였다면, 예수의 제자들은 무기를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18:36) 예수의 나라(예수를 통해 實演된 하나님 나라)는 전적으로 다른 무기를 가지고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빌라도가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그 무기는 바로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제국은 진리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진리를 만들어, 폭력과 불의가 정상인 우울한 실제 상황을 창조해 낸다. 카이사르와 그의 부하들의 통치조차도 하나님의 더 큰 섭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가 빌라도에게 예속된 권한,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그 권한을 인정한 것은, 당연히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현재 진행 중인 과정 전체를 통제하고 계신다는 자각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유대 지도자들이 마지막 이중적 행보를 이어간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그들은 다른 나라들처럼 되기를 원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제국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그들은 인자가 신원되기를 기다리는 데 지쳐서, 네 괴물들과 협정을 맺기에 이를 것이다. 그들은 종의 소명이 이스라엘에게 건네졌다는 사실을 힐끗 확인하고 나서는, 바벨론의 통치를 받아들이는데 만족한 것이다. 예수는 자기 백성에게 왔지만, 그의 백성들은 그를 알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는 왕이 없다고 외치기는커녕, 장자의 명분을 제국이라는 죽 한 그릇에 팔아버렸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그리고 예수의 사랑을 가장 완전하게 드러내 밝혀주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 카이사르에 대한 자신의 권세와 통치를 수립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이 세상의 지배자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카이사르에게 바쳐라?

마가복음 12:13-17의 이 말은 종교와 정치를 완전히 다른 삶의 두 측면으로 나누고, 누구도 이 중 하나를 다른 쪽으로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 당시에 팔레스타인 유대교 안에서 그 말은 정치적 독립을 의미했다. 틀림없이 예수의 이 말을 듣던 사람 중 다수는 그가 그들의 -로마 혁명을 강력하게 지원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의 반대자 중 다수도 그가 본색을 드러내고 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공표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 질문은 예수가 이 쪽인지 저 쪽인지 그 정체를 들추어낼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문맥상 그 명령은 교회-국가 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모든 측면에서 카이사르를 능가한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그 말씀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의 친-로마 정파와 결탁하는 것도, 자칭 폭력적 혁명주의자들과 공모하는 것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청자들이 갇혀 있던 양자택일의 틀을 깨고 나와 더 깊은 실제를 가리키는 방법이었다. 이제 하나님께서 사례를 받으실 때가 되었다! 즉 그분의 초상이 모든 인류에게 새겨져 있으며, 그분의 새긴 글귀가 창조의 페이지마다, 이스라엘 이야기의 시점 시점마다 기록되어 있는 그 하나님께서 이제 사례를 받으실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그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예수의 승리에 찬 예루살렘 입성 이후이자 그의 체포와 죽임 이전이다. 그 두 사건 사이에서 이 사건은 전체적으로 진행되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핵심 지표 중의 하나다. 즉 전체 이야기는 예수가 자신의 순종하는 고난과 죽음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소유였던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어떻게 진정으로 왕이 되셨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사복음서가 공히 예수의 제자들에게 그분의 백성이 되라는 임무를 남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예수의 업적이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해서 시행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서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그전 2,000년 동안의 배경 이야기(옛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없이는 불완전한 이유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우리가 그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으로 가정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 세대에 교육을 통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이야기를 알려 주어야만 한다. 그 이야기가 불완전한 또 하나의 이유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에게 다른 한 제자의 미래에 관해 질문했을 때, 예수는 반문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한복은 21:22). 복음서 저자들 모두가 그렇듯, 요한복음은 앞을 내다보며 복음서를 마무리한다.

 

3부 나라와 십자가

 

8장 우리가 발목 잡힌 지점 : 계몽주의, 권세, 그리고 제국

 

이 책을 집필하는 나의 목적이 단순히 우리가 복음서를 오독해 왔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우리가 이 책들을 평범한 책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말을 하고 싶다. 복음서들은 이야기 전체가 하나로 묶여 있다고 우리에게 얘기해 준다. 나라와 십자가는 서로의 일부다. 이 둘을 분리시켜 두는 생각의 습관으로 복음서의 핵심 주제에 해당되는 나라를 놓친다면, 다른 모든 내용을 철저하게 왜곡된 방식으로 재해석하게 되어, 복음서를 다른 복음 메시지로 바꾸어 놓게 될 것이다.

 

나라와 십자가의 분리

우선 깨달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후대의 전통이 갈가리 쪼개놓은 많은 내용들을, 사복음서는 그다지 공들이지 않고도 쉽게 한 데로 끌어모아 풍성한 일치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나라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 십자가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을 같은 방의 양쪽 구석에 둔 채 살아왔다. 그들은 각자 상대방의 핵심을 오해하고 있다고 염려했다. 한쪽은 사회-복음 강령을 내세우고, 다른 한쪽은 천국을-위한-영혼-구원 강령을 내세웠다. 하지만 사복음서는 이 두 가지 관점을 통합하여, 그 둘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일치를 이루어낸다.(3부의 대부분을 차지할 내용)

 

우리가 정치라고 부르는 것과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 1세기 당시에는 서로 분리된 실체로 생각되거나 경험되지 않았다. 명백한 사례가 있다. 신약에서 예수의 십자가가 악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대답이 아닌 것처럼 취급되어, “속죄의 의미가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죄를 용서하는 것 정도로 협소해지는 상황을 용인했고, “의 문제는 추상적인 내용이라며, 언급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었다. 그것은 위험한 과오였다. 명백한 이 발생했을 때(2001 9 11일이 떠오른다) 우리 정치인들은 마치 폭탄을 투하해서 이 새로운 (정치적인) “악의 문제 해결할 수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식의 위험한 순진함은 신학과 철학, 정치가 서로 분리된 데서 기인한다. 나는 세상에서 지속되는 다층적인 악의 문제를 바라보는 데 있어 복음서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초기 현대 성경학자들의 눈에는 예수가 선언한 대로의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오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했다. 예수가 무장 혁명을 의도한 것이었든, 세상의 종말을 의도했든, 그 비평학자들이 깨닫지 못한 내용이 있다. 유럽의 계몽주의 철학이 그 내용에는 눈을 감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보지 못한 내용이다. 지난 200년간 비평적 학계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핵심 사안으로 받아들였던 유럽의 계몽주의 세계에서 탄생했다. 그 후 비평적 성경 학계는 두 왕국 이론,  종교/신앙의 나라 국가의 나라를 분리하는 입장이 완전하게 굳어진 독일 루터파의 세계에서 양육을 받았다. 따라서 철학적, 문학적, 신학적인 이유 때문에 복음서의 내적인 핵심 내용, 즉 하나님께서 왕이 되셨다는 메시지는 불가해한 내용이 되어버렸다. 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 즉 이스라엘의 살아계신 하나님을 육체화한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실제로 하나님나라가 출범되고 있었던 인물, 바로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해 불가능한 내용일 뿐만 아니라, 아무도 그 내용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바울, 요한계시록은 이미 새 창조가 시작되었고, 장차 그 새 창조가 완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는 그 새 창조를 다스리고 있으며, 그 통치가 자신의 교회의 증언을 통해서 실현되게 한다. “이 세상의 통치자는 타도되었고, 이 세상의 권세들은 예수의 개선 행렬을 따라 질질 끌려가는 패배당한 폭도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는 방식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서들이 간절하게 우리에게 전하려는 진리이며, 지난 200년 동안 유럽과 미국 문화가 기를 쓰며 억누르려고 노력해 왔던 진리다.

 

계몽주의 세계는 기독교 논리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가 실패했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현대가 만든 신화로서, 교회의 역사를 제대로 살펴보면, 그 안에는 수많은 혼란과 부정도 존재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사랑과 창의력과 아름다움과 정의와 치유와 교육과 소망이 담겨 있다. 계몽주의가 우리에게 기독교도 문제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계몽주의도 스스로 고취시켜야 할 종말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종말론과 경쟁 관계인 종말론이다. 계몽주의는 18세기 유럽에서 세계의 거대한 전환점을 맞았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지나간 모든 역사는 미신이며 무의미한 呪文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제 위대한 빛을 목도했고, 우리의 현대 과학과 기술, 철학, 정치는 새시대의 질서를 예고한다.” 그것이 바로 미국과 프랑스에서 신봉하고 설파했던 이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기독교는 종말에 관한 이야기에서 일개 종교로 전락한다. 세계 역사에는 위대한 전환점이 두 번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도 함께 데리고 가길 원한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예수는 신성의 신비에 접근하는 통로 역할의 인물로서의 예수, 계몽주의 이후 멋진 신세계의 구조를 실제로 강화해 줄 수 있는 도덕적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예수다. 하지만 기독교가 그저 한낱 종교로 전락해 버리면, 그 종교가 가장 먼저 수행하는 작업은 복음서들이 간절히 이해시키려 했던 메시지들을 통째로 입막음해서 침묵시키는 일이다. 복음 메시지는 사실상 무력화되어, 사적인 영성의 영역 저편의 세계, 현실도피주의자의 천국에 존재하는 힘 정도로 치부된다. 그것이 바로 계몽주의가 의도한 결과다. 그리고 교회들은 대체로 이러한 경향을 따라갔다.

 

기독교의 반응

대체로 보아서 교회들은 네 가지 반응 중 어느 하나에 빠지고 말았다. 첫 번째 반응은, 우리는 천국에 갈 것이며 언젠가는 이 낡은 세계를 완전히 떠날 것이기 때문에, 현실의 일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반응이다. “천국이 궁극적인 고향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부활은 조용히 논외로 물러나, 쓸데없는 교리 혹은 심지어는 비유 정도의 위치로 격하되어 버려 19세기 전반에 걸쳐 점차 인기를 끌었다. 그 입장은 사복음서가 제시하는 내용이 아니며, 오히려 영지주의에 더 가깝다. 두 번째 반응은, 신재세례파의 입장이다. 즉 교회는 그저 우리 집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나쁜 짓 하지 말고, 어둠을 밝히는 횃불로 살되, 실질적으로 세상에 참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에는 강력한 종파 분파주의가 내포되어 있어, 신약에 등장하는 예수의 우주적인 주 되심에 관한 위대한 선언에는 관심이 없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반응은, 우익과 좌익의 입장들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우익의 경우, 폭스 뉴스가 표명하는 세계관을 증진시키는 것이라면, 기본적으로 기독교적이며 지혜로운 것으로 간주되며 무조건 정당화된다. 좌익도 비슷하다. 좌익들은 빈곤층과 소외층을 돌보는 데 있어 높은 기독교적, 도덕적 기준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신약이 제시하는 복음의 비전의 진정한 깊이를 가늠해보려는 시도도 없이, 진보적 근대주의의 요소들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것에 불과하다.

 

1세기 유대교에서 권세와 제국

유대인들은 통치자들이 어떻게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이 신경 썼던 것은 통치자들이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 실제로 행한 일들이다. 권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권세를 가지고 당신이 시행한 일들이었다. 오늘날 세계는 안전하고 훌륭하여 권세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나, 권력은 권력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악한 것이라고 하는 관점들은 실제 통치자들에 대한 의구심을 낳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권정치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이 반길만한 말은 아니다. 하지만 1세기 유대인들의 관점과는 다르다. 그들은 포로 상태에 있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그 이방 세계 안에서 지혜롭게 사는 것이라고 믿었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 이방 나라들을 통치하고 있다고 믿었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새롭게 정의되었다. 물론 악의 세력이 끊임없이 이 땅을 활보하는 동안은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모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진정으로 그 나라가 이 땅에 능력으로 임했다고 믿었다. 물론 그 나라는 그들이 이전에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들의 소망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더없이 철저하고 새롭게 정의되었다 할지라도, 그 소망이 실현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성전이 근본적으로 새롭게 정의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신권 정치 또한 정말로 시작된 것이다. 카이사르의 제국과, 그와 유사한 모든 제국들을 능가할 새로운 제국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 제국은 우월한 무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힘으로 승리를 거둘 것이다. 그리고 이 비전이 잘 정리되어 있는 곳이 바로 신약에 있는 사복음서 모음집이다.

 

9장 사차원으로 살펴본 나라와 십자가

 

우리는 이제 본서의 핵심 주장에 도달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전하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어떻게-예수의 공생애와 죽음 둘 다를 통해서, 그리고 그 두 사건 안에서-왕이 되셨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이 핵심 주제는 사복음서 모두에서 철저하게 통합된 방식으로 계속해서 진술되고 있다. 이 통합된 주제의 주요 좌표는 나라와 십자가이며, 좌측에는 예수의 신적 정체성의 문제, 우측에는 부활과 승천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복음서 저자들은 나라와 십자가라는 이 두 핵심 주제를 어떻게 관련시켰는가? 복음서 저자들은 모두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생동감 있고 구체적으로 나타나신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자기 백성 가운데 함께 살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을 그들의 궁극적인 곤경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돌아오신 것이다. 우리가 신조의 내용 순서(성육신, 십자가에 못 박힘, 부활, 보좌에 앉음) 나라를 끼워 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 목록에 항목 하나를 더 얹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 내용에 함축된 전체 내러티브의 균형뿐만 아니라 다른 항목들 모두의 의미까지 바꾸어 놓는 일이다.

 

왕국, 십자가, 그리고 이스라엘

1번 스피커, 즉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으로서 복음서에 관해 생각해 보자. 세상의 문제를 일소할 하나님의 해결책을 간직한 백성인 이스라엘 자체가 문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의 우여곡절 많은 긴 이야기는 난관에 봉착한 것으로 보였다. 복음서 저자들에게는 시편과 예언서들에 나타난 주제, 즉 이스라엘 그 자신이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만 할 것이라는 주제가 등장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신의 고통은 그 백성이 통과해야만 하는 단순한 어두운 통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원래 주어졌던 신적인 소명이 진정으로 성취되는 수단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 전승 속에 고통 받는 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거의 모든 경우에 그들은 결국 고비를 넘기고 극심한 고통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승리와 나라를 찬양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것의 가장 유명한 사례가 되는 시편 22편에서 보면, 고통 받는 이 사람은 죽음의 고통까지 내려갔다가 결국에는 구출된다. 그것은 그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야훼의 나라”, 즉 모든 나라에 대한 그의 통치가 실현되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예수의 이야기를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고난과 이스라엘의 최고 대변자의 고난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더 오래되고 더 큰 목적, 즉 범세계적인 치유의 통치를 수립한다는 목적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역으로 이야기하면, 이 하나님이 마침내 모든 나라가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그들의 악한 길에서 구출해낼 때, 그 수단이 다름 아닌 자신의 백성의 고난 혹은 복음서 자체의 이야기로 하면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그 백성의 공식적인 대표자의 고난이기도 하다.

 

나라, 십자가, 그리고 하나님

같은 내용이, 물론 아주 다른 방식으로, 2번 스피커에도 적용된다. 군중들은 왕 제도에 대한 열망을 따라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그는 도망쳐야 했다. 이렇듯 이 목자의 사역에서 하나님과 다윗은 의미상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구분된다. “예수의 신성을 믿으면서 이 믿음을 도피적인 구원관과 결합시키는 것 역시 가능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기독교 정통의 외적인 형태를 보존할 수는 있겠지만, 문제의 핵심은 도외시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요 구속자이시며, 나라(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하나님의 범세계적인 통치가 수립되는 것)를 출범시키는 예수의 사역은 그의 직무에서 핵심 목표였다. 예수는 이 목표를 위해서 살고 죽고 다시 살아나셨다.

 

이사야 40-55장 전체의 요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바로 이 종의 대표 사역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전 세계를 위한 그의 계획을 성취하실 것이란 사실이다.  의 역할은 야훼를 위해 마련된 것이며, 그 역할의 목적은 나라를 설립하는 것이며, 그 수단은 이스라엘의 대표가 겪을 순종의 고난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육신이라고 부르는 실제가 나라-십자가 조합의 핵심에 자리 잡아 그 조합에 깊이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결국 나라-십자가 조합은 사복음서 모두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예수의 신성은 그의 나라 사역,  십자가-달성된 그의 나라 사역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스라엘의 소명과 신적인 목적이 완벽하게 하나로 결합되는 방식으로 예수의 이야기를 전한다.

 

나라, 십자가, 그리고 교회

3번 스피커는 복음서들이 만들어내는 음악 속의 특정한 차원을 들어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복음서 안의 교회 설립 이야기에서 예수의 첫 제자들은 그의 메시지와 그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 나라의 통치가 실제로 나타나도록 예수를 따르는 면에 있어서도 수월하고 눈에 띄게 숙련된 모습으로 나타나지도 않았다. 사복음서에서 그 나라의 의미 중 일부는, 바로 그 나라가 예수의 첫 제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으로 불쑥 찾아왔다는 것이다. 예수가 이렇게 많은 비유를 사용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의 나라 비전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예상 밖의 내용이었다. 하나님의 갱신된 백성의 출범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 나라의 특별한 의미 중 하나는, 그 나라의 출범 자체가 그의 첫 제자들이 전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내용, 즉 예수의 죽음을 수반한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도 그들이 처음에는 그 내용에 동조하기를 거절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갱신된 백성의 출범으로 본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 속에는 그 백성의 몰이해, 실패, 반역이 핵심 요소로 포함되어 있다. 나라와 십자가라는 주제는 단순히 그 제자들이 배워야 했던 신학적 주제도 아니며, 신조적인 정통을 구성해 나가는 과정에 있던 추상적인 사상도 아니었다. 나라와 십자가는 그들의 삶의 패턴이었다. 그들은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시기에도 그 패턴을 따라 갈릴리 주변에서 그를 따랐고, 또한 나중에도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그 패턴을 따라 이 세상 끝까지 그를 따랐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출범이라는 그의 사역에 동참할 사람들로서 그의 제자단을 구성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공생애 기간에는 열두 제자를, 나중에는 다른 제자들을 파송하고, 나아가 그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는 훨씬 더 많은 제자들을 파송한 핵심 이유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의 방식을 따라 그의 나라를 세우려 한다면,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백성이어야 한다.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백성, 즉 고통을 받으며 나라를-가져오는-자들’, 고통 받으며 나라에-동참하는-자들이다. 사복음서 모두에 함축적으로 간직된 교회론은 예수 자신의 보합적인 소명에 동참하는 공동체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것은 먼저 예수 자신의 고난 때문이고, 다음으로 우리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다. 요한계시록 5장에 나오는 죽임을 당하고 보좌에 앉은 어린 양은 그의 백성의 목자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본보기이기도 하다.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이 세계에 그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방법이다.

 

카이사르의 세계에서 나라와 십자가

4번 스피커는 카이사르의 나라와 대결을 벌이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로 사복음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우리를 초대했다. 사복음서 모두가 예수의 이야기를 카이사르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대결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카이사르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로 본다는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권세들은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실상은 하나님의 목적에 기여하고 있으며, 우주의 중심에 있는 지혜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었을 때, 그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이 세계에 큰 상흔을 남기던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승리를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그는 성전이 더 이상 하늘과 땅이 교류하는 장소가 아니라, 맘몬과 폭력이 통제되지 않은 채 횡행하여, 카이사르의 지배와 결탁한 장소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 자신이 바로 이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장소이며, 이 사실이 가장 탁월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처형이라고 말한다. 십자가의 승리는 세상 나라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 인격적이건 초인간적이건 그 동안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탈해 왔던 모든 권세들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승리다. 복음서 저자들 모두는 예수가 그의 죽음으로 향하는 목적이,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에 걸쳐 가장 악한 짓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저지르려고 결집해 왔던 그 악의 세력에 대하여 아주 역설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라고 보았다. 그가 그들에게 거둔 승리는, 칼과 폭탄으로 얻어낸 승리가 아니라, 그의 백성의 승리이며, 그들이 예수를 따라 행한 고난과 증언의 승리일 것이다. 사복음서 저자들에게는 이것이 바로 나라와 십자가가 마침내 결합되는 방식이었다. 하나님이 왕이 되시기 위해서는, 그 동안 그 자리를 찬탈하고 있었던 통치자들이 반드시 축출되어야 한다.

 

예수는 공생애 동안 지속적으로 그 프로젝트를 개시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가 승리를 거두는 결론에 도달한 것은 십자가 위에서였다. 고난을 받아야 하는 그분의 소명에서 예수를 돌이키려고 베드로가 시도했을 때 예수가 그를 사탄이라고 부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십자가가 패배이며 부활은 지연된 놀라운 승리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활의 핵심 의미는 부활이 그 승리가 이미 달성되었다는 사실에 뒤따라온 즉각적인 결과라는 데 있다. 죄의 문제가 처리되었다. 창조주는 이제 그의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다.

 

10장 나라와 십자가 : 새로운 의미 만들기

 

복음서 저자들 본인에게는 십자가 없는 나라 메시지는 결코 존재할 수 없으며, 예수의 십자가 처형 역시 하나님 나라의 개시와 분리된 의미를 결코 지닐 수 없다는 사실에 일말의 의심도 가져서는 안 된다. 이제 중요한 네 개 스피커의 음량을 조절하고 복음서로 다시 돌아가 살펴보면서, 나라와 십자가를 분리된 두 개의 주제가 아닌 본질적으로 하나의 주제로서 다룰 때 등장하게 될 내용들을 분명하게 진술해보자.

 

세례와 나라

이 내용 역시 2번 스피커(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서 예수)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1번 스피커(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으로서 메시아)의 소리가 필요하다. 하나님이셨던 말씀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 서문은 우리에게 육신으로 오신 그 말씀 덕분에 우리가 그의 영광 즉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의 것과 같은 영광”(1:14)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옛 메시아적 범주는 태초부터 의도된 것으로 하나님 자신을 위한 범주로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공관복음 저자들은 단순히 예수를 죄인들이 용서받기 위해 죽으신 분이 아니라고 말한다. 복음서 저자들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가 실제로는 그의 백성이 그를 믿는데 실패했는데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 그의 주권을 확립할 것이라는 것이다. 복음서의 세례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의 신성에 관한 이야기도 창조 세계의 구출이란 의미에서 특정한 속죄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물론 예수의 신적 정체성을 확증하지만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의 오랜 구원 계획의 절정으로 확증한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로서 오신 하나님의 목적, 그리고 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 그의 정의를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수립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것”(24:26)이 단순히 천국에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십자가 처형은 메시아가 전 세계의 왕이 되기 위해 그런 식으로 오실 것이라고 오래 전부터 예언되었던 적합한 방식이다. 요한은 예수의 나라가 폭력으로 오지 않을 것(18:36)이며, 그 나라는 그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올 것이고, 그가 땅에서 높이 들리면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끌어 모을 것(12:32)을 이야기하고 있다.

 

명패와 십자가

빌라도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다. 빌라도는 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예수가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수 본인도 그 통치자와 나눈 대화 속에서 자신의 왕위는 진리를 증언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왕위를 재정의하였다. 하지만 예수를 죽음으로 떠민 일이 그의 주권적 통치와 치유하는 사랑으로 이방 나라에 정의를 가져오실 분이 즉위하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13:1) 사복음서 모두가 예수의 죽음을 왕적인 사건, 노골적으로 메시아적인 사건으로 독자들에 촉구한다. 예수는 줄곧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다고 선포했다. 요한은 예수는 참된 왕으로 오셨으나 그의 나라는 로마 지배자들에게는 어리석은 짓으로,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일로 보이는 기대치 못했던 모습으로 왔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처럼 땅에도 임한 다윗의 참된 아들이자 후계자인 인물을 통해서 행사되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그 나라의 도래다. 그 나라는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온다.

 

당신이 메시아이십니다

메시아는 끔찍한 죽음을 통해서 그의 나라를 물려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따를 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의 효과가 발휘되게 하는 소명을 받은 제자들은 있는 그대로 그들이 받은 왕명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와 동일한 수단을 통해서 성취될 것으로 기대해야만 한다. 가장 초창기의 교회는 이 사실을 진정으로 매우 잘 이해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슬프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가이사랴 빌립보 장면에서 예수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그의 백성을 구출하기 위해서 마침내 돌아오시는 하나님의 화신이라고 분명하게 단언한다. 시편2편과 삼하7장 등의 본문을 상기시키며 그 일차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로 택하여 기름을 부은 이스라엘의 메시아이다. 사복음서 저자 모두 나사렛 예수가 그의 십자가 처형과 더불어 진정한(아무리 역설적일지라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등극했으며, 그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그의 나라를 설립하셨다는 것이다. 사복음서는 하나님이 그전부터 이미 이 세상의 왕이셨고 예수의 사역과 죽음, 부활이라는 극적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왕이 되셨다는 주장은 그 당시 상황에서 굉장히 역설적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 이야기는 우리의 질문, 즉 신조들 속에 존재하는 그 명백한 공백에 관한 질문, 성육신과 속죄 사이에 사라진 연결점에 관한 질문을 해명할 실마리를 던져 주는가?

 

십자가를 이야기하기

복음서의 재판 이야기는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뿐만 아니라 신학적 구원론적으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18-19장에 예수와 빌라도 사이에 벌어진 이 중대한 장면은 모두 나라에 대한 것이다. 예수가 이 세상 안의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한 나라에 관하여 말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요한은 십자가를 나라 신학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요한이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말하는 내용은 하나님 나라가 폭력이 아닌 비폭력을 통해 진군하여 승리를 얻으려한다면 십자가는 반드시 일어나야 할 사건이라는 의미다. 예수가 증언하는 진리로서, 죄인을 대신한 무고한 자의 죽음을 통해서 달성되는 나라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들린 것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유대인의 왕으로서 높여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실행된 그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라와 십자가는 완벽하게 연결된다. 사복음서는 우리에게 나라와 십자가라는 두 주요 주제를 손에 쥐고 복음서를 읽을 것을 요구한다.

 

성전, 나라, 그리고 십자가

예루살렘 성전은 단순히 민족의 삶 전체의 중심만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하늘과 땅이 서로 잇닿아 있고 중첩되는 장소라고 믿었다. 성전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고, 용서를 받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나아오는 장소였다. 또한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통치 기지로 세워 놓은 곳이었다. 복음서는 예수의 이야기를 걸어다니는 성전이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로 제시한다. 예수의 모습은 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묵시이며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이며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와 이제 그들이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고 새롭게 되었음을 그 안에서 발견하는 장소이자 그렇게 변화되는 수단이며 또한 권세가 새롭게 정의되고 정반대로 뒤집어지거나 올바로 정립되는 장소였다. 사복음서는 예수가 자신 안에서 성전의 역할을 성취하고 있으며 자신의 마지막 상징 행위들을 통해서 이제는 성전의 역할을 자신이 담당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신권 정치가 개시되려면 새로운 성전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 세계의 경배를 받으시고 그곳으로부터 그분의 지혜로운 통치가 온 피조 세계에 집행되어야 한다. 복음서들은 메시아 예수로서 그리고 메시아 예수 안에서 자신의 백성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그 절정에 도달한 순간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의 나라에 승리를 거둔 순간이며 하나님께서 항상 계획해 오셨던 장차 올 도성, 그 정원 도시를 우리에게 공개하고 초대하여 그 문을 통과하여 들어와 그분과 함께 그 도시를 건설하자고 권하는 순간이다. 어둠의 부대들은 여전히 잡음을 만들어내고 우리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주겠지만, 우리가 궁극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정해졌다. 이것이 바로 복음서 저자들이 나라와 십자가를 결합할 때 우리에게 제시하는 비전이다.

 

서로 해석해 주는 나라와 십자가

복음서가 묘사하는 나라와 십자가에 관한 묘사는 첫째, 예수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구현(“성육신”)으로 간주된 것은 맞지만, 핵심 주제는 메시아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전 세계에 대한 자신의 통치권을 재천명하셨다는 것이다. 둘째, 이 나라는 십자가로 귀결되는 고난이라는 예수의 전반적인 행동 강령과의 관련성 안에서, 승리주의를 암시하는 어떤 주장도 설 자리를 잃는다. 예수를 통해서 그 후에는 성령에 의해서 그리고 예수의 추종자들을 통해서 그 효력을 발휘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셋째, 예수가 개시하고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시행된 그 나라는 이 세상을 위한 나라이기도 하다. 십자가에 관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첫 번째,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한 구원이 아닌,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출해내는 구원에 대해 질문해 왔다. 하지만 십자가로 달성된 모든 내용은 나라를-도래하게-하는-승리라는 맥락 속에서 설명해야 한다. 십자가는 메시아의 직무, 즉 그 나라를 가져오는 메시아의 소명이 실제로-구현된-궁극적-재 정의였다. 두 번째, 복음서에서 예수는 죄인들, 죄를 범한 이스라엘, 죄를 범한 인류를 대신하여 형벌로서 죽임을 당한다. 그의 죽음 덕분에 희년의 축제가, 위대한 구속이, 모든 부채가 탕감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세 번째, 십자가 사건이 죄를 용서받는 방법 혹은 천국에 가는 방법에 대한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 갈보리의 승리에 비추어 이 세상의 악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 전력을 쏟으며 일할 행동강령을 제시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잡힌 사람들은 또한 이 세상을 바로 잡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나라, 십자가, 부활, 그리고 승천

복음서 저자들은 행복한 결말로서 부활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예수의 처형이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 강력한 창조와 회복의 힘을 가진 사랑의 하나님의 나라 하늘에서처럼 땅에도 임하는 것을 방해하던 어둠의 세력에 치명타를 날린 사건, 즉 십자가가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다고 선언하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마가의 관점에서 부활은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 순간이며, 요한의 관점에서는 새로운 창조, 새로운 창세기가 개시되는 순간이었다. 마태의 관점에서는 부활은 처음부터 줄곧 예수의 것으로 정해져 있던 그 자리, 즉 이 세상의 합법적인 주(Lord)의 자리를 예수가 차지한 순간이다. 누가의 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자신의 영광으로 들어가 이제 죄 사함을 위한 회개가 생명의 길로 선언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부활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왕이 되셨다고 선언한다. 하늘과 땅이 이제 예수라는 한 사람, 그의 부활한 육체 안에서 연결된다. 예수는 이제 자신에게 합당한 자리에 올라서 하늘과 땅 그리고 땅 아래의 모든 피조물들의 충성을 요구한다. 그의 겸손함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그의 제자들이 그의 실제를 구현하게 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거하심이 점진적으로 세상을 가로질러 여기저기로 확산될 것이며, 그 통치의 증거는 강압적이거나 폭력적인 권세가 아닌 사랑의 통치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내용은 오늘날의 우리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 시대 가운데서 참된 복음서 독자, 참된 복음서 기도인, 참된 복음서 생활인이 될 수 있을까?

 

4부 신조, 정경, 그리고 복음서

 

11장 하나님의 이야기를 기념하는 방법

 

전체와 부분

신조들은 이스라엘의 이야기 전체를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내용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실제로는 수년 동안 그 신조를 고백해 온 많은 사람들에게 구약 성경은 대체로 닫힌 책일 뿐이다. 오늘날 교회 안의 굉장히 많은 수의 성도들은 스스로 삼위일체, 성육신, 속죄, 부활, 성령, 재림을 확고하게 믿는 신조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신조들은 그 자체로는 좋다. 하지만 신조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신조들은 정경과 정확히 같은 내용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갈 경우, 그것은 자기기만이며, 그 속에는 그런 의미에서의 진리는 없다. 그것은 권위의 원천이 성경이냐 전통이냐에 관한 논쟁이다. 교부시대 신조의 저자들이 거룩하며 지혜로운 작가들이며 탁월한 공헌을 하였고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들이 성경 이야기의 완전한 규모를 이해했다거나 사도들이 말한 모든 구구절절의 정확한 뉘앙스를 파악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조에 비추어 정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정경에 비추어 신조를 읽고 이를 통하여 신조들이 주장하는 중요한 요점들이 더 완전하고 성경적인 방식으로 주장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바란다.

 

신조를 읽는 한 가지 방식

 하나님을 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외부 세계에서 개입하는 존재로 설명하는 관점, 예수도 어둠의 감옥에서 구원받은 영혼들을 낚아채 데려가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온 것으로 설명하는 관점 등은 기독교가 아니라 전형적인 영지주의다.

 성경 이야기에서 구약을 토대로 유대인의 메시아, 예수 하나님의 아들의 의미를 시 2편과 삼하 7장에 비추어 생각하여야 하며 우리 주라는 호칭 역시 광범위하고 중대한 의미를 생각하여야 한다.

 성육신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왕이 되기 위해서 인간이 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십자가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육신한 나라의 사역을 완결하는 수단으로 이해한다.

 예수가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최악의 장소로 내려갔다는 의미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지금도 여전히 이 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

 심판은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8:1)

 부활 영생과 관련하여 죽을 때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과 교제를 나누기 원하시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그 교제의 대상이 될 것이다.

 

신조를 읽는 다른 방식

 하나님을 존재하는 만물의 오직 하나뿐인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며 그가 전 세계를 다스리는 주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미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사실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 그는 세계의 열방들을 다스리는 자리에 등극하신 분으로 공표하는 것이며, 그를 하나님 나라의 대리인으로 공표하는 것이다. “주님은 예수가 전 세계의 주님이라는 선언이며, “우리 라는 말을 붙이는 것을 예수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을 우리로 제한하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의 처녀 수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 대리자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주권을 수립하려는 목적으로 세상에 오심을 이야기한다. “구원은 이 땅의 구원, 이 땅을 위한 구원이며, 이 땅 위의 피조물인 우리를 위한 구원이다.

 예수의 부활은 마침내 그 정의와 새 창조가 하늘에서처럼 땅에도 임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의미다.

 하늘에서 즉 그의 최고 통치권의 자리에서 오셔서, 이 땅에서 그 통치권을 확립하는 일을 마무리하실 것이다.

 우리가 예수와 그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며 예수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했던 역할을 우리가 이 세상을 위해서 감당하는 것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자신의 백성들이 편하게 앉은 채로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기관을 설립하시기 원해서가 아니다. 교회도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존재를 유지하는 전 세계적인 공동체다.

 모든 창조 세계가 탈바꿈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동참하게 될 올 시대이다. 예수는 우리 각자를 더욱더 활기찬 존재로 만들어가며 부활은 위대한 새 창조의 행위 안에서 그 작업을 완결 지을 것이다.

 만물을 그에게 복종시킨 그 권세로 예수가 행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결론 : 복음서를 읽는 방법

복음서들에 포함된 그 나라와 십자가가 통합된 메시지로, 더 정확히 말하면 성육신, 나라, 십자가, 부활, 승천, 이 모든 요소들이 다른 요소들 모두와의 관련성 안에서 주의 깊게 이해된 통합된 메시지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복음서를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서 어떻게 온 세계의 왕이 되셨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신조들로 돌아갈 수 있고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신조들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자리에서 복음서 하나 이상을 통째로 읽어 보자. 복음서로 기도하는 새로운 방식(이냐시오 묵상 방식, Ignation method)을 시도해 보자. 복음서의 가치에 걸맞게 복음서를 읽어 보자.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왕이 되셨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정보의 차원 문제로 남을 수 없으며, 우리 머리로 배워야 할 단순한 지식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해야 할 내용이며, 또한 그 기도를 통해서 우리 삶과 우리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실제로 구현되어야 할 내용이다. 현대 교회의 비극 중의 하나는 정통 교회는 하나님 나라보다 신조를 우선시 했고, “정통이 아닌 교회는 신조 없이 하나님 나라를 파악하려 했다는 데에 있다. 결코 분리되지 말았어야 할 그 내용들을 이제 다시 한 데로 모을 때가 되었다. 이 복음서들은 단순히 과거에 발생한 이야기를 전하고만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실제로 구현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핵심 수단이다. 이제 성령이 주시는 능력과 기쁨 속에서 복음서의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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