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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계시록- 부르스메츠거

계시록- 부르스메츠거

2017-02-22 21:46:45


 

천상의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1:1-20)

 

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이것은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계시이거나 그에 관한 계시 혹은 그에게 속한 계시라는 의미이다.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으로 부터 와서 천사들에 의해 요한에게 전해진다. 이 계시의 목적은 속히 그리고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는데 있다. 여기서 반드시란 하나님의 목적의 분명한 성취를 의미한다. 한편 요한은 이 계시를 예언의 말씀이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은 구약의 예언자들의 전통을 잇는다고 볼 수 있다. 편지에서 요한은 은혜와 평강을 누리라는 인사로 시작하면서, 이 은혜와 평강의 출처가 삼위 하나님이심을 언급한다.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신 인자 같은 이에 대한 묘사는 그가 왕적 존재임을 나타낸다.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하므로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시는 이는 곧 교회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죽었지만 지금 살아있는 자요 이제 영원히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자라고 계시된다. 이 계시는 교회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을 이기신 분이요 사망의 권세를 좌우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때문에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그의 백성들은 죽음으로 인해 그의 사랑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1-3:22)

 

장면은 천상의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에서 지상으로 옮겨진다. 일곱 편지의 문학적 구조는 균일한 양식을 가지고 있는데 각각의 편지는 모두 천상의 그리스도의 신원을 확인함으로서 시작한다. 이것은 천상의 그리스도가 지상의 교회와 함께 하시며 그들을 돌보시고 지키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모든 메시지의 말미에는 이긴다는 전투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 편지를 수신하는 일곱 교회가 처한 상황이 아무런 염려가 없는 환경이 아니라 어떤 자들과 어떤 것에 대항하는 전투 상황에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과 어린 양에 대한 환상(4:1-5:14)

 

4장에서 다시 장면은 하늘에 대한 환상으로 촛점을 맞춘다. 여기서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이신 어린 양에 대 한 환상이 등장한다.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 천상의 환상을 보았는데 여기서 열린 문이란 문이 계속적으로 열려있는 상태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명히 요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천상의 찬란함과 장엄함을 볼 수 있도록 허락되었음을 말해준다. 기기서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와 그 보좌에 앉으신 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장엄한 광경을 목도했다. 이 장엄한 광경에 대한 요한의 묘사들은 하나님의 권세와 임재의 위대함을 기억나게 함으로써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역할을 한다. 보좌로 부터 나오는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는 구약의 시내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장엄하고 두려운 신현을 상징한다. 흰 옷을 입은 24장로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두 언약을 상징하는 신약의 열두 사도와 구약의 열두 지파를 대변한다. 그들의 보좌와 흰 옷은 그들이 왕적 제사장임을 암시하며 그들이 쓴 금관은 그들이 다스리는 자들임을 보여준다. 보좌 주위의 네 생물은 에스겔1장을 배경으로 하는데, 그들은 스랍(cherubim)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피조세계를 지배하는 권세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강력한 대변자이다. 이 네 생물들의 앞뒤에 눈이 가늑한 것은 그들이 늘 깨어서 사방팔방에서 모든 것을 감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요한계시록에서 열네 번 언급된 네 생물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그들의 변치 않는 성향임을 말해준다. 열두 장도들과 연합하여 네 생물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5장에는 두루마리가 등장하는데 이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의 책이다. 일곱 인으로 봉했다는 진술은 그 내용이 온전히 감추어져서 그 내용을 알 자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두루마리를 펼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일찍이 죽음을 당한 한 어린 양이 제시된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가 두루마리를 펼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된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어린 양은 온 우주에서 홀로 하나님의 숨겨진 섭리를 아시는 분이며 따라서 그것을 계시할 수 있는 분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를 변경하는 분이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그 섭리를 이루시고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그 어린 양에게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드리는데, 요한은 금대접에 득한 향이 바로 땅에 거하는 성도들의 기도라고 말한다. 이것은 땅에 있는 교회의 예배가 하늘에 있는 교회의 예배와 연합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늘에서 승리한 교회와 땅에서 투쟁하는 교회가 연합하여 어린 양을 찬양하는 것이다. 요한이 승리한 천상 교회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은 투쟁 가운데 있는 지상 교회가 승리의 확신을 갖고 견디게 하려는 것이다.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떼다(6:1-8:2)

 

이 본문의 의도는 갈등과 박해 가운데 있는 교회의 투쟁과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데 있다. 묵시의 네 말 탄자는 역사 속에서 실행되는 하나님의 심판들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이러한 심판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곳에는 어디든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인 차원에서 발생한다. 두루마리의 다섯 번째 인과 여섯 번째 인을 뗄 때에 장면은 지상에서 다시 천상으로 옮겨진다.(69-11) 다섯째 인을 뗄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원을 요구하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이르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신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성도들의 신원을 이루는 일임을 보여준다. 순교자들에게 주어지는 흰 두루마리는 순결과 승리와 봉사를 상징한다. 여섯째 인을 뗄 때에 일어나는 우주의 대격변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은 대격변을 상징하는 묵시적 언어이다.

 

마지막 일곱번째 인이 떼어지기 전에 두가지 위로의 환상들이 삽입되어 있다. 이 삽입된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재난과 심판으로 부터 보호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다. 이 막간의 고요함은 휴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심판이 잠시 지연되는 시간이다. 144,000명이 인침을 받는데 그 인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의 보호와 권세 아래 있다는 표식이다. 그러나 그 보호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성도들은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인친 자들 가운데 한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을 것이다. 두번 째로 요한은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승리자라는 표시로 흰 옷을 입고 종려가지를 들고 있었다. 첫번째 환상인 144,000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로 부터 나온다면 두번째 환상에서는 모든 나라들로부터 나온다. 첫 환상이 임박한 위기를 준비하고자 한다면 두번째 환상은 승리와 안정을 나타낸다. 이 두 환상은 서로 관련이 되는데 그들은 위치로 구별되는 동일한 무리들을 가리킨다. 144,000은 박해의 시기에 들어가는 지상 교회를 의미한다면 셀 수 없는 무리는 박해를 견디고 승리한 천상 회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두 교회는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무리들이다. 지상에서 박해받는 교회는 동시에 천상에서 승리한 교회이기도 한다.

 

 

 

일곱 나팔(8:3-11:19)

 

하나님께 올려지는 성도들의 기도 후에 한 천사가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향로에 가득 채워서 땅에 쏟는다 그 후에 엄청난 재난이 일어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일어남을 보여준다. 이어서 일곱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가공할 만한 재난이 계속되는데 나팔은 묵시문학이 선호하는 도구이다. 왜냐하면 나팔은 하나님의 소식에 귀를 가울이도록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때문이다. 나팔 재앙들은 애굽의 열 재앙들과 일치하는데 이것은 이 땅에 내리는 심판이 애굽에 내렸던 재앙과 그 성격이 동일함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재앙에서 면제된 것처럼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 이 무서운 피조물들에 의해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9:4) 비록 그 이미지가 가공스럽지만 일곱 나팔 재앙의 전반적인 의도는 복수를 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도록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전체적인 파괴 대신에 단지 삼분의 일만 재앙의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앙에서 살아 남은 자들은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거부한다.(9:20-21)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황제숭배라는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다. 일곱번째 나팔 직전에 또 한 번의 삽입이 있는데, 이 환상은 이전의 일곱번째 인을 떼기 전에 나타난 삽입 환상의 메시지와 확연히 다르다. 이 메시지는 감미로움과 쓰라림이 혼합되어있다. 박해와 환란을 말하면서 충성과 헌신을 요구한다. 요한은 환상에서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는 힘센 다른 천사를 보았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권세와 자비로 옷 입었다는 의미이다. 이 천사는 그의 손에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요한에게 그것을 받아 먹으라고 말한다. 받아 먹는다는 것은 두루마리의 내용을 읽고 배우고 소화한다는 의미이다. 이 두루마리는 5장에서 언급된 인봉한 두루마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요한에게 주신 특별한 메시지다. 그 두루마리가 입에는 꿀 같이 달지만 그의 배에서 쓰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그에게는 달지만 그 진노와 심판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는 의미이다. 이 두루마리의 내용을 따라서 요한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예언해야 한다

 

11장의 두 증인 이야기에는 구약의 역사서와 예언서에 암시된 상징들이 혼란스럽게 엮여져 제시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충성된 증거를 가진 자들로 그리고 고통과 박해와 모욕을 당하는 자들로 간주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고난과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른다. 이것은 측량되지 않은 성전 마당은 이방인에게 짓밟히지만 측량된 성전과 제단은 보존된다는 환상과도 일치한다. 거룩한 성은 마흔 두달 동안 짓밟힌다. 그들은 제한된 시간동안 교회를 박해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 기간(마흔 두달, 삼년반)은 다니엘 9:27 12:7에서 가져온,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의 지배를 받는 기간을 가리키는 전통적인 묵시 용어이다. 이 본문에서 요한은 교회의 운명은 이 세상의 박해로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는 진리를 충성스럽게 증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증인의 고통스런 죽음과 삼일 반 후에 그들이 부활하고 하늘로 올려짐은 역사적인 사건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부활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드디어 일곱번째 나팔이 울리고 이어지는 사건은 놀랍게도 재앙이 아니라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합창소리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리로다"(11:5)그리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며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가 나타난다. 분명히 이것은 죽은 자들의 심판과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과 함께 세상의 종말에 나타날 일들이다.(11:18)

 

 

사탄의 삼위일체(12:1-14:20)

 

요한의 이야기는 11장에서 종결하는 것이 적합해 보이지만 12장에서 요한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메시아의 출생과 헤롯이 그를 죽이려고 한 시도에 대한 이야기를희화적인 방법으로 언급한다. 이 이야기에서 용은 분명 사탄이고 여자가 낳은 아이는 분명 그리스도이다. 그 아이를 삼키려고 하는 용의 시도는 예수님이 지상사역 동안 부딪혔던 맹렬한 반대를 설명해 준다. 여인은 하나님의 백성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의인화한 것 같다. 용의 패배와 하늘로부터의 추방은 남아있는 천상에 거하는 자들이 큰 음성으로 찬양하는 계기가 된다.(12:10-12) 그리스도의 승리에는 그의 백성의 승리가 포함되어 있다. 나팔 노래는 미가엘과 용이 싸우는 환상이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과 복음 선포에 의해 얻어진 실제적인 승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땅으로 쫒겨난 용은 지상에 거하는 여인의 남은 자손들에게 큰 해를 가한다. 13장에서는 사탄의 대변자 둘이 등장하는데 이 둘은 용과 함께 거짓 삼위일체를 형성한다. 바다로 부터 올라온 짐슴은 요한의 시대에 적그리스도의 화신이요 그리스도의 통치에 반대하는 세상적인 권세를 상징한다. 그 짐승이 하나님과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적인 황제 숭배를 의미할 것이다. 이는 하늘에 거하시는 한 분이신 참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두번째 짐승은 땅에서 나오는데 이것은 인격화된 우상숭배로서 요한은 이들을 거짓 선지자라 불렀다. 용의 대변자는 모든 종류의 거짓 종교와 거짓 술수로 황제 숭배를 증진시켰다. 결과적으로 황제 제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은 매우 나쁜 결과를 수반했다. 그들은 박해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었다. 짐승의 수 666은 가장 큰 불완전의 상징이다. 그 이유는 완전하고 신성한 숫자인 7에 하나 부족한 6이 세번 반복되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것을 인간의 수라고 설명한다. 666으로 상징되는 이 사탄적인 짐승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후보는 네로 황제이다. 거짓 삼위일체 이야기에 이어서 요한은 다시 한번 시험과 박해 가운데 있는 교회에 확신을 주기 위한 이야기를 삽입하고 있다. 요한은 속죄함을 받은 144,000과 함께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서 있는 환상을 보았다. 144,000은 충성스럽게 남아 있는 모든 자들을 대변하는 상징이다.

 

 

 

일곱 대접(15:1-18:24)

 

여기 본문에서 적대적인 세상 권세들과 갈등하는 교회의 투쟁은 새로운 단계에 도달한다. 6장의 일곱 인과 8-9장의 일곱 나팔에 이어 이제 15-16장에서는 일곱 대접의 재앙들이 등장한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 곧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임하는 최후의 환상이다. 요한은 일곱 대접의 재앙들을 묘사하기 전에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긴 자들의 안전에 대해 설명한다.(15:2) 그리고 자신들의 손에 거문고를 가진 승리자들은 모세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른다. 승리한 순교자들의 노래가 지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 자신의 승리와 그들 자신이 성취한 바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없다는 사실이다. 시작부터 끝가지 전체 노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서정시적 탄성으로 이어진다. 재앙들을 반복적으로 진술하는 요한의 의도는 고난의 기간에 교회를 준비시키고자 하는 소망을 강하게 반영한다. 그의 관심은 기다리고 있는 재난들을 온전히 인식함으로써 교회가 당당하게 그것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데 있다.

 

 

최후의 승리와 마지막 심판(19:1-20:15)

 

바벨론의 패망에 대한 애도와 대조적으로 이제 장면은 하늘로 변경되어 할렐루야로 시작되는 하늘의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들이 들린다. 방탕한 도시 바벨론의 멸망을 찬미한 후에 이 찬양의 보다 크고 중요한 부분은 미래를 예견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의 완전한 결합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의 혼인 잔치에 대한 언급은 이제 이 드라마의 절정이 매우 가까웠다는 표시이다. 사탄은 곧 전복될 것이고 그의 통치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하나님의 큰 잔치에서 벌어지는 썩은 고기의 식사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모방한 징벌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선포이다.(19:9) 그리고 이제 선과 악 사이의 마지막 큰 전투가 일어난다.(19:19) 그 결과는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의 압도적인 패배이다. 이 승리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의 어떤 군사적 도움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주목할만하다. 천사는 사탄을 붙잡아 쇠사슬로 묶어서 천 년 동안 무저갱에 던져넣어 그곳을 잠근다. 그리고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음으로 순교를 당한자들이 살아나서 이 기간에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노릇을 한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살아난 자들이 천년 동안 땅으로 내려올 것인지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요한은 나머지 죽은 자들이 천년 왕국의 축복을 누린다고 언급하지 않으면서 순교자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고 있다. 그들의 부활은 영적인 것이지 육체적인 것은 아니다. 천년 후에 사탄은 잠시 놓임을 받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는 비밀이다.

 

 

요한계시록 20장은 천년 왕국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본문이다. 주석가들은 요한의 이야기에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가져온 휴거, 환란, 성전재건 이야기를 결합시켰지만 요한은 그런 이야기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후천년설은 그리스도가 천년 왕국이 시작된 후에 오신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선포와 성령의 구원 역사를 통해 세상에 확장되고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심으로 그가 재림하는 역사의 종말 이전에 평화와 의의 천년 왕국이 세상이 이루어진다는 매우 낙관적인 역사관이다. 전천년설은 그리스도가 천년 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오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세상은 복음전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악화되고 마지막 날 적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비관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파국적인 재림으로 지구상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일천년의 황금 시대가 시작된다는 주장이다. 무천년설은 천년을 단지 오랜 시간에 대한 상징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이 기간을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사이에 있는 현세의 기간으로 본다. 후천년설의 낙관주의 혹은 전천년설의 비관주의 대신에 무천년설은 예수님의 가라지 비유(13:24-30, 36-43)를 사실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선과 악이 세상의 끝날 까지 나란히 발전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세가지 주장들은 모두 각각의 난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중심 진리는 동일한데 그것은 그리스도는 자신이 약속한 것처럼 다시 오실것이며(14:3) 그리고 악의 세력들을 파멸시키고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천상의 예루살렘 환상(21:1-22:21)

 

이 본문에서 요한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관해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받을 영원한 복에 대해 말한다. 요한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현존하는 질서의 변형을 의미하는지 현 우주가 끝나고 새로운 창조를 의미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쨋든 요한이 사용하는 "새로운" 이란 단어는 단순히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하늘과 땅을 의미한다. 새 창조는 현 창조와 얼마간의 연속성은 있으나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창조일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질서에는 하나님의 장막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그날에 바다는 사라지고 하늘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 부터 하늘에서 내려올 것이다. 유대 사상에서 바다는 분열과 소란의 상징이며 끊임없는 불순종을 의미한다.

 

 

천상의 예루살렘은 물론 교회를 대표한다. 이 시점에서 요한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선포를 확대하며 천상의 도시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한다. 요한에게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주겠다고 말한 천사는 분명히 17장에서 바벨론의 심판을 증거하기 위해 요한을 불렀던 그 천사이다. 거룩한 성이 내려온다고 말하는 것은 공간적인 은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 도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다 그 도시에 대한 요한의 장엄한 묘사는 완전하며 영원한 영광중에 승리한 교회를 보여준다. 이 거룩한 도시에는 성전 혹은 성소가 없다. 왜냐하면 그 도시 자체가 모두 성소이기 때문이다. 정육면 입방체로 묘사된 이 도시의 모양은 고대 성막의 지성소와 같다. 도시의 성문들이 도무지 닫히지 않는다는 말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완전한 자유와 자유로운 교제를 의미할 것이다. 하늘 보좌에서 흐르는 생명수의 강은 종말의 때에 생수가 예루살렘으로부터 흐르게 될 것이라는 예언자들의 희망의 성취이다.(에스겔47:1-12, 14:8) 요한은 에덴 동산을 추억하며 강 좌우에 열 두가지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에 대해 말한다. 이 거룩한 도시에는 더 이상 저주가 없을것이라는 선언은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그로 인한 저주를 연상케 한다. 이제 속죄가 이루어졌으므로 실낙원이 복락원이 된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박해와 고난에 직면해 있는 교회를 위한 목회적 권면을 담고 있다. 이 책은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이기고 자신들의 소명을 새롭게 인식하며 소망을 유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