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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리처드 보컴

요한계시록- 리처드 보컴

2017-02-22 21:34:56


요한계시록 읽기

 1. 요한계시록의 의도는 다가오는 악들에 대해 저항하지 말라거나 그런 악들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촉구하기 위함이요, 절망에 반대하는 소망을 품게하기 위함이요, 비타협적 방법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도록 부르기 위함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심판이 우주적 실재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우주적 소망을 가지도록 요구하며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에 능동적으로 동참하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요한계시록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제시해주는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무엇인지 알게 될 때 우리는 세상을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보게된다.

 

 

2.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회람용 서신의 형태를 지닌 묵시적 예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각 교회를 향해 선포된 예언자적 메시지라고 보아야 한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수신자였던 교회들 가운데서 예언자로서 활동해 왔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교회들에게 주어진 일곱 메시지는 교회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신탁들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즉흥적인 예언이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엮어진 하나의 문학작품이다. 우리는 요한이 자신의 오랫동안의 사색과 기록을 철저하게 문학적인 창조로 변환하였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분명히 요한은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전달하기 보다는 주어진 계시를 정확하게 전달하는데 주력했다. 그래서 요한은 구약성경의 예언서들과 특히 유대 묵시문학들에 대한 풍부한 모델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요한이 기독교 예언자로서 구약 예언의 전승에 서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계시록 전체는 어떤 인용의 형식도 나타나지 않지만 구약 예언에 대한 인유들(allusions)로 흠뻑 젖어있다. 요한은 구약 예언자들의 전승에 속할 뿐 아니라 구약 선지자들의 모든 종말론적 선포들이 마침내 성취되는 구약 전승의 정점에 서 있다.

 

 

3. 구약 예언과 유대 묵시문학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과 차이들에 대한 정도와 성격은 상당한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요한이 유대 묵시문학의 형태들과 전승들을 구약 예언과의 연속성상에서 예언의 통로로 사용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대 묵시문학이 역사의 종말에만 관심을 갖지는 않은데 반해, 요한의 묵시문학은 철저하게 종말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가 받은 하늘의 계시는 종말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활동에 관한 것이다. 요한은 묵시적 장르를 예언의 매개로 사용하므로 요한계시록을 예언적 묵시 혹은 묵시적 예언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여러 면에서 유대 묵시문학적 전승에 속해있는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에 대한 초월적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예언적 묵시 문학이라고 할수 있다. 그것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상정하고 그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는 면에서 예언적이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초월적인 환상을 통하여 독자들의 상황을 하나님의 목적을 향한 예언적 통찰력으로 보여준다는 면에서 묵시적이다.

 

 

4. 요한은 하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위해 하늘로 끌어 올려지고 그에게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일면을 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그는 자신이 속한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 참으로 무엇인지를 볼 수 있었다. 요한은 환상 가운데 최종적인 미래 속으로 옮겨짐으로써 현재의 종말적 결과가 필연적으로 어떠해야 하는가의 관점에서 현재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요한의 환상들은 그의 독자들의 세계를 공간적으로 하늘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종말론적 미래로 넓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그리고 지금은, 하늘 그리고 종말론적 미래로 인하여 뒤로 내팽겨쳐진 것이 아니라 단지 완전히 달리 보이게 된다. 묵시적 환상을 통해 이런 초월적 관점에서 보여진 세상은 일종의 새로룬 상징적 세계이다. 요한은 자신의 문학적 기교를 통해 그런 상징적 세계를 창조하였으며 그의 독자들은 그의 문학적 기교를 통해 그런 세계를 경험한다. 그러나 그 세계는 요한의 독자들과 관계가 없는 또 다른 세상이 아니라 그들이 구체적으로 매일 경험하는 세상이다. 다만 그들은 그 세상을 천상적이고 종말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보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세상을 신적 초월을 향해 열어젖힘으로써 실체에 대한 거짓된 관점을 반박한다.

 

 

5. 요한계시록은 유대 묵시문학이 가지고 있는 관심을 함께 공유한다.그것은 누가 세상의 주인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유대 묵시문학의 주된 주제는 악에 대한 심판, 의인들의 구원,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구약 예언의 성취에 대한 것이다. 유대 묵시문학가들은 세상의 악, 특별히 거대한 이교적 제국들에 의해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이 압제당하는 혹독한 현실 속에서 전능하시고 의로우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려고 부심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 문학의 그런 중심적 관심을 함께 공유한다. 그래서 요한은 누가 세상의 참된 주인인가? 라는 질문에 직면하여 모든 악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와 그의 영원한 나라의 수립을 위해 일어날 종말론적 심판을 기대한다.

 

 

6. 다른 묵시문학과 비교할 때 요한계시록은 상당히 많은 시각적 이미지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상징적 환상들은 묵시문학의 장르에 매우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가시적 상징의 비율은 다른 어떤 묵시문학보다도 엄청나게 높다. 시각적 이미지의 풍부함과 환상적 순서의 통일성과 연속성은 요한계시록을 다른 묵시문학과 비교해서 유별나게 만들고 있다. 그 시각적 상징들이 가지고 있는 힘과 풍부함과 일관성은 문학적이며 신학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하나의 상징적 세계를 창출하고 독자들이 그 세계로 들어감으로써 그 상징적 세계가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이해를 변화하게 만든다. 요한계시록의 또 다른 독특성은 다른 유대 묵시문학들과는 달리 가명적으로 저술되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점이다, 요한이 구약 예언자들의 전통 안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최종적인 종말론적 성취인 그의 예언은 구약 예언 전승의 정점에 서 있기 때문에 그의 권위는 그의 선임자들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요한은 가명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하였고 자신의 부르심을 예언에 직접 관련시키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의 상당부분을 다니엘서에 의존하고 있다. 다니엘서의 환상들은 다니엘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먼 미래와 관련된다. 그래서 그의 예언은 마지막 때까지 인봉된 책에 숨겨진 비밀로 남겨져야 했다.(다니엘12:4,9) 그러나 천사는 요한에게 다니엘서와는 전혀 다른 지시를 한다. 때가 가까우므로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하는 것이다.(계시록 22:10, 1:3) 요한의 예언은 먼 미래와 관련되지 않으면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즉각적인 적합성을 갖는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과 긴밀하게 결부된 상황 속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역사의 마지막이 즉각적으로 닿아있는 종말론적 상황이 바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7. 요한계시록은 특정한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전달된 회람용 서신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이 당시 1세기 독자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었고 다만 후대의 세대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이 하나의 서신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데서 비롯된다. 문학 장르로서의 서신의 특징은 편지의 수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이 충분히 이해하기를 기대하고 그런 내용으로 기록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직접적 수신자들 외에 다른 독자들에게 그 가치가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회람 서신이 특정 수신자에게 전달되는 서신보다는 구체적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요한은 각 특정교회들에게 바라는 만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회람 서신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교회에 주어진 메시지들은 홀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 하나의 서론으로서 역할을 한다. 일곱 메시지가 요한계시록 전체의 서론이라는 것은 각 메시지를 마무리 짓는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들로부터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승리의 의미는 여기서 설명되지 않는다. 승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명백해진다. 일곱 교회를 향하여 주어진 승리로의 부르심은 요한계시록의 끝 부분에서 묘사되는 종말론적 전쟁에 연계된 부르심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은 일곱 교회가 그들 자신의 특정한 상황에서 승리함으로써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기록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일곱 메시지들은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다른 서론들을 제공한다. 이렇게 보면 요한은 매우 독특하게도 일곱 개의 명백하게 다른 관점에서 읽혀질 수 있는 책을 고안해 낸 것이다. 일곱개의 메시지는 요한계시록이 읽혀질 일곱개의 다른 정황들과 적절하게 연계하면서도 그런 정황들을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좀 더 광범위한 관점으로 통합한다. 요한은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로마의 세계적인 폭정, 악의 세력과의 우주적 투쟁, 그리고 전 피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목적에 관심을 집중한다. 이런 방법으로 요한은 각 일곱교회들에게 그들의 개별적인 문제들이 악에 대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전투와 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종말론적 목적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8. 요한계시록이 일곱 교회의 특정한 상황 속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은 이 책이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을 압제하는 자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며 결국은 그들의 정당함이 입증될 것을 확신시킴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일반화를 거부한다. 요한계시록의 독자들 모두가 가난하고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자들이 부요하며 악한 체제와 타협하고 있다. 이들에게 요한계시록은 위로와 격려를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심각한 경고와 회개를 촉구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심판의 환상들이 위로와 격려를 주는지 아니면 경고와 고통스런 도전을 주는지는 어떤 독자가 일곱 메시지들의 어느 집단에 속했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이 완성의 숫자인 일곱으로 교회를 상정하여 말하는 것은 그의 메시지가 모든 교회들의 대표로서 일곱 교회들에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이 일곱 교회들에 선포된 메시지의 특수성을 축소시키지는 않지만 이런 일곱 교회들의 다양한 정황들은 1세기에 존재하는 그리고 후대의 어느 교회들에게도 충분히 해당될 것이다.

 

 

9. 요한계시록에는 시각적 이미지가 매우 풍부하게 나타나고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이 살았던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상징적 세계를 창출해 내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시각적 이미지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이 로마의 제국주의적 환영의 강력한 이미지들에 계속적으로 직면했다는 것을 기억해아 한다. 로마의 건축물들, 동상들, 제의 의식들, 축제들, 이 모든 것들의 시각적 경이로움은 로마의 제국적 능력과 이방종교의 화려함에 대한 강력한 인상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계시록은 독자들에게 세상에 대한 다른 환상을 각인시켜줌으로써 로마의 강력한 인상에 대응할 일련의 예언자적 이미지들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강력한 시각적 인상은 세상의 현재적 모습과 미래적 모습에 대한 대체적인 환상들을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잘못된 상상력을 교정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여인은 로마 문명의 의인화, 즉 화려한 영광을 가진 여신으로서의 로마일것이다. 그러나 요한이 볼 때 그 여인은 사람을 유혹하는 하나의 음녀에 불과하다. 이런 방법으로 요한은 독자들에게 로마의 매혹적인 환상 배후에 있는 도덕적 타락을 인식하도록 만든다.

 

 

10. 요한계시록의 이미지들은 단순히 언어적 그림들을 시각적으로 채색한 것이 아니라 정교한 문학적 구성을 이루는데 매우 긴요하게 사용된 것이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구약에 대한 언어적 유비들로 가득차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우발적이지 않고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매우 정교하게 사용되고 있다. 구약의 유비들은 그것들과 관련된 문맥과 요한계시록 본문 배후에 존재하는 구약 본문들 사이의 폭넓은 연결점을 전제한다. 요한계시록의 이미지들은 구약에 대한 풍성한 유비들 뿐 아니라 동시대에 존재하는 신화적인 이미지들을 또한 반영한다. 사탄에 대한 상징으로서 용이나 뱀의 이미지는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방 신화와 종교에서 사용하는 유사한 이미지 때문에 동시대의 독자들에게 문화적 공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동시대적인 유비의 또 다른 유형은 동방으로부터의 침략자에 대한 것이다. 요한은 당시 로마세계 안에 존재했던 파르티아 제국의 침략 위협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고 있다. 이런 방법으로 요한의 이미지들은 그의 동시대인들이 함께 공유했던 사실들, 두려움들, 희망들, 상상들, 신화들을 반영하고 연출하여 예언자적 의미의 요소들로 변화시킨다.

 

 

11.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이미지들을 무시간적인 상징들로 이해하는 것은 심각한 실수이다. 이미지들의 이러한 특성은 일곱 교회를 향한 요한계시록의 정황성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런 이미지들이 오늘날 적절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1세기 독자들의 구체적인 사회적,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세계에서 그것들이 일으킨 공명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반대로 그런 이미지들이 무시간적인 상징이 아니고 실제 세상과 관련되는 상징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들이 실제 세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그리고 실제 세상에서 일어날 사건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피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 재앙들에 대한 묘사는 그것들이 자체가 의미를 전달해주는 고도로 체계화된 문학적 패턴을 형성한다. 그것들은 구약의 여러 이적적 사건들. 그리고 당시의 전쟁과 자연 재해에 대한 참혹한 기억들을 취하여 묵시화하고 성경적인 유비적 용어들로 주조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발견되는 중요한 논점은 요한계시록은 사건들의 순서를 예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임박한 신적 심판의 의미를 드러내고 탐색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을 심판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예견으로 읽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혼란스런 무질서로 전락시켜 버리고 마는 것이요, 진정한 핵심을 놓치게 된다. 요한계시록의 신학 방법과 개념화는 신약의 다른 책들과 다소 다르다. 그러나 그것을 그 자체의 관점에서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세련된 문학작품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학적 업적 중의 하나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천상적 통치

 1. 요한계시록은 대단히 하나님 중심적인데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특유한 신론과 더불어 신약 신학에 대한 가장 위대한 공헌이다. 요한은 거의 계시록의 초두에서부터 신적존재를 삼중적 언어로 표현한다. 초기 기독교 서신들은 종종 축복들의 신적 원인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명시함으로써 이러한 인삿말 형식에 기독교적 특징을 가미했다. 이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존재론적인 용어들로 개념화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예수를 신적인 위치에 포함시켰는지를 잘 보여준다. 초기 기독교 서신 중에서 요한계시록은 인삿말의 표준 형태에 삼위일체적 특징을 부여함에 있어서 독특하다. 그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 대신에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매우 독특한 표현들을 사용한다. 이것은 요한이 신적 존재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창의적으로 나타내고 있음을 암시한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에 대한 고도로 사려깊은 의식의 산물이다. 인삿말에 대한 요한의 창조적 변형은 신적인 존재에 대한 그의 이해가 삼위일체적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2. 요한계시록의 서문은 신적인 자기 선포로 끝난다.(1:8)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에 대한 네개의 중요한 칭호 중에 세개를 포함한다. "알파와 오메가", "전능하신 주 하나님" , "이제도 있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 알파와 오메가"란 처음과 나중이란 표현과 동일한 의미인데 이 칭호는 이사야서에서 유래하고 있다.(44:6)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의 이 칭호는 이사야40-66장에서 바벨론의 우상들에 대항하여 모든 만물들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축약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자적 조망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처럼 철저한 유일신 신앙이다.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구조 안에서 하나님은 두 번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선포하신다. 한 번은 요한이 환상을 보기 전이고(1:8) 두번째는 하나님이 피조세계 전체에 대한 그의 종말론적 성취를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할 때이다.(21:6)

 

 

3.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라는 하나님의 칭호는 요한계시록에서 다섯번에 걸쳐 다양하게 나타난다.(1:4; 1:8; 4:8; 11:17; 16:5) 이 칭호는 야웨(YHWH)라는 신적 이름에 대한 해석이다. 구약성서에서 이 이름은 출애굽기 314절에서 유일하게 발견되는데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후기 유대교는 이것을 신적 영원성에 대한 진술들로 이해했다. 이 신적 이름을 팔레스타인 탈굼은 "지금도 계시고 과거에도 계시며 미래에도 계실 자"라는 존재적 측면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요한은 "오실 자"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단순히 미래적 실존이 아닌 구원과 심판을 위해 이 세상에 도래하시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미래를 묘사했다.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이 구원과 심판을 위해 "오실 것"이라는 구약의 많은 예언적 메시지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구약의 메시지들을 세상을 향한 궁극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오심으로 이해했으며 이것을 예수 그리스의 재림과 동일시했다. 이러한 해석은 그 칭호의 간략한 형태를 사용하고 있는 구절들(11:17; 16:5)에 의해서 더욱 확실해진다. 요한이 환상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종말론적 오심은 이미 발생하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미래가 아니다. 그 신적 칭호를 포함하고 있는 노래들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목적들이 이미 성취되고 있음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의 오심은 곧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의 성취이다. 그 노래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음에 대한 감사가 하나님의 칭호에 대한 미래적인 요소를 대신하고 있다. 따라서 요한은 그 신적 칭호를 통해 이 세상과 멀리 떨어져 스스로만 영원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과 관련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다. 그분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오시기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셨으며 그의 피조물은 그분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해석은 출애굽기 314절의 의미와 중요한 연관성을 가진다. 출애굽기 314절은 단지 자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기 보다는 자신의 역사 안에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실 것을 천명하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역사 안에서 존재하신다는 이스라엘의 오래된 신앙을 요한은 독특하게 발전시켜 하나님은 마지막에 오셔서 그분의 영원한 미래 안에서 모든 만물을 성취로 이끄신다는 종말론적 신앙으로 만들었다.

 

 

4.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라는 칭호는 요한계시록에서 일곱번 등장한다.(1:8; 4:8; 11:17; 15:3; 16:7; 19:6; 21:22) 이 칭호는 확장된 형태로서의 신적 이름에 대한 표준적인 번역으로서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주 만군의 하나님"이란 칭호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런 형태는 구약 예언서에서 매우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이 칭호는 만물과 역사 속의 사건들에 대한 야웨의 절대적인 권능과 주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이 칭호가 일곱번이나 등장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에 대한 구약 예언자들의 믿음을 계승하고 있음을 증언해 준다.

 

 

5.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네 개의 신적 호칭중에 마지막 칭호는 "보좌에 앉으신 이"인데 이 칭호 역시 일곱번 나타난다.(4:9; 5:1; 5:7; 5:13; 6:16; 7:15; 21:5) 하나님이 앉아계신 천상의 보좌는 요한계시록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중심적 상징들 중 하나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보좌의 이미지의 중요성은 특히 하늘의 보좌가 등장하는 4장의 환상에서 부각된다. 지상에서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1:9-3:22)후에 요한은 하늘 속으로 끌어 올림을 받는다(4:1) 이것은 요한계시록 전체 예언에 두가지 출발점을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메시지 속에서 언급된 일곱 교회들의 상황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환상이다. 요한은 후자의 환상으로 인해 전자의 상황을 보다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넓은 시각이란 곧 하나님이 모든 대적들을 정복하여 자신의 통치 아래 두시고 이 세상 안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목적에 대한 관점을 말한다. 4장의 환상에서 이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이 완전히 인지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종말에 땅에서도 압도적으로 나타나게 될 진정한 실체로 세우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서 진정한 것은 땅에서도 진정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요한이 하늘로 올리워진 것은 하늘의 하나님의 보좌야 말로 모든 지상적인 현상들 뒤에 놓여 있는 궁극적인 실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천상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고 난 후에야 요한은 그것이 어떻게 지상에도 세워질 것인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6. 신적 보좌에 대한 환상들은 구약성경의 예언자적 전통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왕상22:19-23) 그것은 또한 많은 유대 묵시들이 가진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요한의 환상은 이런 전통 안에서 특히 이사야6장과 에스겔1장의 신적 보좌에 관한 두개의 위대한 예언적 환상을 기초로하고 있다. 4장은 마치 비기독교적인 유대 묵시사상가에의해 쓰여진 것과 다를 바 없이 기독교에 특유한 요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5장에 가서야 기독교적인 색채의 신학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4장이 기독교의 특징들을 결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신학적 토대를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신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에서도 기독교적 신앙은 유대 유일신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 기독교는 구약과 후기 유대 전통이 가진 중요한 특징들을 취하여 기독론에 의해 규정된 독특한 신학적 발전을 이루었다. 신적 보좌에 관한 대부분의 묵시적 환상들과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도 보좌에 앉으신 분의 가시적인 형태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다. 그 대신 보좌와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인간에게 인지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보존되고 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끊임없이 드리는 예배의 장면은 이 환상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진정한 지식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따로 떨어져 생각할 수 없음을 되새기게 한다.

 

 

7. 신적 보좌에 대한 환상은 예배적인 이미지와 정치적인 이미지를 결합하고 있다. 주된 이미지는 예배적인 이미지이다. 보좌가 놓여진 곳은 천상의 성소이며 동시에 지상적인 성전의 원형이다. 네 생물들은 이사야가 본 스랍들(6:2)과 에스겔이 본 천사들(1:5-14)을 합쳐놓은 모습인데, 지상성전의 지성소에서 속죄소의 측면에 서 있는 두 천사들의 천상적 원형들이다.(25:18-22)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전적으로 일임된 천상적 존재들이다. 모든 실체들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보좌 주위를 둘러 행해지는 천사들의 끊임없는 예배는 모든 실체들의 속성이 하나님 중심적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의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자들이며 그들의 예배에 장차 더 큰 무리들이 동참하고 이 무리들은 더 확장되어 전 우주의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게 된다.(5:13) 보좌 환상에는 예배적인 이미지뿐 아니라 정치적인 이미지도 있다. 보좌가 놓여진 곳은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장소이다. 이십사 장로들은 천상적인 통치회의를 구성한다. 이십사 장로들은 그들의 보좌들과 면류관들이 말해주듯이 통치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리해서 천상적 세계를 통치한다. 그러나 그들의 통치는 의미심장하게도 하나님께 대한 복종의 행위를 통해 이뤄진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보좌에서 내려와 면류관을 벗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놓는다.그들이 가진 권위는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진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능력과 권위의 근원으로서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예배적 이미지와 정치적 이미지가 결합하여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목적이자 근원인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런 두 이미지의 결합은 하나님에 대한 묵시적인 환상에서 전통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의미심장하게도 요한계시록의 종교-정치적 상황과 일치한다. 고대의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은 자신의 권세를 종교적인 용어들로 나타내고 선전했다. 신격화된 황제들과 로마의 전통적 신들을 예배하는 로마의 국가종교는 종교적 예배를 매개로 정치적 충성을 표현했다. 이런 방식으로 로마는 국가 권력을 절대화하고 세상에 대한 궁극적이고 신적인 주권을 주장했다. 따라서 사실상 로마는 하늘에서 이미 인정된 신적 주권과 이 땅에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 도래함으로써 로마의 거짓된 신적 주권이 천상의 보좌에 앉으신 분의 참된 신적 주권으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신적 통치에 대한 로마의 주권 침해는 짐승에 대한 우주적인 경배를 통해 그려지고(13:4,8,12) 반면에 도래할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에 대한 우주적 경배를 통해 그려지고 있다.(15:4; 19:5-6) 의미심장하게도 주권을 놓고 벌이는 이런 충돌은 요한계시록에서 예배에 대한 언급에서 종종 나타난다. 하나님이 승리하는 모든 국면마다 천상에서의 예배가 뒤따르고 있다. 진정한 예배와 거짓된 예배에 관한 쟁점은 독자들이 살고있는 세계의 권력구조를 꿰뜷어보는 요한의 예언자적 통찰에서 매우 중요하다.

 

 

8. 요한계시록의 신학은 매우 상황적이다. 4장의 환상이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문제는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이 살고 있던 세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제국을 정복으로 세워지고 폭력과 압제로 유지되는 조직으로 묘사한다. 로마에 대한 두 가지 주요한 상징은 바다 괴물과 바벨론의 음녀이다. 비록 로마제국이 폭정과 압제로 유지되는 조직이지만 그 대부분의 군신들은 로마의 통치에 열광적이었다. 이들은 요한계시록에서 "땅의 왕들"이란 용어로 표현되는 지방의 통치계급들이다. 또한 "땅의 상고들"이란 용어는 로마의 경제적인 번영에 유착하여 유익을 누리는 자들을 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인 "팍스 로마나"에 의해 설복당해 로마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이런 이데올로기를 거짓된 망상으로 묘사한다.(172-4)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면은 13장에서 묘사되는 로마제국의 권세에 대한 숭배이다. 짐승으로 상징된 로마의 권세는 종교화되어 스스로 신성을 주장하며 종교적 충성을 요구하였다. 요한이 볼 때 정치 군사적인 권력을 신격화하는 것은 위험스런 우상숭배였다. 따라서 로마제국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반대는 단지 기독교 박해 때문만이 아니라, 로마의 권력구조에 대한 주도면밀하고 예언자적인 비판인 것이다. 사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당시에 기독교에 대한 전면적인 박해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은 로마권력의 속성상 만일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들이 되어 참 하나님을 증거하게 될 경우에, 거짓된 하나님 노릇을 하는 로마와의 충돌이 불가피할 것임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이 가져다 주는 이익을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는 당시에 만연했던 로마의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어떤 시각을 가져야 했다. 그 시각이란 곧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지상적 권세보다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기독교적 환상이었다. 로마에 대한 비판이 4장의 신적 통치와 심판에 대한 환상 뒤에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9. 요한계시록 전체는 주기도문의 처음 세 가지 간구가 성취되는 환상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6:9-10)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거나 그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계에서 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의 압제와 착취를 통해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4장에서 요한은 궁극적인 실체의 영역인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함과 의로움과 주권을 보았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이런 환상은 이제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4장의 환상은 5장의 기독론과 더불어 요한계시록의 나머지 이야기의 토대가 된다. 그래서 4장의 환상은 이후에 등장하는 악의 권세와 세상의 심판에 대한 환상과 연결이 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은 지상의 불의에 대한 정죄를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악의 권세들에 대한 심판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렇게하여 악인들의 통치가 지상에 도래하는 하나님의 왕국으로 대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판의 목적은 모두 악을 분쇄하고 하나님나라를 이땅에 도래케 하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일련의 심판들이 4장의 신적 보좌 환상과 연결되는 방식이다. 각 심판 시리즈들은 모두 신적 보좌로부터 발생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보좌로 부터 나오는 번개와 음성과 뇌성(45)으로 상징된 신현 형식은 일곱째 인을 떼는 순간(8:5)과 일곱째 나팔울 부는 순간(11:19) 그리고 일곱째 대접을 쏟는 순간(16:18-21)에 반복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심판의 전체 과정은 45절의 신적 현현 속에서 계시된 바로 그 신적 거룩함이 나타나는 과정으로 묘사되고 있다.

 

 

10.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미지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모델을 제공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물론 보좌 이미지는 인간 세계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그것은 신적 주권과 인간적 주권 사이의 유사점 보다는 그 차이점, 곧 하나님의 주권의 초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보좌 이미지는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가 반드시 피조물들간의 관계를 통해서만 비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정한다. 그런데 보좌 이미지가 취하는 초월성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은 어떤 초인적 존재로서 다른 존재들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보좌 이미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초월성을 이끌어 내면서 동시에 인간 권세의 신격화에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적 초월성을 자아내는 요한계시록의 환상은 참 예배와 우상숭배를,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구분하는 예언자적 목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초월성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절대적 구분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피조물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초월적인 하나님은 모든 만물에게 가깝게 계시는 분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어떻게 새로운 창조물 안에서 인간들과 함께 거하시는 지를 설명하고 있다.(21:3) 현재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하여 땅에서 일하신다. 마침내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종말론적으로 오실 때 그리고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올 때 비로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하늘에서 이뤄진 하나님의 통치는 불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아직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세계를 상정하고 이 세상을 거부하는 이원론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은 이 세상의 악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있지만 결국 이 세상이 악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광채로 채워질 것을 보여준다.

 

 

11. 이십사 장로들의 찬양(4:11) 속에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표현되어 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유대교의 중요한 특징이며 초대 기독교가 명백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유대교와 기독교 유일신론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종말론에서 중요한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창조주가 아니라면 그분은 미래에도 그의 피조물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의 근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창조물은 창조주의 새로운 창조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다. 이것은 부활의 소망이 가능했던 방식이다. 또한 유대의 종말론적 소망은 단지 개인의 부활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전체 피조세계의 미래에 대한 소망이었다. 그것은 새 창조에 관한 소망이었는데, 이것은 창조세계가 다른 세계로 대체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 그리고 그것에 대조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의미하는 바는 또 다른 것에 의한 대체가 아니라 이 세상이 종말론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종말적 소망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자신의 피조물을 향한 창조주의 신실함에 대한 믿음에 기초를 둔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새 창조의 가능성을 초래한다면, 새 창조에 대한 소망은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그분의 신실함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그분의 신실함은 악의 권세들을 파괴함으로써 그의 파조세계를 악으로부터 구원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신적 심판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구원 행동인 것이다.

 

보좌 위 어린 양

1. 요한의 환상은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시작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영광스런 천상적 존재로 나타나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선포하신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는 이 선포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신적 자기선포에 상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한 자기선포(1:8; 21:6)와 그리스도의 자기 선포(1:17; 22:13)의 패턴을 살펴보면 요한계시록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놀라울 정도로 동일시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자기 선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에 참여하였음과 모든 만물의 기원과 목적이 되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신적 자기선포(1:8)가 신적 주되심을 진술하여 만물에 대한 그의 권세를 나타내고 있다면 이에 상응하는 그리스도의 선포(1:18)은 그리스도가 신적 주권에 참여함을 진술함으로써 죽음과 부활을 통해 얻으신 사망과 음부에 대한 그의 권세를 나타낸다. 교회를 향하여 메시지를 전하는 문맥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만물 창조사역에 참여하셨음을 언급하는 것(3:14)은 자연스럽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부른 것은 그리스도가 첫번째 피조물이라든가 혹은 부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의 시작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21:6)과 그리스도(22:13) 모두에 의해 사용되고 있는 이름인 "시작과 끝" 과 동일한 의미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근원으로서 만물들에 우선하신다. 창조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이런 역할에 대한 믿음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공유되고 있지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하심의 충만함 가운데 속했다고 명확하게 진술하는 곳은 요한계시록 이외에 신약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를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 혹은 말씀과 동일시함으로써 발생된 것이다이런 믿음과 함께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오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동일시하는 믿음은 초대교회의 기독론의 아주 초기 단계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들 두 신앙의 발전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만물 창조 사역과 만물에 대한 종말론적 성취사역 모두에서 신적인 행위자로 보게 만들었다.

 

 

2. 이같은 사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가 사용되는 네 구절들(1:8, 17 ; 21:6, 22:13)의 패턴을 자세히 살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우선 서언(1:1-8)의 마지막에 나오는 신적 칭호(1:8)는 결어(22:6-21)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칭호(22:13)와 일치한다. 그리고 서로 상응하는 이 두 구절들은 각각 재림의 언급(1:7; 22:12)뒤에 나온다는 점에서 더욱 일치한다. 마찬가지로 요한의 환상(1:9-22:9)의 시작과 끝 부분에 각각 위치한 그리스도의 칭호(1:17)와 신적 칭호(21:6)도 동일한 방식으로 일치한다. 그리고 이 두 구절들도 각각 새 생명과(1:18; 21:5-6) 관련된다는 점에서도 더욱 일치한다.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그러하다고 선포하고 하나님은 만물에 대한 새 창조와 생명수 샘물을 주심으로 그러하다고 선포하고 있다. 이러한 패턴은 그 이름들이 스스로 나타내고 있듯이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도록 강조한다. 만물의 시작이신 하나님이 역시 만물의 끝이 되실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을 때 들어가신 종말론적인 생명은 곧 모든 구속받은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새 창조 안에서 공유하게 될 생명인 것이다. 이렇게 이들 네 구절은 교차대조적 배열을 형성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의해 사용되는 그런 이름들의 종말론적 측면과 마찬가지로 기원적인 측면 역시 기독론적으로 중요하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공유하고 있는 이들 이름들은 그가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의 영원에 동참했음을 시사한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를 두 번째 신으로 지칭하지 않고 오히려 만물의 유일한 근원이고 목적이 되신 이스라엘의 한 분 하나님의 영원하신 존재 속에 포함시킨다.

 

 

3. 요한계시록에서 예배는 매우 정교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대 유일신론에서 예배는 만물의 창조주시며 경배를 받으셔야 할 하나님과 경배를 받을 수 없는 피조물 사이를 구분짓는다. 이러한 구분은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유일신론의 참된 의미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한 분 하나님께 제한된 예배와 또 그 예배와 밀접하게 연결된 창조의 교리는 정확히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가 그들의 유일신론을 이교적 우상숭배와 대비시키는데 강조했던 점들이다. 요한계시록은 로마제국의 악의 뿌리가 인간 권세에게 드려지는 우상숭배적 예배에 있음을 드러내면서 짐승을 예배하는 자들과 한 분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 사이의 갈등을 잘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에서 환상을 보여주는 천사는 계시의 도구에 불과하지만 예수는 계시의 원천으로 제시된다.(22:16) 이것은 예수가 유일신론적인 경배로부터 제외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예배의 대상에 동등하게 포함되고 있음을 함축한다. 유일신론적 예배의 문제가 첨예하게 등장하는 요한계시록에서 예수에 대한 예배는 한 분 하나님의 존재에 예수를 포함시킬 것을 지시해주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5장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승리하고 신적 보좌에 서 계시는 어린 양 그리스도는(5:6) 천상적 예배의 무리들 중앙에 서서 생물들과 장로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것으로 나타난다.(5:8) 그리고 이 예배의 무리는 확대되어 천사들이 생물들과 장로들에 합류함으로써(5:12)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와(4:11) 동일한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하나님과 어린 양 모두에게 돌려지는 찬미(5:13)에서는 마침내 그 예배의 무리가 전 피조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 곁에서 대신 예배를 받을 수 있는 분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에 참여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유대 기독교적 전통 안에 서 있으며 유대 기독교적 사고의 틀 안에 서서 기독론이 유일신론에 대해 가지는 관계성을 신중하게 숙고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유대 유일신론은 예언자적이고 묵시적인 전통에 중요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요한은 기독교 예언자로서 이 전통 안에서 서 있는 것이다. 요한은 유일신론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사색하지 않았던 반면에 후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추상화된 개념을 가지고 헬라 철학을 끌어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신적 속성을 나누어 가진다고 설명하였다. 요한계시록의 기독론이 비교적 덜 주목받는 것은 아마도 그의 기독론적 관용 어구들이 후기 교부들의 기독론적 사색과 매우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4. 이 세상과 관련된 구원과 심판에 대한 직임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예수에 의해 행사되었는데 하나님으로서 이런 직무를 행하시는 분은 당연히 신적인 예배를 받으신다. 그러나 일단 예수에게 예배가 행해졌을 때, 유대 유일신론자들이 단순히 직무적인 신성에 만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할 예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은 어떤 식으로든 한 분 하나님의 실체에 속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예수의 신성에 대한 진술이 예수의 존재론적 신성에 관한 진술로 귀결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요한계시록에서 현저하게 나타난 기독론의 특징은 그리스도가 하시는 바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매우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한 분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공유하시기 때문에 구원과 심판에서 그리스도가 행하도록 분부받은 것은 곧 "보좌에 앉으신 이" 가 수행했다고 선포된 것 못지 않게 참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신적인 것이다. 이것은 재림과 관련해서도 진실이다. 세 시제로 쓰인 하나님의 칭호에서 하나님의 미래가 "오실 이"로 의도적으로 표현된 것은 하나님의 미래가 구원과 심판을 위해 이 세상에 임하시는 종말론적 오심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오심은 곧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행하실 심판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다. 또한 재림 때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심판이 신적인 심판이라면 그의 희생적인 죽음에도 역시 동일한 것이 언급되어야 한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천상의 보좌 가운데 계심(5:6)은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세상을 통치하는 방법으로 삼으셨음을 의미한다. 악이 세상을 지배하는 동안 "보좌에 앉아 계신 이"로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임재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천상에 계신 것으로 묘사되어야 한다. 그러나 천상에서 "보좌에 앉아 계신 이"는 고난을 통해 세상을 정복하시는 어린양으로서 이 세상에 임재해 계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한 증거와 희생적 죽음은 사실상 하나님이 악을 정복하시고 그의 나라를 지상에 세우시는데 결정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천상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심판들 보다도 더욱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세우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은 단지 초월적인 거룩한 존재로서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으로서도 세상과 관련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희생을 감내하고 있는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는 곧 하나님의 임재이기도 하다.

 

 

 

예수의 사역에 관한 상징들

 1.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은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악이 지배하는 세상의 왕국을 바꾸어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다.(11:5) 이것은 구원의 사역이자 동시에 심판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구원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이 사역은 그리스도의 지상적 삶과 죽음으로 시작해 재림으로 끝나는 과정이다. 그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그가 이미 이루어 놓은 승리는 결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승리는 현재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 지속되어야 하며 미래에 그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승리이다.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대한 이 세 국면을 구별하고 이 국면들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다소 복합적인 이미지를 통찰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세 단계 모두에 사용된 세 개의 중요한 상징적 주제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각 주제들은 모두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전체 사역의 본질을 볼 수 있게 도와준다.

 

 

2. 첫째는 메시아적 전쟁에 관한 주제이다. 이것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 중에서 나타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그 백성의 전사적 지도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유대적 메시아 소망과 관련된다. 그는 이방의 압제자들을 대항하여 싸울 것이며 이스라엘을 해방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세울 것이다. 여기서 메시아는 전쟁을 혼자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군대를 이끌며 전쟁을 수행한다. 예수와 다윗의 메시아를 동일시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에서 매우 보편적인 것이며 요한계시록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는 전쟁을 통한 정복으로 승리하신 것이 아니며 그의 승리와 통치에 참여하는 자들도 민족적 이스라엘이 아닌 초국가적인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의 승리는 자신의 죽음을 통한 악에 대한 영적인 승리이며 하나님나라를 지상에 세우기 위한 세상적 권세들에 대한 정치적 승리이기도 하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전통적인 유대적 메시아 소망의 연장선상에서 묘사하면서도 그것을 재해석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메시아 사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요한계시록에서 정복에 대한 핵심적 개념은 시편2편의 전투적인 메시아 사상으로부터 유래한다. 그 전쟁은 메시아 자신과 그의 승리를 함께 나눌 그의 백성들 모두에 해당된다. 정복의 용어는 그리스도 사역의 세 국면 모두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이기며 그를 따르는 자들은 종말 전에 이기며 그리스도는 재림 때에 이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묘사된 메시아적 전쟁의 이미지는 하나님나라가 세워지는 전체 과정을 묘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이미지를 사용하여 유대적인 종말론에서 기독교적인 종말론으로 그 시간적 관점의 근본적 전환을 꾀하고 있다. 결정적인 승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성취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현재 그 전투를 지속하도록 부름받는다. 궁극적 승리는 여전히 미래에 놓여 있다.

 

 

3. 두번 째는 종말론적 출애굽에 관한 주제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출애굽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이스라엘을 그의 친 백성으로 만들어 약속의 땅에서 신정적 독립국이 되게 인도한 핵심적인 구원 사건이었다. 따라서 출애굽은 자연스럽게 미래의 또 다른 위대한 구원 사건을 소망하는 예언자적이고 묵시적인 소망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종말론적 출애굽을 가져오는 사역으로 해석한 흔적은 신약의 여러군데서 발견되지만 그런 개념을 가장 현저하게 발전시키고 있는 곳이 요한계시록이다. 이 주제에서 중심적인 이미지는 유월절 어린양으로서의 예수의 이미지다. 요한계시록의 어린양 이미지가 유월절에 희생당한 어린양을 지칭하는 것은 분명하다.(5:9-10) 그런데 요한은 유월절 어린양을 이사야 537절의 희생제물로 드려지는 고난받는 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가 이사야 40-66장의 새 출애굽 용어와 관련지어서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을 새 출애굽의 유월절 어린양으로 본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메시아 전쟁의 경우처럼 요한이 새 출애굽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결정적인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새 유월절 어린양은 이미 죽임을 당했고 하나님을 위하여 한 백성을 속량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신정적인 독립을 얻게 되므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지상에서 제사장들로서 다스리게 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사역을 특징짓기 위해 사용되는 세 번째 주제는 증인의 이미지다. 예수는 그 자신이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다이 칭호는 주로 예수가 그의 지상 생애 동안에 하나님을 증거한 것과 죽기까지 그 증거를 지속한 신실함을 가리킨다. 예수의 증거 사역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 지속된다. 그들은 예수의 증인들이라고 일컬어질 뿐 아니라(17:6)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 불리우는데(12:17; 19:10) 예수의 증거란 예수를 증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감당했고 또 그의 신실한 추종자들이 계속 감당하는 증거를 말한다. 그것은 참 하나님과 그의 의로우심에 대한 증거로서 우상숭배의 거짓됨과 짐승을 숭배하는 자들의 악을 폭로한다. 증거의 주제는 진리와 거짓에 관한 요한계시록의 지배적인 관심사와 연관된다. 이 세상은 누가 참 하나님인가에 대한 문제가 판결되는 일종의 법정과도 같다. 이 법정적 논쟁에서 예수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진리에 대한 증인노롯을 한다. 그 법정에서 그들의 증거는 참된 것으로 드러나며 진리를 거부하고 대적한 자들에게 심판의 판결이 내려진다.

 

 

 

그리스도의 승리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악에 대해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취했다는 확신은 그리스도가 하나님나라를 지상에 세워나가는 방식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이해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이런 확신은 5장에서 묘사되고 있으며 5장은 4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천상적 통치의 기본적 환상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천상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계시된 후에 이제 어떻게 그의 주권이 지상에서 나타날 것인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 손에 있는 인봉된 책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비밀스런 경륜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교회를 위하여 에언될 내용으로서 요한에게 계시될 것이다.

 

 

그런데 그 인봉된 책을 열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것을 열어볼 유일한 자가 되게 하는가? 죽임당한 어린 양에 관한 환상에서 핵심적인 것은 요한이 듣고 있는 것(5:5)과 그가 보고 있는 것(5:6)사이에 놓여진 대조를 깨닫는 것이다. 그는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라는 말을 듣는다. 이 두 메시아적 칭호는 군사적이고 민족주의적 이미지를 연상시키며 다윗적 메시아를 열방의 정복자이자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적자들을 무찌르는 자로 부각시킨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요한이 보고 있는 것, 곧 죽임을 당한 어린양에 의해 재해석되고 있다. 어린 양의 희생적 죽음은 사람들을 모든 나라들 가운데 속량해 낸다. 이 두 대조적인 이미지들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요한은 희생적 죽음을 통한 정복이라는 새로운 상징을 만들어 낸다. 그 유대적 메시아는 분명히 승리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희생적 죽음을 통해 승리한 것이며 그것도 민족적 이스라엘이 아닌 모든 나라 사람들로부터 사람들을 얻기 위해 승리이다(5:9). 이렇게 다윗적 메시아가 어떻게 승리를 얻게 되는가? 하는 것이 어린양 이미지로 설명되고 있다. 그래서 어린양의 이미지는 그의 희생적 죽음이 곧 악에 대한 승리였다는 사실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승리를 거둔 어린양에 대한 환호는 그의 승리가 가져올 종말론적 열매들에 대한 기대 속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께 드려지는 예배 가운데 전체 피조세계로 확장되고 있다.(5:13) 요한계시록의 나머지 부분에서 묘사되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궁극적인 승리는 곧 어린양이 십자가 위에서 이룬 결정적 승리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나라 성취의 기초가 되는 어린양의 승리에 대해 주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이 그리스도인들을 죄로부터 해방시켰고(1:5)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이 되게 했다.(1:5; 5:9-10)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나라의 우주적 도래에 있어서 교회가 담당해야 할 역할이다. 요한계시록이 가진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이미 교회 안에서 실현된 하나님의 통치는 그리스도가 쟁취한 승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권세들이 지상을 지배하는 한, 아직 그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자들, 곧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은 어린양의 완전한 승리가 성취되는데 그들이 담당해야 할 필수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이미 성취된 그리스도의 사역은 메시아 전쟁과 새 출애굽이라는 두개의 모티프를 통해 묘사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충성된 증인으로 묘사하는 세번 째 모티프는 앞의 두 모티프들과 명확히 연관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세 모티프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는 방식에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1211절의 어린 양의 피에 대한 언급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킬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증거한 순교자들의 죽음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순교자들의 죽음의 의미는그들이 예수의 증거를 이어받고 있다는데 있다. 그들의 승리는 어린양의 피로써 얻는 승리이다. 그들이 사단을 이기는 것은 오직 어린양의 승리에 참여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두번째 국면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 계속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승리가 그리스도인들의 신실한 증거를 통해 지상에서 효과있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승리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묘사는(5:5-9)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승리한 방식을 따라 이기도록 기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곱 교회들에게 주어진 메시지들은 모두 "이기는 자"에게 약속된 종말론적인 보상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 승리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의 모습을 7장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7장은 그들을 다윗적 메시아의 군대로 묘사함으로써 메시아적 전쟁의 주제를 계속 이끌고 간다. 74-14절 단락은 5 5-6절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요한은 자신이 들은 것(7:4)과 보는 것(7:9)을 대조시키고 있다. 요한이 들은 바, 이스라엘 각 지파중 인침을 받은 144,000(7:4)은 요한이 본 바, 모든 나라들로 부터 나온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무리(7:9)과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이 두 이미지들은 하나의 동일한 실체를 다르게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55-6절에서 보여진 그리스도의 두 대조적인 이미지에 상응한다. 144,000이 유다의 사자인 다윗적 메시아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죽임당한 어린 양의 피로 속량을 받은 백성들이다. 다윗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유월절 어린 양의 구약적 이미지로 재해석된 것과 마찬가지로 메시아를 따르는 자들이 가진 철저한 민족적 이미지는 족장들에게 주어진 구약의 약속(13:16; 15:5; 32:12)에 의해 재해석되고 있다.

 

 

144,000은 하나의 군대를 상징한다. 이것은 이 숫자가 각 지파별로 인구 계수를 통해 이뤄진 숫자라는 사실에 내포되어 있다. 구약에서 인구계수는 항상 군사적 병력을 위한 계수였다. 이렇게 144,000은 열두지파로 부터 소집된 이스라엘의 군대로서 이방의 압제자들을 무찌르기 위해 유다의 사자가 지휘하는 군대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들의 승리를 천상에서 찬양하면서 그 승리를 하나님과 어린양께 돌리는 무리들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한 자들(7:14)이다. 이것은 144,000이 자신들의 죽음을 통해 어린양의 희생적 죽음에 동참함으로서 승리한 순교자들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55-6절이 예수 그리스도를 군사적 힘이 아닌 희생적 죽음으로 승리하신 메시아를 묘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7 4-14절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군사적 물리력이 아닌 희생적 죽음으로써 그의 승리에 동참하는 메시아 백성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144,000이 다시 등장하는 141-5절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55-6절에서 그리스도에 관해 군사적 이미지가 희생적 의미와 함께 사용된 것과마찬가지로 14 4-5절에서도 군대의 이미지가 희생의 이미지로 전환되고 있다.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은 그가 어디로 가든 간에 자신들이 따르고 있는 자를 본받는다.(14:4) 이러한 따름은 "충성된 증인"으로서의 신실함과 그 신실함이 초래하는 희생적 죽음 모두를 본받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군대의 승리는 곧 희생적인 죽음에까지 이르는 신실한 증인의 승리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세가지 이미지, 즉 메시아적 전쟁, 유월절 어린양, 그리고 충성된 증인은 함께 사용되면서 상호적으로 해석해주고 있다.

 

 

요한계시록 7장에는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이 순교를 통해 승리했음을 처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해 볼 것은 이 승리의 장면이 위치한 지점이다. 이 승리의 장면은 일곱인 심판의 여섯번와 일곱번째 심판의 사이에 놓여있다. 여섯번째 인을 뗄 때 일곱인이 떼어지는 최종적인 심판이 곧 임할 것같이 예상되는데(6:12-17) 뜻밖에도 그 심판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이 쳐지는 동안 연기된다.(7:1-3) 다섯번째 인이 떼어졌을 때 먼저 죽은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피를 신원해 달라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들은 순교자들의 완전한 수가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을 듣는다. 그러니까 순교자들을 신원해 줄 악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은 어린양을 따르는 나머지 사람들이 순교할 때까지 연기된 것이다. 그들의 승리가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인 사이에 놓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순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속한다고 함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그것이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얻은 승리를 완성하는 것이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은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세우는 일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직 요한에게 그 비밀이 계시되지 않았다. 그 비밀은 오직 나팔 심판의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심판 사이에서 밝혀지게 된다.

 

두루마리의 비밀

왜 인봉된 두루마리는 어린양만이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신가? 그것은 그 두루마리에 세상에 하나님나라를 세우는데 어린양의 승리가 어떻게 효력을 발생하게 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어린양의 승리이다. 또한 그 두루마리는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이 증거와 희생과 승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인해 어떻게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참여하게 될 것인가를 드러낼 것이다. 어린양은 이미 승리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어떻게 승리하게 될 것인가도 드러날것이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고 어린 양이 그 인을 차례로 떼게 된다. 그러나 그 인들을 뗄 때에 발생하는 사건들이 그 두루마리의 내용은 아니다. 일곱 인을 뗄 때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단지 인을 떼는 일에 수반되어 나타나는 사건일 뿐이다. 인들을 차례로 떼는 것은 그 두루마리의 내용의 계시를 예비하는 일련의 환상들을 전개하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문학적 장치인 것이다.

 

 

이 두루마리는 인이 모두 떼어진 상태로 10장에 다시 등장한다.(10:2; 10:8-10) 그동안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10장에 등장하는 두루마리가 5장에 등장한 두루마리와 다른 것이라고 가정해 왔다. 그러나 요한은 이 두개의 두루마리가 동일한 것임을 주의깊게 암시하고 있다. 그 두루마리를 하늘에서 가지고 내려온 천사(10:1-2)은 힘 센 다른 천사로 불려짐으로써 5장의 힘있는 천사(5:2)가 언급하고 있는 51-9절과 문학적인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요한은 4,5장과 10장 전체에 걸쳐서 에스겔의 환상을(1:1-3:11)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의 차이점은 그 두루마리가 어린양에 의해 먼저 펼쳐진 후에야 요한이 그것을 받아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어린양이 그 두루마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취하고(5:7) 일곱 인을 뗌으로 두루마리가 펼쳐지고(6:1,3,5,7,9,12 ; 8:1) 그 후에 한 천사가 그 두루마리를 하늘에서 땅으로 가져와(10:1-2) 요한에게 먹도록 한 것이다.(10:8-10)

 

 

하나님으로부터 요한에게 전해진 이러한 일련의 계시들은 요한계시록 11절에서 언급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1 1절은 그 두루마리의 내용이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하신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천사를 자신의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의 계시를 요한에게 전달해주는 힘 센 천사가 10장 이전에는 등장하지 않은 것인가? 그것은 그 두루마리의 계시의 내용이 10장 이전에는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10장 이전의 모든 사건들은 계시를 이해하는데 긴요하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계시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간과하고 있지만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요한계시록 이해에 매우 핵심적이다. 두루마리의 내용이 요한에게 알려지는 시점은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나팔 사이에 놓여진 삽입 단락(10:1-11)이다. 그렇다면 왜 그 지점에서 두루마리의 내용이 요한에게 주어진 것인가? 그것은 이 삽입 단락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번째 나팔까지의 심판들은 엄격히 제한적이었다. 그것은 인류로 하여금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성 심판들이었다. 그러나 십입 단락 직전인 9 20-21절에서 그 심판들은 결과적으로 회개의 효과를 갖지 못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심판들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심판만으로는 사람들의 회개와 믿음을 이끌어 낼 수 없는 것이다.

 

 

삽입 단락 초반부에서 일곱 우레들이 나타났다가 인봉된 채로 남게 되었고 요한이 그 내용들을 그의 예언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부언하자면 경고적인 심판들은 더 이상 전개되지 않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런 심판들이 회개를 이끌어 낼 수 없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일곱 우레들도 그러한 경고성 심판이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일곱번째 나팔의 심판 뿐인데(10:7) 그것은 일곱 대접의 심판으로 전개된다. 그 심판은 이제는 제한되지 않는 완전한 심판이며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궁극적으로 파멸시키는 심판이다. 요한에게 주어진 그 두루마리의 내용은 그동안 경고성 심판들이 성취할 수 없었던 것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 두루마리를 먹고 그 내용을 다시 예언하라고 지시받는다. 그 예언의 내용은 지금까지는 계시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이 자신들의 증거와 그 증거로 인한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도록 이끄는데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예언은 만국을 향한 예언자적 증인들로서 교회가 담당해야 할 역할에 대해 교회들에게 주어진 계시이다. 그 두루마리의 내용은 11 1-13절에서 즉시 요약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가장 중심적인 메시지가 된다. 이 본문이 여기에 놓임으로써 만국을 향한 교회의 증거가 어떻게 마지막 심판 전에 오게되는지를 나타내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지막 심판인 일곱번째 나팔과 함께 궁극적으로 도래한다.(11:15-19)

 

두 증인들

두 증인 이야기(11:1-13) 이후에 일곱번 째 나팔이 불리고 12-15장에서는 교회와 악의 권세들과의 투쟁의 모습이 나타나고 이것은 이후에 이어지는 마지막 심판과 그 결과들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된다. 11 1-13절과  12-15장 사이의 관계는 11 1-13절에서 일련의 새로운 이미지들이 도입되는 방식을 통해 관찰된다. 두 증인 이야기의 이미지들은 짐승과 벌리는 교회의 투쟁이 더 큰 문맥 가운데 나타나는 12-15장에서도 사용되 있다. 요한에게 주어진 두루마리에 담긴 계시는 성도들의 충성된 증거와 죽임이 곧 만국을 회심시키는 수단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성도들의 승리는 단지 그들 자신만의 구원이 아니라 만국의 구원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미 인정하는 선민들이 자신들의 희생적 증거를 통해 반역하는 나라들도 그분의 통치를 인정하도록 이끌 때에 지상에 도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나라들로부터 대속된 것은(5:9) 예언적 증거를 모든 나라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이다.(11:3-13)

 

 

이것이 바로 두 증인들 이야기가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내용이다. 여기서 두 증인들은 세상을 향해 충성되게 증거하는 교회를 상징한다. 두 증인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비유적인 혹은 풍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의 증거가 갖는 성격과 그 결과를 극적으로 나타내주는 하나의 비유에 가깝다. 그러므로 두 증인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해 신실한 증거를 전파하는 모든 기간 동안 일어나게 될 것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두 증인들이 촛대와 동일시(11:4)되는 것은 그들이 세상을 향해 증거하는 교회를 상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증인이 단지 두 명이라는 것은 두 증인들의 증거가 믿을 만한 것으로 인정되는 구약적 배경에 상응한다(9"15) 그러므로 그들은 충성된 증인으로서 교회이며 구약의 전통을 따라서 또한 예언자이기도 하다. 11 8절은 두 증인들의 죽음의 중요한 선례가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요한은 복음서 이야기의 예수의 부활 3일을 전형적인 묵시적 숫자인 3일반으로 바꿈으로써 그들이 증거하는 것이 바로 예수 자신의 증거이며 그들의 죽음은 곧 어린양이 흘린 피에 참여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심판만으로는 회개를 이끌어 낼 수 없다(9:20-21). 신실한 증인들의 증거가 회개를 가져온다(11:6,13) 물론 그 증인들의 증거는 심판들과 상관없이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들과 결합되어 선포되지만 중요한 것은 회개하는 자들을 기꺼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심판들 그 자체는 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두 증인들이 회개를 상징하는 베옷을 입고 있음은 그들이 말하는 바가 회개를 촉구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들이 우상숭배와 악에 빠진 세상에 맞서 참 하나님과 그의 다가올 심판을 선포하고 있지만 그들은 바로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증거가 그들의 죽음으로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고 진리로 확증된 이상(11:11-12) 이것을 보는 자는 회개하게 된다. 11 13절은 7000명 외에 모든 살아남은 자들이 진실로 회개하고 한 분 참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의 반응에 대한 묘사는 14 6-7절의 천사의 권고에 상응하며 살아남았지만 회개하지 않은 자들(9:20-21)과 대조를 이룬다. 신실한 소수가 아닌 다수의 불신자들이 살아 남게 된 것은 그들로 회개하고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이다. 엘리야는 남겨진 7000명 외에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가져와야 했지만 두 증인들은 7000명을 제외한 모든 자들을 회심하게 할 것이다.

 

 

증인들이 되어서 만국으로 하여금 한 분이신 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백성인 교회가 담당해야 할 전혀 새로운 역할이다. 이것은 오직 어린양만이 펼쳐볼 수 있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비밀이다. 만약 누군가 어떻게 교회의 예언적 증거가 구약의 예언자들도 해내지 못했던 이런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의심할 여지없이 증인들의 증거가 갖는 그런 권능은 다름아닌 어린양 자신의 승리에서 나온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죽음을 통해 부활에 의해 참된 것으로 확증받음으로 강력한 권능을 지니게 되었듯이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 역시 죽기까지 충성된 증인이 될 때 그들의 증거는 어린양의 증거가 갖는 권능에 참여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3개의 상징적 모티프(메시아적 전쟁, 새 출애굽, 증인) 가운데 두 증인들 이야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주로 증인 모티프다. 12-15장에서는 하나님나라 도래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따르는 자들이 맡게 될 역할에 관한 동일한 주제가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짐승을 이기는 길

 요한계시록에는 "이기라"는 요청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구조와 주제에서 매우 중요하다.그것은 청중으로 하여금 악에 대항하는 신적 전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라는 요구이다. 이기라는 권면에 따라오는 복의 약속들은 청중들로 하여금 악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우주적인 왕국을 세우는 세움에 참여하도록 격려한다. 그 약속들이 지니는 종말론적인 내용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이김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보여준다. 교회들을 향한 일곱 메시지와 새예루살렘 환상 사이에 놓인 환상들은 청중들로 하여금 이기는 것이 무엇과 관련된 것인지를 알게 해준다.

 

 

"이기다"라는 동사는 12장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이겨야 하는지 그 대상에 대한 언급도 없이 방치되어 왔다. 그 이유는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물리쳐야 할 대적들이 12-13장에 이르러 소개되기 때문이다. 그 대적들은 용, 첫째 짐승, 둘째 짐승의 사단적인 삼위일체를 구성하고 있다. 용은 태초부터 하나님을 대적해 온 사단을 가리키고 바다에서 나온 첫 짐승은 로마의 제국적 권세를, 땅에 나온 둘째 짐승은 로마제국의 예배의식을 선전하는 무리들을 의미한다. 로마 도시의 타락하고 착취적인 문화를 나타내는 음녀 바벨론은 17장에 이르러서 소개된다. 12-13장의 이러한 이미지들이 갖는 강력한 신화적인 반향은 로마 권력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게 될 대결을 하나님과 그의 신실한 백성들을 대항해 일으키는 악의 우주적 전쟁이란 관점 속에 놓는다그리스도인들이 어린 양의 군대로서 부름받아 죽기까지 감당하는 충성된 증거로서 물리쳐야 할 대상은 바로 이러한 위협적인 악의 세력이다. 그리스도는 이미 용을 패배시켰다.(12:11) 그러나 이제 용이 하늘에서 쫒겨나 제국적 권력의 모양을 가지고 자신의 힘을 땅에 쏟아 붓고 있으므로(12:12) 그리스도인들은 그 짐승과 싸워 이겨야 한다.(15:12) 그러나 11 7절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그 짐승은 성도를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도록 허락받았다.(13:12)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순교가 짐승의 승리로 묘사된 것이다. 그러나 또한 순교는 짐승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승리로도 묘사된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승리자인가? 그 대답은 지상적 관점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천상적 관점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 땅에 속한 자들의 지상적 관점으로는 짐승이 그리스도인들을 이겼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누가 진정한 하나님인가라는 법정적 논쟁에서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인들의 증거가 틀리고 그들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 당시의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그런 시각으로 상황을 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상적 관점에서 볼 때 상황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이다. 순교자들이야 말로 진정한 승리자들이다. 죽음이 이르기까지 참 하나님을 충성되게 증거하는 것은 짐승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여 짐승에게 결정적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하늘의 환상(7:9; 15:2-3)이나 하늘의 음성(11:12; 14:2) 속에서만 순교자들이 진정한 승리자들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짐승의 거짓된 선전이 지닌 지상적인 망상을 천상적 관점으로 꿰뚫어 볼 것을 요청한다. 천상적인 관점만이 진리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 짐승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일 수는 있지만 진리에 대한 그들의 증거를 저지할 수는 없다. 아마도 악의 권세들과 어린양의 군대들 사이에 놓인 가장 중요한 대조점은 거짓과 진리일 것이다. 용은 온 천하를 속이는 자(12:9)이고 두번째 짐승은 신적인 능력을 보임으로 땅에 속한 자들을 미혹하고(13:14) 바벨론은 그 마법으로 만국을 미혹한다.(18:23) 그러나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은 어린양 자신과 같이 전적으로 거짓이 없다.

 

그러므로 메시아적 전쟁의 주제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증거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가게 한다.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과 짐승과의 대결에서 요한은 군사적 이미지를 사용하는데,그는 그 군사적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가 사건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매우 중요한 이슈를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세상은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힘이 승리하는 곳인가 아니면 고통스럽지만 진리를 증거하는 자들이 승리하는 곳인가라는 질문이다. 요한계시록은 독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의 증거를 통해 모든 악에 대한 포괄적 승리를 얻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예언자적 통찰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통찰을 삶 가운데 용기있게 실천할 것을 요구한다.(13:10) 요한이 사용하는 군사적 이미지는 순교를 어느 물리적인 전투 못지 않게 능동적이고 능력적인 것으로 만든다. 요한의 메시지는 폭력이 아닌 진리의 증거와 순교로서 저항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어린양의 승리의 궁극적인 성취에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성되게 참 하나님을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짐승을 이기며 이 증거를 계속해 나간다. 이런 방식으로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는 그들의 충성된 증거는 역시 죽기까지 충성되게 증거함으로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권세에 참여한다. 일곱 메시지의 모두에서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은 이기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종말론적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이 이기는 자들에게 직접 약속하시는 217절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명백하게 오직 두 가지 뿐이다. 이김으로써 종말론적 약속들을 상속받든가 아니면 불못에서 두 번째 죽음을 당하든가이다.(21:8)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진리 증거로 인한 고난과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승리로의 부르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짐승과의 타협을 통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어떠한 중립적 입장도 허용하지 않는다.

  

두 가지 추수

12-14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12:5)부터 재림에 이르기까지(14:14-20)의 메시아적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12-13장에서 우리는 용과 짐승이 성도들을 대적해 전쟁을 벌리고 있음을 본다. 그런데 14 1-5절에서 우리는 짐승을 이긴 어린양의 군대가 시온산 위에 섰고 천상에서 그들의 승리를 축하하는 모습을 본다. 그런데 어린양의 군대의 이미지는 군사적인 용어들이 아니라 희생과 증거의 용어들로 전환된다.(14:4-5) 순교자들의 승리가 만국에 미치는 영향(14:6-11)과 재림 때 나타날 전쟁의 궁극적인 결말(14:12-20)은 메시아적 전쟁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묘사된다. 그 이유는 증인 이야기에서 나타났듯이(11:3-13)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이 메시아적 전쟁에 참여하는 목적이 만국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회개와 믿음은 전쟁의 이미지로 묘사될 수 없다.

 

 

순교자들의 증거가 만국에 미치는영향은 14 6-11절에 나오는 세 천사들의 선포에서 묘사된다. 그 선포는 짐승에게 지배를 받아 그를 경배했던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한다.(14:6) 짐승과 순교자들의 대립은 만국으로 하여금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한다. 순교자들의 증거를 듣고 회개하든가(14:7) 아니면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에 직면하든가이다. 이 선택의 결과는 두가지 추수 이미지로 제시된다. 그 하나는 곡식추수이고(14;14-16) 다른 하나는 포도수확(14:17-20)이다. 이 두 이미지들은 모두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확고부동안 이미지들이다. 요한은 이 두 이미지를 사용하여 재림의 두가지 측면을 묘사했는데 하나는 회심한 나라들을 그리스도의 왕국 안으로 불러모으는 곡식추수와 다른 하나는 회개하지 않은 나라들을 최종적으로 진멸하는 포도수확이 그것이다.

 

 

곡식 추수 이미지에 상응하여 앞서 나온 이미지는 하나님과 어린 양을 위한 첫 열매들로서 사람들 가운데 구속을 받은 144,000이다. 이 어구는 어린양에 대해 묘사한 59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이 그의 희생에 의해 속량된 후 이제 자신들을 희생으로 드리는 모습을 보게된다. 그들이 드리는 희생은 구속받은 자들 가운데 첫 열매인 것이다. 첫 열매는 나머지 곡식이 익기 전에 추수되어 그 첫 단이 하나님께 희생으로 드려졌다.(23:9-14) 그러므로 순교자들은 모든 나라들로 부터 먼저 속량되어 모든 나라들의 추수를 보증하는 첫 열매들로 하나님께 드려진다. 그리고 모든 나라들에 대한 수확은 1414-16절에 묘사된다.

 

 

곡식 추수와 달리 포도수확은 두 가지 단계로 이루어진다. 포도를 포도주 틀로 모아넣는 일과 포도주 틀을 밟는 일이다. 이 두 행위들은 동방의 왕들과 그의 군대들을 아마겟돈으로 모으는 일(16:12-14) 그리고 재림 때 만국을 심판하는 일(19:15)에 상응한다. 그리고 곡식 추수에서 나타나는 단일한 행동은 구름 위에 앉아 면류관을 쓴 인자와 같은 이(14:14)에 의해 수행되는 반면 포도 수확은 한 천사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다른 자에 의해 수행된다. 그런데 포도주 틀을 밟은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자는 19 11-16절에 이르러서야 신적인 전사이자 심판자로 묘사되는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니까 곡식을 수확하는 자나 포도주 틀을 밟는 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에 대한 두 이미지는 서로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그는 순교자들이 짐승에게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짐승의 지배에서 구해낸 만국을 자신의 왕국 안으로 모아들인다. 그리스도가 교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삼은 것은(1:13) 이 세상에서의 그들의 증거를 통해 모든 나라들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 안으로 인도하는 일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이다.(11:15) 그는 만국을 위해 빛을 발하는 촛대들인 교회(1:12-13)의 주인으로서 "인자 같은 이" 이시다. 드디어 14 14-16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만국으로 확장되는 것을 본다.

 

만국이 돌아옴

본 단락에서 만국을 향한 교회의 증거의 결과를 묘사하기 위해 새 출애굽 모티프가 사용되고 있다. 152절에서 순교자들은 짐승과의 대결에서 벗어나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순교를 통과하여 천상에 이르게 되는 그들의 진행 과정은 홍해를 통과한 출애굽의 이스라엘의 진행과정에 비유된다. 마치 모세의 인도를 받아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듯이 순교자들은 바다 곁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15:1-18) 새 출애굽은 어린양의 피로 쟁취한 승리이기 때문에 그들의 노래는 모세의 노래일 뿐 아니라 어린양의 노래이기도 하다. 이 노래는 모세의 노래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다. 이 노래의 내용들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종말론적 왕국을 세우는 요한계시록 전체의 주제와 연관된다. 요한에게 새 출애굽이 가지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새 출애굽을 하나님이 짐승의 거짓 주장을 반박하시고 만국을 향하여 비길데 없는 신성을 드러내신 사건으로 보고 있다. 요한은 구약의 우주적인 소망 곧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을 경배하게 되리라는 기대에 보조를 맞추어 모세의 노래를 재해석하고 있다.

 

 

모세의 노래에 대한 요한의 이러한 재해석은 상당히 주목할만 하다. 요한은 모세의 노래를 재해석함으로써 새 출애굽의 의미에서 그 강조점을 전환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모세의 노래가 하나님이 원수들을 심판하심으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한 사건에 강조점을 두는 반면에 요한이 재해석한 모세의 노래는 만국으로 하여금 참 하나님을 인정하게 만든 사건에 강조점을 둔다. 그래서 순교자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음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만국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인도하신 것을 인하여 하나님의 승리를 찬양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사역의 첫번째 단계와 관련하여 새 출애굽 이미지의 사용에 신선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을 모든 나라들로 부터 속량하여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셨다(5:9-10) 그러나 이제 이 특별한 백성의 구원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그 이상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만국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배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역의 첫 단계에서 어린양의 피의 희생이 하나님을 위하여 한 백성을 구원했다면 둘째 단계에서는 이 백성들이 순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을 위해 만국 백성들을 얻게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주적인 왕국이 도래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15 2-4절과 1111-13절의 내용은 서로 정확하게 일치하며 양자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확증시킨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현저하게 나타나는 긍정적인 우주적 소망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어떤 난점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이 단락(15:2-4) 이후에 155-19 21절에 이르기 까지 최종적 심판 시리즈에 관한 환상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일곱 재앙들은 완전한 심판이다. 그것들은 인 심판이나 나팔 심판 처럼 제한적인 심판이 아니며 구원을 가져오는 심판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 심판들의 결과는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다. (16:9, 11, 21) 그 일곱 재앙들 중 어떤 것도 죽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저주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궁극적 운명은 아마겟돈 전쟁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거기서 세상의 왕들은 짐승과 연합하여 자신들의 군대를 소집하는데(16:12-16) 이는 자신들을 멸하러 최종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려 함이다.(17:12-14) 그 결과는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의 멸망에 대한 잔혹한 묘사로 나타난다.(19:18-19) 16-19장의 심판들은 주로 하나님과 그의 의로움을 반대하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조직들을 멸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데 이들은 짐승, 거짓 선지자, 바벨론, 땅의 왕들로 상징화되고 있다.

 

 

순교자들이 부르는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 뒤에 마지막 일곱 재앙들이 뒤따르게 될 것이라는 점은 이미 14장에서 곡식 추수가 갖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포도 수확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뒤따르는 방식으로 이미 예상되었다. 요한은 만국의 우주적인 회심을 우주적인 최종 심판과 나란히 놓고 있는데 이는 교회의 신실한 증거가 만국의 회개와 믿음을 가져오지만 반대로 교회의 증거를 거부하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마지막 심판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대조적인 두 그림들은 만국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에 상응하여 나타나는 모습들인데 그 선택은 14 6-11절에서 천사들의 선포로 만국 앞에 제시되고 있다. 이로써 요한계시록은 청중들에게 짐승이나 바벨론의 파멸에 참여하지 말고 예수의 증거를 충성되게 죽기까지 붙들라고 요구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방법으로 만국 백성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되는 소명을 성취한다.  그러므로 21장의 새 예루살렘 환상은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구약 소망의 가장 우주적인 형태를 채택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게 될 백성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든 민족에서 첫 열매로 속량받은 종말론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특별한 민족의 증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모든 민족인 것이다.(21:24-26)

 

재림과 천년왕국

그리스도는 새 출애굽의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죽기까지 충성되게 증거하심으로 악에 대한 포괄적인 승리를 획득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 사역의 첫 단계이다. 그 즉각적인 결과로서 모든 나라들로부터 선택된 백성이 창조되었으며 그들은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이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그러나 이 선택된 백성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왕국을 성취함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았다. 이 하나님의 우주적인 왕국은 인봉된 두루마리를 펼침으로 말미암아 계시되었다. 그리고 그 계시는 요한을 통하여 교회들에게 전달되었다. 모든 나라들로부터 선택된 백성은 그리스도가 그랬듯이 죽기까지 신실한 증인 노롯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로마제국의 우상숭배적인 권력과 대 결전을 치루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모든 나라들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게 될 것이고 만국으로 하여금 회개와 참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사역의 둘째 단계이다.

 

 

요한계시록은 두 개의 가능한 결과들을 서로 제한없이 나란히 놓고 있다. 그것은 만국이 회심하여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든가 아니면 회개하지 않는 나라들에 임하는 심판에 직면하든가이다. 이들 중 두번째 가능성의 존재는 그리스도 사역에 세번째이자 최종적인 단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 역시 첫째, 둘째 단계와 마찬가지로 승리로 묘사되고 있다.(17:14) 땅의 왕들이 짐승을 따르듯(17:12) 교회도 역시 어린양을 따라서 전쟁에 참여한다. 그들은 어린양을 따르는 하늘의 군대들인데(19:14) 이때 어린양은 하늘로부터 말을 탄 신적 전사로 나타난다.(19:11) 그는 자신이 땅 위에 실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모든 정치적인 권세들을 부수기 위해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으로 오신다.(17:14; 19:16)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묘사하고 있는 재림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증거 이미지를 필요로 하는데 이는 전쟁 이미지를 보충하기 위함이다. 교회의 진리 증거는 이중적 효과를 가지는데 한편으로 그것은 거짓과 속임으로부터 사람들을 이끌어 내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거절한 자들에게 불리한 증거가 된다. 진리는 처음에는 하늘에서 보여지고 그 다음에 하늘에서 땅으로 도래한다. 하늘이 열리고(19:11)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자신(9:13)은 말을 타고 땅으로 임한다. 이 국면에 이르러 하늘의 관점은 땅을 지배하여 마침내 짐승의 거짓을 쫒아 버린다. 이 때 그리스도에게 여러가지 이름이 주어지는데, 이 이름이 보여주는 것은 죽임당한 어린양이 아니라 심판주로 바뀐 증인의 모습이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3:14)은 이제 충성과 진실이라고 일컬어진다.(19:11) 동일한 진리에 대한 동일한 충성이 이제 그로 하여금 거짓을 말하는 자들을 심판하는 자가 되게 한다. 그는 비록 어린양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그가 죽기까지 충성되게 증거함으로 흘린 피는 여전히 그를 특징짓고 있으며(19:13) 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컫게 만든다.(19:13) 마침내 거짓을 말하는 자들을 단죄하고 그들을 망하게 하는 것은 어린양과 순교자들이 증거해 온 하나님의 진리이다. (19:20) 땅 위에서 이런 승리의 결과로 인해 사단은 만국을 더 이상 속이지 못하도록 결박당하게 된다.(20:1-3) 사탄의 결박에 대해 요한복음 12 46-49절은 요한계시록과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동일한 사고를 표현하고 있다.

 

 

마침내 우리는 천년왕국을 논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천년왕국은 재림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이해되기 때문이다. 사탄은 종국에 가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운명과 동일한 최후를 맞게 되는데 다만 천년이 지난 후에 그렇게 된다. 재림의 결과로 모든 악은 분쇄되지만 악의 궁극적 분쇄는 재림의 즉각적인 결과로 묘사되지 않고 천년이 지난 후의 결과로 묘사된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의 한 국면(20:4)이 천년을 사이에 두고 마지막 심판 그 자체(20:11-13)로 부터 분리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다니엘 7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한 짐승이 멸망당할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인자와 그의 백성에게 양도될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짐승의 멸망(19:11-21)과 왕국이 성도들에게 양도됨을(20:4-6) 묘사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은 바로 다니엘 7장을 배경으로 한다. 이것은 짐승이 단죄 당하는 심판의 부정적인 면과 성도들이 나라를 차지하는 심판의 긍정적인 면이 함께 묘사된 것이다. 지상적 관점에서 짐승이 승리하고 순교자들은 패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천상의 관점이 마침내 땅에 편만하게 되어 모든 진상이 밝혀질 때, 짐승은 패배당하고 순교자들이 승리한 것이 보여질 것이다. 그러므로 짐승의 통치에 참여했던 땅의 왕들이 자신들의 권세를 빼앗기고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된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20 4-6절은 짐승의 운명에 대조되는 순교자들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천년왕국의 신학적 강조점은 오직 순교자들의 승리를 증명하려는 데 있다. 그 승리의 기간이 천년이라는 것은 그 승리가 영원하고 두번 다시 전복시킬수 없는 승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사탄에게 다시 한번 만국을 속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만(20:7-8) 그것은 더 이상 짐승 통치의 재연이 아니며 성도들의 요새는 난공불락임이 입증된다.(20:9) 요한은 유대 묵시전통으로부터 마지막 심판과 새 창조 사이에 메시아적 지상 통치가 잠시 있게될 것이라는 개념을 취하였지만 요한은 그 개념을 독특하게 발전시켜 순교자들의 승리가 영원하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년 왕국의 이미지를 문자적으로 취급하여 인류의 미래 역사에 있을 실제적인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요한이 그의 상징세계안에서 천년왕국에 부여하고 있는 기능에 적합하지 않다. 천년왕국 이미지를 문자적으로 취급하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요한은 천년왕국 이미지를 통해 순교자들의 정당함이 입증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천년왕국은 그들의 정당함이 입증되는 방식을 예언하기 보다는 그 정당함이 입증되는 것의 의미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예언의 영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비교해 볼 때 성령에 대한 언급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요한계시록의 신학에서 성령은 매우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에서 성령은 이 세상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신적 사역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성령에 대한 언급은 두개의 중요한 범주로 구분되는 데 그것은 일곱 영을 지칭하는 언급들과 성령을 지칭하는 언급들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영에 대한 언급은 네번, 성령에 대한 언급은 열 네번 등장한다. 일곱 영은 승리한 어린양과 긴밀히 관련된다. 그러므로 일곱 영이 네 번 언급되는 것은 곧 어린양의 승리가 신적인 권능의 충만함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14절에서 그 보좌 앞에 일곱 영은 천사가 아니라 신적인 영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요한에게 스가랴 본문( 4:1-14)은 신적인 활동에 있어 성령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구약 본문이다. 요한은 이 본문에 근거하여 일곱 영과 두 증인에 대한 묘사를 이끌어 낸다. 스가랴 본문을 배경으로 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짐승의 권세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어떻게 땅 위에 세워질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것은 세상적 권세가 아닌 신적인 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스가랴는 환상에서 일곱 등잔이 놓인 순금 촛대를 보게 되는데, 요한은 이것을 성전 안의 성소에 있던 일곱 등잔이 달린 촛대와 연결시켰다. 요한은 천상의 환상에서 신적 보좌 앞에 등불이 켜져 있는 일곱 등잔을 보고서 이것을 일곱 영과 동일시하고 있다(4:5) 그런데 천상적 성전은 지상적 성전의 원형이므로 천상적 성전의 일곱 등잔은 지상적 성전에서 주 앞에 켜져있는 일곱 등잔(40:25)에 상응한다. 이러한 언급들은 일곱영을 하나님과 관련시키고 있다. 그런데 56절에서는 일곱 영이 어린양과 밀접하게 관련되면서 어린양이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일곱 눈이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구약에서 야훼의 눈이란 온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는 능력을 지칭할 뿐 아니라 그가 선택한 어디서든지 강력하게 역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칭한다. 아마도 56절은 어린양의 일곱 뿔과 일곱 눈을 모두 일곱 영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다. 요한은 힘의 상징으로 알려진 일곱 뿔을 일곱 눈에 추가합으로써 하나님의 천리안적인 눈과 그의 능력이 갖는 이러한 관련성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의 일곱 뿔은 용과 짐승의 뿔에 맞서는 신적 권능이다.(12:3; 13:1, 11; 17:12-13)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신적인 권능이 어떤 속성을 지녔느냐는 문제이다. 죽임을 당함으로 승리한 어린양의 일곱 눈과 일곱 뿔은 어린양의 승리의 권세를 나타낸다. 일곱 영은 어린양의 승리를 온 세상에 효과있게 하기 위해 땅에 보내심을 받았다. 하나님은 천상 보좌에 앉아 계시고 아직 지상에 거하지 않으시는 반면에, 그리고 어린양은 죽음을 통해 땅위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제 천상에서 아버지 보좌에 참여하고 계신 반면에, 일곱 영은 지상 위에 임한 하나님의 권능의 임재로서 어린양의 승리를 온 세상에 실현시킴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고 있다. 초기 기독교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현재적으로 계신 신적인 권능으로 보았고 그것이 곧 승귀하신 그리스도가 세상에 임재하시는 방식이자 그리스도의 과거 사역이 현재에 효과있게 되는 방식으로 이해하였다. 일곱 영에 대한 요한의 이해는 성령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갖는 관계성에 관한 초기 기독교의 보편적 이해와 대체로 일치한다.

 

 

일곱 영은 111-3절의 두 증인들과 관련되어 있다. 스가랴 4장의 두 감람나무는 기름을 발리운 자들인데 곧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들이다.(414)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두 증인들은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이다. 요한은 스가랴 환상을 수정하여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를 동일시함으로써 두 감람나무가 일곱 등잔이 달린 두 촛대임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암시되고 있는 것은 일곱 영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예언자적 증거의 권능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일곱 영이 온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는 것은 교회의 선지자적 증거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와 비슷하게 일곱 교회들은 일곱 촛대로 나타난다.(1:12,20 ; 2:1) 스가랴에는 일곱 등잔이 달린 하나의 촛대가 나오는데 요한계시록에는 이 하나의 촛대가 일곱 촛대로 나뉘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상응하여 나타난다. 일곱 영이 온 땅으로 보내심을 받는 것은 바로 일곱 촛대들 위에 있는 일곱 등잔들로서 보냄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곱 영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승리로 말미암아 온 세상 안으로 퍼지게 된 신적 권능이다.

 

일곱 영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온 세상을 향한 교회의 증거와 관련하여 신적인 영의 충만함을 상징한다. 바로 이것이 단순히 성령을 지칭하는 언급과 일곱 영에 대한 언급을 구분짓는 차이점이다. 단순히 성령을 지칭하는 언급은 교회들 안에서 기독교 예언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령의 활동에 관련된다. 그래서 성령에 대한 열 네번의 언급 모두는 요한의 예언 자체를 영감시키는 성령의 활동에 관한 것이다. 요한이 성령으로 환상을 통해 계시를 받는 언급은 네 번 등장한다.(1:10; 4:2; 17:3; 21:10) 이러한 언급은 여기서 영이 요한의 인간적 영이 아니라 환상을 일으키는 주체로서의 신적인 영을 지칭함이 분명하다. 성령은 요한으로 하여금 환상을 받도록 해주고 요한은 이 환상 속에서 계시를 받는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으로부터 요한으로 전달되는 계시의 사슬(하나님--그리스도--천사--요한)과 구별되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다. 성령은 계시의 내용 자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요한으로 하여금 계시받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성령에 대한 언급들은 요한계시록의 토대가 되고 있는 환상 경험이 신적인 영의 행위로서 실제적인 것임을 말해준다. 이를 통해 요한은 자신이 전하는 계시의 신적인 권위를 드러내면서 자신의 글을 구약 예언자들의 반열에 위치시킬 뿐 아니라 나아가 성경 예언 전체의 정점에 이르는 최종적인 예언적 계시가 되게한다.

 

 

요한은 환상 경험의 매개로서의 성령에 대한 이런 언급 외에 예언적 신탁을 영감하는 성령에 대해 언급한다. 일곱 교회들을 항한 각각의 메시지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 후에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선포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성령이 말하는 것이 곧 승귀하신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것임을 의미한다. 성령은 예언적 말씀을 영감하며 이로써 예언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교회들에게 전달하게 된다. 성령은 기독교 예언자들의 말이 영감된 것임을 확증해 준다. 예언의 영으로서 성령은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땅 위에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가져온다. 또한 천상적인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땅위에서 보증해 주며 교회들의 기도를 천상적인 주님께 전달해준다. 요한의 성령 언급에서 성령은 하늘이 아닌 땅 위에 있는 신적인 임재이다. 그러나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일곱 영과는 달리 성령의 영역은 교회들이다. 성령은 교회들 안에서 예언자들을 통해 교회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일곱 영은 교회들을 통해 온 세상에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과 일곱 영이 분리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교회들에게 전달된 성령의 메시지인 예언은 교회들로 하여금 세상을 향하여 예언자적 증거를 수행하도록 준비시키며 능력을 부여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19 10절에서 "예수의 증거가 대언의 영"이라는 진술은 성령이 예언을 영감시킬 때 그 예언의 내용이 곧 예수의 증거라는 의미가 틀림없다.

 

 

요한의 예언으로서의 요한계시록이 하나님의 말씀일 뿐 아니라 예수의 증거이며(1:2) 또 예수 자신에 의해서 증거된 것(22:16, 20)이라는 진술은 주목할만 하다. 요한계시록이 예수의 증거이고 교회가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19:10)이라면 예수가 했던 것과 같이 증거하는 자들은 단지 기독교 예언자들만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한 그들의 증거에 있어서 예수의 증언을 지닌 자들이다.(12:17)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본질적으로 예언자들의 역할과 같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역할은 곧 예수의 증거를 지니고 한 분이신 참 하나님과 그의 의로우심에 말과 행동에서 충성되게 남아있는 것이다. 한 분이신 참 하나님과 그의 의로우심을 우상숭배와 악들로부터 구별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예언의 주제다. 그것은 예수의 증거의 주제이며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 지속되어야 할 증거이다. 또한 그것은 요한의 예언의 주제이자 그의 예언이 모든 교회로 하여금 만국에 증거하도록 요구하는 예언적 증거의 주제이기도 하다. 교회들에게 전달된 예언과 세상을 향한 교회의 예언적 증거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양자 모두 예수의 증거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며 한 분 하나님과 그의 의로우심의 진리에 관한 것이다. 양자 모두는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신적인 영으로 영감되어 지며 하나님나라를 세상 가운데 세워나가는 것에 관련된다. 교회들 안에 주어진 예언은 교회들로 하여금 세상을 향한 예언자적 사역을 완수할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교회의 이런 예언자적 사역은 하나님나라 도래에 반드시 필요한 역할이며 요한계시록은 바로 교회들을 이런 과업으로 초청한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전체의 목적 안에서 교회들에게 주어진 일곱 메시지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일곱 메시지 안에는 진리에 대한 지배적인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교회들은 진리를 배반하지 말 것을 명령받는다. 교회들에게 주어지는 이런 예언은 교회들의 참 모습을 폭로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는 마치 두 증인이 땅의 거주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려고 그들을 괴롭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둘째, 그리스도가 일곱 교회를 진리로 책망하실 때 그 결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있다. 회개하거나 심판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증거가 세상으로 하여금 진리에 마주서게 하는 양자택일과도 동일하다. 셋째, 교회들의 참 모습을 드러냄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나타난다. 이들 칭호들은 그리스도를 참된 증거를 제시하는 분으로서 특징짓는다. 자신들을 책망하는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자는 회개할 것이며 그의 증거는 구원을 가져오는 것임이 입증된다. 그러나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그 증거 자체는 그들에 대한 정죄와 심판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를 향한 예수의 증거로서의 예언의 역할은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전파하는 교회들의 증거와 전적으로 병행을 이룬다. 재림에 있을 심판은 세상 못지 않게 교회들도 위협한다.(2:16; 3:3; ) 예언은 구원을가져오기 위한 목적으로 그 같은 심판을 경고한다. 이와 미찬가지로 세상을 향한 교회의 증거도 그러하다. 넷째, 교회들 안에 내부적인 문제들은 사탄과 짐승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세상의 모습과 부분적으로 병행한다 니골라당의 말을 듣거나 바벨론을 본받는 교회는 분명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진리를 충성되이 증거할 수 없다. 만일 교회들이 촛대가 되어 일곱 영으로 하여금 그 촛대로 부터 진리의 빛을 세상 안으로 비추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들이 성령의 예언 말씀 안에서 신적인 진리의 권능 앞에 그 실상이 드러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곱 메시지 모두는 격려와 종말론적 약속들로 끝을 맺는다. 무엇이 요구되든 간에 모든 교회는 종말론적 약속을 상속받기 위해 "이길 것"을 요청받는다. 성령의 예언적 사역은 기만과 의혹이 가득한 이 세상 속에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며 동시에 만물이 진리가 빛 가운데 드러나게 될 종말론적 시대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충성되고 용기있게 사는 곳은 그런 종말론적 미래에 대한 환상을 필요로 한다.

 

새 예루살렘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이 살고 있던 세계는 신약의 많은 본문에서와 마찬가지로 도시들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도시들이 흔히 여성으로 상징되던 세계였기 때문에 로마는 큰 음녀(17:1)로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한다. 로마는 또한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던 구약 도시의 이름을 따서 큰 성 바벨론이라고도 불리운다. 바벨론은 또한 로마가 제국 내의 모든 도시들에 끼쳤던 타락의 영향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벨론이 로마의 실제 도시라고 할지라도 요한계시록에서 예루살렘은 실제 도시가 아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두 개의 예루살렘이 존재한다. 하나는 새 창조시에 하늘로부터 내려 올 새 예루살렘이다.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신부요 아내로(19:7; 21:2,9)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21:2), 내 하나님의 성(3:12)으로 표현되면서 바벨론과 대조를 이루는 도시로 나타난다. 그러나 미래의 새 예루살렘뿐 아니라 거룩한 성(11:2)과 천상적 여인(12:1-6)도 등장한다. 112절의 거룩한 성(도시)은 지상적 예루살렘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지상적 예루살렘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또한 마흔 두달 동안 짓밟힐 거룩한 성은 주후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암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멸망 당시 성소는 로마군대로 부터 보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와 로마 제국과의 갈등의 기간이었던 삼년 반의 상징적 기간을 통해 일어나는 교회의 박해를 의미한다.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힌 거룩한 도시는 곧 짐승의 손에 의해 고통당하고 순교하는 신실한 교회를 가리킨다. 성소가 보호되고 있는 동일한 기간 동안 거룩한 성은 짓밟히고 증인들은 예언한다(11:1-3) 그리고 메시아를 낳은 천상적 여인은 광야에서 안전하게 보호된다.(12:6, 13-16) 반면에 용은 여인을 핍박하려다 좌절되자 여인의 남은 자손을 공격한다(12:13-17) 교회의 영적인 안전함은 112절에서 성소의 안전함으로 묘사된다. 마찬가지로 천상적 여인의 광야 은신처는 교회의 영적인 안전함을 말해주는 또 다른 상징이다. 어린양의 신부 곧 미래의 새 예루살렘은 현재적 전조를 가지는 동시에 그 대조적 상대를 갖는다. 그 전조는 거룩한 성 곧 시온이며 대조적 상대는 바벨론 곧 큰 음녀이다. 거룩한 성은 그 거룩함에 있어서 새 예루살렘을 닮았지만 새 예루살렘의 도전받지 않는 영광과는 날카롭게 대조된다. 거룩한 성은 오직 은밀함과 역설적인 모습으로 존재할 뿐이다.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은 그들이 유대인인든 이방인이든 대부분 도시에 속해 있었다. 그들로 하여금 도시적인 삶을 떠날 것을 요구했던 기독교의 모습은 아마도 가장 어렵고 이해하기힘든 요소였을 것이다. 기독교가 이렇게 한 것은 당시의 도시적 삶에 우상숭배와 부도덕이 깊이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바벨론으로부터 나와 그 유혹을 물리치려면 더 강력한 매력을 줄 대안이 필요했는데그 대안은 종말론적인 미래에 속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대안은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었다. 그 도시는 미래에 속해 있지만 요한의 환상을 통해 그 도시는 이미 그 매력을 행사하고 있다. 바벨론의 장엄함과 그 권세는 온 세상을 지배하지만 요한의 독자들의 영적인 도시는 현재 숨겨져 있으며 핍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11:1-2) 그들은 자신들이 살게 될 미래의 도시에 대한 환상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바벨론에 대한 강력한 대안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래서 음녀의 도시 바벨론(17:1-19:10)과 어린양의 신부 새 예루살렘(21:9-22:9)의 환상들은 요한계시록 후반부에서 구조적으로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바벨론의 멸망은 곧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간의 적의가 귀착하게 될 종국이다. 그러나 바벨론의 멸망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바벨론이 멸망하는 것은 새 예루살렘이 그것을 대신하기 위함이다. 요한은 바벨론이 멸망하기 전에그의 독자들에게 바벨론의 거짓된 매력에 벗어나 새 예루살렘의 진정한 매력을 깨닫기를 요구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의 두 환상들은 병행적인 모습과 아울러 대조적인 모습들로 가득 차 있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는 놀랍도록 많은 구약 전통의 요소들을 함께 엮어 그 내용들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직접적 임재 가운데 백성들이 살아가는 한 장소의 이미지를 일관되게 나타내고 있다. 한 장소로서의 새 예루살렘은 낙원인 동시에 거룩한 도시이자 성전이다. 낙원으로서 그것은 이상적 상태의 자연세계이며 거룩한 도시로서 그것은 고대 도시의 이상을 성취하며 성전으로서 그것은 하나님의 직접적 임재의 장소이다. 그러므로 계시록 21 10절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의 처소는 이상적인 장소로서 지상적 예루살렘이 단지 상징으로 그쳤던 모든 것의 실체가 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생명수와 생명나무로 이루어진 낙원을 포함한다. 생명수와 생명나무 이미지가 암시하는 바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며 인간에게 유한한 생명을 허락하셨듯이 종말론적인 생명 역시 새 창조에 의해 허락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린양의 신부가 단장하고 있는 보석들은 새 창조시 하나님이 신부에게 부여하는 영광이다 그것들은 새 창조의 아름다움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또 영화된 인류를 위한 거처로 만들어진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류가 거처할 한 동산을 창설하셨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은 인류에게 한 도시를 주실 것이다. 한 도시로서 새 예루살렘은 자연으로부터 인류 문화와 공동체가 거하게 될 한 장소를 건설하고자 하는 인류의 열망을 성취한다. 참으로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며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그것에 아무런 공헌을 하지 않게 될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새 예루살렘은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완성시킨다. 그 완성이란 인간의 역사와 문화가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말미암아 이룩되는 것이다(참조 21:12, 14, 24, 26) 반면에 새 예루살렘은 바벨론이 보여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으로 왜곡되어진 역사와 문화를 배제한다.(참조 21:8, 27; 22:15) 자연 그대로의 낙원을 포함하고 있는 동시에(22:1-2) 낙원의 보석들로 단장된(21:19) 그 도시는 자연과 인간 문명이 조화됨을 말해준다. 하나의 도시로서 새 예루살렘은 신적인 왕국의 중심지이다. 하늘에 있었던 보좌(4)는 이제 새 예루살렘에 있다(22:1,3) 그 도시는 세상의 빛이며 그 빛 가운데로 만국이 다닌다.(21:24, 참조 이사야60:3) 동시에 만국과 그 왕들이 순례를 위해 선물을 들고 찾아오는 중심지이다.(21:24-26)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는 구약의 모델들을 근접하게 따르지만 가장 참신한 특징은 성전이 없다는 점이다.(21:22) 에스겔은 새 예루살렘을 "여호와 샴마"라 칭하였고(48:35), 스가랴는 도시 전체가 성전과 같이 성결하다고 선언했으며(스가랴 14:20-21) 이사야는 부정한 자를 새 예루살렘에서 배제(이사야 52:1)한 반면에 요한은 성전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였다. 요한이야말로 성전을 제거한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그 도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장소인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도시 전체가 하나님의 직접적 임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 도시 전체가 하나의 성전이 된다. 이에 대한 놀랄만한 증거는 그 도시가 완전한 정육면체 모양을 하고 있다는 묘사이다.(21:16) 이것은 그 도시 전체가 성전의 지성소를 닮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의 주제가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 개념에서 얼마나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가를 보여준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므로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계시는 것이며 그 결과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시는 곳이다.(21:3) 이 구절은 하나님이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에스겔 37:27-28) 또한 많은 나라들도 역시 그의 백성이 되어 그들과 함께 하나님이 시온에 거하실 것이라는 (스가랴 2:101-11; 이사야 19:25; 아모스 9:12_) 구약의 예언들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이제 언약 백성이 만국의 빛으로서 그들의 역할을 성취하였으므로 모든 만국은 언약 백성의 특권들과 약속들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역사는 새 예루살렘에서 성취하게 된다. 열두 사도의 이름들은 그 기초석 위에 새겨지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은 새 예루살렘의 문들 위에 새겨져 있다. 그 도시의 구조들과 치수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숫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새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제사장들로서(22:3-40 하나님을 그분의 직접적인 임재 가운데 경배하며, 왕으로서 그들은 그분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22:5) 다른 한편, 만국은 그 도시의 빛 가운데로 다니고 사람들은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며 땅의 왕들은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간다.(21:24-26) 바벨론과 짐승에 영합하여 하나님의 왕국을 반대하던 땅의 왕들은 종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게 된다. 만국과 왕들이 새 예루살렘에 대해 갖는 관계를 언급하는 이런 언급들은 새 예루살렘이 열방을 다스리는 이사야의 환상에 기초한다.(이사야 60:3,5,11) 요한은 22 2절에서 생명나무를 언급하는데 이것은 에스겔 47장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에스겔에서는 나무들이 매달 열매를 맺는데 요한은 나무들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 것으로 변형시켜 말한다. 또한 에스겔에서는 그 나무 열매가 약 재료로 쓰인다고 말하는데 요한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설명하면서 언약백성을 암시하는 열 둘이라는 숫자와 만국에 관한 언급을 결합시킴으로써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만들고 있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에서 배타주의적인 주장이 있다. 첫째로 새 예루살렘은 만국으로부터 속량된 언약백성만을 의미한다는 주장이다.(5:9-10) 그러나 이런 주장은 21 3절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한 결과이다. 21 3절은 교회의 증거는 만국의 회심을 가져오기 위한 목적이라는 요한계시록 전체 이야기가 지니는 총괄적 의미를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둘째로 언약백성은 새 예루살렘을 상속받는 자들인 반면에 만국과 그 왕들은 새 예루살렘 밖에 거하면서 다만 그것을 방문할 뿐이라는 주장이다.(21:24) 이 견해는 언약백성은 특별한 특권을 소유하지만 만국은 단지 종말론적 축복들을 공유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 역시 21 3절이 암시하는 바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21 3절은 만국이 언약 백성이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만일 만국과 땅의 왕들이 성문을 통해 그 도시에 들어간다면(21:24-26) 순교자들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22:14) 성문 이미지는 부분적인 배제가 아닌 만국이 언약의 축복에 완전히 속하게 됨을 보여준다. 21 3절은 하나님의 친 백성의 종국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과 만국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우주적 소망을 연결시켜 놓는다. 언약백성의 역사, 즉 하나의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모든 만국으로부터 속량된 교회의 역사는 모든 만국이 언약적 특권들과 약속들 안에 완전히 포함될 때에야 비로서 그 종말론적 성취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 환상이 지니는 이러한 보편주의는 이미 명백하게 밝혀진 만국의 회심에 대한 경향성을(1:13; 14:14-16; 15:4) 완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어떠한 장소도 갖지 못한다.(21:8, 27); 22:15) 이 구절은 심지어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충성된 증인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바벨론의 죄악에 참여한다면 그들도 새 예루살렘을 상속받지 못할 뿐 아니라 바벨론에 내려지는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참조18:4)

 

 

요한계시록의 하나님 중심성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에서 다시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그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의 장소가 될 때 그 종말론적인 성취에 이르게 된다. 마침내 이것은 새 창조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새로워진 것이다. 그것은 옛 창조세계이지만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찬 창조 세계이다. 21장 이전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임재를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이" 로 묘사하며 하늘에 제한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세상에 현재적으로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임재는 오직 은밀함과 모순 속에서의 역설적인 임재임을 의미한다. 그분은 성소 안의 예배자들 가운데 임재하여 계신다. 이 성소는 핍박받는 교회의 숨겨진 내적 실체이다.(11:1-2; 참조 13:6) 그분은 죽임 당한 어린양으로서 임재하여 계시며 그분은 어린양을 죽기까지 따르는 자들의 충성된 증거 가운데 계시는 성령으로서 임재하신다. 그러나 짐승이 세상과 인류를 다스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거부하는 동안에 그분의 분명한 임재와 영광은 오직 하늘에서만 나타난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이 하늘에 나타날 때 그것이 땅에 미치는 결과는 악에 대한 파괴적 심판이다.(15:7-8) 마침내 모든 악이 분쇄되고 그분의 왕국이 도래할 때, 비로서 하나님의 보좌가 땅위에 있게 될 것이다.(22:3) 그리고 나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하나님은 자신의 거처를 땅위의 사람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21:3)

 

 

새 예루살렘 전체가 하나의 지성소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로 가득차 있다. 성전을 대신해서 그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무한한 임재를 지닌다. 하나님의 이러한 종말론적 임재에는 거룩함과 영광이 뒤 따른다. 그분의 종말론적 임재로서 새 예루살렘은 또한 새 창조에서 새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새 창조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으로 창조의 아름다움을 성취한다. 만국의 왕들은 그들 자신들의 영광 즉 인간 문명의 온갖 좋은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 앞에 드림으로써 더욱 그것들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분은 만유안의 만유가 되시되(고전15:28) 창조를 없이함으로 그렇게 되시는 것이 아니라 만유안에 그분이 직접 임재하심으로 그렇게 되실 것이다. 세세토록 사시는 이(4:9-10; 10:6; 15:7)로서의 하나님의 임재는 영원한 생명 즉 생명을 부정하고 위협하는 모든 것이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있는 생명을 의미한다. 그것은 생명의 영원한 근원이신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영원한 생명이 된다. 모든 슬픔과 고통, 죽음은 영원히 폐기되며 하나님은 친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실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이보다 더 생생하게 묘사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주변을 묘사하는 마지막 장면은 4-5장에서 나타난 신적인 보좌를 연상하게 하지만 우리는 한가지 대조적인 모습에 주목하게 된다. 4-5장에서는 생물들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중심 그룹을 형성하고 이십사 장로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보좌들의 중심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반면에, 22장에서는 땅위에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직접 나아갈 수 있다.(22:4)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장들이며 하나님과 함께 통치하는 왕들이다. 종말론적인 왕국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 이미지와 관련해 가장 주목할 사실은 "보좌에 앉아 계신 이"와 그가 통치하는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간격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분의 왕국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분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에서 그 성취를 발견하지 않는다.(22:3) 오히려 그의 종들이 그분과 함께 다스림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은 성취된다(22:5)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는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인간의 완전한 자유라는 역설 가운데서 표현된다.(참조 벧전 2:16) 하나님의 뜻은 우리 존재가 그분의 피조물로서 지니는 도덕적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로운 복종을 통해 그분의 뜻이 우리 마음에 자발적 소망이 될 때에야 비로서 그 성취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됨으로 인해 신정정치(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의 자치(인간 스스로의 결정)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은 기독교 정경 중에서 독특한 위치를 가지는데 그것은 요한계시록이 정경 중에서 유일하게 기독교 예언으로 구성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은 그 자체를 성경적 예언의 전승 가운데 절정을 이루고 있는 기독교 예언의 작품으로서 매우 광범위하고 의도적으로 구약 예언과의 긴밀한 연속성을 갖는다. 요한이 구약 예언에 깊이 몰입되어 있는 것은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종말적 목적이 이미 성취되기 시작한 시대를 그가 새롭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구약의 종말적 대망들을 모아서 그것들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새로운 환상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요한은 지상에 도래할 우주적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에서 구약 예언의 통일성을 발견한다. 그는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그 소망이 성취되기 시작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이스라엘로 부터 만국으로부터 형성된 한 백성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의 빛 아래서 구약을 읽고 있다. 그는 예수와 그의 교회의 관점에서 구약을  읽고 있으며 또한 구약 예언을 방편으로 예수와 그의 교회를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요한은 구약의 예언을 따라 하나님의 우주적 나라가 반드시 오리라는 기대를 가지며 동시에 그 나라는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오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그러나 요한 자신도 새로운 예언자로서 새로운 계시를 전달하는데 그것은 교회가 예수가 걸었던 동일한 길을 뒤따름으로서 악을 이기신 예수의 승리에 동참하도록 요청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길이란 죽기까지 진리를 충성되이 증거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를 반대하는 세상 권세들에 대항하는 투쟁인 것이다. 이런 방법을 통하여 진리는 마침내 악의 통치 수단인 거짓을 이기게 될 것이며 이러한 방법으로 만국은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방식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을 성취하시는 분임이 드러날 것이며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의 모든 예언적 전승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하나님의 우주적 나라가 땅위에 도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적인 목적을 드러내는 요한의 예언적 계시는 그가 주장하는대로 예수가 하나님께 받아서 요한에게 계시해 주신 것이며 이 계시를 중심으로 요한은 구약의 모든 예언적 전승들로부터 다양한 이미지들과 대망들을 종합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빛 아래서 해석하고 또 구약을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해석하는 이러한 과정은 요한의 예언적 계시와 관련하여 한 정점에 이르게 되었다. 종말론적 미래를 지향함에 있어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어느 책 보다 독보적으로 광범위한 성경적 전승을 종합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사건이 성경 역사의 절정이며 나아가 그것은 우주적인 하나님나라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런 미래를 바라보고 살 수 있도록 해준다.

 

 

여러 세기에 걸친 다양한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꾸준히 요한계시록을 정경으로 사용해 왔다는 사실은 요한계시록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분의 백성에게 전달해 주는 진정한 예언으로 인정되었음을 입증해 준다. 요한계시록은 순교자들과 환상가들의 책으로서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여 진리증거의 책임을 저버리게 되었을 때 종종 교회를 구해내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교회 자신의 비판에 있어서 그리고 사회와 국가애 대한 예언자적 비판에 있어서 끊임없이 그 근거 자료가 되어 왔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구약과 가지고 있는 긴밀한 연속성으로 인해 비판을 받아왔다. 루돌프 불트만은 요한계시록을 "희미하게 기독교화된 유대주의" 문서라고 비판했다. 그의 말은 요한계시록의 유대적 뿌리들을 부인하려는 19세기 경향을 드러내는데 당시의 이런 경향은 유대주의가 아닌 것만이 진정한 기독교이교 기독교는 유대주의를 부정함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매우 이상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드러낼 뿐 아니라 구약과의 매우 강한 연속성을 주장해온 기독교 전통을 부인하는 잘못이었다. 요한계시록 뿐만 아니라 신약의 모든 문헌들은 주후1세기 유대교의 한 형태로서 묘사되는 운동의 산물이다. 그것이 다른 유대교 전통과 구분되는 것은 그것이 유대교의 종교적 전통을 부인해서가 아니라 그 종교적 전통이 간직해 왔던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이 메시아 예수에 의해 성취되고 있음을 주장했다는 점에서다. 주후 1세기에 구약과의 연속성을 부인하려고 했던 것은 오직 기독교 영지주의뿐 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 두었던 믿음과 소망 그리고 구약 전통이 하나님께 두었던 믿음과 소망, 이 양자 사이의 연속성을 폭넓게 발전시키는데 있어 요한계시록은 모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던 바를 주목할 만한 방법으로 확언하고 있다. 특별히 만국의 회심에 있어 요한계시록의 소망이 보여주는 우주적인 성격은 신약의 그 어느 책보다도 독보적이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하나님나라의 우주적인 성격은 구약의 예언적 전통이 가진 우주적인 소망에 확고하게 기초하고 있다. 기독교는 유대 종교 전통과의 연속성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시킴으로서 우주적인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이 스스로를 예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곧 요한계시록이 성경 전체의 예언적 전승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는 구약 성경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첫째로 현재의 상황과 관련한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을 예언적 통찰로서 인식해 내는 식별의 요소가 있다. 둘째로 예고의 요소가 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보고 있는 환상에서 현재의 일뿐 아니라 이후에 장차 될 일도 바라보고 있다. 본질적으로 예고란 예언자가 현재의 상황을 인식함에 있어서 우주적 나라의 도래에 관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이 현재의 상황과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셋째로 예언으로서 요한계시록은 그것을 들은 자들이 현재 세상의 참 모습을 인식하고 난 후에 적절한 반응을 보일 것을 요구한다. 바로 이 세번째 요소로 인해 예언의 예고적 요소는 결정론적 성격을 갖지 않는다. 이 세번째 요소가 인간의 자유에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는데 있어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참여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 자유롭게 만든다. 하나님나라는 반드시 도래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도래할 것인지 이미 예고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도래 방식은 인간의 반응여부에 달려있다. 또한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자신의 목적 안에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자유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요한의 예언은 만국에 증거하는 교회의 소명이 가져오게 될 결과를 미리 결정짓지 않는다. 오직 절대적인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도래한다는 것과 그분께서 자신의 창조세계를 종말론적으로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만국이 회심하여 참 하나님께 경배하게 될 것에 대한 소망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를 끝내 거부할 경우 세상에 임할 심판의 경고가 나란히 나타난다.

 

 

요한계시록은 역사를 미리 쓰듯 일련의 사건을 예고하고 있지 않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그런 식의 몰이해는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을 진지하고 주의깊게 검토할 수 없게 만든다. 요한계시록 당시의 현재와 재림 곧 하나님나라의 최종적 도래 사이에 일어나게 될 것으로 명확하게 예고되고 있는 것은 교회와 짐승간에 있게 될 투쟁의 기간이다. 이 투쟁의 기간을 통해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이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참여하게 되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경륜이 실행될 것이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예고라기 보다는 충성된 증거와 인내로 싸움에서 승리하라는 요구이다. 요한이 사용하는 이미지들은 일련의 사건에 대한 예고가 아니라 교회로 하여금 그들이 참여하는 싸움의 의미와 승리의 성격을 통찰하도록 천상적인 전망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교회가 그러한 천상적 전망을 필요로 하는 것은 희생적인 증거를 수행함에 있어서 끝가지 인내하기 위함이다.  분명한 것은 로마 제국의 회심은 종말론적 왕국의 도래가 아니었다. 역사는 진리와 거짓이 투쟁하는 현장으로서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안에서 하나님나라는 오직 은밀함과 역설적인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결코 폐해지거나 중단되지 않고 지속된다. 교회와 로마제국과의 투쟁은 우주적인 하나님나라가 지상에 성취되는데 재림을 눈 앞에 둔 마지막 단계도 아니었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성경의 예언은 항상 선지자 당대의 동시대 인물들과, 곧 닥칠 가까운 미래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성경의 예언은 동시대를 초월하여 다음 세대로 하여금 그들의 미래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을 바라보는 소망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예언을 역사화시킴으로 전자를 강조한 나머지 후자를 배제해서는 안된다. 대부분의 성경 예언들이 지금까지 정경으로 취급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의 원래 문맥에서 언급들이 당시의 직접적 성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근본주의자들은 성경 예언속에서 미래에 일어날 구체적 사건에 대한 암호화된 예고들을 찾음으로써 원래 문맥을 소홀히 하고 예언의 영속적 타당성을 왜곡시킨다.

 

성경의 예언은 당대뿐 만 아니라 후세대의 독자들에게도 영속성인 타당성을 지닌다. 성경의 예언 전승에서 하나님이 역사 안에 두신 목적들은 변함이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구원과 심판을 위해 과거에 행하신 그분의 위대한 행동들은 미래에 행하실 그 무엇에 대한 본보기로서 이해될 수 있었다. 출애굽의 이미지가 종말론적 구원과 심판 사건을 묘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이미 성취된 예언들이 또 다른 새로운 상황들에 관련하여 재해석되고 재적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요한은 바벨론의 운명과 두로의 운명에 대한 구약 예언을 반복하여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자신의 예언을 형성했다. 이러한 원리는 예언자의 신탁들이 그 본래적인 언급을 초월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교회 역사를 통틀어 정치적 경제적 압제를 가하는 후대 조직체들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을 영감시키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예언자적 약속은 종종 성취를 능가한다. 바벨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의 회복은 포로기 당시 예언자들이 예견했던 것과 그대로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예언이 옳았음이 입증되었지만 다른 점에서는 그들의 예언들은 더 위대한 구원 사건을 소망하도록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었다. 역사적 성취를 넘어서는 약속의 이러한 잉여치 안에 묵시적 종말론의 뿌리가 존재한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요한의 환상은 포로기 선지자들의 환상으로부터 발전했지만 그들이 예언했던 예루살렘과 성전의 실제적인 재건은 실현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 대부분의 성경 예언 전승은 종말론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성경이 기록된 동시대적 상황은 하나님나라가 도래함에 있어서 역사의 궁극적 결말과의 직접적인 관계로 유입된다. 후기 예언자들과 묵시적 전승에서 이런 종말론적 경향은 더욱 명확하고 뚜렸해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전체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의 관점에서 당면한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있어 나타나는 성경적 예언 전승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한 예언이 거짓된 것으로 여겨져 거절되지 않고 오히려 유대적이거나 기독교적인 소망을 가진 전승으로 받아들여지고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예언이 지닌 종말론적 경향이 예언적 전승에서 아무 문제가 없는 요소임을 보여준다. 역사의 모호성 안에서 그 예언들이 갖게 된 잠정적인 성취들은 종말론적 나라 자체의 도래에 대한 소망을 확증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의 예언 전승의 절정으로서의 요한계시록은 그 본래의 문맥이 의도했던 바를 독특하게 초월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예언중 매우 분명하게 그 원래의 문맥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영속적인 소망들을 지니도록 영감시켯던 요소들을 다시 모아 펼쳐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요한계시록은 원래의 독자들에게 한정된 문맥과 그 문맥을 초월하는 일종의 종말론적 과장을 결합시키고 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교회와 짐승 사이의 임박한 갈등을 묘사하면서 역사적이고 사실주의적 용어가 아닌 종말론적이고 우주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가까운 미래에 하나님의 우주적인 나라가 도래할 것에 대한 환상을 첨가하고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 과장은 교회와 짐승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에서 무엇이 핵심적인 문제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장은 당시의 투쟁의 핵심이 곧 교회 역사에서 항상 핵심적인 것이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 과장은 이들 상징들로 하여금 재림에까지 영향을 미치도록 본질적인 힘을 부여해 준다. 더욱이 이런 이미지들이 이런 힘을 갖는 것은 과장된 표현 때문만은 아니다. 요한이 사용하는 이미지들은 요한 당대의 영향을 미치는 세력들의 본질적 특성과 그 궁극적인 핵심적 이슈들을 놀라울 정도로 꿰뚫어 볼 수 있도록 의도된 것이다. 그래서 그 이미지들은 요한 당시의 세계의 단순히 부수적인 역사적 특징들을 상당 부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그 예고적인 요소에 있어서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질 성취를 바라보았고 또한 그 본래의 문맥을 초월하여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지속적으로 영감시키고 일깨움으로서 예언의 영속적 타당성을 획득하고 있다. 요한의 예언은 이러한 역사적 성취와 종말론적 잉여치를 모두 가지고 있음으로써 성경의 예언 전승에 충실하다.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는(1:1,3 ; 22:7, 10, 12, 20) 요한계시록이 대부분의 신약 문서들과 공유하고 있는 기대이다. 많은 사람들은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적 기대 자체가 이러한 시간적인 의미로 느껴지는 임박성으로 말미암아 그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고 생각해 왔고 그런 결론은 다수의 신약 본문을 문제있는 것으로 만든다. 요한계시록은 신약본문 중 가장 많이 임박한 종말론적 기대로 가득하다. 그러나 종말의 지연 역시 그 임박 만큼이나 요한계시록의 특징이다. (6:10-11)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은 임박과 연기 사이의 긴장을 의식하게 된다. 그것은 종말이 지속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나 아직 확정적으로 도착하지는 않았음을 의식하게 만드는 긴장이다. 요한은 여기서 묵시적 전통 전체에 흐르고 있는 종말론적 임박과 종말론적 지연 사이의 긴장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임박의 논리는 악이 승리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 하나님의 목적에 모순되는 모습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데 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면 하나님은 곧 모든 잘못을 바로잡으셔야 한다. 그러나 지연의 논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은혜로우심에 기초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와 시간을 허락하신다. 고난을 감내하는 교회의 증거 역할에 대한 요한의 핵심적인 계시는 이러한 지연의 논리를 더욱 분명히 한다. 묵시적 전통에서 하나님나라를 수립하기 위해 하나님의 개입을 요구하는 의인들이 받는 고난은 실제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다. 이 고난의 기간을 상징하는 삼년 반의 기간은 그 시험의 때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기간은 끝을 가지고 있으며 그 나라는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연대기적인 계산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그래서 그 나라의 조속한 도래를 위해 기도하는 동시에 만국의 회심을 소망하는 교회는 임박과 지연의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러한 긴장은 단순히 연대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재림의 지연이 왜 초대교회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는가를 설명해준다.

 

 

요한계시록에서 임박한 종말의 기대가 가져오는 실제적으로 중요한 효과는 이러한 임박한 기대가 요한으로 하여금 역사의 궁극적 결말에 관한 자신의 예언적 환상을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와 긴밀하게 연결시킬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하나남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재적으로 요청되는 역할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주적인 나라를 세우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현재의 삶을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에 직면하게 하는 이러한 예언자적 행동에는 역사의 끝이 역사 전체와 독특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암묵적인 인식이 존재한다. 역사의 종말은 단지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마지막 시간이 아니라 모든 역사의 의미와 진실이 밝혀지는 결정적 국면이며 모든 역사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신적인 판결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지녔던 임박한 종말의 기대는 역사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서 살아가는 삶의 한 방식이었다. 그것은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나라 도래와의 관계 속에서 바라본다.

 

요한계시록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하여 혁신적인 반응을 촉구하는데 그런 반응은 사람들의 지적인 신념만큼 깊이있고 영향력이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어느 한 지배적인 문화가 그 이미지들과 이상들로써 우리 앞에 세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그런 지배적인 문화의 관점에 기초하여 세계를 인식하거나 반응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 더욱이 요한계시록은 그 지배적인 문화가 형성해 놓은 구조가 실상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임을 폭로한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세계를 인식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공함으로써 이것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미치는 영향에 저항하고 도전하도록 만든다. 요한계시록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초월적인 것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이 세상에서 권력이나 구조들 혹은 이상들을 절대화하는 그 어떤 것에도 저항한다. 이것은 교회로 하여금 항상 기성 세계의 가치관을 부인하도록 요청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에 압도적인 관심을 지니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모든 의미있는 진리들을 단지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통속적인 포스트모던적 방식을 반대한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세상을 향한 교회의 증거가 오직 진리에 대한 증거일 때에만 진정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서구사회에서 진리증거가 직면하게 되는 억압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진리의 존재 가능성을 부인하는 절망적 상대주의, 그리고 진리의 적합성을 경시하는 소비자 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다. 진리를 지향하고 주창하는 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이 세상에 대한 환상은 강력하게 하나님 중심적이다. 요한계시록은 이 하나님 중심적인 환상이 압제와 불의 그리고 비인도적 행위에 맞서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세상의 것을 절대화함으로써 맹목적인 우상숭배로 빠져드는 인간의 성향을 효과있게 저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초월성에 관한 순화된 환상뿐이다. 참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힘(짐승)이나 경제적인 번영(바벨론)의 신격화에 저항하는 진정한 힘이다.

 

 

요한계시록은 초월적인 하나님(하늘) 뿐 아니라 대체적인 미래(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를 언급함으로서 세상의 압도적인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 요한계시록은 이 세계가 신적인 초월성에 대해 열려있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바로 이 가능성이 불의와 압제를 간파하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그 불의와 압제를 떠받치는 강력한 구조들을 상대화시킬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위로부터의 전망(천상에서의 신적 초월성) 그리고 종말론적 미래로부터의 전망과 아울러 아래로부터의 전망 즉 역사의 희생자들 편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힘 있는 자들의 우상숭배에 대항하여 하나님과 그의 나라 편에 섬으로써 귀결되는 결과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저항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분리주의적 영역으로 물러나도록 부추키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에만 내어 맡기고 천년 나라의 꿈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묵시적 사고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은 전 세계에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것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러한 하나님나라 도래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청한다. 요한계시록은 모든 나라가 회심하여 참 하나님을 경배할 것에 대한 성경의 우주적인 예언자 전통을 발전시키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의 예언적 증거를 로마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우상숭배에 대항하여 참 하나님과 그의 의로우심 편에 서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참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예배는 삶의 모든 국면에서 정의와 진리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성경의 예언적 전승이 지닌 신념에 충실하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 중심적 환상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예배는 사회 전체의 영역에서 물러난 경건주의적 칩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나라를 위한 증거는 사회 전체와 정치적인 영역에서 요구된다.

 

 

요한계시록이 미래의 종말론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우주적인 하나님나라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승리가 이미 확득되었다는 사실은 요한계시록 신학의 토대를 이루고 있으며 그것의 즉각적인 결과는 만국으로부터 하나님의 한 백성의 형성을 통한 하나님나라의 실현이다.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미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최종목표가 아니라는 인식으로 말미암아 요한계시록의 강조점은 미래의 종말론을 향해 놓여지게 된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자들이 하나님과 그의 의로우심을 경시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충분히 도래하지 않았다. 교회는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인 나라의 도래에 참여하기 위해 존재한다. 메시아가 이미 획득한 승리는 결정적인 종말론적 사건이지만 그것은 모든 악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국이 메시아의 나라 안으로 모일 때에야 비로서 그 최종 목적지에 다다르게 된다. 사실 이것은 기독교적 구원 사건에 대한 유대 묵시적 전망으로서 실현된 종말론의 불균형을 잡아주는 매우 긴요한 평형추이다. 실현된 종말론은 하나님의 나라를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한 나머지 이 세상이 완전히 구원받지 않았음을 간과하지만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미래적 종말론은 교회로 하여금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미래를 지향하도록 만든다.

 

 

요한계시록은 세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교회들에 대해서도 예언적 비판을 가한다. 요한계시록은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진리를 배반하고 우상숭배와 타협함으로써 스스로를 왜곡할 위험성이 자리잡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그토록 예배와 진리에 대해 하나님 중심성을 강조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하나님이 참으로 누구신가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를 통해 알려진다. 세상의 우상숭배에 대항하여 진리를 충성되이 증거하기 위해서는 교회는 끊임없이 진리에 대한 바른 인식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 곧 죽임당한 어린양과 보좌를 함께 하고 계신 주권자 창조주에 대한 환상을 통해 가능해진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목적,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참여는 증거의 문제로 묘사된다. 그 증거는 증거자가 목숨을 내놓을 때 비로서 그 진가가 입증된다. 요한계시록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증거 개념을 포함해서, 세상에 대한 묵시적 인식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다르게 변형시켰다. 물론 다른 상황들 가운데 세상에서 하나님나라를 섬기는 다른 가능성들은 요한계시록이 지닌 증거의 개념을 자연스럽게 확장시킴으로서 얼마든지 열려있다. 그런 가능성에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를 삶 속에서 실현시키는 것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도래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참여가 세상적 힘이나 영향력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요한계시록의 주장은 여전히 중요하다. 기독교의 증거의 본질적인 형태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이며 이것은 다른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다. 합법적인 힘과 영향력이 분명 경시되어서는 안되지만 거짓을 이기는 진리의 힘은 비폭력적 증거로 말미암아 그 진가를 발휘한다.

 

 

요한계시록의 우주적 전망에서 창조와 구속 그리고 종말론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피조세계를 갱신하시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그 분은 피조세계에 대한 신실함으로 그렇게 하신다. 그분은 창조주이시기에 그분이 이루실 새 창조의 범위는 창조의 범위만큼이나 우주적이다.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여 악과 허무로부터 건져내고 자신의 영원한 임재 가운데 가져다 놓을 수 있는 것도 그분이 창조주이시기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신약 신학에 대한 중요한 공헌 중 하나는 그리스도 안의 구원이라는 신약의 중심 주제를 피조 세계 전체를 향한 창조주의 목적이라는 전망 안으로 위치시켰다는 점이다. 요한계시록이 강조하는 하나님 중심성은 요한계시록의 환상들이 모두 하나님에 대한 이해로 부터 생겨났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이런 이해는 진지한 신학적 숙고에 의해 형성된 정교한 결과이다. 요한계시록은 신약 문서 중에서 가장 발전된 심위일체 신학을 가지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헬라의 철학적 범주들로 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삼위일체론의 발전된 형태를 보여주는 가장 가치있는 책이다.

 

 

요한계시록은 악의 권세들이 통치권을 쥐고 있는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보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죽임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그리고 교회의 증거를 영감시키는 일곱 영의 모습으로 현재의 세상에 임재하여 계심을 인식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을 보좌 위에, 그리고 일곱 영을 보좌 위에 위치시킴으로써 하나님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함에 있어서 희생적인 사랑과 진리 증거가 우선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와 동시에 요한계시록은 창조세계가 신적 초월성에로 열려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반드시 하나님나라가 창조 세계에 도래할 것을 보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짐승의 강압적인 폭정과는 달리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함으로써 신적 통치가 완성된다. 즉 신정 제도와 인간의 자율성의 조화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는 것이다. 결국 신적인 초월성은 창조 세계의 종말론적 종착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안에 ,즉 그분의 임재 안에 있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하게 만든다. 요한계시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독보적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