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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오리진(0rigin) - 데보라, 로렌 하스마

오리진(0rigin) - 데보라, 로렌 하스마

2017-01-25 17:55:22


서론

 

1. 그리스도인들은 누가 우주를 창조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동일하지만, 그 하나님이 어떻게 우주를 창조하셨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comment)

어떻게 라는 질문에 대해 다양한 생각이 나타나는 이유는 아마도 성경 자체가 "어떻게" 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의 창조기사의 주관점은 어떻게가 아니라 누가, 그리고 왜 우주를 창조하였가라는 문제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주를 창조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독선적인 성경해석을 가지고 과학적 연구결과들을 반대하기 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과학적 연구결과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혹자는 이렇게 반론을 펼칠지 모른다.  누가? 왜? 창조했는가? 이것이 성경 창조기사의 의도라면 어떻게? 의 문제는 다양하게 열어놓고 서로 다른 주장과 의견들이 공존할 수 있지 않은가? 어차피 과학적 발견들도 일시적인 것이고 하나의 과정적 지식이므로 그것을 수용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나 "어떻게"라는 문제는 그저 다양성을 인정하면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연구결과들을 부인하게 될 때 기독교의 신은 종교의 영역에 제한되어 버리고, 궁극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을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분으로 고백하는 기독교의 신관을 무너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2. 무신론자들이 과학적 발견들을 자신들의 무신론적 세계관의 증거로 주장하는 것이나,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적 연구결과들을 아예 무시하는 것은 모두 극단적인 견해들이다. 

 

(comment)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이며 세계관은 증명될 수 없는 신념체계이다. 따라서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과학적 연구결과들이 그런 세계관을 증명할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과학적 발견들을 신이 없다는 증거로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실 자신의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과학적 발견들을 해석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일 뿐이다. 이것은 유신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신의 비존재가 증명될 수 없는 것처럼 신의 존재도 증명될 수 없다. 따라서 과학적 발견들을 무신론적 증거로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의 도전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반대하느라 과학적 발견 자체를 부인한다면 기독교는 반지성적 프레임에 갇히게 되고 과학 영역을 무신론자들에게 내어주게 될 뿐 아니라, 심각한 것은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신을 믿는 기독교적 신관 자체에 훼손을 가져오게 된다.

 

 

1장 하나님의 말씀(성경)과 하나님의 세계(자연)

 

1. 종교와 과학 간의 갈등을 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두 영역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일 것이다. 무신론자들이나 불가지론자들은 도덕이나 인간의 가치에 대한 질문은 종교에 묻고, 자연세계에 대한 질문은 과학에 물으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질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는 과학적 발견들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과학적 발견들이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질문들에 대한 우리의 신념과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삶의 모든 영역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에 종교와 과학은 간단히 분리시킬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와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연구는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두 영역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같은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이다.

 

(comment)

사실 기독교에서 가장 심각하고 뿌리깊은 문제는 이원론적 관점이다. 종교와 인간 삶의 모든 영역들을 분리하는 이런 관점은 교회사에서도 아주 초기부터 등장했다. 성경은 물론이고 교회 역사에서 이런 입장은 비판받아 왔지만 오늘날 기독교에서 이런 관점은 사실 지배적인 관점이 되었다. 기독교는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신이기 때문에 이런 이원론적 입장은 기독교적 신관 자체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당연히 일원론적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문제는 일원론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데 있다. 오늘날 창조과학의 반지성적, 반과학적 태도가 비판받고 있지만 성경과 과학을 통합적으로 조화시키려는 그들의 일원론적 입장 자체는 정당한 것이다. 

 

2. 성경 해석은 자연 해석에 영향을 미치고 반대로 자연 해석은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 전자의 경우에 발생하는 문제는 성경이 가르치려고 의도하지 않는 내용을 가지고 자연을 해석하려는 태도다. 물론 자연세계를더 적절하게 해석하는데 성경이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성경은 과학만으로 알 수 없는 자연 세계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후자의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은 과학을 기준으로 성경을 읽느라 과학과 상충되는 것 같은 성경 구절이 무시되거나, 특정 부분의 성경 해석이 성경의 다른 부분의 명확한 내용과 충돌되는 경우다. 물론 과학이 성경 해석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는데, 자연을 연구하여 알게 된 지식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그런 경우다. 특정 성경 구절이 내용이 모호하거나 여려가지로 해석이 가능할 때도 과학적 지식이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세계, 이 두영역을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어느 한 쪽을 더 중시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일부를 무시하는 처사다.

 

(comment)

기독교적 세계관은 성경 해석과 자연해석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된다는 신념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인들이 믿는,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성경과 자연이라는 두 계시의 원천을 사용하여 자신과 자신의 뜻을 계시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해석과 충돌하는 성경해석을 반대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성경해석과 충돌하는 자연해석을 반대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과학적 발견을 가지고 자연을 해석한다. 이 해석과정에서 해석자의 세계관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적 해석과 형이상학적 해석을 잘 구분할 필요가 있다. 객관적인 과학적 발견들은 인정하고 그 발견에 근거한 타당한 과학적 해석은 수용해야 하지만 과학적 발견들을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의 증거로 사용하려는 이데올로기적 해석은 반대해야 한다.

 

 

2장 세계관과 과학

 

1. 현대 과학자들이 가진 주류의 세계관은 상대주의와 불가지론이다. 간혹 환원주의적 무신론을 가진 과학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자연세계만이 실재할 뿐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종교는 미신에 불과하고 논리나 실험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과학자들이 서로 큰 갈등없이 공동연구를 진행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들이 개인적 세계관을 포기하지 않고도 과학 연구에 필요한 세계관적 신념들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성경은 하나님이 규칙적인 법칙을 따라 자연을 다스리신다고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자연세계의 작동원리가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다고 해서 불필요해지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과학이 아직 설명해 내지 못하는 자연현상들을 근거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는 틈새의 신 전략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과학적 설명의 가능여부와 관계없이 하나님이 모든 자연세계를 다스리신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은 관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연현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 즉 기적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또한 무작위적으로 일어나는 자연현상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부인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과학에서 무작위(또는 우연)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원인과 목적이 없다는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적 관점에서 무작위적으로 보이는 현상들이 하나님이 자연을 다스리신다는 성경적 믿음과 충돌하지 않는다. 

 

 

3장 과학은 하나님의 세계(자연)를 연구하는 과정이다.

 

1. 과학은 단순히 지식의 총체가 아니라 지식을 쌓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지식을 얻는데 사용되는 방법에는 실험과학, 관찰과학, 그리고 역사과학이 있다. 이 세가지 연구방법에는 모두 모델(혹은 가설, 이론)을 정립하는 과정이 포함되는데, 모델이란 자연세계의 물리적 인과 관계 반응들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해석 틀이다. 과학자는 이 모델을 사용하여 과거에 행한 실험과 관찰 결과들을 설명하고 앞으로 행할 실험과 관찰 결과들을 예측한다. 

 

2. 실험과학은 실험실에서 이뤄지는 종합대조실험을 통한 연구방법으로서 물리학, 화학, 분자 생물학 분야에서 사용되는 기장 기초적인 연구방법이다. 실험과학은 실험실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접근성이 뛰어나고 변수통제나 실험 반복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연구대상이 되는 체계가 실험실에서 실험하기에 부적합한 경우에는 관찰을 통해 연구한다. 일반적으로 관찰과학의 대상들은 실험과학의 대상들에 비해 접근성이나 반복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관찰과학은 기상학, 생태학, 의학 천문학, 지리학 분야에서 주로 사용되는 방법이다. 과학 연구의 세번째 방법인 역사과학은 직접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한 과거의 사건의 경우에 시스템에 남아있는 지난 행적에 대한 모델을 정립하는 방법이다. 역사과학은 숲이나 암석, 행성과 같은 자연체계의 역사를 유추하기 위한 것이다. 과학자들이 과거의 시간과 장소에서 이 체계를 직접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과학은 이 사건들이 남긴 증거를 가지고 그 체계에 간접적으로 접근한다. 역사과학자들은 하나의 체계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그 사건의 역사적 모델을 정립하여 앞으로의 관찰 결과를 예측한다. 중요한 것은 역사과학도 실험과학이나 관찰과학처럼 확인 가능한 예측을 한다는 사실이다. 역사과학은 생태학, 기후학, 천문학, 우주학, 진화생물학, 지질학, 고생물학 연구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이 세가지 방법은 서로 뒤섞이기도 한다. 실험이 복잡해지고 통제가 어려워지면 그것은 관찰과학으로 변모해 가며, 관찰과학도 때로는 실험실에서 실험을 행하기도 한다. 역사과학에서 사용되는 모델은 기존에 알려진 관찰자료에 근거해서 만들어지며, 반대로 현재 체계의 행적을 관찰할 때 해당 체계의 과거 역사에 대한 좋은 모델을 활용하기도 한다.

 

3. 인간타락을 말하는 창세기 3장은 인간의 타락으로 자연세계가 변한 것처럼 말한다. 인간의 타락때문에 근본적인 자연법칙들이 모두 변한 것일까?  인간의 타락이 자연법칙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성경구절은 없다. 자연세계에 대한 연구 결과는 이 질문에 대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천문학, 지질학과 같은 역사과학은 자연세계의 과거 행적에 관한 정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세계의 연구결과는 인간 타락이 자연법칙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인간 타락은 인류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지 자연세계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과학은 자연세계와 그 역사에 대한 질문에 답을 얻으려 할 때 큰 도움을 주는 신뢰할만한 도구다. 하지만 자연세계와 상관없는 질문들에 대해서 과학은 답을 주지 못한다. 과학만이 믿을만한 지식 획득의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든 것을 과학으로 환원하려는 환원주의적 무신론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학은 우리가 역사와 성경, 경험, 문화를 통해 배운 진리를 보충하는 것일 뿐, 그 모든 것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4장 하나님의 세계(자연)와 하나님의 말씀(성경)

 

1. 하나님은 자연세계를 창조하셨고 지금도 다스리시며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연구하는 체계적인 방식이다. 따라서 성경과 과학사이에는 아무런 갈등이 없어야 할 것지만 1633년  갈릴레이 논쟁이 보여주듯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하나님의 세계인 자연이란 두 책을 통해 드러난다는 전제를 가지고 우리는 이 갈등의 원인을 알아보고자 한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이 갈등은 두 계시 사이의 모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성경과 과학에 대한 인간의 해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2. 종교개혁 당시의 신앙고백서인 벨직 신앙고백 3조는 우리는 두 가지 도구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데 첫째는 성경이고 둘째는 자연세계라고 말한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계시라 부르고 자연을 일반계시라고 부른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시편강해에서 성경과 자연은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낸 두 권의 책이라고 말했다. 이 두권의 책 은유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과학과 신학 간의 갈등을 이해하는데 유용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두 종류의 계시를 기록한 저자이시기 때문에 자연과 성경은 서로 충돌할 수 없다고 믿는다. 과학은 자연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며 신학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다. 만일 이 둘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두 권 중 하나 혹은 모두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과학해석이나 성경해석이나 모두 우리 삶의 다른 영역과 분리되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과학해석은 세계관과 정치 등 인간의 경험에 바탕을 둔 여러 상황에 영향을 받고 성경해석은 신학과 교회 전통, 심지어 정치의 영향까지 받는다. 다시 말하면 과학이나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진공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 문화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3. 세계관은 과학에 영향을 미친다. 과학자들은 자연의 규칙성이나 실험을 통한 검증 같은 세계관적 신념을 따라 연구를 진행한다. 세계관은 과학 연구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과학자가 여러가지 과학적 모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실험적 증거들을 통해서는 어떤 것이 최선의 모델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 그 과학자의 신념이나 지식이 그의 모델 선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신의 세계관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특정한 과학적 결론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세계관과 일치한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과학모델을 지지하는 경우도 있다. 특정한 세계관을 비방하기 위해 과학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무신론자들은 과학적 결과들은 무신론의 진실성을 입증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들은 과학이 끝나는 지점과 세계관이 시작되는 지점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과학적 결과와 세계관적 주장을 혼합해 버린다.  무신론자들의 이런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학적 결론이 확실한 증거로 입증된 것인지를 먼저 검토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입증된 결론이라면 그것을 부인하기 보다는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전제된 세계관적 주장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최선의 전략은 과학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 세계관적 주장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적 진술과 세계관적 진술을 따로 평가해야 한다. 과학과 종교에 관한 논의가 정치 영역으로 들어가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이때 사람들은 과학적 증거보다는 당파나 정치 공작을 보고 어떤 관점을 취하게 된다. 불행히도 이런 주장들은 온통 과학적 언어로 포장된 채 남아있으며, 과학적 결과도 정치적인 이유로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4.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권위와 가르침에 공통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 해석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해석하는 일 역시 외부와 단절된 진공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 특히 신학과 교회 전통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과 성경 사이에 갈등이 생길 경우, 과학 해석과 성경 해석을 모두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과학적 지식의 신뢰성을 알아볼 때는 해당 모델을 중심으로 과학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해당 모델이 과학계에서 일반적인 합의를 이룬 것이라면 우리는 그 결론이 옳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경 해석과 관련해서는 첫째로 특정 성경구절을 그 주변 문맥이나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둘째로  성경 말씀이 원 저자와 최초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이 두가지 원리를 따르면 우리는 어떤 구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되는지 또 어떤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

 

5. 과학과 성경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과 이런 갈등은 과학과 성경의 차이가 아닌 인간들의 해석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아직은 이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을지라도 그 해결책이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 모순적인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자연과 성경은 서로 충돌할 수 없다. 따라서 어느 한쪽을 무시하기 보다는 언젠가는 하나님이 드러내신 근본적인 진실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소망을 가지고 우리는 자연과 성경 모두를 탐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comment)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난 누 권의 책이 각각 성경과 자연이라면 성경해석을 신학으로 자연해석을 과학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과 성경은 서로 충돌하지 않지만 그 각각의 해석인 과학과 신학은 서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전제는 자연과 성경이 충돌하지 않는다는 믿음, 그리고 해석의 오류를 바로 잡음으로써 그 갈등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5장 창세기에 대한 일치론적 해석

 

1. 일치론적(concordist) 해석이란 하나님이 자연 세계를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순서대로 만드셨다는 해석이다.  근대 지질학이 발전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창세기를 젊은 지구론으로 해석하면서 지구가 수천년에 하루를 24시간으로 하는 6일만에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근대 지질학이 등장하기 이전의 초기 지질학자들은 세계가 창조된지 오래되지 않았고 대홍수가 있었다는 창세기 해석을 바탕으로 과학적 모델을 세워 자연세계에서 관찰한 바를 설명했다. 그러나 근대 지질학이 발전하면서 초기 지질학자들이 제시한 젊은 지구론과 대홍수 모델은 방대한 과학적 증거와 일치하지 않았다. 이런 증거들로 인해 1840년 경에는 모든 지질학자들은 지구 역사가 최소 수백만년이라고 믿게 되었다. 게다가 대홍수 사건도 전 지구적 차원이 아닌 특정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갈릴레오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구 나이에서도 자연해석(과학)과 성경해석(신학)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다. 기독교 지질학자들은 지질학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였지만 그들은 성경도 자연연구 결과도 버리지 않았고 자연이란 책을 지속적으로 살피는 동시에 창세기 1장을 어떻게 달리 해석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2. 간격이론은 근대지질학이 등장한 1840년 경에 유행한 창세기1장 해석인데 이것은 창세기1장 1절(첫 창조)과 3절부터 서술되는 창조과정(사실은 창조가 아니라 첫 창조가 붕괴한 후의 재창조 혹은 복구과정) 사이에 장구한 시간 간격이 있다는 해석이다. 이 간격 이론도 일치론적 해석으로 창세기 1장에서의 사건들이 점 더 장구한 기간동안 일어났다고 보면서 다만 그 안의 창조순서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 간격 이론은 지질학이 발견한 지구의 오랜 나이와 성경 사이의 모순은 해결할지 몰라도 그 밖의 다른 과학적 증거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간격이론이 주장하는 붕괴와 복구의 과학적 증거도 없고, 현존하는 종들도 1만년 이상 지구상에 존재해왔음을 보여주는 화석증거들도 설명하지 못한다.

 

3. 1700년대 후반에 소개된 또 하나의 일치론적 해석은 날-시대 이론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실제로는 더 장구한 시간을 의미한다고 보는 해석이다. 창세기의 하루를 수백만년이나 수십억년으로 해석해 천문학적, 지질학적, 생물학적 과정이 일어날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 이론도 창조순서의 모순점은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 순서의 문제는 하루의 기간을 아무리 늘려도 자연과학적 연구를 통해 재구성한  창조순서와 도무지 일치하지 않는다.

 

4. 이처럼 간격이론이나 날-시대 이론이 모든 과학적 데이터를 설명해 내지 못했기 때문에 1800년대 초반에 성숙한 모습으로의 창조론이라는 또 하나의 일치론적 해석이 등장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1만년 전에 하루를 24시간으로 하는 6일동안 지구를 창조하신 것은 사실이나 창조된 당시의 모습이 처음부터 아주 오래된 모습으로 보이게 창조되었다고 해석한다. 이 해석은 자연사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성경적 지식 사이의 모순을 해결해주는 것 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이론은 다른 일치론적 이론과 달리 이 해석의 오류를 증명할 과학적 반론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심각한 신학적 문제가 제기되는데 그것은 왜 하나님이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장구한 역사의 모습들로 보이게 창조하셨느냐는 또 다른 의문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5.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젊은지구론이 기독교의 주된 관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사살 이 관점은 1800년대 초부터 190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근본주의 운동가들을 포함한 북미의 대표적인 보수 그리스도인들도 크게 지지하지 않았던 주장이다. 오히려 그들은 오랜 지구론을 뒷받침하는 지질학적 증거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여전히 젊은 지구론을 옹호하면서 이것을 지질학 데이터와 조화시키려고 시도한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다. 1961년에 신학자 존 휘트콤과 공학자 헨리 모리스는 [창세기 홍수:성경기록과 그 과학적 함의]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현대의 젊은지구 창조론 운동인 창조과학 운동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은 창세기 1장에 대한 젊은지구론 해석에 초점을 맞추면서 현대과학으로 볼 때도 창세기1장의 내용이 역사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생명은 하나님이 하나 하나 기적적으로 창조했기 때문에 무생물에세 진화할 수 없고 한 생물에서 다른 생물 형태로 변하는 중간 단계의 동식물 화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생명이 최근에 형성되었고 전지구적인 대홍수가 있었다는 지질학적 증거가 앞으로 나올 것이라고 말한다. 창조과학자들은 종교적 변수와 상관없이 과학적 증거만으로 자신들의 주장이 입증된다고 주장하면서 오직 과학적 잣대로 자신들의 주장을 판단할 것을 요구한다. 주목할 점은 젊은 지구론을 수용했던 1900년대 초반의 근본주의자들이 지구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기독교 신앙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반면에 창조론자들은 그것을 기독교 신앙에 핵심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현대 주류과학에 대한 대체과학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무신론적 세계관에 대항하기 위한 필수 요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창조론자들에게는 과학적 성실성이 부족하여 창조과학 운동 전체의 명성에 흠집이 나고 말았으며 과학자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인 전체의 명성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창세기에 대한 젊은지구론적 해석은 성경의 권위에 큰 의미를 둔다. 이들이 이 해석을 주장하는 이유는 역사적 이야기로 들리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문자-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다.

 

(comment)

결국 일치론적 해석들의 공통된 전제는 창세기 1장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다. 간격이론이나 날-시대 이론은 과학적 발견들을 수용하려고 문자적 해석에 대한 부분적인 수정을 했다면, 창조과학은 전면적으로 과학적 발견들을 거부하고 주류과학에 대항하는 대체 과학을 만들어가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무모한 시도는 결국 기독교의 반지성적 태도를 형성하게 되고 자연세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6장 창세기에 대한 비일치론적 해석

 

1. 창세기를 비일치론적으로 해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은 물론 1800년대에도 있었다. 이들은 물론 창세기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으며 의도된 메시지를 권위있게 전달해 준다고 생각하지만 그 성경 본문 자체가 과학적 사실이나 역사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비일치론적 해석에 의하면 창세기 1장은 역사적,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적, 영적 의미를 가진 신학적 진실을 전하는 것이므로 본문에 나오는 사건의 구체적 순서를 문자 그대로 과학적 진술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러한 비일치론적 해석에는 선언일, 창조시, 왕국-언약, 성전, 고대근동 우주론과 같은 해석들이 있다.

 

2. 창세기 1장에 대한 이런 비일치론적 해석들은 우리에게 성경 해석의 기본원리를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그것은 첫째로 성경의 특정 구절을 전체적인 문맥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 둘째로 먼저 그 말씀이 기록된 당시의 문자적,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파악한 후에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일치론적 해석은 성경 해석의 이런 근본 원리들을 고려한 해석들이다. 만약 창세기 1장의 목적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학적 사실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말씀에서 지구 나이나 발생 과정에 대한 과학적 정보를 찾으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3. 창세기 1장에 대한 일치론적, 비일치론적 해석은 모두 성경과 자연 증거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일치론적 해석의 위험은 특정 성경 구절의 의미를 과학적 발견의 내용과 일치시키기 위해 성경 원저자가 의도한 의미를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비일치론의 위험은 과학적 설명과 상충하는 듯이 보이는 성경 구절을 본문에 대한 충분한 연구없이 무조건 비유적으로 해석하려드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할 구절을 비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역시 성경 원저자의 의도를 왜곡할 수 있는 것이다. 일치론이든 비일치론이든 조심할 점은 지나치게 필요 이상으로 과학을 기준삼아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과학적 발견이 성경 해석에 유용한 도구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만을 기준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태도는 문제가 있다. 과학과 신학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려는 욕심때문에 성경의 진정한 메시지를 왜곡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comment)

일치론적 해석이든 비일치론적 해석이든 주된 의도는 과학과 성경의 모순을 해결하고 조화시키려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성경의 권위를 보호하려는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성경 해석을 지나치게 과학적 증거에 따라 왜곡할 위험이 있다. 과학과 성경이 항상 조화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조화되어야 할 부분과 조화되지 않아도 될 부분을 잘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7장 아주 오래되고 역동적인 우주

 

1. 칼 세이건 같은 무신론자들은 신이란 인류가 만들어 낸 개념일 뿐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우주는 무한히 크고 인간은 작으니 인간이 발명한 신도 아주 작은 존재이며 우주와는 완전히 무관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가 광대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지구의 일에만 관여하는 작은 존재로 여겨온 우리의 생각에 도전한다. 저 멀리 은하계가 존재하듯이 우리를 훨씬 뛰어넘어 존재하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광대한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왜 우리같이 작은 존재를 돌보시는 것인가?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류에게 우주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기셨는데 그것은 지구라는 행성을 돌보는 일이었다. 시편도 우주의 광대함을 묘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가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우리 인간 존재의 의미는 우주에서의 상대적인 크기가 아니라 우리 각 사람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다.

 

2. 우주와 그 우주 안의 개체들은 우주가 시작된 그 순간부터 계속해서 역동적으로 변하고 발전하고 있다. 별은 우주가 이렇게 지속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다. 별은 영원히 같은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의 생명주기를 가지고 있다. 별의 생명주기에 대한 과학적 모델은 매우 잘 정립되어 있어서 이 모델을 통해 많은 관찰 결과를 설명할 수 있으며 새롭게 발견된 별과 성단들의 특성도 꽤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역동적인 별의 생명주기는 은하와 우주에서 끊임없이 변화와 발전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별의 생명주기는 하나님이 계속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 예다. 이렇게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섭리사역을 구분하며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완료되었고 하나님이 계속 우주를 다스리시는 것은 섭리사역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새로운 별들을 계속 창조하신다고 말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섭리에 따라 자연법칙을 주관해 새로운 별들을 형성하신다고 말할 수도 있다. 

 

3. 우주는 아주 오랜 기간동안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해 왔다. 지질학자들이 암석 연구를 통해 지구 나이가 수십억년이란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축적했듯이 천문학자들도 행성과 별, 은하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주 나이가 수십억년임을 지지하는 증거를 발견해 냈다. 오래된 우주 나이에 대한 천문학의 다층적 증거들은 젊은 지구론이나 젊은우주론과 반대된다. 이것은 과학과 신학이 대립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은 젊은지구론자들이 해석하듯이 최초의 독자들에게 과학적 정보를 주려고 기록된 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의 의도는 최초의 독자들에게 창조의 주체가 누구이며 왜 그것을 창조했는지 알리기 위함이었지 언제, 어떻게 창조했는지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내용이 천문학적 증거들과 대립된다고 볼 이유가 없다.

 

4. 우주는 오래된 것은 사실이지만 무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빅뱅이라는 시작점이 있었다. 과학적으로 바르게 해석하기만 한다면 빅뱅 모델은 하나님이 초기의 우주를 다스리시는 방식을 보여주는 좋은 설명이 될 수 있다. 빅뱅 모델을 비롯한 천문학적 연구 결과들을 무신론적 관점에서 다루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는 정당한 과학적 증거와 무신론적 세계관을 분리해 내어야 할 필요가 있다.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특성이 별과 다양한 원자가 발달하기에 적합하도록 미세조정(fine-tuned)된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립자들과 그것들을 붙들고 있는 물리력을 비롯한 우주의 전반적인 변수들은 생명체가 존재하기에 딱 적합한 방식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주가 이렇게 세심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과 관계을 맺을 수 있을 정도로 지적인 인류가 포함된 우주를 계획해 만드셨다는 성경적 신념과 통한다. 하나님은 처움부터 이 모든 것을 지금  보이는 모습 그대로 만드신 것이 아니다. 우주가 증거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각 원자와 분자, 별과 행성을 매번 다른 초자연적 기적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규칙적인 자연적 과정이라는 아름다운 체계를 통해 일하셨음을 알 수 있다. 

 

 

8장, 9장 진화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들

 

1. 찰스 다윈이 1859년 종의 기원울 출간한 이후 종교적 주장과 철학적 주장이 대립하는 전장에는 늘 진화론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싸움은 종종 정치나 법적 영역으로 번져 나갔다. 진화와 관련된 종교적, 정치적 논쟁이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진화와 종교가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고 이들은 진화론은 특정 기독교 교리와 직접적으로 상충하기 때문에 다른 과학이론들과는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부 무신론자들은 진화가 사실이라면 기독교 신앙은 거짓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무신론자들의 전제를 수용하면서 진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화를 수용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은 유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2. 진화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소진화란 차별적 번식성공도(자연선택)과 무작위적 돌연변이라는 메카니즘에 의해  종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의미한다. 화석 기록을 보면 종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변화하면서 일부는 멸종하기도 하고  새로운 종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이것은 살아있는종과 멸종한 종을 불문하고 모든 종들이 가계도를 통해 연결된 공통조상의 후손임을 보여준다. 진화론은 지구상에 생명체가 존재한 장구한 역사 동안 지속적으로 작동해 온 진화 메커니즘으로 공통조상의 존재와 시간에 따른 종의 변화와 패턴을 설명하는 과학적 모델이다. 그러나 진화주의는 진화론을 이용하여 창조자는 없으며 인간 존재는 목적도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적 세계관이다. 

 

3. 진화주의는 과학이 아니라 일련의 세계관적 신념이다. 진화주의는 진화가 사실이라면 세계를 돌보는 창조자는 없으며 인간은 순수하게 자연적 과정만을 통해 발생한 것이며 그러므로 인간 존재에 고상한 목적같은 것은 없으며 절대적인 도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생물학자 제이 굴드는 다윈 예찬이란 글에서 진화론에 의하면 자연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신이 관여하는 바는 없다고 주장한다. 생화학자 자크 모노는 우연과 필연이란 글에서 우연만이 생물권 안에 존재하는 모든 혁신과 창조물의 근원이며 이런 생물학적 발견들로 인해 종합적인 계확아래 창조가 이루어졌다고 가정하는 어떤 체계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크가 말한대로 생물학적 돌연변이의 우연성이나 무작위성은 진화의 필수요소이다. 그러나 모노의 주장은 돌연변이의 우연성(예측불가능성)이란 과학적 사실을 돌연변이가 맹목적이라는 세계관적 신념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많은 불가지론자들과 무신론자들도 진화론이 진화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진화론이라는 과헉적 모델을 진화주의라는 철학적, 종교적 주장과 혼동하고 있고 이로 인해 진화를 둘러싼 종교적 논쟁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다.

 

4. 진화라는 주제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대응하는 방법은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젊은지구창조론자, 점진적창조론자, 그리고 진화론적 창조론자이다. 젊은지구창조론자들은 소진화는 인정하지만 공통조상론, 진화론에 반대한다. 점진적창조론자들은 소진화는 인정하나 공통조상론에는 의견이 분분하고 진화론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진화론적 창조론자들은 소진화,대진화, 공통조상, 진화론을 모두 인정한다. 물론 이 세 그룹들은 모두 진화주의는 반대하지만  반대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젊은자구창조론과 점진적창조론은 진화론을 부정함으로써 진화주의에 맞선다. 이들은 과학적 증거가 진화론을 뒷받침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진화론적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은 수용하지만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거짓이라는 전제(진화주의)에 반대한다.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이 진화론과 배치되지 않으며 하나님이 과학적으로 설명되는 자연적 과정들을 통해 일하시는 것처럼 생물학적 진화과정을 통해서도 일하신다고 주장한다.

 

5. 점진적 창조론자들은 창세기1장에 대한 일치론적 해석을 주장하는 반면 진화론적 창조론자들은 창세기1장에 대한 비일치론적 해석을 지지한다. 그래서 점진적 창조론자들은 하나님이 자연적과정과 기적의 조합을 통해 생명체들을 창조하셨으며 기독교 신앙이 유효하려면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드러내는 증거가 자연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진화론적창조론자들은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에서는 기적을 사용하시지만 자연의 역사에서는 기적이 아니라 자연적 방법을 사용하신다고 주장한다. 기적을 주장하는 점진적창조론이 지닌 신학적 위험은 하나님을 틈새의 신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진화적창조론자들은 이신론의 위험에 빠질 위험이 있다.

 

(comment)

1. 우주의 광대무변함은 인간 존재를 왜소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진화론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근본적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생물진화론은 인간과 다른 동물이 근본적으로 다른 생명체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간 존재가 어떤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광대무변한 우주가 생명체를 위해 미세조정된 것이란 사실은 생명체의 가치와 의미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것이 인간 생명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는 이런 질문에 대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다른 생명체와 달리 특별하고 존귀하다고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과 가진 특별한 관계 그리고 그 관계로 인해 주어진 특별한 사명 이것이 바로 인간 존재를 유의미하고 가치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2. 생물학적 진화론에 의하면 동물의 죽음이든 인간의 죽음이든 그것은 생태계를 유지하는 자연법칙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의 문제를 죄의 결과로 본다. 물론 죽음을 단지 영적인 차원으로 해석하면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만 바울이 죄의 결과로 말하는 죽음을 몸의 부활의 맥락에서 말하는 것으로 보아 바울이 죽음을 단지 영적 죽음에 국한시키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죽음의 문제에 관한 과학적 견해는 신학적 이슈가 될 여지가 많다. 

 

10장 지적설계

 

1. 지난 몇 년 사이에 지적설계는 창조와 진화 논쟁의 핵심적인 사안으로 자리잡았다. 사실 지적설계론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실험해 볼 수 있는 과학적 주장인 동시에 과학적으로 실험할 수 없는 종교적 주장이기도 하다. 지적설계론은 자연에 설계에 대한 증거가 있으며 자연 세계에 분명히 드러나 있는 이 증거들을 설명하기에 진화론은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대다수의 지적설계 이론가들은 종교적인 의도에서 연구를 시작했으면서도 되도록이면 구체적인 종교적 주장은 펴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나 지적설계 운동은 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자연주의와 진화주의라는 무신론적 세계관과 싸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적설계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이론이 과학적이지 않으며 그들이 말하는 이론도 종교적이기 때문에 공립학교의 과학시간에 가르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지적설계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과학적 데이터에 근거한 과학적 이론이며 종교적 의도와 무관하므로 진화에 대한 과학적 대안으로서 지적설계를 연구하고 실험할 수 있으며, 따라서 공립학교에서 이것을 가르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2. 지난 10여년 동안에 지적설계론은 한층 더 구체적인 이론으로 발전했는데, 이것은 두 가지 주장에 중점을두고 있다. 첫째는 우주의 기본 변수들과 물리학의 기본 법칙들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미세조정된 것처럼 보인다는 주장이다. 즉 창조자가 생명체를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우주를 설계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생물학적 생명들이 진화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큰 환원불가능성(irreducible complexity)을 지녔기 때문에 이것은 한 지적인 존재가 어떤 방법으로든 생명체의 역사 가운데 개입하여 지구 위에 생명체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3. 미세조정론은 지적설계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에는 3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는 과학적 주장으로서 물리학의 기본법칙들과 우주의 기본변수들이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 되는 아주 좁은 범위안에 맞추어져 있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철학적 주장인데, 자연적 설명으로는 미세조정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미세조정이 생명체를 형성시킬 목적으로 설계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셋째는 종교적 주장으로서 그러한 설계는 성경에 계시된 창조주 하나님이 생명체를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중에서 과학적 주장은 무신론을 비롯한 거의 모든 세계관을 지닌 과학자즐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내용이지만 철찰학적 주장과 종교적 주장에는 많은 이견이 존재해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미세조정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주를 설계하셨다고 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무신론자들이나 불가지론자들은 미세조정은 신과 무관한 비인격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4. 미세조정보다 더 큰 논란은 생물학적 생명체가 진화론으로 설명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는 주장이다. 과학자들은 지구 최초의 생명체는 현대의 생명체보다 훨씬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은 이 단순한 생명체가 진화 메커니즘에 의해 소진화와 대진화를 이루어 복잡한 생명체로 진화했음을 증명해 냈다. 그러나 지적설계론자들은 진화의 메커니즘만으로 우리가 보고 있는 그 모든 복잡성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지적설계론자들은 진화론과 논쟁할 때 확률과 패턴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들은 복잡한 생물학적 기관이 진화 메커니즘에 따라 진화해 왔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며 따라서 지적존재가 생명체의 역사에 개입해 복잡한 생물학적 패턴들을 창조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첫번째 주장을 과학적으로 따져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두번째 주장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첫번째 주장도 논란이 된다.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전반적인 증거에 비추어 이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일반 진화를 증명하는 유전적 증거와 화석증거가 많다는 것, 그리고 복잡한 구조가 진회되는 몇가지 예를 과학자들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주장을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이유다.

 

5. 지적설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이론이 과학적인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틈새의 신" 이론의 또 다른 변형이라고 지적한다. 최초의 생명체가 어떯게 자가 조직화했는지, 혹은 생물학적 복잡성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과학은 설명할 수 없고 앞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들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틈새가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보는 것이다. 만일 지적설계론자들이 생물학적 복잡성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 틈새의 신" 이론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사실 진화와 지적설계를 양자 택일의 문제로 볼 필요는 없다. 만일 생물학적 복잡성이 진화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것은 지적설론을 지지하는 증거가 될 것이지만 반대로 밝혀진다고 해도 그 자체로 하나님이 생물체를 설계햇다는 것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적설계론과 진화론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11장 인간 기원에 관한 쟁점들

 

1. 인간 기원의 문제는 지구 나이나 진화의 문제보다 더 기독교 신학의 핵심에 가깝다. 수세기 동안 대부분의 신학자는 인간이 동물과 달리 특별하게 창조되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과학 지식의 엄처난 성장이 일어나면서 이 전제에 의문을 던지게 되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해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창조 방법에 대해서는 3가지 주장이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은 다른 생물과는 완전히 구분되게 기적적인 방식으로 동물들과 공통조상을 가지지 않는 최초의 인류를 창조하셨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하나님은 점진적인 진화의 방법을 통해 창조하셨는데, 그 과정중에 동물과의 공통조상으로부터 인간 전 단계의 생명체가 발생했고 이후 기적을 통해 그 생명체들 일부를 변화시켜 최초 인류로 창조하셨다는 주장이다. 셋째는 하나님은 자신의 섭리를 통해 통제 가운데 공통조상과 진화의 메커니즘을 이용해 인간을 창조해셨으며 그 과정 중에 기적은 없다는 주장이다. 

 

2. 과학자들은 인간 유전자가 침팬지의 유전자와 매우 비슷하지만 다른 유인원들과는 그 유사성의 정도가 덜하고 다른 포유류와는 그 보다 덜 유사하며 파충류나 조류와는 그 유사성의 정도가 크게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인간 유전자로부터 밝혀낸 이 증거는 공통조상론의 주장과 맞아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적 유사성을 공통조상론이 아닌 공통기능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공통기능론으로 유전자 서열의 유사성은 설명할 수 있는지 몰라도 유사유전자의 유사성과 같은 다른 증거들을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과학자들은 한 집단 내 동일 유전자의 작은 서열 수치를 분석함으로써 동일종 내의 유전적 다양성을 연구했다. 집단 내 유전자들 중 어떤 것은 150개가 넘는 대립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 같은 대립유전자의 수는 모든 인간이 한 부부의 후손으로 예상할 수 있는 수보다 훨씬 많다. 하나님이 기적이 아닌 진화적 방법으로 인류를 만드셨다면 이 모델들은 현생 인류가 한 쌍의 부부가 아닌 대규모의 인류집단에서 유래되었음응 시사한다. 

 

3.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크게 3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어떤 신학자들은 인간의 정신적 능력과 사회적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증거라고 말한다. 둘째, 또 다른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기로 하셨다는 점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의미를 찾는다. 셋째로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이자 청지기 역할을 하도록 임명받은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말의 진의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런 견해들이 공통조상론이나 진화와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단순한 생명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생명체로 진화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런 세 가지 해석들은 인간이 동물과 공통조상을 공유라는 문제와 무관하게 수용이 가능하다.

 

4. 인간 진화를 증명하는 증거들이 나타나면서 인간 영혼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모든 신학자가 수긍할 만한 단일한 영혼의 정의는 나와있지 않지만 이것이 인간 안에 있는 비물질적 요소라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무신론적 물질주의는 인간은 정신적 능력을 가진 육체일 뿐이며 육체가 죽어도 살아남는 영혼 따위는 없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세계관에서는 인간의 물질적 육체는 중요하지 않으며 비물질적인 영혼만이 영원하다고주장한다. 기독교 전통은 이 두 가지 주장을 모두 반대하지만 기독교 전통 안에도 영혼과 육체에 관한 다양한 이론이 있다. 첫째는 육체와 영혼을 각기 다른 두 개체로 보고 하나님이 물질적인 육체와 비물질적인 영혼을 결합해 한 명의 인간을 만드신다는 입장이다.  둘째는 육체와 영혼을 서로 다른 두 개체로 보지 않고 이 둘을 인간을 이루는 구성요소로 본다. 영혼은 육체를 구성하고 기능할 수 있게 하고 영혼은 육체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상태는 불완전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셋째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인간 뇌의 기능으로 보지만 인간의 영적 삶은 뇌의 기능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달려 있다고 본다. 인간의 정신적,영적 능력이 육체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은 하나님의 기적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 세 이론은 모두 현재의 삶은 물론 궁극적으로 부활한 몸으로 살게 될 영생의 삶에서도 육체가 중요하다는 성경적 관점을 긍정하며 현재의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영혼에 관한 이 세가지 입장은 인간의 기원이 기적적 창조든 진화적 창조든 관계없이 수용이 가능하다.

 

5. 타락 이전에도 죽음이 있었을까? 모든 오랜지구론적 관점은 인류가 나타나기 전 수백만년 동안 동물들이 살고 죽는 일을 반복했다고 본다. 이는 육체적 죽음이 인류 타락의 결과라고 설명하는 일반적 성경 해석과 모순된다. 죽음을 죄의 결과로 설명한 성경구절들에서 언급된 죽음이 인간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에 동물의 죽음이 포함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떤 신학자들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동물들도 영생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신학자들은 동물은 제한된 수명을 살도록 태어나 결국 물리적 죽음을 맞는 것이 동물 존재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학은 동물의 죽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오랜지구와 생명체의 장구한 역사를 증명하는 수많은 과학적 증거를 통해 볼 때, 동물의 죽음은 태초부터 그 존재의 본질이었다고 봐야 한다.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성경이 비교적 분명하게 말하지만 여전히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어떤 신학자들은 죄의 결과로 온 죽음을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으로 해석한다. 반면 교회 전통에서 더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온 견해는 죄의 결과로 육체와 영이 모두 죽게되었다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과학은 이 점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인간의 DNA에는 이미 노화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인간의 세포 역시 닳아서 소멸하게 되어있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가 속한 자연세계에서 자연적 과정으로 불멸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 진정한 불멸은 다음 창조세계에서만 즉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롭고 기적적인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 같다.

 

12장 아담과 하와

 

1.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있는데 각 시나리오는 하나님의 자연계시나 말씀 계시와 관련해 각기 다른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2. 첫번째 시나리오는 최근 조상설인데,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하나님은 약 1만년 전에 아담과 하와라는 인간 부부를 창조하셨고( 그들 이전이나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은 없다) 현대 인류는 모두 이 두 사람의 후손이고 죄인으로서 신분도 이들로 부터 물려받았다. 교회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관점을 견지해 왔다. 이것은 창세기 2장을 지극히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이 시나리오를 전제로 원죄교리도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주신 증거들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시나리오다.

 

3. 두번째 시나리오는 최근 대표설인데, 이 시나리오에 의하면 하나님은 약 15만년 전에 진화적 방법이나 기적을 통해 인간을 창조하셨고(창세기1장의 인간창조) 이후 1만년 전에 현생 인류를 대표하는 부부로 아담과 하와를 선택하셨다.(창세기 2장의 아담과 하와 창조)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 시대에 다른 많은 사람들도 살고 있었고, 다만 아담과 하와가 인류의 대표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의 죄는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었다. 이 시나리오는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 외의 다른 인간의 존재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현대 과학이 시작되기 전부터 등장했지만 오늘날 과학적 증거와도 잘 어울린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었고 아담과 하와도 자연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은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인 죽음만을 낳았다는 관점을 갖게된다. 또한 이 시나리오에서는 원죄가 전승되는 방법이 생물학적, 사회적, 영적 전승이 아닌 대표 전승으로만 국한된다. 이 시나리오와 관련되어 발생하는 신학적 쟁점은 아담과 하와 이전의 오랜 세월 동안 살고 죽었던 사람들의 도덕적 책임에 관한 부분이다.

 

(comment)  이 시나리오는 창세기1장의 인간 창조를 15만년전의 인간종족 창조로 보고 창세기2장의 아담과 하와 창조를 1만년전에 그들을 인간 대표로 선택한 것으로 보면 성경의 인간 창조기사와 잘 어울리는 듯하다.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그들 이전 오랜 세월 동안 살고 죽었던 사람들을 어떻게 대표할 수 있을까?라는 신학적 질문은 남는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이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시작되었다는 전통적인 해석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4. 세 번째 시나리오는 고대 조상설인데,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하나님은 진화의 방법으로 원시 인류를 창조하셨고 , 이후 약15만년전에 원시인류중 한 쌍을 선택해 그들을 기적적으로 변화시켜 최초의 인간이며 현생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만들었다. (이 시나리오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 이전의 원시 인류는 현생 인류와 아무 관련이 없게 된다) 이 시나리오도 하나님의 형상, 인류의 타락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고대조상설은 최근조상설 보다는 과학적 증거와 잘 어울리지만 현대 인간에게 드러나는 유전적 다양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현생 인류가 아담과 하와라는 한 쌍의 조상으로부터 유래되었다면 현생 인류에가 나타나는 수많은 종류의 대립유전자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5. 네번째 시나리오는 고대 집단 조상설인데, 이 시나리오에 의하면 하나님이 한 큰 집단의 사람들을 선택하셨는데 이 인간 집단이 죄를 범했다고 본다.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이 인간 집단에서 발생한 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현생 인류는 이 인간 집단의 후손들이다.

 

6. 다섯번째 시나리오는 고대 대표 집단설인데, 이 시나리오에 의하면 하나님은 약15만년 전에 진화적 방법을을 통해 인류를 창조하셨고, 그 중에 한 집단의 사람들을 선택하여 이 집단이 동시대 인류의 대표가 되게 하셨다. 그런데 이 대표집단이 범죄하였고 그 결과 죄인의 신분이 당대 인류 칭 후대 인류에게 적용되었다. 고대 대표 집단설은 과학적 증거들과 잘 어울린다. 이 시나리오는 최근대표설과 유사한 신학적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 시나리오 역시 당시에 이 대표 집단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영적 신분에 관한 신학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 시나리오는 성경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문자적이 아니라 비유적으로 해석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 이야기의 역사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아담과 하와를 선택된 인간 집단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보는  이 시나리오는 성경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7. 여섯번째 시나리오는 상징설인데,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하나님은 약15만년 전에 진화적 방법으로 인류를 창조하셨고 이후 인류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현재의 영적, 도덕적 신분을 갖게 되었고 아울러 죄성도 갖게 되었다. 이 시나리오는 인루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각 개인과 집단이 많은 사건들을 통해 범죄하게 되었다고 가정한다. 이 시나리오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인류의 지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발달해온 것으로 본다. 물론 이 시나리오에 의하면 인간은 타락 이전에도 자연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다. 이는 인간의 타락이 오직 영적인 죽음만을 초래했다는 주장과 통한다. 이 시나리오는 아담과 하와 이야기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류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알려준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그 이야기의 역사성을 부인한다. 또한 상징설은 원죄가 사회적이나 생물학적으로 전승되었다는 입장과는 양립할 수 있지만 영적 신분을 통해 계승되었다는 입장과는 배치된다. 왜냐하면 이 시나리오는 인간의 타락이 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점차 이루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나리오에서는 죄가 인류 전체에 퍼지기 전까지 인류의 영적 신분이 어떠했는지가 모호하다. 상징설의 또 다른 신학적 문제는 신학적으로 완전히 구분된 창조와 타락이란 개념이 혼합된다는데 있다.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창조가 완료된 후에 인류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인간 종이 여전히 발달 과정 중에 있는데 타락이 일어났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인간이 타락 이전에 실제로 의로운 상태에 있었다는 원죄 교리와 어울리기 어렵다. 

 

8. 이상의 시나리오들은 서로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몇가지 중요한 점은 합의를 이루고 있다.  시나리오들은 모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며 타락인 영적 혹은 육적인 사망을 초래했다고 본다. 그러나나 각 시나리오들은 인간이 언제 타락했는지, 최초의 범죄가 개인인지 집단인지, 범죄 이전에 생존한 인류의 영적 신분은 어떠한지 등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모든 시나리오들이 각기 나름의 신학적 과학적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어느 특정 시나리오도 완벽하지 않다. 이 지점에서 교회가 일정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성경과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조화시키기 위해 교회는 과학 해석과 성경 해석의 내용을 더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이 일은 두려워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받은 소명의 일부다.