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죽음- 전성민
2017-06-21 16:51:45
창조와 죽음에 관한 복음주의 성서학의 최근 동향
1.지구의 역사가 길다면 인간의 타락 이전에 죽음이 있어야 한다. 어떤 종류의 죽음은 창조의 자연스러운 요소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창세기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나? 타락 이전에 죽음이 있어야 한다는 질문은 과학을 성경 위에 두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과학적 입장이 아니라 오직 성경 본문만을 고찰하여 타락 이전 창조 안에 죽음이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
2. 인간의 죽음이 처음 등장하는 본문은 창세기 2장 17절이다. 여기서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가 주어지는데 여기서의 죽음이 먹는 그날에 죽음이 즉각적으로 일어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실제 즉각적인 죽음이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여기서 말한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육체적 죽음은 어떻게 된 것인가? 창세기 3장 19절에는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육체적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육체적 죽음이 인간은 원래 죽는 존재임을 확인시켜준 것인가? 아니면 원래는 죽지 않는 존재인데 죄에 대한 심판으로 죽게 되었다는 의미인가?
이어서 3장 22절에는 생명 나무를 먹고 영생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타락 이후에도 생명나무를 먹으면 영생할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렇다면 생명나무는 어떤 기능을 하는 나무인가? 나아가 창세기 2:17의 말은 인간은 원래 죽지 않는 존재인데 죽는다는 의미인가? 즉 불멸의 존재가 타락으로 인해 사멸의 존재로 존재적 변화를 한 것인가? 그러나 성경 본문은 존재의 변화를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3장 19절로 돌아오게 된다.
3. 월터 부르그만은 자신의 창세기 주석(1982)에서 죽음의 기원에 대해 말하는 창세기 2장4절 부터 3장 24절은 어떤 죽음은 징계로 인한 것이지만 죽음 그 자체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정하신 것임을 가정하면서 죽음이 선언되었지만 누구도 죽음을 맛보지 않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죽음이 실현되기 보다는 에덴에서 추방이 된 것으로 보아 이 죽음은 영적 죽음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특히 부르그만은 죽음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로 만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뱀이라고 지적한다.
고든 웬함은 창세기 3장17-19절을 주석하면서 이 본문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2장17절에 경고된 죽음이 즉각적인 죽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즉각적으로 일어난 것은 죽음이 아니라 동산에서 추방인 것으로 보아 죽음이 현실이 된 사건은 인간이 생명나무에 접근이 차단된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웬함은 인간은 타락 이전에 원래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죽는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생명나무를 통해 그 생명이 지속된 것으로 본다.
해밀턴은 창세기 주석(1990)에서 2장17절의 죽음이 즉각적 죽음이 아니라 궁극적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즉각적인 죽음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암시한다고 말한다. 그는 딤전 6:16을 인용하면서 죽지 않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므로 인간은 타락이전이든 타락 이후든 죽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죽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지 안간의 타락으로 죽을 수 없는 존재가 죽는 존재로 본질이 전환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권위있는 성경주석인 NAC도 아담이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죄를 범한 후에 죽는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언급이 성경 본문에 없다고 말한다. 이 주석도 딤전 6:16을 언급하며 불멸은 오직 신만이 속성이라고 말한다.
국내 학자인 천사무엘은 자신의 창세기 주석(2001)에서 2장 17절의 정년 죽으리라는 말이 즉각적 죽음이 아닐 궁극적 죽음이라고 해석하는 이면에는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전제가 있다고 말하며 그러나 이런 사고는 본문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정녕 죽으리라에 대한 다른 해석을 소개한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은 창조시부터 시간적으로 제한되었는데 생명나무를 통해 그 생명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생명나무에 접근이 금지되면서 영생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것이 정녕 죽으리라는 선언이 실현된 것이다.
부르스 월키는 자신의 창세기 주석(2001)에서 3장19절의 흙으로 돌아가라 3장 22절의 생명나무에 접근이 차단된 것은 인간이 타락 후에 불멸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된 것을 의미하며 죽음은 타락으로 발생한 고통으로부터 해방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존 월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시간은 선한 창조이지만 죽음이 창조에 포함됨으로써 시간이 대적으로 느껴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2장17절의 정녕 죽으리라는 말이 즉각적으로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것을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것은 죽음이 나중에 실현이 되었지만 확실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생명나무 열매가 인간의 생명지속에 필요한 것이라면 인간의 육체는 시간이 지나면 쇠퇴하여 죽는 존재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창조시에 영생적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죽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생명나무를 통해 생명을 유지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생명나무에 접근이 차단된 것은 죽임이 불가피한 실체가 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월튼은 로마서 5장 12-14절도 이런 식으로 이해 가능하며 인간 몸이 불멸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를 통해 죽음이 방지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죽음은 창조세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는데 타락 이후에 동산에서 추방되고 생명나무에 접근이 차단되면서 그것이 필연적이 되었고 이것이 바로 죄로 인해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월튼은 밀리드 에릭슨의 조직신학을 인용하면서 인간은 창조시에 존재적 불멸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생며나무를 통해 조건부 불멸성을 가진 존재라고 말한다.
골딩게이도 창세기 주석(2003)에서 죽음은 창조시에 이미 존재했고 인간은 원래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었다고 말하며 성경 본문 어디에도 그런 주장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죽음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자연적 일부라고 말하며 특히 생명나무의 존재는 인간이 원래 죽는 존재임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 사는 동안에는 생명나무에 접근이 가능했고 죽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먼지(APAR)로 창조되었다는 것도 안간이 불멸의 존재가 아님을 암시한다. 시편에는 먼지와 관련된 구절들이 많이 등장하는데(시22:15; 22:29; 30:9; 44:25) 이 구절들에서 먼지는 주로 죽음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이상의 구약학자들과는 달리 피터 엔즈는 창조 이야기를 포로기의 이스라엘을 위한 그림 이야기로 해석한다. 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을 찾으며 여기서 죽음은 포로로 잡혀간 현실을 가리키는 그림 언어라고 주장한다. 그는 에스겔을 인용하면서 여기에 등장한 마른 뼈 이야기기 결국 포로 귀환에 대한 그림 언어이듯이 죽음은 곧 포로를 가리킨다고 논증한다. 결국 피터 엔즈는 아담 이야기는 이스라엘 이야기의 축약판이라고 말한다.
4. 창세기 9장에는 육식이 허용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을 창세기 1장 29-30절과 비교해보면 인간의 타락 이후에 사람이건 동물이건 육식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창세기 3장21절의 가죽 옷이나 아벨의 양 제사는 동물의 죽음을 전제한다. 창세기 1장 24절에는 동물을 가축, 기는 것, 땅의 짐승으로 구분하는데 여기서 기는 것은 야생 초식동물, 땅의 짐승은 야생 육식동물로 보인다. 이는 창조시부터 육식 동물이 존재했고 육식 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 먹는 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창조 질서였다고 볼 수 있다. 시편 104편도 하나님이 사자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고 말한다면 육식 사자 자체가 악이라고 볼 수 없고 동물의 먹이사슬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 질서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9장3절은 육식의 시작이라기 보다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변화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의 타락이후 동물들이 육식으로 변하여 동물의 고통을 야기한 것으로 주장하는 본문은 없다.
5. 우리는 죽음 자체를 과도하게 저주로 생각하지 말하야 한다. 오히려 죽음은 인간의 타락이후 발생한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고통이나 죽음은 인간 삶의 자연스런 일부다. 오히려 본질적인 죽음은 하나님을 떠난 영적 죽음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정녕 죽으리라고 말했다면 이는 아담이 이미 죽음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경험했다는 증거다. 오직 하나님만이 불멸의 존재라면 인간이 사멸의 존재로 창조된 것은 당연하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본질은 영적 죽음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떨어짐이다.
그런데 죽음이 창조질서의 일부라면 죽음을 이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일종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죽음을 이긴다는 것은 생물학적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을 이긴다는 말로 보아야 한다.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육체적 죽음도 없을 것이다. 종말은 창조로의 회귀가 아니라 창조를 뛰어넘는 창조의 잠재력의 완성이다. 부활의 몸이 지금의 몸과 다르다면 타락 이전의 몸과도 다를 것이다. 타락이 일으킨 변화는 부활이 일으킬 변화에 비하면 미미할 것이다. 타락이 일으킨 가장 큰 변화는 하나님과 인간의 영적 관계이다. 타락이 인간 존재 자체나 창조 질서에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사실 창세기에서 인간의 타락이 가장 큰 이슈는 아니다. 타락으로 자연질서가 변했다고 볼 수 없다. 타락은 존재론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보아야 한다. 타락이후에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셨고 인간에게 주어진 문화 창조 능력은 여전히 발휘되었다. 결국 창세기 3장 22절이 창조와 죽음에 관한 해석의 관건이 되는 결정적인 본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이 본문의 자연스런 해석이 억압되어 왔다. 이 본문을 자연스럽게 해석한다면 창세기 2장 17절은 영적 죽음으로 그리고 창세기 3장 24절은 육체적 죽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동안 성경 해석의 문제는 신약을 기준으로 구약을 해석한 것이다. 신약을 기준으로 구약을 해석하기 보다 구약적 맥락을 따라 신약을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약은 이미 구약적 맥락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글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5장에 포도나무 열매를 맺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포도나무 열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구약에 수없이 나오는 포도나무 비유에(이사야 5장에 보면 포도나무의 열매는 이스라엘이 행해야 하는 정의와 공의였다) 근거하여 해석해야지 이것을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로 비약하는 것은 적절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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